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사
4번 우금암도와 함께 하는 - 이 사진으로
40. 유배의 땅, 보물섬
유배의 땅, 보물섬
역사의 물결이 출렁대는 남해. 남해에 오면 이순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명한 한려수도, 다도해에서 핏빛을 뿌리면서 지켜낸 남해가 아닌가.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건너오자마자 전라우수영지가 공원화되어 이순신의 첩들을 맞게 한다. 진도에 오면 이순신의 유명한 첩이 맞이해준단다. 서해가 문학적이라면 분명 남해는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전라우수영 공원에서 화사하게 피는 꽃길을 돌면서 어찌 옛 기억에 가슴 아파해야 하는지 가슴 쓰렸다. 좋은 봄날에. 아름다운 지구촌에서 어찌 인류는 싸움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장식된 울돌목 야외무대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건너편 우수영 자리를 아슴히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 바다에서 치열한 해전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진도읍내에서 향토음식 생선 알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음미할 새도 없이 시장이 제일의 반찬이었다. 섬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읍내 풍경이었다. 몇 년 전에 낭만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해남의 친구 댁에서 하루를 쉬었다가 진도로 건너왔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운림산방과 신비한 바닷길를 산책하였지만, 그때와 지금의 형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완전 도시형 관광지로 변모한 것 같았다.
단체로 몰려다니니까 개인적 관심사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보배라는 말이 붙은 걸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문명을 일구어왔던 섬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도가 가까이 오게 된 이유는 조선 시대의 유배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도 하면 아리랑이 자연스럽지만, 진도에 오면 다섯 가지를 자랑 말라고 했다. 시, 서, 화, 춤, 노래다. 그래서인지 일행 중에 아무도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유배 왔던 옛사람의 기억이나 흔적을 여기저기 흘깃거려보았지만. 알 수 없고 다만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던 노수신을 그려보았을 뿐이었다.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선생 자신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순천에서 3년, 이어서 진도에서 19년의 유배생활의 역경을 딛고 재상의 반열에 올라 영의정에 이르고, 시문과 철학으로도 일가를 이룬 분이어서 여러 향교에 배향된 걸로 알고 있다.
노수신이 자주 다녔다는 진도향교에 못 들러서 못내 아쉬웠다. 진도향교는 어느 곳의 향교보다 아름다워서 그가 자주 산책하면서 선비들과 교유했다.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비탄에 젖은 감회를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진도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첩도 얻어서 자식도 낳았다. 진도의 풍속에도 관심을 기울여 굿하는 모습을 보고서 장편시도 지었고, 진도는 조曺씨와 박朴씨가 가장 세력이 강한 성이라는 것도 밝혔단다. 나이가 같은 사람과는 동갑회도 만들었다. 술과 서책을 벗 삼아 시렁 위의 책을 몇 번이나 읽고 취하면 시를 지었다. 그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논어>>와 <<두보의 시>>로, 읽은 수효가 2천 번에 이르렀다. 그가 대가로 칭송받고 귀양지에서 풀려 정승이 되는 데 유배 시절의 독서가 바탕이 되었다. 나중에 정승이 되어서도 진도에서 행한 책 읽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책을 많이 읽은 선비로 노수신을 빼놓지 않는다는데, 진도에서 익힌 습관이다. 유배지에서 탄생한 문집과 글들을 많이 남겼다.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생활에 비교하면 유배의 기간은 길었지만 요즘 말로 낭만적인 생활도 영위했던 것 같다. 한가로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귀양지에서의 네 가지 맛이란 시도 지었단다. 그 맛이란 맑은 새벽에 머리를 빗는 맛, 늦게 아침밥을 먹고 천천히 산책하는 맛, 환한 창가에 앉아 햇살을 쪼이는 맛, 등불을 맑히고 책을 읽는 맛이란다. 보통 사람들이 노년에 와서야 누릴 수 있는 맛을 젊은 나이에 맛볼 수 있었다. 28세부터 유배생활을 하였으니 그 기간 동안에 닦았던 학문과 객지의 생활체험은 고스란히 명재상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점이다.
진도가 예술문화의 땅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유배의 땅이기 때문이었지 싶다. 정치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은 누구나 유배를 가야했던 시대. 옛 중국에서는 중죄인은 도성에서 3,000리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땅이 작아서 섬이 유배지가 되었다.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로 큰 섬이어서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진도에 유배된 사람의 수효가 제일 많았다고 한다.
유배를 온 사람들은 학문이나 문화생활에 젖어 있던 양반지식인이어서 화려했던 날을 잊기 위하여 시, 서, 문에 몰두했고 그것이 지방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이 되었을 것이다. 남종화로 명문대가를 이룬 소치 허련이 일군 운림산방도 그와 맥락이 같다. 양천 허씨의 본향은 본래 경기도 양천일 텐데 진도에 자리 잡은 것이다. 소치의 선대 어른이 진도로 유배 와서 눌러앉게 된 연유로 소치도 진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산골짜기에 이는 구름이 숲을 이룬다는 운림산방. 몇 년 전보다 주변 정리가 매끈하고 미술관과 건축물이 들어서서 낯설었다. 이른 봄날의 꽃 잔치가 운림산방에서 열리고 있었다. 운림산방 자체가 한 폭의 산수화였다. 어느 해 여름 연꽃이 피었던 연못 주위를 배회하면서 나무 그늘에서 쉬었던 때의 연정이 피어올랐다. 추사와 초의선사의 교유가 소치 허련을 남종화의 대가로써 일가를 이루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에 인연의 소중함이 새로웠다.
세한도를 도쿄 후지스카 교수에게 빌고 또 빌어서 끝내 조건 없이 되찾아온 신화의 주인공이 진도사람 소전 손재형 씨가 아니던가. 이후 세한도는 국보 180호로 매김 되어 조선 회화사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옛날부터 명성으로만 들어오던 그의 예술혼을 이제야 진도 그의 기념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용장성 고토의 벚나무 아래서 옛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몽골과의 투쟁을 감행했던 고려 삼별초의 고난도 다시 떠올리며 오늘을 감사했다. 중국사람들이 조선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에 옛 고구려가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던 일과 몽골과의 60여 년의 투쟁을 꼽는다든가. 우리 민족의 끈기를 길이 발전해야 하리라. 마지막으로 벽파진에 올랐다. 오솔길을 지나니 지금은 항구가 된 벽파진 언덕 너럭바위에 이순신의 벽파진전첩비가 웅장하게 바다를 지키며 우리를 압도했다. 명량대첩의 역사를 적은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손재형 씨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여 쓴 것으로 웅혼한 기상을 자랑한다.
옛날 노수신은 벽파진 언덕에 있던 벽파정을 찾아 벽에 기대면서 시를 지었다. 주차장 옆 쉼터의 현대식 정자 하나가 옛 벽파정을 기리는 듯했다. 수형 좋은 벚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으며 켜켜이 쌓인 진도 사람들의 한을 풀어내기에 알맞은 <진도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려보았다.
이순신의 벽파진이라는 큰 첩의 배웅을 받고 돌아왔다. 송구하게도.
41. 전등사의 맛
전등사의 맛
늦은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맛부터 보았다. 순무물김치. 심심한 국물맛과 독특하게 알싸한 맛이 입 안에 엉겼다. 강화도 문학기행 때 강화 순무김치를 한 통 사 온 거다. 김치 담는 일을 감당하지 못해 김치를 담그지 않은지가 오래다. 그래도 선물 들어오는 게 많아서 집에 김치가 떨어지는 날이 별로 없다. 내 손에 오기까지 김치의 과정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음식을 담아준 손길을 기억하며 사람에 대한 그리움마저 먹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를 먹게 된 지는 19세기가 되어서라 했던가. 그전에는 무를 더 많이 먹었고, 오히려 무김치는 약용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단다. 조선의 역대 임금도 대부분 그랬다고 한다. 특히 영조임금은 김치를 약으로 먹었을 정도였다.
