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 에세이 2집

에세이 2집 3부, 첫눈 오는 길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7. 23:00

 

 

3부

1. 첫눈 오는 길

2.  연화사와 동백꽃

3.  충무 김밥

4. 영산으로 가는 길

5. 서울의 봄 2007

6. 천년의 꿈

7.  감이 익을 무렵

8.  침묵의 강

9.  길 잃는 즐거움

10.  겨울 들녘








1

첫눈 오는 길



  아침 창 밖이 환하다. 가을이 터 놓은 길로 밤새도록 사분사분 내려오신 첫눈. 바다 밑의 물고기들의 술렁임처럼 첫눈 구경을 나선다.

  가을이 감성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이성(理性)의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나무도, 길가의 너저분한 풀 한 포기도 묵묵히 시련을 견디다 오늘처럼 눈꽃을 피울 때면 거룩한 은총이 된다.

순창군 동계면의 장구목. 신이 빚은 조각품들이 깔려 있는 강기슭.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제 살을 깎아 빚은 얼굴들을 내놓았다. 얼마나 많은 세월의 강을 흘려보냈으면 저리도 매끄러운 피부 결을 만들어 내었을까. 강물이 많이 빠져나간 강기슭은 흘러간 물소리에 어우러졌던 이 마을의 전설이 새겨진 바위들로 물결을 이룬다. 내 스스로 우물바위라고 명명하고 어느 가을 날 나르시스의 꿈을 보았던 요강바위 속은 메말랐다. 그윽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빈 바위 구멍 안을 휘돌아 울린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각가지 조각품의 결 위로, 흐르는 물살 위로 날아 내리는 눈발들을 지켜본다. 눈발들은 이 첫 만남을 위하여 얼마나 설레였을까. 그 머나 먼 나라 어디쯤에서 눈송이 되어 온 걸까. 그들의 기착지가 이곳 강으로 흐르는 이 물살일 것을 알았을지. 나뭇가지에 모여서 나무의 이성을 꽃피우리라고 약속이나 했을지. 차가운 바위에 떨어지는 순간에 하늘 길의 사연을 새기며 사라져야 한다는 걸 알았을까. 물살과 한 순간의 짜릿한 만남으로 한 살이 되기 위해 그 먼 길을 날아 왔다. 갈색의 솜털 입은 산 너머에서 산 벚꽃 무리 진 봄날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수놓는다. 물 속에 녹아버린 눈발들은 마땅히 올 곳에 돌아왔다고 안도의 숨을 쉴까. 아! 모를 일이다. 그들의 따뜻한 집은 어디인가. 눈발을 만나고 있는 나 또한 이 순간 이곳에서 첫눈을 맞이하리라고는 어제는 미처 몰랐으니…….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잠시도 주저 없이 꾸준히 내린다. 마냥 내리는 눈이 좋다. 디카는 가다가 근사한 곳의 설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 흐르는 물소리도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도 담고 싶다. 돌아갈 길의 걱정도 하지 않은 채…….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은 재미없어 새 길을 찾아든다. 어느 듯 어둠이 하얀 세상을 감싸버렸다. 자동차의 불빛을 배경으로 내리는 눈발도 정답다. 시간은 아직 초저녁인데 갈 길이 앞뒤로 막혀버린다.

  지난 경험들은 아스라한 추억의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마른 단풍잎 같은 것. 지나고 보면 첫사랑의 설렘 등이 까슬한 상처로 남아 아련한 습작이 되기도 했다. 첫사랑은 또 다른 첫사랑을 불러오는데, 연습도 없이 단 한 번에 대설로 찾아온 첫눈이다. 사상 최대로 첫눈이 이렇게 많이 온 것도 처음이란다. 더 이상 눈다운 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단번에 초고속으로 와서 풍성한 설경을 한꺼번에 다 안겨주고 폭설이 되어 당혹스런 뒷면을 여지없이 드러내리라고 애초에 계획했던 일이었던가.


  순창 근처에서 전주까지는 38키로밖에 안 남았는데 얼어붙은 길바닥에 갇혔다. 자동차 안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첫 경험이다. 27번 30번 국도가 막히고 호남고속도로가 통제라는 뉴스 속보다. 겨우 17번 국도로 나왔는데 임실에서 전주까지 주차장이 되어버린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눈꽃을 실어 나르기를 몇 시간이다. 벗은 나무에 달랑거리는 낙엽처럼 한 장  남은 달력도 기울고 있는 즈음 누구나 새해를 준비하는 자세를 이야기한다. '내 여생(餘生)에의 첫 날' 새해가 오면 그 날부터 술도 담배도 끊고 좀 더 좋은 계획을 세운단다. 그러나 막상 새해 첫 날이 되어도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럼 음력 설날부터 하면 된다. 그도 못하면 회교력의 시작인 7월부터 시작한다. 그도 또 못하면 유태력의 시작인 시월부터……. 그도 저도 아니면 노년기의 길목에 선 오늘은 첫눈 온 날. 내 여생의 첫 날이라 하잔다.  모든 날은 오직 첫날, 모든 만남은 첫 만남의 연속이었다. 이생에 못다 이룬 꿈은 저승으로 이체되어서 계속 이어지리라. 아예 꿈꿀 시간도 없이 그날그날 좋은 날이면 그냥 그대로일 뿐, 뿐, 뿐.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전주천 한벽루 앞을 지난다.  인적도 드문 텅 빈 거리, 옛 임업시험장이었던 곳을 넓힌 큰 도로 면이 하얀 도포를 깔은 것 같다. 천변의 가로등이 깜박이는 인도(人道)는 순결한 적요의 아름다움이 깔려 있는 오솔길이다. 오늘은 한벽청설(寒壁淸雪)이랄까. 한밤중에 밤거리의 설경에 들어서 첫눈에 첫 발자국을 찍는 상큼한 경험을 언제 또 가질 것인가. 여생이 아니라 진정한 생의 첫 날인 영원한 첫 날로 접어두자.

(2005년 12월 4일)








2

연화사와 동백꽃


                                 


  바다는 언제나 영원한 꿈과 자유의 날개를 달아준다. 갈매기들의 배웅을 받은 유람선은 바닷물을 뒤집으며 세차게 하얀 포말을 헤치고 나아갔다. 바다는 알 수 없는 부피만큼 속내도 알 수 없는 위엄의 빛깔로 다가와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우리나라 남녘 해안 도시인 통영시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미륵도에서 남으로 뱃길 40여 분이 걸리는 연화도.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연산군의 억불 정책으로 한양에서 이곳 섬으로 피신하여온 스님이 부처님 대신으로 전래석(둥근돌)을 모셔 놓고 예불을 올리며 수행하다가 깨쳐서 도인이 되셨다. 도인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나를 바다에 수장시켜 달라'고 고하여 제자들과 섬 주민들이 스님을 바다에 수장하니 그곳에서 커다란 연꽃이 떠올라와 승천하였다. 북쪽 바다에서 본 섬의 모습이 연꽃잎을 닮았다 해서 그 때부터 섬 이름을 연화도 라 하였고 돌아가신 스님도 연꽃도인이라 하였다." 유람선 안내자의 구수한 입담으로 전해 듣는 연화도의 전설은 바다에 핀 연꽃을 연상하게 했다. 


   내 인생 등정의 베이스 캠프는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바닷물에 씻기라도 하듯 부산의 송도 앞 바다를 매일 걸어서 다니기도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까맣게 잊혀진 내 스무 살 시절의 아지랑이 같은 꿈과 낭만과 사랑이 남해 바다 깊숙이 녹아 있었던 것일까. 갈매기가 바닷물에 내려꽂힐 때마다 뿌연 안개에 서린 추억의 꼬리가 한 가닥씩 낚이는 것 같았다.  잠시도 가만히 멈추지 못하는 거센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아련한 추억의 영상들도 출렁이다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먼 바다 한 가운데서 유유히 유영을 즐기고 있는 갈매기들이 비행솜씨를 뽐내는 듯 사뭇 높이 날았다 수면으로 내려왔다, 서로 번갈아 가며 물장구치는 곡예를 펼쳐주었다. 기암괴석이 둘러쳐진 촛대바위, 사 형제 섬, 멀리 뿌옇게 보이는 고래바위 섬, 가까이는 구멍 섬 등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바다 위에 아름다운 절경이 연출되었다. 뱃머리에서 부서지는 물보라를 맞으며 유람선의 난간에 넋을 잃고 선 여인네의 머리칼이 하염없이 바람에 휘날렸다.

  연꽃 섬의 선착장에 배가 다가가니 기다렸다는 듯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 소리를 내면서 우르르 반겨주었다. 갈매기는 통영의 시조(市鳥)다. 연꽃도인의 원력이 서려있는 연화사 오르는 길은 들꽃들이 길 가에서 하늘하늘 손짓하고 있었다. 자주 빛 콩꽃, 언덕의 노란 유채꽃, 하얀 산딸기 꽃들이 보라 빛 꽃 잔디와 조화로운 향기를 뿜고 있었다.


  동백꽃은 절 마당에서도 선홍빛 핏물을 뚝뚝 흘리듯 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젊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떨어진 동백꽃 송이를 장수의 베어진 머리로 비유했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장수의 머리뿐이겠는가. 이 순신 장군의 구국 충절이 살아 있는 한산도 앞 바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꽃잎 떨어지듯 사라진 젊은 혼들의 넋이 환생하여 동백꽃으로 피어났을까. 동란의

후유증으로 멍든 가슴을 부여안고 살았던 어머니의 한숨이 아직도 이명처럼 가시지 않는다. 어찌 나만이 안고 있는 애잔함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수난의 핏자국을 저 동백꽃은 알리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무참히 스러져간 봉오리들의 넋이 그 핏물 응고되어 따뜻한 남녘 마을마다 동백꽃으로 피나보다. 지금도 지구의 한 편에서 허무하게 봉오리 째 떨어진 넋이 얼마며 핀 채로 떨어지는 혼들은 그 얼마이겠는가. 인류사에 상상할 수도 없는 피다만 꽃들, 동백꽃이 떨어지듯 그 핏물 뚝! 뚝! 처절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는 듯도 했다.

   한려수도를 내려다보는 통영시의 길모퉁이마다 가로수의 꽃으로 피어나는 동백꽃은 젊음을 채 불태우지 못하고 떨어진 넋이런가. 어찌하여 통영시의 상징이 왜 동백나무인지 짐작할 만 하다. 그래서 충렬사 마당의 우람한 동백나무는 그 넋들의 기원을 알리고자 그리도 긴 세월을 자라고 또 자라고 있는지.

