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영상물 모음

북악산, 서울성곽

차보살 다림화 2007. 11. 11. 18:43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서울성곽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계획하고 한양에 종묘사직을 건립한 이래 북악산(백악산이라고도 함)은

군부통치 시대를 거치며 40여년 동안 일반인에게는 닫혀 있었다.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인왕산을 개방한 것에 이어 2007년 4월5일 식목일을 맞아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었다.

 

서울 성곽 - 사적 제 10호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다.

1393년 정월에 권중화가 풍수지리학상 계룡산이 가장 좋은 곳이라 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륜이 송나라

호순신의 지리서를 이용하여 계룡산 신도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다시 검토하였다. 1394년 8월,  태조는 직접

무학대사를 대동하고 현장을 시찰한 다음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9월에 신도조성도감

(신도읍 조성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정도전은 권중화 등과 협력하여 종묘, 사직, 궁궐, 도로, 시장 등 도시계획을

작성하였고 그해 12월에 종묘의 터 닦기를 시작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약 10개월 후인 태조 4년 (1395)

9월에 이 엄청난 신도읍 공사를 완료하였다.   태조가 경복궁에  입주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이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충당하였고,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충청도의 민간 장정들은 농한기인 1,2월과

8,9월 가을에만 동원되었다.

<조선불교통사>에 인왕산 선바위를 성곽 안에 넣을 것인가에 대한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엇갈리는 의견을 놓고

태조가 어려운 결정을 단행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큰 눈이 내렸다. 이튿날 아침 한양의 안쪽은 눈이 녹은 반면에

바깥쪽은 여전히 녹지 않고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 녹은 선을 따라 성곽의 선을 그었다고 한다. 그때

 인왕산 선바위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서울 성곽 바깥쪽으로 남게 되었다.

 

 

 성곽의 북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이 열렸다.

 

 

 

 현재의 경복궁 흥례문 앞 마당에서 올려다 본 북악산

해발 342m라는 저 봉우리을 성곽을 따라 넘어 왔다니 감개무량하다.

2007년 시월 현재 경복궁의 대문인 광화문은 다시 헐렸다. 제 자리를 정확히 답사한 결과 다시

건축하기 위함이다. 경복궁 남쪽 담은 전부 칸막이로 막혀 있어 볼쌍 사나운 어지러운 모습이다.

 현재와 비교하기 위하여 담장 벽에 붙여진 옛 모습들의 광화문 사진을 또 찍어왔다.

북악산 앞에 버티고 있던 구 조선총독부청사 모습 앞의 광화문. 그것도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한 부분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라면 동쪽이다. 지금의 자리에 있던 광화문을 일제가 동쪽으로

옮겼던 것을 후에 제 자리를 다시 찾았다. 언제까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하는지.... 

문화재를 얼마나 오래 잘 보존할 것이며 거듭되는 역사의 오류를 겪는 동안 또 우리의 할 일이란?

 

 흥례문애서 본 인왕산인가?

 

 불과 100년 전 쯤인 것 같은데 저 아이의 모습을 보라!

 

 

 

 서울 성곽 중 산성에 해당하는 북악산성을 오르기 위하여는 동쪽 명륜동 성균관 뒤로 오르면

완만하게 올라가서 북악산 마루 가파른 길을 나중에 만난다. 서서히 올라 나중에 마지막 힘을

내어 정상을 넘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게 된다. 성곽에 오르니 우선 복자기라는 나무가 곱게

물들어 환영하였다.

 

 

 

 저 멀리 북한산 줄기들이 이어지는 사이로 현대의 상징물인 아파트 건물이 보인다.

성곽이 쌓이던 그 옛날은 그저 적막과 위험의 지대로 묻혀 있었을 곳에....

 

 

 

 

 

 

 

 

명륜동 성균관 뒤로 성곽을 올랐다.

서울 성곽 탐방로의 한곳인 말바위 쉼터 집결장소에서 예약과 신원확인 절차를 거친 후 숙정문으로 향했다.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숙정문은 성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져 문루가 없이 무지개 모양의

석문(월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서울 성곽은 태조가 수도 서울의 방어와 도성의 안팎을 구분하기 위해 정도전의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축조했다.

서울의 4대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18.2km로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현재의 성곽은 1704년 숙종 때

이루어진 것으로 이후 전차부설 등의 이유로 철거되어 10.5.km만 남아있다. 소실된 8km는 복원하여 유네스코에 등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 성곽의 모습

 

 숲 아래로 청와대의 본체와 마당이 보인다.

