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만날 때마다 내 발길을 붙잡는 백제 탑이여!

차보살 다림화 2009. 8. 28. 11:27

 

 

 

익산 왕궁리오층석텁, 1965원 복원한 후,  주변의 왕궁터를 발굴하기 전의 모습. 역사가 초원으로 덮혀 있을 때...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 탑이여!"

                                                      

                                                                   조윤수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있어도 없어도 좋고 아름다운 연인이라 해도 좋다. 오늘은 염부단금 같은 꽃술을 가진 차꽃을 탑신께 헌다화 공양 올리고 싶다. 
  80년도 초, 풀밭에 둘러싸인 이 탑 앞에서 우리는 정성스레 차를 우려 올리고 탑을 돌곤 했다. 우리 스님은 유난히 백제 탑들을 좋아했으니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정림사지 탑을 닮은 미륵사지와 왕궁리5층석탑엘 자주 갔었다. 그 때는 연꽃 같은 스님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따라 좋아했고 스님의 행을 그대로 닮고 싶었다. 탑을 올려다보는 시선 따라 같이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내가 다례원을 열었을 때, 전라북도에 오니 차(茶) 하는 사람도 없고 찻집(전통)도 없다 시면서 스님은 나의 다원에 오시기를 좋아했고 우린 한 눈에 서로 반했다. 선뜻 전화 주시고는 송광사 마로니에를 같이 보러가자 하시고, 연꽃이 필 때는 연방죽에 같이 가자 하셨다. 그님이 경기도로 옮긴 후 많은 해가 지났다. 문득 지난날들이 되살아나, 미륵사지와 왕궁리 석탑을 다시 찾게 되었다.

  왕궁리탑을 보러 갈 때면 옛 연인을 만나는 듯한 묘한 설레임조차 일었다. 탑을 돌아보고 면석을 어루만져도 보고, 풀밭에 누워보기도 하며 무한한 아늑함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며, 때때로는 거석이 주는 위압감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한참 탑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폐허로 남아있는 탑 주변에서 알지 못할 적요한 마음결이 느껴져서 좋았다.
  어느 날 오후 넋 놓고 탑신을 바라보자니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탑 앞에 모이는 것이다. 부산의 대학생들이었다. 혼자 말로 '왜 이렇게 이 탑이 아름다운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들을 이끌고 백제 지역을 답사하는 교수님은 내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문득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손뼉을 치며 "딱,딱,딱, 자, 여러분! 이 백제 탑이 어떻게 아름다운가요? 신라 탑과 어떻게 다른가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멍 하니 모두 올려다보았다. 물론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돌조각을 쌓는 데는 모두 과학적 원리가 있다. 그리고 시선이 닿았을 때의 체감까지 고려한 점도 있다. 그 교수님의 설명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보았고, 그 후로 더욱 그 미감을 음미하곤 했다.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초층 탑신은 맏형처럼 듬직하고 2층 이상은 어여쁜 누이동생들처럼 옹개종개 오라버니 넓은 등에 업혔다. 평사낙안 기러기처럼 너른 지붕은 넉넉하고 한가로운 정경…. 지붕 끝마다 드러난 추임새는 어느 여인이 진양조 느린 가락으로 춤을 추다가 불현듯 손끝을 튀기는 악센트…. 위층으로 오를수록 지붕은 넓고 몸뚱이는 가냘퍼!  저 꼭대기의 긴장은 아름답다 못해 애틋하고 속이 타들어 간다." 이렇게 탑 박사님은 탄식했다. 아마도 이 감상은 정림사지5층석탑의 미를 표현한 말이지만, 이 왕궁탑에도 충분히 해당되는 맛이다. 
  미륵사 서탑(국보 11호)은 200여 년의 전성기를 누렸던 목탑木塔의 시대가 끝나고 영원하게 변하지 않을 석탑의 시원(始原)인 탑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 한 번 돌탑을 조성한 백제의 석공은 나무를 주무르듯 이렇게 조각미가 아름다운 정림사지탑과 왕궁리석탑을 만들었다.
  이제는 왕궁터가 발굴되어 왕궁리란 이름의 물증이 드러났다. 사방에 나타난 성벽과 유구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실체의 흔적이 드러날 수록 발굴되기 전의 모습이 애틋하게 그립다. 탑이 보이는 입구에 서면 자연의 흙 길이 열려 있고 양옆으로 100여 년 가까이 된 벚나무가 줄 서 있었으며, 왼쪽은 지금도 여전히 벚나무 숲이다. 흙 길 끝에 하늘을 당당히 떠받치고 서 있는 탑이 노을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아름슬픈 자태는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했다.

