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로가(嘆老歌)
- 不在其位, 不謨其政
조윤수
희미한 태양이 구름 사이에 나타난다. 주위를 살핀다. 처음 왔을 때와 반대인 사임리 쪽으로 들어와서 청련암에서 쉬게 되었다. 초행 때와 달리, 사인암(舍人岩) 앞으로 흐르는 남조천의 구름다리 반대편이다. 사인암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려면 구름다리를 건너서 갑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여름이나 단풍철이라면 나무숲과 어울린 절벽이 아름다웠겠지만, 기암절벽만 오롯하게 그 맨살이 드러난 초겨울도 좋다. 오히려 낙엽을 떨군 나목들의 가지 사이로 암벽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늘한 모서리를 칼처럼 벼리고 있는 절벽을 오직 소나무만이 지키고 있다. 밝은 날 자세히 살펴보니, 사인암을 품고 있는 산을 받치고 있는 뼈대 바위들이 많다. 빼어난 작품 하나가 있으면, 주위에 비슷한 작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가의 작은 둔덕에 우탁(禹倬) 선생의 기적 비가 소나무 세 그루 사이에 서 있다, 아침 산책을 하다가 둑 아래 한 소나무 밑에 시조 한 수가 새겨진 선돌을 만난다.
춘산春山에 눈 노기는 바람 건듯 불고 간듸 업다
저근덧 비러다가 머리우희 불이고져
귀밋티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가 하노라
우탁 선생의 시조 한 수다. 안내판을 보니, 우탁(禹倬)(1263~1342년) 선생은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태생이며 호가 백운당, 시호는 문희(文僖)이고, 후세에 역동(易東) 선생이라 불리었다. 조선 시대 성종 때 임제광이 단양군수로 재임할 때 선생을 추모하여 기암절벽을 사인암(舍人岩)이라 불렀다. 고려 말, 우탁 선생이 정4품 ‘사인’ 벼슬에 있을 때 이곳을 사랑하여 자주 휴양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아하! 그래서 사인암이구나!
우탁 선생이 사인 감찰 벼슬에 있을 때 충선왕의 부왕의 후비와 간음하는 짓을 하자 백의(白衣)로 도끼와 거적자리를 메고 대궐에 들어 소를 올려 간언했다고 한다. 왕의 곁 신하가 그 소를 펴들고 감히 읽어 내려가지 못하였다. 이를 지부상소(持斧上疏)라 일컫는다. 신하도 임금도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우탁 선생의 절의(絶義)와 곧음의 정신을 나타내는 바위라는 뜻이었구나. 과연 그렇다. 70여 미터나 된다는 절벽의 모서리는 날카로운 장 도끼를 방불케 한다. 서슬이 퍼런 바람결이 느껴진다.
우 선생의 충의와 대절(大節)은 천지와 산악도 움직일 만하고 경학의 밝음이나 진퇴의 정당함이 뛰어나서 후학의 사범이 되어 백세에 묘식(廟食)을 할 분이라고 ‘역동서원기’에 퇴계 선생이 썼다고 한다. 역동(易東)이란 이름도 중국의 역(易)을 한 달 만에 익혀서 동(東)으로 가져왔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두 개의 바위에 고어와 현대어로 새긴 우탁 선생의 탄로가嘆老歌가 기막히게 절절하다. 청구영언에 나오며 교과서에도 나온다는데 내 기억에는 없으나 이 시조가 귀에 낯설지는 않다, 이제 우리도 백발이 서리어 오는 즈음이라 참으로 가슴을 치는 시구가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세월, 늙어가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다만, 젊다면 저 칼날 같은 정신을 써먹을 수나 있을까.
사인암 가까이 가려면 마을 쪽에서는 지금의 청련암으로 들어가야 한다. 청련암 역시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었으나 1954년 현 위치로 옮겨와서 사인암 뒤에 삼성각을 짓고 승려의 수련장으로 사용한다. 청련암 모서리를 돌아가니 청정수가 흐른다. 한 사발 들이키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기이하게도 사인암과 그 뒤의 절벽 사이 좁은 틈새에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앞에서 볼 때는 전연 그 뒤로 해서 절벽 위를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바윗돌을 쓰다듬듯 올려다본다. 마치 파리한 비단으로 바윗돌을 감싸서 차곡차곡 비딱하게 혹은 길쭉하게 쌓아놓았다. 어떤 건축가나 조각가가 저리도 추상화같이 쌓고 조각할 수 있을까. 자유분방한 형태의 탑이다. 추사 김정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그림 같다고 했다.