 

 서울 시내의 모습도 보인다.

 

 줌으로 청화대를 끌어당겨 보았다.

 

 

1968년 1.21 사태로 기념비가 된 김신조 소나무 
청와대 바로 뒷 산이니 침투할 만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백악의 마루에서... 고려 때까지는 북악산을 백악으로 불렸단다.

 

 정상을 넘고 나면 가파르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올 때마다 주저 않아지려고 했다.

아마도 혼자였더라면 119를 불렀을 것이다. 중국처럼 짐수레라도 있으면 싶을 지경이었다.

 

 

강마른 바위에서도/드센 바람에도/주어진 터전에 붙어/ 해맑게 붉은 웃음 피어내어/

힘든 나그네의 마음 북돋우고 있네/

 

 

 
창의문(彰義門)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사대문,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복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 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 (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에 (1617)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를 운반하기 위하여 열어 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완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령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서 세워지게 되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이지만 서울의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고, 문루에서 바깥쪽으로 나와 있는 수구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에 매력을 더하고 있다. 또한 성문의 월단, 무지개 모양의 석문,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새긴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경복궁의 진산인 북악은 화강암이 주를 이룬 돌산으로, 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성곽 주위로 수목이 가꾸어져 있다. 특별히 소나무는 조선 개국 초부터 특별 보호 대책을 세워 관리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잘 보존되어 온 소나무 숲은 일제강점기 이후 숲이 방치되면서 능선 주위에마 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북악산은 근 40년 동안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은 덕분에 식물들이 잘 보존된 쳔연의 공간이 되었다.

지금 자라고 있는 식물은 208종류이고 그중 나무는 81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러 나무 중에 복자기의 단풍빛이 백미였는데 발길을 가볍게 도와주었다. 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는 청와대 주위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청와대 녹지원을 구경하고 서쪽 문으로 나가면 바로 칠궁으로 이어진다.

 

 녹지원

대통령 영부인께서 청와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녹지원이라고 했다.

보기 좋은 반송 뒤 계단 위에는 상춘제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손님 접대하는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코스모스가 잔디밭 앞 가장자리를 정갈하게 줄 서 있다. 봄이 되면 봄꽃을 심지 않을까.

 

 청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서 사진 촬영할 기회를 준다.

 

청와대 담장을 빠져나와서, 칠궁으로.

조선조 시대 이곳은 아마도 경복궁의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여기는 칠궁 입구이다. 조선시대 창경궁은 살아있는 삶의 공간이고 음양에서 양택에 해당된다면 칠궁이나 종묘는 사후의 공간인 음택에 해당된다. 칠궁은 그래서 왕실 여인들의 삶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옆에 있다는 이유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질 않아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코스이다. 2001년 청와대 관람이 공개되면서 방문코스이 하나로 공개되었다. 2주 전에 미리 신청하여 청와대와 칠궁까지 관람할 수 있었다.

군사정부가 전복되었던 12.12사건의 현장인 궁전동안가는 칠궁 입구의 왼쪽 숲이다. 지금은 무궁화 공원으로 조성되어 개방하고 있다.

오른쪽 담은 청와대 서쪽 담장이다.

 

 

 종묘는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능 왕실 사당이기에 후궁의 위패를 모신 칠공과 비교된다. 후궁의 위패는 종묘에 들아갈 수 없었고 후궁 사당에 '궁'이라는 칭호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칠궁에 있는 7명의 후궁들에게 '궁'이라는 칭호가 붙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왕 또는 추존왕의 생모였기에 가능했다. 원래 이 자리는 1724년(경종 4) 8월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후궁 출신의 빈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봉사奉祀의 은전을 받지 못한 그의 모친 최숙빈을 추념하여 사당을 짓고 봉사한 육상궁이 있던 곳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장희빈의 사당 전각의 기둥은 둥근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네모의 기둥보다 격이 높다는 뜻이었다.  후궁 출신의 여인이 왕비가 된 것은 조선 역사상 장희빈이 유일무이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무고의 옥사가 일어나고 결국  지위가 강등되고 사약까지 받게 되었다. 숙종은 그 후로 후궁출신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후에 경종의 생모라는 이유에서 영조로부터 '대빈궁'의 궁호를 받았다.

 

 

 

 

 

 

 

 장희빈의 사당이다. 기둥이 둥근 것이 다른 전각과의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