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 에세이 2집

에세이 2집 1부, 역사의 향기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7. 22:31

1부

1. 역사의 향기, 전주 경기전에서

2.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 탑이여

3. 선화공주는 누구일까

4.  백제의 르네쌍스를 그린다

5. 들꽃의 향기 따라 역사의 숨결 따라

6. 죽막동, 수성당 앞에서 (보타락가산)

7. 새망게징게

8. 온고을, 은행나무골

9. 산유화




1

역사의 향기, 전주 경기전(慶基殿)에서

                                                       

   청년 시절에는 처녀의 눈썹만 예뻐도, 찰랑거리는 머리채만으로도, 얼굴이 예쁘지 않아도

그 처녀를 좋아  할 수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렇지 않더라는 한 남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청춘이 아니어도, 이순耳順이 넘어도 사람 뿐 아니라 그 어떤 물상이든 한 부분이

특별히 매력적일 때 나머지 전체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이른 봄에 제주도에서 봄을 만끽하고 돌아와서 약간 조용한 봄을 보낼 것 같았다. 아직

춘삼월이 다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모녀가 만나서 우연히 경기전을 산책하게 되었다. 역사적

가치보다 이젠 시민의 공원으로써 자리 매김 된 경기전 뜨락의 숲이 좋기 때문이었다.

대나무 밭이 있는 사고(史庫)로 막 들어 서려던 때 어디선가 보드레한 암향이 풍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아! 사고 앞에 기이한 매화나무가 있다고 했지! 뜨란 가운데서 아담한

노매(老梅) 한 그루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 때 찍은 사진은 행촌수필 제 15호의 표지로

채택되어 기념비로 남게 되었다.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다워서 꼭 한 번은 들러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이 매화나무로 하여 경기전 전체가 담고 있는 역사의 향기를 다시 새기게

되었다.

   사군자 중의 매화도(梅畵圖)를 그릴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그 가지에 있다. 고매古梅의

굴곡진 가지를 잘 그려야 매화의 품격을 나타낼 수 있다. 꽃은 그 다음이다.  경기전 안뜰의

매화나무가 꼭 그렇다. 가지가 세 번이나 절묘하게 굽었고, 굽어진 가지 끝에서 겹꽃과 홑꽃이

총총히 달려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바라보는 사람들도 꽃과 향보다는 그 굴곡진

등걸을 입 모아 칭송하고 있었다. 그런 고매가 그리도 화사한 꽃을 피워내고 있으니……. 언제쯤

부터 그렇게 힘든 등걸을 누이고 있었던 걸까. 老梅의 둥치가 반은 비어있어 시멘트 같은 약품재로

보수되어 메워져 있다. 古梅는 역시 高梅이고, 故梅, 苦梅, 孤梅며, 枯梅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고매의 맛을 모두 지녔다. 하여 잔가지마다 만발하게 피어난 꽃들이 모두 고귀하고 또 고아하며,

아취가 깊어 어떤 말로 칭송하기조차 어줍잖았다. 

   경기전을 자주 들렀지만 매화 철엔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던가. 맨 가지로 외롭게 서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참 무심했다. 매화 등걸 같은 처지가 되어서야 이심전심 조우하게 된다.

매향처럼 은근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경기전 정신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태조어진>과 <왕조실록>을

목숨으로 보존하였던 선비들의 넋이 다니러 온 듯하여…….

   내 친구 임여사는 경기전 문화해설사로 십여 년 일하고 올해로 퇴임했다. 은퇴 기념으로 경기전

동편 담에 세 그루의 이팝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나와 함께 전주박물관의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전주문화 지킴이의 일역도 담당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매화나무 감상을 감동적으로 전했더니

경기전의 사계(四季)를 이야기하면서 특히 볼만한 풍경을 귀띔해 주었다.

   봄엔 사고 앞의 매화. 여름엔 배롱나무, 특히 배롱나무 꽃이 피었을 때 갑자기 소낙비 온 후

떨어진 꽃잎이 땅에 달무리 무늬를 지었을 때. 참 낭만적이지 않은가. 사고 앞의 매화나무 옆 정전

담장 옆에는 키 큰 잣나무가 있는데 뿌리에서부터 능소화 한 그루가 잣나무 등걸을 감고 올라가서

높은 가지에 꽃을 피운다. 다음으로 정전 앞의 팽나무 이끼를 들었다. 내가 하나 더 들고 싶다면

정문 안으로 들어와서 오른 편의 고목이 된 우람한 회화나무를 들고 싶다. 그걸 그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하니 가을의 단풍든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거목이 된 경기전의 은행나무는 향교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명품 중의 명품이다.  겨울에는 경기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나무들이 나목으로

서서 한 생을 되돌아보며 숲에 가려졌던 전각들의 지붕들과 그 속의 역사성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주의 대표적인 역사적 문화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지난 주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때, 소낙비인가 했더니 태풍의 영향으로 오후 내내 비가

내렸다. 여름날 소낙비 내릴 때의 배롱나무가 생각나서 경기전에 들어갔다. 우산을 받고 바지가랑이가

다 젖었지만 과연 경기전 전각 사이사이의 배롱나무는 잠시 나를 잊게 했다.  휘어졌으나 말쑥한 굵은

가지의 빼어난 수형樹形이 고풍스런 전각들과 조화를 이루어 너무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전각들

사이에서 애절하도록 화사한 진분홍 꽃잎 꽃잎들이 비에 젖고 있었다. 사고 전각 앞의 배롱나무

밑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이 흥건하게 고인 빗물에 달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전주시의 경관을 보자면, 전주부로 입성하는 남쪽 들머리의 한벽당과 그 뒤 승암산자락은 견훤성

터가 있으므로 후백제의 견훤의 땅으로 보면 좋다. 오목대와 이목대 그리고 향교를 지나서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중심에 경기전이 자리하고 있고, 구 도청자리가 전라감영으로 복원된다면 객사까지 이어지는

관광 밸트가 형성되어 이 일대를 조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보면 좋을 것이다.

   한양을 두고 전주가 조선의 문화를 대표한다고 과잉 선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경기전

의 의미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써, 전주의 충성스런 선비들에 의하여 어진과 왕조실록을 보존하였다

는 중요성과 희소성을 생각하는 데서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놓치지 않아야 할 경기전의 문화 코드가

있다면, 하나는 입구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지차개하마至此皆下馬  잡인무득입雜人毋得入)와 정전의

정자각 풍판에 붙어 있는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말함이 아닐까. 경기전의 참 모습 또한 면면이

이어져 오는 역사문화의 향기에서 그 정신을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역사의 뒤란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전주인들의 정신이 팽나무의 푸른 이끼처럼 경기전 뜨락에 서려 시민의 공원이 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도 내 친구 임여사는 조선의 선비 후예답게 문화재를 사랑하는 전주지킴이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서 든든하다. 역사가 이룬 이러한 품격을 현대의 가치와 양립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 이것이 앞으로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2009년 8월 7일)



2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 탑이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있어도 없어도 좋고 아름다운 인연이라 해도 좋다. 오늘은 염부단금 같은

꽃술을 가진 차꽃을 탑신께 헌다화 공양 올리고 싶다.  80년도 초, 풀밭에 둘러싸인 이 탑 앞에서

우리는 정성스레 차를 우려 올리고 탑을 돌곤 했다. 우리

스님은 유난히 백제 탑들을 좋아했으니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정림사지 탑을

닮은 미륵사지와 왕궁리5층석탑엘 자주 갔었다. 그 때는 연꽃 같은 스님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따라 좋아했고 스님의 행을 그대로 닮고 싶었다. 탑을 올려다보는 시선 따라 같이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내가 다례원茶禮院을 열었을 때, 전라북도에 오니 차(茶) 하는 사람도 없고 찻집(전통)도 없다 시면서

스님은 나의 다원에 오시기를 좋아했고 우린 한 눈에 서로 반했다. 선뜻 전화 주시고는 송광사

마로니에를 같이 보러가자 하시고, 연꽃이 필 때는 연방죽에 같이 가자 하셨다. 그님이 경기도로 옮긴

후 여러 해가 지났다. 문득 지난날들이 되살아나, 미륵사지와 왕궁리 석탑을 다시 찾게 되었다.

