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와유도(臥遊圖)

차보살 다림화 2012. 7. 16. 18:03

 

와유도(臥遊圖)

 

                                                                                                   조윤수

                                            

 

   토요일이 좋다. 요즈음 한국은 평일에도 관광객들이 많다. 주말에는 교통체증도 많으니  나들이 하지 않는 것이 득이기도 하여,  집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 같을 때도 잦다. 누워서 편안히 휴식하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얼마 전에 <진품명품> 프로그램에서 조선의 <와유도臥遊圖>가 나온 적이 있었다. 꽤 놓은 가격이 매겨진 것으로 기억한다.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와서 금강산의 들머리에서 승경이 있는 곳까지 표시한 그림 한 장이었다. 와유란 말 그대로 비스듬히 누운 채 그림을 감상하면서 마음을 맑힌다는 뜻인 것 같다.

옛 사람도 이제는 늙어서  금강산에 더는 갈 수도 없으니, 자신이 다녀온 길을 그려서 벽에 붙여 놓고 유람할 당시의 감격했던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즐겼다. 조선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모두가 와유하기에 좋은 자료들이다. 영조 임금도 직접 금강산을 다니러 갈 수 없어 겸재에게 <금강산도>를 그려오라고 했고, 정조임금도 단원에게 단양팔경을 그려오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그림들은 조선회화사에 큰 자리를 확보하였다.

 

  오늘날은 단면의 사진 뿐 아니라 활동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대이다. 언제라도 나라 안 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의 오지까지 영상으로 인문지리를 파악할 수 있고 자연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토요일은 오전 시간에 <걸어서 세계여행>과 <한국의 재발견> 프로가 연속 상영된다. 오늘의 세계 여행 코스는 유럽의 남부 ‘크로아티아’였다. 크로아티아는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다양한 시선으로 다시 보아도 좋은 곳이다.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국립공원은 내가 본 공원 중에 가장 자연스럽게 조성된 아름다운 자연공원이다. 여러 줄기의 폭포가 자연스럽게 계단식으로 이루어져있다. 또 두브로브니크 시는 유럽의 고대문화와 현대가 잘 어우러진 낭만적인 도시다. 멀리까지 나들이는 이제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와유도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한국의 재발견>에서는 백두대간의 허리인 강원도 인제 지방을 여행한다. 가수 김도향이 진행했던 프로를 성우 배한성이 맡았다. 콧소리가 특징인 목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옛날에 그곳을 지나칠 때를 회상하면서 경관을 감상한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라는 말 같이 40여 년 전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서울에서 설악산으로 가기 위해 인제를 넘어가다가 빗물에 다리가 무너져서 일행이 여관에서 하루를 묵는 동안 근처의 군부대원들이 고쳐준 적이 있었다. 관동팔경의 일부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버스는 언제나 터덜거리며 버스의 의자 밑은 강원도 옥시기(옥수수를 강원도에서는 그렇게 불렀다.)가 이리 저리 굴러다녔다. 그때만 해도 강원도에 가면 모두 옥시기를 기념으로 사들고 왔다. 핫팬츠 차림으로 집에서부터 바다 와 설악산 울산바위까지 그 험한 계단을 올랐던 것이다. 요즘의 젊은이처럼.

 

 

 