   연꽃도인이 이 섬 한가운데서 도를 깨친 원력으로 연화사가 창건된 것. 이 또한 격전의 역사를 간직한 그 바다를 달래기 위함이었던가. 기원의 힘이 아직 모자라 세계로 퍼져나가지 못하여서일까. 폭염에 불타던 이라크 전에 희생된 생명은 지금도 울부짖는다. 대웅전에 들어서 삼배를 올렸다.

  부드러운 낙조가 내려앉고 출렁이던 바다도 조용해진다. 하루의 눈부신 봄나들이는 또 하나의 추억의 꽃이 되어 상념의 날개를 타고 그 섬을 찾으리라.

(2003년 4월 25일)


























3

충무 김밥


  한 때는, 서울 여의도에서 몇 시간이라도 달려가서 먹는다는 김밥. 여전히 충무김밥이라 불러야 더 정겹게 들린다. 통영시의 옛 이름이 충무였지만. 말로만 듣던 그 김밥을 통영시 달아공원의 수산과학관 앞 벤치에서 먹었다. 바다 내음 물씬 맡으며 먹은 김밥은 어떤 맛이라 할까. 우선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냥 먹기 시작했다.

김밥은 속을 넣지 않은 것이 특색이었다. 손가락 길이만큼 길고 두께는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 만 했다. 맨 밥을 생김에 둘둘 말아서 썬 것이었다. 똑같은 크기의 김밥을 나란히 모아서 한 덩이로 싼 것을 펼치면 2 명이 한 조가 되어 먹을 수 있었다. 맨 김밥에 큼직한 무김치와 오징어무침을 찬으로 먹었다. 무김치는 무를 통째로 엇비슷하게 썰어서 김치 양념에 버무려 알맞게 익은 것이었다. 김치 한 개를 집어 한 입 베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해산물 고장답게 삶은 오징어무침도 부드러워서 속이 없는 김밥에 잘 어울렸다. 무김치와 오징어무침을 따로 따로 비닐 보자기에 싸서 묶은 것을 그대로 펼쳐서 먹을 수 있어 간편했다. 길에서 먹는 점심으로는 운치마저 더해주는 듯했다. 시래기 국까지 곁들여서 목마름을 달래주기도 한 묘한 음식의 궁합이었다. 처음에는 맹숭맹숭한 맛 같기도 했지만 먹을수록 밥도 쫀득쫀득한 것에 싱싱한 김 맛이 어우러져 감칠맛이 있었다.


   통영시는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해안은 굴곡이 심하고 간만의 차가 적으며, 남쪽으로 다도해를 안고 있었다. 통영의 한산도에서 삼천포와 남해안을 이어 전라도의 여수 오동도까지 이어지는 잔잔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물길을 일러 한려수도(閑麗水道)라 했다.

  통영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는데 하나는 한려수도를 아름답게 비추는 태양이요, 또 하나는 이 순신 장군의 정신이 빛내는 태양이란다. 그로 인하여 한국의 나폴리로 알려질 만큼 인기 있는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동해안의 끝과 남해의 시작인 부산에서 전라도 여수까지 잇는 뱃길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곳이 통영시이다.

  옛날에는 부산에서 그 한려수도를 거쳐 여수까지 수많은 뱃사람들이 어업을 위하여 그 뱃길을 다녔다. 도시와 농촌에서는 소고기 등을 고기라 하지만 통영에서는 생선을 일컬어 모두 고기라고 부른다. 그 정도로 고기잡이가 성하다는 말인 것 같았다.


  뱃길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챙겨 먹을 수 없었던 어부들이 부산과 여수의 중간 지점인 통영에서 급히 요기할 수 있었던 것이 통영에서의 할매 김밥이었다. 먹고살기 바빴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었던 할매 김밥!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이미지 중심의 나들이 김밥으로 각광을 받을 줄은 예전엔 미리 생각할 수도 없었으리라. 바삐 먹을 수 있어야 했고 최소한의 실질적인 영양을 고려했음 직했다. 그래서인지 씹을수록 그 수수하고 깔끔한 맛이 정겹게 느껴졌다. 아마도 평생을 통영의 시장 터에서 보냈던 내 고모님도 점심때면 그 김밥을 수 없이 잡수셨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김밥 맛이 더욱 진했다. 때때로 그 김밥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눈물 섞인 김밥이기도 했을 것이다. 뱃사람들이 고기 잡던 비린내 나는 손으로 성큼 성큼 집어먹기에 안성맞춤인 김밥이었을 것 같다.


  통영이 관광도시라고는 하지만 실제 관광수입보다는 예로부터 미륵도와 섬 등지에서 어부들이 잡는 고기들로 경제를 움직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해역은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남해의 황금어장인 동시에 수온과 수질이 좋다. 사방의 바다 한 가운데 아름답게 떠 있는 많은 부표들이 양식수산업의 보고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부근의 상당한 해역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 FDA의 공인을 받은 청정해역(淸淨海域)이라 한다. 수온 또한 알맞아 각종 어류(魚類)·굴·피조개·우렁쉥이 등 한국양식수산물의 대부분이 이 바다에서 생산되고 있다.

 

  수산과학관 앞에는 옛날 고깃배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 있는 통영의 전래 배인  '통구밍이' 란 옛 이름이 시선을 붙잡았다. 손으로 어루만져보자니 김밥을 싸 가지고 부부가 단둘이서 고기잡이 나갔을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되었다. 석양을 등에 지고 노를 저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던 노어부들의 고달팠던 삶이 오늘의 여행객에게는 낭만적인 풍경으로 연상된다. 평화롭기만 해 보이던 어촌은 잡는 고기잡이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바뀌었다. 고속엔진을 단 어선으로 먼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도 옛날 같은 만선의 기쁨을 맛보기엔 어려움이 크단다. 수요와 공급의 어긋남과 밀려오는 값싼 중국의 활어 때문에 가두리 양식업자들의 한 숨도 날로 깊어만 간다. 기계 배들의 엔진 소리 때문에 고기들은 먼바다로 피난을 가야하고, 어부들은 더 멀리 고기를 잡으러 나가야 한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이제 이 노래도 전설로만 들리는 노래일 뿐이다.


  하루의 일정으로는 너무 먼 길이었을까?  느긋한 점심을 챙겨 먹을 수 없는 빡빡한 여정의 점심으로 충무김밥은 얼마나 제격이었는가.  옛날의 어부들이 뱃길에서 급한 허기를 달랬던 그 김밥을 우리는 하루의 관광일정 사이에 먹었다는 것이 어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으랴. 충무김밥은 풍속도가 바뀌어 훗날에는 구경하기 바쁜 관광객들이 먹었던 점심으로 기억될 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오던 캄캄한 밤, 제대로 저녁도 챙겨 먹을 수도 없는 시간, 휴게소에서 먹었던 남겨온 그 김밥 맛이야말로 정말 꿀맛이었다. 몇 시간을 달려가서라도 그 바다 가에서 충무김밥을 다시 먹고 싶다.  (2003. 4. 25)

















4

영산(靈山 )으로 가는 길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봄을 재촉하는 듯, 어제의 눈이 오늘은 봄기운을 타고 내린다. 마을버스는 비를 가르며 달리고 있다. 전주 시가지를 벗어나자 고향 들녘이 비를 맞으며 긴 잠에서 깨어난다. 먼 산의 잔설도 아쉬운 듯 손짓하며 사라진다. 시냇물도 덩달아 졸졸졸졸 노래를 부른다.

  옛날에는 겨울이면 진안은 갈 수 없는 곳으로 알았었다. 마을버스는 옛길로 모래 재를 넘고 있다. 새로 난 길로 몇 번 마이산을 둘러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마흔 아홉 고개 길의 마루쯤 되었을까? 내가 마치 산꼭대기를 곡예 하듯 날고 있는 것 같다. 은하철도 999를 타고 배움길 나들이를 가는 것 같다고 개구쟁이 소녀(?)는 말했다. 정말 그랬다. 문우들의 과외 공부인 셈이다. 알프스의 몽블랑,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등의 영상들이 눈앞의 산꼭대기 위에 떠올려졌다. 차창 밖을 내려다보니 바로 아래에 계단식의 길이 나 있었다. 일 층 길, 이 층 길, 우리가 탄 버스는 삼 층 길을 통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저 길은 어떤 길이죠?”하고 무심코 앞사람에게 물었다. “우리가 돌아 온 길이잖아요?” 아, 그렇구나! 버스가 꼬불꼬불 산허리를 감돌아 지나온 길이었다. 잠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잊고 있었다.

  모래재 쉼터를 지나자 백설의 사막이 펼쳐진다. 작은 호수도 겉면이 아직 얼어 있다. 그곳이 높은 곳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짚으로 덮인 밭 가래가 가지런한 맵시로 긴 잠을 자고 있다. 지난 가을 씨뿌리기했다는 인삼밭이 드문드문 보인다. 개울의 얼음장 녹아내리는 물소리에 풀잎들도 소스라치듯 기지개를 켠다.

  마이산 주차장 가까이에 다다르니 땅바닥에서부터 바위로만 된 산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마이산의 이름에 걸맞게 말 타는 놀이터가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마이산의 두 봉우리. 마치 내가 태초부터 바위가 되어버리는 듯했던 벅찬 떨림이 되살아났다. 알 수 없는 힘의 무게로 서 있는 바위산의 틈새에 오늘의 흔적들도 새겨지리라. 탑사(塔寺)까지 오르는 길은 빙판이 빗물에 젖어 미끄러웠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탑사를 향해 오르는 벚나무 터널, 일행들의 등 뒤로 스치는 빗 사이로 꽃비가 흩날릴 화창한 봄날이 몰려오는 것 같다.


  내려오는 산길. 높은 산들은 첩첩이 겹쳐지고 펼쳐져 하늘을 수놓았다. 산등성이의 곡선 따라 쭉 늘어서서 사열식을 하는 듯한 나목들의 모습이 겨울 산의 백미가 아닌가. 버스가 달리는 소리는 나목들의 행진곡 같이 들렸다. 잎이 무성했던 때 들어볼 수 없었던 행진곡이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그 어떤 움직임보다 역동적인 행진곡이 아니던가. 나무들의 목숨이 내달리며 나팔소리를 울리고 있지나 않았는지. 새 옷을 입을 때까지 나무의 허심을 달래주고 있는 듯한 빛바랜 헌 옷들이 오늘은 꽃처럼 보였다.


  아침부터 출근해야 하는 사람 마냥 시간에 맞추어 나가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힘들어졌다. 꼭 가야만 하는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비도 오는데……. 마이산에 초대해준 그 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이미 먼저 가 있는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던 윤(輪)으로 이어진 마음의 한 자락이 만든 길이다.

