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본심평
본심위원 오창익 (수필가)
<본 상>
예심을 거처 종심에 온 작품은 모두 12편이었다. 이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191 님의 『익어간다는 것』 269 님의 『바다의 편지』그리고 288 님의 『작은 새 오카리나』등 3편 이었다. 이들 3편 모두는 기성 문인의 역작들이라 본격수필이 요구하는 구성적 요소나 기능적 요건들을 고루 갖춘 수준작들이었다. 문장의 개성화나 제재의 자기화도 돋보여 모두 당선권에 진입한 우수작들이었다. 하지만, ‘당선작은 각 1편’ 이라는 문학상 규정이 전제되었기에 부득이 ‘공감과 미적(美的) 감동’ 이라는 문예화의 잣대로 가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191 님의 『익어간다는 것』을 최종 당선작으로 선했다.
이 작품은 차(茶)를 제재로 하여 ‘차를 경영하는 일이 곧 인생경영이다’ 란 의식을 주제화 한 창작수필이다. 관조(觀照)나 의미부여의 수법(手法) 또한 매우 돋보였다. 특히나 말미(末尾)에서 보인 “목마르면 차 한 잔, 졸리면 잠 한숨, 그것으로 모자람이 없으련만…”이라고, 주제의식을 압축, 상상 처리한 문장이 백미였다.
<신 인 상>
예심을 거쳐 종심에 넘어온 신인 작품은 모두 14편이었다. 이 중에서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285 님의 『너와집』과 102 님의『삼대(三代)의 공덕』등 2편이었다. 이들 작품도 제재에의 동화나 관조가 돋보였을 뿐만 아니라 의식의 형상화 작업도 매우 정연(整然)하여 2편 모두 당선권에 들고도 남을만한 수작들이었다.
하지만, 본상처럼 ‘1편의 당선작’이라는 규정에 따라 부득이 ‘공감과 감동’이라는 문예화의 잣대로 가름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미적(美的) 감동이 보다 진한 285 님의 『너와집』을 최종 당선작으로 선했다.
『너와집』은 ‘자연 친화(親和)와 자족(自足), 그리고 자적(自適)’이라는 의식을 주제로 굳힌 창작수필이다. 특히 작품말미에서 보인 “도시에서는 자족(自足)을 무능이라 하지만, 시골에서는 자적(自適)이다. 머지않아 스스로 그런 자연으로 회귀하기를 꿈꾸며 다시 유배지로 돌아 갈 때 나도 모르게 아라리 한 소절을 읊는다.”라고, 운치있게 주제의식을 갈무리한 문장이 돋보였다.
『제6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예심평
예심위원 임인택 (수필가)
유 헌 (수필가)
<신 인 상>
예년에 비해 응모자가 늘어났다. 응모작들을 읽다보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보내온 걸로 추정되는 내용의 작품들도 자주 눈에 띄어 6회째를 맞는 목포문학상이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체 작품의 3분의 1정도는 당장 문예지에 실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수준도 높았다. 주제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신세한탄이나 여행담, 지나간 시절의 가족 이야기 등을 평면적으로 나열한 작품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수기手記공모 응모작으로 착각할 정도의 글들도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띄어쓰기나, 단어의 중복, 정해진 글의 분량을 크게 벗어났거나 부족한 경우도 더러 있어 기본을 지키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특별하게 읽어내 훌륭한 작품으로 풀어낸 글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특히 장르의 특성과 장점을 제대로 살려 문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수작秀作들이 글재주를 겨루고 있어 수필의 건강한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문학상의 신인상에 도전하는 문청文靑이라면 주제나 글감 선택에서부터 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참신성과 독창성은 기본이고 본인만의 철학이 깃든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을 창작해야 할 것이다.
<본 상>
작가의 진솔한 삶이 묻어난 아름다운 언어로 옷을 입힌 좋은 작품들, 퍽 감동적이었다.
