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스크랩] 제갈 량의 출사표, 원문과 해설

차보살 다림화 2013. 9. 6. 18:25

  출사표

    出師表


               - 촉, 제갈 량(諸葛 亮) (181~234) -



(원문)


선제창업미반, 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  차성위급존망지추야.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罷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선제(유비)께서 왕업을 시작하신 지 아직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중도에서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우리 땅 익주가 오랜 싸움으로 피폐하여져 있으니,

이는 실로 위급하여 나라의 흥망이 걸린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시위지신, 불해어내, 충지지사, 망신어외자, 개추선제지수우, 욕보지어폐하야.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그러나 모시고 지키는 신하들이 궁중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뜻이 있는 무사들이 밖에서 자기 몸을 잊고서 애쓰는 것은,

모두 선제의 특별히 두터웠던 대우를 추모하여

이를 폐하에게 갚고자 함입니다.



성의개장성청, 이광선제유덕, 회홍지사지기, 불의망자비박, 인유실의, 이색충간지로야.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진실로 마땅히 성스러운 폐하께서는 들으심을 넓게 여시어,

그것으로써 선제가 남긴 덕을 빛나게 하여

뜻 있는 선비의 의기를 넓고 크게 해야 합니다.

공연히 스스로 덕과 재주가 모자란다고 함부로 단정하셔서는 아니 되며,

억지로 비유를 끌어대어 의를 잃으시고,

그것으로써 충간의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궁중부중, 구위일체, 척벌장부, 불의이동. 약유작간범과급위충선자,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奸犯科及爲忠善者,


의부유사, 논기형상, 이소폐하평명지리, 불의편사, 사내외이법야.

宜付有司, 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궁중과 조정은 모두 한 몸이니

상을 주는 일과 벌을 내리는 일을 달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를 범하는 자와

성실하고 선량한 일을 한 자가 있으면

마땅히 담당자에게 넘겨서

그 형벌과 상을 논하여

그것으로써 폐하의 공정하고 밝은 다스림을 드러내셔야 할 것입니다.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이 법도가 다르면 안 될 것입니다.



시중시랑, 곽유지.비위.동윤 등, 차개량실, 지려충순, 시이선제간발,

侍中侍郞, 郭攸之.費褘.董允 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


이유폐하. 우이위궁중지사, 사무대소, 실이자지, 연후시행, 필능비보궐루, 유소광익.

以遺陛下.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시중과 시랑인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은 모두가 선량하고 진실하여

뜻과 사려가 참되고 순수합니다.

그러므로 선제께서 그들을 여럿 가운데서 뽑아 쓰시고

폐하께 남기셨으니

제가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일에 크고 작음 없이

모두 이들에게 물은 연후에 시행하시면

반드시 부족하거나 빠진 것을 도와주고 보충하여

널리 이익이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장군상총, 성행숙균, 효창군사, 시용어석일, 선제칭지왈..능.

 將軍尙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시이중의거총위독. 우이위, 영중지사, 사무대소, 실이자지, 필능사행진화목, 우열득소야.

是以衆議擧寵爲督. 愚以爲, 營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必能使行陣和睦, 優劣得所也.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위가 선량하고 치우치지 않으며

군대의 일에 밝아 두루 아는지라 예전에 시험 삼아 써 봄에

선제께서 그를 칭찬하여 '유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총을 천거하여 지휘관으로 삼았으니

제가 생각건대 군영 중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 없이

모두 그에게 물으면 반드시 각 부대들로 하여금 화목할 수 있게 되어

우수한 자와 졸렬한 자가 각각 마땅한 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친현신원소인, 차선한소이흥륭야, 친소인원현신, 차후한소이경퇴야.

親賢臣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함은

이것이 선한이 흥하고 융성한 까닭이요,

소인을 친근히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함은

이것이 후한이 기울어지고 쇠한 까닭입니다.



선제재시, 매여신론차사, 미상불탄식통한어환영야.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嘆息痛恨於桓靈也.

 

선제께서 계실 때에

매번 저와 함께 이일을 의논하며

일찍이 후한의 환제와 영제의 나라가 어지러웠던 일을 탄식하고

몹시 원통하게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시중상서.장사.참군, 차실정양사절지신야. 폐하친지신지, 즉한실지륭, 가계일이대야.

侍中尙書.長史.參軍, 此悉貞亮死節之臣也. 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시중, 상서, 장사, 참군,

이들은 모두 곧고 어질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킬 신하들이오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하시고 이들을 믿어 주시면

곧 촉한의 황실이 흥륭함을 날을 헤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본포의, 궁경남양, 구전성명어난세, 불구문달어제후,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선제불이신비비, 외자왕굴, 삼고신어초려지중, 자신이당세지사.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신이 본디 미천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 갈며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서 출세할 것을 구하지 않았더니,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낮추시어

세 번이나 신을 초가집 안으로 찾으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셨읍니다.



유시감격, 허선제이구치. 후치경복, 수임어패군지제, 봉명어위난지간,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이래이십유일년의.

爾來二十有一年矣.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힘써 일할 것을 허락하였더니

그 뒤에 국운이 기울어짐을 만나 당양의 장판에서 패군할 때에

선제의 명령을 위급한 때에 받고

오와 함께 하여 위난을 극복하라는 구국의 명을 받은 지가

그 이래로 이제 21년이 됩니다. (207~227)




선제지신근신. 고임붕, 기신이대사야. 