사람살이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가 시작이며 어디가 끝일까? 우리의 목적지에서 만나야 하는 결과가 어떤 것일까.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행자가 있어 힘들어도 즐거운 여정, 과정뿐인 인생이 아닐까. 산허리를 돌아올 때는 그렇게 높은 고개를 넘는 줄 몰랐다. 우리도 그렇게 저마다 삶의 고개를 넘고 있다.


  인생의 마흔 아홉의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거기 펼쳐지는 지천명의 들녘을 만나게 된다. 힘겹게 높은 고개를 다 넘고 나면 언제나 펼쳐지는 새로운 들판이 있었기에 가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펀펀한 땅에서 오래도록 새로운 풍광 속에서 평화롭게 쉬고 싶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곳에서 머물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네의 사람살이다. 벌판 끄트머리로 보이는 또 다른 산이 우리를 부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표를 보고 우리는 또 가야 한다. 오로지 한 마음으로 마지막 고개만 넘을 때는 오히려 목표가 분명했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데는 세거리도 나오고 네거리도 나온다. 여러 갈래길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린다. 눈앞의 경치에 매료되어 갈 길을 잊을 수도 있다. 구경하는 재미로 우리는 발밑의 늪으로 서서히 빠지고 있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녀야 한다고 현인은 말했나보다. 목숨은 고정되지 않고 흐를 때 행복의 노래를 부른다. 고정되지 않는 전진(前進)이 목숨의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실내의 런닝 머신 위에서 걷고 뛰는 것처럼 우리는 전진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흔 아홉 고개를 넘어야 갈수 있는 마이산은 영산(靈山)인가? 아름다운 설화(說話)와 숨겨진 유적을 품고 있어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마이산은 어디쯤일까. 그 산을 넘어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진정한 이순(耳順)의 산이 보이나보다.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다. 오르내리는 길목의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그 모든 길들은 하나의 멧부리에 닿기 마련이다. 어느 때였던가, 산꼭대기에 섰을 때 들렸던 성서의 이야기가 또 떠오른다. 기도하기 위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높은 산에 올랐다. 한 제자가 예수가 놀랍게 변모하여 옛 선지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황홀하였다. 제자는 “선생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고 엉겁결에 말했다. 높은 산에 초막 셋을 짓고 선생님과 선지자를 모시고 살고 싶었다. 안일한 순간적인 유혹이었을까? 예수가 그 때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했던가.

  편안함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듯이 꼭대기가 우리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제 자리로 결국 내려와야 한다. 비는 그쳤다. 구름을 헤치고 나온 햇빛 한 줄기가 길을 비춰준다.











5

3부

1. 첫눈 오는 길

2.  연화사와 동백꽃

3.  충무 김밥

4. 영산으로 가는 길

5. 서울의 봄 2007

6. 천년의 꿈

7.  감이 익을 무렵

8.  침묵의 강

9.  길 잃는 즐거움

10.  겨울 들녘








1

첫눈 오는 길



  아침 창 밖이 환하다. 가을이 터 놓은 길로 밤새도록 사분사분 내려오신 첫눈. 바다 밑의 물고기들의 술렁임처럼 첫눈 구경을 나선다.

  가을이 감성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이성(理性)의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나무도, 길가의 너저분한 풀 한 포기도 묵묵히 시련을 견디다 오늘처럼 눈꽃을 피울 때면 거룩한 은총이 된다.

순창군 동계면의 장구목. 신이 빚은 조각품들이 깔려 있는 강기슭.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제 살을 깎아 빚은 얼굴들을 내놓았다. 얼마나 많은 세월의 강을 흘려보냈으면 저리도 매끄러운 피부 결을 만들어 내었을까. 강물이 많이 빠져나간 강기슭은 흘러간 물소리에 어우러졌던 이 마을의 전설이 새겨진 바위들로 물결을 이룬다. 내 스스로 우물바위라고 명명하고 어느 가을 날 나르시스의 꿈을 보았던 요강바위 속은 메말랐다. 그윽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빈 바위 구멍 안을 휘돌아 울린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각가지 조각품의 결 위로, 흐르는 물살 위로 날아 내리는 눈발들을 지켜본다. 눈발들은 이 첫 만남을 위하여 얼마나 설레였을까. 그 머나 먼 나라 어디쯤에서 눈송이 되어 온 걸까. 그들의 기착지가 이곳 강으로 흐르는 이 물살일 것을 알았을지. 나뭇가지에 모여서 나무의 이성을 꽃피우리라고 약속이나 했을지. 차가운 바위에 떨어지는 순간에 하늘 길의 사연을 새기며 사라져야 한다는 걸 알았을까. 물살과 한 순간의 짜릿한 만남으로 한 살이 되기 위해 그 먼 길을 날아 왔다. 갈색의 솜털 입은 산 너머에서 산 벚꽃 무리 진 봄날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수놓는다. 물 속에 녹아버린 눈발들은 마땅히 올 곳에 돌아왔다고 안도의 숨을 쉴까. 아! 모를 일이다. 그들의 따뜻한 집은 어디인가. 눈발을 만나고 있는 나 또한 이 순간 이곳에서 첫눈을 맞이하리라고는 어제는 미처 몰랐으니…….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잠시도 주저 없이 꾸준히 내린다. 마냥 내리는 눈이 좋다. 디카는 가다가 근사한 곳의 설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 흐르는 물소리도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도 담고 싶다. 돌아갈 길의 걱정도 하지 않은 채…….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은 재미없어 새 길을 찾아든다. 어느 듯 어둠이 하얀 세상을 감싸버렸다. 자동차의 불빛을 배경으로 내리는 눈발도 정답다. 시간은 아직 초저녁인데 갈 길이 앞뒤로 막혀버린다.

  지난 경험들은 아스라한 추억의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마른 단풍잎 같은 것. 지나고 보면 첫사랑의 설렘 등이 까슬한 상처로 남아 아련한 습작이 되기도 했다. 첫사랑은 또 다른 첫사랑을 불러오는데, 연습도 없이 단 한 번에 대설로 찾아온 첫눈이다. 사상 최대로 첫눈이 이렇게 많이 온 것도 처음이란다. 더 이상 눈다운 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단번에 초고속으로 와서 풍성한 설경을 한꺼번에 다 안겨주고 폭설이 되어 당혹스런 뒷면을 여지없이 드러내리라고 애초에 계획했던 일이었던가.


  순창 근처에서 전주까지는 38키로밖에 안 남았는데 얼어붙은 길바닥에 갇혔다. 자동차 안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첫 경험이다. 27번 30번 국도가 막히고 호남고속도로가 통제라는 뉴스 속보다. 겨우 17번 국도로 나왔는데 임실에서 전주까지 주차장이 되어버린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눈꽃을 실어 나르기를 몇 시간이다. 벗은 나무에 달랑거리는 낙엽처럼 한 장  남은 달력도 기울고 있는 즈음 누구나 새해를 준비하는 자세를 이야기한다. '내 여생(餘生)에의 첫 날' 새해가 오면 그 날부터 술도 담배도 끊고 좀 더 좋은 계획을 세운단다. 그러나 막상 새해 첫 날이 되어도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럼 음력 설날부터 하면 된다. 그도 못하면 회교력의 시작인 7월부터 시작한다. 그도 또 못하면 유태력의 시작인 시월부터……. 그도 저도 아니면 노년기의 길목에 선 오늘은 첫눈 온 날. 내 여생의 첫 날이라 하잔다.  모든 날은 오직 첫날, 모든 만남은 첫 만남의 연속이었다. 이생에 못다 이룬 꿈은 저승으로 이체되어서 계속 이어지리라. 아예 꿈꿀 시간도 없이 그날그날 좋은 날이면 그냥 그대로일 뿐, 뿐, 뿐.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전주천 한벽루 앞을 지난다.  인적도 드문 텅 빈 거리, 옛 임업시험장이었던 곳을 넓힌 큰 도로 면이 하얀 도포를 깔은 것 같다. 천변의 가로등이 깜박이는 인도(人道)는 순결한 적요의 아름다움이 깔려 있는 오솔길이다. 오늘은 한벽청설(寒壁淸雪)이랄까. 한밤중에 밤거리의 설경에 들어서 첫눈에 첫 발자국을 찍는 상큼한 경험을 언제 또 가질 것인가. 여생이 아니라 진정한 생의 첫 날인 영원한 첫 날로 접어두자.

(2005년 12월 4일)








2

연화사와 동백꽃


                                 


  바다는 언제나 영원한 꿈과 자유의 날개를 달아준다. 갈매기들의 배웅을 받은 유람선은 바닷물을 뒤집으며 세차게 하얀 포말을 헤치고 나아갔다. 바다는 알 수 없는 부피만큼 속내도 알 수 없는 위엄의 빛깔로 다가와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우리나라 남녘 해안 도시인 통영시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미륵도에서 남으로 뱃길 40여 분이 걸리는 연화도.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연산군의 억불 정책으로 한양에서 이곳 섬으로 피신하여온 스님이 부처님 대신으로 전래석(둥근돌)을 모셔 놓고 예불을 올리며 수행하다가 깨쳐서 도인이 되셨다. 도인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나를 바다에 수장시켜 달라'고 고하여 제자들과 섬 주민들이 스님을 바다에 수장하니 그곳에서 커다란 연꽃이 떠올라와 승천하였다. 북쪽 바다에서 본 섬의 모습이 연꽃잎을 닮았다 해서 그 때부터 섬 이름을 연화도 라 하였고 돌아가신 스님도 연꽃도인이라 하였다." 유람선 안내자의 구수한 입담으로 전해 듣는 연화도의 전설은 바다에 핀 연꽃을 연상하게 했다. 


   내 인생 등정의 베이스 캠프는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바닷물에 씻기라도 하듯 부산의 송도 앞 바다를 매일 걸어서 다니기도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까맣게 잊혀진 내 스무 살 시절의 아지랑이 같은 꿈과 낭만과 사랑이 남해 바다 깊숙이 녹아 있었던 것일까. 갈매기가 바닷물에 내려꽂힐 때마다 뿌연 안개에 서린 추억의 꼬리가 한 가닥씩 낚이는 것 같았다.  잠시도 가만히 멈추지 못하는 거센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아련한 추억의 영상들도 출렁이다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먼 바다 한 가운데서 유유히 유영을 즐기고 있는 갈매기들이 비행솜씨를 뽐내는 듯 사뭇 높이 날았다 수면으로 내려왔다, 서로 번갈아 가며 물장구치는 곡예를 펼쳐주었다. 기암괴석이 둘러쳐진 촛대바위, 사 형제 섬, 멀리 뿌옇게 보이는 고래바위 섬, 가까이는 구멍 섬 등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바다 위에 아름다운 절경이 연출되었다. 뱃머리에서 부서지는 물보라를 맞으며 유람선의 난간에 넋을 잃고 선 여인네의 머리칼이 하염없이 바람에 휘날렸다.

