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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기행
“내 인생의 최고의 전성기에 문득 길을 잃고, 뒤를 돌아보니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르네상스를 열었던 인문학자요, 시인이었다는 페트라르카의 시 구절이라던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악 경관을 가진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산 정상에서 아름다운 산, 바다, 거대한 가르다 호수를 바라보며 감탄하지만 정작 인간의 본질은 보지 않았다. 페트라르카의 성찰이었다. 르네상스는 그렇게 산에서 잉태되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시대, 창조의 시대를 만날 수 있을까?
르네상스가 바로 그런 시대였다. EBS를 통하여 연세대학교 김상근 교수의 안내로 르네상스미술 기행으로 초대받았다.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때 늘 흥미로웠던 분야는 르네상스 미술이었다. 피렌체라면 르네상스의 고향이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서양미술을 이해하며 그 의의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서로마제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중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암흑의 시대였다.
르네상스의 서막은 시에나에서 시작한다. 시에나 초기 역사의 중심지로 현 시에나 시청사인 푸블리코 궁전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광장 중의 하나인 캄포 광장에 있다.
르네상스의 초기 씨앗을 어느 도시가 뿌리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된다. 팔라초(중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시대에 건립된 정청(政廳)이나 규모가 큰 귀족의 개인 저택) 푸블리코 청사의 건축 자체가 중세를 대표하는 고딕식의 건축물이다. 14세기 초에 고딕식 건물로 1층은 시청사이며, 2,3층은 시립미술관인데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푸블리코에 들어가면 치열했던 경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에 대한 알레고리> 암브로조 로렌체티 (Ambrogio Lorenzetti 1290-1348)의 연작을 본다. 중세시대에 피렌체와 시에나는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래서 너무 희생이 많아져서 협상을 맺기로 했다. 시에나와 피렌체에서 전쟁을 하지 말고 각 도시에서 기사가 한 명씩 출발하여 만나는 장소를 국경으로 정하자고 했다. 아침에 가장 먼저 우는 닭소리를 듣고 피렌체와 시에나에서 기사가 달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만나는 지점을 국경선으로 하기로 협정을 맺은 거다. 피렌체 사람들은 검은 닭을 선택했다. 그리고 굶겼다. 어떻게 되었을까? 시에나 국경선 12Km 지점까지 와서 두 기사가 만나게 된 거다. 피렌체 사람들의 기지를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아시시는 성프란체스코의 도시로 유명하다. 바로 성프란체스코 대성당이 있다. 시에나에서 아시시로 가는 길은 푸른 들판이 펼쳐진 평야에 오밀조밀한 농경의 마을이 전개된다. 예의 붉은 지붕을 한 주택이 들판 가운데 점점이 박혀 있다. 마을과 들녘을 가르는 가로수가 울창하다. 유럽은 애초부터 그림 그리듯이 도시를 조성했는지, 주택의 벽채는 하얀 벽에 붉은 색조여서 한 폭의 그림이다. 아씨시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곳으로 로마제국 시대부터 번영한 도시로 대성당은 13세기 건축된 로마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성프란체스코 대성당에는 1226년 임종했던 성프란체스코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내 40대, 인생의 전성기 때, 길을 잃었던 저 시인처럼 정신의 자유를 찾았던 시기. 지금 생각하면 어쩜 새로운 빛을 향하여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기 가톨릭 신앙을 하던 때, 성프란체스코의 삶, 그중 어린시절의 성프란체스코가 자유를 위해 다 벗어던지고 들녘과 산야를 헤매던 시절을 보고 공감했던 때가 있었다. 아씨시의 풍경을 보면서 성프란체스코의 삶의 단면에서 감동했던 때가 떠올랐다.
성스럽고 웅장하고 근엄한 대성당 안에는 로렌체티와 조토(Giotto)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서양미술사 공부하면서 귀동냥했던 미술가들이다. 두 사람은 각각 시에나와 피렌체를 대표했던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들이다. 로렌체티와 조토의 사이에서 그리고 시에나와 피렌체 사이에서 어떤 일이, 어떤 경쟁이 치러졌을까? 그 현장을 본다. 봄이 오는 기쁨을 즐기는 아씨시 주민들의 축제에서 느낄 수 있다. 아시시 지역의 두 마을이 경기를 펼친다. 마그니피카와 노빌리시마의 두 마을 주민들이 행진하며 중세시대를 재현하고 합창을 겨룬다.
성프란체스코가 묻힌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로마가톨릭 순례지이다. 대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 중세시대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치마부에의 작품, 검은 도포를 입은 성프란체스코 수도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치마부에(Cimabue) (1240(1250)-1302)는 피렌체 출신이며, 로마에서도 일했고 성프란체스코 대성당에서 <성모전>, <묵시록>, <그리스도의 생애>, <성프란체스코 생애> 등의 벽화 장식에 종신했다. 지오토의 스승이기도 했다.
성당 내부는 벽과 천장까지 성서의 내용의 벽화로 화려하고 근엄하게 장식되어 성스러운 분위기로 압도될 듯하다. 이곳에서 조토(Giotto)는 왜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지 확인한다.
조토는 상상의 세계, 신화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본 것을 작품으로 남김으로써 인간의 관점을 중시하는 르네상스의 기초를 세웠던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그림이 등장했다. 슬퍼하는 얼굴, 기뻐하는 얼굴, 그리고 내면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얼굴들이 표현되어 있다.
<산다미아노에서 기도하는 성프란체스코>, 성프란체스코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화 연작으로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eone) 작품이 등장했다. 14세기는 전쟁의 시기였다. 피렌체와 시에나의 전투였다. 단순하게 황제파와 교황파의 대결이 아니다. 예술의 대결이 일어난 것이다. 대성당 지하층에 있는 로렌체티의 천사와 달리 조토는 울부짖는 천사의 얼굴에서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시에나는 가고 피렌체가 르네상스 미술의 고향으로 등장하게 된다.
오! 피렌체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 내륙에 위치해 있다.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거리 곳곳에서 천재들의 이야기와 찬란한 걸작을 만난다. ‘꽃의 도시’ 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도시. 이 도시에서는 누구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안내자도 이 도시에서는 사랑을 느낀다고 한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났던 곳. 미켈란젤로가 그의 예술 혼을 마음껏 불태웠던 곳.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같은 철학자들이 학문의 자유를 누렸던 곳. 메디치 가문의 자비로운 후원이 있었던 곳. 시민들의 자유가 보장되던 곳, 바로 그곳이 피렌체이다. 이곳에서 중세의 암흑이 끝나고 창조와 아름다움, 빛의 시대가 시작된다.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세계관에 영원한 평화가 지배하는 신의 나라로 가기 전, 잠시 머무는 곳인 이 세상에 속한 인간과 자연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고 기독교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의 정신적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던 하늘나라로부터 어떻게 사람들의 관심을 인간 스스로에게 그리고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으로 돌릴 수 있었을까? 사람들의 가치관의 변화는 전적으로 예술을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의 업적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산타 트리니타 다리를 지나면서 이 도시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흥미롭게 한다.