130여편의 응모작 중에서 15편, 10편, 5편 이렇게 뽑는 다기 보다는 떨쳐내는데 몹시 힘이 들었다. 어떤 작품에 행운이 돌아갈지 모르지만 예심을 통과한 모든 분께 경의를 표한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면모가 보인다. 좋은 작품을 읽다보면 금방 달려가 만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문학성이 결여된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나, 좋은 내용임에도 맞춤법이나 규격에 맞질 않은 작품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적어도 문학상에 응모한 작품이라면 최소한의 예의와 꼼꼼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제6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당선작
「익어간다는 것」
조윤수(전라북도 완주군)
온 집안이 차향으로 가득하다. 때마침 재스민 꽃이 피고 있을 때, 꽃 향이 얼굴을 어루만지듯 스치며, 풋풋한 차향을 피워낸다. 오늘 한나절 따온 찻잎을 마루에 한가득 깔아놓았다. 싱그러운 생잎을 재스민 꽃바람으로 우려 마시는 기분이다. 고요히 차향에 마음을 담그면 다신(茶神)에 대한 은혜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차유진향(茶有眞香), 유난향(有蘭香), 유청향(有淸香), 유순향(有純香), 이렇게 차에는 네 가지 향이 있다고 했다. 겉과 속이 한결같으면 순향, 설익거나 과숙(過熟)하지 않으면 청향, 불기가 고루 머물면 난향, 곡우 전 신기를 갖추면 진향이라 한다. 해마다 서툴게 차를 빚으면서 느끼는 것은, 차와 하나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찻잎은 뜨거운 가마솥에서 온전히 자신을 죽여 도통 다른 몸으로 거듭나는가 하면, 자신의 모습을 일그러트리며 발효 과정을 거쳐 신비한 풍미를 지닌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은 아이일 적에는 성의 구분 없다가 성장하면서 남아는 남자다워지고, 여아는 여성스러워지는 것 같다. 잘 우려진 녹차를 마실 때 첫 잔의 맛을 아리땁고 여리고 부드러운 열세 살이요, 둘째 잔은 벽옥 같은 십 오륙 세요, 셋째 잔은 익은 맛이라고 옛 다인들은 말했다. 익은 맛이란 서른 살 이후 여인의 맛일까. 그 뒤의 잔은 늙은 맛이고 목마름을 달래기도 하고 다른 용도로 쓴다.
오늘 부려놓은 찻잎은 아직 차의 역할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가능성이 충분한 아이들이다. 하룻밤 시들면 발효하기 시작한다. 발효차는 발효가 진행되는 농도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지닌다. 기호에 알맞은 향이 풍겨 나올 때쯤 발효를 멈추면 된다. 전문 시설이 있다면 더욱 좋은 차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형편대로 소박하게 할 뿐이다. 차가 발효하는 동안 찻잎은 형태가 여러 차례 변하면서도, 고유한 자신의 향은 간직한 채, 때마다 다른 묘미로 승화되어 간다. 여리게만 뵈던 찻잎이, 자신의 형체를 변화시켜 그토록 그윽한 향을 낼 수 있음이 신비스럽다.
젊었을 때는 스승에게 차를 배우고 같이 차(茶) 일을 하였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그 일에 파묻혀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내 인생에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 몇 분 있는데, 스승이자 도반이었던 차(茶) 스님도 그중 한 분이었다. 차를 배우면서부터 한 단계 더 높은 삶을 살고자 했던가. 차의 길이 본래면목을 찾기 위한 수행의 도구였을까. 중년에 들어서자 다도의 길을 주위의 벗들과 전하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낙원의 환경을 만들자는 모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네 가지 향이 고루 벤 녹차는 완성해보지도 못한 채, 이제는 발효된 차 맛이 내 마음과 몸에 달갑게 어울리는 것 같다.
