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서울성곽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계획하고 한양에 종묘사직을 건립한 이래 북악산(백악산이라고도 함)은
군부통치 시대를 거치며 40여년 동안 일반인에게는 닫혀 있었다.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인왕산을 개방한 것에 이어 2007년 4월5일 식목일을 맞아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었다.
명륜동 성균관 뒤로 성곽을 올랐다.
서울 성곽 탐방로의 한곳인 말바위 쉼터 집결장소에서 예약과 신원확인 절차를 거친 후 숙정문으로 향했다.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숙정문은 성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져 문루가 없이 무지개 모양의
석문(월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서울 성곽은 태조가 수도 서울의 방어와 도성의 안팎을 구분하기 위해 정도전의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축조했다.
서울의 4대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18.2km로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현재의 성곽은 1704년 숙종 때
이루어진 것으로 이후 전차부설 등의 이유로 철거되어 10.5.km만 남아있다. 소실된 8km는 복원하여 유네스코에 등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 성곽의 모습
청와대 본관 초록색 지붕이 저 아래로 뿌옇게 보인다.
북악산 마루를 힘겹게 넘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에 닿는다.
문루에 올라보고...
창의문(彰義門)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사대문,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복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 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 (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에 (1617)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를 운반하기 위하여 열어 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완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령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서 세워지게 되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이지만 서울의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고, 문루에서 바깥쪽으로 나와 있는 수구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에 매력을 더하고 있다. 또한 성문의 월단, 무지개 모양의 석문,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새긴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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