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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연명(陶淵明)-귀거래사(歸去來辭), 도화원기(桃花源記)

차보살 다림화 2013. 9. 6. 17:51

 

 

 

 

 

 삶과 자연(自然)을 사랑한 詩人 도연명(陶淵明)

 

중국 송대(宋代)의 대표적인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년)은

동진(東晉) 말기에 태어나 남조(南朝)의 송(宋)나라 초기에 살았던 詩人이다.
이름은 잠(潛)이며 자는 연명(淵明) 또는 원량(元亮)이다.
난정서(蘭亭書)를 쓴 왕희지(王羲之)와 동(同) 시대를 살았지만 왕희지 보다 44살 아래로

그의 위대함을 알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무튼 도연명은 29세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전원생활(田園生活)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41세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관직(官職)을 사임하고 낙향(落鄕)하여 두 번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도연명(陶淵明)을 두고 중국 문학사(文學史)를 통털어 가장 조화롭고 원만하고 유순한 삶을 살다 간
詩人이라는 점에 이론을 제기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큰 벼슬을 지낸적도 없고, 그렇다고 뛰어난 업적이나 권력을 잡은 적도 없었으며,
평생 지은 일백 편이 좀 넘는 詩와 열 한 편의 산문(散文)이 남아 있는 정도지만
오늘날까지도 전원시(田園詩)의 초석(礎石)을 놓은 위대한 詩人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의 생활 역시 그의 詩처럼 검소하고 단순 담백해서
화려하고 복잡하고 빠른 걸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자신을 뒤돌아보는 여유를 느끼게 하는 시인으로,
존경심을 넘어 외경심(畏敬心)까지 일게 하는 大 詩人이다.

 

도연명(陶淵明)은 애정관(愛情觀) 또한 모범적인 사람 였다.

당시의 많은 명사(名士)들은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에 달하는 첩(妾)을 두고 사는 것이 보통였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사랑도 지나치지 않게 적절하게 절재하며 평생을 살았다.

그렇다고 큰 이상을 품고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가는 금욕주의자(禁慾主義者)같은 삶을 산 건 결코 아니다.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줄도 알았으며,

높은 정신적 품성까지 갖춰 그 조화가 잘 어우러진 사람 였었다.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男性象)을 말하자면,
여성(女性)의 관능(官能)과 미적(美的)인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고 존중 하며,
人生의 멋과 향(香)을 즐기지만 절제 할 줄 알아야 하고,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에 대한 욕구와 낙담이 결국에 가서는 다 부질없는 허상(虛象)인 줄도 알며,

그에 초연(初演)하지만,
그렇다고 삶과 욕망을 가벼이하거나 적대시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正義) 할 수 있다.

 

 

도연명(陶淵明)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의 詩처럼 지극히 순리적이고 자연적이며
인간의 본성(本性)을 사랑했던 사람 였다.

진정한 자유(自由)를 알아 그것을 만끽하며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다 간,
가슴 따뜻한 자유인(自由人)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낙향하여 3년 째 되던 해 한창 전원생활에 심취 했을 무렵

원인 모를 불이 나,

집과 세간을 다 태워 가족을 데리고 심양 근교 남촌(南村)으로 이사를 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부분 시인들이 그렇듯 그도 술을 너무 좋아하여 한때는 가세(家勢)가 기울기도 했으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놈의 술이 늘 문제를 일으킨다.

 

서기 405년 평택현의 지사(知事)자리를 그만두고 낙향하며 지은 詩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부패하고 타락했던 사회상과 뇌물로 얼룩지고 아부와 아첨을 일삼는 벼슬자리가 그의 생리에 맞을리 없던 그는
"내 어찌 쌀 다섯 말에 허세부리는 미관말직 소인배들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으랴" 라고

소리치곤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당시 현(縣) 지사(知事) 한 달 봉급이 쌀 다섯 말 정도 였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詩 "귀거래사(歸去來辭)"에는

자유로운 삶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짙게 녹아 있다.

