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 수필에는 이 개암사 사진으로
<우금암도>와 함께 하는 부안 역사 산행 탐방
개암사
40번 수필 유배의 섬, 진도 -
진도 운림산방
정원수 기둥 하나가 뒤에서 갑자기 내 자동차를 들이받았다. 그날 오후 나는 박물관 뒤뜰에서 햇살을 잠깐 즐겼다. 어처구니없게도 안전한 곳에서다. 안전띠를 단단히 매고 뒤로 차를 뻬는 순간, 조금 전에 없던 자동차 하나가 통로에 들어와 있는 것을 몰랐다. 순간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당황하여 엑셀을 밟았던 것이다. 뒤차의 압쪽을 조금 받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얼떨떨하여 이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삶에도 이런 비렁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을. 죽도록 수업료를 지급하면서 인생길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일까. 너무나도 조용하게 봄맞이하는 나를 시샘하는 것이었다. 나를 각성시켜준 것에 대해 차라리 감사했다. 자동차 사고 체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무도 몸을 다치지 않았다면 그것이 인생 흑자라 했다. 그래, 큰 이득을 본 셈이었다. 금오도 ’비렁길‘이 떠올랐다. 비렁길 걷기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던 터.
여수 금오도에는 이름난 해안 둘레길인 ‘비렁길’이 있다. 왜 비렁길인가. 걸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다. 비렁이란 말은 벼랑이란 순우리말의 그 지방 방언이었다. 아직 비렁길을 생각하면 가끔 아찔한데, 무사히 다녀온 것을 이렇게 샘을 치르게 하는 것이려니 싶었다. 가기 힘든 길이어서, 비렁길 5코스 중에서 가장 절경인 3,4 코스를 걸었다. 절경인 만큼 길도 험하고 가파르기도 했다. 벼랑이 있는 곳엔 반드시 비경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남녘의 바람은 벌써 꽃바람이었다. 봄은 남쪽 해안으로부터 소소리바람을 물리치고 꽃바람으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돌산대교를 건너고 쉼터에서 만난 매화와 동백이 새봄과의 첫 상봉이었다. 푸른 하늘에 점점이 뜬 흰 구름 속의 산수유 꽃가지, 땅에는 아기 별꽃, 제비꽃 등. 생동감이 넘치는 봄 풍경이었다. 돌산도를 돌면서 훈풍을 실어오는 바다를 가슴에 채웠다. 바다에 뜬 하얀 부표가 꼭 하늘의 희 구름 송이 같기도 하고, 가까운 부표는 백조 무리 같았다. 김병종 화가의 바다 그림이 그대로 바다에 떠 있었다. 지중해 바닷속을 헤엄치는 어리아이들이 부표처럼 떠 있던 꿈의 바다.
돌산 읍의 신기 항에서 금오도까지, 뱃길 25분 동안 작은 섬들이 점점이 어울려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다도해임을 절감한다. 여천 항구에서 심포까지 버스로 오면, 갑판으로 시작하는 4코스 길이 시작된다. 바위와 벼랑이 절묘하게 어울린 봄빛을 품은 해안이 아름답다. 달콤한 꿈속을 걷는 것이 어린 맛이지 싶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평평한 길이 이어지고 가파른 길 위에 이르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어서 가쁜 숨을 고르면서도 즐겁다. 비탈 언덕에 수많은 동백군락이 많다. 가는 곳마다 자생 동백 숲이 아늑한 숲속 푸른 풍경을 자아낸다. 떨어진 꽃을 사뿐히 비켜 가기도 하고 꽃송이를 주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기도 하는 등. 금오도의 동백꽃은 떨어져서도 한 생을 더 머물면서 나그네를 위로한다. 동백 숲은 100여 년생과 200여 년 생들도 있다. 삭막한 겨울에도 푸른 숲이라면 반드시 동백 숲이다.
