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 역사의 향기, 전주 경기전에서
2.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 탑이여
3. 선화공주는 누구일까
4. 백제의 르네쌍스를 그린다
5. 들꽃의 향기 따라 역사의 숨결 따라
6. 죽막동, 수성당 앞에서 (보타락가산)
7. 새망게징게
8. 온고을, 은행나무골
9. 산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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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의 향기 따라
산성으로 오르는 비탈길 가에는 나팔꽃잎에 내려앉은 진분홍빛 이슬이 아직 반짝이고 있었다. 해발 47미터라는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니 사방으로 확 트인 들녘이 펼쳐진다. 가을걷이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벌판에 널브러져 있는 생명이 남긴 허물에 농민들의 잔상이 서려있는 듯하다.
이곳은 전주와 김제, 부안, 고부, 태인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로도 알맞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이 지방 기념물제 31호, 사적 409호로 부안 백산면 용계리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의 백산봉기터이다. 1894년 3월 농민군이 이곳에 집결하여 군대로써의 대오를 갖추고 혁명의 시작을 널리 알린 역사적인 곳이다. 여기에서 공포한 농민군의 창의문(倡義文)으로 농민군봉기의 소식이 전해져서 수많은 농민들이 흰옷에 죽창을 들고 백산으로 모여들었으니 과히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 아니었겠는가. 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니 그 숙식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과연 110년 전에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솥가마를 대신하여 소가죽을 벗겨서 그릇 형태로 오므리고 겨우 밥을 익히기도 했다니, 오늘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그것이 짐승 밥이었을까 사람 밥이랄 수 있을까 싶게 참담한 심정이 밀려든다.
동진강이 주변을 감싸는 이 야산은 윗 부분을 테를 두른 것처럼 쌓은 테뫼 식 산성이라 한다. 키 큰 노란 들꽃과 억새 무리들이 웬 지 농민들의 죽창처럼, 하늘을 찌르는 깃발처럼 보이고, 피맺힌 농민군의 절규가 하늘을 울리고 땅 속으로 숨어들어 나팔꽃으로 피게 되었던가 싶다.
아직 아침 이슬이 깨지 않은 산성을떠나 비장한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가 서있는 둑에 내려서니 양옆으로 낱알을 다 내어준 볏짚이 끝없이 줄을 지어 편안히 누워 있지 않은가. 할 일을 다 해내고 저렇게 누운 볏짚만큼도 농민들의 넋은 편치 않았으리라.
갑오 년 당시 고부군수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이미 농민들이 쌓아 사용하던 민보(民洑)가 있었음에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 하류에 보(洑)를 쌓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였다. 농민들은 고부관아에 물세감면을 진정하였으나 강제로 쫓겨났다. 군수의 폭정과 수탈을 참다못해 전봉준의 지휘 하에 천여 명의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부셔버렸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였다. 만석보로 인하여 후에 만석을 수탈 당하게 되는 생산의 의미이기도 하면서 수탈의 상징을 함께 지닌 이 터. 수백 만 번 땅을 찧어도 시원치 않을 기막힌 농민들의 울분을 이 들녘은 기억하고 있을까? 가을걷이하는 트랙터 소리만이 빈 하늘을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전봉준 장군의 고택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중얼거려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마침내 녹두꽃이 떨어지던 날에청포장수들의 구슬픈 노랫가락은 천지를 울렸으리라. 들녘에서 바람결에 스쳐 대는 풀잎 소리마저 잦아드는 농민들의 한숨인 듯 자꾸만 뒤돌아보아진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전주역사박물관이 올해로 아홉 번째가 되는 역사기행을 개최하였다. 이번 역사기행은 전국적인 혁명으로 확대되는 가장 핵심적인 곳인 전북지역 유적지의 답사로 이루어졌다. 버스 7대에 나뉘어 탄 영호남의 대학생들이 함께 어우러진 하나 되는 마음의 대 행진에 동참하여 우리의 근대 역사에 대하여 다시 조명해보았다. 이로 인하여 비어 가는 가을 들녘에 희망의 녹두꽃 씨앗이 다시 뿌려지는 기분이다.
