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하고도 덕스러운 가야연맹의 진산 가야산,
모두들 합천 가야산이라 부른다. 팔만대장경의 법보종찰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육지의 교통이 사통오달해서 합천이나 성주 쪽으로 가야산을 찾고 있지만,
물길을 이용하던 옛날에는 고령 땅 개포나루를 거쳐야만 쉽게 가야산으로 드나들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고려 때에는 강화도와 남해에서 다듬어 새긴 팔만대장경을
고령의 개포(개경포 -일본이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경'자를 빼고 개포라 불렀다.)
나루를 거쳐야만 쉽게 가야산으로 드나들 수가 있었다.
지금도 팔만대장경 축제 때에는 스님과 신도들이 개포나루에서 해인사까지 대장경을
이고 지고 옮기는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가야산은 이 나라의 등뼈 백두재간에서는 살짝 동쪽으로 비켜솟아있는 산이다.
경남합천곤과 경북 성주군이 거의 반씩 나누어 차지하고 있고, 북서쪽 일부가 거창군이다.
고령高靈군은 국립공원구역에서는 빠져있지만 미승산과 주산이 가야산에 맥을 두고 관내에
솟아있어 같은 권역에 들어간다.
고령을 에워싸고 있는 회천을 내려다보고 있는 주산 기슭에 대가야박물관과 왕릉전시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 뒤로 진산동고분군들이 산 능선에 줄을 서 있다.
200여 기나 되는 고분군들이 산재해 있고 번호가 붙은 것만 70호가 넘는다
볼록한 여인의 젖가슴처럼 어여쁜 분봉들이 그 옛날의 한을 머금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가야인들이 무덤이라니!, 저 아름다운 풍경 속을 상상하면....
고령군민헌당에는 이렇게...
"대가야의 도읍지 우리고령은 가야산연봉의 푸른 정기와 회천의 맑은 물빛에 서려
찬란한 문화를 창건한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물이 넉넉하고, 땅은 기름지고 후기가야의 맹주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
높은 산 정상에 조상의 영령들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
지산동 고분 44호
44호분을 그대로 재현한 내부 모습
순장유형으로
30대 남성과 8세 여아(부녀)의 순장
발굴 당시 무덤에서 어른과 아이의 머리뼈, 다리뼈, 발가락뼈 등이 발견되었다고.
10대 소녀 2명의 순장
두 사람분의 머리뼈, 다리뼈와 손가락뼈 등이 남아 있었다. 분석 결과 두 사람은
대략 10살 전후의 여자 아이로 확인되었다.
두 사람이 모두 몸을 편 채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는 부모가 죽을 운명이면 자식도 같이 죽어야 했던가!
양전동의 암각화
남향의 나지막한 바위면에 세겨진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으로
그림은 동심언과 다수의 가면모양이 새겨져 있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농경에서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울산 바구대 암각화와 함께
선사시대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