  유행은 돌고 돌아 긴 바지에서 여름의 핫팬츠가 다시 눈길을 끈다. 나에게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하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아찔한 젊은이의 옷차림이다. 문인화 동호회원들과 동해바다에서 울산바위까지 해강의 아드님이신 청강선생님과 여행하면서 들었던 선생님의 말이 생각난다. “미스 조는 풍류객 같은 면모가 있구먼.” 무엇을 두고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비슷한 성정이 있었던가 싶다. 나의 아버지처럼. 50년도 더 된 예전에, 아버지는 동생들을 태운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전주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도중, 남원을 지나면서 광한루를 둘러보고 가자고 했으니 말이다. 풍류란 단지 바람따라 놀이를 즐기는 것만이 아니었다. 풍류 정신은 조선인이 유불선을 받아들이는 정신의 바탕이란 것을 뒤에 알았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동안 배한성은 벌써 천상의 정원인 점봉산의 정상, 야생화 천국에 도달하여 숨을 고르고 있다. 한 때 점봉산 주위를 너무나 깎아서 환경을 훼손한다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야생화의 보고가 되었다. 용대리 황태 덕장 이야기를 들으며 백담사 가는 길의 추억에 또 젖는다. 백담사라면 만해스님이 가장 좋아했던 곳이다. 스님의 흔적으로 지금은 만해 마을이 조성되었다. 다음에 그곳을 갈 때면 꼭 만해마을에 들리리라. 전직 대통령의 흔적으로 더욱 유명해진 절이기도 하다. 한 번은 주변에서 쉬었고 한 번은 셔틀버스로 절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주변 계곡의 바위는 버스 안에서의 감상만으로도 눈 맛이 시원하던 계곡. 백담사에서 대청봉까지는 눈길로만 더듬어야 할 길. 설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 적멸보궁이 있는 봉정암에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반바지 차림으로 울산바위까지 올랐던 까마득한 젊음을 뒤로 하고 자매들과 연인과 함께 돌았던 설악 주변을 떠올렸다.

  6.25 사변 중에도 부산에서 개성으로 두 달 뒤 1.4 후퇴. 당시 몇 날이 걸렸는지, 걷다가 머물었다가 또 차를 얻어 타고 유랑민처럼 내려갔던 길. 원치 않았던 국토 종단 길이었다. 그때로부터 고향을 잃은 디아스포라처럼 살았던 것 같다. 전주에 정착한 뒤에도 서울로 부산으로 혹은 더 먼 곳으로 건너뛰기가 더 쉬웠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어딘가가 있는 것처럼.

  많이 움직이기 어려워서 와유를 즐기면서도,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 같이 움직이고 있다. 현대를 노마드 시대라고 하지만, 고대의 유목을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앉아서도 새 공간의 자유로움을 찾는 일, 새로운 사유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삶이 될 것이다. 정착민과 유목인 사이의 어느 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가치를 모두 받아들이는 생동하는 삶이 될 것이다. 누워서도 앉아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삶을 익혀야 하리라. 움직이면서도 앉는 방법을, 누워서도 생동하는 삶의 방식. 영원히 살 것처럼.

 

  *  <겸재 정선의 <금강산전도> 국보 제 217호>

 

"영조 10년(1734)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실제로 보면 수묵담채로 그렸다. 크기는 가로 94.5센티, 세로 130센티.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모습이다. 눈덮인 봉우리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는 수직전법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이와 함께 위쪽에는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화면 중심으로는 만폭동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메마른 느김의 봉우리들과 대조적으로 왼편에는 무성한 숲을 이룬 부드러운 토산이

놓여있는데, 이는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으로 나타내었다. 화면의 웃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호,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다."

 
"<금강산전도>는 대상의 감동을 전하기 위하여 왜곡 과장, 축소를 강조한 정선의 다른 모든 그림이 그렇듯 실경 그대로를 옮겨 놓은 그림은 아니다. 주역에 능통했던 정선인만큼 낮은 야산과 높은 암산을 좌우로 배치하여 음과 양, 부드러움과 강함이 대비될 수 있게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을 보면 금강산의 전체 모습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정선이 금강산을 생각으로 그리지 않고 골짜기 골짜기를 직접 발로 밟아보고 다녀 봤기 때문이다. 마치 명장이 목공소에서 깎아놓은 나무를 가져가 조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무결에 따라 대패질을 한 나무로 집을 지은 것과 같다.
정선의 <장안사>는 어떤가. <금강산전도>를 보지 않고 <장안사>를 본다면 별로 감동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장안사는 금강산 초입에 있는 절이다. 돌로 된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절이 바로 장안사다. 다리 건너 편에 우람하게 늘어선 석가봉, 관음봉, 지장봉, 장경봉 등 암봉의 호위를 받으며 좌정한 장안사는 <금강산전도>에서는 금강산이라는 전체 지역 속에서 위치한 장안사를 그리다보니 아주 작고 소략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이 작은 표시만으로도 장안사가 금강산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반면 장안는 절이 놓인 장소가 눈에 잡힐 듯 자세히 그려졌다. 그런데 막상 <금강산전도>가 없이 <장안사>를 보개 된다면 어떨까.?"  (조정육의 그림이야기에서)
그것은 전체지도 없이 목적지만 잘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으로 여행하여 과정의 풍경도 모르고 목적지만 향해 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2. <와유도臥遊圖> 속으로

