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밭에 죽순 나니
김 수 봉
삼은 삼밭에서 쑥쑥 자랐습니다. 어느새 일곱 살배기 아이들 키를 넘게 컸습니다. 주인네가 두 번씩이나 솎음질을 해 주어서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뻗쳐오르며 활개를 펼칩니다.
밑에서 자라 오르는 쑥줄기같은 것은 비웃어버려도 됩니다. 제깟것들이 삼을 따라서 커 오른다지만 삼대의
키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대들은 쑥을 내려다보며 함께 비웃고, ‘너까짓 게 커봤자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삼대들의 속마음은 따로
있었습니다. 곁의 삼을 보며, 너는 왜 솎음 당하지 않고 남아서 나를 따라 크는 거야. 내 기필코 너보다 더 커서 네 머리를 눌러버리겠어.
다른 삼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이슬을 흠뻑 먹고 하룻밤을 자고 나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나 혼자만 쑤욱 자랐다고 생각하고 옆을
보면 다른 놈들도 똑같이 커 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 때, 저 녀석들이 딱 꺾여버렸으면 하지만, 서로 기대고 이리저리 함께
흔들렸기 때문에 자기도 꺾임을 면했다는 건 미처 모릅니다.
삼들이 이렇게 보이지 않는 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삼밭 속에선 대뿌리가 뻗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웃 대밭에서 뻗어온 대뿌리였습니다.
대뿌리가 땅을 뚫고 있을 때, 삼뿌리들은 발가락 간지럼같은 걸 느꼈지만 무시해버렸습니다.
어느 날 대뿌리에서 죽순이 내밀었습니다. 칙칙한
삼잎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가 촉촉히 내린 다음 날, 죽순은 성큼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먼저 파리한 쑥들을 향해 인사를
했습니다. ‘쑥들아, 고생한다. 열심히 자라고 버티면 햇볕 볼 날이 있을 거야.’라고.
그러나 삼들은 그들의 허리께까지 올라온 죽순을 보며
쑥한테처럼 또 비웃었습니다.
‘이파리도 없이 몽톡한 게 크면 얼마나 클 거야, 쳇.’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 죽순은
삼들의 머리 위로 불쑥 솟았습니다. 어이없었지만 삼들은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순도 말없이 쑥쑥 커올랐습니다. 그리고 죽피를 하나씩 벗어
던지며 활개를 폈습니다. 그러더니 댓이파리를 펼쳐 하늘을 가렸습니다,
삼들은 그들끼리의 다툼을 미뤄놓고 대나무를 향해 일제히 종주먹을
댔습니다. 그러나 대는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없이 흔들거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대님들, 낡은 경쟁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여름이 다 가기도 전, 삼대들은 삼밭에서 베어졌습니다. 그리고 마당가에 내 건 삼굿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삶아져서 껍질 벗길 일만
남았습니다.
삼밭 자리에는 우뚝 솟은 대나무와 이제야 햇볕을 맘껏 즐기는 쑥들이 한들거리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눈이 내리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대나무는 파랗게 우뚝 서 있었습니다. 마른 쑥들도 눈을 꽃송이처럼 이고 있었습니다.
껍질이 벗겨져 백골같이
하얀 겨릅대로 남은 삼대들은 땔감이 되어 헛간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