단테는 1274년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녀를 보는 순간 단테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중세시대가 끝나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새로운 시대, 중세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9년 뒤에 우연히 산타 트리니타 다리 부근에서 단테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했노라. 당신이 나의 사랑이다.”라고 고백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옆에 있는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그 길로 조용히 걸어갔다. 사랑했던 그녀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지 못했던 단테는 쓸쓸한 마음을 안고 아름다운 아르노 강둑을 걸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3년 뒤 단테는 우연히 베아트리체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6년간 자신의 가슴에 자리해온 여신을 잃은 상실감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그에게 바친 연시를 모아 <<라 비타 누오바(새로운 인생)>>를 출간한다. 이런 사랑 이야기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수없이 많은데, 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는 불멸의 이야기로 남을까? 베아트리체가 단테의 연인에서 만인의 연인으로 남게 된 것은 단테의 <신곡>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리라. 중세가 끝나 가고 단테의 <신곡>과 함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 브랑카치의 채플이 있다. 바로 르네상스 미술의 요람이라 불리는 곳이다. 15세기 초반에 천재 예술가였던 마사초가 성당의 벽화 그림을 그리고 난 후 70년이 지났을 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베로키오, 이런 사람들이 선배인 마사초가 그린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르네상스가 탄생하게 된다. <성 베드로의 일생>, <낙원의 추방> 등이 유명하다. 그림 속에서 15세기 피렌체 화가를 대표하는 마사초를 만날 수 있다. 얼굴이 넓적하고 광대뼈가 약간 나와 코도 길고 잘생긴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가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였을까. 왜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을까. 어떻게 르네상스 미술의 첫 출발을 알렸을까. 선원 근법이 처음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사초의 <성전세를 바치는 베드로>는 그림을 따라 그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낙원의 추방>를 보면 알 수 있다. 회화에 문외한이었던 나도 이 그림만은 익숙하다.
르네상스라면 마사초부터 들추어내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있다. 발가벗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는 그림. 중세시대에 아담과 이브를 그렇게 그리면 그 화가는 잡혀가 종교재판에 넘겨져서 사형에 처할 확률이 높았다. 신학자들이 아담을 예수그리스도의 구약적 모델로, 이브를 성모마리아의 구약의 모델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늘 거룩하고 경건하게, 멋지게 그려줘야 했다. 그런데 <낙원의 추방>을 보라. 낙원에서 추방될 때 아담과 이브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마사초는 인간이 느끼는 고뇌와 슬픔, 좌절과 외로움을 수치와 두려움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마사초는 인간 슬픔의 본질을 표현했던 것이다. 마사초의 혁신적인 투시화법, 사실적인 비극묘사 등은 그를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이곳은 르네상스 미술의 요람이 되고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르네상스는 최고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게 된다.
마사초의 <낙원의 추방>
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 성당’, 바로 이곳이 피렌체의 심장. 이 두오모 성당의 돔 지붕은 피렌체 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미술사를 통하여 수차례 보아왔던 곳. 마치 그 성당에서 예배를 자주 봤던 것처럼 가지 않고서도 추억처럼 그리운 곳. <냉정과 열정 사이>의 영화 배경이 바로 피렌체다. 헤어졌던 두 연인이 십 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각각 두오모 성당 꼭대기 전망대를 찾는다. 십 년 전에 남자는 십 년 후에 여인을 두오모 성당에 데려다 줄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그 약속을 기대하고 두오모 성당 꼭대기로 가서 사랑을 추억하게 된다. 우연이 필연이 되어 두 연인은 만나게 되고 피렌체 거리에서 다시 두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는 사랑의 느낄 수밖에 없는 장소가 되었다.
성당의 거대한 돔이 완성되기까지 조각가의 일화도 재미있다. 부루넬레스키의 거대한 돔이 피렌체를 내려다보고, 피렌체 거리를 안고 있는 듯하다. 성당 제작 과정에서 유명한 작가들의 경쟁이 있었다. 세례당 제 2문, 청동문 제작을 놓고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경쟁하였으나 브루넬레스키의 포기로 기베르티가 <그리스도전> 28면의 청동문을 제작하기 시작한 21년만인 1424년에 완성하게 된다.
세례당 청동문
브루넬레스키는 청동문을 제작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름다운 돔을 만들어냈다. 언제 보아도 놀랍고 멋진 돔이다. 성당 외벽에는 브루넬레스키 동상이 그가 1430년도에 자신이 완성했던 돔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청동문 만들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로마 건축을 공부한 다음 돌아와서 르네상스 건축의 모델과 같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돔을 완성하게 된다. 1418년까지 캄비오라는 사람이 두오모 성당을 완성하게 되었다. 바로 캄비오의 시선이 머무는 곳까지만 완성했다. 하지만 캄비오는 거대한 돔을 만들 수 있는 건축학적, 미학적 해결책이 없었다. 바로 그때 로마의 고전 건축을 공부하고 돌아온 브루넬레스키가 그 위대한 돔을 만들었던 것이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동상은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란 것을 알리고 있다. 흰 구름 떠 있는 푸른 하늘에 8개의 하얀 띠를 두른 붉은 돔은 피렌체 심장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 돔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조토의 종탑’으로 올라가야 한다. 조토의 종탑은 그의 제자 피사노와 함께 작업해서 14세기 말에 완성한 종탑이다.
피렌체는 브루넬레스키에게 기회를 주었다. 기회를 주는 곳, 그에게 새롭고 거대한 돔을 만들 기회를 줬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곳에서 르네상스 건축의 백미라고 불리는 브루넬레스키의 돔이 완성된 것이다. ‘오! 피렌체’라고 탄성을 지를만 하지 않은가. ‘조토의 종탑’ 꼭대기에서 건너편에 보이는 돔이 바로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역사에 있어서 왜 저 돔이 중요한 것일까. 고전을 재해석한 것이다. 바로 고전의 부활.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가서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재해석하고 연구하고 공부했다. 로마에서 배운 판테온의 미학을 바로 브루넬레스키의 돔에서 구현했다. 피렌체의 중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재현한 것이다.
