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 에세이 2집

에세이 2집 2부 아름다움이란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7. 22:06

2부






1. 아름다움이란 뭔가요?

2. 춘삼월

3. 대지가 웃네요

4. 철없는 사랑

5. 쟈스민

6. 향 공양

7. 날 잊지 말아요

8.  지금 어디야?

9. 설거지를 하며

10. 바퀴벌레

11. 달빛 소나타

























1. 

아름다움이란 뭔가요?





  생각해보면 그전에도 그랬어요. 봄의 신비에 젖던 기억 말입니다. 그럼에도 유난히 이 봄은 정말 처음 보는 봄입니다. 봄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이기에 봄이지요. 마치 아기가 처음 눈이 뜨여 첫 사물을 볼 때, 이런 느낌이 아닐까요? 아기와 눈맞춤을 할 때 그 눈빛에서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세상이 이렇게 향기로운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좀 더 산뜻하게 보내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조차 부끄럽게 생각될 정도입니다.


  아주 이른 봄날  아지랑이 같은 연두 빛이 번지기 시작하는 건너편 언덕에 이끌렸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아름답게 보이던 그 실루엣은 없었습니다. 푸석 푸석한 땅은 막 녹기 시작하고 축축하기까지 하여 허리를 쉴 수 있는 어떤 자리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답던 연두 빛 물감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하잘 것 없는 풀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듯이 자연도 적나라하게 그들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실체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우리는 가끔 그 아름다움이란 것에 잠깐 홀리거나 사로잡혀서 존재의 본질적인 것을 직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볼 때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름다움은 그 거리와 사이가 만들어 내는 그 무엇일 것도 같습니다. 그 거리나 사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모든 생명과 현상은 역동적으로 운동하며 변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머물러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변화 자체가 아름다움을 생산해내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의 실체와 그 본 바닥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깨달아질 때, 모든 생명이 온 생명의 여러 갈래였음을 알고 비로소 사랑이 싹트는 것 같습니다.

  내 뜰의 봄을 보지 못하고 봄 찾아 헤매던 젊은 날들, 유난할 만큼 아름다움을 찾아 다녔던 많은 날들. 행복의 파랑새는 내 안에 언제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다울 것이 어디에 따로 있겠습니까? 어느 과학자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했습니다. 이 세상 자체는 유기체로 엮여져 돌아가는 생명 덩어리가 아닐까요. 세상은 그저 아름다움 자체라고 하고 싶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수용하지 못할 것도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은 아름다우며 너무 멀리 두고 보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맙니다.  '아! 사라져 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하는 종해 님의 탄성이 너무나 절실합니다. "안녕, 하고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 밑을 비춘다" 꽃이 아름다운 건 낙화가 있기 때문이요, 단풍이 또한 아름다운 건 낙엽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주 안에 미미한 먼지에 불과한 작은 풀잎, 가을의 작은 풀벌레, 그리고 한 점 같은 우리들 인생, 작지만 위대하기도 한 삶, 작아서 아름답고 짧아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도 역시 사람마다 그 마음이 형형색색이니 자기의 마음 모양으로 아름다음의 모양도 다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더욱 아름답게 창조해 나가야 하겠지요.


  봄밤이 깊어갑니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구슬이 서로 부딪히는 것 같아요. 소쩍새 소리 이쪽에서 소쩍! 저쪽에서 소쩍! 메아리쳐 장단을 맞춥니다.  아름다운 봄밤을 잠으로만 보낼 수는 없나봅니다. 언덕의 연두 빛 아지랑이 속에 서 있던 나무들과 푸석한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 풀의 희미한 빛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림이 보이지 않는 밤이지만 그 풍경에 소쩍새 울음과 개울물 소리가 어울리니 더욱 아름다운 밤이 됩니다.


"아름다움이란 뭔가요? 꽃잎이 크고 빛깔이 진하고 향기가 많이 나면, 그러면 아름다운 건가 요?"

"그런 것은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럼 진짜 아름다움이란 어떤 건가요?"

"아름다움이란 꽃이 어떤 모양으로 피었는가가 아니야. 진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게 좋은   뜻을 보여주고 그 뜻이 상대의 마음속에 더 좋은 뜻이 되어 다시 돌아올 때 생기는 빛남이야."   정채봉의 동화 <제비꽃>중에서  (어느 초춘(初春)에)













2

춘삼월




  러시아의 눈은 하얗지 않단다. 흰눈은 내려 쬐는 햇살에 반사되어 보라, 분홍, 파랑, 하늘, 노랑 색의 빛을 뿜어내기도 한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회청색 톤으로 채색되는 3월의 눈 위에 떨어지는 따뜻한 햇살이 러시아의 봄이라고 한다. 몇 달 동안 쌓인 눈을 녹여 계절을 바꾸기 위해 러시아의 햇살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하게 뇌려 쬐리라.  사월의 도시는 을씨년스럽기만 하고 오월이 되어야 초록 물결이 일어난다고 들었다.

  챠이코브스키의 곡, 사계 중 봄 (3,4,5월)은 너무 아름다워 많은 음악가들의 편곡 작품이 많다고 한다. 앙상불로 편곡된 차이코브스키의 봄을 춘삼월에 춘설이 펑펑 내리는 밤에 듣자니 끝없이 펼쳐진 설원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라라’가 되는 기분에 젖는다. 유난히 짧기만 한 러시아의 봄이 얼마나 찬란하고 매력적이었는지 상상이 된다. 유리 파편처럼 반짝거리는 음악의 코드가 챠이코브스키의 혼을 저절로 오선지 위로 흐르게 했으리라. 비발디의 봄은 경쾌하고 활기차지만 챠이코브스키의 곡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그렇게 깊게 심연으로 파고드는 선율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겠다.


  동면하던 동물들이 부풀어 오른 땅을 뚫고 깨어 나오려는 찰나에 내린 폭설로 온 나라가 순간 뒤집혔다. 시골의 농부들에게는 혹독한 시련이다. 나태해지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찬물 아닌 폭설이 쏟아졌다. 단지 겨울이 물러가기 싫어 앙탈부리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미칠 듯이 질주하는 세상일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계절도 반란을 일으킨다.


  봄은 어느 순간 찾아오는 듯싶더니만…. 이제 막 트고 있는 잎눈들이 춘설의 장난에 화들짝 놀란다. 야성의 기운을 느끼는 러시아의 봄처럼. 백년만의 삼월의 폭설에 놀라는 것은 새 잎뿐 아니라 잠에서 깨려던 동물들과 땅 속의 미생물조차 질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춘설은 그리움을 가져다주기보다 아예 가슴이 아린다. 하늘이 눈발로 가득 채워진다 해도 춘설임에야! 남녘에서 불어오는 춘풍에는 빙점을 지켜내지 못하리라.