귀거래사(歸去來辭)는 한시의 초기 작품이라 후기에 생긴 한시(漢詩) 형식(形式)과는 차이가 있다.
도연명을 두고 언뜻 생각하면 은둔자(隱遁者)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는 결코 세상을 도피한 은둔자는 아니었다.
그가 정녕 피하고자 했던 것은 현실(現實)의 답답한 정치(政治)와 혼탁한 사회 였지.
인생 자체의 도피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관직을 그만 둔 후에도 여러 번 조정의 관직(官職) 권유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땀 흘려 부지런히 농사 짓고 자연과 벗하며,

천하의 근본이며 땅의 진정한 주인인 농부로 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詩는

사언체(四言體) 9수, 오언체(五言體) 115수와 산문 11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은 80여 수에 불과하다.
허나, 따스한 인간미와 고담(古談)의 기풍이 서려 있는 작품들이 다수(多數)로
모나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경지는 전원적인 삶에서 우러나는 심성(心性)의 산물이다.
그의 시가 오래도록 주목 받고 애송 되는 까닭은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읊조림과 멀리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를 칭송하는 선경(仙景)의 경지 때문이라고 소동파(蘇東坡)는 칭송 했다.

 

 

그는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이나

현실 부정적(否政的)인 사고와 미래 지향적인 사고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가족을 떠나거나
현실적인 삶 자체를 등안시하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이상(理想)을 ?는 사람들과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노동의 고됨과 신성함을 몸으로 느끼며 그것들을 즐기고 또 사랑했으며,
긍정적인 사고와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이치를 폭넓게 구현한 진정한 휴머니스트(humanist) 였다.

 

이상(理想)과 현실(現實)이 잘 조화 된 그의 인생관(人生觀)에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선경적(仙境的) 전원시(田園詩)인 "귀거래사(歸去來辭)"가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가 태어나고 살아온 부패와 모순 투성이의 세상을 피해 숨기보다는,

한 걸음 빗겨서서, 맑은 아침 홀로 산책을 하거나

밭 가에 지팡이를 꽂아두고 잡초를 뽑고 곡식을 돌보는, 근본적인 삶을 택해 살았다.
그는 죽는날까지 전원(田園)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63세에 그가 애정을 쏟아부은 자연(自然)으로 돌아갔다.

 도연명(陶淵明)...

그의 人生 목적(目的)은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의 아름다운 조화(調和)였지,
결코 배반이나 도피는 아니였음을 그의 詩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일러주고 있다.

 

* 다음(DAUM) 네트워크에 저장 된 한자(漢子) 글자 수가 부족하여 싯귀절 중 몇 글자를 쓸 수가 없었다.

부득이 한글로 채워넣은 점은 씁쓸할 따름이니 이해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歸去來辭(귀거래사): 귀향을 하며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의 전원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껏 고귀한 정신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구나.
奚추창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며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일 탓했자 무슨소용 있겠는가.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남은날 바른길을 쫓는 게 옳다는 것도 알았도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길 잘못들어 헤맸지만 그것도 멀지는 않았고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 깨닫고 바른길 찾았으니, 지난 벼슬길 그릇됨도 알았노라.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 얼마나 머냐고 물으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녁 희미한 빛마저 한하도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내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니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마음 급히 뛰어간다네.

동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자식 대문에서 손 들어 나를 맞도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안 세 갈래 작은길엔 잡초 무성하나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 국화는 변함없구나.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아이 손 잡고 방 들어서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향 좋은 술, 항아리 가득하구나.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당겨 스스로 잔 부어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짓노라.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창에 기댄 체 의기양양 해지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작은집이건만 어찌 편안치 않을손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은 달았건만 찾아오는 이 없어 늘 닫혀있도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몸 의지해 발길 멎는대로 쉬다 가며,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 바라본다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 돌아나가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 제 둥지로 돌아오도다.
影예예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 어두우메 서산에 해 지려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외로운 소나무 붙잡고 서성이도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도다!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잖고 속세와도 단절하련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 나가 무얼 구할 게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지들과 정담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 일러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내일 서쪽밭에 나가 밭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때론 수레 불러 타기도하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배 스스로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골 시냇물 찾아 나서며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산 넘고 언덕 지날 때도 있노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는 즐거운듯 생기롭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 퐁퐁 솟아 흘러가도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만나 즐거워하는것 부러워 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생도 머지않았음을 스스로 느끼는 바로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이제 모든것이 끝이로구나!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 세상 머물날 얼마나 되려나.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이 마음 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리.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초조하고 황망한 마음 무얼 욕심 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나라 태어날 것 바라지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 (혹식장이운자) 때로 지팡이 세워놓고 김도 매고 한다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도 짓노라.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날 돌아갈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일소냐.