   왕궁리탑을 보러 갈 때면 옛 연인을 만나는 듯한 묘한 설레임조차 일었다. 탑을 돌아보고 면석을

어루만져도 보고, 풀밭에 누워보기도 하며 무한한 아늑함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며, 때때로는

거석이 주는 위압감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한참 탑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폐허로 남아있는 탑

주변에서 알지 못할 적요한 마음결이 느껴져서 좋았다.

   어느 날 오후 넋 놓고 탑신을 바라보자니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탑 앞에 모이는

것이다. 부산의 대학생들이었다. 혼자 말로 '왜 이렇게 이 탑이 아름다운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들을

이끌고 백제 지역을 답사하는 교수님은 내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문득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손뼉을 치며 "딱,딱,딱, 자, 여러분! 이 백제 탑이 어떻게 아름다운가요? 신라 탑과 어떻게 다른가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멍 하니 모두 올려다보았다. 물론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돌조각을 쌓는 데는

과학적 원리가 있다. 그리고 시선이 닿았을 때의 체감까지 고려한 점도 있다. 그 교수님의 설명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보았고, 그 후로 더욱 그 미감을 음미하곤 했다.

  "초층 탑신은 맏형처럼 듬직하고 2층 이상은 어여쁜 누이동생들처럼 옹개종개 오라버니 넓은 등에

업혔다. 평사낙안 기러기처럼 너른 지붕은 넉넉하고 한가로운 정경…. 지붕 끝마다 드러난 추임새는

  어느 여인이 진양조 느린 가락으로 춤을 추다가 불현듯 손끝을 튀기는 악센트…. 위층으로 오를

수록 지붕은 넓고 몸뚱이는 가냘퍼!  저 꼭대기의 긴장은 아름답다 못해 애틋하고 속이 타들어 간다."

이렇게 탑 박사님은 탄식했다. 아마도 이 감상은 정림사지5층석탑의 미를 표현한 말이지만, 이 왕궁리

탑에도 충분히 해당되는 맛이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은 200여 년의 전성기를 누렸던 목탑木塔의 시대가 끝나고 영원하게

변하지 않을 석탑의 시원(始原)인 탑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 한 번 돌탑을 조성한 백제의 석공은 나무를

주무르듯 이렇게 조각미가 아름다운 정림사지 석탑과 왕궁리 석탑을 만들었다.

  이제는 왕궁터가 발굴되어 왕궁리란 이름의 물증이 드러났다. 사방에 나타난 성벽과 유구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실체의 흔적이 드러날수록 발굴되기 전의 모습이 애틋하게 그립다. 탑이 보이는 입구에

서면 자연의 흙 길이 열려 있고 양옆으로 100여 년 가까이 된 벚나무가 줄 서 있었으며, 왼쪽은

지금도 여전히 벚나무 숲이다. 흙 길 끝에 하늘을 당당히 떠받치고 서 있는 탑이 노을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아름슬픈 자태는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옛날 탑 사진을 보던 한 관람자는. 자기는 이 부근의 마을에 살았는데 초등

학생 때 탑 주위에서 놀면서 옥개석(지붕돌)위를 올라 다녔다고 했다. 인근 초중등학생들의 소풍장소가

미륵사지와 이 왕궁 터였다. 소재구 탑 박사님도 그랬다. 어렸을 때 늘 이 주위에서 놀 질 때까지

자주 놀았단다. 그 인연이 나중에 청년 시절부터 탑에 미쳐 새벽부터 밤늦도록 돌아다닐 줄을 그때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냐고 술회했다. 참 인연이란 묘하다. 내가 아버지의 직장 인연 때문에

중고등학생시절을 전주에서 보낸 일이 후에 다시 이곳 사람과 결혼할 인연이 될 줄이야! 설화의

주인공처럼 서동이 선화공주를 찾아다녔던 것 같이 내 남편도 청년시절 다시 나를 찾아다니다 결국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나를 찾아 전주까지 데려올 줄이야!  아마도 친정 친척 하나도 없는 타향에서

내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나를 위로해주었던 백제 탑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작부터 차의 공덕을 알고 부처께 헌다공양을 올렸던 기원의 덕도

힘이 되었을 것 같다.

  어렵사리 삼국을 통일한 신라. 백제를 무너뜨리고도 고구려와 8년간이나 전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를 물리치기까지 힘겨웠다. 통일한 나라를 화합하기에는 내용이 충분해야 했다. 자기 고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익산 지역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 희망과 꿈이었던  미륵사를 유지하기 위하여

강력한 신라인들로부터 시주를 받아야 했겠지. 지역을 살리고 화합하기 위하여 그들의 민요에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상상의 인물을 등장시켰을 테지. 문학적 상상력은 선화공주를 빌어 서동의 신분 상승을

올려놓을 만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지역은 오랜 세월 서동요의 덕을 보아왔던 셈이다. 새삼스레

선화공주가 아니고 익산의 호족이었던 '사택적덕'의 딸이 왕비였다고 해도, 또 왕비가 어디 한 분

뿐이었겠는가.

  아버지의 덕택에 경남에서 산 세월보다 전주에서 산 세월이 많아졌다. 이제는 이곳의 문화미에 푹

젖게 되어 탑 앞에 서면 한 살처럼 느껴진다. 고대에 선화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내 피도 걸러지고

여과되어 나에게서는 복합 문화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첫 세대로써 영호남의 가교를

이었으며 내 아들도 대를 이어 영남 여인을 아내로 맺었으니 그렇게 해서 선화공주의 후손들은

대한민국 안에서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 창조해 가고 있다.

  만날 때마다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아, 세월이여! (2009)

 

 

 

 

3

선화공주는 누구일까

  

 

    교통이 발달된 2008년 여름, 나는 옛 신라 땅, 경주 근처 후포리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가을에 오라고 하신 광도사 스님 말씀을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했다. 고속버스가 부산까지 바로

가는 것이 있긴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부산엘 가려면 대전 발 0시 기차를 갈아타고

열차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신라 땅에서 태어나서 어찌하여 이 백제 땅에 와서 살게 되었는고! 현대판

선화공주처럼 말이다.  근데 그 옛날 백제의 땅 익산에서 경주까지 어떻게 그런 러브스토리가 있을 수

있었는지. 어찌 익산에서 경주까지 서동이 마를 캐어 팔러 갔을꼬. 그런 노래까지 지어서 말이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선화공주님은 /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  薯童房乙(서동방을) /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맛동(서동)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공자도 그 나라 가요를 들으면 그 나라의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정부수립 이후 60년의 가요

사(史)를 보아도 그 시절마다 그 때의 상황과 정서를 느낄 수가 있다. 그동안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선화공주와 서동과의 관계는 그 시대로써는 말도 안 되는 개 짓는 소리라고 들 해왔단다.

  "역사에서· 문학에서· 전설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면 역사가는 그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찾아내는 수사관이 되어야 한다." 전 고궁박물관장이셨던 소재구씨의 말씀이다. 역대의

역사의 수사관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그동안 역사 배경적으로, 문학적으로 '서동요'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기로, 백제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 이야기로 낙찰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무왕이 익산의 토착 귀족층의 힘에 의하여 왕으로 등극하였고 부여씨들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결국 오늘, 1400여 년 만에 물증이 드러난 셈인가. 아직은 미비하지만.

