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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
-색채의 마술사-
“나의 친구 샤갈처럼 나도 미친 그림들을 그릴 수 있다면……” 샤갈의 시인 친구 블레즈 산드라드의 시(詩) 중에 있는 말이다. ‘색채의 마술사 샤갈’ 이란 표어를 실증이나 하는 듯, 30여 년 전의 유화들에서도 금방 그려진 것 같은 색감이 살아 튀길 것 같다.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흔히 일컬어진다면, 샤갈은 단연 캔버스의 시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샤갈은 전통적인 미술 법을 관통하면서도 어떤 화풍, 어떤 사조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그만의 독특한 색감과 비구상화법을 구현했다. 글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생각과 이미지들을 화가들은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구나! 그렇게 그림을 그릴 수는 없더라도 글로써도 그런 색채나 느낌이 들어 있는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그의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의 관념은 완전히 깨진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며, 언제나 샤갈의 사람들과 동물, 사물들은 하늘 위에 떠 있다. 동물들이 날고 사람이 동물을 타고 하늘을 난다. 어쩌면 우리가 지구 위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생각되기도 하다. 그래도 아무도 틀렸다고, 어지럽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아름다운 그의 색채를 따라 꿈꾸게 된다.
그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 단순한 색깔들을 구사해서 현란하고 아름다운 그의 꿈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원색으로 펼쳐 보이는 조화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포인트가 아닐까. 그의 순수하고 투명한 인간애가 관객들에게 기쁨과 꿈을 안겨주며 세계적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감동을 자아내게 한 소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살아 당시에 고갱, 고호, 마티스, 피카소 등과 함께 인기와 인지도가 높은 화가였다.
‘도시 위에서’ 앞에 선다. 30여 년 전에 만났던 샤갈을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그가 30세 무렵에 그린 것, 초기 작품 중 걸작인 그림이다. 비슷한 나이 때 그의 그림 ‘탄생’을 보았을 때 나의 내면의 색조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늘에 뜬 연인들의 꿈이 부각되었을 뿐, 땅 위의 세상의 고뇌를 보지 못하였었다.
그 옆에 나란히 대조적으로 서 있는 그림. 50년 후에 그린 연인들의 모습. ‘생 폴 위의 부부’에는 ‘도시 위의 연인’들이 그들의 인생의 꽃피움과 사랑의 메시지까지 담아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붉은 색은 땅과 형제애를 나타내며 화폭의 반절 정도를 차지하는 비중의 꽃다발은 삶의 절정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듯 했고, 붉은 색의 도시 위에 붉은 색깔의 발로 푸른색의 하늘에 떠 있는 듯 서로 껴안고 굳건히 서 있는 부부. 그들의 뒤에 말머리도 그려져 모두가 가족이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는 것이리라.
가난한 유년기 시절과 러시아 혁명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고향 비테프스키. 화가의 길로 성공하게 된 계기가 된 파리 시절. 그리고 미국으로의 망명시절을 보낸 후 다시 프랑스의 생 폴 드 방스에 정착하여 노년을 아름답게 보낸 시절. 이 세 도시는 그의 작품에 부호처럼 언제나 등장한다. 우울한 유년기와 어두운 혁명기의 러시아는‘비테프스키’를 추억하는 이미지로 생 폴은 행복하고 하려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 세기를 살았던, 화가로써는 80여 년, 120여 편의 작품들이 주제별로 전시되어 한 편의 대 서사시를 읽는 듯했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깔이다.”라고 샤갈이 말했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연인 시리즈에는 원색으로 연인들의 모습, 가족들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초록색 동물과 초록색 얼굴도 같이 등장한다. 초록과 노랑은 유태계인 그에게 유태민족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로 언제나 작품 속에 깔려 있다. 그는 또 서커스의 곡예사들도 많이 그렸다. 예술가들은 곡예사들과 같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전 작품을 통하여, 전 생애를 통하여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사랑의 색채였다.
그 의 그림 한 장 한 장에는 언제나 자화상의 상징으로 꽃과 동물이 들어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메시지가 있음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어떤 것은 한 편의 시이고 어떤 것은 아름다운 수필 같기도 하다. 전 작품이 한 권의 시집이었고, 한 권의 수필집이었다. 그가 그린 성서 이야기처럼, 또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처럼 그의 삶도 하나의 대 서사시 같았다.
사랑하던 벨라를 잃고 65세의 재혼은 그에게 새로운 활력이 되어 만년의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0여 년 동안 발표된 작품에는 지중해의 강렬한 색채가 나타나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석판화 시리즈에 나타난 색채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평화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어도, 그런 색깔의 좋은 글은 쓸 수 없더라도 내 인생의 나머지도 그런 색깔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샤갈은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 유대인 학살과 2차 대전 그리고 유대인의 조국인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에 따른 격변의 상황 등 동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체험한 시대의 증인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경험하고 느낀 한 세기 동안의 인간사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시대 정신을 마치 자신의 그림일기를 써 내려가듯이 차곡차곡 그려냄으로써 화가로서의 사명을 다한 20세기의 드문 그래서 더욱 독보적인 화가로써 여겨지고 있다.” (2004년 10월 )
2008년 <행촌수필> 13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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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얼마나 아시나요(1)
현대는 정보시대이며 자기를 선전하는 시대라지요. 그런데 저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밀려들고 나가는 파도에 저희의 간절한 소망을 실어 보내기만 합니다.
먼저 저희 집을 소개하겠습니다. 저희 집 주소는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입니다. 대한민국의 동쪽 끝 마지막 영토입니다. 마치 바둑판의 화점처럼 동해의 한가운데에 외로이 떠 있습니다.