역사의 숨결 따라
1 황토현 전적지.
황토현은 전북 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와 도계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35.5미터의 황토로 이루어진 언덕이다.
황토현(黃土峴)의 팻말을 지날 때마다 일어나는 의문을 이제야 풀게 된다. 황토현 보다는 황토재라 부르니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낮은 구릉지인 이곳이 전주의 관군을 맞아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전적지다. 당시 전주부의 관군이 쳐들어왔을 때 세 봉우리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은 한 봉만 남기고 나머지 두 곳의 불을 끄고 관군을 유인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주변의 농민세력이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다. 이를 기념하여 후에 기념탑이 세워졌는데 농민의 혁명정신은 새 정권이 바뀔 될 때마다 그들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되어 기념탑과 기념관이 지어지는 등 시대적 변화 속에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곳의 탑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한다. 전봉준 동상과 사당, 기념관, 교육관, 광장, 주차장등이 갖추어져 있다. 기존의 기념관과는 별도로 대규모 기념관이 세워져 2004년 5월에 이미 개관하였다. 동학농민혁명사와 더불어 세계의 혁명사도 함께 읽으며 우리의 근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다.
2 고부관아터와 사발통문발견지
조선말엽 고부는 전라도에서 전주, 남원 다음으로 컸던 고을이었다. 지금은 산업화에 밀려 하나의 면소재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낮은 구릉으로 이어진 밭들이 많아 풍성한 밭 생산물로 살기 좋은 마을로 보인다. 수탈의 근거지였던 고부관아 터는 흔적이 없고 그 자리에 고부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옆에 향교가 옛날의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듯 처량한 모습으로 비쳐 보였다.
농민군은 1892년 4월에 부임한 고부군수의 갖은 수탈과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고부군수를 죽이고 전주감영을 함락시켜 서울로 올라가자는 혁명적인 모의를 결의하고 호소문을 썼다. 이런 내용을 담은 사발통문. 호소문을 쓰고 나서 그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관계자의 이름을 원둘레를 따라 적은 통문이다. 시대를 초월한 첨단의 결의문이 아닐 수 없어 사무치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신중리 주산마을에서 사발통문이 발견된 것을 기념하여 1969년 4월에‘동학혁명모의탑’을 세웠으며, 탑에는 사발통문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또한 주산마을에는 어느 조각가에 의하여 조성된 ‘무명농민군위령탑'이 있다. 기행단의영남대학생은 초록색 수건을, 전북인은 황토색 수건을 들고 영령들의 넋에 머리를 조아려 묵념을 하였다.
고부농민봉기를 기점으로 1894년 3월에 백산에 집결하여 군대를 조직한 농민군은 이제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시작하였다. 황토재에서 대승을 거두고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부성을 점령한 것은 국가를 점령한 것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도 되었으리라.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 넘겨졌다. 마침내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는 구국의 일념에 불타올라 2차로 삼례에 집결하게 되어 공주 우금치까지 올라갔다. 일본의 조총에 무참한 패배를 당하게 되니 일 년에 걸친 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20여 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늦가을 추위에 처참하게 쓰러졌다. 일부 살아남은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없이 전북 일대의 산간지방에 흩어졌다. 가족들과의 교통도 할 수 없게 되고 암흑 속에 가려져 110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유족들과 그들의 넋인 들 저 들판의 볏짚보다 못한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에는 삼례봉기역사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름 없는 모든 농민들의 넋을 기릴 수 있는 하나되는 '하늘’이라는 조각이 설치되어 영상에서나마 그들의 넋과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동학농민혁명사상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 반봉건 민주화와 반외세 자주화였다. 19세기 말 우리의 외세는 러시아, 미국, 중국, 일본이었다. 현재도 진행 중인 혁명은 여전히 구질서의 기득권을 없애고 외세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주화를 이루자는 것이지 싶다.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역사의 아픔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기에 …….