섬 깊숙한 곳부터 칼로 자른 듯한 깊은 계곡의 두 벼랑 벽을 잇는 출렁다리가 있다. 중간 지점에 밑을 내려다보는 유리 발판이 있다. 발밑이 바로 천길 좁은 벼랑 아래의 거친 물결이다. 걸음 떼기도 아찔하다. 해안의 돌출된 비렁에는 어김없이 전망대가 있다. 쉬멍 걸멍 하면서, 왜 비렁길인지 비로소 절감한다. 숨가쁘게 올라 전망대애서 안도의 숨을 토하며 바라보는 해안, 먼 바다, 수평선 너머를 그리면서 다음 길을 걷는 힘을 채운다. 땅을 바라보면서 오직 걷는 것 외에 다른 잡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명상 길이다. 땅바닥에서 조용하게 걷는 것 외에 다른 잡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명상이다. 땅바닥에서 조용하게 발길을 붙잡는 제비꽃도, 노란 민들레도 동백 못지않게 봄의 밀어로 위안을 준다. 기막히게 휘어진 곡선의 뿌리를 땅 위에 드러낸 나무를 보고 과연 꽃과 잎만 보고서 어찌 나무를 보았다고 하랴! 알 수 없는 신비한 생의 여정이란 것만 짐작할 뿐이다.
4크스가 끝나는 지점인 학동마을에는 쉼터가 있다. 솔직히 4코만 걷는 것이 적당했는데, 무리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목적한 바, 일행이 없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3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매봉전망대 오르는 길이 가장 힘들었다. 물러설 수도, 더 가기도 어렵지만, 묵묵히 걸었다. 사람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지 않는가. 거기만 오르면 내리막이란 것. 목적지까지는 내리막이란 것. 벼랑 바위에 놓인 친절한 갑판 계단을 하나하나 거친 숨 내쉬며 밟고 드디어 매봉 전망대. 휜히 트인 삼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서 바다와 사람도 느껴지지 않는 공(空)한 순간을 잠시 누렸다. 내리막길도 굽이가 있기 마련, 만만치는 않았다. 종점인 직포마을에 닿으니 방풍나물 밭이 많았다. 비로소 섬사람의 생활이 그려졌다. 삶에서도 수많은 비렁길을 걸어왔음을 새삼 생각했다. 젊어서는 비렁인 것을 모르고 쉬이 달려올 수 있었던 길도 많았지 싶었다. 젊은이들은 2시간이면 걷는 길을 우리는 5시간 걸렸으니.
직포마을에서 여천항으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많은 자동차, 때로는 위험한 비렁을 만들기도 하는 문명의 이기들을 운용하면서 참 잘도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수많은 비렁길이 숨어 있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 알 수는 없는 것, 인생의 비렁길도 그런 것이다. 절경이 있는 곳은 반드시 비렁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생을 되돌아보니 수많은 비렁길을 비껴가기도 하고 넘어오기도 했다. 위험했던 비렁을 넘는 당시에는 비렁인 것을 모르고 넘었다. 삶의 여정이 죽음에 돌러싸여 있지만, 죽음을 처험하지 않고서는 죽음을 알 수 없듯.
순탄한 그냥 길은 아름답지 않다. 평탄한 길은 재미도 없고 지루하여 육체를 단단하게도 하지 않는다. 인생의 비렁길이 영혼을 살찌운다는 것을 지난 뒤에 알았다. 세상이라는 헬스장에서 겪는 어려운 경험이 영적 몸매를 가꾸어주는 가장 강력한 운동 기구라고 하지 않는가. 단련 없이는 영혼의 자유도 얻을 수 없으며, 영적 몸매도 흐물흐물해진다. 그래서 굽이굽이 넘어온 인생길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렁길’처럼.
삶에서 비일비재하다는 자동차 사고라지만, 내겐 비렁을 만나 헛발 디딘 것 같은 실수였다. 일상을 유지하는 일에서도 작은 비렁길을 걷는 것 같을 때가 많은데, 여생을 보내면서 금오도 ‘비렁길’을 넘어온 일이 힘이 될 것 같다. 지금도 벼랑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과 뭇 생명도 있으려니! 인생 내리막길에서 만난 아찔했던 비렁 하나, 무사히 비렁에 빠지지 않고 마지막 길을 끝까지 잘 내려가라는 깨침에 감사할 일이다.
수덕사에서 만난 몬드리안
수덕사에서 만난 몬드리안
지난겨울 수덕사에서 피에트 몬드리안의 그림을 만났다. 세 번째 만남이다. 흰 눈이 많이 쌓인 주변이어서 오히려 그림의 선이 선명했다. 수덕사의 대웅전의 측면 벽이다. 화려하고 번쩍번쩍한 장식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눈길을 끌지 못할 수도 있는 대웅전이다. 그렇기에 그 간결한 마름모꼴의 사방연속무늬로 된 창살을 단 대웅전이 배흘림기둥과 어울려 강렬한 힘과 멋을 풍긴다.