  삼월은 그렇게 단번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올까 말까, 멈칫 멈칫, 찬바람으로 오다가 때로는 춘설을 난분분하게 흩날리기도 하며, 따뜻한 햇살로 유혹하기도 하며 감질나게 조금씩 다가온다. 춘삼월의 바람은 겨울바람보다 더 살 속으로 스며든다. 삼월이라고 성급하게 속옷을 벗었다가는 오늘처럼 갑자기 몰아치는 춘설에 이지러지는 매화꽃처럼 맥 못 추게 될 수가 있다.

느닷없는 춘설로 정이품 소나무 가지가 꺾인 것은 아쉬운 일이다. 어찌 그 가지를 다시 이어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재생할 수가 있을까. 가지 한 쪽 찢기어 나갈지라도 한 줌의 눈발을 가슴에 안아본 맛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때  아닌 폭설을 맞고 한 가지  잘려나간 소나무처럼 다친 발을 딛고 겨울 나목처럼 지낼 수 있었던 것도 행복이었다. 겨울 동안 나목이 깊은 호흡으로 언 땅에서 길어 올렸던 최소한의 양분으로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포근한 함박눈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춘설에  움츠러든 매화 망울들이 애처롭지만 긴 겨울도 그렇게 지내온 걸. 이미 불기 시작한 춘풍을 누가 걷어갈 것인가. 춘설의 아픔을 맞은 우리의 마을도 샤갈의 마을처럼 매력적인 봄을 잉태하고 있지 않은가. (2004. 3.)



















3

대지가 웃네요






"대지는/꽃을 통해/웃는다." 레이첼 카슨이 노래했습니다.


  정말 봄 꽃나무들의 웃음들은 대지의 노래입니다. 지리산 자락 구례군의 산동 마을은 노오란 수채화 물감을 뿌려놓은 듯 산수유 무리 속에 감싸여 있어요.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도 매끄러운 바위를 타고 명랑하게 울립니다.


   꽃놀이 가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화사한 웃음들이 나의 가슴 가득 감동의 물결로 번져왔습니다.  무리 지어 있어 더욱 멋지고 근사한 화음을 내는 벚꽃입니다. 벚나무 밑으로는 개나리들이 샛노란 웃음을 까르르 내는 동안 산 나무들의 새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한겨울밤 눈 내리는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초록이 짙어 가는 사이로 진분홍 진달래들 수줍은 미소 피는 소리 여기 저기, 꽃님 얼굴 좇는 내 눈길이 분주하여 핸들이 자꾸만 흔들렸습니다.


  저녁이 되자 강풍이 일기 시작합니다. 꽃들의 잔치를 시샘하는 걸까. 웬 바람이 이리도 센 건가요. 세찬 비바람에 아기 속살 같은 야들야들한 꽃잎이 속절없이 꽃비 되어 날리고 있겠구나. 언제나 그랬습니다. 벚꽃이 만개하여 절정을 이루어 사람들이 환호하게 될 때 한 차례 비바람이 몰아쳐 떨어지는 꽃들을 아쉬워해야 했습니다. 꽃놀이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 주는 조화의 손길인가요.


   밤새 강풍은 얼마나 불어대었는지 아침부터 조용한 비가 예쁘게 내리고 있습니다. 산에서 언덕으로 막 피기 시작하는 복사꽃 밭으로, 봄 가뭄에 메말랐던 대지가 촉촉이 젖어들어 차라리 안도의 숨이 쉬어집니다.

  겨울 나목 어디를 찾아보아도 꽃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 들여다  보아도 그 속에 꽃잎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았는데요. 어디에 숨어 있다 나오는 걸까요.

  아! 그래요. 땅과 하늘은 그 얼굴을 알 수 없으니 나무를 통해 얼굴을 내미는 걸까요? 그래요 대지는 나무를 통해 웃는 걸 거예요. 땅은 산이나 들에서 형형색색 여러 모양의 웃음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작은 뜰에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람들의 손길에 의하여 미소로 와서 우리의 축제를 더욱 즐겁게 하는군요. 봄비로 산천초목에 물이 차오르면 봄의 교향곡은 더욱 힘차게 울려 퍼지겠지요 이렇게 봄이 무르익어 갑니다.

   우리 동네는 복사꽂이 아기자기한 마을입니다. 과일 나무를 손질하는 농부들의 콧노래도 들리는 듯 합니다. 나는 꽃그늘 아래서 나물을 뜯으며 꽃들에게 추임새를 보냅니다. 거실 오른쪽 창 밖으로 윗동네의 배꽃 숲이 반쯤 보인답니다. 어제 오후에 나는 기어이 그 꽃 숲에 갔습니다.

  한 송이 빼어난 장미 보다 4월 밝은 날 배나무들의 꽃구름은 얼마나 환상적인지요.  빛부신  하얀 꽃과 얼굴을 마주하니 마음 눈이 멀어버립니다.  모란이 피기까지 대지는 정말 바쁘겠지요.. 대지가 그리 분주한데 그냥 손놓고 모란이 필 때까지를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꽃봉오리 같은 처녀시절에 중국에서 시집온 낭자가 심었다는 산동마을의 산수유. 평생을 노란 산수유 꽃에 둘러싸여 바쁜 대지 위를 발다닥이 닳도록 오가며 삶을 일구어 온 사람들. 가을에 노란 꽃들이 새빨간 열매들로 한 번 더 꽃동네가 될 때 그 마을 처녀들 이빨이 붉어져야 했다지요. 땅을 일구고 그 땅을 웃게 만들던 농부들에게는 따로 웃음을 흘릴 일이야 없을 겁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땅을 일구는 농부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아는 자들이겠지요.

  환경운동가였던 레이첼 카슨은 온 생을 다하여 글을 쓰면서 대지가 정말  웃을 수 있도록 그의 <침묵의 봄>으로 세계에 자연 사랑을 호소하였지요.   (2002. 4)



































4

지금 어디야?

                                                         



  우리 동네 목련꽃들은 가련하다. 일찍이도 피어서 기쁨을 준다 했더니. 하루 종일 햇볕 속에 서있어야 하기 때문에 급히 핀 꽃들은 혹독한 춘설을 맞아 무참히 멍들었다. 봉오리조차도 피는 동안 몇 차례의 꽃샘바람과 심한 일교차로 누렇게 변색되어 지저분한 몰골이 되어버렸다. 목련 특유의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몸부림에 넋이 빠져버렸다.