2009년 1월, 드디어 마지막 미륵사지서탑 기단부의 심초석에서 사리기와 사리봉안기 등 유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출토 유물은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국보급 유물 683점이다. 미륵사를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하게 된 내력을

  새긴 '금제사리봉안기'에는 절대연대와 왕비의 이름이 밝혀졌다.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왕의 수명장수,

  치세영구, 상구하화이며, 왕비에 대해서는 신심명징, 건강복리, 불도성취를 기원한다. 대가람을 세운

목적이 최고통치자인 왕과 왕비에 대한 건강, 치국, 불심에 모아진다. 말하자면 왕사로서 지어지고 왕권강화에 목   적이 있음이 명확하다.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 창사의 배경과 전경이 뚜렷한 반면, 미륵사연기설화인 서동설화에는 드러난

전경은 없다.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 배경은 나와 있지만, 창사의 목적은 뚜렷하게 나와 있지 않다. 또한

사리봉안기에는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이며 왕비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다. 따라서

역사와 설화 상에서 흥미로운혼란이 다시 생기게 된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서동설화는 거짓말이

되었으니, 선화공주는 누구란 말인가. 또 '기해년'은 과연 무왕 조의 기해년인가.

   신라여인이 백제로 와서 살고 있는 나를 두고 '선화공주'라는 애칭으로 불러준 이가 있다. 미륵사지에

헌다례를 하러 자주 갔던 나는 더욱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선화공주를 찾아야 했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지붕은 석탑의 형식미를 따라서 건축했다. 지금은 서양식 잔디밭이 되어버린 폐사지의

벤취에 앉아 그 당시의 가람을 상상해본다. 연못가를 서성이며. 우리의 선화공주는 어디로 갔는가.

선화공주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본의 아니게 역사공부와 문학공부가 되었다. 흥미로운 역사 탐색이 아닐

수 없었다. 단 두 줄의 서동요가 향가 중에서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고도의 문학장치를 세련되게 구사했다는 점. 절묘한 시작법(詩作法).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글 쓰면서 들은 풍월로 문학작품이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적 기록이 아닌 전해져 내려온 민담과 설화와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설이 텍스트가 되었다면 기록자나 전달자의 상상력에 따른 인위적 가필이 허용될 수 있다. 史는

事實的이요 傳은 寫實的이다. <삼국유사> 전체 성격이 그렇듯, 무왕조, 역시 史가 아닌 傳을 텍스트로

하고 있다." 라고 나경수 교수는 언급했다.  이번에 발굴된 '사리봉안기'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겪었던

혼란을 밝히는 빌미가 된 셈이다.

 

   “서동설화는 역사는 아니지만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서동설화는 민중들의 간절한 희망이 투사되어 있다.

서동설화는 창의력 신장교육을 위한 훌륭한 문학 작품이다." 역시 나경수 교수가 이미 밝힌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기(고려)는 작품의 주인공과 주변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구전되어온 신화와 민담과 전설이 섞여서 서동설화로 묶어질 수 있는 시기였다. 일연 자신도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상상력을 포함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 나타난 여신

女神의 실체가 시대를 거쳐 오면서 정치적 상황에 의하여 변색된 것처럼. 도저히 그 당시의 정치적 입장

에서는 두 나라 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문학의 장치인 아이러니와 역설 속에 민중들의

소망을 담고 탄생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탑상조에서 '미륵선화'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를 찾았다. "네가 웅천(지금의 공주)수원사로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보게 될 것이다." 眞慈師가 꿈을 꾸고 미륵선화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신라

진흥왕은 불사를 많이 짓고 승니를 많이 두었다. 천성이 풍류를 좋아하였고 신선(神仙)을 많이 숭상하여

인가의 예쁜 낭자를 뽑아 원화(原花)로 삼았으니, 그것은 무리를 모으고 선비를 뽑아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는 것으로서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러 해 후에는 풍월도(風月道)를 하여 나라를 흥하게 하려고 명을 내려서 양가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다시 화랑(花娘)을 남자 화랑(花郞)으로 고치고 맨 먼저 설원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은 신선을 가리켜서 미륵선화(彌勒仙花)라 불렀다.

   지배권자들은 전쟁을 일으키지만 민중들은 평화를 원한다. 얼마나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던가. 설화는

민중들의 소망에서 탄생되는 것이기에 모두 사이좋게 살기를 바란다. 신랑인 백제와 신부인 신라와 결혼

하여 진정으로 사이좋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쩌면 통일시기 신라인들에 의하여 각색되어졌을 수도

있었던 서동설화였다. 진평, 즉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민중들은 백제의 왕과 화랑으로 승화돤 '

미륵선화'를 맺어준 것이 아닐까. 그렇게 '미륵선화'가 신라의 선화공주로 시적 변모한 것이 아닌가.

서동요는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2009/8/19)

  

 

 

4

백제의 르네쌍스를 그린다

  

 

   헌다례(獻茶禮)을 올리기 위하여 茶스님과 화림회원들은 가끔 미륵사지와 이웃 왕궁리 오층석탑에

갔었다.  1982년 무렵, 미륵사지서탑은 한 쪽이 시멘트로 메워진 채로 반쪽의 몸만 남은 탑신이었다.

주변에는 떨어져 조각난 탑돌들이 세월을 잊은 채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우리는 차를 우려 차반에

받쳐 들고 그런 탑을 돌곤 했다. 폐사지의 허전한 들판에서 부서져 남은 반쪽 부처의 집을 올려다보며

그저 경건한 마음으로 탑돌이를 하고 나면 돌아오는 발걸음이 고요해졌었다.  폐사지 주변은 정리되지

않은 논두렁길로 어수선했었지만, 그것이 더욱 미륵사가 품고 있었던 백제의 꿈을 그리게 했었다. 

아직 발굴이 전개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2008년 봄에 박물관자원봉사자팀이 익산 답사에 나섰다. 연못 뒤의 가건물 안에 미륵사지서탑이

해체되어 있었다. 1400여 년의 백제인의 삶과 한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탑돌들이 늘어져 있었다.

각각의 돌은 이름, 층수, 위치, 방향 등을치밀하게 기록한 표식을 주렁주렁 달고 제자리를 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층부는 모두 해체되었고 기단부분만 남아 있는 1층 옥개석의 네 귀퉁이에 수인상이

울상을 짓고 있는 듯했다. 한많은 서탑이 창고 안에 갇힌 이래 난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창고를 다

둘러보고 늘어놓은 돌들을 보자 너무나 아득하였다. 저 돌들이 모두 제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옛날부터 있었던 연못가에 앉아 그려보았다.  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는 도중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던

연못이 여기였을까. 미륵사지를 나오면서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옛날 헌다례를 행하러

다녔을 때가 차라리 그리웠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록이 전무하였던 백제의 유적이 발견될 때마다 뉴스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1971년이었던가,

공주의 무령왕릉이 발굴되었을 때가 그랬고 부여 능산리에서 '백제금동향로'가 발굴되었을 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서울의 몽촌토성이 그랬으며,  2007년에는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발견된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 사리기가 나온 것이다. 사리기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담는 그릇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9년 1월 드디어 미륵사지서탑 해체 과정 중 마지막 기단부의 심초석에서 사리장엄구와 사리봉안기

등 유물이 쏟아짐으로써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번 사리장엄구 발굴로 인하여 학계에서는 많은

토론을 했다. <미륵사지 탑지의 조사과정에 대한 검토>에 관한 심포지엄도 개최되었다. 모두가

'사리봉안기'의 <기해년>을 당연히 '무왕조'의 기해년으로 단정짓고 토론되었으며 신문 보도 또한

'639년 기해년'으로 이루어졌다.

