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소설을 쓰는 경우는 많지만 소설가가 시를 쓰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간혹 소설가가 시를 발표하면 소설을 쓰다 지쳐 여기로 몇 편 써본 것이라 치부하게 마련이다. 그간 몇 명 소설가가 시집을 내기도 했었지만 그들의 시집이 평단의 주목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소설가 한승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제껏 {열애 일기}(1991),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1995),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1999) 등 3권의 시집을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냈지만 별다른 비평적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시들이 소설을 쓰다 잘 안 풀릴 때, 재충전을 위한 워밍업으로 쓴 짧은 운문이라면 그런 평가가 뭐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한승원의 시를 유심히 읽어온 나로서는 평단의 무관심이 아주 못마땅하다. 청탁 받은 지면이 워낙 적어 그의 시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의 각 시집을 대표할 수 있는 시를 몇 편씩 골라 읽으며 나의 소감을 피력해보는 이 행위가 뭇 독자로 하여금 한승원의 시에 다가가게끔 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고,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다. 첫 시집에는 '열애 일기'를 부제로 한 시 29편, '戀歌'를 부제로 한 시 21편, 나머지37편이 모여 있다. 부제로 알 수 있듯 열렬한 사랑의 시를 연작으로 써 한 권의 시집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의 시에는 불가에서 쓰는 용어가 자주 나오지만 승려의 시처럼 정통 불교 교리에 입각해서 쓴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속세간의 사랑, 즉 이성에 대한 열렬한 구애의 몸짓을 보게 된다. 하염없는 연모의 정을 담아 쓴 연애 편지를 방불케 하는 시도 여러 편 보인다.
왕거미줄에 걸린 이슬 방울 하나에 우주가 담기듯 뜨거운 사랑 나누고 난 다음의 암컷 사마귀가 수컷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듯 당신의 체온을 덥히는 화톳불이 되어 밤새 타다가 한 개비의 만리향이 되어 당신의 방을 향기롭게 하기 위해 밤새 타다가 한줌 재가 되고 싶은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프고 아름다운 순리입니다. ----[눈물 한 방울을 마시고 싶어하는 것은] 부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밧줄 끝을 던져주고 그것을 끌어당기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심연 속의 허기진 갈치들이 서로의 꼬리를 잘라먹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허무의 바다 건너가기입니다 한쪽은 나룻배가 되고 다른 한쪽은 사공이 되어. ----[사랑한다는 것은] 부분
앞의 시는 자기 희생으로 일관하는,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열렬한 찬가이다. 비록 사랑의 끝이 '상처뿐인 영광'일지라도 자기 몸을 불사르며 애타게 그리워하는 과정에서 온전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오묘한 사랑의 철학을 시인은 설파하고 있다. 뒤의 시는 두 사람이 합심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랑의 완전한 성취가 가능하다는 철학적인 주제가 숨어 있다.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지상에서의 모든 사랑이 이와 같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새로이 태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이성간에는 이러한 숭고한 정신적인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뜨겁게, 온몸으로 타자를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승원은 말한다. "개처럼/코와 코 마주대고 꼬리와 꼬리 마주대고/영육을 섞는"([옥잠화]) 사랑을 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맨살 맨몸으로 싱싱하게 사는 것이 극락이고 천국"([바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들을 보면 신비 체험과 세속적 욕망을 동시에 성취하고자 비의적인 수행 체계를 세운 탄트라 불교(밀교)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승원이 줄기차게 그리는 만다라는 '사랑 만다라'인데 온몸 온 마음으로 그려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사뭇 숨이 가쁘다.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도 온몸 온 마음으로 하는 사랑을 갈망하거나 실행하고 있다.
대나무 그림자 마당을 쓸 듯 달빛이 호수를 관통하듯 저는 그렇게 당신을 자취 없이 사랑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둠 헤치고 산에 올라가 새벽빛을 길어오듯 당신의 사랑을 길어오고 골짜기의 바람이 산정의 나뭇잎에 와서 진저리치듯 당신의 젖무덤에 얼굴 처박고 전율하고 싶습니다 ----[다시 사랑 만다라] 부분
인용 시의 앞 연 두 행은 영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한승원은 그런 사랑에 만족해하지 않는다. "당신의/젖무덤에 얼굴을 처박고 전율"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영과 육의 합일을 통한 완전한 사랑, 거기까지의 힘겨운 도정에 한승원의 시는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에서도 몸과 마음을 서로에게 바치며 완성하는 뜨거운 사랑에 대한 묘사를 곳곳에서 해 보이고 있다. '촛불 연가'를 부제로 삼은 시 40편과 '도선사 가는 길'을 부제로 삼은 시 27편의 시에는 육체가 연출 가능한 황홀경에 대한 묘사가 제1시집에서보다 더욱 많이 보인다.