강화의 순무김치라고 하면 강화도령인 철종 임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선대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도령은 강화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헌종이 후사가 없자 철종은 갑자기 농부에서 원하지 않는 임금이 되어야 했다. 조선 후기부터 왕자가 귀해지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국운이 쇠해지고 있던 혼란한 시기였다. 사랑하는 강화 처녀와 결혼하여 오순도순 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처자와 헤어져야 했다. 철종은 궁에 들어와서도 강화 순무김치를 좋아했단다. 순무 김치를 먹으면서 강화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순무김치를 먹을 때마다 나 또한 강화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철종 임금은 오죽했으랴.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였다.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조정이 피난했던 곳이다. 강화 섬 둘레의 요새마다 진(陣)과 돈대가 많다. 초지진에 올라보니 잿빛 바닷바람은 우중(雨中)임에도 시원했다. 평화롭고 그 잔잔한 바다가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전장일 때가 있었던가 싶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 군함 등 근세 외침에 맞서서 줄기차게 싸웠던 격전지였다. 수문장처럼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어찌나 멋이 있던지, 진을 보초 서는 전사의 혼이 서린 듯 당당하게 보였다.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까지 근 40여 년 동안 몽골과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 동료와 강화 전등사를 방문했지만, 어느 곳인지 기억이 가물거릴 뿐이다. 아치형의 성문 앞에서 하얀 모자를 쓴 젊은 날의 초상 한 장이 남았는데, 이번에 보니 그곳이 삼랑성 문이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기에 인근의 마니산에 천제단이 세워진 것인가 싶다. 바로 그 삼랑성 안에 전등사가 있다. 아마도 국내의 사찰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절일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 했는데, 고려 충렬왕의 정화공주가 경전과 옥 등을 헌납한 뒤로 전등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단다.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史庫)를 지키는 호국의 임무도 담당하였다
지닌 세월의 흔적은 경내의 거목들이 말하고 있다. 가물던 차에 온종일 비가 내렸지만, 그렇게 세차게 내리지 않아서 우산을 받고 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짙은 추색(秋色)에 덮인 전각 처마와 어울린 나뭇가지들이 어찌나 새뜻하고 아름다운지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감탄사를 토했다. 역사의 풍상을 기억하는 듯 비에 젖은 거목들의 옹이에서 무언가 간절한 이야기가 터질 것 같아 우러러 살펴진다.
오래전부터 들었던 전등사 나부상(裸婦相)의 전설. 대웅전에 들기 전에 먼저 전각의 네 귀퉁이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부상을 찾았다.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처마공포를 받치고 있다. 긴 세월 나부는 얼마나 많은 목탁소리와 스님의 염불 소리를 들었을까. 이제는 내려와 옷을 입고 여염집 부인으로 살아도 좋을 만도 할 텐데...…. 벌써 깨달은 바 있어서 내려올 필요도 없어졌을까. 그대로 편안하여 그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대웅전 앞에 커다란 나부상 조각 작품이 보초처럼 앉아 있다.
나부상의 전설은 이미 많이 퍼지고 그에 관한 글도 많아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옛날 대웅전을 지은 대목수가 마을의 주막집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삯을 받으면 그 여인에게 다 맡겼다. 나중에 혼인하면 집도 장만하고 잘살아보자는 뜻이었겠다. 그런데 얼마간 지난 다음에 그 여인은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서 도망쳐버렸단다. 목수는 분을 참지 못하여 그 여인을 욕되게 벌하자는 생각에서 벗은 몸으로 대웅전 처마를 받치고 있도록 한 것이란다. 몇 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나부상은 전등사의 보물이 되어서 오는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 나부상 앞에서 사랑의 맹세를 하면 절대로 헤어지는 일이 없으리라. 그 긴 세월 말하는 뜻이려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 맛, 예술이다!’ 독특하게 맛있는 음식에 주는 감탄이다. 소박하게 맛있는 강화 순무김치를 아껴서 먹었다. 강화의 기억까지 새록새록 맛보며. 맛이 곧 멋이던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추억에서 멋까지 풍겨 나오니 예술의 근원이 맛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순무김치는 그 어느 해 석모도 보문사에서 취했던 낙조를 떠올리고,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를 되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음식이란 지역의 풍토에서 자란 재료와 고유한 손맛에 따라 특유한 맛이 나오게 된다. 같은 지구촌이라도 각 나라마다 사람의 생김새와 생활 문화가 다르다. 그 지역의 자연 환경과 풍토에서 나오는 재료의 지닌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묘한 개성과 차이가 있을 뿐, 그 다양성이 어우러지면서 멋진 예술이 탄생했으리라.
사찰의 공양 간에는 이런 공양계가 붙여져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허물을 모두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부끄러움 없이 음식을 받을 만한 자격이라면, 각각의 인생도 삶의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체험이 조화롭게 배여 맛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인생 자체가 예술이리라. 전등사의 나부상이 멋진 예술품이 된 것처럼. (2015)
42. 역동적인 부산
역동적인 부산
부산은 길의 도시다. 부산의 역사는 길이 열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적으로는 경부선의 철길과 부관 연락선이라는 바닷길이 서로 뚫리면서 동래가 아닌 부산이 도시로 형성된 것이다. 부산은 항만 도시로도 유명하다. 세계 6대 항만에 들어간다고 한다. 항만 시설이 잘 되어서 컨테이너 하나를 배에 실어 올리는데 2분밖에 안 걸린단다. 부산은 우리나라 항구 중 가장 큰 항구도시가 되었으며, 제2의 도시로 불리는 것은 한국전쟁 때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부산을 알려면 동래부성으로 가야 한다. 전국의 주요 도로로서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한 아홉 개 대로가 있었다. 그중 부산은 영남대로로 한양과 이어졌다. 영남대로에는 좌도, 중도, 우도 세 갈래 길이 있었다. 그중 중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영남대로이며 가장 많이 사용된 도로였다.
지난겨울에도 부산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전에 없던 하늘에도 길이 열려 있었다. 다리의 도시 부산에는 영도다리가 있다. 내 기억으로는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의 명물이라 하면, 영도다리와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이었다. 길이라면 서대신동이나 동대신동, 나는 어렸을 때 대신동에 살았다. 대신동에서는 송도해수욕장이나 국제시장까지 걸어 다녔다. 그래서 길이라면 소위 서쪽 전통적인 동네라고 할 수 있는 대신동에서 길게 휘어진 도로 하나로만으로 기억한다, 9.28 수복 때 개성까지 갔다가 1.4 후퇴 때 부산으로 다시 와서 구덕산 기슭의 천막교실이 공부했던 기억이 내 어릴 적의 추억 아닌 추억이랄까. 한참 뒤에는 구덕 터널을 지나면 동부산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다. 영도다리를 건너면 내 친구네 집이 있던 청학동이 있고 태종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쯤에서 해운대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지 싶다.
조용했던 어촌마을 같았던 해운대 해수욕장에 관광호텔이 하나 세워졌을 때 구경 갔고, 몇 십 년 뒤에 광안대교가 개통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다시 관광 차 다녀왔다. 그리고는 친척들의 행사에 다녀올 뿐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부산시 사상구 근처에 가면 도시 교통의 정체로 인하여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도시 고속도로가 세워졌으며, 부산의 인근 도시로 연결되는 길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서 어느 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가 없다.
2015년 9월 12일, 영호남수필문학회가 부산에서 열렸다. 내 어릴 적 놀던 마당 같았던 송도해수욕장 해안에 있는 송도비치관광호텔에서 묵게 되었고, 송도스포츠센터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다. 겨울에 갔을 때도 해변을 걸으면서 주위릐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면 어느 먼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거리감에 졸랐다. 송림으로 우거진 언덕의 소나무만은 우람하게 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잎갈이를 했던지, 거북등 같은 나무껍질에나 옛날이야기가 쓰여 있을지 쓰다듬어볼 뿐이었다. 모래도 물도 그때의 것이 아니기에, 송도해수옥장이 한눈에 보이는 창이 있는 호텔 방에서 일출을 맞는 기분은 어느 먼 나라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야릇한 감회였다.
송도에서 영도까지 남항대교가 세워졌다, 하늘에 떠있는 북항대교는 나선으로 이어졌다. 놀이 기구를 타는 것 같은 묘기를 체감했다. 그래서 부산은 하늘에도 길이 있는 길의 도시가 되었다.
어촌마을의 해수욕장이 있던 해운대는 우리들이 자주 다녔던 유원지며, 일출을 보러 새벽에 가끔 달려갔던 장소였다. 뉴욕을 방불케 하는 수영만에서는 국제 요트 대회가 열리고 해운대 주변은 완전히 국제도시가 되었다. 광안대교는 수영구 남천동과 센텀시티를 잇는 74키로미터. 복층 구조 8차선 다리다. 백스코 등 부산시립미술관도 여기에 있는데, 몇 년 전에 부산비엔날레가 열려서 세계의 예술가들이 한자리에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한 적도 있었다.
조용하던 동백섬에 국제회의장이 세워지고 해안은 말끔히 도시형 해안풍경이 되었다. 2005년 11월 부산 APEC 제2차 정상회의가 열린 ‘누리마루’에 들어서니, 정면에 12장생도가 화려하게 걸려 있었다. 모두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시아. 태평양 21개국 정상들의 국기와 대통령 얼굴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회의장에는 그 당시의 식사 메뉴와 선물한 한복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건축물 구석구석에 한국을 상징하는 단청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한복을 입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푸른 바다에 떠있는 광안대교와 오륙도를 조망하며 나누었던 환담처럼 우리도 그리했다. 딴 나라에 온 것처럼. 누리마루에서는 광안대교의 현수교와 해운대 마린시티를 가까이 조망할 수가 있다.