  연꽃 섬의 선착장에 배가 다가가니 기다렸다는 듯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 소리를 내면서 우르르 반겨주었다. 갈매기는 통영의 시조(市鳥)다. 연꽃도인의 원력이 서려있는 연화사 오르는 길은 들꽃들이 길 가에서 하늘하늘 손짓하고 있었다. 자주 빛 콩꽃, 언덕의 노란 유채꽃, 하얀 산딸기 꽃들이 보라 빛 꽃 잔디와 조화로운 향기를 뿜고 있었다.


  동백꽃은 절 마당에서도 선홍빛 핏물을 뚝뚝 흘리듯 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젊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떨어진 동백꽃 송이를 장수의 베어진 머리로 비유했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장수의 머리뿐이겠는가. 이 순신 장군의 구국 충절이 살아 있는 한산도 앞 바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꽃잎 떨어지듯 사라진 젊은 혼들의 넋이 환생하여 동백꽃으로 피어났을까. 동란의

후유증으로 멍든 가슴을 부여안고 살았던 어머니의 한숨이 아직도 이명처럼 가시지 않는다. 어찌 나만이 안고 있는 애잔함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수난의 핏자국을 저 동백꽃은 알리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무참히 스러져간 봉오리들의 넋이 그 핏물 응고되어 따뜻한 남녘 마을마다 동백꽃으로 피나보다. 지금도 지구의 한 편에서 허무하게 봉오리 째 떨어진 넋이 얼마며 핀 채로 떨어지는 혼들은 그 얼마이겠는가. 인류사에 상상할 수도 없는 피다만 꽃들, 동백꽃이 떨어지듯 그 핏물 뚝! 뚝! 처절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는 듯도 했다.

   한려수도를 내려다보는 통영시의 길모퉁이마다 가로수의 꽃으로 피어나는 동백꽃은 젊음을 채 불태우지 못하고 떨어진 넋이런가. 어찌하여 통영시의 상징이 왜 동백나무인지 짐작할 만 하다. 그래서 충렬사 마당의 우람한 동백나무는 그 넋들의 기원을 알리고자 그리도 긴 세월을 자라고 또 자라고 있는지.

   연꽃도인이 이 섬 한가운데서 도를 깨친 원력으로 연화사가 창건된 것. 이 또한 격전의 역사를 간직한 그 바다를 달래기 위함이었던가. 기원의 힘이 아직 모자라 세계로 퍼져나가지 못하여서일까. 폭염에 불타던 이라크 전에 희생된 생명은 지금도 울부짖는다. 대웅전에 들어서 삼배를 올렸다.

  부드러운 낙조가 내려앉고 출렁이던 바다도 조용해진다. 하루의 눈부신 봄나들이는 또 하나의 추억의 꽃이 되어 상념의 날개를 타고 그 섬을 찾으리라.

(2003년 4월 25일)

 


3

충무 김밥


  한 때는, 서울 여의도에서 몇 시간이라도 달려가서 먹는다는 김밥. 여전히 충무김밥이라 불러야 더 정겹게 들린다. 통영시의 옛 이름이 충무였지만. 말로만 듣던 그 김밥을 통영시 달아공원의 수산과학관 앞 벤치에서 먹었다. 바다 내음 물씬 맡으며 먹은 김밥은 어떤 맛이라 할까. 우선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냥 먹기 시작했다.

김밥은 속을 넣지 않은 것이 특색이었다. 손가락 길이만큼 길고 두께는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 만 했다. 맨 밥을 생김에 둘둘 말아서 썬 것이었다. 똑같은 크기의 김밥을 나란히 모아서 한 덩이로 싼 것을 펼치면 2 명이 한 조가 되어 먹을 수 있었다. 맨 김밥에 큼직한 무김치와 오징어무침을 찬으로 먹었다. 무김치는 무를 통째로 엇비슷하게 썰어서 김치 양념에 버무려 알맞게 익은 것이었다. 김치 한 개를 집어 한 입 베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해산물 고장답게 삶은 오징어무침도 부드러워서 속이 없는 김밥에 잘 어울렸다. 무김치와 오징어무침을 따로 따로 비닐 보자기에 싸서 묶은 것을 그대로 펼쳐서 먹을 수 있어 간편했다. 길에서 먹는 점심으로는 운치마저 더해주는 듯했다. 시래기 국까지 곁들여서 목마름을 달래주기도 한 묘한 음식의 궁합이었다. 처음에는 맹숭맹숭한 맛 같기도 했지만 먹을수록 밥도 쫀득쫀득한 것에 싱싱한 김 맛이 어우러져 감칠맛이 있었다.


   통영시는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해안은 굴곡이 심하고 간만의 차가 적으며, 남쪽으로 다도해를 안고 있었다. 통영의 한산도에서 삼천포와 남해안을 이어 전라도의 여수 오동도까지 이어지는 잔잔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물길을 일러 한려수도(閑麗水道)라 했다.

  통영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는데 하나는 한려수도를 아름답게 비추는 태양이요, 또 하나는 이 순신 장군의 정신이 빛내는 태양이란다. 그로 인하여 한국의 나폴리로 알려질 만큼 인기 있는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동해안의 끝과 남해의 시작인 부산에서 전라도 여수까지 잇는 뱃길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곳이 통영시이다.

  옛날에는 부산에서 그 한려수도를 거쳐 여수까지 수많은 뱃사람들이 어업을 위하여 그 뱃길을 다녔다. 도시와 농촌에서는 소고기 등을 고기라 하지만 통영에서는 생선을 일컬어 모두 고기라고 부른다. 그 정도로 고기잡이가 성하다는 말인 것 같았다.


  뱃길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챙겨 먹을 수 없었던 어부들이 부산과 여수의 중간 지점인 통영에서 급히 요기할 수 있었던 것이 통영에서의 할매 김밥이었다. 먹고살기 바빴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었던 할매 김밥!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이미지 중심의 나들이 김밥으로 각광을 받을 줄은 예전엔 미리 생각할 수도 없었으리라. 바삐 먹을 수 있어야 했고 최소한의 실질적인 영양을 고려했음 직했다. 그래서인지 씹을수록 그 수수하고 깔끔한 맛이 정겹게 느껴졌다. 아마도 평생을 통영의 시장 터에서 보냈던 내 고모님도 점심때면 그 김밥을 수 없이 잡수셨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김밥 맛이 더욱 진했다. 때때로 그 김밥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눈물 섞인 김밥이기도 했을 것이다. 뱃사람들이 고기 잡던 비린내 나는 손으로 성큼 성큼 집어먹기에 안성맞춤인 김밥이었을 것 같다.


  통영이 관광도시라고는 하지만 실제 관광수입보다는 예로부터 미륵도와 섬 등지에서 어부들이 잡는 고기들로 경제를 움직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해역은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남해의 황금어장인 동시에 수온과 수질이 좋다. 사방의 바다 한 가운데 아름답게 떠 있는 많은 부표들이 양식수산업의 보고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부근의 상당한 해역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 FDA의 공인을 받은 청정해역(淸淨海域)이라 한다. 수온 또한 알맞아 각종 어류(魚類)·굴·피조개·우렁쉥이 등 한국양식수산물의 대부분이 이 바다에서 생산되고 있다.

 

  수산과학관 앞에는 옛날 고깃배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 있는 통영의 전래 배인  '통구밍이' 란 옛 이름이 시선을 붙잡았다. 손으로 어루만져보자니 김밥을 싸 가지고 부부가 단둘이서 고기잡이 나갔을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되었다. 석양을 등에 지고 노를 저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던 노어부들의 고달팠던 삶이 오늘의 여행객에게는 낭만적인 풍경으로 연상된다. 평화롭기만 해 보이던 어촌은 잡는 고기잡이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바뀌었다. 고속엔진을 단 어선으로 먼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도 옛날 같은 만선의 기쁨을 맛보기엔 어려움이 크단다. 수요와 공급의 어긋남과 밀려오는 값싼 중국의 활어 때문에 가두리 양식업자들의 한 숨도 날로 깊어만 간다. 기계 배들의 엔진 소리 때문에 고기들은 먼바다로 피난을 가야하고, 어부들은 더 멀리 고기를 잡으러 나가야 한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이제 이 노래도 전설로만 들리는 노래일 뿐이다.


  하루의 일정으로는 너무 먼 길이었을까?  느긋한 점심을 챙겨 먹을 수 없는 빡빡한 여정의 점심으로 충무김밥은 얼마나 제격이었는가.  옛날의 어부들이 뱃길에서 급한 허기를 달랬던 그 김밥을 우리는 하루의 관광일정 사이에 먹었다는 것이 어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으랴. 충무김밥은 풍속도가 바뀌어 훗날에는 구경하기 바쁜 관광객들이 먹었던 점심으로 기억될 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오던 캄캄한 밤, 제대로 저녁도 챙겨 먹을 수도 없는 시간, 휴게소에서 먹었던 남겨온 그 김밥 맛이야말로 정말 꿀맛이었다. 몇 시간을 달려가서라도 그 바다 가에서 충무김밥을 다시 먹고 싶다.  (2003. 4. 25)






 


4

영산(靈山 )으로 가는 길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봄을 재촉하는 듯, 어제의 눈이 오늘은 봄기운을 타고 내린다. 마을버스는 비를 가르며 달리고 있다. 전주 시가지를 벗어나자 고향 들녘이 비를 맞으며 긴 잠에서 깨어난다. 먼 산의 잔설도 아쉬운 듯 손짓하며 사라진다. 시냇물도 덩달아 졸졸졸졸 노래를 부른다.

  옛날에는 겨울이면 진안은 갈 수 없는 곳으로 알았었다. 마을버스는 옛길로 모래 재를 넘고 있다. 새로 난 길로 몇 번 마이산을 둘러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마흔 아홉 고개 길의 마루쯤 되었을까? 내가 마치 산꼭대기를 곡예 하듯 날고 있는 것 같다. 은하철도 999를 타고 배움길 나들이를 가는 것 같다고 개구쟁이 소녀(?)는 말했다. 정말 그랬다. 문우들의 과외 공부인 셈이다. 알프스의 몽블랑,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등의 영상들이 눈앞의 산꼭대기 위에 떠올려졌다. 차창 밖을 내려다보니 바로 아래에 계단식의 길이 나 있었다. 일 층 길, 이 층 길, 우리가 탄 버스는 삼 층 길을 통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저 길은 어떤 길이죠?”하고 무심코 앞사람에게 물었다. “우리가 돌아 온 길이잖아요?” 아, 그렇구나! 버스가 꼬불꼬불 산허리를 감돌아 지나온 길이었다. 잠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잊고 있었다.