저희 이름은 옛날에는 우산도(于山島),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습니다. 저희 집은 면적이 56,000여 평으로, 정말 작다고 할 수 있지만, 해저에 넓게 차지한 영토의 일각이므로 결코 작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생긴 지는 약 270만 년 이전 화산분출로 해서 생겼다니, 저도 아련하기만 합니다. 두 개의 섬인 서도와 동도는 해저에는 서로 붙어 있습니다. 그 외 부속도서와 암초가 89여 개가 서로 의지하며 지냅니다. 각각의 암초들은 삼형제바위, 물개바위, 독립문바위, 촛대바위, 얼굴바위 등 제가끔 생김새에 따라 재미있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저희 주인은 대한민국 해양수산부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저희가 대한민국의 품에 있게 된 것은 저희를 지키려는 많은 숨은 수호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93년 조선 숙종 때 어부인 안용복이 에도막부에 항의하여 인증문서까지 받아낸 일은 유명합니다. 그 외에도 저희가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저희를 알리고 대한민국의 땅임을 주장하며 지켜주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오늘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외롭고 힘들게 거센 비바람과 싸워 왔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일본인들의 침략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일본이 저희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저희를 다시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일본 측 주장의 허구성을 증명하기에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각종 역사 기록이 일본보다 여실히 빠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우리의 역사에 등장하였는지를 소개하자면, 1500년 전부터입니다. 512년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신라에 포함시켰습니다.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服屬)하기 위하여 그는 배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싣고 우산국에 도착하여,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놓겠다고 위협하는 지혜를 썼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오는군요. 그 후로도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고지도인 팔도총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독도는 1946년 연합군최고사령부의 지령 제 677호로 우리 땅임을 국제적으로 공인 받게 됩니다. 그 후 1948년 제정헌법에 따라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에 이어 대한민국 땅이 된 저희, 독도는 현재 경상북도 경찰청 소속 경비대원들과 몇 명의 주민들이 생활하는 섬으로 동해에 우뚝 솟아 이제는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저희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국민들이 많아짐으로 나라 동쪽 끝 바다 가운데서 국토의 방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데 많은 힘을 받게 됩니다.
저희를 제대로 알릴 기회가 없었음을 늘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국립진주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저희들의 무대를 크게 마련해 주셔서 저희의 실체를 알리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특히 뾰족한 작은 두 섬으로만 알고 있는 저희의 뿌리가 해저에 그렇게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준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보람이었습니다. 저희의 식구들이자 친구들인 각종 새들과 야생화의 아름다운 모습들도 사진으로 만나보실 수 있었겠지요. 아마도 독도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어떻게 독도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도 이번 전시회를 보게 되어 간접으로나마 독도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을 줄 압니다. 그리고 정말 가서 만나고 싶은 심정이 되어 독도 사랑이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줄 압니다. 박물관에서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독도전시회를 열어서 일반인들과 어린이들에게 국토 수호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신 점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다 밑에서 산처럼 솟아 있는 독도해산(獨島海山)
1950년대이래 세계 각 국은 해양자원개발 전진기지로서, 국가 간 해양경계획정의 중요한 기준으로서 섬의 가치를 새롭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일본은 해저자원에 눈을 돌려 그 성과를 올리고 있는 시점이며 독도의 경제적 가치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독도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섬인지 한 번 더 짚어볼까 합니다.
독도는 지정학적 가치 뿐 아니라, 해양학적 가치와 해저 광물자원적 가치가 대단합니다. 세계는 육상 자원이 고갈되어 감에 따라 해양자원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독도가 먹여 살릴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독도근해는 북한한류계수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동한(冬寒)난류(暖流)가 서로 만나는 해역으로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천혜의 어장을 형성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겨울철에는 한류계수에 서식하는 연어, 송어 등의 어족이 저희를 찾으며, 여름철에는 난류계수가 성하여 우리 주변에는 오징어, 꽁치, 방어 등의 온대성 어족과 참다랭이, 개복치 등 아열대 어족이 많아집니다.
그 옛날부터 누군가 그리워질 때면 철새들이 찾아와서 저희의 외로움을 달래주곤 했습니다. 바로 그들이 황로, 흑비들기, 흰갈매기, 까마귀, 노랑발도요, 딱새 등이랍니다. 저희 섬에 짐승은 없습니다. 1973년 경비대에서 토끼를 방목하였으나, 지금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곤충은 많습니다. 잠자리, 집게벌레, 메뚜기, 매미, 딱정벌레, 파리, 나비 등 37종 가량 서식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바다제비, 슴새, 여러분들이 잘 아는 괭이갈매기, 황조롱이, 물수리 노랑지빠귀 등 22종의 조류가 서식합니다. 저희가 어찌 다 알겠습니까. 각계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있나 봅니다. 저희의 집은 경사가 급해서 토양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비는 내리는 대로 배수되어 수분이 늘 부족하기 때문에 자생하는 식물의 종류가 적습니다. 그러나 울릉도에서 씨앗이 날라 와 살게 된 50-60종의 풀과 나무가 있습니다. 독도에 사는 식물은 키가 작아서 강한 바닷바람에 잘 적응하며, 잎이 두텁고 잔털이 많아 가뭄과 추위에도 잘 견딘다고 하네요. 특히 야생화 사진 연구가이신 김정명씨께서는 독도 사랑이 지극하여 지난 15년여를 그 험한 기후를 극복해 가며 나무를 심고 독도 야생화를 찍어 본토에 알리고 강연회도 열었습니다. 땅채송화나 보랏빛 해국은 정말 예쁩니다.
독도는 바람의 섬입니다. 바람이 일면 파도가 높아지고 뱃길도 끊어진답니다. 괭이갈매기는 온몸으로 맞서 바람을 견딥니다. 5월이면 괭이갈매기의 천국입니다. 맑은 날 괭이갈매기들 노니는 바다에 떠오르는 아침놀의 장엄함이나 저녁놀이 물들일 때의 저희 집 풍경은 정말 자랑할 만한 아름다움입니다.
저희의 광물학적인 가치는 더욱 소중합니다. 20세기 들어 세계 각 국은 육상자원의 고갈로 필연적으로 바다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신 에너지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 함유층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미국, 일본, 독일 캐나다 등은 공동 체굴 실험을 하기도 하는 등 자원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석유, 천연가스층 위에는 일종의 뚜껑 역할을 하는 하이드레이트란 물질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과학원이 공개한 이 물질의 분포도를 보면 인도에서 대만, 동해를 지나 미국, 남미 서해안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벨트를 형성하고 있죠. 이 연결고리 중에 끊긴 곳이 독도 부근입니다. 일본도 민,관 합작기구를 만든 점으로 미뤄 우리도 빨리 조사에 착수해야 합니다. 하이드레이트는 그 자체적으로 훌륭한 광물자원이기도 하지만,석유가 매장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지시자원으로도 가치가 매우 높다고 경상대 화학과 백우현 교수님은 해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도에 대해 일본과의 과거사와 연계하는 다소 감정적이며 민족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관심을 따져보면 구체적으로 경제적인 이익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유도 그들 나름으로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독도근해에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저광물자원에 대한 경제적 가치 때문이라는 지적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고 합니다. 즉, 독도가 일본영토로 되었을 경우 거의 대부분의 해저광물자원 매장추정지역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해양수산부는 이어도와 백령도에 이어 오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총 371억의 국가예산을 투자하여 독도에도 해양과학기지를 구축할 계획에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인간생활과 밀접한 기상업무와 경제활동의 중요한 무대인 해양산업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함이며, 독도는 그 위치 상 기상예보, 해양예보, 어장예보, 지구환경연구, 해양 대기 상호작용 연구 등을 위한 국내 최 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독도는 바둑판의 화점과 같은 중요한 기점입니다. 그러나 화점에 튼튼한 집을 짓고 가꾸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집을 지을 기회를 빼앗기고 맙니다.