저 풋풋한 생잎을 보니 내게도 저렇듯 싱그러운 시절이 있었던가 싶다. 생기발랄했을 아이 때에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혼란스러운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안개 자욱한 길도 지나왔고, 희미한 한 줄기 빛에 희망을 걸고 어두운 터널도 걸어 나왔다. 힘겨운 세월을 건너고 삭히는 동안, 나에게는 어떤 결 맛이 쌓였을까. 분명히 내게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겠지만, 과연 제 맛을 품어왔는지 모르겠다. 뒤돌아보니, 십삼 세까지는 아이였다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여성으로 성장해간 것 같다. 대학 시절은 청춘을 꽃피운 시기였는데, 청년 시기에 익히고 배워야 할 덕목을 다하지 못하였기에 늙도록 철없는 배움을 멈추지 못하는 것 같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는 온전히 어머니로 살았다. 어느 정도 아이가 큰 뒤부터 세상에 눈뜨기 시작했다. 부모로서 살아야 하는 일은 사회적 일원의 책임도 따른다는 인식이 새롭게 다가왔다. 여자도 이제는 남자와 함께 인간으로 성숙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여성스러운 인간 말이다. 이렇게 내 삶의 단계는 배우고 익으며 변모를 거듭해오지 않았나 싶다. 청년기는 여자아이로, 성숙의 시기는 어머니의 삶으로, 그리고 인간의 삶으로…….
사람의 얼굴과 표정이 다양하듯, 속에 지닌 인격과 정서도 각양으로 나타난다. 차를 덖을 때 한 잎이라도 타면 온 솥을 못 쓰게 된다. 모처럼 좋은 녹차도 간수를 잘못하면, 해가 되기도 한다. 차의 발효 과정을 두고 보더라도, 잘못 발효된 차는 원하지 않은 냄새로 비위에 거슬린다. 과정이 중요한 만큼 차는 내버려두지만 않으면 배반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끔 내 인생의 발효는 어느 정도일까? 스스로 물어본다. 뒤 익기(後熟)가 잘된 좋은 보이차를 만나면 마실 때는 별 향미가 느껴지지 않지만, 마신 뒤 은근한 향이 입안에 머문다. 인생도 그렇게 깊이 발효된다면, 무미(無味)하나 여운이 오래 남는 향긋한 맛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차를 경영하는 일이 인생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차 만드는 일은 정성스럽게, 갈무리할 때는 건조하게, 끓일 때에는 청결하게 해야 한다. 정성스럽고, 잘 말려 습하지 않게, 청결하게 하면 다도(茶道)는 다한 것이다. 삶의 경영이 녹록하지 않을지라도 담담히 나아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내는 맛이 아닐까. 이제야 겨우 다도에 입문하는 것 같은데,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다. 비록 육체의 맛은 넉 잔째 우려낸 뒤의 노(老)한 녹차 맛이지만, 정신은 끊임없이 발효하여 성숙의 경지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사이후이(死而後已), 있는 힘을 다하여 여생에 힘쓸 일이다. 찻잎이 익어가는 달금한 향이 집안에 가득하니, 이런 절후 같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이제 조용히 차가 지닌 성품대로 차 생활을 즐기는 일만 남지 않았는가. 목마르면 차 한 잔, 졸리면 잠 한숨, 그것으로 모자람이 없으련만…….
『제6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신인상
「너와집」
김동수 (대구시)
죄라도 지었을까. 유배라도 떠난 듯 너와집은 두메에 있다. 산촌박물관에 전시된 집은 박제일 뿐, 그 영혼을 찾으려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주가곡선株價曲線에서 뛰어내리고 쿵쾅거리는 세상일랑 하루쯤 버려야 한다. 도시를 벗어나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에 유랑민의 노래 몇 소절 뿌리면 좋다.
저만치 누가 온들 돌아오는 사람이겠냐는 듯 너와집은 무덤덤하다.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았으니 허름해도 좋고, 빈틈없는 삶을 바라지 않았으니 허술해도 괜찮다며 매무시를 여미지도 않는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이 없으면 어떻고 물 한 그릇 건네는 이 없으면 또 어떤가. 먹어보고 입어보라는 새빨간 장삿속에 넋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 얄팍한 지갑 걱정이나 마음의 무장일랑 내려놓고 자적自適에 들어본다.