  오늘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겨울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때다. 추운 북쪽 지방에서도‘추위는 춘분까지’라고 했다. 한랭전선이 통과하면서 흔히 일기 쉬운 천둥을 동반한 춘삼월의 폭설로 사람도, 동물과 식물도 놀랐던 가슴을 이 때부터는 마음껏 펼 수 있으리라. 춘분에서부터 약 20여 일이 기온 상승이 가장 큰 때란다. 일 년 중 농부들이 일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 밭 갈고 씨뿌리는 준비와 일 년의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 서양 점성학에서는 이 때부터 양자리(3월 21일부터 4월 20일까지)가 시작하며 일 년이 펼쳐진다. 비로소 나의 일 년도 춘분을 맞아 시작된다.


  참 매력적이다. 반쯤 열려 수줍은 모습들이 낭창한 가지에 몇 송이의 봉오리와 함께 어울려 있는 그 자태. 잘 피어나는 목련꽃은 달 밝은 밤이나 별이 뜬 밤에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우아한 여인 같다고 누가 그러던 가. 누군들 이끌리지 않겠는가. 초파일 전야의 절 마당에 걸리는 연등처럼 나무에 매달린 연꽃을 연상케 하는 목련이 아니던가.

  자리에 따라서 이리도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다니. 춘분이 되어서 피기 시작하는 목련꽃은 더 이상 심한 꽃샘바람을 맞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자신의 생명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후회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으면 그것이 생의 보람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옮겨놓지 않으면 식물은 평생 그 자리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  음지에 있으면서 일정한 시간 살짝살짝 스치고 지나는 햇살을 보듬으면서도 제 모습을 한껏 피어내는 생명들도 얼마나 많은가.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 해서 좋은 양지만을 쫓아다닌다고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생명이라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자리가 있으리라. 누구나 그 자리에서 필연코 해내야 할 자기만의 역할이 있을 터. 진정한 자유란 자리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진대……. 빨리 달려서 목적지에 닿아 섣부른 성취감의 축배를 올리다 서리 맞은 목련 같이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앞장서서 달린다고 해서 그것이 꼭 행복일수는 없다. ‘혼자 잘살믄 무슨 재민겨!’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어느 농부의 말이 떠오른다.


  춘분을 기점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한 순간에 엇갈리고 서서히 낮이 길어진다. 잠시도 자연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서 영상으로 보는 폭설의 대란이 전설처럼 들리기만 하는 도시인들에게는 절기란 관심 밖의 일일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절기를 구분하여 농사를 지어왔던 옛 사람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한다.

  24절기는 우리 몸의 기둥 24개인 척추에 해당한다는 말이 있다. 24절기에는 우주의 좋은 기운이 왕성하게 작용하는 날이어서 이 때를 맞추어 숲 속에서 혹은 자기에 맞는 나무 밑에서 기(氣)를 받은 명상을 하면 좋다 한다.  직접 농사를 하지 못하니 마음 밭을 갈아야 하리. 절기가 교차하는 시각 전 후 30분씩 명상을 하기 위하여 가까운 숲을 찾는다.

  대지는 온갖 생명들의 태동을 위하여 꿈틀거리고 있다. 어리디 어린 봄날, 뾰족이 땅의 더께를 뚫고 올라온 수선화의 노란 꽃봉오리가 첫 햇살을 만났을 때 꽃의 마음은 어땠을까. 비수 같은 첫사랑의 입맞춤이었을까? 깨고 나오는 그 진동은 어떤 감흥에도 견줄 수 없는 신비한 명상체험이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희망을 속삭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새소리 또한 천지를 울린다. 절기의 호흡에 맞출 수 있는 농부들이야말로 아름답다는 헤픈 말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온몸을 다 해 명상 속에서 진정한 봄을 열고 있다. 따뜻한 햇살의 은총 속을 유영하며 쑥 향에 파묻혀 있는 화평한 이 봄날,  부풀은 봄 흙을 맨발로 밟고 다녔던 옛 시절이 그립다.


4월이 되어 온갖 꽃들과 새 잎이 터지면 대지도 새 생명을 틔워내는 아픔을 날려버리고 꽃들을 통하여 웃음 지으리라. 이 모든 생명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나는 왜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가. 선악과를 따먹고 숲 속으로 숨어버린 아담에게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고 부르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서 전화를 받고 안부를 물을 때 자주 쓰는 말이 ‘지금 어디야? 뭐 해?’  하는 말이다. 어찌 보면 정말 본질로 통하는 깨우침을 주고받는 말이지 않을까. 봄바람 한 줄기가 휙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2004. 3. 20)


























5

철없는 사랑



  집 베란다에는 철없이 피고 지는 꽃이 있다.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옮겨 다니기도 한다. 벌 나비도 없는데, 이웃 화분에도 옮겨가서 씨를 퍼뜨린다. 잎 한 줄기 또는 꽃대 한 줄기가 다른 화초 사이에 올라 와 차츰 영역을 넓힌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했거늘, 사랑이 항상 넘쳐 사랑초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우리나라의 사랑초는 분홍색 꽃과 초록 잎을 가진 것, 자주 빛 잎과 꽃을 지닌 것과 잎이 초록이며 흰 꽃을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집의 것은 흰 꽃을 피운다. 작은 화분 하나가 불어나서 큰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그 후에는 여기저기 다른 화초들 사이로 파고들어 아주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을 살려야 할지 몰라 그냥 두고 보자니 아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아내듯 주인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왕성한 번식력을 나도 말릴 수 없어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 가을에 낙엽 지는 것이 많아지고 지저분해서 한 두 뿌리만 남겨두고 모두 걷어버렸다.


  황사바람이 봄날을 어지럽히는 날에는 창안으로 들어온 햇살에 안긴 화초들이 편안하게 보인다. 이른 봄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베란다가 수런거리더라니! 불쑥 가느다란 꽃대 두 개가 빈 화분에 쑤욱 올라 와 하얀 꽃망울을 제일 먼저 터트리면서 생글대는 것이다. 지켜보노라니 벌써 한 철 이상 꽃을 피우고 있다. 두 개의 사랑초 화분은 벌써 소담한 새 잎들과 꽃대가 둥그런 꽃 궁궐을 꾸미고 꽃바람을 낸다. 나 봐란 듯이 또 로즈마리 화분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한 줄기 올라 왔다. 사철 푸른 잎에서  향기를 풍기는 로즈마리 사이에서 앙증맞은 꽃 한 송이가 재롱을 떤다. 정말 사랑은 아무도 못 말려!


   요새 텔레비전 일일드라마 중에 '사랑은 아무도 못 말려' 가 악조건 속을 헤쳐 나가는 젊은이들의 끈질긴 사랑을 그리고 있다. 고3인 은민이 가정교사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가정교사의 집과 은민이의 집은 이웃 간이지만 서로 좋지 않은 관계이다. 은민이 어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철부지 은민이 선생님을 무작정 좋아해 대학도 가지 않고 어른들 몰래 선생님을 찾아다니고 드디어 둘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은민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니 어쩔 수 없이 양가는 그 둘을 결혼시킨다. 임신한 며느리에게 잉어 죽을 끓여주시는 시어머니에게 은민이 거짓 임신을 고백하고 잘못했다고 빈다.  '아무리 철없고 어른 무서운 줄 몰라도 이런 법은 없다.' 하며 시어머니는 잉어 죽을 엎어버리고 눈물을 흘리신다.