국토란 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땅임에, 틀림없는 우리 땅 독도는 온 국민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요. 올해는 광복이 환갑을 맞이한 해입니다. 정신적으로도 정말의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국토를 잘 알고 그 의미를 새로이 해야 할 것입니다. 자국의 영토를 지키며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 어찌 영토가 돌아오겠습니까. 지금의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철새들 따라 저희 집을 찾아오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2006년 8월)
('가고 싶은 우리 땅, 독도' 전시회 (2006년 7월 10일 - 8월 20일 국립전주박물관) 관람후기 공모전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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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가 그립다
-퇴계 선생님께-
퇴계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저보다 무려 540세나 연상의 어른이십니다. 그러니 제가 어떤 존칭을 써야합니까? 그냥 편하게 요새 말로 '선생'이라고 부르라고요?
선생님, 500년 전에 저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었을까요? 아녀자로서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의 후학들이 완성해 놓은 도산서원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그 옛날엔 안동에서 한양(서울)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셨나요? 말을 타고 가시기도 하고 걷기도 하셨을 테지요. 저희들은 선생님의 흔적을 느껴보려고 전주에서 안동까지 단 네 시간만에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산중 깊은 곳까지 도로가 발달하여 바퀴 네 개 달린 자동차라는 것들이 각양각색으로 사람을 싣고 나라 안 구석구석까지 다닐 수 있답니다. 다른 나라에 갈 때는 새처럼 날아다니는 비행기라는 것을 타고 가고요.
문명은 발달하여 생활이 편리해졌지만 선생님께서 이룩해 놓으신 학문과 사람의 도리를 알아 실천하는 이가 많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낙엽을 밟으며 도산서원 구석구석을 걷노라니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한없이 묻어왔습니다.
산 중턱 주차장에 내려서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안동호반을 끼고 있어서 산책하기 좋았습니다. 가파른 절벽의 산자락 숲 사이로 단풍이 아직도 곱게 타고 있었습니다. 서원 입구의 절벽 위에서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라는 표지판이 먼저 우리를 맞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즐겨 산책하시던 곳이라 했습니다. 햇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도는 곳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얼마나 자연에 어울린 생활을 하셨는지를 알만 하였습니다.어디 그곳뿐이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고향 산천을 너무나 사랑하셨지요. 낙동강 줄기가 청량산 자락을 휘감고 도는 풍광을 감상하며 읊었던 시조가 그리 많다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는 선생님의 뜻을 밝혀서 재조명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행하여졌습니다. 덕분에 저도 선생님의 학문의 자취를 조금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선생님의 '퇴계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답니다. 이렇게 선생님의 정신은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젊은 시절 저는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가지 워크샵에 참석해보았는데 선생님의 교육관과 어쩌면 그리도 흡사했던지 선생님의 교육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은 현대에도 아니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도 어른 되는 연습을 했습니다
손수 지어 후학을 가르치셨다는 서당 앞마당엔 잎을 다 떨군 노거수(老巨樹)가 풍상을 겪어온 500년 세월의 사연들을 품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49세 때에 풍기군수를 사임한 후 조그만 서당을 지어 후학을 시작하셨는데 이내 장소가 협소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지요? 세 칸 밖에 안 되는 작은 집 한 채였습니다. 요즈음의 보통 아파트의 거실만이나 할까 하는 집인데도, 재력이 모자라 4년이나 걸려 완성했다는 것으로도 선생님의 면모가 어떠하였는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비록 선생님께서 손수 마중을 나와 주시지는 않았지만 내딛는 걸음걸음마다에서 다정하셨을 것 같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귀가 기울여졌습니다. 서당을 찾아오는 아이, 노비, 누구라도 방 밖에 나가 맞이하고 전송하셨다는 것으로도 인애사상(仁愛思想)을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서당 앞 좁은 마당의 작은 연못, '정우당( 右塘)' 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너무도 고매하신 성품을 지니신 대학자로서 어찌 연꽃을 벗으로 가까이 두지 않았겠습니까. 멋과 풍류도 즐기시는 생활 속에 자연 풍광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마땅히 군자는 군자를 알아본다고 그 벗들을 가까이 하셨을 줄 압니다. 집 정원에는 항상 솔, 대나무, 매화. 국화 등을 심어벗삼아 즐기셨다지요? 그 벗들 또한 지조의 표상이었습니다. 매화 분을 마주하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시고, 매화와 선생님이 하나가 되어 가는 경지를 상상해봅니다.
서원으로 오르는 계단 옆으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모란이 줄지어 서서 오는 봄에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워 선생님께 흠모의 정을 띄울 약속이라도 하는 듯 야무지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퇴계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지금 하늘나라에서도 천하의 영재를 모아 가르치고 계시나요? 날씨가 차갑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길 빌겠습니다. (2004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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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과 활인심방 -
퇴계 선생님!
지난 번 띄운 편지는 하늘나라에까지 잘 도착했던가요? 도산서원을 돌아보며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을 단풍잎에 새겨 하늘나라에 보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하늘에서도 도산서원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도란거리는 말소리를 훤히 내려다보고 계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좀 더 도산서원 이야기를 해볼까요?
도산서원의 건물 중에는 선생님의 유물전시관도 있습니다. 옥진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현판의 뜻은 금성옥진의 줄임말이라고 했어요. ‘글 읽는 소리는 금소리와 같고 글을 떨치는 것은 구슬과 같다는 뜻으로 전시관에 어울리는 현판이었어요. 유물들이란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일용품인 문방사우와 실내 비품으로 하나같이 순박하고 검소하여 외면적인 꾸밈과 사치를 떠나 오직 청빈에 만족하신 도학자다운 일면과 선생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로 등극한 17세의 선조 임금에게 올린 그 유명한 ‘성학십도’를 그림처럼 감상했습니다. 선생님의 평생 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임금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지요? 그 방대한 내용을 알 길은 없으나 그 병풍 앞에 서니 선생님의 숨결이 저절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 그것 모르시죠? 요즈음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천 원 권 지폐에는 앞면에 선생님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박혀 있답니다. 그리고 한양(서울)에 가면 선생님의 호를 지닌 거리도 있답니다. 이름하여 ‘퇴계로’라고 하지요. 흡족하신가요? 그러나 퇴계로를 지나면서 선생님을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도산서원을 다녀온 후 천 원 권 지폐를 살펴보다가 유물전시관에서 의미 깊게 보았던 ‘투호’가 새겨져 있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그 투호야말로 운동과 놀이도 되었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삼으셨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투호놀이를 한 번 해봤는데 마음을 집중해야 되는 것이더군요.
