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종찰 조계총림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
송광사 앞이다.
주차장 주변의 상가를 지나 올라가자 편액도 없는 문이 나타난다. 현관 같은 문이다 입장표도 받는 산문인 것 같다.
소낙비가 지나가듯 벚꽃이 사라진 봄의 관문을 들어선 것 같은 계절. 아직 조계산은 듬성듬성 산벚이 희끗희끗 남아 있다.
겨우내 빈 몸으로 설한풍을 맞았던 나뭇가지에 봄물이 올라 가지 끝이 파라스름 생기가 돋고 있는 숲이 펼져진다.
전에 없던 거대한 선돌. '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이 새겨진 비석돌이 이 사찰의 위용을 말한다.
일주문처럼 양 옆에 구부리고 서 있는 노송을 올려다 보며 심호흡을 연신 거푸하다 보니 일주문의 장엄한 다포 장식이 가슴을
서늘하게 여는 것 같았다. 육중하게 두 기둥이 서 있는 다른 일주문과 다른 정감이 있다. 양 쪽으로 이어진 아담한 돌담 사이에 자리한 것이
대갓집 대문을 연상하지만 지붕 밑의 공포조각만은 다포계로 화려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다. 산을 오를 때 보지 못했던 꽃 내려올 때
보았다는 말처럼, 전에도 이 문을 들어섰을 테지만 볼 수 없었던 일주문의 장식이었다. 편액자체도 세로로 쓴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와
안쪽의 편액, <승보종찰조계총림>, 두 편액으로만 봐도 송광사가 불교사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지닌 사찰인지 알만하다.
물론 산문 들어서면서 '청량각'이란 누각이 서 있는 극락교를 지나면서 흐르는 물소리에 벌써 한차례 세심을 하였던 것이지만
다시 대웅보전으로 들어갈 때 건너야 하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삼청교에는
단아한 우화각 팔작지붕 밑으로 누각 속을 통과한다. 얼필 무지개 모양의 홍교인 것만 설핏 살피고 바쁘게 지난다. 언제나 그렇듯
단체 여행의 정한 시각으로는 충분히 주변을 살피고 느낄 수가 없지만, 주마간산이나마 거대한 사찰이 앉아 있는 주변의 산경의
청신한 느낌을 흡입해보고자 온 몸의 세포가 들떠 있기 마련이다.
문우들과의 우의를 다지는 문학기행이기에 평소에 못 만나던 문두들과 사진도 같이 찍고 드문드문 소식도 전해듣는다.
대웅본전 앞 마당에서 사방으로 겹겹히 에워싸고 있는 건축물들의 지붕들이 그림처럼 이어진 곡선을 둘러볼 뿐, 여기 저기 살피지도 못하고
맑은 샘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옛 기억을 더듬는다.
송광사의 인연은 출가 4박 5일의 체험 여행이었다. 내가 가장 삶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던 시절의 화두를 여기와서 풀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삶의 진정한 수행이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벌써 30여 년 가까운 세월인데. 지금 쯤은 해탈의 맛을 보고 있어야 할
것이련만. 그 수많은 해탈교를 건너봤지만, 진정한 해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쨌던 그 시절 송광사에서 보냈던 4박 5일, 법정스님이
수련원장을 맡고 있을 당시였다. 결코 잊을 수 없던 법정스님과의 독대는 참으로 나를 시원하게 앞길을 열어주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린아치처럼 천진난만한 회주 큰스님의 미소도 새삼 떠오른다. 그때는 내 마음의 화두에 몰두한다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일주문이 어떻고 청량각이나 우화각의 그 건축미가 아름다웠다는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사자루라는 강당에서 선수행을 했던
50여 명의 수행도들이 누구였던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엄격했던 발우공양도 마지막 발우에 묻은 음식찌꺼기도 물로 씻어 마셔야 했던 것.