전라북도에 살게 되면서 아름다운 산과 들의 풍경에 늘 감탄하지만 때로는 내 안의 바다가 꿈틀거릴 때가 잦았다. 역동적안 국제 도시 부산 관광을 마치고 전주로 들어서면 고즈넉한 조선 시대의 거리로 들어서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다시 새로운 전통의 한韓 바탕 길에 어떤 무늬를 그릴 것인가를 생각한다.
4부 아름다운 시절, 끝
1.영원한 미소
25.불국사 다보탑
31.백제탑
5부
늙은 가지에도 꽃은 피나니
구소를 날아 옛 선인을 뵙다
보원사지를 거닐며
백장암 삼층석탑과 남원 실상사
가락국의 장군차를 찾아서
다솔사
늙은 가지에도 꽃은 피나니
쌍계사 벚꽃길
르네상스 미술 기행의 초대
후기
작품해설 - 전일환(수필가,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 조윤수 제5수필집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옛 향 깊은 작가의 수필세계
43. 구소九宵를 날아 옛 선인을 뵙다
-보령 성주사지
구소를 날아 옛 선인을 뵙다
-보령 성주사지에서
햇살 좋은 어느 가을날 그리운 누군가를 만날 듯 길을 나섰다.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쳐진 산 아래 햇살만이 가득한 빈 절터. 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 성인이 주석했던 절이었다는 것을 이름으로 짐작했다. 거기에는 낭혜화상탑비가 있었다. 언젠가 꼭 가보리라 하고 생각한 날이 바로 이날이다. 낭혜화상탑비명은 그 유명한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4개의 비문은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보령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315호),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에 적혀 있는 금석문이다. 대숭복사비는 비문만 남겨져 있고 비석은 없다. 낭혜화상탑비를 못 봤기 때문에 꼭 보고 싶었다. 비문을 읽을 수는 없지만,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글의 흔적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탑비를 세울 만한 선사가 주석했던 절이면 큰 법풍을 일으켰기 때문에 분위기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런 절이 있는 곳이면 산세와 풍경이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없지 않은가. 비어 있어 허허로운 절터의 영화로웠던 때를 상상하며 생성과 소멸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들판에 작은 석탑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기슭 풀만 무성한 평지에 한때는 불전이 50칸이고, 행랑이 800칸이었다니! 군에서 나온 일꾼들이 풀을 깎고 있다. 여유 있게 묵상하듯 둘러보자니 일꾼이 다가와서 신기하여 묻는다. 내가 교수나 학자처럼 보인단다. 해바라기 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모두 시들고 있다. 입구로 보이는 곳 계단으로 올랐다. 계단을 오르면 석등이 먼저 불을 밝힌다. 석등은 간결한 모습이다. 기단 돌 위에 복련을 조각한 받침돌에 팔각기둥을 세우고 앙련 조각 받침 돌 위에 화창석을 세웠는데, 상륜부는 없어졌다. 8각 지붕 처마 밑에 8면에 화창이 열려 있다.
5층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의 것으로 조촐하고 우뚝한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1탑, 금당, 강당 일원 식의 도량인 것 같다. 금당 터에는 연화 좌대가 당당하게 놓였는데, 어쩌면 석불상이 놓여진 곳이리라 짐작된다. 금당 터와 강당 터 사이에 3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서 이상했다. 이렇게 석탑들이 즐비하게 배치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탑들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들은 본래 이 절터에 있던 것이 아닌 듯한데, 아무도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를 모른다.
낭혜화상탑비는 탑 군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다. 처음에 발견될 때는 길 가에 묻혀 있었던 것을 보수해서 세웠고, 지금은 보호각 안에 있다. 내가 본 비석들 중에서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드물게 웅장하고 기골이 장대하다. 귀부의 몸통은 거북 같지만 머리는 불을 뿜는 용의 모습 같은데 오른쪽 얼굴이 심하게 깨져서 안타깝다. 오석에 새긴 5,000여 자의 글자는 또박또박 선명하게 파여 있는데, 이럴 때면 그 글자를 읽을 수 없음이 애석하다.
낭혜화상이 성인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그 덕이 빛났기에 성주사란 이름을 하사 받은 것이리라. 최치원의 사산비문이 늘 궁금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전의 훌륭한 문장이기 때문에 한국학 연구에 필수적인 금석문이란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이라고 한다.
낭혜화상탑비명 번역문을 찾아 읽었다. 한문을 잘 모르니 어떻게 대문장가라 하는지. 하지만 번역문으로도 그의 문장은 내가 감동받기에 충분했다. 부드러운 태도와 알맞은 비유로 표현한 글에서 선사의 인품과 공덕을 알 수 있었다. 낭혜화상의 불덕을 얘기했을 터이지만 읽는 나로서는 최치원의 인품이 그 안에 함축되어 나타나는 것 같았다. 모든 글에는 짓는 사람의 인생이 배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이 땅에 탑비를 남긴 선사들의 염력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성주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 것과 같은 분이셨다. 전에 나의 부왕(父王 : 景文王)과 헌강왕(憲(獻)康王) 모두 스승으로 섬기셔서, 오랫동안 나라에 이로움을 주셨다. 나도 왕이 되어서는 선왕들의 뜻을 이으려 하였으나, 하늘은 (그런 분을) 남겨주지 않았다. 이에 나의 마음이 더욱 애달프다. 생각건대 큰일을 한 사람에게는 큰 이름을 주어야 하므로 시호를 ‘대낭혜(大朗慧)’, 탑의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고 하노라.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 가서 벼슬하고 이제 출세하여 고국에 돌아왔다. 전에 나의 부왕께서 (그대를) 국자(國子)로 뽑아 공부하게 하였고, 헌강왕(憲(獻)康王)께서는 (그대를) 국사(國士)로써 대우하였으니, 그대는 국사(國師)의 명(銘)을 지어서 그 은혜에 보답함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치원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 저의 글이 벼에 알맹이는 없으면서 쭉정이만 많고, 계수나무에 향기만 있듯 실속이 없음을 용서하시고, 글을 지어 은혜에 보답하라 하시니 진실로 뜻밖의 행운이옵니다. 다만 대사(大師)께서는 유위(有爲)의 세상에서 무위(無爲)의 신비한 가르침을 널리 펴셨는데, 소신(小臣)의 한계가 있는 하찮은 재주로써 그 끝없이 큰 행실을 기록하려 한다면 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긷고자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행여 돌이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거나, 거북이 돌아보는 신조(神助)가 없으면 결코 산과 시내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숲과 골짜기의 물에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부디 글 짓는 것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사양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면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대는 힘써 행하라.”라고 말씀하면서 크기가 방망이만 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어 내시로 하여금 전해주었는데 곧 (대사의) 문하 제자들이 올린 (대사의) 행장(行狀)이었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선불교가 8대 조사인 마조도일, 9대 조사 마곡 보철에 이어 10대에 와사 신라의 낭혜화상 무염국사(801-880)로 그 맥이 이어진다. 무염은 중국의 선맥뿐 아니라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 다선불이(茶禪不二)의 차풍도 이어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서기 845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받아 귀국한 무염은 지금의 충남 보령 만수산 북쪽 기슭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열었다. 무염국사와 동시대 신라의 학자인 김립지가 쓴 <성주사사적기>에는 차인들이 목마르게 찾고 있는 차(茶) 자(字)가 나온다고 한다. 차는 향과 더불어 스님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물이었다. 무염의 일생이 기록된 낭혜화상탑비에는 차와 향을 뜻하는 ‘명발’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당시 문성왕도 갓 귀국한 무염에게 차와 향을 올리며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9대 조사인 마곡이 누구인가. 단순한 마실 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차(茶)를 선에다 접목시켜 선의 화두로 끌어들인 8대 조사 마조도일의 제자이다. 마조도일의 문하에는 걸출한 차의 달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불전이나 사원의 각종 의식에 차를 올리게 하면서 사원 차례의 바탕이 된 백장청규를 남기고 백장회해(749-814), 또, "차나 한잔 하고 가게"라는 공안의 주인공인 조주(趙州) 등이다. 무염은 당대의 걸출한 선배조사들의 차풍을 고스란히 신라로 가져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 서울 낙양 불광사에서 마조의 법손인 여만이 무염을 처음 보고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다. 뒷날 중국이 선을 찾는다면 장차 동이(東夷)에게 묻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무염국사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겼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이 마신 물로 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고 저 사람이 먹은 밥으로 내 굶주림을 구하지 못한다. 어찌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아니 하느냐.”