 

 

 

- 주(註) -
영원한 paradise 무릉도원(武陵桃源)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그의 이상(理想)과 뜻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근원의 뿌리는 노자(老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동양철학사(東洋哲學史)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몇 일 전에 소개한 그의 詩 귀거래사(歸去來辭) 역시 자연을 벗하며 욕심없이 인생을 살아가자는 내용으로
도가사상이 핵심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영향을 받았다.


무위(無爲)란 조금도 거칠것 없는 자연그대로의 상태로,

즉 인위적 행위나 어느 틀과 법에 전혀 얽매임이 없는 완전한 자연상태를 말하며,
도가(道家)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명(陶淵明)에 영향을 준 무위사상(無爲思想)을 좀 더 풀자면...


소국과민(小國寡民)

노자(老子) 80장에 나오는 이 말이 그 원류로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란 말로,

문명의 발달이 없는
무위(無爲)와 무욕(無慾)의 이상사회(理想社會)를 일컷는 말이 소국과민(小國寡民)이다.
문명의 발달이 거의 없으며 갑옷과 무기도 쓸모가 없는,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 이상적 사회요, 이상적 국가임을 일컫는 말이다.
노자(老子)는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自然)에 녹아들어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 했다.
이 사상(思想)은 뒤이어 일어난 공자(孔子)의 유가사상(儒家思想)과 정면 대치되는 사상이다.

 

도가사상(道家思想)이니 유가사상(儒家思想)이니 혹은 법가(法家)니 묵가(墨家)니 하는 사상들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것이 국가의 틀이 형성되고 조직화되어 이합집산에 따라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수도없이 반복되며,
여러 정치사상이 탄생하고 소멸 되던 혼돈기인 기원 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정립 된 사상들로 지금의 시각과는 적잖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때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사상들이 2세기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아직도 중심사상으로 남아있음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도연명(陶淵明)은 그의 시와 산문에서 이르듯
그가 꿈꿨던 무릉도원경(武陵桃源景)은
이상향(理想鄕)을 일컷는 세상으로, 고단한 현실을 벗어난 이상세계(理想世界)의 또 다른 세상을 말하며,
人間이 생각하고 꿈 꿀 수 있는 최고의 낙원(樂園)의 경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렵고 골치 아픈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전문지식과 깊이 있는 내용들은 각설하고...

 

아무튼, 도연명(陶淵明)이 상상했던 도원경(桃源境)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 서양의 두가지만 예로 들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으로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안견(安堅)의 그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에 그린 그림으로,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꿈에 기초하여 그린 그림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방문하는 꿈을 꾸고,
그 내용을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설명한 후 그리게 한 것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안평대군의 표제와 발문을 비롯해, 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
당대 최고 문사(文士)들의 낙관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자필 찬서(燦書)가 곁들여 있다.
이 그림은 1447년 음력 4월 20일에 그리기 시작하여 3일 만인 4월 23일에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세로 38.7cm, 가로 106.5cm로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었으며,

십여 년 전 한국에 건너와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둘째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의 모태가 된 이야기로 유명하며,
서양(西洋)에 신비로운 동양(東洋)의 유토피아(utopia)사상을 일반에 널리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이 소설은 1933년 처음 출간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제임스 힐튼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샹그릴라(Shangrila)"라고 표현 했다.
샹그릴라는 티벳어로 "푸른달이 뜨는 언덕"이란 말로
서양의 유토피아(utopia)를 이르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그의 소설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 소설을 고등학교 1학년 때 문고판으로 읽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읽고 나서 묘한 감동을 받아 다시 정독을 했었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은 서양사회의 시각으로 보는 신비로운 동양의 유토피아 사상에 매료 돼,

출간되자마자 베스트 셀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37년에는 프랭크 카프카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또 한번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인기 작품이였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고교 2학년 때 구정을 맞아 시골집엘 갔는데,