 

 

 

 

 일제시대의 왕궁리탑

 

 

2009년 1월 사진

 

 

2008년 4월 벚꽃이 피었을 때 발굴 작업 중

 

 

2009년 1월 사진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옛날 탑 사진을 보던 한 관람자는. 자기는 이 부근의 마을에 살았는데 초등학생 때 탑 주위에서 놀면서 옥개석(지붕돌)위를 올라 다녔다고 했다. 인근 초중등학생들의 소풍장소가 미륵사지와 이 왕궁 터였다. 소재구 탑 박사님도 그랬다. 어렸을 때 늘 이 주위에서 놀 질 때까지 자주 놀았단다. 그 인연이 나중에 청년 시절부터 탑에 미쳐 새벽부터 밤늦도록 돌아다닐 줄을 그때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냐고 술회했다. 참 인연이란 묘하다. 내가 아버지의 직장 인연 때문에 중고등학생시절을 전주에서 보낸 일이 후에 다시 이곳 사람과 결혼할 인연이 될 줄이야! 설화의 주인공처럼 서동이 선화공주를 찾아다녔던 것 같이 내 남편도 청년시절 다시 나를 찾아다니다 결국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나를 찾아 전주까지 데려올 줄이야!  아마도 친정 친척 하나도 없는 타향에서 내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나를 위로해주었던 백제 탑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작부터 차의 공덕을 알고 부처께 헌다공양을 올렸던 기원의 덕도 힘이 되었을 것 같다.

  어렵사리 삼국을 통일한 신라. 백제를 무너뜨리고도 고구려와 8년 간이나 전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를 물리치기까지 힘겨웠다. 통일한 나라를 화합하기에는 내용이 충분해야 했다. 자기 고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익산 지역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 희망과 꿈이었던  미륵사를 유지하기 위하여 강력한 신라인들로부터 시주를 받아야 했겠지. 지역을 살리고 화합하기 위하여 그들의 민요에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상상의 인물을 등장시켰을 테지. 문학적 상상력은 선화공주를 빌어 서동의 신분 상승을 올려놓을 만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지역은 오랜 세월 서동요의 덕을 보아왔던 셈이다. 새삼스레 선화공주가 아니고 익산의 호족이었던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비였다고 해도, 또 왕비가 어디 한 분뿐이었겠는가. 그렇게 고치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덕택에 경남에서 산 세월보다 전주에서 산 세월이 많아졌다. 이제는 이곳의 문화미에 푹 젖게 되어 탑 앞에 서면 한 살처럼 느껴진다. 고대에 선화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내 피도 걸러지고 여과되어 나에게서는 복합 문화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첫 세대로써 영호남의 가교를 이었으며 내 아들도 대를 이어 영남 여인을 아내로 맺었으니 그렇게 해서 선화공주의 후손들은 한 영토 안에서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 창조해 가고 있다.

  만날 때마다 내 발길을 붙잡는 백제 탑이여! (2009)
 

 

 

 해체 되기 이전의 미륵사 서탑

 

 주변에 꽃나무도 장식하기 전의 모습

 

 

미륵사지 서탑은 오른 볖 복원된 동탑과 마찬가기로 9층일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복원보다도 남아 있던 6층 까지의 모습을 수복한다는 의미로 6층까지만 수복하기로 되어 있다.

 사리공이 해체되기 전의 심초석이 가운데로 보인다.

 

 80년 대부터 보아왔던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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