   삼국유사의 무왕조를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고본(古本)에는 무강왕(武康王)이라고 하였으니 틀린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이에 미륵법상 3개와 회전, 탑, 낭무 각각 3개소씩을 창건하고

  액(額)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음) 진평왕이 百工을 보내어 도왔는데,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또 삼국사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이 전에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확실치 않다."

    고본에 표기된 '무강왕'과 '기해년'이 다시 실마리가 되는 셈이다. '기해년'이란 절대연대로 인하여

무왕 조가 아닌 <무령왕 19년 519년(기해년)>임이 더욱 선명해졌다는 사재동 교수의 논문 <미륵사지

문물의 예술사적 고찰>이 너무나 그럴싸해서 나의 생각도 거의 무령왕 쪽으로 기울어졌다. 일연의

시대에서는 이런 사실을 증거 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일연은 무강왕은 없다고 일축했으리라. 이로써

문학가와 역사의 수사관 사이에 또 학자들 사이에 심심찮게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겪었던 혼란이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륵사창건설화의 배경의 무왕은 무령왕이라는

주장이 다시 흥미를 갖게 된다. 동성왕 때 무령왕은 왕자였으며 신라와 국혼이 있을 정도로 교류가 많았고

백제의 문물이 가장 융성하여 미륵사 같은 대찰을 창건할 여건이 무르익었으며, 무령왕의 녕寧 자가 삼국

사기에 나타난 무강왕의 강康 자와 동의同意 이어異語로 얼마든지 환치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무령왕이야말로 기골이 장대하며 용모가 그림과 같은데다 그 성품이 인자하고 관후하여 민심이 돌아와

의지함으로써 동성왕이 서거하자 태자가 아닌데도 즉시 왕위에 올랐다. 미륵사창건설화의 주인공을

'무령왕 19년 519년 기해년'으로 결부시킬 때 그것은 여전히 튼튼한 기반 위에서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재동 교수의 주장이다. 설화의 원형과 변모의 궤적을 찾아보면 설화적 면모로부터 역사적

모습까지가 계통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유물관을 들어서면서 벌써 마음이 상기되었다. '사리장엄구'들을 친견하는 마음이 그리도 달뜰 수가

있을까. 모래알 만한 '사리' 하나를 둘러싼 오색유리알 11과의 사리는 어쩜 그리도 협시보살들 같은가.

부처님 몸을 모시는 믿음을 영원히 변치 않는 '금제내호'에다 최고의 공예기술의 문양을 새기도록 했다.

  옛 백제 인들의 마음을 대하는 이 시대의 마음도 그들과 다를 게 없다. "사리를 일곱 번 요잡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하지 않았던가. 옛날 사람들이 그랬듯이 전시된 유리관 탑을 돌며 자세히

살폈다. 순금제 내호는 두 손으로 감싸면 그 손바닥 안에 폭 싸일 것 같은 크기로 참으로 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찬란하다' 라 고도 말할 수 없는 그이상의 장려한 색채를 품고 있었다. 엄숙

하고도 고귀한 빛을 은은하게 빛내지 않는가.

   백제의 미(美)를 말할 때 흔히 사용되어지는 말이 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치졸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그 말만으로는 백제의 예술을 다 말하지 못할 것 같다.

통일신라 시대의 상징인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은제품에다 청동과 목제품이었다. 금세공의

기술이 이미 높은 수준에 와 있었던 백제였다.  '백제금동대향로'에 그들의 우주관을 통째로 표현한 조각

솜씨와 중국의 탑을 능가하는, 목재를 주무르듯 조각한 석탑의 조형으로 보아 어찌 다른 예술품을 상상하지

못하랴! 대사찰에 담긴 모든 불교미술과 신앙도구들이 당대 최고의 기술과 예술품으로 창조됨으로써 한국

불교문화의 전형으로 현대에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새꼬리 모양의 치미는 미륵사 전각마다 용마루의 양쪽 끝에 세워져서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였을 것이고

사자 얼굴 다리로 된 향로, 사리함에 새겨진 공예 솜씨로 보아 다른 문물들의 솜씨를 능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세 금당에 모셔진 삼존불상에는 당시 왕실 대가를 중심으로 최고 절정의 공예품이 제작되고 복장 

되었으리라. 삼국시대에 제작된 국보 78, 83호인 '미륵반가사유상'를 탄생시킨 빼어난 조각 솜씨가 아닌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서도 짐작될 수 있다. "사리봉안기의 금판 명문은 무령왕릉 출토 지석의

석판 명문과 그 시대적 기록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터라 하겠다. 이러한 양자의 명문은 실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최고의 성과인데, 하나는 생전의 원찰에 새기고 하나는 사후의 능침에 새기었으니, 그

친연성이 실감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리봉안기의 명문이 무령왕 대의 소산임을 족히 유추할 수가

있겠다."

    그 옛날 그때도 미륵사에서는 사리봉안 대법회가 이루어졌으리라. '사리봉안기'에 담은 백제의 기원을

한데 모아서 왕과 왕비를 주축으로 하여 왕실가족과 대소 신료들, 시주자들과 전국의 승려들, 백성들이

다 모인 가운데서 야단법석이 펼쳐졌을 것이다. 새꼬리 모양의 웅장한 치미가 하늘을 찌르는 전각 앞에서

금동대향로에서는 백제인들의 비원의 향이 하늘로 피어올랐을 것이며, 백제 악기인 배소, 완함, 거문고,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최고의 악사들이 아름다운 가락을 울렸을 것이고,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추는

축하공연도 하였으리라. 

    여름 한 달(2009년 6월 27일 - 7월 26일) 동안 익산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지난 1월에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굴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장마 기간이었지만 전북 지방은 물론

이거니와 전국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갔다. 감개무량하게도 1400여 년 만에 같은 자리 폐사지에서

전북의 모든 사찰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모인 가운데 부처님사리 친견대법회를 다시 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폐막식 공연도 다채롭게 열려져서 백제불교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2009년 8월)

5

들꽃의 향기 따라



  산성으로 오르는 비탈길 가에는 나팔꽃잎에 내려앉은 진분홍빛 이슬이 아직 반짝이고 있었다. 해발 47미터라는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니 사방으로 확 트인 들녘이 펼쳐진다. 가을걷이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벌판에 널브러져 있는 생명이 남긴 허물에 농민들의 잔상이 서려있는 듯하다.


  이곳은 전주와 김제, 부안, 고부, 태인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로도 알맞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이 지방 기념물제 31호, 사적 409호로 부안 백산면 용계리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의 백산봉기터이다.  1894년 3월 농민군이 이곳에 집결하여 군대로써의 대오를 갖추고 혁명의 시작을 널리 알린 역사적인 곳이다. 여기에서 공포한 농민군의 창의문(倡義文)으로 농민군봉기의 소식이 전해져서 수많은 농민들이 흰옷에 죽창을 들고 백산으로 모여들었으니 과히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 아니었겠는가. 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니 그 숙식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과연 110년 전에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솥가마를 대신하여 소가죽을 벗겨서 그릇 형태로 오므리고 겨우 밥을 익히기도 했다니, 오늘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그것이 짐승 밥이었을까 사람 밥이랄 수 있을까 싶게 참담한 심정이 밀려든다.