피렌체라면 우피치 미술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관에 들어가면 르네상스 미술의 보물 창고. 조토,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마키아벨리까지 일렬로 서 있다. 정문 양 면에는 바로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서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마음껏 예술 혼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이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피렌체의 르네상스미술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메디치 가문을 언급한다.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피렌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의 저자인 원광대학교 성제환 교수의 강의를 들은 바 있다. 그는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만든 것은 상인들이었다고 경제학적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다루었는데.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였는지 연구하여 흥미진진하게 파헤쳤다. 마침내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권력을 가지게 되고 교황에게 막대한 헌금을 내었으며, 성당의 건축과 교회 내의 장식을 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을 활용했다. 르네상스를 만든 것은 상인들이었던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부를 가지게 되면 권력을 쥐고 싶게 되어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의 피렌체가 있기까지 상인들의 역할이 어떻게 빛나게 되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메디치 가문이 교회에 막대한 후원을 함으로써 그들의 영묘를 안치하기 위한 속내도 있었다. 예술가들을 통해서 그들의 사후 세계까지 장식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산 로렌초 성당,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 옆에는 로렌초 수도원이 딸려 있다. 메디치 가문의 2번 째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미겔란젤로에게 도서관을 만들라고 지시를 내렸다.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 (둥근 계단)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설계한 메디치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서리가 둥근 계단이다. 도서관 전체의 환경, 전체 건물의 구조, 창문, 밖을 내다보지 못하는 창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의도적으로 세상의 단절된 어둠의 공간을 만들었다. 빛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 먼저 숙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1555년에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조르조 바사리에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나는 지난밤에 꿈을 꾸었다네. 그런데 그 꿈속에서 나는 둥근 계단을 보았는데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다네.’라는 표현을 남겨두었다. 아마 그렇게 둥근 곡선으로 계단을 만든 사람은 미켈란젤로가 최초였을 것이다.
밖의 세상이 차단되는 그 어둠의 공간에서 고뇌를 거쳐서 우리는 빛의 세계로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미학적 의도가 있다. 메디치가문은 자신의 부를 이용해서 엄청나게 많은 고대의 희귀본을 소장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둥근 계단 옆의 계단을 통해서 피렌체의 인문학자들 그리고 시민들도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가 진리의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이 공공 도서관을 통해서 보여줬던 것이다. 바로 이곳이 있었기 때문에 동방과 서방 그러니까 비잔티움제국과 로마제국,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가 함께 만나게 되고 그 사상의 융합을 통해서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와 같은 놀라운 거장들에 의해서 르네상스 미술이 꽃피울 수 있었다.
<성전세를 바치는 성베드로>
미켈란젤로와의 산책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결. 두 거장의 경쟁은 개인의 경쟁이 아니다. 집단의 경쟁이었고, 장르의 경쟁이었다. 왜냐하면 회화와 조각 중에서 어느 장르가 더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느냐를 놓고 경쟁했다. 1504년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완성했는데, 피렌체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왜? <다비드>를 어디에 설치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바로 란치 로지아(회랑) 정면에 장식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다비드>를 회화 작품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을 시뇨리아 정청 입구에 장식하기를 원했다. 바로 이런 경쟁 때문에 이 도시에서 르네상스가 꽃피게 된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는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시뇨리아 정청 안 500인 대회의장세서 다시 한 번 더 치열하게 경쟁하게 된다. 거기 보이는 작품, 다빈치가 그린 <앙기아리 전투> 장면이다. 당시 시뇨리아 정청 안 500인 대회의장에서 두 명의 예술가가 치열하게 경쟁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도시에서 위대했던 시대, 르네상스의 시대, 빛의 시대, 창조의 시대, 아름다움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피렌체의 외곽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세티냐노. 미켈란젤로가 탄생한 마을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아야만 되는 것일까. 그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6살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된다. 바로 세티냐노의 한 채석장에서 일하던 인부의 집에 맡겨졌다. 그가 살던 집터에 지어진 <빌라 미켈란젤로>란 저택이 있다. 도로 이름에도 비아 데 부오나로티 시모니(부오나로티 시모니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바로 그 장소에서 미켈란젤로와 로렌초 데 메디치가 만나게 된다. 그는 할아버지 목상을 조각하고 있었다. “꼬마야, 너 조각 잘했는데 할아버지치고는 이가 너무 가지런하지 않아?” 그 말을 하고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말을 듣고 발심해서 밤새도록 열심히 조각했다. 다음날 로렌초가 조각공원을 다시 지나다가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가 2년 반 동안 함께 숙식하며 같은 식당에서 음식을 나누면서 당대 최고의 플라톤 철학자를 동원하여 미켈란젤로를 교육시켰다.
미켈란젤로 교육의 현장, 천재가 탄생했던 메디치 가문의 저택을 본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Palazzo Medici Riccardi),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4대 건축물 중 하나. 피렌체의 대부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해 지어졌다. 이 건축물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곳에서 3명의 교황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에서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에 입양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냥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이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플라톤 철학자였던 마르실리오, 프리치아노 같은 학자에게 플라톤 철학을 배웠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플라톤 철학의 예술적 구현이다.’라고 말한다. 예술의 천재였던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미술의 보고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즐비하다. 처음에는 우피치 궁으로 건축하여 메디치 가문이 사용하던 거물이었는데, 후에 미술관이 되었다. 우피치는 ‘집무실’이란 뜻을 의미한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상속자인 안나 마리아는 1743년 가문의 전 재산을 피렌체 시에 기증하고 사망하였는데, “이 모든 유산들은 절대 피렌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이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피렌체를 방문해야 한다.” 이 사건으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영원한 보고가 되었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이 위대한 걸작들을 만나기 위해 계속 몰려온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서 있는 <다비드> 상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다비드(다윗)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린 소년 영웅이다.
<켄타우로스의 전투> 1490-1492, 로렌초 데 메디치를 위해 제작한 미겔란젤로의 십대 시절 작품. <바쿠스>, 1497,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신을 묘사한 작품. 우리나라 음료 이름 ‘바카스’가 여기서 비롯됐다.
<피에타> 1498-1499, 성모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 미켈란젤로의 3대 작품 중의 하나. 후대의 작가들이 이 피에타를 모방한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다비드> 1501-1504, 미켈란젤로의 29세에 완성한 대리석 조각 작품.
<피렌체의 피에타> 1545-1555, 미켈란젤로의 후기의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자신의 무덤에 전시하려고 시작했던 작품.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다비드상>이 늠름한 자태로 아름다운 남성미를 자랑하는 시뇨리아 광장. 지금 광장에 있는 <다비드상>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것이다. 복제품도 진품과 마찬가지로 분간할 수가 없다. 광장에는 코시모 데 메디치 청동기마상이 늠름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1594년 제작했다. 넵튠 분수에는 물의 요정들에 둘러싸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서 있다. 단테의 사랑과 푸치니의 아름다운 아리아가 펼쳐지는 피렌체. 베키오 궁전은 1322년 세웠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지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피렌체 공화국의 시 청사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의 아카데미이다.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조르조 바사리가 이곳 미술대학을 만들었다. 비록 미켈란젤로는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한 조각가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미켈란젤로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멋진 예술가죠, 그의 작품은 수 세기 동안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요.”
카라라란 도시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현에 있는 도시인데 대리석을 채취할 수 있는 거대한 채석장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 거대한 채석장에 숨어있는 조각품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카라라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세계에서 품질이 뛰어난 대리석 채석장으로 유명했다. 원래 로마인은 그리스에서 대리석을 수입해왔다. 그런데 기원후 2세기에 접어들어서 많은 양의 대리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카라라에서 엄청난 양의 대리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바다까지 5km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운반이 수월했다.