맨발로 눈 시리게 흰 요 호청에 첫몸 섞던 밤에 흘린 선혈 같은 빨간 꽃 수놓으며 가고 싶어라 ----[첫눈] 부분
육신과 영혼이 함께 지쳤을 때 그대의 붉은깨꽃잎 입술과 오디빛 유두에 나의 입술을 가져간다 (…)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나는 그곳의 해바라기의 꽃잎으로 솟아나곤 한다. ----[해바라기] 부분
보련향 비구니는 음욕을 탐하고 즐기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고 늘 은밀하게 즐긴 나머지 여근에서 불이 났다 (…) 아 나의 남근에서부터 타기 시작한 불이 지금 불기둥이 되고 있다 그 불기둥은 그대의 영혼을 태우고 있다 나는 그대의 영혼을 붙잡기 위하여 목터지게 그대의 이름을 외쳐 부른다. ----[업보] 부분
이처럼 성행위 장면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묘사가 자주 나오는데 왜 한승원은 이러한 '뜨거운' 사랑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에게 있어 성행위는 가장 인간다운 행위, 즉 원초적인 생명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을 억누르기 위한 방편으로 면벽 참선하면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가지만 한승원은 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시인의 논리에 따른다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수도승처럼 욕망을 숨기려 들거나 터부시하려 들지 않고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육체는 우주의 축도, 즉 소우주이다. 성적 결합을 통해 초월적 경지에 이르고,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본질적 실체와 신비로운 합일을 이루게 된다는 탄트라 불교의 논리가 한승원의 시에는 대체로 들어맞는다. 시인의 의도가 성욕 충족을 목표로 하는 외설에 있지 않았음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국내 시인의 시집 가운데 한승원의 시집처럼 뜨거운 시집을 아직 읽은 적이 없다. 해외 시인으로 장 주네 정도가 기억난다. 아무튼 "피처럼 타는 노을을 보며/당신을 진달래꽃처럼 사랑하다가 나 기꺼이/복상사하리라."([그 황홀한 복상사를 위하여])나, "독수공방 과부를 탐하는/남정네의 발소리 같은/밤비 소리에 묻어온다")([사랑하는 나의 女神]) 같은 구절을 봐도 섹스를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로 간주한 시인의 생명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자연인으로서, 자연의 일부로서 행하는 것이기에 성행위는 "슬프고 아름다운 순리"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늙고 병들어 죽는 유한자이다. 즉, 늙으면 젊음의 혈기를 분출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이 한창 젊을 때 사랑도 변변히 해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생명체가 생명력을 발휘할 때 진정으로 우주의 질서에 동참할 수 있다. 생명성의 고양을 위한 한승원 시인의 집념은 우리 시단에서 높이 사주어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제3시집에서 그는 존재에 대한 불교적 성찰에 깊이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시간과 죽음, 우주와 사랑 등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이 전개되는 것이 제3시집이 아닌가 한다. [모래알]은 비의와 상징으로 충만해 있는 시다.
모래알 속에 담겨 있는 바다를 보았는가 우리들의 뿌리 시간의 얼굴을 보았는가 그 질척거리는 시간의 촉감을 아는가 흘러온 강 같은 시간이 머무를 곳을 아는가 정지된 별들의 율동을 아는가 윤회의 숨결을 들어보았는가 죽음에 들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 그 어른의 모래알 같은 사리의 숨결 ----[모래알] 전문
시간에 대한 의미 규명은 이전 시집에서도 간간이 행해졌던 것인데, 제3시집에서는 더욱 심오하게 추구되고 있다. 시인은 바다에 가서 모래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래알 속에서 바다를 본다. 시간의 잔존물인 모래가 바다의 형성 과정을 다 알고 있음을 시인은 또한 알고 있다. 모래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영원을 꿈꿀 수 있고, 영원 회귀할 수 있다. 인간의 시간이 시의 중반부에 가서는 우주의 시간이 되고 "윤회의 숨결"이라는 영겁의 시간이 된다. 그러다 마지막 3행에 가서 영겁의 시간은 다시 인간의 시간이 된다. 시간이란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것이지만 시간이란 개념을 만든 것은 인간이다. 그 인간 중의 한 사람이 죽음에 들면서 임종게(臨終偈)를 거부하고 우주의 질서에 동참한다는 결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그 어느 것인들 두꺼운 자궁 속에 담겨 있던 씨알맹이 아니었으랴 그 아름답고 슬픈 벗어나기 뱀이 허물을 벗듯이 자유는 스스로와 우주를 파괴하는 자이면서도 지금보다 더 드높이 날 수 있는 날개 아닌가. ----[모순] 전문
이 시도 전체가 암시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모태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는 출생의 비밀을 밝히면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이 시가 되었다. 그렇다, 시인이 이해하는 '모순'이란 자기 자신과 우주를 파괴해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즉 해탈과 이타(利他)라는 이원적 세계관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대승적 사고를 시인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불교적, 우주적 상상력이 빈곤한 우리 시단에 한승원의 존재는 참으로 이채롭다. 시인은 [세상이 슬퍼졌을 때]란 시에서 귀 멀고 눈 멀고 혀 끊어버린 채 살고 싶다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머리 깎고 중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사실상 이미 33년째 글을 쓰면서, 그 긴 세월 동안 시지프스의 형극을 감내해온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어떤 수행도 글쓰기의 고통에 비길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한승원은 첫 시집의 제일 뒷면에 쓴 글에서 "시를 여기(餘技)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출발지점에서부터 그러했듯 앞으로도 그는 심혈을 기울여 시를 쓰면서 생명체들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우주의 비밀을 탐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