  그렇게 철없이 사랑을 시작했지만 끝까지 책임 있는 사랑을 키워가려고 철없던 은민은 고생을 해가면서 철들어 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철없는 사랑으로 철없는 인생을 소모하는 경우가 많을 것인가. 청춘이 어느 한 시기를 말하진 않을 진데 어디 젊은 청춘뿐이겠는가. 철없을 때 비켜간 많은 인연들과의 사랑 연습도 모두 철들어 가는 과정이리라.

  바람 부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사람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인생을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러다가 갑자기 상황이 달라지면 바람 부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모두 서러워지고 사람은 없던 인생을 얻어놓고도 하늘 뜻도 모른 채 철없는 인생을 산다.


  열흘 이상 가는 꽃이 없다는데 사랑초는 작은 풀꽃 같지만 우리 베란다에서는 한 번 피면 철없이 피고  진다.  꽃과 잎이 다 시들어 말라도 다시 그 뿌리에서 새 잎과 꽃이 소생하기를 거듭한다. 정결한 꽃은 낮 동안에 활짝 피며 초록 잎도 펴져 하늘을 향한다. 저녁이 되면 꽃과 잎이 함께 오므라든다. 빛에 민감하여 흐린 날이나 밤이면 잎은 세 나비가 서로의 날개를 맞대고 줄기 쪽으로 내려지는 형상 같고 셋의 입도 모여서 하나로 붙어버릴 것 같다. 마치 세 나비가 합장을 하고 기도하듯 잠이 들고 꽃잎도 눈을 고요히 감는 모습이 얼마나 꽃다운 사랑의 표현인지 모르겠다. 아침이면 어느새 깨었는지 나보다 언제나 먼저 깨어 저희들끼리 서로를 맞으며 그저 그렇게 정다운 하루를 연다. 철없이 그렇게 피고 지고 ……. 계절을 모르는 사랑이니 그야말로 철든 사랑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습과 생태에 어울리는 그 이름 사랑초. 한평생이 다 가는 길 언저리, 사랑초 옆에서 철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사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천리향이 아무리 천리(天理)향을 피워도, 찬 바람 드는 통로에서 겨울 지낸 춘란이 다소곳하게 그 고아한 자태를 드러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랑초.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도 다 때와 곳이 있건만 아무데나 사랑의 불씨를 퍼뜨리고 지켜 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순결한 사랑초. 철든다는 것은 그 때에 든다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 든다는 것이련만 사랑초야말로 시공을 모르는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철든 사랑을 과시라도 하는 걸까?.

(2006 여름)



부활절


들녘엔 햇나물 지천이네

냉이 민들레 쑥 돌미나리 돌나물

님께서 통 채로 내주신

성체(聖體)

이는 님의 피요 님의 살이니


겨우내 인고의 땅기운 먹고, 또

사순절 동안

꽃샘바람에 흔들리다

햇바람 봄볕 먹고 자란 새 생명

이는 영원 전 내 피요 내 살이니


또 다시

전신을 송두리째 열탕으로 세례 받고

변모된 봄나물 한 접시

이는 내 피요 내 살이 되리니


엄숙히 받아 모시는

부활의 성찬(聖餐)식

꽃들이 천지를 장식하고

새들은 축가를 부르네.


(2006년 4월 부활의 계절에)




*사순절 - 천주교에서는 부활절 전야까지 40일 동안을 사순절이라 해서 신자들은 침묵을 중시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참회한다. 특히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라 한다. 그 날 미사에서 이마에 재를 뿌리며 마음에 새긴다. '명심하라,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6

쟈스민


 

  여름 내내 식물원에 맡겼던 쟈스민 화분을 늦가을에 찾아왔다. 봄에 다시 꽃을 피우려면 가지에 붙어있는 잎을 모두 따주라고 식물원 아저씨가 말해 주었다. 과감히 잎을 모두 따준 쟈스민은 삐죽이 마른 가지만 남아 볼품이 없었다. 그래도 춥다고 아프다고 말이 없었다. 푸른 잎 달린 다른 화분 사이에서 죽은 듯 소리 없이 나보다도 더 간절히 봄을 기다렸으리라.


실내지만 꽃샘바람 지난 고요한 날부터 잎과 잎 사이에 콩알만한 봉오리가 꽈리모양을 하고 맺혔다. 그리고는 여러 날 부풀었다. 그 연두 빛 꽈리모양 안에서 꽃대롱이 크고 있었다. 어느 날 꽃 봉은 꽃받침이 되고 그 안에서 주름진 연보랏빛 꽃 봉을 단  대롱이 솟아나오게 된다. 화려하지 않은 쟈스민 꽃은 처음 야들한 보라빛으로 핀 다음 향기를 발하면서 차츰 흰색으로 변한다. 그 향기가 요염하지도 않고 분 냄새를 진하게 풍기지도 않으며 그윽하게 퍼져 코끝을 간지럽히며 실내를 향 맑게 한다. 아마도 보라색 향기를 품어내고 나면 힘없어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향을 잃지 않는다.


  쟈스민 화분 옆에 서면 남쪽 유리창은 무릉도원 풍경화를 걸어놓은 듯 하다. 겨우내 잎 다 떨군 복숭아나무 가지에는 열매를 싸주었던 봉지만 남아서 깃발처럼 달랑거리고 있었다. 이미 약속이 된 듯 잎 떨어진 자리에 발갛게 꽃눈이 맺혀 눈바람을 맞고 있었다. 겨울나무는 맨 몸으로 뼈마디 속까지 싸늘한 추위를 잘 견뎌내야 오늘과 같은 찬란한 봄을 맞는다는 것을 저절로 아는 것이다. 새로운 성장을 위하여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과수를 보면 나태해지려는 나를 다시 고쳐 잡는다. 실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한 자리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하며 맞이해야 하는 나무처럼 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와 책임져야 할 부분을 살펴보게 된다.

  화분의 식물들은 사람의 손길에 달려 있다. 어떤 물질이든 저마다의 물성(物性)이 있는데 그것을 잘 알고 그에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자라는 생명이야말로 유전적으로, 환경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그 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 물성을 알아서 서로 조화롭게 자라게 하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다. 같은 쟈스민 화분을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잎을 따 주라고 말했더니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생  잎을 따주는 것이 아깝고 아프기 때문에 용단을 내리지 못한 줄로 안다. 그러니 큰 잎만 가지고 있을 뿐 꽃을 피우지 못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순리인지는 모르지만 꽃나무를 도와서 꽃을 피우는 동안 같이 성장하지 않았는가 싶다.  천지간에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 자연의 이치를 배워서 그 순리를 따르는 일은 어렵고도 긴 여정이다. 성장통을 위한 수행이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하리라. 겸허한 자세로 배우고 또 익혀서 자연과 동화하며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이상(理想)이지 않을까. 