니콜리예술공방에는 현재도 조각가들이 창조적인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 공방은 2000년 유네스코 클럽의 평화의 문화사절 장소로 선정 되었으며, 1835년부터 6대째 운영 중이다. 공방 대표가 방문자를 <모자>상의 모조품 앞으로 안내한다.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지요. 조각품들이 제작되고 있는 이 장소의 분위기 자체가 정말 아름답네요. 대리석으로 만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예요.” 공방의 대표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피에타>를 설명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은 현대의 모든 조각가들이 복제하고 있다. “처녀 성모마리아는 아들 예수보다 더 젊게 조각된 것처럼 보이죠. 심지어 아들의 딸처럼 보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신성함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고자 했어요. 우리처럼 요. 이게 바로 죽은 예수의 몸으로서 존엄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예요. 아들을 잃은 엄마의 인간적인 슬픔을 카라라 대리석으로 묘사해낸 것 같아요. 멋져요.” “...... 때로 고통과 슬픔이 평온과 기쁨을 능가하는 것인가. 그의 고통은 모나리자의 평온보다 더 평온하고 슬픔은 신비로운 미소보다 더 신비롭게 다가온다. 아픔을 진정으로 아는 이는 아픔을 끝내 물리치지 않고, 슬픔을 진정으로 아는 이는 한 방울의 피눈물도 함부로 내비치지 않는다 했던가. 차가운 대리석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본다. 그 바닥에는 길어내고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도 있는 것인가 .....” <피에타>의 또 다른 멋진 감상이다.
공방 근처에 한 식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식단’을 제공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었는지 그 맛은 어떤지 궁금하다. 피노키오 스프 - (야채를 넣은 우리의 된장국 같은 스프), 빵 두 개와 포도주 조금, 청어와 멸치조림 등의 소박한 식단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이런 음식을 먹고 이 험한 카라라 산에서 대리석을 캐냈다는 사실.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그의 검소한 식단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고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왜 작업 중지를 명령했을까. 심지어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캐왔던 대리석을 압수해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금이 가게 되었다. 그때 율리우스 2세 교황은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천장을 보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브라만테가 이렇게 교황에게 제안했다.
“교황님, 미켈란젤로가 천재라고 하니까 천재에게 그림 하나 그리게 하시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조각가야.” “당장 올라가서 그림을 그리라구.” 올라가서 예수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그리라고 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지 못한다면 나는 저곳으로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이때 그린 그림이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이다. 처음으로 그린 그림이 세계 최고의 회화 작품이 된 것이다. 회화의 파라곤(Paragon:모범)이 된 것이다. ‘피에타’와 ‘다비드’를 통해서 이제는 회화의 파라곤을 완성한 것이다. <천지창조 Genesis> 1508-1512, 미켈란젤로가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세계 최대의 벽화가 탄생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모세상>을 완성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2세의 영묘를 안치하기 위해서 장식했던 미켈란젤로의 또 하나의 명작이다. <모세상>에서는 오히려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장르든 모든 예술가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기 마련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슬픔을 안고 죽었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외적 프랑스와 스페인을 몰아내지 못한 슬픔을 안고 죽었고, 우리 조선의 고종은 일본을 몰아내지 못하고 죽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자신의 예술 혼을 불태우기 위해서 고뇌하고, 평생 숙고하고 좌절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모세상>의 모습으로 상상했던 것 같다.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 시청사의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좌우 건물이 마주보는 간격은 투시효과의 조화를 위하여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현제(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다. 광장과 건물의 디자인은 독창성과 공간 통일의 탁월성으로 미켈란젤로의 가장 뛰어난 건축 작품으로 꼽힌단다. 60대 후반의 미켈란젤로는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89세의 나이로 임종했다. 그러나 그이 작품을 통하여 전세계에 그의 정신이 전해지고 있다. 유럽의 모든 예술의 근원은 성서의 내용과 영웅들의 생애가 바탕이 되었으며. 동양의 예술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통하여 부처의 세계가 불화와 조각품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미켈란젤로의 시대가 마감되고 르네상스는 100여 년 뒤에 베네치아에 상륙한다.
베네치아
베네치아 - 두 개의 상상이 펼쳐지는 베네치아, 세상의 다른 곳,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인구는 6천 1백만 명(2012), 면적은 약 30만 킬로미터, 한반도 면적의 1.5배다. 피렌체에서 북동쪽으로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이동한다. 옛날부터 베네치아는 ‘알테르 문디’ Alter Mundei'라고 불렀다. ‘세상의 다른 곳’이라는 뜻이란다. 이 세상에 그런 곳이 없다는 것이다. ‘세래니시마 리퍼불리카 (Serenissima Republicka di Venezia)라고 불렀다. 르네상스의 꽃이 어떻게 만개했는지 그곳에는 어떤 작품이 있는지 또 어떤 역사가 펼쳐질리 너무 궁금하다.
우리의 호기심과 벅찬 기대감을 안고 르네상스의 기차는 계속 질주했다. 창밖의 풍경은 질서정연하게 구회된 들녘과 숲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Venice, 베네치아의 영어식 이름. 5세기에 세워진 베니스는 ‘물의 도시’라 불리며 118개의 섬이 약 400여 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베니스 입구에 산타루치아 역이 보인다.
<산타루치아>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그 Santalucia의 이름이다. 베니스는 바다에 도시를 심은 것 같다. 건물의 밑바닥은 어떻게 지탱하고 있을까. 바위 위에 심고, 석호에 심은 것이다.
서기 828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도난 사건이 벌어졌다. 베니스의 상인들이 성자 성 마가의 시신을 훔쳐서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왜? 베니스의 상인들은 성 마가의 시신을 훔쳐왔을까. 이 도시의 수호성자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 마가는 베니스 사람들에 의해 마르코라 불렸다. 그래서 두칼레 궁전 앞에 있는 기둥 위에 큰 사자의 조각상이 전시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광장을 산마르코 광장이라고 부르게 됐다.