차를 수행 처와 생활 처로 알고 사는 나로서 차와 인연 깊은 무염국사 비를 만나고 선다일여의 성지에 온 것 같아 가슴 메이는 그리움에 싸인 시간이었다.
43-2. 보원사지를 거닐며
보원사지를 거닐며
여린 햇살이 다정했던 어느 가을날 오후. 보령 성주사지에 다녀오는 길이다. 먼, 먼, 그날들을 회상하며 성주사지에서 따뜻한 마음을 챙기고 돌아오는 길. 서산을 들러서 보원사지를 걷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폐사지(敝寺址)를 찾는 일이 좋아졌다. 답사할 때는 같이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가지만, 다시 찾아 흘러가버린 시간의 폐허에 젖고 싶은 마음이 남는다. 무한한 상상 속에서 그날들과 오늘과 미래에 겹쳐진 세월의 의미를 더듬어 보고 싶은 건가?
충청남도 지방은 예부터 살기 좋은 내포지방이라 하여 조선시대 벼슬자리나 차지했던 사람들은 내포 지방에 땅과 집을 소유했던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백제시대부터 태안과 서산 지역은 중국과의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점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에 따라서 불교문화도 융성했던 것 같다. 옛 사람들은 거석과 거목들을 숭배하였다. 그런 거석에다 불상을 조각하였으니 종교심은 더욱 컸으리라. 나도 석탑과 석불을 만나기를 좋아하고 거목들을 바라보기 좋아한다. 딱히 뭔가를 기원한다기보다 알 수 없는 시간의 힘이 느껴져서일지 모른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 보원사지 삼거리에서 조금 들어가자면 너른 들판에 우뚝 솟은 당간지주와 마주하게 된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한창 발굴 중이었다. 그동안 모든 발굴이 끝나고 터가 정리되었다.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당간지주는 언뜻 보면 간단한 구조인 것 같으나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에서 많은 예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보물 제103호이다. 당간지주 뒤로 절터의 가운데 자리쯤에 5층석탑이 보이고 산기슭 아래 탑비가 멀리서도 보인다. 도랑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마당으로 들어서면 5층석탑 앞에 선다.
5층석탑은 언뜻 보아도 통일신라시대 후기와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은 얇고 넓게 펴져서 끝이 살짝 치켜든 것이 백제 양식이고, 옥개석 층받침이 4층인 것은 신라 식이며, 각 층의 몸돌을 받치는 굄석을 하나 더 받쳤다는 것은 고려 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탑 전체의 모습은 미려하고 경쾌하여 아름답다. 기단부의 면석에 팔부중이 합장하고 있는 모습을 돋을새김의 조각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고도 또렷하다. 제1층 탑신 각 면에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는 정상에 노반석이 놓였고 그 위에 긴 찰간이 꽂혀 있을 뿐 다른 부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절은 고려 때에 중창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탑도 세워졌을 것이라고 한다. 보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절터의 맨 뒤쪽 산기슭 아래 부도와 탑비가 유려하게 서 있다. 바로 보물 제105호인 고려시대의 고승 법인국사 탄문의 부도와 탑비이다. 부도, 즉 승탑은 바닥 돌부터 지붕돌까지의 단면이 8각으로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을 따랐다. 아래받침돌은 윗단과 아랫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단은 옆면의 각 면마다 1구씩의 안상이 조각되었는데, 안상 안에는 각각 모습을 달리한 사자상이 1구씩 돋을새김 되어 있다. 윗 받침돌의 옆면에는 구름무늬와 용무늬를 돋을새김 하였다. 용머리의 부리부리한 눈과 코, 입 그리고 몸통의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위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불교가 융성하던 시절의 석물들은 화려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재미를 더한다. 보물 제106호인 법인국사보승탑비. 전체 높이 450센cm. 너비 116.5cm. 장쾌한 느낌을 주는 탑비의 머리장식(이수)은 상부에 용이 양쪽에서 노니는 연못을 새기고,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겨 용이 사방에서 모이도록 조각하였다. 비석의 받침은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이만한 승탑과 탑비로 기념할 만한 승려라면 과연 어떤 분인가.
법인국사 탄문은 신라말, 고려초의 명승으로 고 씨이며, 968년 (광종 19)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 왕은 '법인'이라 시호를 추증하고 '보승'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고려 초기에는 구양순체를 쓴 대가가 많았다는데 그중에서도 이 비석의 글씨는 백미에 속한단다. 역시나 글씨를 읽을 수 없음이 이럴 때 아쉬울 뿐이다.
이밖에도 서산시에는 해미읍성과 유서 깊은 개심사가 있다. 보원사지 뒤쪽 산을 오르면 개심사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 것 같지만, 언제 그 길을 걸어가 볼 수 있을까. 벌써 가을바람이 햇살을 서서히 밀어내고 있다. 황량한 들판 같지만, 긴 세월 100여 칸이나 되는 전각들이 남긴 석물들이 한가득 마당을 차지하여 옛날의 영화를 증명이라도 하는가. 입구의 물통으로 쓰였던 널찍한 석조도 휑뎅그렁하게 수풀 속에 버려진 듯 있지만, 그 옛날의 분주한 역할을 했던 기억만은 담고 있는 것 같다.
보
보원사지 오층석탑
법인국사 승탑
서산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국보 제84호)
서산에서 용현계곡을 지난다면 반드시 마애삼존불을 만나고 가야 한다. 보원사지를 찾으면서 태안의 마애삼존불과 백제의 미소라 일컬어지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을 떠올리게 된다. 서산마애삼존불을 두어 번 찾은 적이 있다. 삼존불의 미소만은 항상 내 마음에 들어있다. 최근에는 삼존불의 보호각을 걷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산 중턱 벼랑 바위에 새긴 삼존불. 본존불은 머리의 보주형 육계는 작지만, 머리 부분에 영기 무늬가 또렷한 광배가 부처를 더욱 환하게 하여 그 친근하고 푸근한 미소가 가까이 느껴지게 한다. 우협시보살은 본존과 같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보주를 잡고 있다. 발밑에 복련(覆蓮) 연화좌가 있다. 좌협시보살은 또 어떤가, 반가사유상인데 그 천진스런 미소라니! 두 협시보살 모두 미소를 풍겨주는 광배가 있다. 이런 삼존상은 <<법화경>>, 즉 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단다.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사료라고 한다. 그런 사료적 가치는 몰라도 된다. 거대한 바위 안에서 걸어 나와서 우뚝 서버린 부처들이 그렇게 천년의 미소를 짓고 있을 수 있는가. 누구를 향하여! 물어야 하지 않을까.
고대의 석공들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무심한 벼랑 돌 속에서 부처를 끄집어낼 수가 있었을까. 조각가들은 어느 질료를 보면 그 안에서 어떤 형상을 보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것은 또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신전에 모시기 위해서 돌을 캐어서 신상이나 여인상으로 조각하였다. 그리하여 신을 숭배하도록 한 것이리라. 우리 삼국시대의 조각가들은 어땠을까. 누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불국을 위하여 나라를 튼튼한 기반에 서게 하여 보호하도록 국가 이념이 석공들을 재촉한 것인가. 원인이 곧 목적인 바지만, 그 시대 최고의 작가들의 예술 혼을 불태워 그토록 아름다운, 세월을 넘나드는 예술품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로 인해 벌써 이 시대 사람들은 모두 부처나 신이 되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일까.
어찌 돌덩이나 청동조각에다 미소를 그려낼 수가 있단 말인가. 특별한 예를 갖추지 않아도, 위엄을 내려놓은 부처 앞에서 누구나 편안하게 마주 미소 지을 수 있지 않은가. 마음이 울적하거든 이 백제의 미소를 만나보시라.