  쟈스민의 향기는 영혼의 진수이다. 두고두고 마음으로 즐기는 열매이리라. 사람도 살면서 자기 얼굴에 마음을 그린다.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영혼의 빛바랜 잎들도 떨어지고 다시 새 잎을 피우기를 수십 번씩 하면서 나이테에 어떤 향기가 새겨질까. 잎 떨어진 자리에 어떤 마음의 열매들을 열리게 했을까.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자유,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는지.

  그 많은 마음의 열매 중에는 한 개인의 내면에 초석이 되는 바탕의 성품이 있을 것이며, 기둥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되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여러 역할의 성품이 쌓이는 만큼 그만의 향을 지닌 영혼의 집이 만들어질 테지.

(2005년 4월) (미래문학 2008)







































7

향 공양



  쟈스민 꽃잎은 모두 하얀 색이 되었다.  다 핀 쟈스민 꽃은 채송화만하다. 보라색이 점점 옅어지면서 끝내는 하얗게 바래 버린다. 힘없는 꽃잎이 뒤로 넘어져 주름지고 파리해지면서도 떨어지기 전까지 향을 낸다. 향기를 자아내려면 너무 힘들어 그렇게 바래버리는 것일까. 하얀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마지막 분향 올리고 말라서 오그라진 모습 그대로 곱게 떨어진다.

  한참을 망설이다 지난 가을 어느 날 모진 마음을 먹고 또 쟈스민 나무의 잎을 모조리 따 주었다. 같이 빈 몸이 되어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겨우내 빈 가지로 있던 쟈스민 가지를 보면 정말 잎이 날까? 지난 해 체험을 하였지만 그래도 가끔 빈 가지를 눈여겨보며 기다렸다. 이른 봄 가지가 가려운 듯 눈이 돋는 것 같았다. 하나씩 잎눈이 돋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 잎이 다시 피기 시작하고 빈 가지는 푸른 옷을 입어 따뜻했다.

  가느다란 꽃줄기 위의 꽃망울은 아기 손가락 끝마디만 하다. 그 앙증스런 꽃망울이 그렇게 몇 날 필 때를 기다리더니, 한번에 활짝 열지 못하고 배시시 벙글다가 날마다 조금씩 조심스레 피었다. 활짝 열린 꽃잎은 평면으로 펼쳤다가 색깔이 변하면서 나중에는 뒤로 발랑 넘어져서 꽃받침을 가린다.

  하루의 피로를 녹이는 시간 거실에서 텔레비젼을 보며 족욕을 한다. 어디선가 묘한 향이 나를 어딘 가로 실어가듯 안개처럼 감긴다. 아! 고개가 절로 돌려지면 거기 쟈스민이 눈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분향을 올려주는 거룩한 기분이 들어 화분 쪽을 돌아보다 발을 닦고 정좌하게 된다.

  부처님께 가장 귀한 것을 올리는 공양 거리 중에 ‘향공양’이 들어 있지 않은가. 내 안의 부처가 소생하는 시간이 된다. 옛날부터 향은 부정을 없애고 몸과 마음을 맑게 함으로써 신명과 통한다 하였기에 거룩한 제사의식에 분향을 하여 왔던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욕구는 한계를 짓기 어려워서 좀처럼 오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은 일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꽃을 보면 냄새를 맡아보게 되고 과일을 보아도 냄새를 맡아보게 되며, 음식은 여러 가지 냄새로 구미를 자극한다. 마음과학이 점점 밝혀지는 현대는 병의 치료에도 그림치료, 음악치료, 향기치료 등을 활용하고 있으며 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하여 공부방의 색깔도 좀 더 신경을 쓰면 그 효과가 증명되고 있는 때다. 오감을 통하여 풍요로운 감각을 키워내게 되면 그것이 꽃받침이 되고 그 위에 고귀한 의식의 꽃을 피우게 되는 지도 모른다.


  벌 나비들이 꽃들의 향에 의하여 모여들 듯이 식물들도 동물들도 그들 고유의 냄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기에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외면을 꾸미는 일이 산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옛날에 향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럽의 샤넬을 선물 받은 적이 있어도 순결한 쟈스민 향보다 좋지 않았다. 향내를 풍기는 나무는 향나무, 백란, 정향나무가 있고 그 많은 꽃들 중에 쟈스민도 한 목 하여 중국에서는 쟈스민 차도 생산하고 있다. 오룡차에 마른 쟈스민 꽃이 섞인 차는 우리 입맛에는 별로 이지만 중국의 식생활에는 맞는 모양이다.

  현대인에게 너무나 낯설기만 한 고대부터 중세까지 있었던 유럽의 치열한 향료전쟁. 향료를 구하기 위해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을 허비했던 길고 힘든 여정을 감안한다면 향 자체를 구하는 일은 신을 찾는 순례자의 길과도 통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조촐한 찻상 앞에서 차 한 잔 나누면, 차 맛인지 달콤한 쟈스민 맛인지 분간이 잘 안 된다. 맹탕 한 잔 마셔도 쟈스민 차를 마시는 것과 같다. 꽃이 피는 동안은 집 안에 머물고 싶어진다. 청정한 향이 저절로 의식의 날개를 달아주어 안개처럼 나를 감싸고 신명과 통하게 한다. 작고 별 볼일 없는 나무 형으로 한 달도 채 못 되는 날들의 향연을 마련했던 쟈스민처럼 내 삶도 그런 분향이 될 수 있을까.  (2006년 4월)



































8

날 잊지 말아요

 

 

  사람이 꽃이라고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그렇다면 꽃이 또한 사람이겠지요. 화려하고 탐스럽고  

잘 생긴 재배 꽃들은 또한 잘나고 잘 생긴 대로의 사람이고, 이 땅에 저절로 피고 지는 들꽃  

풀꽃들도 그와 못지 않게 모두 소중하고 귀한 생명입니다. 이 땅에 살다 간 조상 대대로의  

영혼들이 세상에서 못 다한 한을 달래고자 들꽃으로 피고 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6월이 되면 개망초꽃들이 아련히 사라지는 산 숲의 아카시와 밤꽃 냄새를 맡으며 몰려옵니다.  

봄꽃들이 순서대로 찾아와 찬란한 쇼를 펼치고 돌아간 뒤, 산과 들이 푸르름으로 뒤덮일 때쯤,  

때를 맞춰 무리 지어 피어나는 하얀 꽃무리가 안개같이 서립니다.  