목조건축으로서는 몇 안 되는 고려 때 지은 전각으로서 700년을 견뎌온 작품이다. 나무로 된 집이 그 숱한 세월의 기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니! 유홍준은 말했다. “안정된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덕사 대웅전의 저 간결미와 필요미가 연출한 정숙한 아름다움에 깊은 마음의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오래된 건축 앞에 서면 저절로 정서가 안정되면서 숙연해지기도 한다. 대웅전을 보는 맛은 마치도 가벼운 밑 화장만 한 중년의 미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미 중년은 넘기고 노년에 접어들었는데 젊은 때부터도 색조 화장에는 서툴고 또한 어울리지도 않아 말대로 밑 화장만 주로 하는 셈인데, 나에게는 그런 미인의 풍을 지니지 못한 것이 민망스럽지만, 나의 정서만은 그런 미인이고 싶다.
대웅전 측면 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지붕선 아래의 면 분할이 몬드리안의 신조형적인 그림을 연출한 것 같다. 대웅전 안에는 건축부재들이 시원스레 그대로 노출되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들보와 창방 등의 기둥이 안벽에서 밖으로 튀어나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것이 적당한 벽의 면을 나누어 노란 바탕 면에 선으로 그린 것 같기에 몬드리안의 그림 같다고 하는 것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어진 선만으로 그렇게 비친다고 본다.
마침 전주에서는 겨울 내 전라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린 대형 전시회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란 제목을 걸고 베네주엘라에서 대여해온 ’현대미술거장전‘이 열렸다. 현대미술의 사조를 통하여 본 서양미술사의 맥을 조금이나마 짚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기서 피에트 몬드리안의 그림을 진짜로 만나고서 수덕사의 벽면에서 본 몬드리안을 함께 생각했다.
흔히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란 말을 많이 하고 또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무쌍한 변신과 무궁무진한 조화의 연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도 흉내 내지 못하고 갖지 못하는 갈증만 더할 때가 많다. 자연과 하나 되는 간절한 염원만을 중얼거리다가 망연해질 뿐이지 않은가. 예술가들은 자연의 문턱에서 목말라 애태우며 소망한다. 피에트 몬드리안도 그러했기에 차라리 자연을 등지고 자신의 집의 창문으로 경계를 치고 산 것일까. 지금까지의 미술 사조를 뛰어넘고 신조형주의 세계를 창조하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우리네의 옛 조상들처럼 조각 천으로 만든 조각보나 창호지 창문의 창살무늬가 또한 몬드리안의 선의 예술 같아서 친근하게 보이는 걸까. 우리의 조상들은 미술 사조를 몰랐더라도 이미 초현대적인 조형미를 창조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던 것일까.
몬드리안의 말년의 신조형적인 그림은 순전히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다. 수평선과 수직선,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순수기하학적 형태의 화면 구성을 하고 있다. 색도 삼원색과 희색, 검정, 회색만 이용하는 것 같다. 왜 단순한 선과 면으로 된 그림이 아름다운지. 이것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자기 성찰과 명상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새삼스럽게 주어지는 철학적 질문을 되새김질 한다.
13.
예덕상무사와 충의사
충남 예산 지방으로 간다. 2011년 봄 문학기행 날, 이곳 완주의 벚꽃은 꽃비가 내려 흥건하게 땅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차령산맥 위쪽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나아가 당진, 아산에는 비산비야의 넓은 들판이 생겼단다. 옛날에는 여기를 '내포(內浦)'라 했고 지금도 이 일대를 내포 평야라고 부른단다. 내포 지방은 전북의 김제나 부안 지방같이 농사와 과일이 잘 되고 수산물도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택리지에 "산천은 평평하고 아름답고 서울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의 세력 있는 집안치고 여기(충청도)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기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단다. 사실 안동 김씨 후예인 내 동생 시댁도 이곳에 땅이 제법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예산 지방으로 들어서니 애정 어린 농촌의 전형을 그리려면 내포 땅이 좋다고 한 화가의 말이 떠오른다. 버스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충의사'와 '예덕상무사' 앞이다. 관광이나 유적 답사는 길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가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더듬으며 그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되새기고 나아가서 오늘의 나를 되물으면서 이웃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 땅의 역사 지리와 삶의 내용인 인문지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일이 바탕이 된다.