태안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역시 백제시대의 불상이다.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태안읍의 진산이라는 그리 높지 않은 백화산 등성이에 있다. 마애불 아래는 현대에 조성한 절이 있다. 우리는 그 절에는 들어가지 않고 태안마애삼존불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 답사한 적이 있다. 보물이었던 태안마애삼존불은 2004년 국보 제30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백제의 초기 불상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기원한 마애불은 한국에 와서는 독특한 한국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도 백화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은 마애불을 조성하기 쉬운 괴석이 많다고 한다. 태안 백화산도 작고 아담하지만 서해안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경관과 기암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도 알 수 없는 것은,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이 보살상으로 작다는 것이다. 좌우 협시가 부처상이라는 점이다. 중앙에 보살,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좌우의 불상은 중앙의 보살보다 상대적으로 큼직하여 1보살, 2여래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를 보여주는 특이한 구도인 것이다. 그 당시에 관음보살 숭배 사상이 유행했던 것일까. 서산마애삼존불은 그 조각 솜씨가 빼어난 데 비하여 태안마애삼존불은 형식도 특이하고 많이 마모되었지만, 경외심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앞선 형식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얼굴은 살이 붙어 양감이 있는 데다 근육이 팽창되어 강건한 인상을 보여 주고 있다. 백제가 융성했을 때 조성한 것이 아닐까. 모든 예술품이 그러하듯 그 시대의 작가의 특성이 잘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중국과의 교역이 많았던 백제였기 때문에 불상 또한 수나라 불상의 장대한 양식 계열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전문가의 이론이 짐작된다.
거대한 보원사지의 터에 설 때면 백제의 융성했던 문화미를 생각하게 된다. 보원사지가 백제시대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지(寺誌)나 사적기(寺跡記) 등의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단다. 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이 6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보원사지 근처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과 태안마애삼존불이 서로 연관이 있는 시대 불상이란 것을 짐작하게 된다.
44. 백장암 삼층석탑과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과 실상사
지난해 초파일 때 백장암을 다시 찾았다. 탑 주변의 넓은 터에 대웅전이 세워져서, 전연 새로운 절이 되어 있었다. 대웅전을 지은 뒤로 그 석탑을 옮겨 세운 것처럼 보였다. 사실 국가문화재는 옮길 수가 없는 것을…. 물론 백장암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자동차로 구불구불 올라갈 수 있다. 상전벽해라 하던가? 백장암 알기를 40여 년이나 되었으니. 백장암 삼층석탑은 제대로 모습을 갖춘 것 같아서 다른 사찰 불사 같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지리산 천왕봉의 중턱쯤 되는 산허리라서 대단히 높다. 산아래를 내려다보는 경치도 마음을 씻어내기 충분하다. 스님들이 반가이 맞아주어서 저녁 공양까지 대접받았다. 옛날이야기를 했더니 대나무 숲으로 올라가면 선방이 있으니 올라가보라고 했다. 대나무 숲 속의 계단을 오르자니 그때야 그 옛날의 정취가 되살아났다. 선방 옆의 요사체 작은 방에서 잠도 자고 난생 처음으로 아궁이 장작불 지피는 체험까지 했던 때. 아! 옛날이여, 지금은 어떤 나로 어찌 여기 있는가?
남원에서 인월 가는 버스를 타고 백장암 입구에서 내리면 산길을 걸어야 했다. 길도 포장되지 않았고 가파르고 험한 돌길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내 인생이 치열했던 시기였던가. 인생의 물음표가 많았던 때였던 것 같다. 겨울엔 눈마저 쌓인 길도 기꺼이 올랐다. 백장암 주지 스님은 불교 신도인 친구 소개로 내 다실(茶室)에 찾아오셨다. 몇 마디 담소 끝에 그분이 말했다. 내가 천주교 옷을 입었지만, 내용은 불심을 담고 있다고. 차로 인해서 알게 된 스님 몇 분의 영향으로 신도 아니면서 불교에 관심이 생겼을 때였다. 내가 편지를 잘 쓴다고 바로 버리지 못하고 한동안 간직하기도 한다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 몰라도 불교와 인생에 대하여 내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때는 다구(茶具)를 좀 챙겨 오라고도 하고 명상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하도록 부르기도 했다.
그 시절엔 몰랐다. 우리 문화재의 미감에 대해서. 암자 입구까지 올라오면 근처의 밭 옆, 담장 안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었다. 의미도 모른 채 경외심이 들어서 반드시 탑돌이를 하고 선방으로 올랐다.
박물관에 자주 가게 된 인연으로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그 뜻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특히 석탑을 보러 다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답사 객들과 찾은 백장암. 옛날의 백장암이 아니었다. 주변 담장과 밭 등을 모두 뭉개버린 벌판에 탑만 우뚝 서 있었다. 다시 본 석탑은 국보 10호였다. 처음 만난 아름다운 조각미였다. 돌도 화강암이 아닌 검은색을 띤 벼루 같은 돌이다. 그 모양새를 자세히 봐야 했다.
기단석에서부터 삼층 지붕까지 거의 크기가 일정한 비례로 조촐한 크기에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자태다. 통일신라의 전성기에 석가탑이 전형적인 삼층석탑이 된 이후 뿐 아니라 그 모든 시대의 석탑들과는 다르게 자유스러운 구조로 만든 이형(異形)탑이다. 일층 몸돌만은 길다. 이층과 삼층의 몸돌의 크기는 비슷하다. 일층 탑신의 받침돌과 이층과 삼층의 몸돌에 목조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난간을 돋을새김 하여 둘렀다. 이 난간의 생경한 구조가 바로 앞 석등의 중대석에서도 볼 수 있다. 그 평난간의 새김이 감탄을 자아낸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목재 같은 느낌의 문살을 짜 넣은 것이라니! 각 몸돌에는 신장상과 보살 입상, 주악 천인상 같은 인물상이 섬세하게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조각되었다. 각층의 지붕돌 밑의 연꽃 받침의 양감도 얼마나 두드러지는지, 육감적인 섬세함이 탐스럽기조차 하다. 백장암 석탑의 상륜부에는 방형의 노반석 위로 복발, 보륜, 보개, 수연 등의 부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는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의 상륜부와 관련이 깊다.
남원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의 하나로 평지 사찰 중의 보물이 많은 절이다. 특히 동서 삼층석탑이 상륜부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어 불국사 삼층석탑을 보수하는 데 참고가 되었다고 하던가.
양 석탑 뒤, 보광전 앞 석등의 아름다움은 압도적이다. 석등의 불빛창에 불을 밝히기 위한 석대가 있는 것은 그 어느 석등에도 없는 유일한 것이다. 석등도 석탑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변천 따라 그 양식이 변모해 왔다. 신라 후대에 몸돌이 장고형인 것이 나타났는데,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이 가장 크며, 임실 지구사지에도 그와 비슷한 석등이 있다. 그중 실상사의 석등은 모양과 크기와 석대까지 온전하게 그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넓은 기단 터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기단석의 복련(覆蓮) 끝에 세 개의 귀꽃이 달려 있다. 그 귀꽃은 지붕돌과 상륜부에도 있어 전체적 통일미를 나타내는 데 결정적 역할이 되는 것 같다. 어떤 마음이 이런 예술 형태를 구상하게 되었을까. 모든 작품은 만든 사람의 생각에 불심과 시대정신을 담은 예술 혼이 새겨져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정신이 오늘에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까. 때때로 석조 예술 작품 앞에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실상사 약사전에는 거대한 여래좌상철불이 있다. 상채가 길어서 입상처럼 보일 정도다. 철불은 천왕봉을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이 닿아 있단다.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 자세라든가. 사실 이 지방은 고대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단다. 홍척 스님이 절터를 찾을 때 이곳에 절을 세우면 왜구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다는 예시를 받았단다. 보광전 안에 동종이 있는데 종의 표면에 일본 지도 같은 무늬가 있다는데, 그곳을 치면 왜구가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단다. 사실 그 무늬를 나는 인식할 수는 없었다. 약사전은 단일 전각이지만 팔작지붕에 꽃살문과 귀공포 조각도 아름다워 볼만하다.
남원지방은 역사와 문화가 뒤엉켜 있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실상사 근처에는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황산대첩비가 있고 인월에는 이성계가 황산 전투 때의 흔적인 피바위가 있으며, 인월이란 말에도 달빛이 비추어 전투를 잘하게 되었다 해서 그 지방 이름이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또한 실상사 뒷산에는 후백제의 연호인 정개(政開)가 새겨진 승탑이 있으며 여원치마애불과 신계리에도 석불좌상이 있다.
백장암 삼층 석탑 같은 명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그만한 바탕 정신과 정서가 있었던 것이 아니랴! 남원지방은 이야기의 보고다. 남원의 아이콘인 춘향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현대까지 리메이크되고 있다. 남원시 산내면 백장암 계곡 가는 길에는 쌈지 공원이 하나 있다. 변강쇠와 옹녀가 팔도를 유람하다가 지리산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전설에 바탕을 두었다.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여섯 마당 중 하나인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 황부가)>에 등장하는 변강쇠와 옹녀를 주제로 남원문화원이 1998년에 조성하였다. 옹녀탕, 음양바위, 태아바위 등의 명칭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팔도의 장승을 비롯하여 변강쇠와 옹녀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당간형 솟대 등이 있다.