  진짜 비슷하나 진짜가 아닌 가짜인 것에 개자를 붙이는 것 같습니다. 한 때 흔해서 천대시한 것.  

개살구, 개꿈, 개떡, 개판, 개복숭아, 또 개 자로 시작되는 안스러운 야생꽃이 있습니다. 개망초꽃.  

나라가 망할 때 피어서 농부들에게 천더꾸러기 취급받았다는 꽃. 귀화해온 꽃이 들녘을 차지한다고  

더러는 무시하기도 한 꽃. 그러나 개 자가 붙여진 이름이야말로 지구의 토종인지도 모릅니다. 원초적  

본질을 지닌 원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난히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일까요.  

진짜도 아니지만 가짜도 아닌 것. 그것이 참모습이지 싶습니다.  

  나는 개망초꽃을 망초꽃이라고 부릅니다. '날 잊지 말아요(Forget me not)' 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꽃이 있다지만, 난 개망초꽃을 볼 때마다 그 꽃말을 생각합니다. 판에 박은 듯한 미니  

계란후라이 같은 꽃. 노란 꽃술이 도톰하고 하얀 꽃잎이 잘고 짧은, 아이들의 순진한 눈망울 같아서,  

망할 망 자가 아닌, 망초꽃이라 하고 싶습니다. 기다란 꽃대에 잎이 엇갈려 나다가 윗부분에서  

꽃가지가 이리저리 뻗어서 꽃다발을 이룹니다.  두어 포기 한 손에 움켜쥐면 꼭 안개꽃 다발  

같습니다. 망초꽃 한 다발 속에 빨간 장미 한 송이 꽂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픈 훌륭한  

애정의 꽃다발이 될 겁니다.  

 

  외출할 때 계단을 내려가면 계단 창틀 안으로 둑 밭의 순결한 망초꽃들이 비쳐 들어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밝은 나들이가 되라는 눈짓인 듯 생기를 돌게 합니다. 삼천 변을 지나는  

길가에 가로수처럼 망초꽃들이 누가 심어놓은 듯 우르르 줄지어 서서 환영하는 하양 물결을 이룹니다.  

 

  6월의 개망초꽃은 땅 파먹기 힘들었던 이 땅을 다녀간 수많은 조상들의 영혼일지도 모릅니다. 이제사  

마음 놓고 한숨을 바람에 날리며 흔들거립니다. 망초꽃들은 한스런 민초들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언제 농부를 방해했는가 하며, 봄을 시샘하지도 않고 바쁜 농사철 지나서 핍니다. 익어가는 열매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제가 올 때를 잘 아는지 산언저리 빈 농토가 아까워 저들의 세상을  

만듭니다.  

 

  개망초꽃들은 후덥지근한 여름의 전투장에서 쓰러져간 영혼들이기도 합니다. 젊은 혈기를 다 여위지  

못한 아까운 영혼들이 우루루 모여서 시위를 합니다. 페허가 된 고지에도 지금 망초꽃들이 피고 있을  

겁니다. 삼팔선이 가로막힌 비무장지대에 망초꽃 언덕이 유난히 많은 것은 그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시골길 가로수가 되어 행인을 반기고, 쓰지 않는 땅을 지키는 망초꽃들. 6월이 아름다운 것은  

망초꽃 언덕과 망초꽃길 때문입니다. 속절없이 사라져 간 영혼들이 토해내는 한숨이 빈 농토마다  

허드레 쪼가리 땅에 서리어 안개처럼 망초꽃밭을 이룹니다. 초록빛 들녘에 달무리같이 하얀 꽃무리가  

서립니다.  

 

  놀고 있는 빈터가 쓸쓸하지 않는 것은 망초꽃들 때문입니다. 도란도란 작은 눈망울을 굴리는  

망초꽃들이 벌써 날 잊었냐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들도 먼 먼 옛날  

중국에서 귀화했습니다. 아니 또 그들의 먼 조상은 동이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나를 이 땅에  

귀화했다고 싫어할 것입니까. 본래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더운 여름날 모든 곤충과 벌레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는 망초꽃 들녘. 어느 세월 이전 먼 조상의  

정령일 수도 있으며, 다음 세상에 환생한다면, 틀림없이 인간으로 환생할 것을 믿습니다만,  또  

알 수 없겠지요. 먼 먼 훗날 내 영혼이 개망초꽃으로 후미진 빈터에 잠시 수많은 곤충들과 조우하러  

올지도 모릅니다.  

  태풍이 몰아칩니다. 개망초꽃들이 들녘마다 한들한들 넌출넌출 곡예를 펼치다가 끝내 쓰러져 갈  

것을 어찌 합니까.  (2006 여름) 

 

 

9

설거지를 하며



  더위와 함께 장마전선이 들이닥쳤다. 사계절을 동시에 살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위안하지만, 이럴 땐 주위가 지저분하면 더 덥다. 이때쯤 되어야 비로소 모아두었던 겨울용품도 서둘러 정리하게 된다. 다른 일들은 얼마 동안이라도 모아둘 수 있지만 다음 식사준비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설거지이다. 오늘 따라 설거지를 하자니 그때 마음을 정리하고 오라고 말해주던 그 사람이 보고 싶다.


  그때 정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었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여름 어린이 낙원촌캠프에 가는 도중 수원에서 버스를 갈아탔었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난 후 나도 한숨 돌리고 짐을 정리하려는데 가방의 옆구리가 길게 칼로 찢겨져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다급하게 가방 속을 뒤지자 출발 전에 엄마들이 넣어준 참가비 돈 봉투가 손에 잡혔다. 내 지갑은 없어졌지만 얼마나 다행이던지 큰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휴! 안도의 숨을 내쉬고 가다가 생각하니 이제는 내 지갑이 아까웠다.


   현지에 도착하여 접수할 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진행자 한 사람이 수원 역에 가서 마음정리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되돌아 가보고 싶어 마음이 찜찜한 상태였다.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기분이 그랬다. 수원 역에 가보니 너무나 막연했다. 지금은 고속철도 운행으로 새 수원역사가 세계 수준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수원 역에는 날치기꾼이 많았다는데 흔히 현금만 꺼내고 지갑을 휴지통에 버린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분명 남자일 확률이 큰데 어찌 남자 화장실을 뒤져보겠는가. 나는 깨끗이 마음을 접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일을 떨쳐버리고 내가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마 다시 가보지 않았다면 쉽게 마음을 털지 못했을 것이다.