‘성마르코 광장’ 베니스의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두칼레 궁전과 그 옆 건물의 일층은 아취문이 나열해 있는 긴 회랑이 이어진다. 광장에는 비둘기도 사람 수만큼 무리지어 놀고 있다. 광장에서 <오, 솔레미오>를 한 곡 부탁받은
가수가 멋지게 노래를 불러 광장의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에 초대했던 안내자인 김상근 교수가 회랑에서 연극배우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대사를 읊는다. ‘당신이 우리를 찌르면 우리는 피 흘리지 않나요?“ ”당신들이 우리를 해코지한다면 우리가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요?“ ’베니스의 상인‘ 제 3막에 나오는 내용이란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서기 4-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틴 사람들은 석호에 말뚝을 박고 살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가장 동경하는 것은 마른 땅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봉건제도가 발생할 수 없었다. 왜? 땅이 없었으니까. 베네치아에 있는 모든 배들, 갯기선(돌과 노가 있는 군용선)들은 국가의 소유였다. 그해서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다였고 땅이 없어 농업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두칼레 궁전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거인의 계단에 두 명의 거인이 서 있다. 바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교역과 무역의 신 헤르메스이다. 바닷가에 대종루가 서 있다. 꼭대기 상부는 종탑이다. 그곳이 바로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이다. 1432년 코시모 데 베디치가 이곳으로 망명을 왔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을 은신처로 삼았다. 미켈로초가 자신을 후원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보호하겠노라고 찾아왔다. “자네는 칼을 쓸 줄 안나? 창을 쓸 줄 아나?” “자네는 건축가가 아닌가? 이왕 여기 왔으니 베네치아 시민들을 위해서 건축 하나 해주게.” 그래서 건축된 노랑색 건물이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도서관이다. 바로 그곳에서 두 위대했던 도시가 만남으로써 르네상스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남쪽 해상에 떠 있는 산 조르조 섬에 있는 교회인 것이다. 바로 그 성당에서 피렌체의 르네상스 건축 미학이 베네치아로 전수된 것이다. 그곳에서 위대했던 도시가 만남으로써 르네상스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베네치아에는 단돌로 가문이 있었다. 어떻게 베네치아가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는 거대한 무역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제 4차 십자군 때 단돌로는 당시 베네치아를 통치하던 통영이었다.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 90 노인이었던 단돌로가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실명 상태였던 단돌로가. 베네치아 시민들은 그 장면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고 용기를 내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는 거대한 해양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페 플로리안>은 1720년에 개업한 카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카사노바, 괴테 등 유명인들의 단골 카페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점점 내면화되기 시작했다. 아마 그래서 세계 최초의 커피숍으로 알려진 ‘플로리안’이 1720년에 문을 열게 됐는지도 모른다. 쓴 커피를 마시며 ‘멜랑콜리’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된 지 꼭 100년 만에 르네상스의 물결이 베네치아 해안에 도착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르네상스의 마지막 물결이 일어나게 된다. 지중해 해상권을 오스만투르크에게 빼앗긴 베네치아 인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멈추게 된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에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장된 곳이다. 그리고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팔려나가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수백 점의 작품이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명의 화가를 만나야 한다. 첫 번째 인물은 조르조네, 두 번째 인물은 티치아노, 그리고 마지막 인물은 틴토레토이다.
<산 마르코의 유해 발굴> 1562-1566, 16세기 중후반에 베네치아에서 활약한 화가 틴토레토의 작품. <산 마르코의 기적> 1567-1568, 색채와 구도를 모두 중시했던 틴토레토의 작품
<피에타> 1576, 미완으로 남은 티치아노의 마지막 작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 이후 대대로 많은 화가들이 조각이나 회화로 재해석하기도 하여 재창조하고 있는 것 같다. <폭풍우> 1505, 16세기 베네치아 회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조르조네의 대표작이다.
베네치아에서는 곤돌라(택시 기능)를 타는 것이 제격인 것 같다. 안내자는 이제 르네상스 미술의 기행을 마무리하고 곤돌라를 타고 더 넒은 아드리아 해로 나가고자 한다. 좁은 골목을 지나는 것처럼 좁은 수로를 연결하는 아치형 다리 밑을 곤돌라가 지난다.
‘오티움 쿰 디그니타테 - Otium cum dignitate', 여행은 위엄을 갖춘 여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여행의 전부가 아니다. 새로운 영감을 얻는 것, 미래에 대한 돌파구를 발견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작은 해답이 르네상스 미술의 여행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새로운 영감과 미래에 대한 돌파구를 찾는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내자의 바람이었다. 안내자를 태운 곤돌라는 이제 아드리아해의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더 넓은 바다가 암시하듯, 우리들 의식도 새롭고 넓은 지평을 열어가야 하지 않을까.
중세의 어둠에서 빛을 찾아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예술가와 인문학자들 그리고 그들의 창조적 자유가 주어졌던 환경과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대까지 많은 예술사조가 시대를 대변하고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어쩌면 현대는 혼돈의 무지개가 난무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삶의 공간이 여행지가 된 지금 우리의 르네상스라는 조선 후기의 예술과 인문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인본주의가 극에 달하여 위험한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지구촌인 것 같다. 다시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인본주의를 넘어서 휴머니즘보다 더 멀리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도 생물이라는 차원에서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 연결된 나, 인간, 자연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 기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다시 정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황지우 시인의 <나는 너다>라는 시의 주인공처럼 너의 자리에는 사랑 혹은 모든 생물, 자연물이 자리해야 하는 자리이리라. 동서를 막론하고 페트라르카의 위대한 발견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후기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후기
폭염이 계속되던 어느 날, 늦은 오후에 금산사로 산책을 나갔다. 보제루 옆길 큰
마당으로 가던 중 대적광전 쪽을 힐끗 바라본 순간, 푸른 나무 사이에서 배롱나무
꽃빛이 내 가슴에 불을 붙이는 듯했다. 한순간 시원한 감동에 떨었다. 큰 마당의
유서 깊은 잣나무와 사진작가들의 소재였던 고풍스런 감나무는 사라진 지 오래다.
미륵전 앞의 산사나무는 <고목에 핀 꽃>으로 추억의 나무다. 반쪽이 헐어버린
기둥이 위험해서 옆에 후손을 키우고 있다. 미륵전 옆에서 배롱나무 꽃이 그토록
아름답게 하늘을 채우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전각들의 건축미에 장소가 주는
공간미를 더한 감흥에 멍하니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주위에 수형 좋은 나무가
많기는 하지만,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어떤 조명을 받는가에 따라서 느낌이 주는
감상이 이렇게 달라진다. 이날만은 전각의 삼층 지붕선이 배롱나무의 배경이 되는
것 같았다. 미륵전에 들어 백팔배를 올렸다. 땀을 내며 열을 높이는 일도 시원했다.
어차피 땀에 젖을 바에야 열렬히 젖었다. 불타는 여름을 감사했다.
하루 사이에 갑자기 가을이 된 듯하다. 열렬했던 청춘의 사랑은 역시 한 순간인가.
가을이 깊어지면, 사랑 뒤에 남는 쓸쓸함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풍성한 가을에 대한
기대보다 사라짐에 대한 그리움을 먼저 앓을 것이다. 뜨거움을 열로 치유하듯,
허전함을 달래는 데는 폐사지에 남은 돌탑이 어울릴 수도 있다. 지난 세월의
흔적에서 의미를 찾아낼 일이다.
가끔은 미륵사지에서 “고운 님 보고픈 생각이 나면 황룡사 문 앞으로 달아
오소서” 하던 민사평(1295-1359)의 시도 읊조릴 것이다. 살다 보면 문득 가버린
날들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가 있겠지. 그럴 때면 당간지주와 외로운 탑 하나 남은
빈 절터로 오라고 했다. ‘아무 말 말고 황룡사 문 앞으로 찾아오소서. 빙설처럼
고운 그 모습이야 보이지 않겠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앞에 서면, 임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소곤소곤 들려온단다. 우리 사랑했던 아름답던 시간들 주춧돌
위에 여태도 남아 반짝인다고. 잊고 있던 사랑의 꿈이 안타까운 날이면, 눈감고
당간 기둥에 기대보시라!