동진강이 주변을 감싸는 이 야산은 윗 부분을 테를 두른 것처럼 쌓은 테뫼 식 산성이라 한다. 키 큰 노란 들꽃과 억새 무리들이 웬 지 농민들의 죽창처럼, 하늘을 찌르는 깃발처럼 보이고, 피맺힌 농민군의 절규가 하늘을 울리고 땅 속으로 숨어들어 나팔꽃으로 피게 되었던가 싶다.


    아직 아침 이슬이 깨지 않은 산성을떠나 비장한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가 서있는 둑에 내려서니 양옆으로 낱알을 다 내어준 볏짚이 끝없이 줄을 지어 편안히 누워 있지 않은가. 할 일을 다 해내고 저렇게 누운 볏짚만큼도 농민들의 넋은 편치 않았으리라.


  갑오 년 당시 고부군수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이미 농민들이 쌓아 사용하던 민보(民洑)가 있었음에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 하류에 보(洑)를 쌓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였다. 농민들은 고부관아에 물세감면을 진정하였으나 강제로 쫓겨났다. 군수의 폭정과 수탈을 참다못해 전봉준의 지휘 하에 천여 명의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부셔버렸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였다. 만석보로 인하여 후에 만석을 수탈 당하게 되는 생산의 의미이기도 하면서 수탈의 상징을 함께 지닌 이 터. 수백 만 번 땅을 찧어도 시원치 않을 기막힌 농민들의 울분을 이 들녘은 기억하고 있을까? 가을걷이하는 트랙터 소리만이 빈 하늘을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전봉준 장군의 고택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중얼거려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마침내 녹두꽃이 떨어지던 날에청포장수들의 구슬픈 노랫가락은 천지를 울렸으리라. 들녘에서 바람결에 스쳐 대는 풀잎 소리마저 잦아드는 농민들의 한숨인 듯 자꾸만 뒤돌아보아진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전주역사박물관이 올해로 아홉 번째가 되는 역사기행을 개최하였다. 이번 역사기행은 전국적인 혁명으로 확대되는 가장 핵심적인 곳인 전북지역 유적지의 답사로 이루어졌다. 버스 7대에 나뉘어 탄 영호남의 대학생들이 함께 어우러진 하나    되는 마음의 대 행진에 동참하여 우리의 근대 역사에 대하여 다시 조명해보았다. 이로 인하여 비어 가는 가을 들녘에 희망의 녹두꽃 씨앗이 다시 뿌려지는 기분이다.





역사의 숨결 따라


1 황토현 전적지.


   황토현은 전북 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와 도계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35.5미터의 황토로 이루어진 언덕이다.

  황토현(黃土峴)의 팻말을 지날 때마다 일어나는 의문을 이제야 풀게 된다. 황토현 보다는 황토재라 부르니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낮은 구릉지인 이곳이 전주의 관군을 맞아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전적지다. 당시 전주부의 관군이 쳐들어왔을 때 세 봉우리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은 한 봉만 남기고 나머지 두 곳의 불을 끄고 관군을 유인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주변의 농민세력이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다. 이를 기념하여 후에 기념탑이 세워졌는데 농민의 혁명정신은 새 정권이 바뀔 될 때마다 그들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되어 기념탑과 기념관이 지어지는 등 시대적 변화 속에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곳의 탑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한다. 전봉준 동상과 사당, 기념관, 교육관, 광장, 주차장등이 갖추어져 있다. 기존의 기념관과는 별도로 대규모 기념관이 세워져 2004년 5월에 이미 개관하였다. 동학농민혁명사와 더불어 세계의 혁명사도 함께 읽으며 우리의 근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다.


2  고부관아터와 사발통문발견지

 

   조선말엽 고부는 전라도에서 전주, 남원 다음으로 컸던 고을이었다. 지금은 산업화에 밀려 하나의 면소재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낮은 구릉으로 이어진 밭들이 많아 풍성한 밭 생산물로 살기 좋은 마을로 보인다. 수탈의 근거지였던 고부관아 터는 흔적이 없고 그 자리에 고부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옆에 향교가 옛날의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듯 처량한 모습으로 비쳐 보였다.

  농민군은 1892년 4월에 부임한 고부군수의 갖은 수탈과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고부군수를 죽이고 전주감영을 함락시켜 서울로 올라가자는 혁명적인 모의를 결의하고 호소문을 썼다. 이런 내용을 담은 사발통문. 호소문을 쓰고 나서 그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관계자의 이름을 원둘레를 따라 적은 통문이다. 시대를 초월한 첨단의 결의문이 아닐 수 없어 사무치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신중리 주산마을에서 사발통문이 발견된 것을 기념하여 1969년 4월에‘동학혁명모의탑’을 세웠으며, 탑에는 사발통문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또한 주산마을에는 어느 조각가에 의하여 조성된 ‘무명농민군위령탑'이 있다. 기행단의영남대학생은 초록색 수건을, 전북인은 황토색 수건을 들고 영령들의 넋에 머리를 조아려 묵념을 하였다.


  고부농민봉기를 기점으로 1894년 3월에 백산에 집결하여 군대를 조직한 농민군은 이제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시작하였다.  황토재에서 대승을 거두고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부성을 점령한 것은 국가를 점령한 것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도 되었으리라.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 넘겨졌다. 마침내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는 구국의 일념에 불타올라 2차로 삼례에 집결하게 되어 공주 우금치까지 올라갔다. 일본의 조총에 무참한 패배를 당하게 되니 일 년에 걸친 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20여 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늦가을 추위에 처참하게 쓰러졌다. 일부 살아남은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없이 전북 일대의 산간지방에 흩어졌다. 가족들과의 교통도 할 수 없게 되고 암흑 속에 가려져 110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유족들과 그들의 넋인 들 저 들판의 볏짚보다 못한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에는 삼례봉기역사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름 없는 모든 농민들의 넋을 기릴 수 있는 하나되는 '하늘’이라는 조각이 설치되어 영상에서나마 그들의 넋과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동학농민혁명사상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 반봉건 민주화와 반외세 자주화였다. 19세기 말 우리의 외세는 러시아, 미국, 중국, 일본이었다. 현재도 진행 중인 혁명은 여전히 구질서의 기득권을 없애고 외세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주화를 이루자는 것이지 싶다.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역사의 아픔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기에 …….

   우리나라 근대사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둘러 본 이번 답사는  어떻게 그 정신을 살려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다. 이제 ‘동학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으며 젊은 학생들도‘동학농민혁명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농민군들은 110년 동안 밝은 햇살을 받지 못한 채 반란군으로 몰렸으며, 일제 시는 반역 사상주의자로, 해방 후는 빨갱이로 몰렸다. 이제야 그 명예를 회복할 시기를 만난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 수많은 혁명이 있었지만 오늘까지 인류는 행복한 사회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총칼로 이루는 혁명은 영원히 완성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기에, 혁명의 악순환을 거듭하지 않을 'Z'* 혁명이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이기에 농민의 정신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된다. 그 정신을 살려나가는 데 마음을 모아, 개개인이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사고(思考)의 혁명으로 전체를 보는 안목을 넓혀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집단 이기주의나 국가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짓밟혀도 솟아나는 가을 들판의 들풀처럼 농민혁명의 저항정신도 우리 안에 계속 피어나 맑고 그윽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2004년 11월)


*‘Z' 알파벳트의 끝 자로 ‘마지막’이란 뜻







6

우리의 보타락가산

-죽막동, 수성당(水聖堂) 앞에서-





  바람결에 실려 오는 갯벌 내음은 애잔한 서러움 같았다. 해안 사람들의 삶의 질곡이 풍겨오는 듯도 했다. 해안의 반대편의 산에는 초록 하늘에 뜬 하얀 별 같은 찔레꽃들이 순박한 시골 색시들처럼 무리 지어 나타나곤 했다.

