봉암사 가는 길
5월은 차꾼들에겐 일 년의 차(茶)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달이다. 차나무의 잎을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초파일과 겹쳐지는 그 시기에는 어디 갈 수가 없었다. 이번 석가탄신일도 둘째 주 화요일, 차 하기에 최적의 시기였지만 올해는 차나무 생육에 이변이 일어서 많이 늦다는 소식이었다. 사진작가인 지인이 보내 준 겨울 봉암사 사진을 본 뒤부터 이번 초파일엔 차(茶)만드는 일을 제쳐두고 거기부터 먼저 다녀오려고 했다.
서울에서 하루 종일 걸려서야 갈 수 있었던 봉암사. 20여 년 전만해도 문경에서 봉암사가 있는 원북마을까지 비포장길이었으니 그럴만 했겠다. 아마도 내가 전주에서 혼자 봉암사를 찾아가려면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그렇게 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는 원북마을까지 두 시간 만에 당도할 수 있었다.
1983년 가을, 유홍준은 그 유명한 지증(智證)대사의 탑비와 부도를 보기 위하여 문경 봉암사(鳳巖寺)에 갔다가 처참하게 출입을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바로 1982년부터 80여 명의 납자(衲子)들이 결제와 산철 없이 정진하는 청정도량이기 때문이었다. 전문 미술사학자로서의 답사였지만 절집은 부처님 모신 곳이지 미술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어느 스님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돌아온 후 늘 꿈의 절집이었단다. 그런 후 10년 만에 봉암사 선방의 상량식 때 기회가 생겨서 갈 수 있었다. 십년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증대사의 비문 속의 아름답던 봉암사의 전경은 환상속의 절집 봉암사였어야 옳았다고 했다. 글 속에서만 볼 수 있는………. 1년에 단 하루,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만 축제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한다는 것을 알고 1991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 7차 답사로 다시 다녀왔다는 것이다.
천하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사산(四山)비명(碑銘) 중의 하나인 지증대사비 속의 절집의 풍경은 전연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들로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천하의 문장이란 한문자의 비문을 읽을 수도 없거니와 비문 속의 봉암사를 본 적이 없으니 낙심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답사객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경관이 맑고 빼어나면서도 마음의 평온을 안겨다주는 가장 넉넉한 기품의 절집이라고 했으니까. 다음 부처님 오신 날 다시 갈 거라고 했으니까. 봉암 결사대회로 유명한 이 절집을 나도 귀동냥으로 듣고는 갈 수 없는 절로만 생각했다. 스님이 봉암사의 기도 모임에 간다고 해도 감히 따라 나설 수가 없는 절이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었지만 1년 중 하루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흰구름이 산허리를 감아 도는 청록산을 바라보고 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5월이 펼쳐졌다. 원북마을에 들어서니 자동차들이 한 쪽에 줄을 서고 있었고 교통 안내원의 인도를 받아 셔틀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산문 밖 초소에서 내려서 걸었다. 거기서부터 계곡을 끼고 비포장길을 걸어간다. 너럭바위들이 많은 계곡을 따라 푸르른 숲속을 걷는 것만으로 세속의 모든 잡다한 일상을 끊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이때 쯤 초록빛 속에 빛나는 때죽나무 꽃무리가 환영하듯 종소리를 울려주기도 한다. 한참 가다보니 개울 건너편에 일주문이 보였는데 일주문 형식부터가 고색창연한 모습이었다. 계곡을 가운데 두고 양 갈래 길이 있었던 것이다. 초파일 외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으니 절집 앞에 있기 마련인 잡상가가 없으니 청량하기 그지없다. 희양산 봉암사는 결코 관광의 대상이 아니다.
경내로 들어서니 많은 봉사자들이 공양간에서 점심식사 준비하느라 바빴다. 특이하게도 대웅전 앞마당은 오색 연등이 아니라 하얀 등이다. 밤에 등불을 키면 어떨까. 백련이 가득 핀 연밭 풍경이 그대로다.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설선당 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훔쳤다. 봉암사에서 진짜로 멋있는 유물은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한 쌍의 노주석이라고 했으니 백등에 싸여서 미리 알고 가지 않았으면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노주석이란 정료석(庭燎石) 또는 순 한글로 불우리라고 하는 이 돌받침은 야간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그 위에 얹어 마당을 밝히던 곳이다. 이런 불우리를 봉암사처럼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평범한 구상으로 그 형태도 단순하지만 둥근 받침돌이 위로 오므라드는 긴장된 맛과 그 위에 얹힌 판석의 듬직스러움이 한 시대의 멋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하는 말이 그대로다. 전야제 때 불우리에 관솔불을 피우고 연등을 밝히고 탑돌이를 하는 행자들의 행렬이 떠오른다. 희양산의 장엄한 바위산을 이은 봉우리들 속에 들앉은 이 가람형태가 연꽃 속의 연실인듯, 연꽃 속의 연등이라! 햇빛 희, 볕 양. 희양산(曦陽山)은 글자 그대로 수행자들의 정진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곳을 거쳐 간 고승들 사이에서 “우리도 옛날에 봉암사에서 힘 얻었지”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풍수에 대한 의미를 몰라도 희양산의 정기를 입은 봉암사란 것을 알만 하다.
계단 위의 2층 지붕이 극락전이다.
한 쌍의 노주석
절집 마루에 앉아 노주석의 관솔불 타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올라오던 노고가 풀린다. 우선 점심공양부터 하기로 하고 공양간에 가서 순서대로 공양을 받는다. 정성이 깃든 오색 나물들을 곁들인 비빔밥과 미역국 한 그릇, 후식으로 떡도 한 조각씩 나누어 준다. 식사는 큰 선방이나 주위에서 자유롭게 한다. 방바닥은 적당히 따듯해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식사하는 풍경이 다른 곳 같으면 피난민을 연상했겠지만 이곳, 이 날 만은 모든 사람이 즐거운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즐거운 자리로 여겨졌다. 아니 그랬다. 열린 방문 하나하나는 신록의 푸른 물이 주르르 흐를 듯한 풍경사진이어서 또 하나의 맛을 곁들인다. 돈으로 거래되지 않은 순수한 부처님이 내린 공양이다. 음식의 대부분이 선수행하는 스님의 울력에서 나온 것이려니 스님들의 기도를 먹은 셈,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 수 없다. 수행정진의 정신을 희양산 기운과 더불어 음식으로도 받는다.
봉암사는 전국 각지에서 禪 수행을 위한 최고의 선승들이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수행 정진하기 위해 찾는 정신적, 상징적 절로 유명하다. 그리고 하루 세 번의 공양, 세 번의 예불, 14시간 이상의 좌선, 그리고 결사의 뜻을 이은 울력(공동노동)은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한다. 개인적인 공간도 없고 높고 낮은 구분도 없이 한 방에서 같이 공부하고 같이 자고 같이 수행하는, 전적으로 자급자치 공동체의 삶이다. 배가 부르니 따뜻한 방에 등을 대고 눕고 싶었다. 고향집에 와서 마음 놓고 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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