하늘과 맞닿아 있는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순간 받았던 처음의 전율을 다시
느낄 것이다. 해질녘 노을빛이 탑을 감싸 만드는 아름다운 실루엣이 드리우는
시간, 그보다 더 좋은 마음의 휴식처가 없으리라. 무상과 소멸이라는 화두를
챙기고 침묵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챙길 일이다. 사라지는
것에서 흐르는 시간의 힘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나를 잘 다스리는 일이 진정으로
이웃을 돕는 일이 될 것이기에.
(2016년 만추愛) 조윤수
작품해설
전일환(수필가,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 조윤수 제5수필집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옛 향 깊은 작가의 수필세계
- 조윤수 제5수필집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에 부쳐 -
전 일 환(수필가,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1. 작품과 작가가 일치된 수필
수필가 조윤수는 2003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한 수필가다. 수필집 <<바람의 커튼>>(2008)을 첫 출간한 이래, <<나도 샤갈처럼 미친及 글을 쓰고 싶다>>(2010), <<명창정궤(明窓淨机)를 위하여>>(2013), <<나의 차마고도(茶馬孤道)>>(2014) 등을 연이어 생산해 내더니 올핸 제5수필집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를 상재했다. 작품집 대부분이 2년 만에 출간을 거듭 했으니, 그가 말한 것처럼 수필을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아예 수필이 직업이 된 작가다. 13년의 문력(文歷)이 말해주듯 그는 글을 쓰는 열정이 펄펄 넘치는 문학가다. 그는 수필간가 하면, 다도가(茶道家)며, 다인(茶人)인가 했더니 종교철학자인 데다가 역사, 음악, 미술 등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박물학자다.
나는 이 분을 만나기 전에 어느 문예지에 발표된 <대하연(大賀蓮) 오오가 하스>를 먼저 만났고, 그리고 올해 전북문학관 문학아카데미에서 운명적으로 조우(遭遇)를 했다. 프랑스의 문학사가이자, 과학자인 뷔퐁(Buffon 1707-1788)은 프랑스아카데미회원으로 들어갈 때의 입회연설인 문체론(1753년)에서 ‘문장은 인간’이라 했다는 것처럼 조윤수 작가의 제5수필집 속에는 뷔퐁의 그 말 한마디답게 정말 작품과 작자가 똑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본디 가톨릭신자였다. 그런데 그의 수필집을 보면 오히려 천주교신자라기 보다 불교신자 같고, 불교철학에 매료된 작가라고 하는 편이 훨씬 타당한 것처럼, 편향되지 않고 보편성이 있는 다정다감한 수필가다. 마치 여말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이조년이 노래한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들어’하는 작가다. 뿐만이 아니다. 중, 고등학교를 전주에서 다녔기 때문에 의당 고향이 전라도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경상남도 진주가 고향이었다.
정치인들이 자기만의 얄팍한 어떤 이익만을 찾으려고 영호남을 2분해 놓고 정치 놀음을 하면서 자만(自慢)하고들 있지만, 우리 순박한 보통사람들은 저들의 교활한 그런 저의(底意)도 모른 채 그들의 놀음에 일희일비하면서 무감각적으로 그렇게 흘러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조윤수 작가는 아예 그런 것과는 무관한 수필가다. 오히려 옛 신라문화보다 백제문화를 더 좋아하고 지금의 전라도를 자신의 원고향보다도 더 사랑한다. 그래서 ‘이제는 이 곳의 문화미에 푹 젖게 되어 탑 앞에 서면 한살처럼 느껴진다.’라는 고백도 서슴지 않았다.
작가의 부친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분 같다. 부녀지간 영호남을 가리지 않고 경상도를 떠나 전주에서 삶터를 잡은 탓에 작가는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고, 그를 좋아했던 전라도 남자가 서동요의 마동처럼 끈질지게 구애한 끝에 혼인을 하여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리고 스스로도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紀異)조의 기록대로 선화공주처럼 백제의 서동을 맞아 인생을 엮어간다고 재미삼아 말하곤 한다.
참 인연이란 묘하다. 내가 아버지의 직장 인연 때문에 중고등 학생시절을 전주에서 보낸 일이
후에 다시 이곳 사람과 결혼할 인연이 될 줄이야! 설화의 주인공처럼 서동이 선화공주를 찾아다녔던
것 같이 내 남편도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나를 찾아 전주까지 데려올 줄이야! 아마도 친정 친척
하나도 없는 타향에서 내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나를 위로해주었던 백제탑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작부터 차의 공덕을
알고 부처께 헌다공양을 올렸던 기원의 덕도 힘이 되었을 것 같다.
중략
아버지의 덕택에 경남에서 산 세월보다 전주에서 산 세월이 많아졌다. 이제는 이곳의 문화미(文化美)에
푹 젖게 되어 탑 앞에 서면 한 살처럼 느껴진다. 고대에 선화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내 피도 걸러지고 여과
되어 나에게서는 복합 문화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첫 세대로써 영호남의 가교를 이었고, 내 아
들도 대를 이어 영남 여인을 아내로 맞았으니 그렇게 해서 선화공주의 후손들은 대한민국 안에서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 창조해 가고 있다. 만날 때마다 내 발길을 붙잡는 백제탑이여, 아! 세월이여!
제5수필집의 제호가 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끝 단락 마지막 문장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잡는 백제탑이여!’의 일부다. 필자가 매료된 것은 전주의 자연환경이나 도심이 아니라, 목재로 시작된 아름다운 사탑에서 최초로 화강석을 목재처럼 공굴리고 다듬어 만들었던 석조미륵사탑으로부터 왕궁리 5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탑들이다. 그는‘왕궁리 탑을 보러 갈 때면 옛 연인을 만나는 듯한 묘한 설렘조차 일어서 탑을 돌아보고 면석을 어루만져도 보고, 풀밭에 누워보기도 하고, 무한한 아늑함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며, 때로는 거석이 주는 위압감에 숙연해지기도 했다’고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동심처럼 그 기쁨을 고백하면서, ‘한참 탑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폐허로 남아있는 탑 주변에서 알지 못할 적요한 마음결이 느껴져서 좋았다’라 감탄을 토로하고 있다.
이렇듯 필자는 사물을 보는 관점(viewpoint)이 남다르고 초월적이며 전문가보다 더 세밀한 미적 감각, 즉 심미안(審美眼)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안목은 시인이나 소설가에게도 필요한 요소지만, 수필가에겐 더더욱 빼놓을 수 없는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햇빛을 프리즘에 굴절시키면 일곱 색깔 무지개 색으로 분화된다는 그런 분석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햇빛은 무색무취의 물처럼 아무런 색깔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프리즘을 통해 투과된 빛은 일곱 빛깔 무지개 색으로 신비롭게 분화되는데 그게 햇빛의 본질이다.