귀신과의 사랑이야기가 탄생한 남원 만복사지가 있다. 김시습의< 만복사 저포기>의 배경이 된 곳이다. 차(茶) 일 때문에 교룡산성 밑 대복사에 자주 갔을 때, 가까이 있던 만복사지에도 갔었다. 고려 때의 절터였던 것으로 아는데, 고려 식의 5층 석탑도 보기 좋거니와 광배가 찬란한 석불 좌상도 있으며 전각 터였을 너른 잔디밭에 석련대가 있다. 아마도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그쯤 될 것이라고 한다. 초파일 오색 연등 아래서 마시는 차 맛은 오묘한 세월의 맛이었다고 할까.
갑자기 빈 들에 대형 석인상이 서 있다니! 반드시 서 있지 않고 살짝 돌아보는 이국적인 인물상. 육감적인 자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나 인상만은 무섭다. 옷 주름도 양감 있게 두드러져 있지 않은가. 최근 남원지방 답사 때 알았다. 내가 대복사에 자주 다닐 당시에는 사지 입구의 당간지주 근처에 커다란 돌덩이가 묻혀 있었다. 몇 년 전에 그곳을 캐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물상 당간지주였을까? 위아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다. 당간지주석을 인물상으로 구현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실상사가 200여 년 폐사로 있을 동안 스님들은 백장암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새로 발견한 백장암 석탑미로 인하여 그 아름다운 석물이 나오게 된 배경을 재삼 생각해보면서 무한한 상상력 속에서 생기를 얻게 된다. 장소는 무릇 생동감이 있을 때 가고 싶고 머무르고 싶어져서 새로운 정신으로 나갈 출구를 찾게 되는 곳이 되지 않을까. (2016)
39. 대한민국을 참배하다
45. 가락국 장군차를 찾아서
장유사
김해시 장유면의 불모산(佛母山)에 있는 장유사(長遊寺)를 찾았다. 불모산이니, 부처의 어머니 격인 산으로 보아 유서 깊은 산이다. 입구에 장유폭포가 방문객을 먼저 맞이하고 있으며, 계곡이 수려했다. 아직 새잎이 나지 않은 잡목이 우거진 산에 봄의 기운이 서리는 듯했다. 절은 산의 정상 바로 아래의 가파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수로왕과 처음 만났다는 곳이 장유사라고 한다. 공주와 수로왕과 공주의 오빠라는 장유화상의 설화가 묻어 있는 신비로운 절이다. 허왕후가 수로왕을 만났을 때 장유사는 지금의 이런 절은 아니었을 것이며, 이 높은 고개까지 올라올 필요도 없었으리라. 지금의 장유사 고개쯤에서 만나고 준비된 행궁에서 결혼식을 했지 않았을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보면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얽힌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2만 5천리의 긴 항해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 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
설화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김해시에는 이야기의 두 주인공인 김수로왕과 허 황후의 능이 현존하고 있다. 황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의 돌탑이 이천 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허보옥은 동생의 신행길을 함께 왔는데, 그는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보아 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설경하고 산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여, 장유불반(長遊不返)이니 장유화상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유화상은 허 왕후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하며 수로왕의 7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리산 반야봉 칠불사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 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가 3년간 불법을 수도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들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장유화상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그 뒤 다시 지리산을 찾은 왕후를 장유화상은 반가이 맞으며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만나라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을 보니 황금빛 가사를 걸친 금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칠불사를 세웠다.
칠불사에 가면 근처에도 차나무가 많다. 또한 조선 후기 차문화를 부흥시킨 초의선사 동상도 최근에 세웠다. 초의 선사가 여기에 머물면서 동다송을 집필했기 때문이지 싶다. 허 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차 씨앗은 여기에도 전해질 수 있었지 싶다. 칠불사 밑 쌍계사 주변에 차나무의 시목지도 있으니 서로 상관이 있을 것도 같다.
현재 장유사에는 장유화상 사리탑으로 알려진 8각 원당형 부도가 있지만, 양식상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의 허왕후 신행길 수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에 적혀 있다고 한다. 역시 후대의 기록이다. 장유화상에 대한 설화는 허왕후 도래설화의 불교적인 유색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장유화상이 암자를 짓고 수도했을 때는 작은 암자 정도였겠지만, 2천 년을 지나오면서 몇 번의 전환기가 있었으리라.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 장유화상의 승탑이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양식이란 점에서 그 무렵에 절집이 세워지고 또 전쟁으로 없어진 후, 최근에 절집의 규모가 갖추어진 것 같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탑루와 너른 마당 산기슭에 대웅전과 요사채, 그 뒤 높은 곳에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 서면 산 아래는 안개 바다 그 자체다. 옛날에는 맑은 날이면 지금의 김해 들판은 바다였으며 진해와 부산까지 바다가 내려다보였다고 한다. 대웅전 용마루가 신비롭다. 용마루답게 두 용의 머리가 양쪽 치미를 장식하며 절을 수호한다. 꿈틀대는 용의 허리가 지붕마루에 앉았다. 말 그대로 용마루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승탑으로 이어진다.
장유화상의 승탑은 기단 돌 위 복련, 몸돌은 앙련이 받치고 있다, 몸돌은 팔각지붕을 이고 있는, 좀은 투박하며 강인한 체구를 하고 있다. 돌 위의 푸른 이끼가 세월의 무게처럼 설화로 피었다. 승탑에서 내려오는 계단 입구에 작은 불상들이 안치된 것은 오가는 사람들의 기원이 모인 것이지 싶다. 맑은 석간수 한 잔을 올리며 나누어 마시고 불모산에 서린 장유화상의 기원에 함께하는 마음을 정화수 한 잔에 담을 수도 있으리라.
불모산 기슭으로 내려오는 작은 폭포수들이 소를 만들고 있는 산 아래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언덕에 오르니 이 산의 영험한 기운을 받은 야생화가 봄기운을 먼저 토하고 있다. 낙엽을 뚫고 나온 노루귀라는 야생화다. 작고 앙증맞게 귀엽게 빛나는 꽃이다. 분홍색, 하얀색, 이 신비로운 꽃을 담으려고 많은 사진작가들이 렌즈를 들이댄다. 부엽토 사이에서 부스럭대는 소리 한 점 내지 않고 언제 트는지도 모르는 사이 찬 이마를 내밀었다. 갇혀있던 봄기운의 조용한 외침 같다.
장군차將軍茶란?
장군차의 유래를 알고 싶어서 2016년 3월 4일 김해를 찾았다. 전에 역사 유적 답사 차 온 적이 있지만, 어디가 어딘지 잘 알 수 없었다. 김해 시청에서 장군차의 시음을 한다기에 시청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기간 동안 시음회를 연 적이 있고 지금은 하지 않았다. 관광과에 문의했더니 차 맛을 보여주었다, 발효차의 맛이 깊고 향이 좋았다. 김해시 농업시험장의 차 전문가를소개해주어서 그분을 만났다.
장군차의 현황과 해마다 '가야차문화 한마당'을 열고 있다는 전단지를 주었다. 직원 한 분이 자생군락지까지 동행해 주었다. 허 왕비의 동상이 있는 곳에 장군수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왕비의 무덤 뒤의 산자락에 있는 자생 차밭에 다녀왔다. 장군차 자생지 중에서 김해시 동쪽 산자락의 차밭이었다. 지금은 개인 소유로 된 것을 시(市)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잎이 도톰하고 넓은 것이 특징이다. 남쪽 바닷가의 기후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해시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까지 차나무가 모여 있었다. 아직 새 잎은 나지 않았고 묵은 잎들은 상당히 두텁고 잎이 넓었다. 지리산이나 전북 지방의 차나무 잎은 갸름하지만 이곳의 잎은 두껍고 넓었다. 기후가 다르고 종자가 다르니 그러리라. 그리고 차맛은 상당히 깊고 향이 좋았다. 차통을 열고 찻잎을 뜨거운 물에 넣을 때부터 향이 퍼져서 주위가 향기로웠다. 늘 익숙하게 익은 차맛이었다. 독특하게 익은 차 맛은 내가 차를 익힐 때 났던 바로 그 향기였다. 그런데 집에서는 그맛을 즉시 농축하지 못했다. 천천히 말려서 바로 그 맛이 그대로 나지 않은 것 같다. 좋은 설비에서 차의 발효가 적당히 되었을 때 바로 그 맛을 간직할 수 있었다. 대신에 내가 만든 차의 맛은 우릴수록 깊은 맛이 나지만, 장군차는 두 번째 차가 가장 맛이 좋게 우러나고 바로 옅어지는 것 같다.