음식맛과 마지막 스님들이 해준 찰밥이 그리도 맛 있었다는 것만 아지고 생생하다. 그리고 아침이나 쉴 때 지금 보니 일명 침계루라고 하는
7칸 누각 밑에서 세수도 하며 물소리를 청량하게 들었다는 기억도 새삼스럽다. 사자루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가에서 산책도 하고 쉬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절집의 주변을 의식하지 못했다. 눈이 있으되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마음의 눈이 떠지지 않았던 때가 그런것이었던가.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던가.
저 위의 사자루옆으로 흐르던 계곡이 아래로 계속이어져 흘러내리는 물이 대웅보전 입구의 우화각 아래서 절정의 그림을 그린다.
돌아나올 때는 올라갔던 길 아래 쪽 길로 내려온다. 계울물에 떠 있는 징검돌다리를 짚으며 우화각의 홍예교를 바라본다
무지개 모양 홍교 아래에 의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오 있는 것을 새삼 엎드려서 눈으로 짚어본다. 선암사라던가 다른 홍예교
아래도 옹머리돌이 나와 있던 것이 기억난다. 들어갈 때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까 우화각은 앞 쪽은 팔작지붕인데, 뒷쪽은 맞배지붕이었다.
주변 건출물과의 공간 배치로 인하여 그리도 절묘하게 지붕을 꾸미게 된다. 물론 대웅보전 건축물 지붕도 단순한 팔작지붕는 아니었다.
팔작지붕이 겹으로 펼쳐져 있어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건축물에서 보는 것 같다. 위세서 보면 바로 아亞자 형식인 것 같다.
이 신라 때 작은 길상사란 이름으로 지어져서 조선시대에 와서 송광사로 이름이 바귀었고 몇번의 개축이 이어졌을 것이고, 지금의
대웅보전은 1980년대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대 건축미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고려때 보조국사 지눌이 제1세의 국사로 시작하여
16국사를 배출하였다지. 옛날의 '길상사'란 이름은 현대에 와서 법정스님이 살아계신 동안 성북동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살린 사찰이
세워졌다.
내려올 때 다시 보니 일주문 아래서부터 노거수들이 이미 일주문의 상징처럼 자리하여 산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맞아주고 있다.
얼마나 오래된 나무였던지 자신을 모두 내어준 노거수의 그루터기 하나가 포토존이 되어서 한 번 씩 모두 그 패인 그루터기 앞에서
인증샷을 하고 나무 위에 돌 하나를 올려놓고 탑처럼 기원을 한다.
아! 청량각, 그 오랜 세월 견디면서 송광사의 첫 산문 역할을 하고 있다. 전혀 이 청량각을 건넜던 기억이 없다.
오를 때는 청량각의 현판이었는데 내려올 때는 저쪽은 극락교란 현판이다. 산문을 오르면서 가팠던 숨을
이 누각에서 쉬면서 흐르는 물소리에 저 밑 세상의 복잡한 소식들과 번뇌들을 날려버리고 들어간다
부처님을 만나고 다시 새 기운을 얻은 극락의 기분을 맛보고 왔느냐고 극락교가 물어주는 것인가.
몇 번의 보수가 있었겠지만 세월의 힘이 느껴지는 청량각. 천장에 용머리가 내려다 보며 마음을 점검한다.
이쪽과 저쪽으로 난 길, 오를 때 보지 못했던 내려올 때 다른 길에서 만난 많은 나무들과 흙과 돌맹이와 풀조차 모두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정겹다.
그리고 불일암 오르는 길은 아직 가보지 않았던 길, 다음에는 그 길을 올라 법정스님의 흔적을 찾아보리라.
법정스님이 보았던 우주의 섭리를 다시 따라가보리라.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지나치며 놓쳤던 것일까. 오를 때 못 보았던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네.
살면서 보통의 한 개인이 만나는 사람이 천여 명 정도 된다고 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 중에 또 만났던 사람, 물상들
모두 얼마나 안 것일까. 얼마나 안다고 할 것인가. 허망하고 물거품 같은 세상이었던 것이지만, 순간순간
전체인냥 열심히 살 뿐이다.오를 때 못 들었던 그 소리 내려올 때 들었네.
누가 나를 몰래카메라로 찍어서 카톡에 올렸다. 그것도 몰랐네,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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