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2015년 4월 3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늙은 마도로스 "박중성"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에 공감하기에 이곳에 옮겨본다...
(참고 ; 4월 6일 이곳에 옮긴후 비공개로 두었다가 6월 20일 공개 함)
부활한 유령선
1964년 2월 10일 일본 도쿄 항구에서 홍콩에
적(籍)을 둔 일본계 화물선 룽화(龍華)호가 출항했다. 이 2700t급 화물선은 폐선(廢船) 대상이었다. 녹이 슬다 못해 선체는 곳곳에 구멍이
났고 바닷물로부터 녹을 막을 페인트는 다 벗겨져 있었다. 너무 낡아서 일본인 선원 누구도 승선을 꺼리던 배였다. 잡화를 가득 실은 '유령선'이
기약 없이 출항했다. 선장 김기현과 기관장 이상래를 비롯해 선원 28명은 전원 한국인이었다. "못 돌아올지도 몰라." 항구에 있던 선박회사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두 달이
지났다. 룽화호로부터 도쿄항으로 귀항 중이라는 무전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항구로 마중 나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선원들이 거친 파도 위로
로프에 의지해 망치로 녹을 떨어내고 페인트를 칠하고 부서진 선실들을 말끔하게 치워놓은 게 아닌가. 유령선이 부활한 것이었다. 훗날 선원들이
말했다. "우리가 잘한다는 걸 보여줘야 또 취직할 수 있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배를 지켜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바다에 목숨을 걸고서 달러를
벌어온 사내들, 우리는 이들을 '송출선원(送出船員)'이라고 부른다.
영주동 사내 박중성
꼬장꼬장한 아버지 덕에 박중성은 배를 곯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온갖
뇌물 상자를 마다하고 살았다. 국장급까지 올라갔지만 평생 관사(官舍)에서 산 터라 집도 절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는 6·25전쟁이 터지고
아내와 8남매를 데리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부산역이 내려다보이는 영주동 달동네에 터를 잡았다. 박중성이 열한 살 때다.
대한청년단 본부도 영주동에 있었고 극장 기도, 항만 관리를 하는 거친 사내들이 영주동에 많이 살았다.
아버지는 친구가 운영하는 광복동 동아극장 건너편 신선한의원에서 수은을
섞어 임질약을 만들어 팔다가 중성이 스물한 살 때 중풍으로 하늘로 갔다. 돈 버는 재주가 없었던 아버지는 집안 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거친 영주동 사내들이라면 대개 그러했듯 중성은 강원도 화천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공장에 다니다가 배를 탔다. 1970년 스물여덟
살이었다.
첫 배는 원양어선이었다.
인도양까지 가서 참치를 잡는 7척 선단(船團)이었다. 배 크기는 90t이었다. 90t, 어선이 아니라 보트였다. 생각해보라. 배마다 선원
20명이면 꽉 차는 일엽편주(一葉片舟) 일곱 척이 망망대해에서 헤매는 장면을. 파도와 전투를 하고 잠과 싸워도 고기는 잡히지 않았다. 1년이 채
못 가 회사는 부도가 나고 선단은 빚쟁이들이 가져갔다.
이듬해 중성은 집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뭍에 온 김에 다섯 살 아래
이웃집 동생과 결혼을 했다. 동생 이름은 오순덕이었다. 젊은 선원 중성과 더 젊은 아내 순덕은 다짐했다. '돈 벌어서 행복하자.' 다짐과 함께
중성은 곧바로 다시 바다로 갔다. 중성은 기관원으로 배를 탔다. 기관원. 쉬운 말로는 보일러에 불을 때는
화부(火夫)다.
첫딸 소현이 태어나고
이어서 둘째 아들 민철이 태어났다. 두 아이의 탄생 소식을 중성은 브라질 해상에서 모스부호로 알게 됐다. 아이들의 이름은 옥편을 뒤져 지었다가
한 달 뒤 뭍에 상륙한 뒤 알려줬다. 그리고 각각 1년이 지나서 집에 갔더니 소현과 민철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43년 동안 배를 탄 이
늙은 마도로스는 그게 가슴 아프다. 왜 배를 타서 나는 아이들과 지금도 친하지 못한 걸까.