  요즈음 내가 나다니면서 정리되지 않고 하다 만 일들이 너무 많이 쌓여간다. 마음 설거지 감도 그렇게 쌓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몸과 균형이 맞지 않아 부조화를 낳아 즐겁지 않다. 다음 일을 하는 데도 터덕거려지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기본인 의식주 생활은 별 다를 것이 없지만 생각과 운용방식에 있어서는 생각의 차이만큼이나 각인각색이지 싶다. 형태와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때 그 상황에 깨어 있어 충분히 지금을 살려나가고 있는가 하는 게 삶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마음도 제때에 설거지해서 산뜻하고 가볍게 생활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것은 언제나 나만의 희망사항일까?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상념들이 있어 마음이 무겁고 오지 않은 내일 걱정 때문에 지금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삶이 더 고달프지 않을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항상 괴롭고 걱정이 많다면 그렇게 많은 이들이 소망하던 내일인 오늘이 송두리째 빠져있기 때문에 중심을 잃고 부유하는 삶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안전사고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현재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남의 허점을 노려보기만 하는 범법행위는 차치하고서라도 내 쪽을 먼저 본다면 아이들만 살펴보는 일에 쏠려있던 내가 보였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이 바깥출입이 잦아지면 살림살이는 때가 묻는다 했다. 살림살이를 매끈하게 하려면 매일 닦을 일이다. 하지만 여자들이 하는 일이 표시 나지 않게 많으니 그리 쉬운 일이던가. 더욱이 현대야말로 산업시대와 정보화시대를 넘어 정신문화시대에 와 있지 않은가. 현대는 아이를 기르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는 여성의 섬세한 뇌의 활동이 여러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시대임이 분명하다. 구식 남자들이 아내를 일컬어 말하는 '자기 집사람'이라 하는데 그러던 '자기 집사람'도 이제 더 이상 집만 지키고 있지는 않는다.


글을 쓰려하니 다시 국어공부를 해야겠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 공부할 것이 많아진다. 공부하는 게 취미가 되다보니 내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본래 취지보다 곁길로 빠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한다고, 사실 그럴 시간조차도 없지만, 내가 이제 무슨 사상가나 학자들처럼 이뤄내야 할 일이 있겠는가. 또한 젊을 때처럼 직업여성이 될 처지도 아닌 것을. 지금까지 무수한 현인들이 이루어 놓은 철학, 사상, 종교의 핵심이 무엇인가. 모두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실천의 문제가 더 시급할 것 같다. 나의 행복이 나만의 혹은 내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모두의 지혜와 마음을 모아서 노력할 일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위와 조화롭게 실천의 묘를 어떻게 살려야 할 것인가 그게 문제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조화되어 이웃과 자연의 질서에 따라 하나가 되는 통로를 잘 찾아가면 좋겠다. 나야말로 별다른 것을 바깥에서 크게 얻어 올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더 구해서 내 안에 집어넣을 것인가, 그게 또 치워야 할 쓰레기만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일을 보름 이상 마음에 갖고 있지 말며, 2년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더 이상 갖고 있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식사 후에 설거지하듯 늘 마음의 찌꺼기를 설거지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면서도 나는 틀림없이 날마다 또 일거리를 쌓아가며 살아갈 것이다.

(2004년 7월)

 













10

바퀴벌레

                                             

    바퀴벌레 한 마리가 냉장고 앞에 굴러와 비실댄다. 구석구석 마른 은행잎이 많으니까 벌써 반

주검이 된 것 같다. 그놈을 시험해 보려고 은행잎 바구니 속에 놓았다. 기어가지도 못하고 실 같은

더듬이와 발을 버둥댄다. 자기 딴엔 전력을 다해 발버둥치는 일일 텐데…. 그 날렵한 솜씨는 어디로

가고 정말 벌레만도 못한 꼴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작년 여름부터 우리 집에 나타나기 시작한 바퀴벌레가 나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다. 우선

보기에 징그럽고 지저분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오히려 바퀴가 더 나를 징그럽게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아니 징그럽다는 말로써는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천둥번개보다도 더 놀라고 두려워서 그렇게 쏜살같이

내빼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혼비백산할 일이러니.

    편견을 깨고 보면 곤충들은 인간의 삶에 유익한 도우미들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모든 문화가

바퀴벌레를 싫어하고 더럽게 취급하는 건 아니다. 동인도나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바퀴벌레를 찬미하기

위해 보석과 장신구를 만들었다. 하긴 우리의 고대 신라 사람들도 비단벌레로 허리띠에 무늬를 새기지

않았던가. 아프리카의 난디족은 바퀴벌레 모양의 토템을 세우고, 러시아나 프랑스의 몇몇 지방에서는

바퀴벌레를 수호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집에 바퀴벌레가 나타나는 것을 행운이라 믿는단다.

    또한 바퀴벌레는 실험용으로 자주 사용된다. 신경생물학자들은 바퀴벌레의 촉각이 예민하고

신경계통이   유난히 큰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신경세포의 기능을 연구하는 데 이상적인

실험 대상이라고 말한   다. 더욱이 바퀴벌레가 질병을 퍼트린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누명이라는

것이 대다수 과학자들의 주장. 브라   질에서는 바퀴에서 나온 성분으로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바퀴는 끈질긴 천식이나 알레르기 등 호흡기 질환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미 오래 전부터 치료에 사용돼 왔다고 한다.

   옛날에 들었던 어느 선사의 법문이 떠오른다. 주장자를 내리치면서 “똥자루나 피고름 주머니를

지니고 다니면서 00님이네 하고 목 뻣뻣이 세우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하시며 우리들을 호통

치셨던 것이다. 이   는 오늘 바퀴벌레가 죽어가며 내게 주는 법문이 아닌가.

    바퀴벌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깨끗한 몸체를 지녔다. 더러운 곳에서 먹이를 얻어 사는

바퀴가 어떻게 그렇게 정갈한 몸을 지니는 것일까. 마치 진흙 속의 연꽃 같은 곤충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정말 나야말로 쓰레기 만드는 일밖에 하지 못하면서, 나 중심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실수였다. 알고 보면 바퀴의 종류는 4천여 종이라고 한다. 그 중 몇 종류만 쓰레기나

하수구 등에 서식하기 때문에 더   럽다고 생각한다. 곤충학자에 의하면 바퀴벌레만큼 깨끗한

습성을 지닌 곤충도 드물단다. 고양이처럼 자신의   몸을 핧기도 하며, 특히 인간과 접촉한 후에는

더욱 격렬하게 핧는다고 한다. 그러하니 주장자를 들고 우리   들을 호통하시던 선사의 말씀이

맞는 말이다. 인간은 몸은 물론이고 그 마음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시커멓   게 먹어 놓았는가.

  인간에게 해로운 벌레는 없다고 한다. 다만 인간이 해충이니 익충이니 구분할 뿐이며 그 생태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이 우주의 에너지와 빛을 받아서 그 조건이 무르익어

탄생하기에 곤충이나 풀 한 포기도 누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하여 태어난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존재가 없으면 내 존재도 살아갈 조건이 무너진다는 것은 믿음 이전의 사실이다.