  모래재 쉼터를 지나자 백설의 사막이 펼쳐진다. 작은 호수도 겉면이 아직 얼어 있다. 그곳이 높은 곳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짚으로 덮인 밭 가래가 가지런한 맵시로 긴 잠을 자고 있다. 지난 가을 씨뿌리기했다는 인삼밭이 드문드문 보인다. 개울의 얼음장 녹아내리는 물소리에 풀잎들도 소스라치듯 기지개를 켠다.

  마이산 주차장 가까이에 다다르니 땅바닥에서부터 바위로만 된 산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마이산의 이름에 걸맞게 말 타는 놀이터가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마이산의 두 봉우리. 마치 내가 태초부터 바위가 되어버리는 듯했던 벅찬 떨림이 되살아났다. 알 수 없는 힘의 무게로 서 있는 바위산의 틈새에 오늘의 흔적들도 새겨지리라. 탑사(塔寺)까지 오르는 길은 빙판이 빗물에 젖어 미끄러웠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탑사를 향해 오르는 벚나무 터널, 일행들의 등 뒤로 스치는 빗 사이로 꽃비가 흩날릴 화창한 봄날이 몰려오는 것 같다.


  내려오는 산길. 높은 산들은 첩첩이 겹쳐지고 펼쳐져 하늘을 수놓았다. 산등성이의 곡선 따라 쭉 늘어서서 사열식을 하는 듯한 나목들의 모습이 겨울 산의 백미가 아닌가. 버스가 달리는 소리는 나목들의 행진곡 같이 들렸다. 잎이 무성했던 때 들어볼 수 없었던 행진곡이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그 어떤 움직임보다 역동적인 행진곡이 아니던가. 나무들의 목숨이 내달리며 나팔소리를 울리고 있지나 않았는지. 새 옷을 입을 때까지 나무의 허심을 달래주고 있는 듯한 빛바랜 헌 옷들이 오늘은 꽃처럼 보였다.


  아침부터 출근해야 하는 사람 마냥 시간에 맞추어 나가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힘들어졌다. 꼭 가야만 하는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비도 오는데……. 마이산에 초대해준 그 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이미 먼저 가 있는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던 윤(輪)으로 이어진 마음의 한 자락이 만든 길이다.

사람살이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가 시작이며 어디가 끝일까? 우리의 목적지에서 만나야 하는 결과가 어떤 것일까.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행자가 있어 힘들어도 즐거운 여정, 과정뿐인 인생이 아닐까. 산허리를 돌아올 때는 그렇게 높은 고개를 넘는 줄 몰랐다. 우리도 그렇게 저마다 삶의 고개를 넘고 있다.


  인생의 마흔 아홉의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거기 펼쳐지는 지천명의 들녘을 만나게 된다. 힘겹게 높은 고개를 다 넘고 나면 언제나 펼쳐지는 새로운 들판이 있었기에 가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펀펀한 땅에서 오래도록 새로운 풍광 속에서 평화롭게 쉬고 싶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곳에서 머물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네의 사람살이다. 벌판 끄트머리로 보이는 또 다른 산이 우리를 부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표를 보고 우리는 또 가야 한다. 오로지 한 마음으로 마지막 고개만 넘을 때는 오히려 목표가 분명했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데는 세거리도 나오고 네거리도 나온다. 여러 갈래길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린다. 눈앞의 경치에 매료되어 갈 길을 잊을 수도 있다. 구경하는 재미로 우리는 발밑의 늪으로 서서히 빠지고 있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녀야 한다고 현인은 말했나보다. 목숨은 고정되지 않고 흐를 때 행복의 노래를 부른다. 고정되지 않는 전진(前進)이 목숨의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실내의 런닝 머신 위에서 걷고 뛰는 것처럼 우리는 전진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흔 아홉 고개를 넘어야 갈수 있는 마이산은 영산(靈山)인가? 아름다운 설화(說話)와 숨겨진 유적을 품고 있어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마이산은 어디쯤일까. 그 산을 넘어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진정한 이순(耳順)의 산이 보이나보다.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다. 오르내리는 길목의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그 모든 길들은 하나의 멧부리에 닿기 마련이다. 어느 때였던가, 산꼭대기에 섰을 때 들렸던 성서의 이야기가 또 떠오른다. 기도하기 위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높은 산에 올랐다. 한 제자가 예수가 놀랍게 변모하여 옛 선지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황홀하였다. 제자는 “선생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고 엉겁결에 말했다. 높은 산에 초막 셋을 짓고 선생님과 선지자를 모시고 살고 싶었다. 안일한 순간적인 유혹이었을까? 예수가 그 때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했던가.

  편안함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듯이 꼭대기가 우리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제 자리로 결국 내려와야 한다. 비는 그쳤다. 구름을 헤치고 나온 햇빛 한 줄기가 길을 비춰준다.







 

5.

서울의 봄 2007

  황사가 멎은 따뜻한 봄날,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맛이 참 호젓하다. 고독한 자유의 

묘미랄까. 햇살의 맛과 꽃피는 소리가 가슴으로 스며오는 것 같다.  

  개나리 언덕도 뒤로 물러가고 순식간에 도화(桃花) 점점이 박힌 먼 산기슭이 지나간다. 늙은  

갈대가 스러진 곳에 새순이 뾰족이 올라오고 싸리 꽃 하얀 길도 지나네. 거리마다 벚꽃길이  

화사하구나. 이런 날에 저 먼 산 속에서는 빈 가지가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새 옷을 차려입으리라. 전국이 꽃대궐인 듯, 푸르러지는 산야가 뒤로 뒤로 달린다.  

 

  봄물 가득한 강이 스쳐 지나고 산도 강도 꽃길도 스쳐 지난다. 흘러간 젊은 날의 초상들이 풍경  

위로 겹쳐서 그렇게 지난다. 아이들도 순식간에 자라서 나의 젊은 날들을 새롭게 살고, 저들의  

아이들 키우는데 여념이 없다. 나는 기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은 듯한데. 인생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순간에 스치는 풍경처럼 지나버렸구나 싶다. 모두가 마음 속 그림이 되었다. 허상, 허망한  

그림이라, 살 때는 진짜로 산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꿈같은 세월이었으니 참 삶을 살았다 할  

것인가.  

 

  꽃과 꽃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가지가 터져 잎이 열리며, 물과 물이 만나서 강물이 가득한 봄.  

혈관이 부푸는 이 찬란한 봄에는 혼자는 어울리지 않다. 그러나 기차 길 가 돌무더기 틈에서 활짝  

웃고 있는 노란 민들레 한 송이는 당당하다.  

  여의나루에 약속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했다. 여의도 벚꽃 축제장이다. 지하철 역구내서부터  

김밥 장수들이 늘어앉아서 분주하다. 봄 축제장임이 실감난다. 화사한 벚꽃나무 밑을 지나며 여러  

종류의 가판대들이 재미있다. 어렸을 적에 부산 송도해수욕장에서 봉지로 사먹던 고동이 보였다.  

뒤 꽁지를 깨물고 앞 주둥이를 빨면 알맹이가 쏙 빠지는 것이다. 어린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미리 뒤 꽁지를 모두 깨고 한 봉지씩 담아 있다. 그 바다의 향수를 빨아먹어 본다. 아련하기만 하다.  

바로 그 바다 맛이다. 도시락을 싸들고 소풍 나온 노부부들이 보이고 아이를 동반한 사람들, 다양한  

소풍객들이 한강 둔치의 공원을 수놓고 있다. 강물 가까지 걸어가기가 멀어서 자전거를 한 시간  

빌렸다. 몇 년 만에 타보는 자전거인가. 일행이 올 때까지 한강변을 달려본다. 자전거회원들이 단체로  

달리고 있다. 여의도로 들어오는 다리가 서 너 개 걸쳐 있어 그 다리 밑을 달렸다. 강에서 노는 물새와  

작은 보트들이 같이 떠간다. 잔디밭 위로도, 새순이 피는 소리 속삭이는 꽃나무 사이로도 달린다.  

상쾌한 바람을 일으키며. 누가 청춘을 특별한 한 때를 말할 것인가.  

 

  63빌딩 전망대. 여의도 63빌딩을 바깥에서 보면 꼭대기쯤에 두 줄의 까만 띠가 보인다. 그 줄의  

한 줄이 밖을 내다보는 유리창이었다. 올라가는데 2분 30초 정도 초고속으로 올라가는 듯. 높이가  

해발 약 2000미터는 될 것 같다. 한 눈에 저 북한산성까지 내려다보이니까 말이다.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면서 서울의 동서남북을 조망했다. 한국은 마치 아파트 공화국 같다고 말한 한 외국인의 말이  

생각난다. 한강변을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고 있다. 최초의 사람이 반도로 내려오면서 모두  

강변에 자리를 잡았으리라. 선사시대부터 이렇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한강이 있었기에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이후에도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벌려 왔으리라. 강물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나 그 때의 강물은 흘러갔고 지금의 강물이 그 역사를 어찌 알 것인가. 한강유역에 옹기종기  

움막집부터 시작된 사람의 살림터가 몇 천 년이 지나자 비옥한 땅에는 산보다도 더 높은 빌딩의  

숲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무엇을 먹고 입고 살 것인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가 중요하게 되었다.   

오래된 낮은 주택단지들은 앞으로 재개발이란 팻말을 달고 또 얼마나 높이 올라갈 것인가. 더 오랜  

날이 지나면 빌딩의 흔적들도 사라진 유적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도시도 드물단다. 세계의 대도시를 두루 구경한 동생의 말이다.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는 사진으로만 보더라도 까마득하게 도시가 멀리까지 펼쳐져 있지 않은가.  

나의 20대 시절, 비행기 쇼를 보러왔을 때의 한강 둔치의 자연을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그때는  

겨울의 한강이 얼었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뚝섬의 한강이 얼어붙어 걸어서 강 가운데까지 걸을  

수가 있었다. 한강의 기적이 추었던 서울을 다 녹일 수 있었던 것일까. 50여 년을 쏜 살같이  

달려온 서울이다. 동생은 안타깝게 말한다. 그때부터라도 유럽의 성곽도시들처럼 가꾸어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이다. 서울의 4대 성곽문 안의 전통을 보존했더라면 지금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의 서울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의 부가가치는 더욱 높아졌을 것이라. 서울의 남북을 이어주는 

22개의 다리 밑으로 강물이 흐르고 구불구불한 강변의 곡선을 따라 이어진 교각 위로 줄 선  

개미들처럼 기어가는 자동차들. 여의도와 밤섬과 선유도, 노들섬이 듬성듬성 중간에 떠 있으며,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서 멀리 보면 남북의 산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강북의 끝을 보면 아스라이  

북한산이 펼쳐진다. 북한산성 아래 인왕산옆 북악산 아래 청화대의 기와 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68년 김인조 공비사건으로 막혔던 북한산성은 이제 개방되었다. 동북쪽에 사계절 등산 코스인  

도봉산이며, 기암괴석을 타기 좋은 수락산이 있고 그 아래 불암산이 있고, 낮지만 유명한 아차산이  

있다. 바로 한강의 동북쪽에 있는 아차산은 온달장군의 전설이 베어 있고,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요충지였다. 390년 광개토왕이 한성도읍의 백제를 점령하기 위하여 아차산을 차지했고, 675년  

신라 무열왕이 침공했다. 260여 년 동안 삼국의 치열한 무대가 되었던 산이다. 중구에는 서울의  

아침을 여는 남산이 있고 마을을 사이에 두고 낮은 구릉이 심심치 않다. 강남으로는 관악산이  

우뚝 솟아 있고 우면산과 구룡산이 받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안락하게 모여 살기에 좋은  

요지였기에 옛날부터 한 나라의 도읍지로 손꼽힐 수밖에 없었던 한강 유역이었나 보다.  

