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조매

차보살 다림화 2007. 3. 15. 00:07
조매(造梅)




윤 오 영

 

 


  S양이 만든 매화.

  꽃은 흡사하다. 진가(眞假)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묘한 솜씨다. 그러나 아깝게도 사화(死花)를 면치 못했다. 그 줄기와 가지에 병통이 있다.

  조화(造花)의 묘는 다만 화형情濕)이 비슷한 데 있지 않고 그 화심 (花心)을 그려내는 창작력에 있다.

  풍죽(風竹)을 그리면 스치는 바람이 소슬하게 일어나야 하고 유란(幽蘭)을 그리면 그 밝은 향기가 은은히 피어나야 한다. 매화를 만들면 그 암향(暗香)이 떠올라야 한다. 푸른 잎 새로 날려오는 난초 향기를 유향(幽香)이라 하고,

그 성긴 가지로 떠오르는 매화 향기를 암향이라고 한다. 암향을 나타내 자면 꽃보다도 먼저 가지에서요, 가지보다는 줄기, 줄기보다는 등걸에서다. 이것이 살아야 비로소 아니다. 온 그루에 모인 정 (情)이 필연적으로 터져서 유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뿌리는 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연륜은 꺾어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온갖 풍상(風霜) 속에서 매몰스리 지켜온 그 높은 절개, 등걸 속에서도 맥맥히 흐르는 강한 생명력, 찬 눈(雪)을 뚫고 나오는 그 민감, 담아(淡雅)하고 고고(高孤)한 모든 품격이 한 그루의 매화로 눈앞에 생동할 때 비로소 그 가지와 줄기에서는 구슬 같은 꽃이 맺혀 향기를 토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것만 살리면 꽃은 없어도 바야흐로 터져나오려는 꽃 기운에서 그 향기를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살지 못하면 마른 나무 끝에 밥풀같이 붙은 꽃들이라 이미 생맥(生脈)을 잃었으니 무슨 향기가 있을 것인가. 이는 사화요, 활화(活花)가 못된다.

  옛사람도 일찍이 "난정을 알아야 난초를 그리고, 죽기(竹氣)가 있어야 대를 그린다"고하지 아니했던가. 그렇지 못하면 지필(紙筆)로 그린 초목에서 어제 신운(神韻)이 표일(課逸)함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매화를 만들자면 먼저 매화를 말아야 하고 매화를 알자면 매화가 돼봐야 한다. 세상에는 진매(眞梅)를 아는 이가 드물다 그 꽃의 비슷함을 신기하게 여기고, 그 혼(次)의 온자함을 모른다.

  그러나 마음속에 매화가 있어 그루마다 매화가 되기도 하고, 매화를 가꾸고 가꾸면 마음속에 매화가 깃들이기도 한다. 매화를 만들어보는 그 마음이 이미 매화를 사랑하는 꽃이 산다. 한 송이의 꽃은 우연히 가지 위에 나타난 것이 진매가 솟아날 것이다.

  내 조화를 연구한 적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매양 비슷한 이치가 있는 것을 안다 먹을 갈아놓고 선화지에 한 폭 묵매(墨梅)를 칠 때와 음을 가다듬어 한 수의 매화시(梅花詩)를 읊을 때가 곧 그것이다.

  예전에 최북(崔北)이라는 화가는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아니했다. 그 이유를 힐난했더니, 눈을 부릅뜨고 "산 밖이 다 물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은 내 아는 바 아니다. 그러나 오묘한 맛이란 항상 붓 밖에 있는 법이다.

  냇가의 돌을 그리고 울밑에 대를 그리면 오직 돌이고, 대일 뿐이다. 목석(木石)에 무슨 정(情)이 있고 운(韻)이 있으랴. 그러나 마음속의 돌과 매화를 그렸다면 그것은 그냥 목석만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또 돌과 대를 돌과 대로 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돌이 아니요, 대가 아니다. 여기에 부질없이 기교를 더하면 이것은 사족(蛇足)일 뿐이다. 저간(這間)의 소식을 알면 나의 조화론(造花論)도 오직 황당한 말은 아닐 것이다.

  어찌하면 묵은 등걸에서 옥 같은 그런 꽃이 맺히노? 어찌하면 그 작은 꽃에서 그런 향기가 퍼져나노. 굵은 뿌리는 땅속에 깊이 묻혀 있어, 가는 실뿌리로 빨아올리고 빨아올려 등걸 속에는 생명이 맥맥히 흐르고 있다. 줄기는 가지로 뻗쳐오르는 그 기운이 꽃망울이 되고 향기가 된 것이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그 향기이기에 더욱 맵고 깨끗하다. 사람의 향기도 이와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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