예덕상무사에 들러서 옛날 보부상들의 흔적을 들러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부상들의 삶과 유품전시장에서 우리는 옛날 장돌뱅이들이 등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넘나다녔던 것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조선 정조임금 시절 제주도의 거상이 된 '김만덕'의 드라마를 보았는데, 거기서도 부보상을 꾸려서 장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보부상이라 하지 않고 부보상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보부상이나 부보상이나 같은 말이었다. 보상은 보자기에 싸고 다녔고, 부상은 지게에 지고 다녀서 생긴 이름이니 그렇다.
우리의 문학 속에 나타난 보부상의 흔적은 '정읍사'와 '메밀꽃 필 무렵'에 나타나 있는데, 오늘 이 전시관을 통하여 행상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정읍사의 여주인공이 행상을 나간 남편을 기다렸던 심정이 비로소 애틋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장돌뱅이라 불리는 보부상이 하나의 길드적 조직으로 형성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로 생각된다. 이성계가 석왕사를 지을 때 황해도 토산 사람 백달원이 보부상을 거느리고 불상과 건자재를 운반한 공이 있어서 이태조가 그에게 보부상의 상행위에 관한 전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덕상무사'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역대 보부상 두령의 위폐 중에서 '두령 백토 선생 달원 신위'가 중앙에 크게 세워져 있다.
“보부상의조직은 근대로 내려올수록 커지고 사회 구성에서도 점점 큰 몫을 갖게 됐다. 1866년에 와서는 드디어 나라에 보부처가 세워졌다.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이 이 보부청의 청무를 맡았다. 그리고 나서 보부청은 여러 번 기구가 개편되고 명칭이 바뀌다가 1899년에는 상리국商理局 안의 좌사, 우사로 개편됐다. 그래서 생긴 말이 상무사이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인들이 이들을 해산시키고 상권을 오로지하였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 중에서 발췌)
이 보부상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환란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에게 수천 명의 양식을 조달해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뚫고 양곡을 조달해주었으며, 1866년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해주었다고 한다. 농민전쟁 때와 갑오농민전쟁 때는 관군을 도와 농민군 토벌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내포 땅에 가면 보부상들이 쉬었다는 밤나무 울타리의 주막이 있다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의문이다. 정치에 관여하고 관군을 도와서 토벌에 공헌하였다는 것은 오늘에 와서 보면 민중의 한 형태로 보일 뿐이다. 대부분의 행상은 힘든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전쟁 때에는 민중의 입장에 설 수 없었다. 그들의 시장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현대에 와선 정경유착이라는 단어의 뿌리가 이때에 자리 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관권과 상권의 결탁이라는 것이 이토록 오랜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그들이 국가의 반란 때 이바지했다는 것은 그들의 순수한 애국적 동기보다는 상권을 지키기 위한 시장보호 차원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무사에 와서 과거에서부터 쭉 이어져 온 사회의 밝은 면과 어두움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예덕상무사 옆에 '윤봉길의사기념관'과 충의사가 있다.
윤봉길의사도 이 보부상단들로 인하여 세상 소식과 일본인들의 동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농사가 잘되는 내포 땅, 기암절벽이 만드는 절경은 없어도 낮은 구릉으로 이어져서 부드럽고 온화하다. 누구라도 고향 같은 친근감이 있는 이 땅에서는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기골이 장대한 걸출 인물이 많이 탄생한 것은 아마도 이 평야보다는 가야산 정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최영 장군부터 시작해서 사육신의 성삼문, 임진란의 이순신, 9년 유배객 추사 김정희, 구한말에 자결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 김대건 신부, 김좌진 장군. 개화당의 김옥균, 상록수의 심훈, 남로당의 박헌영, 만해 한용운과 화가 고암 이응로 등이 그들이다. 자기의 명을 못다 할망정 의를 다한 분들이다.
윤봉길 의사는 어렸을 때부터 누구와의 싸움에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성정이었으니 어찌 일제와 싸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포 땅의 가야산 주변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만큼 명승지도 많다. 고건축박물관이 세워질 만큼 예산 지방에는 불교와 유교 건축물이 많다.
지나는 거리마다 나무들의 새 잎이 쫑긋쫑긋 반짝이며 생명의 환희를 일게 한다. 의를 다한 선조들의 은덕으로 이 봄을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완주의 벚꽃은 다 떨어져 어디로 가고 있는가 했더니 이곳의 하늘 아래 봄볕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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