 

  강은 다리가 만드는 구조적 역할 때문에 더 아름답다. 강북로 하나로 모자라서 강변 따라 강  

속에 교각을 만들이 강북로가 하나 더 강의 곡선을 따라 간다. 그 모든 다리 위로 자동차들이  

개미 군단처럼 기어 미끄러지듯 지난다.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들이 장난감 기차들을 모아놓은  

것 같다. 벚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는 화사한 벚꽃무리들이 이 높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한낱  

먼지뭉텅이 같다. 내려앉은 구름송이다. 무엇을 위하여 환성을 터트릴 것인가.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한강의 기적이여! 고정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인데, 아무것도….  

 

  국회의사당 앞 윤중로 변의 벚꽃이 제일 울창하다. 벚꽃축제 꽃탑이 높게 세워져 있고 인도  

변엔 조형적인 꽃 전시회도 열리고 있다. 벚꽃잎이 가벼이 가지에서 떨어져 팔랑거리며 땅 위로  

날린다. 의사당 안의 의원들은 이 벚꽃 축제에서 진정한 여민락(與民樂)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짙어지는 어둠 속으로 일제히 터지는 도심의 조명은 한강을 또 다른 정취에 젖게  

한다.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청춘남녀의 상춘객들은 어떤 꿈을 그리고 앞으로 어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낼까. 아름다운 봄밤이 강물로 흐른다.  

(2007 6월 30)  





 

6

천년의 꿈




  잠에서 깨어납니다. 열어져 있는 창가로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매미 소리도 온 마을을 울립니다. 창 밖의 훤한 하늘이 아침임을 알려줍니다. 침대에 누운 채 긴 꿈속을 더듬어 보는 이 아침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천년을 거슬러 갔던 길고도 짧은 여행에서 막 도착했거든요.


  백제의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에서도 깊숙한 산곡으로 들어갔습니다. 새소리 물소리가 바람 소리에 실려 아름다운 합주가 열리고 있는 계곡을 지나 산사를 찾았습니다. 어둠인지 안개인지 모를 베일에 가리어져 있는 숲 속 풍경에서 알 수 없는 정기를 느꼈습니다. 대웅전과 사찰의 지붕이 마치 구름 속을 떠가는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연등이 걸린 대웅전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향불을 피우고 삼배를 올렸습니다. 부처님들의 미소가 내 몸을 감싸는 것 같았습니다. 향이 새어나가는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적막한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을 올려다보자니 천 년의 숨결이 나무 잎 사이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팔각지붕을 이고 선 부도를 눈썹 반달도 울창한 나무 숲 사이로 내려다보려고 머문 듯 물끄러미 시선을 멈추었습니다. 물소리가 천상의 노래 소리처럼 들리는 계곡 위의 찻집에서는 맑은 불빛이 고즈넉하게 우리의 옷자락을 붙잡는 듯했습니다. 어둠에 쫓기듯 돌아서는 발자국 소리에 범종의 울림이 따라왔지요.


  일상의 옷을 벗고 여행복을 갈아입을 때도 우리는 단추를 잘 끼워야 할까요? 좀 삐뚤어진 채로 있어도 멋스럽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여행길은 자유로운 것을 찾아 나선 길 아닌가요. 단추가 잘못 끼어진 파격을 만끽할 수 있었지요. 고속도로를 잘못 들었어요. 그냥  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길은 언제나 통하게 되어있기에 어디든 가면 되었어요. 그냥 길에 그들의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찔한 쾌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험의 여정을 만들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풍광도 만나고 아름다운 밤 숲길에서 밤하늘이 내려다주는 우주의 속삭임에 젖어들 수도 있었지요. 그 길은 설렘과 짜릿한 맛을 즐기는 탐험이기도 했습니다. 타임머신은 계속 그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불빛이 이끄는 데로 호수를 끼고 달렸지요. 후텁지근한 밤바람도 호수에서 밀려오는 물결을 연상하리 만치 감미롭게 그들의 이마를 스치곤 하였습니다. 혼자였더라면 그 밤이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길을 잘 못 들어도 동행이 있어 외롭지 않았지요. 서로 길을 묻고 대답하며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찬란했던 신라왕조의 후예인 여인이 백제의 청년을 만납니다. 어찌하여 그 먼 곳에서 백제의 나라로 오게 되었을까. 신라의 선화공주와 백제의 무왕의 혼으로 잠시 환생한 꿈을 꾸었는지도 모릅니다. 천년의 사랑이 아직도 남음이 있어 그들을 새벽이 열리는 사비성 숲길로 배회하게 합니다. 애잔한 대금 소리에 이끌려 그들은 자꾸만 산정을 향해 올라갑니다. 후줄근한 땀에 젖은 손을 놓지 않고 솔숲의 향기에 젖고 땀에 젖으면서. 아침이슬을 머금은 새들의 맑은 소리가 더욱 청아한 아침입니다. 피리소리를 잡으면 그들의 꿈도 손에 잡힐 듯한 환상이 듭니다.


  낙화암. 꽃잎처럼 삼천 궁녀가 떨어졌다는 바위에 걸터앉습니다. 고요한 아침 하늘 아래 펼쳐진 백마강은 천사백년의 역사를 안고 있었으나 그 때의 물결은 이미 역사의 그늘 속으로 흘러 가버린 뒤였습니다. 아마 백마강의 설움은 벌써 바다에서 녹아내려 하늘의 흰 구름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의 새 물결이 그들을 그곳까지 불렀습니다. 마치 아쉬운 꿈을 찾아 헤매다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융성했던 한 문화의 마지막 운명이 그 곳 바위에서 흩어졌던 순간을 굽어보았을 소나무들이 지금도 붉은 몸으로 그 때의 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청년은 붉은 몸통을 지니고 신라의 여인은 청정한 소나무의 잎이 되어 한 몸으로 백마강을 내려다봅니다. 타오르는 정염이 냉가슴 되어 사철 푸른 잎으로 피어 있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안으로 숨 죽여 은은한 솔향기를 품어낼 수밖에 없나 봅니다.


  고란사 앞 백마강은 한 폭의 그림으로 흘러간 옛 왕조의 꿈을 되새기게 합니다. 강가에서 밤을 지샌 백로들이 물결도 일지 않는 강 위를 유유히 날고 있습니다. 옛 영령들께 소리 공양을 올리는 스님의 대금소리에 그들도 영들과 함께 아늑한 그리움 속에 묻힙니다. 소리는 백로들의 날개에 실려 멀리멀리 퍼져나갑니다. 아니 피리소리에 실려 백로들이 날아갑니다.


  신라의 공주와 백제 청년의 청춘을 누가 돌려 줄 수 있을까요. 아! 다시올 아름다운 청춘의 날들을 꿈에라도 그립니다. 그들은 다음 천년을 꿈꾸어야 했을까요? 그 땐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들과 손에 손을 이어 잡고 아름다운 세상의 윤(輪)을 만들 겁니다. (2004 여름)
























7

감이 익을 무렵




  길 반대 쪽 먼발치의 자동차 옆에 서있는 한 신사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1960년 대, 그 시절, 인기 절정이었던 '초원의 빛'이란 미국 영화가 있었다.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청춘 한가운데서 보았을 때는 아름답게만 여겨진 영화였다.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여배우인 나탈리우드(윌마 분)와 남우 워렌 비티(버드 분)가 주연하고 있었다. 우리 세대의 여성이라면 많은 이들이 그토록 발랄한 청순함을 지닌 그녀를 잊지 못한다. 우리 친구들은 윌마가 수업 시간에 울먹이며 낭송하였던 워즈워즈의 시를 원문으로 베껴서 외우는 것을 즐겨 하였다. 마치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말이다.

  윌마와 버드는 같은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청춘이기 때문에 억제 할 수 없는 욕망으로 괴로워했던 그들의 순수한 사랑은 성숙하지 못했다. 사랑을 잃을 것 같은 불안이 격렬한 히스테리와 우울증으로 발전하여 윌마는 자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버드는 시골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도 낳았다. 어느 날 윌마가 시골 농가에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던 버드를 찾아왔다. 어떤 말을 할 듯 말 듯 하면서 서로 거리를 두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마지막 장면, 만감이 교차되는 옛 연인들의 눈빛이 지금도 가슴의 상흔을 스치듯 떠오른다. 정말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이었다.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있으나 강은 늘 그 곳에 있듯이 세월도 흐르고 우리들도 흘렀다.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교의 고학년이 되고 있었다. 다원(茶園)을 하고 있던 나에게 누가 찾는다는 전갈을 해 왔던 것이다.


  주방에 서면 뒷동네가 창문으로 가득 들어온다. 창 아래 감나무 밭은 아직 푸른 잎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긴 긴 폭우와 거친 태풍 속에서도 튼실하게 자라주었다. 태양의 사랑을 한껏 받은 열매들은 드디어 수줍음 타는 여학생의 볼처럼 홍조를 띠기 시작한다. 감나무가 둘러쳐진 마을에 살면서부터는, 감이 익을 무렵이 되면 스쳐간 그 때의 인연이 떠오르곤 한다.