계단을 오른다. 가파르고 좁아 조심스럽다. 입구에 세모난 선돌에 다른 시조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청련암에서 만든 모양이다. 역시 우탁 선생의 탄로가 한 수.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나의 속셈을)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세월을 막으려는 의지보다 더 빨리 와버린 백발이다.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어찌 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으로 가로막을 수가 있단 말일까. 고졸한 선비의 풍류가 아닐 수 없다. 늙는 줄도 모르고 살다 보니 이렇게 백발이 서리고 있으니. 현대 사회는 백발도 검게 하고 얼굴의 주름살도 없애는 기술이 있는 것을. 하지만, 흰 머리칼을 염색하고, 주름을 편다고 한들 그 사람에 서린 나이를 어찌 감출 수 있으며, 어찌 기력을 젊게 돌릴 수 있단 말인가. 고고한 선비의 정신과 감성이 묻어난 인간미를 느낀다. 고려 말의 이 시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로써 국문학사에 길이 남아 있는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계단을 끝까지 올라 삼성각에 참배하고 한숨 돌린다. 삼성각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본다. 절벽 끝의 상판 바윗돌이 바로 눈앞이다. 삼성각의 지붕 바로 위에 걸쳐져 있다. 네모난 떡판 같기도 하고, 바둑판같은, 탑 끝의 상륜부에 오른 듯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희어진 소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아래가 멀게 느껴진다. 흐르는 물줄기를 즐기면서 바둑판을 앞에 놓고 있는 선비처럼 보이기도 한 소나무다. 우탁 선생의 표상이라도 될까. 이곳을 자주 찾은 우탁 선생과 후대의 시인 묵객들이 와서 즐겼을 풍경을 상상해본다. 봄여름 가을의 풍치는 더할 나위가 없었겠다. 싸늘하게 날카로워 서릿발같이 고매한 선비의 절미(絶美)에다 옷을 입히면 어떨까, 어느 철 다시 오고 싶다. 막대와 가시덩굴로 막을 수 없는 길을 백발이 가로막을까 몰라.
요즈음에는 새 머리칼을 심기도 하고,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를 성형도 한단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란 착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 한다. 그래서 돈 앞에 무릎을 꿇고 돈줄에 서는 돈을 신으로 우러러 쫒는다지 않는가. 탄로가를 읊기보다 탄식 가를 부를까 한탄 가를 부를까.
정치판이나 기업 판이나 사람이 만든 조직에는 돈과 권력이 신인가 보다. 신은 신인데 귀신임에 잠시 뒤에는 헛것임이 증명되지 않는가. 정치인들의 모습이 그러하며 돈 귀신의 노릇에 눈멀어 ‘항공기 회향’ 사건을 일으킨 아무개 항공사 부사장일 같은 귀신 장난이 많은 세상인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예술분야라고 뭐 다를까. 분명 사인암이 말하는 뜻은 제정신을 차리라는 말이다.
不在其位, 不謨其政 (부재기위, 불모기정). 논어에서 배운 이 말이 시대를 넘어 오늘에도 얼마나 적격한 말인가. 가슴 깊이 닿으면서 그 누구, 어디에도 적용되는 말인 것 같다. 우탁 선생이야말로 벼슬에 있을 때 죽음을 각오하며 임금의 부당함을 상소했고, 자리에 물러났을 때 지방으로 칩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 자리에 있을 때 월권 하지 않았으며, 물러난 뒤에 정사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고 관련도 없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만 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 말만 하기 좋아하는 세상이란다. 때때로 남의 일을 씹는 일을 볼 때도 잦다. 나 또한 그에 응대할 때도 있지 않은가. 새삼스레 삼갈 일임을 챙긴다. 내 일상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시정의 일을 말할 수 없음이다. 모르는 일은 전문가에게 묻고 배우고 직접 관찰하고 체험할 일이요. 알아도 다 말하지 못할 일이 많다. 그 자리의 소임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 사람답기가 쉽지 않다. 늙고 힘없어도 꼿꼿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조용히 자기의 일을 할 뿐.
비단으로 싸인 듯한 바윗돌들. 비단이 세월에 벗겨지기도 하고 찢기기도 했다. 긴 세월 옷 벗겨진 맨살의 돌까지 모두가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풍모와 정신을 품고 있는 사인암의 절리(節理)가 자꾸만 떠오른다. 스산한 소식이 많은 이 세모에. (2014년 12월)
단원 김홍도의 사인암도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 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나의 속셈을)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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