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다솔사 경내

차보살 다림화 2016. 7. 26. 17:26

 

 

 

 

 

 

 

민족정신 일깨운 다솔사의 안심료(安心寮)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 인연이 깊은 절로 한용운 선생과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의 안심료에 기거했다고 한다.

한용운 선생은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사찰 내 안심료는 만해가 머물면서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문영빈, 오제봉, 설창수, 강달수, 이기주 선생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선언문 초판을 집필한 곳이다.

한용운 선생의 회갑 기념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심었다는 황금편백은 안심료 앞 마당에 15그루 중 7그루만 남아 아름드리가 되어 황금빛으로 곧고 푸르게 빛나고 있다.

또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안심료에서의 생활을 통해 등신불이란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를 찾은 것은 1937년 봄으로 다솔사 주지 효당 최범술 선생이 문맹퇴치를 위해 절 아래 마을에 세운 학당의 야학 교사로 합류했다.

5년 여 다솔사에 거주하며 마을 어린이와 여성, 심지어 머슴에게까지 우리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그 후 일제탄압이 힘들어 서울로 올라간 선생은 사상계에 등신불을 싣는다. 다솔사 주변 이야기를 작품 속에 많이 담았던 김동리 선생의 제자들도 근처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다솔사의 주지였던 효당 최범술은 우리나라 최초의 다도(茶道) 개론서인 『한국의 다도』를 저술했다.

일본식 다 법(茶法)에 지나치게 연연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효당이 꺼져가던 우리 차 문화의 불씨를 지핀 차인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극락전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무량불 이라고도 하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을 품은 서방정토 세계의 부처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건립된 이 극락전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과 소실을 거쳐 1910년대 중건한 것이 지금에 전하고 있다.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 좌우 측의 창호와 머름, 벽체의 설치가 특이하다.

 

다솔사 웅진전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149호이다.
웅진은 아라한과 같은 의미의 불교 용어로 웅진전은 달리 나한전으로도 불린다.
나한 혹은 아라한은 부처님을 따르던 수행자들로 최고 경지에 이른 스승들이며,
이곳 웅진전에서는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창건된 원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이후 160년(숙종6)에 죽마 대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그 건물도 노후화하여 1930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다시 중수한 것이 지금 전하고 있다.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에 들보 3량으로 조성된 이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마감되어 있다.

 

 

 

 

적멸보궁 뒤편에 위치한 사리탑

부처님 사리탑 참배를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참배 방법은
연화대 차(茶) 물에 손을 3번 담가 몸을 청정하게 한 후 탑전에 오르나.
호신불을 수지 합장하고, 사리탑전에 참례한 후 사리탑을 오른쪽 시계 방향으로 3번 돌면서 소원을 기원한다.
 

적멸보궁은 원래는 대웅전이었으나 1979년 오른 편에 있는 응진전을 수리하다가

탱화 뒤 벽에서 사리가 발견되어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개축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다른 적멸 보궁들에 보통 불상들이 없는 데 반하여 이곳에는 잠든 듯 기대어 있는 와불이 모셔져 있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하던 것이 편의에 따라 전각을 짓게 되었으며

그 전각은 법당이 아니라 예배 장소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았다.

다만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 행위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다.

  

적멸보궁 가운데는 불상(佛像)을 전혀 모셔놓지 않은 있는데 바로 그곳이 적멸보궁이다.

법당 안에는 단(壇. 戒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이다.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 또는 보궁이라 하는데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또한 뒤쪽 투명 유리를 통해 사리탑이 보이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남기고 가는 발자국, 가지고 가는 추억

다솔사 주변에는 삼나무, 비자나무,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러나 소나무가 많아서 다솔사가 아닌, 많을 다(多), 거느릴 솔(率)자를 쓰는데 ‘많은 불심과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주산인 봉명산의 모습이 장군이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기에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의미다.
다솔사에 들어가는 초입의 언덕길 소나무 숲 사이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는 바윗돌이 있다. 조선시대 고종 임금 때 경상감사가 다솔사라는 명당에 선영을 안장하려하자 스님이 주민 탄원서를 임금에게 올려 분묘를 안치하지 말라는 어명을 받아 저지했던 징표다.
우리나라에 있는 봉표나 금표 23개 중 다솔사의 고종임금이 내린 봉표는 다솔사는 누구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좋은 명당, 길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사한 글씨라서 더 유명하다.
특히 다솔사는 군립공원으로 주민들의 자연사랑 애착심으로 상권을 들이지 않아 상술로 얼룩진 사찰 앞 풍경이 없어 소박함이 더 정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책길에 쓰여 있는 남기고 가는 발자국, 가지고 가는 추억이란 정겨운 푯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다솔사 주변은 야생 차밭으로 가득 차 있다.

2~300년은 족히 됐을 법한 야생 차나무 밭이 다솔사를 감싸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자생하는 차밭도 많다. 여기에 효당 선생이 다솔사 주지로 있으면서 주변에 차나무를 직접 심고 돌보며 차를 마셨다. 효당 선생이 다솔사 주변 1㏊가량에 재배한 차나무에서 반야차를 만들어 보급한 차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1973년 초판 발행된 한국의 다도는 현대 차 공부의 표본이 되고 있으며 1977년 다솔사에서는 한국 최초의 차인 모임도 발족됐다. 다솔사를 찾으면 말 그대로 우리 차 문화를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다솔사 주지 혜운 스님은 "다솔사는 우리 민족이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의 산실이었다."며 "앞으로 한용운 선생과 김동리 선생이 걷던 오솔길을 발굴하는 등 사찰환경을 정비하고 정신문화의 산실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겠다"는 꿈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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