마침 안방의 흑백TV에서 카프카 감독의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이 한창 방영되고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밥 먹고 보라고 재촉하는 어머니의 성화도 뒤로 한 체 끝까지 다 보고나서
주린 배를 채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인공 로날드 콜만이 매서운 눈보라속을 헤메다 결국 샹그릴라를 찾아 동굴로 들어서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감동으로 남아있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현재 중국 윈난성(雲南省)에는 샹그릴라라고 하는 시간이 멈춘듯한 고대 도시가 있으며, 리장, 쿤밍, 따리,등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소수민족들의 전통적은 삶을 이어가는 도시와 마을들이 깊은 산속에 적잖이 남아 있다.
따라서 제임스 힐튼이 세상에 알린 샹그릴라(Shangrila)라고 하는 말은,

싱가포르의 고급 호텔 이름을 비롯하여,
중국내 많은 호텔들이 같은 이름을 쓸 정도로 대중화 되었다.


지금까지 두어가지 예를 든 그 외에도

도연명(陶淵明)은 수도 없이 많은 영향을 문학사(文學史)에 끼쳤다.
특히 회화부분에서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양화풍(東洋畵風)에 영감을 준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작은거인 도연명(陶淵明)...

그가 차지하는 문학(文學)과 예술(藝術)에서의 비중은 실로 커다란 거인(巨人)의 발자취라고 해도 전혀 그릇된 말이 아니다.

 

도연명(陶淵明)이 꿈꿨던 세외도원(世外桃源)의 세상!

그 이상(理想)과 정서(情緖)가 담긴

도화원기(桃花源記) 서문(序文)과 본시(本詩)를 여기 소개 한다.

 

 

桃花源記 序文 (도화원기 서문)

 

晉太元中 武陵人捕魚爲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達桃花林

(진태원중 무릉인포어위업 연계행 망로지원근 홀달도화림)

진(晉)나라 태원년간에 무릉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물길을 따라 갔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모를 무렵 홀연히 복숭아꽃 숲이 눈앞에 나타났다.

 

來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美 落英빈紛

(내안수백보 중무잡수 방초선미 낙영빈분)

양쪽 강을 끼고 수백 보의 거리에 온통 복숭아나무뿐이며 다른 잡목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향기로운 풀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랐고 복숭아 꽃잎이 펄펄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林盡水源便得一山. 山有小口 방불若有光. 便舍船從口入.

(어인심이지 부전행 욕궁기림. 임진수원편득일산. 산유소구 방불약유광. 편사선종구입.)

어부는 이상하게 여기고 계속 앞으로 나가 복숭아 숲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했다.
숲은 강 상류에서 끝났고 그곳에 산이 있었으며,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속으로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初極狹 재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良.

(초극협 재통인 부행수십보 활연개량.)

동굴은 처음에는 몹시 좁아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으나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다.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美池桑竹之屬. 阡陌交通 鷄犬相聞.

(토지평광 옥사엄연 유량전미지상죽지속. 천맥교통 계견상문.)

 其中往來種作男女衣著 悉如外人 黃髮垂초 竝怡然自樂.

(기중왕래종작남여의저 실여외인 황발수초 병이연자락.)

토지가 평평하니 넓고 집들이 정연하게 섰으며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사방으로 길이 트였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마을에서 왔다갔다하며 농사를 짓는 남녀의 옷차림은 다른 고장 사람들과 꼭 같았으며,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다.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견어인 내대경 문소종래 구답지 편요환가 설주살계작식.)

사람들은 어부를 보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하자 그들은 어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 대접을 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어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저마다 물었다.

 

 

自云: 先世避秦大亂 率妻子邑人來此絶境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자운: 선세피진대란 솔처자읍인래차절경불부출언 수여외인간격.)

 問今世何世乃不知有漢 無論魏晉. 此人一爲具言 所聞皆歎완.

(문금세하세내부지유한 무론위진. 차인일위구언 소문개탄완.)

집 주인이 이르길 "우리 선조가 진(秦)나라 때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絶境)으로 와 다시 나가지 않았으므로 바깥 세상 사람들과 단절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묻는 것을 보니,
그는 한(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뒤로 위(魏)나라와 진(晉)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고 하였다.
어부가 지난 역사를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해 주자 모두들 놀라며 감탄했다.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여인각부연지기가 개출주식. 정수일 사거. 차중인어운: 부족위외인도야.)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술과 밥을 대접했다.
어부는 며칠을 묵은 후 작별하고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라고 했다.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기출 득기선 편부향로 처처지지. 급군하 예태수 설여차.)