선생님께서 그 많은 벼슬길에서 업무를 추진하시고 또 학문적 업적을 모두 남기시느라 힘드셨을 텐 데도 오래 사셨던 것은 ‘활인심방’ 건강법이 뒷받침되었을 줄 압니다. 후학들도 실천할 수 있게 정리해 놓으신 것에 감탄해마지 않습니다. 건강법의 핵심이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음은 현대에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늘 마음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로 중화탕(中和湯)의 제조법을 창안하셨지요. 정말 유머가 넘치는 솜씨여서 미소를 절로 머금게 하는군요. 그 중화탕이란 것은 신선하고 깨끗한 30가지 약재를 골고루 조제한 후 서서히 달여 수시로 따뜻하게 들면 된다고 했지요. 그렇게 하면 정신이 맑아져 의사가 못 고치는 만병의 근원인 마음을 잘 다스려 사기를 막아 원기를 회복하는 정신적인 약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해학적인 처방인지요. 그것 자체가 마음먹기 달린 것이라서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 거세게 불고 있는 웰빙 바람을 고요히 하는데도 이 처방이 절대적일 것 같군요. 현대와 같이 발달한 과학과 의학이 미치지 못하는 심신 조화적인 건강수련법이어서 쾌재를 부릅니다.
특히 건강법에 음악이 좋다는 말에도 탄복했습니다. 오늘날은 새로운 세계음악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니 어떤 때는 음악이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답니다. “음식물의 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비장은 음악을 좋아한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음악으로 식사를 한다고 했더군요.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소화에 좋다는 것은 현대에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 시절에도 4계절에 부르는 노래까지 일러주신 걸로 보아 얼마나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셨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활인심방’이야말로 우리의 웰빙법입니다.
제가 그 시대 남자로 태어났으면 틀림없이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한 평생 가까이에서 학문을 닦으며 살았을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명종 임금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여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 이란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으며, 신하를 도산에 보내어 도산도를 그려오라고 했겠습니까.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선생님의 인격과 학문임을 찬탄만 할 뿐입니다.
선생님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언행록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고 합니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이요, 무명보다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속은 밝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고 서술했습니다.
선생님의 교육관에 대해서 다산 정약용도 이렇게 평했습니다.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도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 중도에 패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라고 했습니다.
유난히 붉은 단풍나무가 옷자락을 잡는 듯하여 쉬이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늦가을에 익을 대로 익어 처연히 타고 있는 담장 밖의 단풍나무 가까이로 발걸음이 옮겨지더이다. 떨어져 수북이 쌓여진 낙엽을 밟는 소리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가을에 부르면 좋을 소리처럼 가슴에 맑은 바람을 일게 했습니다.
겨울 동안 깊은 명상 속에 잠겨 있을 나무들의 소리에 저도 마음을 맞추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늘 사랑하시던 청량산 자락처럼 하늘나라에서도 저희들을 지켜봐 주세요. 저는 선생님의 그 중화탕 제조법을 연구하며 이 겨울을 보낼까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4년 늦가을)
6
죽엽군(竹葉軍)
몇 천 년 동안 사라져 간 옛 선조들의 한이 응축되어 있던 땅이던가. 천안 부근 지역은 고구려, 신라, 백제가 치열하게 땅뺏기 싸움을 벌였던 곳이고, 왕건과 견훤도 최후의 접전을 벌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예부터 이 고장은 평화롭고 인심도 좋아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났던 땅이었다. 또한 백제가 망하고도 그 부흥을 노린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당 연합군과 십여 년이나 겨루며 버틴 곳이 바로 천안지역과 연기 땅이었다니…….
이런 연유로 나라 안에서는“이곳이 편안해야 천하가 태평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됐고, 그래서 고을 이름도 천안이 됐다는 설이 있다. 정부의 신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두고 찬반 의견대립으로 한동안 술렁대기도 했다. 각 입장의 주장을 판단할 바는 아니로되, 옛 말대로라면 정부의 계획대로 나라의 균형발전을 걸어볼 수도 있는 대역사(大役事)의 과정이 잘 진행되어야만 나라가 태평하게 되어 천안의 이름이 길이길이 이름 값을 하게될 것이 아닐지.
문득 신라의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어서도 신라를 수호한 미추왕과 김유신장군의 설화가 민간에 퍼지게 된 이야기다. 어머니 박씨가 별빛을 받아 마시고 수태한 14대 유리왕 박씨는 별빛이 건드리고 들어간 입술이 터서 아무 음식도 삼킬 수 없게 되었고, 유리왕을 해산하던 밤에도 별들이 영롱하게 빛났으며, 집안 가득 이상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왕의 재위 때는 별처럼 맑고 향기로운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가까운 나라가 신라를 쳐들어왔다. 신라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이어서 금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위기의 순간에 수를 셀 수 없는 이상한 군대가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되풀이하며 신라를 도와 적군을 물리쳤다. 형형한 눈빛을 한 그들은 신라군과 별로 다를 바는 없었지만 특이하게도 양 귓등에 댓잎을 꽂고 전투를 치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엽군이라 불렀다.오래 전에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 귓등에 댓잎을 꽂고 생시와 똑 같이 싸우더라고 노인들이 말했다. 죽은 선조들이 군사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신라를 돕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죽엽군이 하늘로 사라진 걸로 알았는데, 어느 날 한 농부가 우연히 미추왕능 근방을 지나다가 그곳 대나무의 잎이 색깔도 바래지 않은 채 무슨 병기들처럼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죽엽군들이 미추왕능에서 나왔다가 다시 저 능으로들어갔군.” 하였다. 그제야 미추왕이 망자들로 구성된 음병(陰兵))으로써 신라를 수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신 행정수도 천도지가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 연기 지역으로 확정된 것은 태조산에 얽혀 있는 왕조의 설화와 어떤 역사적 맥락이 이어져온 것이리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입증할 사료가 없어 안타까울 뿐, 온조가 첫 도읍지로 정했다는 설이 있는 직산현과 목천읍을 지나 연기 땅으로 지나가자니 이 땅 밑이 모두 옛 백제인들의 무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백제 시절에는 이 곳이 목씨 성과 연씨 성을 가진 백성들이 많아서 땅 이름이 목천과 연기라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 성씨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기에 성을 바꾸어야 하는 처절한 입장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자연히 성씨는 없어지고 땅 이름만 남아 옛 사람들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통일 신라의 하대(下代))시절에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죽은 김유신 장군도 신라의 호국신이 되어 미추왕의 무덤으로 들어가 신라를 구할 논의를 하였단다. 평화스러운 연기의 땅을 밟으면서 그 들녘 곳곳 어디선가 옛 백제인들의 억울한 혼령들이 죽엽군처럼 들고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백제의 음병들이라면 귓등에 솔잎을 꽂고 나타나지 않을까? 논산 벌 어느 곳의 견훤의 무덤을 지켜볼 일이다. 혹여 계백장군도 백제의 호국신이 되어 견훤의 무덤으로 들어가 백제의 한을 풀 길을 논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지금쯤이면 차원을 달리하여 모두가 화해하고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동서 지역갈등도 없고, 반도의 허리가 잘려 섬처럼 살아온 민족의 한을 풀 수 있도록 기원하고 있지 싶다.