  그는 항상 나를 멀리서 훔쳐보았었다. 그의 친구 집이 우리의 이웃에 있었다. 그는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의 끝 담벼락에 붙어 서서 얼굴을 살짝 내밀고 대문 쪽을 지켜보곤 했다. 어느 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친구들과 탁구장에 가기로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의외로 옛날 대갓집 같은 한옥이었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옆에 사랑채가 있었고 가운데는 아담한 정원이 있어 안채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방을 뜯어낸 사랑채 안에 탁구대가 있었다. 그 집에서 그 남학생을 만났다. 알고 보니 내 친구와는 사촌 간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서울에 계셨다. 그는 큰 솟을대문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전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우리는 가끔 그의 집 그늘진 툇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식히며 얘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학교에서 공부한 내용을 주고받는 것 외에 별 다른 화제가 없었다. 그는 같은 대학에 진학하자는 이야기도 하였으나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사색적이며 늘 외로워 보였다. 그는 자주 내 친구를 통하여 편지를 전해왔다. 하교 길에 우연히 마주쳐도 멀리서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따로 만나지 못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길 가장자리로 고개를 숙이고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무렵 갓 설립된 전북대학교의 건물 주변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 사방이 꽃 숲을 이루고 있었다. 졸업기념 사진을 찍기 위하여 누구나 한번쯤 그 코스모스 들녘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맑은 가을의 어느 날 꽃길에서 만난 그는 책 한 권을 내게 주었다. 신지식의 '감이 익을 무렵'이었다.


  친구들 사이에 내가 그를 만난다는 소문이 난 것을 알고 그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때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얼마 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손가락 끝을 깨물어 그렸을 하트 모양의 그림에서 선홍색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아무에게도 말도 못하였고 물론 답장도 하지 않았다. 내 쪽에서는 저 영화처럼 애절한 사이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심정을 몰라준 것이 새삼스레 미안하다.

  대학생이 된 후, 어느 날 S대 마크가 달린 교복을 입은 청년이 우리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내 친구 뒤에 서 있는 그를 멀리서 보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쳐다보기만 하였다. 세월이 또 흘렀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시청 앞 대한빌딩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냥 반가웠다. 우리는 덕수궁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의 창가에 앉았다. 나는 아직 미혼이었는데 그는 이른 결혼을 했고, 결혼생활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외로워 보였다. 매일 만나던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또 헤어졌던 것이다.


  '감이 익을 무렵'은 '고슴도치 선생'외에 가을의 정취를 풀씬 풍기는 단편집이었다. 맑고 고운 감성을 가진 여고생들이 발견하는 기쁨과 슬픔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이야기들이었다.

청소년들의 정서에 맞은 이야기들이어서, 그때 그 남학생은 그와 같은 심정을 나와 함께 나누고 싶었을 것 같았다.

  또 한 세월이 흐른 후였는데, 어엿한 신사가 되어 추억을 다시 찾았던 모양이었다. 얼굴의 윤곽과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거리를 두고 서서 망연히 서로를 쳐다보는 동안, 나는 '초원의 빛'의 마지막 장면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윌마가 수업시간에 낭송했던 시 구절을 가만히 읊조렸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 다시는 그것이 안 돌려진다 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 초원의 빛이여!…"







 

 

8

침묵의 강

 

 

 

  오랜만에 그윽한 친구가 나를 찾는다.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다정한 친구라면 한나절  

숲 속으로의 짧은 여행도 좋으리라. 그래! 오늘 우리,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 너머로 가자.  

너무나 잘 아는 우리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은 풍요해  

질 것이다. 머리가 무겁고 피곤해질 때면 자주 명상에 들면 좋다. 밭에 가서 흙과 하나 되는 일  

명상도 있고, 일상에서도 매사에 집중하면 명상이 일어날 때도 있으나 아무래도 삶의 장면을  

바꿔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푸른 들녘을 지나 호수가로 갔다. 강물에 안겨 잠자는 산처럼 그렇게  

부드러운 우주의 품 안에 잠들고 싶다. 며칠 만에 햇살이 날개를 편 날이어서 호수 가는 자동차들이  

뜨거운 볕에 지친 듯했다. 

 

  자, 지금부터 우리는 침묵의 강을 유영한다. 졸리면 그 강물에 안겨 깊이 잠드는 거야. 마치 성가를  

부르는 미사의 시간 외에는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사처럼, 생각도 쉬고  

일어나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도 버리고 단지 깨어 있는 정신과 순수한 감성만 열어놓자. 

   우리는 금산사로 향한다. 차창을 여니 계곡의 물소리가 합창을 하듯, 새소리는 풀륫처럼 독주를  

하고 힘찬 여름의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우리는 일주문 아래에 차를 놓고 걷는다. 숲 속의 바람이  

살결 속으로 기어 들어와 끈끈한 열감을 식혀준다. 

   일주문으로 들어가며 생각한다. 불자들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귀의할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  

너와 내가, 부처와 중생이, 반야와 번뇌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해탈문으로  

들어서는 계단을 오르면서 서원을 한다. 가슴의 불순물은 쏟아내고 들어오는 우주의 힘을 마음껏  

받게 하소서! 금강문을 들어서면서 진리 안에서 우리와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기를 굳게 빌어 본다.  

사천왕문을 지나면서는 옷깃을 여미고 우리 안의 모든 집착의 끈을 풀도록 하리라 마음먹어야 한다.  

무서우니까.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 해는 서산 숲 위에서 싱싱히 노닐고 있다. 먼저 우리는 공양 간으로  

가서 저녁 공양부터 했다. ‘이 음식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고, 이 음식을 받아 진리를 수행하는  

약으로 삼아라’ 는 절간의 공양 기도문을 생각했다. 오직 밥을 먹는 것은 사람으로서 꼭 수행해야하는  

진리를 행하는데 필요한 약으로 삼으라는 지엄한 뜻을 새긴다. 설거지는 각자 스스로 하도록 되어 있다.  

밥그릇을 닦으면서 세상일도 버리고 마음도 닦는다. 

   보제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오르니 새로운 불국정토가 열리는 듯 절 마당이 펼쳐지면서 대적광전이  

품 넓게 우리를 안으러 다가오는 것 같다. 대적광전과 미륵전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 참 서서 바라보다 미륵전 앞의 산사나무 앞에 선다. 안쓰럽게도  

올 해는 두 둥치를 끈으로 묶어 두었다. 한 쪽 둥치 속이 다 파여서 더 이상 두면 꺽어져 넘어질 것  

같다. 조그만 산사 열매가 옹기종기 달려 있어 갸륵하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이왕 절에 왔으니 오랜만에 예불에 참여해 보자. 예불 시간에  

들리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부르는 예불문은 얼마나 듣기 좋은 만트라인가. 대적광전이 불타서 지금의  

법당이 세워진 지난 86년도 무렵에는 차(茶)활동을 같이 했던 스님과 함께 이 절 마당을 자주 다니면서  

석탑돌이도 하고 차공양도 올리지 않았던가. 불교 신도는 아니면서 스님과 친구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천주교에 적을 두면서도 모든 종교나 자연의 가르침이 하나라는 데서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맞추어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금산사의 부도탑 뒷산의 차밭에서 찻잎을  

따서 덖고 비볐던 때의 차향이 법당의 분향 내음 속에 묻어나와 신비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스님들의 예불문이 울려퍼지자 따라서 절을 하고, 일어서고, 엎드리고,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를  

합창하다보니 우리는 벌써 부처님들의 가피 속에 들어 있었다. 법당안의 비로자나불이 주불이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과 여러 보살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필요는 없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나 문화재에 대한 지식은 마음을 맑히는 데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냥 거룩한 부처들을 부르고  

‘지심귀명례’를 제창하고 또 여러 보살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부르면 그분들이 우리들의 소리를 듣고  

마음을 알아주리라고 믿어 본다. 법종각에서는 중생들을 깨우는 법고 소리가 천지를 은은히 울린다.  

잠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는 물고기들처럼 깨어 정진하라고 일깨우는 목어를 두드리는 소리,  

날 짐승을 성도하는 구름판을 울리는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조화처럼 온 도량을 구석구석 울리면서  

퍼져나간다. 신중단을 향해서 부르는 반야심경을 끝으로 예불은 끝난다. 스님 한 분은 계속 남아서  

염불을 한다. 나와 친구는 눈과 마음을 맞추면서 열어놓은 법당 창문의 틀에 걸친 두 팔에 턱을  

괴고 앉아 한 눈에 펼쳐져 보이는 고즈넉한 절 경내를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오묘한 조화 속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뒤로 하고 추억의 오솔길인 야생화 밭을 잠시 거닐다가 우리는 두 기둥이 하나가  

되어 일주문이 된 것처럼 한마음이 되어 해탈교를 밟고 내려왔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기 전. 이내 낀  

산이 이제야 긴 휴식에 들었는지 강물에 푹 안겨 잠든 호수. 물결만 잔잔히 이랑지는 강물 속에는  

산이 가득 자리하고 있어 그 무엇도 비집고 들 공간이 없었다. 마침 두 사람이 탄 쪽배가 피안을  

향하는 듯 산그림자의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지나는 풍경이 참 평화스럽게 보였다. 물에 뜬 듯  

한 종이학의 불빛과 조양월의 불빛이 수면에 얼비치어 산 그림자에는 오색의 빛 고드름을 걸어놓은  

듯하다. 깊고 고요한 수면일수록 아롱거리는 빛물살은 더 아름다운 법이다. 아른거리는 빛 결을  

타고 우리도 침묵의 강 언덕에 닿아 자유의 날개짓인냥 기지개를 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리는 음악은 우연히도 그레고리안 성가들의 모음이었다. 혼성 합창곡으로  

들려오는 성가는 법당에서 들었던 예불문에서 느꼈던 그 맛과 어쩜 그리도 같은지. 지금 막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세례를 받고 나오는 것 같았다. 

  침묵의 여행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다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좋다. 언제라도 침묵의 강가에 서면 다가오는 내 마음인 친구이다. 

 

(2004년 7월 10일)  

 

 

 

   

 

 

 

8.

침묵의 강

 

 

 

  오랜만에 그윽한 친구가 나를 찾는다.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다정한 친구라면 한나절  

숲 속으로의 짧은 여행도 좋으리라. 그래! 오늘 우리,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 너머로 가자.  

너무나 잘 아는 우리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은 풍요해  

질 것이다. 머리가 무겁고 피곤해질 때면 자주 명상에 들면 좋다. 밭에 가서 흙과 하나 되는 일  

명상도 있고, 일상에서도 매사에 집중하면 명상이 일어날 때도 있으나 아무래도 삶의 장면을  

바꿔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푸른 들녘을 지나 호수가로 갔다. 강물에 안겨 잠자는 산처럼 그렇게  

부드러운 우주의 품 안에 잠들고 싶다. 며칠 만에 햇살이 날개를 편 날이어서 호수 가는 자동차들이  

뜨거운 볕에 지친 듯했다. 

 

  자, 지금부터 우리는 침묵의 강을 유영한다. 졸리면 그 강물에 안겨 깊이 잠드는 거야. 마치 성가를  

부르는 미사의 시간 외에는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사처럼, 생각도 쉬고  

일어나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도 버리고 단지 깨어 있는 정신과 순수한 감성만 열어놓자. 