 

 

 

  지난 6월 중순에 자매들과 부산에서 전주까지 일주한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함께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부산까지의 주변 풍광과 길들이 벌써 낯선 나라 같았다. 부산에서 가족행사를 마치고, 언니 집에서 하루를 묵고 올라가는 길에 어디를 들를까 생각했다. 큰언니는 영주부석사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의견을 제시했다. 지난번에 경남 한안군의 와유도를 본 일이다. 전통의 도시 전주가 이씨조선의 본향이란 것이 이 지방의 명분이다 . 그러나  함안 조씨인 우리는 정작 본향인 함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경남 진주가 고향인 우리자매들은 처음으로 본향을 방문하기로 했다.

  함안군은 옛 아라가야의 땅이다. 아라가야의 궁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유교 유적지와 불교 유적지도 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과 위치상으로 칠서면의 유교유적지와 악양루만 찾아 보자고 했다. 주세붕이 조선에 처음으로 건립한 서원 자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뒷산의 대나무 숲에 하얀 왜가리 군락지가 있어 왜가리의 군무만 보았다. 와유도에서 백미로 꼽았던 주씨고택연당지를 찾는데 갈림길에  이정표가 표시되지 않아서 우여곡절 끝에 찾았다. 사진보다는 좀 작게 보였지만, 주씨고택 서원으로 연당지 안에 섬까지 만들어서 천원지방이란 선비의 이상향을 형상화했다. 조그마한 연못에 운치 있는 자그마한 정자와 고풍스러운 소나무 한 그루, 무기리연당에는 연꽃은 없고, 바람에 목욕하는 풍욕루(風浴樓)에 오르니 벼슬과는 바꾸지 않는다는 하환정(何換亭)이 연못 건너 단정하게 앉았다.

 

 

 함안 무기리 주씨고택연당지에서 

 

 

 

 

 

 

 

함안 악양루에서

 

  햇살이 여위어가고 있어서 서둘러 악양루를 찾았다. 길게 곧은 들판의 길을 가로질러 어렵게 찾은 악양루. 김제 지평선을 연상할 만치 넓은 쪽 곧은 논을 가로질러 갔다. 악양루는 남강과 함안의 샛강이 합류하는 강 가 절벽에 세워져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허름한 누각이 먼지 속에 쓸쓸하게 보였다. 악양루는 강 건너 함안의 들녘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옛날에는 풍류를 읊을만한 곳이었다. 강을 둘러싼 둑방길을 쌓아 홍수를 예방하고 지금은 자전거 길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단다. 악양루라는 이름은 중국의 유명한 악양루에 비유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고대에는 도읍이 될 만한 고장으로 보였다.

  어둠이 햇살을 먹고 있는데 갈 길은 멀었다. 아직도 우리는 부산이란 이름과 경남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 지도에 경남북도가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실감되었다. 지도를 보고 밤을 지새울 곳으로 덕유산 자락을 꼽았다. 무주의 나제통문이 바로 신라와 백제의 경계가 아니던가. 함양 휴게소에서 저녁밥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밤중에 무주구천동 초입에 들어서자 처음 눈에 들어온 황토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공기가 아주 청신했다. 천장이 높고 넓은 방에서 맘껏 활개를 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첩첩 산중의 산자락에 위치한 곳이란 것을 알았다. 큰언니는 서울에서 시댁고향인 거창을 다닐 때 십년 전의 길을 떠올리면서 길이 정말 좋아졌다고 감격했다. 아침에 덕유산 리조트 주변을 돌아서 아침 식사할 곳을 찾았다. 승강기를 타고 덕유산 정상에 올라볼까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운행하지 않았다. 구천동 입구에서 알맞은 식당을 찾았다. 송이버섯해장국을 주문했는데 다른 곳과 달리 모든 접시를 사기그릇을 사용하였고 산골에서 직접 채취한 나물 맛이 좋았다. 우리의 운전기사인 제부는 아주 맛있다고 한 달에 한 번씩 여기 오자고 제의한다.