신라의 후예이던 내가 백제 땅으로 시집와서 살아온 지 30여 년이 지나니, 이제는 이 땅이 내 살처럼 느껴져 백제의 비통한 망국의 한이 내 가슴에 밀물져온다. 역사 속에서 서로 적군이었던 선조들이여! 본래 단군의 한 자손들이었으니 이제는 본래로 돌아가 한민족의 뜻을 이루도록 기원해주소서. (2004년 8월)
7
태조산
태조산은 성거산, 흑성산과 더불어 모두 형제봉으로 천안 벌 동녘을 에워싸고 솟아있다. 백제 시조 온조와 고려와 조선조 태조와의 관련설화가 얽혀있는 영산들이란다. 백제의 부흥군과 맞서 싸우던 왕건이 산정 위에 오색 찬란한 구름이 신비롭게 피어오르자 그곳에 신선이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고 제사를 지낸 뒤부터 성거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했다. 왕건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백제 부흥군을 제압했던 감격의 현장에 신선이 되어 돌아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서의 수행으로 기를 얻고 조선을 개국했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옛 성상(聖上)들이 머물고 수행했던 신성한 곳이라 해서 성거산이란다. 성거산 아래쪽에 천안의 진산 태조산이 솟아있다.
천안의 진산 태조산을 찾은 것은 7월이 무르익어 갈 때였다. 마침 신 행정수도의 예정지 후보 중 일 위의 지역으로 떠오른 지역이라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태조산은 높지는 않았지만 첩첩 골이 깊었다. 울창한 숲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흐르는 땀을 식혀주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왕건이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삼았다는 태조산. 천안시를 동쪽으로 감싸는 듯하여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산길에는 우리민족의 강인한 기상을 상징하는 듯 노송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성불사의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를 연상하며 태조산의 북서쪽 기슭 가파른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성불사에 올랐다. 고려 태조 때의 절이라는 설과 조선조 태조 때의 절이란 설이 양존하고 있다고도 한다. 성불사는 하늘에서 한 쌍의 백학이 내려와 부리로 바윗돌에 불상을 쪼아 새기다가 어인 연유에서인지 중도에 날아가 버려 미완성 석불로 남아 있게 된 절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성불사(成不寺)라 부르다가 지금은 성불(成佛)사라 고쳐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 입구에 일주문을 대신하는 듯한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엄청나게 큰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벼랑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대웅전에 들어서니 불상은 없고 대신 뒷면 벽에 낸 창으로 백학이 쪼아놓은 미완성 석불상이 보였다.
태조산에는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지가 있다는데 그 흔적을 알 수 없단다. 위례성의 혼령이라도 되살아난 것일까. 웅장하기 그지없는 거찰 각원사(覺願寺)가 들어서 태조산의 정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듯했다. 이 사찰은 단연 내가 본 사찰 중에서는 가람의 규모가 제일 큰 것 같았다. 대웅전과 여러 전각들의 크기도 그랬고, 대웅전 안에 조성된 다양한 모습의 관세음 보살상을 모신 것도 특이했다. 또한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청동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보기 좋은 소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는 청동대불은 60톤의 청동을 녹여 만든 불상으로 높이가 14.5미터 둘레가 30.3미터이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남북통일기원청동대불’은 태조님들의 설화에 힘입은 조계종 여신도회인 ‘관음회’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런 기원들이 모이고 쌓여져 통일의 물꼬는 점점 넓혀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조산 골짜기에 천안의 새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각원사가 세워진 것은 의미 깊은 일인 것 같았다.
(2004년 8월)
8
수릿날
일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가 지났다. 음력 오월이 되면 태양의 열기가 뜨거움을 더해 간다. 하지가 되어 모심기가 다 끝나니 신록은 더욱 짙어지고 빈 들녘이 꽉 차고 생동감으로 넘친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하지가 되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이장이 제관이 되어 용소(龍沼)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올해는 태풍의 영향으로 비는 많이 내려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동시에 집중호우로 농가의 피해도 컸다.
어느 날 머릿결을 쓰다듬다 머리숱이 한줌밖에 안 되는 것 같아서 그 때서야 늙었구나 하고 가슴 한 구석이 휑한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 많아지는 것보다 머리숱이 적어진 것이 더 아쉽다. 세월 탓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만들어 온 공해와 세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별로 형(形)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내 영혼을 정갈히 하고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차림과 건강이면 좋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도 머리 샴푸만은 신경이 쓰인다.
전주국립박물관에서는 해마다 단오절 행사를 한다. 오시(午時)에 창포물에 머리 감기, 씨름대회, 단오부채 만들기 등이었다. 연 사흘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도 난생 처음으로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보았다. 물기가 마른 후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도 화장품을 바른 것 이상으로 매끈하고 탄력이 있었다. 정말 신기로울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도, 마지막 날도 머리를 감으러 갔고 올 때는 창포 삶은 물을 얻어오기도 했다.