  수성당이란 팻말만 보고 걸었다. 바닷가에 웬 성당이라니! 묘했다. 그곳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제사유적이 발굴된 죽막동이었다. 북으로는 동진강구, 남으로는 줄포만을 끼고 있고, 서로는 위도와 상왕등대·하왕등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인근 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적벽강 여울골 절벽 위에 있는 지방유형문화재 제 58호 수성당은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를 모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죽막동제사유적은 바로 이곳 수성당 옆에 있었다고 한다.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수성당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이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이때 출토된 유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제사유물들이라고 한다. 이들 출토품에는 중국 청자편이나 석제 모조품 등이 외국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통일신라 토기, 고려, 조선시대의 도자기가 출토되어 이 일대가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계속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삼국시대 유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시기에 제사행위가 가장 집중적으로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바다가 보이는 여울 골은 경관이 아주 좋았다. 물살이 세어서 눈을 감았다가는 곧장 바다로 떨어질 것 같았다. 절벽 뒤로는 산대죽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많아서 죽막이라고 했던가 싶다.

수성당 앞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위도와 비안도라는 섬이 있다는데 보이지 않았고 등대도 보이지 않았다. 개양할미의 여덟 딸을 인근 섬에 각각 하나씩 시집보내어 주변의 바다를 돌보게 했다는 전설로 보아 토착세력에 의해 해상로를 통제하며 해상교통과 관련된 제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출렁이는 바닷물을 보자니 통일 신라 시절 해상왕이었던 장보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옛날 항해술도 아직 발달되지 못했을 때에 배들은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지점을 표지 삼으면서 항해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항해에는 바람과 해류 등의 해상 여건을 잘 분석하여 해상 항로을 추정했다고 한다. 바람의 변화는 바람의 방향에 의존하는 범선의 연안 항해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계절풍과 무역풍등을 잘 활용하였을 줄로 짐작된다. 드라마 왕건에서도 왕건이 해상에서의 승산 없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원인이 바람의 방향이었지 않은가. 항해를 하다가 조류가 심하고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컸던 이 곳에서 해신에게 풍어와 항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으리라.


  수성당은 중국의 보타락가산처럼 우리나라의 보타락가산 같은 지도모를 일이다. 보타락가산은 남인도의 엄곡(嚴谷)에 있는 바다에 면한 산으로 수많은 성현들이 살고 있고 온갖 보배로 꾸며져 있으며 지극히 청정한 꽃과 과일이 풍부한 숲이 우거진 데다가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이 연못 옆 금강보석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보살이 바로 관음보살로서, 그렇게 앉아 중생을 이롭게 하며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설법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음보살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라지만, 거의 여자 형상으로 보이니 개양할미로 말하자면 우리의 여성신(女性神)인 관음보살이지 않은가.


  삼국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사가 많이 행해졌다는 것으로 본다면 이곳은 백제지역이었다. 백제야말로 해상교통이 활발하여 중국과의 교류 뿐 아니라 일본과의 밀접한 관계를 했고 황해와 대한해협에서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한 해양국가였다. 해양을 군사적 전략으로 이용하여 중국과 해상교역을 하였다. 특히 4세기 후반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오늘날 해남반도 일대와 가야지역의 거점을 확보하고,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고대의 동아시아 국제 해양교역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제사유적의 발굴로 인하여 다가오는 서해안 시대에 재현할 수 있는 어떤 문화적 컨텐츠가 없을까. 전주가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만큼 새만금이 서해안의 새로운 요충지역이 되어 해양국이었던 백제의 르네쌍스를 재현 해봄 직하지 않을까 하는 염원을 해본다. 견훤의 이루지 못한 꿈을 후손인 전북인들이 이어갈 수 있다면 나라를 위해서도 그보다 더 한 충효가 어디 있겠는가.

(2004. 6. 7)





















7

새망게징게

 

 

                                                         

 

    정말 지도가 바뀌는구나!  지난 2006년 4월 21일,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는 날,  

축제 팡파레를 울리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었다. 지금 그 뉴스의 현장에 와 있다. 변산면에서  

가력도, 신시도, 야미도, 비응도 등 고군산도를 이어 군산항까지 세계 최장의 방조제 33km.  

현대에 모세의 기적을 맛보다니!  바다 위를 달려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새만금 방조제는 17년 동안 전라북도의 키워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랜 세월 개발성장에  

밀려 있던 전라북도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하여 '전북의 성장 엔진'이 될 새만금에  

생명을 걸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방조제 사업을 이끌어내었다. '동북아의 허브', '새만금  

동북아의 두바이 인프라 구축' 등 이런 구호가 비로소 내게 들려왔다. 새만금 전시관에서 구체적인  

새만금공사 추진상황을 들으면서 뉘우쳐졌다. 직접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나도  

방관자처럼 관심 없이 귀 밖으로 들어왔구나. 그동안 몇 번 이 바다에 오긴 했지만 풍경만 감상하며  

스쳤구나 싶기도 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이었던가. 갯벌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환경론자  

쪽이었나. 개발 쪽이었는가. 아니면 양 다리를 걸치는 기회주의자 편이었던가. 아무 쪽도….  

 

  전주에서 김제를 지나 부안을 거처 변산반도까지. 이 땅을 밟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렸을 때 부산 앞바다를 보고 자랐으나 벼 물결 끝의 지평선은 몰랐다. 김제의  

가을 들판은 코스모스 길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노란 바다가 되곤 한다. 처음 벽골제의 둑에  

올랐을 때, 망망한 누런 벌판이 고대에 저수지였다는 생각으로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었다.  

  그 옛날 벽골제의 역사(役事)가 남긴 전설들이 지평선을 삼키는 노을에 붉게 붉게 출렁여 또한  

가슴 뭉클했었다.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섬진강댐 아래 섬진강은 늘 목이 탄다 /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 떠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댐으로 섬진강이 마른 것을 이렇게 노래했다.  섬진강은  

3개 도의 지방 마을에 60여개의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고 임실 옥정호(섬진강 댐)로 모인다.  

섬진강에서 빠져나간 물이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의 젖줄을 이루는 것이다.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임란 때문에 생긴 구호지만 '징게망게'* 평야로 해서도 

타당한 구호였다. 그 김제 평야와 만경 광활 땅보다 더 큰 땅이 된다 해서 새만금이다.  벽골제가  

축조되어 풍요를 누렸던 농경사회가 1600년 세월의 강을 흐르다가 마침내 섬진강을 마르게 하고,  

오늘날은 이 시대 문명에 걸맞은 초현대식 벽골제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인가.  

 

  공사 규모나 시설에 해당하는 숫자는 머리가 아팠고, 바다 밑에서부터 돌과 흙을 쌓아 물을  

막는 공사를 볼 때 어지러웠다. 그리고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막상 가력도 갑문에 올라서  

상상할 수 없는 무게의 배수갑문이 바닷물을 막고 있는 것을 보자니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에 낭만이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사정이 허락지 않아 가력도에서 우리는  

되돌아왔다.  

 

  불교의 관음성지는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도량으로 대개 바닷가에 있다. 변산반도에   

얽혀 있는 관음연기설화는 불교가 백제에 전래된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음상을  

실은 돌배(石舟)가 바닷가에 닿았는데 내소사의 창건주인 혜구두타가 내변산 실상사로 인도했단다.  

변산반도의 돌출된 부안 격포 죽막동에는 중국의 보타락가산처럼 '수성당'이란 당집이 바다를 향해  

있어 우리의 관세음보살인 계양할머니가 그 바다의 안전을 빌고 있었다. 수성당 앞 깎아지른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물살이 거칠다. 계양할머니의 일곱 딸들을 주변의 각 섬에  

배치하여 바닷길을 수호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수성당' 옆에는 또한 고대의 제사 유적지가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죽막동 제사 유적지의 유물들은 고대 해양왕국이었던 백제의 전성기의  

흔적을 잘 알려 주고 있다.  