어부는 마을을 벗어나와 배를 얻어타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군데 표식을 했다. 읍에 이르자 태수를 찾아가 그대로 보고를 했다.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태수즉견인수기왕 심향소지 수미불부득로.)

태수는 즉시 사람을 보내 어부가 표식한 곳을 찾아가게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도화원으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하였다.

 

ㅡ 서문 끝 ㅡ

 

 

      桃花源記 本詩 (도화원기 본시)


               ?氏亂天紀(영씨난천기): 진(秦)나라 임금이 천도를 어지럽히자

        賢者避其世(현자피기세): 현자들이 세상에서 몸을 숨겼다

    黃綺之商山(황기지상산): 은둔자들도 상산으로 갔지만

         伊人亦云逝(이인역운서): 그들 역시 이곳으로 피해 왔더라

 

              往迹浸復湮(왕적침복인): 은신해 갔던 발자욱은 묻혀 지워졌고

              來逕遂蕪廢(내경수무폐): 도화원으로 오던 길도 황폐해 버렸다

             相命肆農耕(상명사농경): 그들은 서로 도와 농사에 힘을 쏟고

 日入從所憩(일입종소게): 해가 지면 편하게 쉬더라

 

               桑竹垂餘蔭(상죽수여음): 뽕과 대나무가 무성하여 그늘이 짙고

       菽稷隨時藝(숙직수시예): 콩과 기장을 때를 따라 심더라

     春蠶收長絲(춘잠수장사): 봄 누에 쳐서 비단실 거두고

       秋熟靡王稅(추숙미왕세): 가을 추수에 세금 안 바치더라

 

       荒路曖交通(황로애교통): 황폐한 길이 희미하게 틔였고

  鷄犬互鳴吠(계견호명폐): 닭과 새가 서로 우짖는다

          俎豆猶古法(조두유고법): 제사도 여전히 옛법 그대로이고

             衣裳無新製(의상무신제): 옷도 새로운 형식을 따르지 않더라

 

                  童孺縱行歌(동유종행가): 어린아이들은 멋대로 길에서 노래하고

              斑白歡游詣(반백환유예): 백발 노인들은 즐겁게 서로 찾는다

           草榮識節和(초영식절화): 풀 자라니 온화한 봄철임을 알고

                    木衰知風?(목쇠지풍려): 나무 시들자 바람이 찬 겨울임을 아노라

 

         雖無紀歷志(수무기력지): 비록 달력 같은 기록은 없어도

                  四時自成歲(사시자성세): 사계절 변천으로 일년을 알 수 있노라

         怡然有餘樂(이연유여락): 기쁜 낯으로 마냥 즐겁게 살고

                     于何勞智慧(우하노지혜): 애를 써서 꾀나 재간을 피우지도 않는다

 

               奇?隱五百(기종은오백): 흔적 없이 가리워진지 오백년 만에

              一朝敞神界(일조창신계): 홀연히 신비의 세계가 나타났으나

                        淳薄旣異源(순박기이원): 순박한 도원경과 야박한 속세가 맞지 않아

                   旋復還幽蔽(선부환유폐): 이내 다시 신비 속으로 깊이 숨었노라

 

                借問游方士(차문유방사): 잠시 속세에 노는 사람에게 묻노니

                 焉測塵?外(언측진효외): 먼지와 소음 없는 신비경을 아는가?

         願言?輕風(원언섭경풍): 바라건대 사뿐히 바람을 타고

                      高擧尋吾契(고거심오계): 높이 올라 나의 이상향을 찾으려 하노라

                 

                 - 끝 -   

 * 진시황은 성씨(性氏)가 ?(영)이고 이름이 政(정)이다.

따라서 본시 윗 부분 첫머리에 영씨(?氏)란 진(秦)나라 왕들의 성씨를 일컷는 말이다.*

 

 

 

 

출처 : 학 마 을
글쓴이 : 천마리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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