우리에게 ‘오’자의 의미는 깊은 것 같다. 집안에 불행이 들어오는 다섯 통로가 있다는데 그 통로에 다섯 종류의 나무를 심으면 그 액을 막는다는 옛 말도 있다. 또 손님을 맞이할 때는 오리 앞까지 마중 나가서 맞이하기 위하여 오리정(五里亭)을 지었다고도 했다. 그 ‘오’가 두 번 겹치는 음력 5월 5일 단오. 단오니 단양이니 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붙인 이름이지만 우리말로 수릿날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전국시대 초나라에는 굴원이란 시인이 있었다. 그는 정치가와 사상가였으나 애국시인으로도 유명하였다. 주周난왕 16년(BC 299년) 굴원은 방축(放逐)당하였다. 그는 초나라가 망하는 것을 한탄하여 벽라강에 큰 바위를 안고 투신자살하였다. 후에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여 쫑즈라는 찹쌀떡을 만들어 그 강에 던져 물고기가 굴원의 시신을 해치지 말도록 기원했다. 그가 죽은 날이 5월 5일이었으므로, 매년 5월 5일에 옛 초나라 지역의 백성들은 모두 쫑즈를 만들고 용주(龍舟)경기를 하여 그를 기념하는 의식을 하였다. 이렇게 애국 시인인 굴원에서 중국의 단오절이 비롯되었다. 쫑즈란 찹쌀에 대추나, 호두, 돼지고기, 팥 등의 소를 넣어 댓잎이나 갈잎에 싸서 쪄먹는 단오 날 음식의 한 가지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의 5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수리’란 명칭이 붙었다고 하며, 전통적으로 수리치로 떡을 해먹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단오절이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고려시대의 9대 명절이었고 조신시대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였다.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端午扇)’이라고 하였다. 선비들 사이에는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시아버님께서도 살아 계실 때 친정아버지께 단오선을 선물하신 적이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단오의 세시풍속은 더운 여름철의 건강을 유지하는 지혜와 신체단련을 위한 놀이,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습속, 풍년농사를 바라는 의례가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지역주민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의례로서‘단오제’와 단오 굿‘을 들 수 있는데, 요즈음에 와서 이런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지역주민의 축제형식을 띠고 있다.
젊었을 적에는 덕진 연못 가까운 곳에 살았다. 단오절 무렵이면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계곡의 다리 밑에서 부녀자들이 머리를 감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따라 해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덕진 연못에는 초여름이 되면 노란 창포 꽃이 호수의 운치를 더하여 산책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그러나 옛날 다리 밑의 풍정은 사라진지 오래다. 초여름이 되어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푸른 들녘에서 샛노란 창포 꽃을 자주 본다. 늪지에 어김없이 피는 창포 꽃이다. 창포가 물을 정화하는 성분이 있기에 물가에 많이 조성하고 저수지와 천변에 많이 심는 것 같다.
단오절을 생각하면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단오풍정’과 ‘빨래터’가 떠오른다. 한복을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을 치솟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계곡에서는 가슴만 여민 채 저고리를 벗고 삼단 같은 트레머리를 감는 모습은 훌륭한 모델이었다.
옛날 미인들의 조건에는 칠흙 같은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유지하는 것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부인들이라면 삼단 같은 머릿결이 언제나 반듯하게 쪽 지은 모습이었다. 현대에도 여인들에게 머릿결은 중요하다. 머리모습은 이미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정도여서 자꾸만 머리에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그 삼단 같은 미인의 머리가 요즈음에 와서는 변색해도 너무나 많이 변색해버렸다. 여자들 뿐 아니라 청년들까지 염색으로 다양한 칼라와 모양을 연출한다. 칠흙 같은 머리도 보이지 않지만 혹여 있다 해도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첨단 화장술 뿐 아니라 얼굴 모양도 마음대로 성형하는 오늘의 세태에 옛 부녀자들이 했던‘단오장(端午裝)'은 박물관의 행위 유물의 하나 일 뿐일까.
수리란 고(高), 상(上), 신(神)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古語)라고도 한다. 최고의 날, 수릿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 화장하고, 이 땅의 첫 과일인 앵두를 따먹고, 햇감자를 직접 캐어 먹을 수 있는 아직 순수한 은혜를 입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2004년 수릿날에)
9
삼족오(三足烏) 옥새
“사라진 삼족오가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몽이 생사불명이 되자 부여의 신녀는 말했다. 삼족오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우리에게 삼족오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고구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오랫동안 고구려의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던 우리에게 갑자기 한꺼번에 고구려가 몰려오고 있다. 지상파 방송 세 채널에서 삼족오 깃발이 날고 있다. ‘주몽’과 ‘연개소문’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시작을 알리는‘대조영’이다. 전사들은 의례 삼족오 마크가 새겨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을 든 행렬을 이루기도 한다. 드디어 주몽의 상징인 삼족오는 부여의 태양에서 비상하여 새 나라를 세울 것이니, 그 나라가 고구려이다.
전설의 삼족오는 고구려의 역사 속에 살아 있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는 그 삼족오를 나는 고구려 벽화 전시회에서 놓치고 눈여겨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번 ‘북녘의 국보 유물’ 전시회에서 그 삼족오를 조각한 금동 제품을 보고 감개무량했다.
내가 처음 삼족오의 형상에 접한 것은 지난 2006년 4월에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렸던 ‘우리나라 옥새’ 전람회에서였다. 민홍규씨는 그가 옥새전각자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그의 생을 들려주었다. 그는 옥새전각자가 되기 위하여 서예를 비롯하여 회화와 예술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였다. 40여 년 동안 스승에게서 받은쓰라린 질책을 감내하며 전각 수업을 했다.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날 그는 밀납에 나뭇잎 하나를 그려 오라는 스승의 주문을 받았다. 정성을 다하여 밀납에 나뭇잎을 그렸다. 그러나 스승은 단호하게 호통을 치시면서‘이 잎이 살았는가 죽었는가!’하셨다. 그는 고심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나뭇잎을 그릴 것인가. 드디어 그는 어느 가을날 오그라져 떨어진 단풍잎을 보고 무릎을 쳤다. 밀납에 오그라진 단풍잎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생동감 있는 나뭇잎이 되었다.