 

  변산반도의 바닷길은 격포와 위도 사이에 열려있다. 격포와 위도 사이에 임수도라는 무인도가  

있으며 임수도와 촛대바위 사이에 위치하는 바다를 '인당수'라고 부른다. 위도 사람들은 그곳을  

심청이가 빠진 인당수로 믿고 있다고도 한다. 그 부근 해역은 유난히 수심이 깊어 바닷물이 빙빙  

돈다고 한다. 실지로 1992년 위도를 떠난 배가 침몰하여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었던 사고가  

있었다. 고대로부터 그 바닷길로 중국의 남경 상인들이 교역을 했다. 변산반도 앞 바닷길은  

한중(韓中) 해상교류상에서 매우 중요한 항로지점이었던 것이다. 중국 청자를 실은 선박이  

침몰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송화섭씨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 위도 해안도로를  

조성하다가 바다 속에서 인양된 3구의 대리석 석인상이 인양되었다. 그 돌은 부안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중국 상인들이 바다에 인신공희 방식으로  

대리석 인형상을 던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위도에 들렀고, 선유도에 들러서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위도와 선유도는 고려시대부터 해양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고, 군사적으로도 대단한  

요충지였다. 백제 때 군산은 마서량(馬西良)이었고, 고려 공민왕 때는 금강 하구에 포구를  

설치하여 개성으로 가는 배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진포(鎭浦)라 불렀다. 당연히 강진에서  

구운 도자기들을 개성까지 운반할 때도 이 바닷길을 지났다.  

  이제 새만금에 신항로 개설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저 고대의 해상교역이 새로운 형태로  

이루어지리라. 정말 동북아의 허브로서의 제 역할이 새롭게 그려진다. 청사진대로 잘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그 방조제를 참관하러 올 때는 새만금 새 희망으로 오고 싶다.  

 

  박노해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외쳤지만,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곳곳에서 우리는  

‘사람만이 문제’임을 절감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길 좋아진다고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섬진강의 물만 빼앗아 간 것이 아니었다. 도로공사로 샘이 없어지고, 마을의 장승 할머니가  

없어지니 장승 할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김미숙은 갯벌을 '바다의 눈'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그 바다는 장님이 되어 바다를 지킬 수 없을까. 망해사 앞 바다에 내려앉는 노을  

사랑도 눈이 멀게 될까. 심포가 고향인 사람은 망해사(望海寺)가 더 이상 망해사가 되지 못할 것이  

안타깝다.  

 

  기러기는 V자로 모여서 날아간다. 하늘에 무늬를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은 우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모이면 날 수 있는 힘의 70퍼센트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새떼처럼 대형 버스를 빌어 타고 바다가로 육지로 돌아 여기 신성리 갈대밭까지 올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은 겨울이었는데, 그 겨울을 뚫고 나오니 세밑인데도 봄 강가에 닿은 것처럼 햇살마저  

포근하다. 금강 하구, 강 여기 저기 까맣게 가창오리들이 그림처럼 머물고 있다. 마른 갈대 끝에  

앉은 새처럼 달려있는 갈꽃들이 강 가운데 오리 떼들처럼 보인다. 철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져서 강가로 가볍게 달려가 본다.  

  금강하구둑을 지나자니 새만금 방조제수문의 육중함이 아직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그 갯벌의 터전을 잃어가는 갈매기들과 뭇 생명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어딘가에서 저 철새들처럼  

다냥한 햇살을 즐기고 있으면 좋으련만.  

 

  꿈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의 꿈이 합쳐지면 하느님도 감읍하시는가. 자연에 인위를 가하여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우면 하느님도 탄복하실 지도 모른다. 17년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만금이다. 환경을 걱정하여 날 새워 반대했던 삼보일배의 비원과 갯벌에 의지하여 살았던 무수한  

생명들의 한숨도, 없어져가는 고향 풍광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시인들의 꿈이 모두 보상받을 만큼  

새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꿈은 생성과 소멸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 먼 훗날 또 1600여 년  

후의 새만금의 전설을 위하여 오늘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야겠지. 힘차게 최선을 다하여.  '눈물의  

강'과 ‘비탄의 바다’가 새 희망의 강과 바다가 되기를….  (2008년 1월)  

 

 

* 징게망게 는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김제·만경 평야를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고  

  ‘아리랑’에서 작가 조정래는 말했다.  

 

 

8

온고을, 은행나무골

 

    가을이 다시 왔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간 사람은 영 오지  않는다. 벌써 일 년이 되었는데....

  "아아 가을은/ 이처럼 마구 하 아름씩 퍼부어 오는 거냐/ 저물도록 낙엽은 지고/ 우수수 낙엽을 몰고

온 /가을 비 뿌리느니 …" "진정 가을은/ 부산히 부스러져 다니는 거냐/ 불고 불리며/ 바람 속에 머리

풀고 다니는 거냐/ 여윈 손가락으로/ 가슴을 뒤져/ 무엇을 더 버리라는 거냐"  김남조 시인의 심정,

나와 같느니…

   지난해 가을이 익어 가는 그 길을 날마다 다녔다. 그의 병실을 지키기 위해. 초록색이던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랗게 물들고 느티나무 잎들도 앞 다투듯 서로 다른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겨자빛

들녘은 어느새 비기 시작하고 투명해지는 나뭇잎의 빛깔이 선연해지고 있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하자 조바심이 일었다. 저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날을 맞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이 착잡하였다. 병실의 창가에서 전주시가지의 은행나무 길 풍경을 내려다보곤 했다. 누군가

창밖에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잎새를 그려줄 화가는 없을까 하고.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의 품안에 /눈감는 것". 가로수들이 품었던

가을을 다 풀어헤칠 때쯤 그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세 발 자전거를 탈 때부터

걸어 다녔다 는 전주시라고 다른 도시로 가기 싫어했던 그였다. 학업 때문에 몇 년을 비운 것 외에는

거의 전주에서 살았던 그였기에 그는 경상도 태생인 나에게는 전주 자체였다. 전주 이씨의 사대부집

후손으로써 맹목적인 자부심만 넉넉한 그였다.

   그가 떠난 전주시는 텅 빈 것 같았다. 하늘나라에 그이의 입적 신고를 하던 날, 시내는 온통 샛노란

은행나무 숲에 싸여 있었다. 해마다 보았건만 그 거리들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내 가슴으로 들어찼다.

새삼스러이 메어터질 듯 온 몸이 뻐근했다. "어느 한 번인들 / 흡족히 바라나 보았으리/ 매양 보고

짐으로 눈 아프던 내 사랑에/ 이별은 오고/ 이별만이 길었더니라"

  올 가을, 나도 몸살치료를 위해 그 길을 자주 다니게 되었다. 멀리 가을 구경을 굳이 가지 않더라도

전주시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가을 정취는 넘쳐났다.

  전주천은 상류인 상관면 신리의 대흥천이 북으로 흐르다가 한벽당 앞에서 전주천이 되어 서쪽으로

흐른다.  천변따라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양쪽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좁은목 약수터부터 한껏 자태를

자랑하는 느티나무 군들로 바뀐다. 싸전다리를 지나 다가교까지 울긋불긋 화려한 가을색을 자랑한다.

둑 아래 냇물 가는 사람 키를 덮는 억새풀꽃들이 흐느끼듯 바람결에 서걱대며 은발을 반짝인다.