송출선원과 파독 광부와 간호사
1960년대 대한민국. 사람은 많았고 돈은 없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국가를 세워야 했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샀고 수많은 남녀 청춘이 서독으로 날아가 막장을 파고 시체를 닦았다.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 사업이었다. 한국파독협회에 따르면 1965년부터 10년 동안 광부와 간호사 1만9443명은 모두 1억153만달러를 한국으로 송금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조국을 부흥시킨 영웅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1960년 6월 부산항에 입항한 그리스 선박 라밀레프레스호의 통신장이
병으로 하선했다. 통신은 반드시 필요했기에 선장은 부산항을 수소문해 대한해운공사 통신장 김강웅을 승선시켰다. 월급은 330파운드로 해운공사
월급의 3배였다. 김강웅은 2년 반 동안 배를 탄 뒤 귀국했다. 간간이 개인적으로 이어지던 외국 배 승선은 1964년 유령선 수준의 룽화호를
시작으로 본격화됐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선박 단위로 선원 송출이 이뤄진 것이다.
선원은 넘치고 탈 배는 없던 시절 억센 부산 사내들은 너도나도 외국
화물선에 올랐다. 일본·그리스·미국 같은 해양국들은 그때 이미 선원 부족을 겪고 있었다. 배 없는 나라의 선원들은 배가 남아도는 해양국으로
떠났다. 어선을 타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대륙 간 화물을 나르는 상선이었다.
1964년 28명으로 시작된 송출선원들은 이듬해부터 10년 동안
1억6700만달러를 한국으로 송금했다.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한 1977년에 송출선원 1만3462명이 부친 돈은 8800만달러였고,
500억달러를 달성한 1988년에는 5억1600만달러였다. 2014년까지 9700명 넘게 바다에서 죽었다. 목숨을 걸고 바다와 싸운 그들을 육지
사람들은 '마도로스'라 부르며 낭만시했다. 아니면 '뱃놈'이라고 눈을 내리깔거나. 박중성도
마도로스였다.
미사일 날아다니던
아미르 항구
유령선의 화려한
부활을 본 외국 선박회사들은 한국 선원들을 즐겨 채용했다. 면서기가 한 달에 5000원을 받을 때 송출선원은 첫 승선에 3만7000원을 받았다.
부산 사람들은 "배를 타면 가문을 살린다"고 했다. 1년만 죽을 고생 하면 집이 생겼으니까. 죽을 고생이란 게 다른 게 아니었다. 유령선을
살려내듯 일하면 되는 것이었다. 배가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폭풍우 속에서도 선체의 녹을 벗겨 내고 페인트칠을 하고 규율을 준수하며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잘 못한다고 재계약이 안 되면 집에서 기다리는 마누라와 자식들이 먹고살 수 없으니 화물 기중기에 부딪혀 팔목이 부러져도 기간
내에 화물을 하선시키는 것이었다. 해적 떼를 피하고 머리 위를 날아가는 미사일을 보면서 심장을 쓸어내리며 목숨보다 화물을 먼저 걱정하는
것이었다.
지구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지독한 가난 속에서 그만큼 혹독한 군대를 제대하고 독기를 가득 품은 대한민국의 젊은 마도로스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해양국들은 그 한국 선원들을 선호했다. 한국 선원만 타는 단일선도 있었고, 다국적 선원이 타는 혼승선(混乘船)도 있었다. 미국에서
고철을 수집하던 회사 슈네처는 한국 선원들이 탄 유령선이 변하는 걸 보고 아예 라스코라는 해운 회사를 설립해 한국 선원만
고용했다.
1980년 이라크·이란
전쟁이 터졌다. 중성이 탄 배가 방콕에서 쌀을 싣고 이란 아미르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쌀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한 달 기다리는 동안
폭격기들이 항구 위로 미사일을 쏴댔다. 어렵사리 쌀을 내린 뒤에도 전투기 한 대가 저공 비행하며 배를 한참 쫓아왔다. 아미르항을 떠난 배는
남아공 더반항에서 사탕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을 떠난 배는 다시 방콕에서 쌀을 싣고 아미르항으로 되돌아갔다. 선주(船主)는 전쟁 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배를 항구 외곽에 정박시켰다. 결국 수당은 받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철광석을, 영국에서는 온갖 잡동사니를, 프랑스에서는 화장품을
가득 싣고 중미 카리브해로 갔다. 한 번 항구를 떠나면 다음 항구까지 보름에서 한 달까지 걸렸다. 그렇게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고 나면 1년이
가고, 중성은 브라질 앞바다에서 득남 득녀 소식을 들었다. 1978년은 박중성에게 잊고 싶은 한 해였다. 박중성은 독일 선박과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뉴올리언스를 출발한 배는 쌀을 싣고 일본으로 떠났다. 태평양 위에서 곡물창을 닫던 한국 선원이 30m 아래로 추락해 죽었다.