우리나라 근대사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둘러 본 이번 답사는 어떻게 그 정신을 살려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다. 이제 ‘동학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으며 젊은 학생들도‘동학농민혁명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농민군들은 110년 동안 밝은 햇살을 받지 못한 채 반란군으로 몰렸으며, 일제 시는 반역 사상주의자로, 해방 후는 빨갱이로 몰렸다. 이제야 그 명예를 회복할 시기를 만난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 수많은 혁명이 있었지만 오늘까지 인류는 행복한 사회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총칼로 이루는 혁명은 영원히 완성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기에, 혁명의 악순환을 거듭하지 않을 'Z'* 혁명이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이기에 농민의 정신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된다. 그 정신을 살려나가는 데 마음을 모아, 개개인이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사고(思考)의 혁명으로 전체를 보는 안목을 넓혀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집단 이기주의나 국가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짓밟혀도 솟아나는 가을 들판의 들풀처럼 농민혁명의 저항정신도 우리 안에 계속 피어나 맑고 그윽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2004년 11월)
*‘Z' 알파벳트의 끝 자로 ‘마지막’이란 뜻
6
우리의 보타락가산
-죽막동, 수성당(水聖堂) 앞에서-
바람결에 실려 오는 갯벌 내음은 애잔한 서러움 같았다. 해안 사람들의 삶의 질곡이 풍겨오는 듯도 했다. 해안의 반대편의 산에는 초록 하늘에 뜬 하얀 별 같은 찔레꽃들이 순박한 시골 색시들처럼 무리 지어 나타나곤 했다.
수성당이란 팻말만 보고 걸었다. 바닷가에 웬 성당이라니! 묘했다. 그곳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제사유적이 발굴된 죽막동이었다. 북으로는 동진강구, 남으로는 줄포만을 끼고 있고, 서로는 위도와 상왕등대·하왕등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인근 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적벽강 여울골 절벽 위에 있는 지방유형문화재 제 58호 수성당은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를 모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죽막동제사유적은 바로 이곳 수성당 옆에 있었다고 한다.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수성당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이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이때 출토된 유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제사유물들이라고 한다. 이들 출토품에는 중국 청자편이나 석제 모조품 등이 외국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통일신라 토기, 고려, 조선시대의 도자기가 출토되어 이 일대가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계속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삼국시대 유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시기에 제사행위가 가장 집중적으로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바다가 보이는 여울 골은 경관이 아주 좋았다. 물살이 세어서 눈을 감았다가는 곧장 바다로 떨어질 것 같았다. 절벽 뒤로는 산대죽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많아서 죽막이라고 했던가 싶다.
수성당 앞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위도와 비안도라는 섬이 있다는데 보이지 않았고 등대도 보이지 않았다. 개양할미의 여덟 딸을 인근 섬에 각각 하나씩 시집보내어 주변의 바다를 돌보게 했다는 전설로 보아 토착세력에 의해 해상로를 통제하며 해상교통과 관련된 제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출렁이는 바닷물을 보자니 통일 신라 시절 해상왕이었던 장보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옛날 항해술도 아직 발달되지 못했을 때에 배들은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지점을 표지 삼으면서 항해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항해에는 바람과 해류 등의 해상 여건을 잘 분석하여 해상 항로을 추정했다고 한다. 바람의 변화는 바람의 방향에 의존하는 범선의 연안 항해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계절풍과 무역풍등을 잘 활용하였을 줄로 짐작된다. 드라마 왕건에서도 왕건이 해상에서의 승산 없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원인이 바람의 방향이었지 않은가. 항해를 하다가 조류가 심하고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컸던 이 곳에서 해신에게 풍어와 항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으리라.