   사람들의 주거환경이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진 현대는 새로운 질병도 나날이 늘고 있다. 도시

아파트에는 새 집이라도 애집개미가 여기저기 파고들어 그들 삶의 터전을 만든다. 외국의 경우

흰개미군들이 집더미를 통째로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각종

집먼지진드기로 인한 천식이나 아토피와 비염 등의 질병이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곤충들은 제거하려고 하면 할수록 멸종 위기를 느끼는 그들은 더 많은 알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들을 절대로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다. 그들도 존재의 이유가 분명히 있으니까. 모든 생명체는

언제나 더 나은 환경을 찾기 마련인데, 집먼지진드기에게도 아파트는 최적의 환경이 된다. 그러니

그들의 서식처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일이나 최소한의 공존을 위한 마음과 지혜도 필요한 것 같다.

  바퀴벌레와의 전쟁을 뉘우치며 나와 그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같이 살 수 없으니

잡으려면 저주하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그들을 증오하는 일은 나를 증오하는 일이 될 테니까

나에게도 독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찮은 풀이나 벌레라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 지를 분명

알리라.

   곤충학자들은 바퀴벌레를 두고 살아 있는 고생대의 표본이라고 일컫는다. 일부 학자들의 말대로

공룡이 멸종했다는 빙하기 때도 곤충들은 멸종하지 않았다는 것. 곤충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한다. 세균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생명연대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빙하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빙하기 때부터 곤충들은 제일

먼저 몸을 줄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퀴벌레는 비좁은 틈으로 숨어들어 천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까지 터득했다.

  그렇다면 인간도 차츰 험난해지는 지구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연구하며 단련해야 할 것이다.

한쪽에서는 환경파괴를 일삼고 한쪽에서는 화성으로 이주할 꿈을 꾸고 있다. 우주선을 타려면

우주선의 환경에 맞는 훈련을 해야 하듯이, 이 우주의 한 공간에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주와의 관계 회복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집에 바퀴벌레가 나타난 것을 나도 행운으로 받아들여야겠다. 다른 생명체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관용과 애정을 가진다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일테니까. ((20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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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소나타



 

    어느새 햇살도 바람결도 보드라워졌습니다. 한결 높아진 하늘에 흰 구름이 한가로이 떠  갑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가없는 하늘에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땅거미가 기어오는 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옵니다. 저녁이 되면 벌써 등이 오싹해집니다.  

    가을은 풀벌레들의 소리에 실려 옵니다. 귀뚜라미랑 먼데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는 누구를 부르는지,  

서로를 알리는 소리가 분주합니다. 그냥 들길을 달려가면 차 창 밖으로 합주를 하듯 방울벌레 소리가  

쩌르렁 쩌렁 먼 창공을 가릅니다.  

 

   풀벌레들이 부르는 가을이 호수 가에서 익어가고 있습니다. 검은 호수, 연푸른 하늘 아래 그려진 산  

그림자 위를 몰래 기어오른 보름달이 높이 올라 사방을 비춥니다. 호수를 껴안고 나란히 누운 기다란 산이 

달빛에 감싸여 풀벌레들의 연가에 숨죽이고 있습니다. 너는 산이 되고 나는 강이 되어 바람결을 타고  

떠가면 좋겠습니다. 너와 나, 그리고 산과 강 모두 모두 달빛의 현이 되어……. 물오리 두 마리가 짝지어  

서로 중얼대며 지나가고, 멀리서 차르르 탬버린 소리를 내는 풀새가 반주를 합니다. 모양은 볼 수 없으나  

혼신을 다하여 날개 현을 떨고 있지 않을까요. 어느 가을밤에 들었던 마린바 연주를 듣는 듯합니다.  

풀벌레들이 울어 예는 소리들은 깊어 가는 초가을 밤의 적막을 감미롭게도 합니다. 바람이 물결을 희롱하면  

달빛이 떨어진 호수 면은 반짝반짝 춤을 추고, 풀벌레 소리들이 호수 면으로 모여들다 흩어지는 사이로  

고요한 가을밤이 소나타로 흐릅니다. 달그림자를 에워싸는 흰 구름도 갈 길을 잃고 서성입니다.  

 

 

   이런 밤이면 생각나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백(李百)이 달을 초대하는 그림’, 중국역사박물관 책에서 본  

사진이지만 참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달밤이 연상되었습니다. 이태백이면 누구나 그의 시를 읽지 않아도  

‘ 달’을 연상합니다. 그는 젊었을 때 유가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생활의 정취와 재능이  

다양하였다지요. 그러나 그가 검술까지 익혔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그림에 표현된 그의  

모습은 당당하고 날씬하여 멋져보였습니다. 매화꽃 그늘 옆 괴석 앞에서 둥근 달을 향하여 오른  

손으로 하얀 술잔을 높이 든 자태는 시인이라기보다 장군의 기백이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꽃  

사이 놓인 한 병의 술을/ 친한 이 없이 혼자 마시네 / 잔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구나 / 달은 전부터 술 마실 줄 모르고 / 그림자는 부질없이 흉내만 내는구나 / 내가 노래하면  

달도 서성이고, /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어지러이 춤추네, / 깨어 있을 땐 함께 기쁨을 나누지만, 취한  

뒤엔 각자 헤어지네 / 영원히 맺은 고상한 우정 / 저 아득한 은하수에 기약하네.”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그는 노래했습니다. 도시의 불빛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홀로  

차를 마시며 때때로 그 그림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림 속의 그는 봄밤을 노래했지만 이런 달빛  

흐르는 가을 강가에서도 수없이 그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을 겁니다. 유배에서 사면을 받은 후의  

영락(零落)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말입니다. 차 두어 잔이라도 옆에 놓고 달과 시선(詩仙)이었던  

이백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강가의 숲에 자리 잡은 풀벌레들은 단 한 번의 짧은 생을 위하여 남음 없는 사랑을 하겠지요. 한 세월  

흘러버린 후에야 풀잎에 맺힌 이슬 같다는 인생이 절실해집니다. 한 번의 인생이 그리도 짧은 것을,  

놓치고 지나온 소중한 것들은 그런 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쓸데없이 감정을 소모했던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허전한 마음 한 구석을 비수 같은 하얀 빛살이 후비고 지납니다.   

  이 밤, 미경(美景) 속의 묵묵하기만 한 자연은 무슨 말을 건네는 걸까요. 영원 무구(無垢)로부터  

생성해서 영원무궁(無窮)으로 되돌아가는 어느 여정의 어귀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요. 구름에  

달은 가고 아득한 그리움만 쌓이겠지요.  

( (2006년 9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