중성은 자기 손으로 청년의 옷을 벗기고 염을 하고 관에 못을 박았다. 생살에 못질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난한 유족은 아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시신은 도쿄항에서 화장했다.
항구에
내려 일주일 정도 쉴 때는 좋았다. 가족에게 줄 선물도 사고, 오랜만에 술집도 갔다. 젊은 선원들은 걸핏하면 거친 싸움을 벌였지만 대개 취중
실수로 넘겨주곤 했다. 바다는 훨씬 거칠었으니까.
일본에서 미국으로 가는 도요타 승용차 화물선에서는 높이가 2m도 안 되는
화물칸 해치에서 떨어진 청년이 날카로운 쇠사슬에 두개골이 깨졌다. 긴급 무선으로 근처에 항해하는 선박 의사를 찾았다. 소련 배가 보낸 구급
보트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승선했다. 무시무시한 공산국가 여 선원들은 곧바로 사망 선고를 내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바람에 날리는 로프에 목이
감기고 하역용 기중기에 척추며 팔이 잘리는 마도로스들도 숱하게 보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카리브해에서 사이클론 파도에 갑판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며 지옥문이 열렸다. 모든 물체를 고정하고 메인 엔진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극도의 긴장 속에 배는 폭풍을 벗어났다. 지옥 길 같은 이
항해를 뱃사람들은 '황천 항해'라고 부른다. 중성은 어떻게 배가 프랑스까지 가서 어떻게 하선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늙은 마도로스와
대한민국
공식 집계가 시작된
1971년 144척이었던 송출 취업 선박은 1987년에 2534척으로 절정에 달했다. 송출 첫해인 1964년 55만7000달러였던 선원들의 송금
액수는 그해 4억6900만달러였다. 송금 액수는 1991년 5억3600만달러까지 가기도 했다. 선원들이 목숨 걸고 벌어온 돈은 대한민국이 나라
형색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울올림픽이 있던 해인 1988년 4만2471명으로 절정이었던 송출선원은
2012년 현재 3551명으로 줄었다. 나라가 잘살게 되고 육지가 부유해지면서 더 이상 청년들이 고된 선원직을 원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해양
국가를 꿈꾸는 대한민국 상선과 어선에는 미얀마와 베트남 청년들이 일한다. 박중성은 섭섭하다. 국가에 봉사했다는 덕담까지는 아니더라도 뱃놈이라고
천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송출선원들은 감쪽같이 잊히지 않았는가.
박중성은 짧아야 1년에 한 번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 다시 배를 안
탄다고 다짐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선원수첩을 챙겼다. 그가 말한다. "먹고 살아야 했다. 육지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배운 도둑질이 배
타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육지에서 친지들에게 돈 떼이고 사기당한 선원들은 셀 수도 없다.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가족과도 불화가 잦았다.
마도로스들은 뭍에 적응하지 못했다.
박중성은 그 생활 끝에 부부가 사는 아파트와 아들 장가갈 때 혼수로 줄
작은 아파트 하나, 그리고 작은 상가를 마련했다. 공식 집계가 시작된 1980년부터 2013년까지 박중성은 모두 35개 상선을 타고 대양을
누볐다. 그는 '기력과 기억력이 쇠해졌다고 스스로 느껴서' 배에서 내렸다고 했다. 화부로 시작해 기관장으로 하선한 늙은 마도로스 박중성은 지금
일흔세 살이다.
부산 영도에 있는 순직 선원 위령탑 앞에선
글의 주인공 마도로스 박중성..
[박중성이 말합니다]
나이 스물여덟에 배를 타서 일흔하나에 내렸습니다. 햇수로 43년입니다.
아쉬움이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아들 민철이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할 말이 없습니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집에 들르면 민철이를 혼낸
기억밖에 없습니다. 속뜻은 그게 아닌데, 제 입에서는 그저 '공부해라'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고요. 내가 바다에 있을 때 집을 지키며 또순이처럼
일한 아내 순덕이가 그저 고맙습니다. 이제 늙어서 기력도 없고 기억력도 떨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이 나라 해양 국가라지요? 우리 선원들이 익힌
기술과 경험이 그런 나라를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 뱃놈들, 기억해주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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