  전주로 가는 길에 찾을 만한 관광지를 생각했는데 장수지역을 지나면서 주논개 유적지를 찾다 놓치고 말았다. 朱씨는 우리자매의 외척이기도 하니까. 진안에 당도하여 시장에서 수삼을 사고 용담댐을 둘러보고 <운일암반일암>를 지나가기로 했다. 나도 몇 번 다닌 길이긴 하지만 진입로와 방향을 잘 알 수 없었다. 용담댐 공원에서 진안 수박을 잘라 먹고 시원한 입맛으로 공원을 산책했다. 자매들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부럽지 않다. 먹거리와 볼거리가 좋은, 산수가 빼어난 고장에 오니 부산언니는 더욱 좋아했다. 비록 가물어서 저수지의 수위가 낮았지만 함안의 악양루에 비유할 곳이 아니었기에 못 다한 정취를 용담에서 누렸다. 용담은 이름대로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용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지 않은가. 와룡마을 뒷산은 산수화 한 폭 그대로였다. 마이산이 고생대 때에는 바다 속이어서 사암으로 이루어졌다니 이곳은 물이 많다. 진안의 데미샘과 장수의 뜬봉샘이 섬진강과 금강의 시원이어서 물길이 굽이굽이 흐르는 수려한 계곡이다. 내가 전북 사람이 되었으니 전북에 오면 내가 해설사 역할이다.

 

 

 

 

 

  손벽을 치고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것은 ‘운일암반일암’에서였다. 운일암반일암을 향해서 가는 동안 각자 그곳을 다르게 상상하였다. 큰언니와 제부는 암자인 줄 알았고 부산언니는 운일암과 반일암이 따로 정해져 있는 큰 바위로 생각했다. 해서 큰 광광지처럼 주차장도 넓은 줄 알았는데 정자 옆의 오른편 언덕길을 오르려고 한다. 올라가야 암자가 나올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팔각정(도덕장)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니 과연 정자 밑은 반일암이고 운일암, 구름 같은 바위가 즐비하다. 사실은 약 50여 년 전만해도 이 계곡은 깎아지른 절벽에 길이 없어 하늘과 나무와 돌만 있었고,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었단다. 하여 반나절만 햇살이 들었다 하여 운일암반일암의 명성을 얻었다. 물이 작아서 이름값을 하지 못했지만 반대편 절벽 바위는 영락없이 부처바위였다. 동생이 어처구니없다면서, 관광안내도를 보면 아주 중요하게 운일암반일암이 크게 표시되었단다. 다니다보면 생각과 실제가 다른 점이 웃음 나게 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안내도에 ‘운일암반일암계곡’이라고 표시해야 맞다 고 하면서 착각에 허탈해 했다. 실은 진안군 정천면 주천리의 갈거마을에 있다 하여 갈거계곡이라 한다.

 

 

   이제 이렇게 하여 나의 와유도가 하나 더 그려졌다. 와유도는 중국에서 비롯했다고 말할 수 있다. 17세기 중국에는 '강산와유도'(江山臥遊圖)를 그린 화가가 있었다. 예술가란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재창조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강산와유도는 중국 미학이 도달한 정점이라고 한다는데, 고요함과 금욕주의가 압축된 명상의 개념을 근본으로 하는 것 같았다. 동양의 산수화나 문인화는 풍경만 그린 것이 아니라 풍경에 우주적 정신을 담아서 혹은 선비의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진정한 와유를 즐기려면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와 너와 사회 나아가서는 지구촌을 아름답게 보전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활동 와유도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우리가 기대어야 할 지구가 힘들어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저수지들이 맨살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유람의 방향도 많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반성이 되었다. 옛 사람들의 와유는 단순히 마음을 맑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적이며, 정신적이고 철학적 가치가 그림 속에 담겨 있어야 진정한 와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데 오늘날 유람객들은 그 가치를 실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좋은 시와 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도앵부(陶甖賦)/이규보(李奎報)  (0) 2013.05.01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년  (0) 2013.01.27
기도하는 나무  (0) 2012.03.16
금요수필  (0) 2012.03.16
2011년 3/4 단풍 모음  (0) 201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