화분에 물을 주어 봤는가. 나뭇잎은 살려면 오그라든다는 것. 얼마나 절묘한 이치인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옥새를 찬찬히 살피고 또 살폈다. 선명하게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민홍규씨에게 직접 물어 보았다. "선생님 어떻게 저 옥새의 손잡이인 동물들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할 수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그는 한 마디만 말씀하였다. '삼족오 옥새'를 잘 관찰해 보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날부터 전시회가 끝나는 날까지 박물관에 갈 때마다 나는 삼족오를 빙빙 돌며 관찰하였다. 단호한 눈빛으로 날카로운 부리를 무섭게 벌리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삼족오가 금방이라도 날갯짓을 할 것 같았다. 삼족오는 왼편에서 보는 것과 오른 편에서 보는 표정이 달랐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도 삼족오가 새겨졌다. “옥새(玉璽)는 왕조시대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궁중예술의 꽃입니다.” “조그마한 인면(印面)안에 하늘의 이치와 절대자의 기운을 담아 왕조의 안녕과 종묘사직의 융성을 기원했던 옥새는‘방촌(方寸)의 미(美)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국내 유일의 옥새전각장은 말했다. 옥새전에서 단연 내 눈을 자극한 것은 전통적인 옥새들이 아니라 2006년 제작한 '삼족오' 국새였다. 민홍규씨는 대한민국이 옛날의 동이족의 후예들인 고구려인의 기상을, 아니 천손 민족의 자존을 되찾아야 한다는 기원을 삼족오 국새에 새긴 것이다.
삼족오는 천손민족인 동이족의 상징이라고 민홍규씨는 말했다. 우리 민족은 하늘로부터 시작된 천손 민족이다. 천신을 숭배해온 한민족은 하늘을 상징할 수 있는 태양을 그 대상으로 했다. 고대인은 태양의 흑점 중앙의 그림자를‘세 발 달린 검은 새’라고 믿었다. 태양 속에 살고 있는‘세 발 달린 검은 새’는 현조(玄鳥), 혹은 일두삼족오(一頭三足烏)라 불렸는데 이는 태양조(太陽鳥)의 명칭이다. 태양조가 ‘세 발 달린 까마귀’로 잘못 알려진 것은 ‘오(烏)’를 까마귀로 해석한데서 생긴 오류라고 했다. 결국 삼족오는 우리나라의 상징인 셈이다.
중국의 학자 임어당은 한자는 동이족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한자를 연구하는 학자는 그렇게 알고 있다. 중국의 학자 서량지는 한글 학자 한갑수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제가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 달라”며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속전속결하지 않으면 부여에게 불리할 것이므로 대책을 궁리하는 주몽. 옛 다물군이 한나라를 쳐부술 때 썼던 비책을 알아냈다. 소문나지 않게 소탄을 만들었다. 소탄을 매단 수많은 연이 캄캄한 밤하늘을 수놓았다. 폭풍 전야의 고요한 하늘의 연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바람이 연들을 잘 날게 하여 한나라 진영에 소탄이 떨어지니 불이 붙은 한나라 진영은 혼비백산했다. 그처럼 우리도 이제 모두의 가슴에 삼족오를 새기고 삼족오 연을 만들어 중국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아 보면 어떨까. 그리하여 삼족오가 잃어버린 우리의 고대사를 찾고 중국도 올바른 역사관을 회복하였으면 좋겠다.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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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순례 긴 여운
-대영박물관 한국전- (1)
농담이 아니다. "대영박물관에는 진짜 영국제는 수위밖에 없다." 라는 말은 진짜일까? 사실 대영박물관은 그야말로 제국주의 시대의 전리품들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물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말 그대로 각 국에서 무력으로 훔쳐온 유물들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파렴치한 범죄 행위지만 따지고 보면 선진의식이 있었기에 소멸 위기에 처한 보물들을 안전하게 보전시켜온 눈부신 공로가 있기도 한 것이다. 1759년 설립된 이래로 대영박물관은 국제적인 학술의 중심으로서 지식을 전파하고 인류 문화사를 보존 및 연구하며 전시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런 대영박물관이 대대적인 나들이를 했다. 지난 2005년 4월부터 7월 11일 막을 내린 서울전에 이어서 부산으로 옮겨 10월까지 전시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대영박물관 해외 전시 사상 최대 규모라고 한다. 아시아 국가 중 일본 다음의 두 번째 전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국 내 전시 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는 명품 전시를 할 수 있었다고들 입을 모은다.
명품에 어울리는 전시 공간 연출의 기획 솜씨가 대단했다. 전시의 핵심인 유물은 물론이거니와, 유물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해줄 조명, 유물박스, 채색과 동선 연출까지 영국 본관의 느낌에 가깝도록 하기 위해 현지 스텝들과 긴밀히 협의 하에 전시공간을 연출했다고 한다. 전시장 귀퉁이마다 공기청정기가 배치되어서 사실 한나절 내내 전시장을 돌아다녀도 산뜻했다. 전시 기간 중 매일 3, 4천 명의 관람객이 있었고, 주말은 7천 여명의 입장객이 있었다니 우리의 문화 수준도 많이 향상되었다. 관람객은 어머니의 손을 잡은 아이로부터 학생, 어른,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여러 층이었다. 전시품의 주제를 말한다면 한마디로 인간 자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실을 메운 관람객의 관람 태도도 수준 급이었다. 특히 인기 전시품 주위에는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어 서로 양보하고 기다리기도 했다. 전시품의 보험계약액이 1500억 원이라는데 과연 입장료 등으로 대여료며 전시 관계에 필요했던 비용이 충당이 되는지 내 머리로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대영박물관은 영국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들르는 코스 중의 첫 번째라고 한다. 현지에 체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관광객으로 94개나 되는 전시장을 어찌 다 둘러 볼 수 있겠는가. 영국까지 가지 않고도 내 나라 안에서 그들을 맞이할 수 있는 나라 안 수준이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기간 중에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폐막을 앞두고야 갈 수 있었다. 오전 11시에 개장이니 일찍 와서 천천히 보라는 안내를 받고 갔는데, 좀 늦었더니 이미 사람들이 긴 줄을 서고 있어 마당이 꽉 찬 상태였다. 구르는 의자도 빌리고 작품 설명을 잘 해 줄 mp3도 빌려서 들어갔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를 포함해, 인류가 일군 문명의 역사를 총망라한 대영박물관의 700만점의 유물 가운데 350점의 대표적인 귀중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장 입구부터 고대로 되돌아가는 여행은 시작되었다. 인류의 문명사에 흔적을 남긴 많은 사람들의 영혼들과의 눈맞춤으로 어떤 영감을 받을 지는 사람 모습만큼이나 그 모양과 빛깔이 다채로웠으리라. 긴긴 역사의 흐름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의 형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꺼번에 세계인의 조문이라도 받고 있는 겐지……. 고대사회의 지배계층의 유물과 현대까지 인류의 정신을 지배하게된 성인들의 유물 전시장이니, 일면은 성지순례의 행렬 같기도 했다.