차맛은 역시 차맛이었다. 아주 잘 익었을 때 바로 바싹 말린 것이지 싶다. 지금의 장군차 맛을 그 옛날 허황옥 공주가 알기나 할까? 그래도 차 맛이야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음식도 현대화 하면서 그 맛도 발전하듯 차 만드는 기술로 원시에서 현대로 오는 동안 현대인의 맛에 어울리도록 발전해왔으니, 그 모든 차맛이 한데 어울려 나온 맛이다. 2천 년 동안 우려진 차 맛이었다.
"장군차는 AD48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께서 봉차封茶로 가져와서 옛 가락 문화권에 전파하여 야생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차이며, 고려 충렬왕께서 김해 금강곡에 자라고 있던 차나무를 가리켜 '장군수將軍樹'라고 칭한 데서 유래되어 '장군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중국 북방 및 일본계통의 중엽류 녹차와는 다른 남방계통의 대엽류에 속합니다.“ 장구차의 안내문이다.
차밭에서 내려와 인근의 허황옥, 수로왕비의 무덤으로 갔다. 수로왕비가 된 허씨는 김해 김씨, 허 씨와 인천 이 씨의 시조모가 되었다. 인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파사탑을 다시 보았다. 정말로 인도에서 왔는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이런 돌이 한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왕비가 가지고 온 차는 봉차 그대로였다니, 오늘날 같은 덖은 찻잎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찻잎을 말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 씨앗은 동백 씨앗처럼 생겼으니 그대로 가지고 와서 심었을 수 있었겠다 싶다. 지리산 쌍계사 근처에 차 시목지라고 하는 차 군락지가 있으며 정금리에는 천년고차수도 있다. 어느 곳이 시조인지는 몰라도 수로왕비는 김해로 와사 차를 심었고 지리산 자락에는 중국의 것이 내려왔을 수도 있으며, 혹은 자생한 나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당시로는 첫 다인이지 싶다. 공주는 인도에서 오는 동안 중국의 해안을 거쳐서 쉬다 오다 하지 않았을까. 혹은 중국의 어느 곳에 머물다가 육로로 왔다는 설도 있으니, 어쨌건 여기 그의 무덤이 증명이 된다. 우리나라 제1호 다인이었던 수로왕비와 차 한 잔 나누는 심정으로 그의 무덤을 참배하고 떠나왔다.
46. 다솔사
- 현대 우리나라 차(茶)운동의 산실
다솔사(多率寺)
-현대 우리나라 차(茶) 운동의 산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4월 초, 오랫동안 마음으로 그리던 다솔사를 찾기로 했다. 차를 알고부터 찾고 싶은 절이었다. 현대에 와사 차(茶) 운동의 본거지로 손꼽히는 차의 성지였다. 효당 최범술 선생의 공로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찾지 못했다.
종일 비가 내렸지만, 다솔사 입구로 들어가면서 비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통과하여 절 뒤로 올라가다가 되돌아 절 요사체에 이르렀다. 한숨 돌리고 천천히 입구로 다시 내려가서 거슬러 오르며 살피기 시작했다. 비 오는 평일이어서 절 경내는 고요하여 한적했다. 마당 왼편, 고색이 짙은 해우소를 지나서 비석 앞에 서서 자세히 살폈다. 다솔사 중건비였다. 중건비 뒤에 마주하는 당당한 건물은 대양루다. 정면 5칸, 즉면 4칸인 맞배지붕으로 앞에서는 2층이지만, 올라가면 단층으로 보인다. 본래는 누각 아래가 대문이었지만 지금은 막아서 다른 용도로 쓰고 옆으로 난 108계단을 돌아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서면 대양루는 높은 적멸보궁과 마주하고 있다. 대양루는 현재는 '다도전시관'으로 사용하여, 다솔사 차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전시하고 있다. 다솔사의 역사는 503년 창건된 이후 천년 세월 동안 수많은 영고성쇠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기에 주름 깊은 세월에 쌓인 이야기와 전설도 많다. 대양루가 조선 영조 때 지은 건물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다도전시관의 전시는 다음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우선 적멸보궁에 오른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하던 것이 편의에 따라 전각을 짓게 되었다. 적멸보궁 가운데는 불상(佛像)을 전혀 모시지 않는다. 법당 안에는 단壇. 계단戒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봉안한 사리탑이 보이게 유리창을 배치했다.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적멸보궁이 있는 모든 사찰에는 이렇게 조성되어 있다. 양산통도사와 우리 고장 금산사의 방등계단이 그렇고, 그 외도 사리탑이 있는 곳은 이와 비슷하게 적멸보궁을 형성한다. 완주 안심사도 전각 안에서 사리탑을 예배하게 되어 있다.
보궁에 들어서 삼배를 올리고 앉았다. 석가모니 입적 때의 와불이 보궁의 유리판 아래 있다. 함께 고요히 앉아 적멸의 기운이 들기를 기다렸다. 원래 이곳은 대웅전이 있던 곳인데, 대웅전 안의 삼존불을 개금불사하기 위한 과정에서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사리 사진을 발견하고 난 뒤에 대웅전 현판을 내리고 적멸보궁 현판을 올렸다고 전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날이 개어서 뒷산을 산책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철이다. 주위는 온통 푸름으로 덮여 청신한 기운이다. 우선 적멸보궁에 들어서 아침 인사를 올리고 진신사리탑으로 올라가서 탑돌이를 했다. 많은 사람들의 기원이 모인 리본들이 가득 줄에 매달려 있다. 보궁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기슭은 온통 차나무 밭이다. 묵은 잎들도 사철 푸른 차나무. 아직 새잎이 돋지 않았다. 다솔사 주변에는 삼나무, 비자나무,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러나 소나무가 많아서 다솔사가 아닌, 많을 다(多), 거느릴 솔(率)자를 쓰는데 ‘많은 불심과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뜻인 걸 알았다. 주산인 봉명산의 모습이 장군이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기에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일주문 대신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들이 개선한 장군들처럼 보였던가.
싱그러운 차나무 숲을 거닐고 있는 편백나무 아래 흙길을 걷는 맛으로 새아침의 기운이 내 안에 가득 채워진다. 일제 시기 때 주지로 있던 ‘효당 최범술’ 스님이 봉명산 기슭에 차를 재배하면서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다가 거의 사라져 가는 우리나라 고유의 차(茶)문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지대한 공로가 있었다.
<다도 전시관>, 차밭을 한 바퀴 돌아 적멸보궁 앞 대양루로 들어선다. 다도전시관이란 팻말이 붙여 있다. 전시관 안에는 다솔사의 역사와 다솔사 차의 유래를 비롯하여 다솔사 차의 역사가와 선인들이 쓰던 다도구와 차 조제법의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효당 선생의 다도정신도 알기 쉽게 도표로 작성되어 있다.
<다솔사 차 기운>, 다솔사 원형은 좌우 대칭형으로 마치 봉황새가 골을 따라 봉명산 가운데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기운은 백두대간을 이루어 그 끄트머리에 지리산을 올리고 다시 낙남정맥을 이어서 이명산 아래 봉명산에 그 기운을 맺는다. 이어 봉명산 양쪽 작은 산등성이를 따라 그 기운을 마을로 불어넣은 다음, 기운의 조각들이 바다가 되어 사천만을 이루고 남해로 들어가 태평양으로 확산된다. 그 당당한 기운으로 다솔사가 창건(503)되고, 차나무를 기르고 맑은 물을 뿜어낸다. 그런 정갈한 찻잎을 맑은 날 새벽부터 따서 차인 효당 최범술 스님의 가르침대로 정성들여 손수 만든 다솔사 차이다. 다솔사 차는 맑은 맛의 녹차 ‘봉명죽로’와 노을빛을 내는 발효차 ‘황봉운하’가 있다. 봉명산 차밭의 튼실한 찻잎으로 만든 다솔사 차는 오미 가득한 차향을 품어 독특한 차맛을 낸다. 그렇게 다솔사는 오늘날 한국 차 이야기의 산실이 되었다.
다솔사는 지금은 차(茶)로 유명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불제자들의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왜구의 침략이 잦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에게 위안이 되는 사찰 기능만이 아니라 군 사들이 주둔하며 말을 조련시키고 승병들이 무술을 익히던 훈련장으로도 이용됐는데 그 흔 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다솔사는 독립 운동가들의 은거지이기도 했던 곳으로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 흔적을 찾 기 위해 문학인들의 답사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김동리 선생께서 청년기를 보내고 결혼도 한 곳이다.