새끼 짊어지고 고개를 넘어 닿은 두메, 햇살 맑은 언덕에 터를 다진다. 나무를 잘라 뼈대를 세우고 흙을 이겨 벽을 쌓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돌을 모아 나지막한 담을 두른다. 가지 닮은 나무 둘 맞대 지게를 만들고 기다란 나무를 낫으로 툭툭 잘라 바지랑대를 세운다. 싸리나무 한 줌 묶어 어지럽게 흩날리는 생각을 쓸어내고, 수수대궁 두엇 꺾어 내면에서 재채기를 일으키는 먼지를 털어낸다. 댕댕이덩굴로 멍석을 짠 다음 그 위에 앉아 말린 옥수수자루로 삶의 뒷면에서 자분거리는 가려움을 긁어도 본다.
화전火田을 일구면 땀 흘린 만큼 소출이 돌아온다. 지주의 횡포를 견뎌야 하는 머슴살이에 비하면 산골살이는 마음이라도 덜 고단했을 것이다. 없으면 만들어 쓰는 일도 산골에서는 재미일 터, 투박한 손맛대로 살림이 되고 소박한 마음대로 일상이 되니, 해가 뜨면 밭을 매고 달이 뜨면 길쌈 매며 자연으로 수렴되는 삶은 그런대로 살만하지 않았을까. 불 지른 산비탈에 감자 심고 수수 심던 어미아비는 평생 너와집 한 채만 이루고 밭 한 뿌다귀에 뼈까지 심었으리라.
사람은 가도 살림은 남아 산골살이를 말없이 전설한다. 망태·삿갓·따비·삼솔·도롱이가 세월의 더께를 쓴 채 벽에 걸려있고, 지게·써레·쇠스랑·고무래는 고단한 노동을 내려놓고 생각하는 조각인 양 깊은 침묵에 들었다. 삐걱거리는 정짓문을 열자 스르릉 가마솥 소리, 토닥토닥 도마 소리,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 소리가 봉인된 부뚜막에는 아궁이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마른 솔가지를 넣고 성냥만 그으면, 모든 것이 화르르 깨어나 무성영화처럼 챠르르 돌아가고 밭 갈러 나간 화전민 내외가 먼지를 툴툴 털며 나타나 밥상을 차려 내게 수저를 건넬 것 같다.
너와집에서 압권은 지붕이다. 도톰한 널판을 너스레 위에 얹고 군데군데 지지름돌로 눌러놓았다. 마음이 가벼우면 숨은 그림도 보이는지, 지붕에 마치 용의 비늘 같은 음영이 어른거린다. 그래, 이 땅에 태어난 사내라면 누군들 천하를 호령하는 용이 되고 싶지 않으랴. 권문세가의 자손도 아닌, 돌담 아래 납작한 민들레처럼 낮은 운명을 타고난 사내는 갑옷처럼 무거운 욕망의 비늘을 떼어 너스레 위에 한 장 한 장 이었을 것이다. 얹고 얹힌, 저 묵직함이 위압으로 느껴지지 않음은 지붕에 무욕이 서려있기 때문이리.
암녹색 기와지붕이 영화를 전설하고 우람한 기둥이 권세를 떠받치는 고택에 비하면 너와집은 보잘것없다. 본디 내 것이 아니기에 돌 한 덩이 나무 한 쪼가리도 잠시 빌려 쓰다가 자연에게 돌려준 집, 너와집에는 아무개가 산자락에 들어 자적한 흔적들이 풍화에 들었을 뿐, 뼈대를 내세우거나 업적을 자랑할 증거는 어느 곳에도 없다. 만약 액자에서 가훈이 내려다보며 훈계하거나 문패가 주인의 이름을 각인하라고 한다면, 내 생각도 네모난 틀에 갇히고 말 것이다.