인류문명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순례는 흥미진진했다. 대영박물관의 전 소장품에 비하면 광대하다고까지 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관람객이 들려 역사를 체험하기에는 충분한 분량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대영박물관의 단골처럼 나도 매일 부분적으로 따로 다시 음미하고 싶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시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은 어둠이 꽉 덮인 가운데 방향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만감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로 나와서 버스를 탔다. 지금 막 런던의 박물관에서 나온 듯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라디오의 뉴스에서는 런던 한복판의 거리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의 한 곳이 전쟁의 화염에 뒤덮여 지금도 선진의식의 발밑에서 짓밟혀야 하는 운명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테러범이 그 지역의 출신인 영국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뿌리깊은 민족의식이 살아 있는 한 테러의 위험은 그칠 날이 없을 지도 모른다. 전 세계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영국 박물관과 테러가 직접적인 관련이야 없겠지만 그 뿌리를 살펴본다면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전쟁으로서는 이 지구의 영원한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테러와의 전쟁을 다짐하는 선진의식의 각성은 미미한 편이다. 런던의 이층 버스도 아닌데 괜스레 주위가 둘러봐지기도 했다.
최근의 세계 추세는 해외로 밀반출된 자국의 유물들을 되찾아 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대영박물관의 유물들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그 자리에서 그곳 문화에 어울리게 될 날이 있을까. 어떤 민족의 것이든 동등한 보편성 위에 인류 공동의 유물들로서 본 고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날이 온다면 그야말로 대영박물관은 인류사에 길이 남을 추억의 대 전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유물들의 본 고장도 그만한 지적 수준이 갖추어진다면 세계 평화의 기반이 세워지리라는 꿈 같은 생각에 젖어 버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빗물에 젖은 서울의 야경이 슬라이드처럼 스치고 있었다.
(2005년 7월 28일)
11
기억의 전당
대영박물관 대한민국전(2)
대영박물관 한국전의 이번 전시장의 유물은 테마별로 관람해도 좋을 만큼 규모가 방대했고 엔터테인먼트 요소도 많아서 기획에 있어 대단한 노력을 들였다고 보았다. 인물별로, 여인들의 관심사인 보석별로 볼 수도 있었고. 가족단위나 친구들과 연인들이 자기들의 관심사에 따라서도 볼 수 있었다. 작은 보석류, 반지나 귀걸이 목걸이와 동전, 펜던트 등은 확대경으로 볼 수 있는 장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전시장을 살펴보자. 첫 번 째 실에는 대영박물관 역사, 칼 막스 열람실 서명, 대영박물관 입장권, 대영박물관 조례 등이었다. 본격 유물로서 첫 번째 실에는 고대 이집트와 수단 람세스 4세 석상, 死者의 書, 불행의 미라. 메소포타미아의 왕조들, 정말 아련한 전설처럼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푸아비 여왕의 수금과 보석들. 돌로 만든 기념비. 에집트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이 영국 왕실에 양도한 그 유명한 로제타 스톤. 고대 근동, 우리의 고구려 광개토왕에 비유할 만한 아슈르나시르팔 2세 상. 석제 사자 부조. 3실에는 그리스와 로마 흑색의 오이노코에, 헤르메스 상, 디오니소스 상. 등 역사와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조각상들이 있다. 이번 전시에는 지역적으로 5대양 6대주의 자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시간적으로도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고 있어서 몇 시간으로써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일반 관람객으로는 그 시간 동안 한 번의 관람으로 충분한 이해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불행의 미라〉를 볼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던가. 대영박물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이 된 이유는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과 품격 높은 예술성에 있기도 하지만, 작품에 얽힌 전설이 구전되어 널리 유포된 데에 있다. 고대 이집트 묘를 파헤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린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전해진 것이다. 주인 유체는 지금까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세기 이 보드를 이집트에서 운반한 영국인 4명은 요절하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 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같은 불행이 있었다. 가장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한 미국인 수집가가 이 미라보드를 구입해 1912년 타이타닉호에 싣고 미국으로 운반하던 중, 배가 빙산에 충돌해 침몰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지중해 지방과 페르시아 제국을 넘어가면 중앙 아시아와 인도와 중국의 유물들이 나온다. 유럽의 중세를 지나면서는 군중 앞에 선 예수의 조각과 많은 성인들의 이야기, 성인들의 자화상들과 유물 보관함, 신성하고 아름다운 루시아를 그린 접시, 성 유스터스의 두상 유물함 등 성화들에 관련한 기독교적 유물들이다. 그리고 아시아로 넘어오면서 눈에 익은 인도의 여신상들, 고대 간다라, 파키스탄의 〈서 있는 부처〉, 〈설법하는 부처상〉 등 현대에까지 종교의 시조가 되어 그 정신의 뿌리가 된 부처와 인도의 신들 그리고 예수의 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축약되는 것을 느꼈다. 특히 서 있는 부처상은 고대이집트의 석상과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상〉과 로마의 〈하드리안 조각상〉이 변형된 동서양의 모습이 합쳐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제 2의 경주라고까지 불리는 창녕 지방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관룡사라는 절 뒤편에 정말 타이타닉를 연상하는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환희심을 불러일으킨 석가 상을 상면하였다. 그 석가상과 서양의 조각상을 합쳐 놓은 듯한 〈서 있는 부처상〉은완전한 모습인 32상의 석가모니가 어찌하여 삼 천 년 동안 추앙 받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마지막 아시아 관의 우리나라의 작품. 정조 시대의 영의정이었던 〈체제공의 초상화〉 앞에 섰을 때는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 드디어 고향에 내린 듯한 감격적인 해후였다. 그렇지만 그 작품이 전시 후 다시 영국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초상화는 금방 그린 듯 할 정도로 생생하게 잘 보관되었다. 실제로 유물 입장으로 볼 때 대영박물관은 그들의 천국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유물 보존을 위해 최대한의 과학적이고 세밀한 노력을 그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해서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왕의 초상화〉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조선왕조의 개국을 연 초대 왕으로써 전국에 다섯 곳에 왕의 초상을 모신 집전이 있었는데, 전란으로 다 소실되고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것만 진품이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초상화보다 체제공의 초상화가 더 잘 보존되어 생생히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왕의 초상전이 끝나고 왕의 초상 진본은 보존을 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일반 전시 때는 모사본이 전시되지만 진본을 경기전 본래 자리로 되돌아 와야 한다는 주장은 과연 합당한 일인가.
(2005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