先帝知臣勤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성실하게 조심함을 아시는지라

그러므로 돌아가심에 즈음하여 신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수명이래,숙야우려, 공부탁불효, 이상선제지명.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受命以來,夙夜憂慮, 恐付託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명령을 받은 이래로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하신 일에 효과가 없어서

그것으로써 선제의 밝으심을 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금남방이정, 병갑이족, 당장솔삼군, 북정중원, 서갈노둔, 양제간흉,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奬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이부흥한실, 환우구도, 차신소이보선제, 이충폐하지직분야.

以復興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이제 남쪽이 이미 평정이 되고 무기와 갑옷이 풍족하니

마땅히 삼군을 권려하여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을 평정하고

느리고 무딘 재주나마 힘을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고

다시 한의 황실을 일으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방법이요

폐하께 충성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지어짐작손익, 진진충언, 즉유지. 위. 윤지임야.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 褘. 允之任也.


그 동안 이곳에 남아 나라께 이롭고 해로움을 헤아리

나아가 충성스러운 말을 다하는 것은

곽유지, 비위, 동윤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원폐하,

願陛下, 


탁신이토적흥복지효, 불효즉치신지죄, 이고선제지령.

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약무흥덕지언칙책유지.위.윤등지구, 이창기만.

若無興德之言則責攸之.褘.允等之咎, 以彰其慢.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도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데 실효를 거둘 일을 맡겨주십시오.

맡기시어 신이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곧 신의 죄를 다스리어

그렇게 함으로써 선제의 영 앞에 고하시고

만일 폐하의 덕을 흥하게 할 충언이 없으면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허물을 꾸짖어 그로써 그 태만을 밝히십시오.


 


폐하역의자모, 이자추선도, 찰납아언, 심추선제유조.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폐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시어

좋은 방도를 자문하시고, 아름다운 말은 살펴 받아들이시고

선제께서 남기신 가르치심을 마음 깊이 새겨 좇으시옵소서.




신불승수은감격, 금당원리, 임표체읍, 부지소운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泣, 不知所云.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이제 먼 길을 떠나거니와,

군사를 일으켜 떠남에 즈음하여 표문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나와

무어라 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상)


이 글은 유명한 제갈공명의 출사표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한나라 위나라 때에는 '표'라고 했다.

하은주 시절에는 주(奏)라고 하였다.

 

'상주(上奏)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군대를 거느리고 떠남에 있어

촉의 2대 황제인 유선에게 올린 글이다.

 

 


이는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황제에 대한 여러 가지 훈계를 적어 넣은 명문이다.


서기 227년.

 

공명의 나이 47세.


한수(漢水)에서 주둔 한 후 출발에 즈음하여 올린 글이다.

 

다음해인 228년에 올린 ‘후(後)출사표’에 비해

이는 ‘전(前)출사표’라고도 한다,


나라에 대한 충성과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

그리고 우국의 지성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는 유명한 명문이다.


이 글을 천천히 잘 읽어 보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마치 유서를 읽는 기분이 든다.


위의 공격을 선공(先攻)으로 방어하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삼국의 정립(鼎立)은

결국 위(魏)의 승리와 위를 이은 진(晉)나라의 통일로 끝났다.


공명이 죽은 후 29년 후인

서기 263년에 촉은 위에게 패망한다.


제갈량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인들이 이 글을 명문이라 칭송하면서

“사내대장부라면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장부의 일은 그 성공과 실패를 묻지 않는다

바로 그 뜻 때문이리라.


유비는 이런 승상을 휘하에 두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중국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제왕과 승상이 꼭 서로 역할 분담을 한다.


제 스스로 만사를 헤아리고 독점하여 통할하지 않는 점은

우리도 배워야 할 것이다.


충성의 화신으로 제갈공명이 후대의 추앙을 받은 것은

사마중달의 후예는 나라를 훔쳤으되.(후손 사마염이 진을 세움)

제갈량은 청렴결백하게

오로지 몸과 마음을 자신을 알아준 주군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후일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하여 지나칠 정도로 더 미화되기는 하였으나

인물의 가치는 그가 죽고 난 후에 엄격 확실하게 매겨지는 법이므로

중국인이 아직도 그를 기리는 그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제갈공명이 훌륭한 승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처럼 싸움터에서 별세하지 않았는가!


아무에게나 충무라는 시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갈 량 [諸葛 亮, 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겸 전략가.

초야에 있을 때에도 일찍이 명성이 높아 복룡(伏龍)과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山東省 沂水縣)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181년 태어났다.


15세가 되기 전에 어릴 때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온 제갈량은 스스로 농사를 하고 지냈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원소를 정벌하고 남하하는 조조에게 맞설 수 없던 유비로써는

남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제갈량은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이 되고,

손권도 제갈량의 요청에 응해 유비와 동맹을 맺게 된다.


그리고 손권과 유비는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다.

209년 겨울의 일이다.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한 후에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 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촉의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그의 계책인 삼국정립이 일단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국력과 국세는 너무나 강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운남[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국세의 기울어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수차 중원 토벌을 기획하여

여러번 전선에 나서

위의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陝西省)에서 대진 중에

병몰(病沒)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227년《전출사표(前出師表)》

228년《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충성과 우국의 화신으로 아직도 많은 추앙을 받고 있다.

 

문학작품이 아니면서도 가슴을 울림은 이 글이 그만큼 절박한 심정으로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우국의 충정으로 썼기 때문이다

출처 : 노량진에서..
글쓴이 : 김익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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