너와집에 들면 모난 대로 둥근 대로 나 또한 자연이다. 자연의 눈으로 보면 칸칸이 번호가 붙은 콘크리트 육면체는 감옥이다. 반듯하게 재단된 도시에서 규격에 묶이고 위층에 눌려 살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소음과 공해에 시달려 아토피에 걸린 일상은 긁고 긁어도 가렵기만 하다. ‘빨리빨리’에 쫓겨 정신없이 뛰다보면 어느새 빌딩 그림자 길게 눕고, 회식이다 뭐다 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시계바늘은 한 치 오차 없이 남은 삶에서 하루를 차감한다. 가끔 차 한 잔 들고 베란다에 나가면 영혼마저 적출 당하고 박제된 사슴처럼 퀭한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한 스님이 무소유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 바람에 집집마다 무소유라는 책을 소유하고 있으나 세상에는 여전히 욕심이 넘친다. 돈 맛을 본 사람은 돈을 중심으로 돌고, 힘의 원리를 즐기는 사람은 권력 주위를 맴돈다. 가질수록 덩어리는 커지고 또 그것을 지키려 한 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니, 욕망포화의 법칙은 경제학에서 배운 원론일 뿐, 어쩌면 우리는 포화된 욕망에게 영혼까지 구속당한 채 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가볍지만은 않은 삶, 욕심이 지나치면 더욱 무거워지니 무소유는 쓸 만큼만 가지되 영혼까지 소유에 갇히지 말라는 은유가 아니겠는가.
고래 등 같은 기와집, 하늘을 찌르는 빌딩, 살면서 마음속으로 집을 몇 채나 지었던가. 하지만 세상 일이 다 내 마음과 같지 않아서 또 얼마나 허물었던가. 그렇다고 인격을 허문 자리에 양심을 팔아 대궐을 짓는다 한들 꿈자리까지 행복하겠는가. 물질을 추구하다가 외려 더 귀한 것을 놓치지 않았는지.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만 지향하다가 지명知命의 고갯마루에서 돌아보니 알겠다, 고급 차·넓은 집·비단 옷, 누구나 목표로 삼는 그것들은 몸을 편안하게 하는 도구가 될지 모르나 영혼까지 행복하게 하는 삶의 제재題材는 아님을.
산골에서는 무소유가 나를 이롭게 한다. 가질 수 없기에 다툼이 없고 늘 거기 있기에 고단한 노동이 필요치 않은 것, 곳간에 쌓아둘 수 없지만 아무리 써도 동이 나지 않는 그것들은 삶을 향기롭게 하는 제재다. 새소리, 물소리가 흐르고 순서를 잊지 않고 들꽃향기 불어오는 마음의 본향에 들면, 봄비 토닥이는 삼짇날 밤 도랑물 구르는 소리는 얼마나 간지러울 것이며 칠석날 별들의 동화는 얼마나 순수할 것이며, 시월 저녁 단풍의 탄성은 또 얼마나 붉을 것이냐. 눈 내린 설날 아침 그 눈부심은 눈을 감지 않고서야….
한동안 나를 묵직하게 옥죄던 상념을 풀어놓으니 저기 날아가는 새가 내 마음인 양 싶다. 장딴지 살 빼고도 모자라 뼈까지 깎아 하늘을 날 자격을 얻은 새처럼 이제는 물질문명의 중력에서 벗어나 바람 같은 자유를 갈망하나, 스스로 욕망이라는 유배지로 떠난 죄, 아직 형기刑期가 남은 자유혼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문짝 삐걱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노루가 줄행랑치다가 문득 멈춰 뒤돌아보고 피식 웃거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바람만 쉬어갈 뿐, 내가 떠나면 너와집에는 새 떠난 둥지처럼 그리고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짓다 만 기와집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너와집 한 채 지어보련다. 타인을 경계하는 담장을 헐면 마음이 열리고, 남을 겨누는 창이며 위압을 주는 감투며, 몸을 무겁게 하는 무장까지 내려놓으면 삶도 가벼워지지 않겠나. 산골에서 태어나 흙·돌·나무와 살을 부대끼며 자랐기에 자연으로 삶을 짓는 법을 서툴게라도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욕심만 버린다면 너와집 하나만으로도 모자람이 없지 않겠나.
도시에서는 자족自足을 무능이라고 하지만 산골에서는 자적自適이다. 스스로 그런 자연으로 회귀를 꿈꾸며 다시 유배지로 돌아갈 때 나도 모르게 아라리 한 소절 읊는다. 집이야 많다만 기왕이면 너와집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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