2. 미학적인 안목이 남다른 작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만물이 다 그렇다. 만물 중에 가장 귀하다는 사람도 그렇고, 개미 같은 하찮은 미물도, 길가에 생명 줄을 내리고 온갖 것들로 하여 짓밟히는 풀 한 포기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작자는 자칫 지나쳐버릴 수 있는 미물 같은 것들도 확대경을 들이대어 분석해내듯 볼 수 있는 그런 안목(眼目)이 있어야만 한다. 조윤수 수필가는 그런 미학적인 남다른 안목이 독특한 작가다.
저녁 이내가 내리는 시각, 안타까워 그리는 백제의 옛 꿈을 말없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멀리서 아련하게 보이는 석탑은 날개를 접고
안전한 곳에 내려앉은 붕새처럼 천년 세월을 품고 있다. 백제인의
어떤 삶의 철학이 강직하기만 한 돌에 예술 혼을 실었을까. 생명을
불어넣은 돌탑에서 어떤 정신을 발견해야 하는 걸까. 옛 백제인의 삶의
철학과 의지를 통하여 오늘 내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천4백 년 전의 혼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어떤 정신에 감동된 것일까.
어떤 감동이든 그 감동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은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
는 것 같다. 생활의 활력이 되어서 행동의 변화도 일으키고, 보람찬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날로 새로운 감동의 날들을 엮어
가면서 새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는 다음의 세대로 또 이어지리라.
아스라이 먼 것 같지만 또렷하다. 어느 순간은 바로 옆에서 보던 때보다
더 장중하게 다가오는 석탑이다. (왕궁리 5층석탑 중 일부)
서산에 해가 지니 패망한 옛 백제의 왕성에 이내 같은 어스름이 내리는 걸 ‘안타까워 그리는 백제의 옛 꿈을 말없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멀리서 아련하게 보이는 석탑은 날개를 접고 안전한 곳에 내려앉은 붕새처럼 천년 세월을 품고 있다.’라 하고, 그리고 ‘백제인의 어떤 삶의 철학이 강직하기만 한 돌에 예술혼을 실었을까. 생명을 불어넣은 돌탑에서 어떤 정신을 발견해야하는 걸까. 옛 백제인의 삶의 철학과 의지를 통하여 오늘 내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천4백 년 전의 혼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어떤 정신에 감동된 것일까’라며 연거푸 네 번씩이나 설의법을 통해 폐허의 유허지에서 망국의 스산한 백제국의 서정을 어스름 짙어가는 이내 속에서 안타깝게 그리고 있다.
이렇듯 좋은 수필은 김광섭이 <수필문학소고>(1933년)에서 말했듯이 달관(達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심경이 무심히 생활주변,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혀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되어지는 형식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씌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붓 가는 대로’의 의미를 담은 ‘따를 수(隨), 붓 필(筆)’자의 수필이다. ‘따른다(隨)’는 말의 속뜻을 살펴보면 어떤 수준에 ‘이른다(到)’는 의미가 함의(含意)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수필을 쓰려면 어떤 단계에 올라야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운필(運筆)의 기본도 모르면서 붓 가는 대로 쓴다면 아무런 글씨도, 글도, 그림도 이루어질 수 없는 잡기(雜記)류가 되거나 아니면 악필(惡筆)이나 졸화(拙畵)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 수필은 기품(氣稟)이 넘쳐야 하고 고상한 품격과 향기가 있어야 하며 아름다움이 넘쳐나야 한다. 그리고 인생을 관조(觀照)하면서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나 미적가치가 있어 독자에게 감동을 주어야만 한다.
조윤수 작가는 석공예자가 되고, 건축가가 되었다가, 때론 미술가도 된다. 이번에 출간하는 제5수필집은 총 50여 편의 작품을 실었는데, 거의
대부분 절집, 사탑, 석존상, 사지(寺趾) 등이 대부분인데, 신라와 백제에 걸쳐 두루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불교미학의 중심은 주로 백제에 국한되어 그 미적가치를 탐색해 내었다.
꿈틀거리는 용 한 마리가 부처의 머리 위에 머물고, 주위를 날고 있는 비천상과 화려한
연꽃 등이 환희심을 일으키게 한다. 극락전 뒤를 돌아보았다. 육중한 처마를 받치는
백제식의 하앙(下昻)식 공포(栱包)라는 것. 앞 쪽은 용의 얼굴 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했지만,
전각 뒤의 공포는 단순하게 처리했다. 주변에 여름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어 오랜만에 절집은
잔치를 맞은 듯하다. 뒤안길에는 잎을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가 곳곳에 무더기로 피어서 산자락
뒷길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 극락세계가 사철 꽃동산을 이루면 얼어붙는 빙벽 길에도 불명의
꽃비를 내릴 것이다. 바라지창이 활짝 열린 우화루에 달린 목어도 오늘따라 생기를 얻어
날카롭게 삐져나온 이빨이 애교스럽게 보인다.
중략
단청을 덧입히지 않은 절집은 시인의 말처럼 잘 늙은 절집.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겉은 늙었으나 그가 지닌 정신은 날로 새롭다. 저리 곱게 늙어가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래전에 불교
신자도 아닌 내게 법명을 지어서 보내준 큰스님 한 분이 떠올랐다. 바위골짜기를 쉬엄쉬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수월관음을 만난 선재동자처럼 환한 마음으로, 화암사는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도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계단이라고.
<내 사랑, 화암사>의 일부다. 이 수필 제목은 안도현이 읊은 시 <화암사, 내 사랑>이 좋아 인용해 오면서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았다’라는 주해(註解)도 아끼지 않아 모두(冒頭)에 밝혀두는 작가의 예도 잊지 않았다. 화암사는 완주군에 있는 안심사, 위봉사와 더불어 ‘완주3사’의 한 고찰이다. 화암사에 가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글을 읽어보면 화암(花巖)의 글자가 지닌 대로 불명산(佛明山) 화암사(花巖寺)의 절집이 꽃과 바위로 하여 얼마나 아름답고 여타의 절과 다른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묘사되었다. 마치 화가가 수채화를 그려 놓은 듯이 부처의 자비를 밝히는 불명산에 자리한 ‘꽃 바위 절’, 화암사를 풍경까지 아우르며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아예 글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수필을 아름답게 써놓았다.