  한벽청연을 본 적이 없지만, 처음 전주에 왔을 때 한벽당 아래 빨래터에 따라 가 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으뜸 갔던 전주십경 중의 하나가 새로 난 도로

때문에 가리어졌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곳이다. 그 훤칠한 길을 지나면 전통문화센타 뒤쪽 하늘에

노란 물감이 점점이 박혀 있다. 가을이면 그 은행나무들을 보고자 누구나 한 번쯤 전주향교에 들리게

마련이다.

  전주시는 한벽당 뒷산인 승암산 쪽을 후백제의 견훤의 땅으로 일컬으며, 오목대부터 향교와 콩꼬투리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회화나무들이 줄 서 있는 태조로, 한옥마을과 경기전, 객사부근까지

이씨 조선의 땅으로 불리 울 수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 전주의 경쟁력을 부각시키려면 견훤의 이미지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다가교를 지나 선너머, 구이에서 흘러와서 삼천 천을 흐르는 서신동이나 서곡지구는

신도시로 불린다. 최근 전라북도 도청이 그리로 이주했다.

  구시가지의 경계를 이루는 다가교부터 전주천과 삼천의 합수지점까지, 거리의 가로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냇가에 축축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들과 높이 치솟아 하늘을 가리는 원시목(메타스퀘아)이

겨울 초까지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천 변 길을 달리자면 전설 같은 이야기가 그려지기도 한다. 서문 밖

기전여자대학과 어은골 사이의 마을 이름이 배마을((丹洞)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주천에 떠 있는

배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전주극장 서쪽 모퉁이에 옛날에 대공손수(大公孫樹)라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에 배를 매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전주천에서 뱃놀이하는

풍경을 상상해 보는 맛이라니. 꿈속의 그림이다.

은행나무골. 세월을 떠받치고 있는 명륜당의 대공손수들이 떨군 나무잎들이 마당을 노랗게 메웠으나

글 읽는 소리 온데 간데 없고 잎 잎에 새긴 옛 사람의 정신 어린다. 은행나무는 벌레도 타지 않아 썩지

않는 선비정신의 상징이다. 공손수라 하듯 어르신이 심어 자자손손 대까지 열매를 먹는달 만큼 오래 그

수명을 자랑한다. 회화나무 역시 마(魔)를 타지 않아 울타리에 심는다는 데 …. 전주시는 거리거리마다

은행나무요 회화나무다. 가로수들의 숲에 싸여 숨쉬는 전주사람들은 오늘날 그 정기를 얼마나 받고 그

정신을 얼마나 키워가고 있는 것인가.

  전주천에 뱃놀이 하던 옛사람들, 한벽당 앞 빨래터에서 빨래하던 옛 아낙네들, 다 어디로 가서 무얼

하는가. 배를 띄웠다는 그 물, 어디로 흘러갔을까. 계절은 변함 없이 다시오나 옛사람은 오지 않는다고

옛사람 노래 많이 하였지. 그 나무 잎 꼭 같은 것 같아 보일 뿐, 그 잎 아닌 줄 알 나이는 벌써 지났네.

나도 지난해의 내가 아닌 걸.

  가을이 다시 간다. 그 사람, 이 아름다운 전주를 안겨주고 떠난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한 이 가을.

노랑 은행나무 잎들 어리는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떠간다. 날이 저물 듯이 사랑도 저물고 가을도

저문다.

(2007년 11월)


 

9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우리나라 사람 그 누구라도 시(詩) 한 수를 말한다면 소월의 시를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저 운율이 좋아서 시어가 좋아 기억나는 시구이다.  한 번은 '꽃 피네'이고, 또 한 번의 반복은  

'꽃이 피네'이다. 보통은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하기가 쉬우리라. 순서대로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가  

아니라 "갈 봄 여름 없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절묘한 운율이며 시어의 나열인가. 오늘 새삼스럽게  

베란다에서 저 홀로 피고 지는 꽃들을 바라보자니 소월의 '산유화'가 가슴 저리게 울린다. 소월이  

젊어서 요절한 것으로 아는데, 민족의 암울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을까. 봄 꽃잎이  

떨어지듯 자신도 그렇게 일찍 갈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제야 '산유화'의 화자와 깊이 만나는 것 같다.  

  산과 합일되어 있는 꽃과 새를 보며 서정적 자아는 그들과의 거리를 느끼며 인간의 고독과 소외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시어로 인간의 원초적 고독감을 압축할 수가 있다니! 그냥  

피어있는 꽃의 존재가 좋아 산에서 우는 작은 새는 산과 하나 되어 같이 살아간다. 우리도 그렇게  

산이라는 영원성과 하나 되어 그냥 저절로 살 수 있으면 하는 간절함이 일어난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산에서나 거리에서라도 눈꽃 터널에 갇혀 보지도 못한 아쉬움에  

겨울 끝자락이라도 잡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허허로운 겨울의 벌판에서 넋 놓고 편하게만 보낸 것  

같아 미안했다. 역설이지만 겨울은 눈이 많이 와야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베란다의  

천리향은 2월 내내 진한 향기를 내며 말을 걸어왔다. 쓸쓸한 내 거실 유리창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온 집안을 감미롭게 감싸주었다. 이어서 춘란 세 분에서 꽃대가 올라왔다. 하루하루 쑥쑥 자랐다.  

치마 자락 속에 가녀린 몸매 감추고 다소곳이 고개 숙이며 올라왔다. 같이 볼 사람은 멀리 떠나서  

오지 않는데…. 그렇게 '저만치 혼자서' 스스로 피고 있었다. 내 마음은 아직 눈이라도 더 와야 할  

것 같은데 봄이 활짝 들어와 버렸다. 여름에 소담스럽게 피었던 바이올렛도 가을 지나 겨울에도  

꽃이 피었다가 또 진다. 해마다 그렇게 작은 베란다에서도 산에서처럼 갈 봄 여름 없이 꽃은 피건만.  

산이 아니어도 좋아, 그 좁은 화분에서 피는 꽃들이여! 철없이 피어주는 꽃들이여!  

 

  베란다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소월의 '산유화'를 다시 흥얼거려본다. 특별히 내가  

애송하는 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가끔 산기슭을 산책하거나 산에서 꽃을 만날 때면 생각나는  

시구라고나 할까. 봄 산에서 작은 풀꽃 하나를 발견할 때의 반가움이나, 홀로 여름 산에서 만난  

원추리 한 송이를 바라볼 때나, 또는 가을 산에서 구절초를 만날 때면 저절로 새어나오는 한 소절.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으면서도 언뜻 그 꽃을 잡을 듯이 손길이 내밀어지곤 하는 것이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전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유화'는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l 연에서는 꽃의 생성을, 4연에서 꽃의 소멸을 노래한다.  

2, 3연에서는 자연에서 느끼는 인간의 고독감을 나타낸다. 시적 화자의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자연의 순환하는 절대적 질서 속에서 화자는 개체로써 근원적 고독감에  

젖는다. 시어를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따라서 시적 효과를 잘 나타낼 수 있다는 좋은 예로 보인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시어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2연과 3연을 거꾸로 접는다면 시어들이 짝을  

겹칠 만큼 시행이 변조를 맞추는 것이 아닌가. 소월의 시가 운율과 의미가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오늘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천리향의 꽃잎이 떨어진다. 보랏빛 바이올렛도.  비좁은 뜰을 홀홀 떠난다. 같은 분에서 두  

번 째 핀 꽃은 처음 것보다 크기는 작지만 송이가 많이 핀다. 다시 핀다 해도 지금 가는 그 꽃이  

다시 오지는 않을 것임에. 사라지는 꽃들은 마음이 없는데....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2007년 3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