수성당은 중국의 보타락가산처럼 우리나라의 보타락가산 같은 지도모를 일이다. 보타락가산은 남인도의 엄곡(嚴谷)에 있는 바다에 면한 산으로 수많은 성현들이 살고 있고 온갖 보배로 꾸며져 있으며 지극히 청정한 꽃과 과일이 풍부한 숲이 우거진 데다가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이 연못 옆 금강보석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보살이 바로 관음보살로서, 그렇게 앉아 중생을 이롭게 하며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설법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음보살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라지만, 거의 여자 형상으로 보이니 개양할미로 말하자면 우리의 여성신(女性神)인 관음보살이지 않은가.
삼국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사가 많이 행해졌다는 것으로 본다면 이곳은 백제지역이었다. 백제야말로 해상교통이 활발하여 중국과의 교류 뿐 아니라 일본과의 밀접한 관계를 했고 황해와 대한해협에서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한 해양국가였다. 해양을 군사적 전략으로 이용하여 중국과 해상교역을 하였다. 특히 4세기 후반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오늘날 해남반도 일대와 가야지역의 거점을 확보하고,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고대의 동아시아 국제 해양교역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제사유적의 발굴로 인하여 다가오는 서해안 시대에 재현할 수 있는 어떤 문화적 컨텐츠가 없을까. 전주가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만큼 새만금이 서해안의 새로운 요충지역이 되어 해양국이었던 백제의 르네쌍스를 재현 해봄 직하지 않을까 하는 염원을 해본다. 견훤의 이루지 못한 꿈을 후손인 전북인들이 이어갈 수 있다면 나라를 위해서도 그보다 더 한 충효가 어디 있겠는가.
(200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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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망게징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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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을, 은행나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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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다시 왔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간 사람은 영 오지 않는다. 벌써 일 년이 되었는데.... "아아 가을은/ 이처럼 마구 하 아름씩 퍼부어 오는 거냐/ 저물도록 낙엽은 지고/ 우수수 낙엽을 몰고 온 /가을 비 뿌리느니 …" "진정 가을은/ 부산히 부스러져 다니는 거냐/ 불고 불리며/ 바람 속에 머리 풀고 다니는 거냐/ 여윈 손가락으로/ 가슴을 뒤져/ 무엇을 더 버리라는 거냐" 김남조 시인의 심정, 나와 같느니…
지난해 가을이 익어 가는 그 길을 날마다 다녔다. 그의 병실을 지키기 위해. 초록색이던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랗게 물들고 느티나무 잎들도 앞 다투듯 서로 다른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겨자빛 들녘은 어느새 비기 시작하고 투명해지는 나뭇잎의 빛깔이 선연해지고 있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하자 조바심이 일었다. 저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날을 맞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이 착잡하였다. 병실의 창가에서 전주시가지의 은행나무 길 풍경을 내려다보곤 했다. 누군가 창밖에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잎새를 그려줄 화가는 없을까 하고.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의 품안에 /눈감는 것". 가로수들이 품었던 가을을 다 풀어헤칠 때쯤 그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세 발 자전거를 탈 때부터 걸어 다녔다 는 전주시라고 다른 도시로 가기 싫어했던 그였다. 학업 때문에 몇 년을 비운 것 외에는 거의 전주에서 살았던 그였기에 그는 경상도 태생인 나에게는 전주 자체였다. 전주 이씨의 사대부집 후손으로써 맹목적인 자부심만 넉넉한 그였다. 그가 떠난 전주시는 텅 빈 것 같았다. 하늘나라에 그이의 입적 신고를 하던 날, 시내는 온통 샛노란 은행나무 숲에 싸여 있었다. 해마다 보았건만 그 거리들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내 가슴으로 들어찼다. 새삼스러이 메어터질 듯 온 몸이 뻐근했다. "어느 한 번인들 / 흡족히 바라나 보았으리/ 매양 보고 짐으로 눈 아프던 내 사랑에/ 이별은 오고/ 이별만이 길었더니라"
올 가을, 나도 몸살치료를 위해 그 길을 자주 다니게 되었다. 멀리 가을 구경을 굳이 가지 않더라도 전주시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가을 정취는 넘쳐났다. 전주천은 상류인 상관면 신리의 대흥천이 북으로 흐르다가 한벽당 앞에서 전주천이 되어 서쪽으로 흐른다. 천변따라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양쪽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좁은목 약수터부터 한껏 자태를 자랑하는 느티나무 군들로 바뀐다. 싸전다리를 지나 다가교까지 울긋불긋 화려한 가을색을 자랑한다. 둑 아래 냇물 가는 사람 키를 덮는 억새풀꽃들이 흐느끼듯 바람결에 서걱대며 은발을 반짝인다. 한벽청연을 본 적이 없지만, 처음 전주에 왔을 때 한벽당 아래 빨래터에 따라 가 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으뜸 갔던 전주십경 중의 하나가 새로 난 도로 때문에 가리어졌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곳이다. 그 훤칠한 길을 지나면 전통문화센타 뒤쪽 하늘에 노란 물감이 점점이 박혀 있다. 가을이면 그 은행나무들을 보고자 누구나 한 번쯤 전주향교에 들리게 마련이다.