‘바위에 꽃이 피는 절집? 연꽃이 핀 바위 위에 지은 절. 옛날 임금님이 꿈에 공주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연꽃을 찾았다. 부처님이 꿈에서 알려주었다는 곳. 깊은 산속 바위 위에 연못의 용이 올라와서 연꽃을 키웠다는 이야기. 그 연꽃을 따와서 공주의 병은 낫게 되고 임금은 그 바위에 절을 지었다. 깊은 산속 연화대에 앉은 절집이다.’라며 불명산 화암사를 이 네 줄의 간결한 문장에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압축하여 절 이름을 해석해 놓은 문재(文才)가 놀랍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여름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어 오랜만에 절집은 잔치를 맞은 듯하다. 뒤안길에는 잎을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相思花)가 곳곳에 무더기로 피어서 산자락뒷길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 극락세계가 사철 꽃동산을 이루면 얼어붙은 빙벽 길에도 불명의 꽃비를 내릴 것이다.’는 감각적인 묘사는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3.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맛과 향이 나는 수필
작가 조윤수는 글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면서 탁월한 석공예가요 건축가다. 백제식 건축양식의 화암사 전각도 서너 줄의 단순한 문장으로도 비단옷을 공그리듯 수놓는다. ‘꿈틀거리는 용 한 마리가 부처의 머리 위에 머물고, 주위를 날고 있는 비천상과 화려한 연꽃 등이 환희심을 일으키게 한다. 극락전 뒤를 돌아보았다. 육중한 건물의 처마를 받치는 백제식의 하앙 식 공포라는 것. 앞쪽은 용의 얼굴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했지만, 전각 뒤의 공포는 단순하게 처리했다’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목공들은 육중한 절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의 머리 부분 아래를 들어 올린다는 뜻으로 하앙(下昻)이라 하고,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을 공포(栱包)라거나 포작(包作)이라 하는데, 이는 목공예가나 건축가들만이 주로 사용하는 전문용어다. 절집만 그렇게 전문인들이 쓰는 건축용어를 쓰는 게 아니라, 석존상들을 그릴 때도 매 한가지다. 그런 전문적 안목이 있으므로 그는 국립박물관 해설사로도 봉사를 한 적도 있다. 어떤 문인이 국립전주박물관에 관람을 갔다가 능란한 말솜씨로 해설하는 조윤수 작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는 말을 몇 사람에게서 들은 적도 있다.
그만큼 작가 조윤수는 공예나 미술, 음악까지도 다방면에 해박하고 그것을 삶에 대응해서 아름답게 해석해내는 글재주가 아주 좋은 작가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에서 미국미술 300년 속으로 들어간 그가 ‘<모히칸 족의 최후>의 한 장면만으로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어떻게 사라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라는 문장에서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대하고 웅혼한 자연풍경에 압도되어 힘센 정복자에 의하여 피 흘리며 죽어가는 한 쌍의 남녀를 놓치게 된다’는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또한 ‘청교도들이 토착민들에게 성경의 장면을 들어 바로 이사야 11장 장차 올 평화스러운 왕국’이라고 설명하는 장면도 놓치지 않고 묘사하고 있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성경과 커피, 콜라 등 세 가지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이후 세계의 후진국들을 점령할 때도 동일한 수법을 썼다는 사실은 보편화된 지 오래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 ‘바라지창이 활짝 열린 우화루’, ‘목어도 오늘따라 생기를 얻어’, ‘날카롭게 삐져나온 이빨이 애교스럽게 보인다.’ 는 서술은 산문이라기보다 한 편의 시를 읽어 내리듯 시적이다. 이런 감각적인 문체는 그의 작품 속에서 면면이 드러나고 있다.
조윤수 작가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제대로 실행하여 수필에 새로운 맛과 향이 나도록 자양(滋養)을 불어넣어 독자로 하여금 짙은 다향(茶香)의 맛을 느끼게 한다. 옛 것이란 용도 폐기된 실용성을 잃어버린 폐물이 아니라, 이를 다시 새로운 향과 맛이 어우러지도록 음식으로 요리하여 독자들에게 베풀어준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수필집 <<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이 쓴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의 ‘옛것을 상고하지 못했노라’를 읽고
바로 그것이다 라고 쾌재를 불렀다. 전라감사를 두 번이나 지냈던 이서구는 젊어
서 연암에게 글을 배웠다. 그가 쓴 <녹천관집>을 연암에게 가져와서 평해 달라고
했다. 당시 이서구는 옛글을 답습하지 않는 새 글을 썼기 때문에 기존 문인들에게
핀잔을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연암은 그의 제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로
인하여 전하지 못하던 옛날 학문이 계승될 것임을 칭찬하였다.
우리가 옛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현재의 문명을 누릴 수 없다. 첨단문물의 모든 것들이 옛것에 새로운 것들을 가미(加味)하고 다시 모양과 기능을 바꾸어서 새로운 것처럼 만들어 오늘의 우리가 그것을 누리며 살아간다. 연암은 삼종형 박명원이 청나라 고종의 성절사로 갈 때 동행을 하면서 <열하일기>를 남겼다. 박지원은 조선 굴지의 대문장가다. 그는 장인의 아우 양천으로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해 역사서를 교훈 받으며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면서 현대소설에 비겨도 결코 뒤지지 않는 소설, <호질전>, <양반전>, <허생전>, <예덕선생전>, <광문자전> 등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풍조를 해학과 풍자로 비판 고발한 한문소설을 펴내어 경종을 울렸고, 열하일기 중 <일야구도하기>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만큼 조선의 명수필을 남겼다.
수필가 조윤수는 백제의 사찰에서 찬란한 백제문화답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유허지나 왕궁리5층석탑에서도 옛 역사문화를 찾아 만져보고 호흡하면서 그 문화에 탐닉되어 작품을 썼다. 뿐만 아니라, 차문화(茶文化)도 <<차마고도(茶馬孤道)>>라는 수필집까지 내면서 다도의 전문성을 그 수필에 담아 다향의 진미를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친절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정목일도 <우리 차문화의 멋, 맛, 향기>라는 작가의 작품해설에서 ‘나의 차마고도- 오심지다(五心之茶)의 세계’라 부제하고 ‘조윤수 수필가의 차(茶)수필은 맑은 선미가 있다. 명상의 문이 있고 온정과 그리움이 있다, 범속과 과장을 떨쳐버리고 마음으로 주고받는 대화법을 보여준다. … 조윤수 수필가가 한국문화의 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차문화에 관심을 갖고 테마수필집을 펴내게 된 것만 보더라도 개성과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 한 발문 성격의 작품해설에 오롯이 드러내고 있을 정도로 차문화 전문가요, 차문화 수필가다.
이렇듯 작가 조윤수는 천인만색(千人萬色)의 사람의 삶에 관한 지나간 역사나 철학에 관해서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고, 깊은 천착(穿鑿)을 하고 분석하면서 작품에 재해석해 놓는 그의 수필작법은 놀라울 정도다. 이번 독자들에게 내놓는 제5수필집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는 그러한 작가의 수필적 재능이 종합적으로 응결된 작품집이다.
앞으로도 한여름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종교, 역사, 미술, 음악, 다도(茶道) 등 사람의 삶을 무채색의 햇빛이 프리즘을 투과시키면 일곱 빛깔 무지개로 영롱하게 비쳐지듯 아름답고 가치 있는 좋은 작품들을 옹글게 많이 창출, 생산해내길 바란다. 그리하여 조윤수 수필가의 작품을 그냥 스치지 않고 그가 만들어 놓은 작품세계 속에서 독자들이 그 영혼과 교통하며 인간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인간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느끼고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제5수필집의 상재를 마음 깊이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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