<안심료>, 다도전시관을 나와서 옆 건물로 간다. 하늘을 가리는 황금편백나무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길을 하늘로 이끈다. 민족정신 일깨운 다솔사의 안심료(安心寮) 앞이다.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 인연이 깊은 절로 한용운 선생과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의 안심료에 기거했다고 한다. 한용운 선생은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사찰 내 안심료는 만해가 머물면서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문영빈, 오제봉, 설창수, 강달수, 이기주 선생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선언문 초판을 집필한 곳이다. 한용운 선생의 회갑 기념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심었다는 황금편백은 안심료 앞마당에 15그루 중 7그루만 남아 아름드리가 되어 황금빛으로 곧고 푸르게 빛나고 있다. 또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안심료에서의 생활을 통해 등신불이란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를 찾은 것은 1937년 봄으로 다솔사 주지 효당 최범술 선생이 문맹퇴치를 위해 절 아래 마을에 세운 학당의 야학 교사로 합류했다. 세월을 묵묵히 안고 빛을 뿜는 푸른 나무여!
주지 스님께 인사를 하고 다솔사를 뒤로하고 소나무 장정들이 배웅하는 일주문을 내려왔다. 갈림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진달래 빛 뿌리는 언덕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다솔사에 들어가는 초입의 언덕길 소나무 숲 사이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는 바윗돌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조선시대 고종 임금 때 경상감사가 다솔사라는 명당에 선영을 안장하려 하자 스님이 주민 탄원서를 임금에게 올려 분묘를 안치하지 말라는 어명을 받아 저지했던 징표란다. 우리나라에 있는 봉표나 금표 23개 중 다솔사의 고종임금이 내린 봉표는 다솔사는 누구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좋은 명당, 길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사한 글씨라서 더 유명하다. 특히 다솔사는 군립공원으로 주민들의 자연사랑 애착심으로 상권을 들이지 않아 상술로 얼룩진 사찰 앞 풍경이 없어 소박함이 더 정이 간다. 갈림길에 쓰여 있는 ‘남기고 가는 발자국, 가지고 가는 추억’이란 정겨운 푯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다솔사에 남은 내 발자국을 생각하며 가지고 가는 추억은 어떤 의미로 내게 남을까 생각한다. 다솔사는 쌍계사의 말사이며,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이제 올라가면서 벚꽃 만개하는 쌍계사 화개천으로 올라간다.
46. 늙은 가지에도 꽃은 피나니
늙은 가지에도 꽃은 피나니
저 유명한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찬양한 봄날의 서정이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다.
‘봄날 밤 도리원 연회에서 지은 시문의 서’와 같은 문장이다.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
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
부평초 같은 인생 꿈같은데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랴!
따뜻한 봄날의 아련한 경치로 나를 부르고
천지가 나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빌려주었음이랴!”
벚꽃이 만개하여 전국이 꽃 대궐에 싸였다. 남도 다솔사의 적멸보궁에서 하루를 지냈다.
올라오는 길도 꽃구름에 떠오는 것 같았다. 하동 쪽으로 올라오면 벚꽃 10리 길도 만나고 섬진강이 꽃구름으로 흐를 것 같았다. 역시 하동포구에서부터 가로수의 벚꽃이 환희에 차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벚꽃 터널을 이루는 길가에 차를 세운다. 뒤따라오는 자동차도 서고 그 뒤차도 서고 사진을 찍는다. 혼자 가는 사람도 꽃 풍경을 그냥 갈 수 없는 듯.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인사를 나눈다. 하동포구 강가 둘레길이 있다. 데크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수놓인 카펫을 밟으며 걷는 맛이 그윽하다. 언제 이런 풍경을 보았을까. 또다시 볼까. 천지의 은혜로움을 누리는 기쁨을 어찌 축복하지 않으랴! 이 순간, 시간이란 긴 세월을 지나는 나그네이며 또 오늘 벚꽃 길을 지나는 나그네라! 잠시 누리는 행복은 꿈 같이 꿈 너머로 사라질진대….
월요일인데도 쌍계사 근처에 오니까 자동차가 길게 줄을 서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꽃들이 잠시 나무에 붙어서 꽃구름으로 소복하게 쌓였다. 화개천 양쪽은 활짝 핀 벚꽃 길이 띠를 이룬다. 꽃나무 아래를 걷는 사람도 뭉게뭉게 모두 행복하다. 한 바퀴 돌아내려 오는 길은 자동차들이 밀려서 꽃 터널 속에 갇히는 즐거움도 누린다. 천천히 꽃비를 감상하며 봄날의 상념에 젖는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걸으면서 화개천의 흐르는 물줄기에 빠질 듯한 꽃가지들을 아련하게 바라본다, 눈처럼 휘날리는 꽃잎을 손들어 전송하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져 모인 꽃을 사뿐히 ‘즈려밟으며’ 가는 길이 어디 일지 마음으로 그리나, 알 수 없는 그 길. 같이 흐를 뿐이다. 애틋하게.
고목이 된 벚나무들이 굵은 가지를 늘어뜨리고 화개천을 따라 줄 서 있다. 시커먼 둥치의 옆구리에서 불쑥 붉어져 나온 꽃송이가 얼마나 기특한지. 알 수 없다. 그 신통력. 꽃잎들은 어디를 갔다가 봄날 이맘때만 되면 다시 나무속으로 들어갈까. 나도 거기가 어딘지 알고 싶다. 가면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 떠나간 모든 임이 꽃잎이 되어 내려오는지도 모른다. 꽃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나 역시 세상에 태어나서 몇십 번의 봄 향기가 나의 일부가 되어 쌓였을진대, 어찌 그 꽃님들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으랴! 환희심(歡喜心)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늙은 벚나무도 옆구리에서 툭툭 생생한 꽃잎을 틔워낸다. 꽃잎 날리는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은 옆구리에서 싯다르타 태자를 생산했지 않은가. 그리고 세상을 떠났지. 그리고……. 나도 늙었지만 싱싱한 정신으로 옆구리에서 오래 기억될 글줄이나 터졌으면…. 늙은 벚나무의 몸피에서 피워낸 꽃잎 같은. 아니 가슴에 쌓인 그리움이 꽃 같은 글줄이 되어 생산되면 좋으련만, 황홀하고 환장할 봄이 누군가의 가슴에서 오래도록 살 수 있는 열매 같은 문장으로 익어가도록.
이백이 저런 명문장을 이미 써버렸고 송한필이 짧은 인생을 이리 읊었으니 나는 즐거이 시정詩情을 음미하며 묵묵히 세월을 이겨보리라.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어제 내린 비에 핀 꽃이 오늘 아침 바람에 떨어지네, 가련타, 봄날의 일이 비바람 속에 오가네. 인생사가 또한 그러하니…. 어제 화사했던 꽃잎이 오늘 밤비에 다 떨어지겠다.
(2016.4.7. )
- 쌍계사 벚꽃길
쌍계사 벚꽃 길
그대, 어느 해든 좋으니
청명절(淸明節) 맑은 꽃바람이 불거든
전라도와 경상도가 DNA로 꼬여 흐르는
섬진강 화개장터로 한번 오시게.
사랑이 꽃(花)으로 피어나(開)는 화개(花開) 주막에서
전라도 안주로 경상도 막걸리 몇 잔 칼칼하게 마시고
맑은 화개천 따라 십 리 벚꽃 길을 걸으면
백억 송이의 벚꽃은 우리의 인연을 다 헤아릴 수 없어
그냥 연분홍 구름으로 피어나리니
우리 사는 이승이야 까짓
역려건곤(逆旅乾坤)이면 어떻고 역려과객(逆旅過客)이면 어떠랴?
사랑이 꽃으로 피는 길은
먼먼 십 리 길이라도 차타고 갈 수는 없는 길
목이 말라도 다리가 아파도 내색 않고 걸어야 하는 길
끝내는 이별이 되든 죽음이 오든 원도 한도 없어야 하는 길.
말없이 걸어도 벚꽃은
연분홍으로 살풋 사랑을 색칠해 주고
노래하지 않아도 개울물은
밝은 소리로 마음의 꽃가지를 흔드나니
구름 속의 쌍계사 도통(道通)스님들이야
어찌 세속(世俗)의 이 그리움들을 알랴?
우리, 불일폭포에 들어 목욕재계(沐浴齋戒) 하고
다시 거슬러 반야봉(般若峰)에 오른다면
지리산 천왕신(天王神)도 마고선(麻姑仙)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는 말
저 구름 같은 벚꽃목걸이로 만들어
우리 사는 길에 걸어주지 않으랴?
<2016, 4, 8>
*유치환의 서간집에 나오는 말임.
<늙은 가지에도 꽃은 피나니>를 읽은 양명학 선생께서 보내주신 <쌍계사 벚꽃길>에 감사의 정을 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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