전주시는 한벽당 뒷산인 승암산 쪽을 후백제의 견훤의 땅으로 일컬으며, 오목대부터 향교와 콩꼬투리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회화나무들이 줄 서 있는 태조로, 한옥마을과 경기전, 객사부근까지 이씨 조선의 땅으로 불리 울 수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 전주의 경쟁력을 부각시키려면 견훤의 이미지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다가교를 지나 선너머, 구이에서 흘러와서 삼천 천을 흐르는 서신동이나 서곡지구는 신도시로 불린다. 최근 전라북도 도청이 그리로 이주했다. 구시가지의 경계를 이루는 다가교부터 전주천과 삼천의 합수지점까지, 거리의 가로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냇가에 축축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들과 높이 치솟아 하늘을 가리는 원시목(메타스퀘아)이 겨울 초까지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천 변 길을 달리자면 전설 같은 이야기가 그려지기도 한다. 서문 밖 기전여자대학과 어은골 사이의 마을 이름이 배마을((丹洞)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주천에 떠 있는 배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전주극장 서쪽 모퉁이에 옛날에 대공손수(大公孫樹)라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에 배를 매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전주천에서 뱃놀이하는 풍경을 상상해 보는 맛이라니. 꿈속의 그림이다. 은행나무골. 세월을 떠받치고 있는 명륜당의 대공손수들이 떨군 나무잎들이 마당을 노랗게 메웠으나 글 읽는 소리 온데 간데 없고 잎 잎에 새긴 옛 사람의 정신 어린다. 은행나무는 벌레도 타지 않아 썩지 않는 선비정신의 상징이다. 공손수라 하듯 어르신이 심어 자자손손 대까지 열매를 먹는달 만큼 오래 그 수명을 자랑한다. 회화나무 역시 마(魔)를 타지 않아 울타리에 심는다는 데 …. 전주시는 거리거리마다 은행나무요 회화나무다. 가로수들의 숲에 싸여 숨쉬는 전주사람들은 오늘날 그 정기를 얼마나 받고 그 정신을 얼마나 키워가고 있는 것인가. 전주천에 뱃놀이 하던 옛사람들, 한벽당 앞 빨래터에서 빨래하던 옛 아낙네들, 다 어디로 가서 무얼 하는가. 배를 띄웠다는 그 물, 어디로 흘러갔을까. 계절은 변함 없이 다시오나 옛사람은 오지 않는다고 옛사람 노래 많이 하였지. 그 나무 잎 꼭 같은 것 같아 보일 뿐, 그 잎 아닌 줄 알 나이는 벌써 지났네. 나도 지난해의 내가 아닌 걸. 가을이 다시 간다. 그 사람, 이 아름다운 전주를 안겨주고 떠난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한 이 가을. 노랑 은행나무 잎들 어리는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떠간다. 날이 저물 듯이 사랑도 저물고 가을도 저문다.
(2007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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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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