   우리는 금산사로 향한다. 차창을 여니 계곡의 물소리가 합창을 하듯, 새소리는 풀륫처럼 독주를  

하고 힘찬 여름의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우리는 일주문 아래에 차를 놓고 걷는다. 숲 속의 바람이  

살결 속으로 기어 들어와 끈끈한 열감을 식혀준다. 

   일주문으로 들어가며 생각한다. 불자들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귀의할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  

너와 내가, 부처와 중생이, 반야와 번뇌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해탈문으로  

들어서는 계단을 오르면서 서원을 한다. 가슴의 불순물은 쏟아내고 들어오는 우주의 힘을 마음껏  

받게 하소서! 금강문을 들어서면서 진리 안에서 우리와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기를 굳게 빌어 본다.  

사천왕문을 지나면서는 옷깃을 여미고 우리 안의 모든 집착의 끈을 풀도록 하리라 마음먹어야 한다.  

무서우니까.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 해는 서산 숲 위에서 싱싱히 노닐고 있다. 먼저 우리는 공양 간으로  

가서 저녁 공양부터 했다. ‘이 음식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고, 이 음식을 받아 진리를 수행하는  

약으로 삼아라’ 는 절간의 공양 기도문을 생각했다. 오직 밥을 먹는 것은 사람으로서 꼭 수행해야하는  

진리를 행하는데 필요한 약으로 삼으라는 지엄한 뜻을 새긴다. 설거지는 각자 스스로 하도록 되어 있다.  

밥그릇을 닦으면서 세상일도 버리고 마음도 닦는다. 

   보제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오르니 새로운 불국정토가 열리는 듯 절 마당이 펼쳐지면서 대적광전이  

품 넓게 우리를 안으러 다가오는 것 같다. 대적광전과 미륵전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 참 서서 바라보다 미륵전 앞의 산사나무 앞에 선다. 안쓰럽게도  

올 해는 두 둥치를 끈으로 묶어 두었다. 한 쪽 둥치 속이 다 파여서 더 이상 두면 꺽어져 넘어질 것  

같다. 조그만 산사 열매가 옹기종기 달려 있어 갸륵하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이왕 절에 왔으니 오랜만에 예불에 참여해 보자. 예불 시간에  

들리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부르는 예불문은 얼마나 듣기 좋은 만트라인가. 대적광전이 불타서 지금의  

법당이 세워진 지난 86년도 무렵에는 차(茶)활동을 같이 했던 스님과 함께 이 절 마당을 자주 다니면서  

석탑돌이도 하고 차공양도 올리지 않았던가. 불교 신도는 아니면서 스님과 친구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천주교에 적을 두면서도 모든 종교나 자연의 가르침이 하나라는 데서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맞추어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금산사의 부도탑 뒷산의 차밭에서 찻잎을  

따서 덖고 비볐던 때의 차향이 법당의 분향 내음 속에 묻어나와 신비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스님들의 예불문이 울려퍼지자 따라서 절을 하고, 일어서고, 엎드리고,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를  

합창하다보니 우리는 벌써 부처님들의 가피 속에 들어 있었다. 법당안의 비로자나불이 주불이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과 여러 보살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필요는 없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나 문화재에 대한 지식은 마음을 맑히는 데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냥 거룩한 부처들을 부르고  

‘지심귀명례’를 제창하고 또 여러 보살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부르면 그분들이 우리들의 소리를 듣고  

마음을 알아주리라고 믿어 본다. 법종각에서는 중생들을 깨우는 법고 소리가 천지를 은은히 울린다.  

잠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는 물고기들처럼 깨어 정진하라고 일깨우는 목어를 두드리는 소리,  

날 짐승을 성도하는 구름판을 울리는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조화처럼 온 도량을 구석구석 울리면서  

퍼져나간다. 신중단을 향해서 부르는 반야심경을 끝으로 예불은 끝난다. 스님 한 분은 계속 남아서  

염불을 한다. 나와 친구는 눈과 마음을 맞추면서 열어놓은 법당 창문의 틀에 걸친 두 팔에 턱을  

괴고 앉아 한 눈에 펼쳐져 보이는 고즈넉한 절 경내를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오묘한 조화 속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뒤로 하고 추억의 오솔길인 야생화 밭을 잠시 거닐다가 우리는 두 기둥이 하나가  

되어 일주문이 된 것처럼 한마음이 되어 해탈교를 밟고 내려왔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기 전. 이내 낀  

산이 이제야 긴 휴식에 들었는지 강물에 푹 안겨 잠든 호수. 물결만 잔잔히 이랑지는 강물 속에는  

산이 가득 자리하고 있어 그 무엇도 비집고 들 공간이 없었다. 마침 두 사람이 탄 쪽배가 피안을  

향하는 듯 산그림자의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지나는 풍경이 참 평화스럽게 보였다. 물에 뜬 듯  

한 종이학의 불빛과 조양월의 불빛이 수면에 얼비치어 산 그림자에는 오색의 빛 고드름을 걸어놓은  

듯하다. 깊고 고요한 수면일수록 아롱거리는 빛물살은 더 아름다운 법이다. 아른거리는 빛 결을  

타고 우리도 침묵의 강 언덕에 닿아 자유의 날개짓인냥 기지개를 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리는 음악은 우연히도 그레고리안 성가들의 모음이었다. 혼성 합창곡으로  

들려오는 성가는 법당에서 들었던 예불문에서 느꼈던 그 맛과 어쩜 그리도 같은지. 지금 막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세례를 받고 나오는 것 같았다. 

  침묵의 여행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다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좋다. 언제라도 침묵의 강가에 서면 다가오는 내 마음인 친구이다. 

 

(2004년 7월 10일)  


 

 

 

9

길 잃는 즐거움


 



  톨케이트를 빠져 나왔다. 달리다 보니 호남고속도로가 아니었다. 자동차 길에서는 잘 못 든 길인 줄 알아도 그 자리에서 되돌릴 수 없다.


  호숫가에서 잠시 허리를 폈다. 하늘이 검어지더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우르르꽝! 후두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물이 강물처럼 앞 면 유리창을 흘러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아 달릴 수 없었다. 차라리 난타음악을 감상하고자 눈을 감았다. 난타가 머리 속을 후벼내어 시원해지자 주위가 조용해지는 듯하여 눈을 떴다. 피로가 가시고 앞 길이 훤히 보였다. 아차! 하는 순간에 또 다른 톨게이트라니! 통행카드도 뽑지 않은 채 되돌아 빠져 나오려고 했다. 도로공사 사무실에 들러 통행료를 지불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상월면 가는 길을 확인한 후, 한적한 옛날 시골길을 산책하듯 돌아 나왔다. 목적지의 이정표를 만나고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해지기 전에 당도하기만 하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집이기에 서둘 필요는 없었다.

 

  길이 많아서 헤맬 수밖에 없는 현대인. 이미 잘 닦여진 길은 어디든 통하기 마련이다. 빨리 가야 할 어떤 이유도 없으니 애탈 것도 없었다. 그냥 길에 맡기기로 했다. 밤은 깊어 가는데 우리는 약간의 흥분마저 느끼면서 야릇한 호기심까지 느꼈다. 가다보니 대청호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났다. 밤이긴 하지만 정처 없이 대청호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호수를 끼고 한여름 밤을 달리는 기분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여행은 어차피 예기치 않은 일로 신선한 즐거움과 새로운 풍광을 만나는 짜릿함을 맛보기도 한다.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름밤의 이야기에 잠들 줄 몰랐다.


  소나무 숲 속 높은 바위에 앉았다. 아침의 서늘한 공기 속의 솔 향이 온 몸에 스며들었다. 먼발치의 산 능선이 소나무 잎 사이에 걸쳐 있어 마치 산꼭대기에 떠 있는 듯했다. 솔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빛줄기들이 눈부셔 안개 속의 여로에서 깨어났다.


  우리 앞에 여러 갈래의 삶의 길이 뻗어 있었지. 그러나 오직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다가 험난한 고갯길과 가시밭길도 만났다. 비바람도 폭우도 만났다. 그래도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여우비가 내리는 여름날은 무지개를 만나는 행운도 있었기에. 무지개 다리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그만 둘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아직 가야할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는 동안 안개 속을 헤매다 놓친 소중한 그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길을 끝까지 가 본 사람은 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는 것을. 자기의 길을 넘어온 사람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통할 수 있다. 같은 세상 길을 걸어온 것처럼, 오랜 지기처럼.


  원시목 가로수가 도열하여 길 양 쪽 나무 끝 사이에 파란 융단이 깔린 듯한 그 길은 여름   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울창한 숲이 하늘 가운데 터널을 이루는 그런 길도 얼마나 가고 싶은 길인가. 산자락에 편히 앉아있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 따라 나있는 흙모래 언덕길은 언제나 가고 싶은 고향 길이다. 낙엽이 나뒹구는 가을 숲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그리움의 길이다. 자욱한 안개의 신비한 유혹에 이끌려 미로를 헤맬 수도 있다. 자칫 이정표를 잘 못 본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엇갈리게 할 수도 있다. 길 저쪽에 있는 이파리 하나, 희미한 피리 소리가 내 인생에 머물며 어떤 무늬를 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모든 길의 허허로움을. 아득했던 슬픔과 고통을 안고 한 때 사랑했던 기억만으로도 지친 세월은 아름다운 길이었다는 것을. 마음의 행로, 그렇게 많은 세상살이의 길, 어떤 길이 진정으로 우리가 가야할 깨달음의 길일까. 어떤 길이 참으로 가야 할 길인지, 진리에 이르는 길도 시대에 따라 너무 많아서 사람들은 길을 잃는다. 좌우, 양극단의 벼랑길은 떨어지기 쉽다.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탄탄대로인 중도(中道)의 길은 어디인가.


  길 위에서 우리는 자주 묻는다. 내가 무엇이기에 여기에 있으며,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향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왜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었던 인생의 행로, 저 피안의 세계에서 차안으로 떠나올 때 터지고 만 충격의 봇물은 망각의 늪을 이루었다. 여행에서 도착해야 할 곳이 우리가 떠나온 지점이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되돌아가야 할 본향인 피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다시 깨어나 그 길을 밝혀내야 하는 임무가 우리의 세상길인가 싶다. 결국 도착할 곳은 떠나온 그 출발의 자리였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도 언제나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

(2003. 8.)     

 

 


10

겨울 들녘



  어디로 갔을까?  봄부터 설렘으로 왔던 잎새들이 행진을 마치고 고운 단풍 빛으로 마지막 혼불마저 다 내뿜더니……. 거리를 나뒹굴던 꿈의 껍질조차 아쉬운 마음 다 떨구고 겨울 들판에 선다. 길가의 살랑이던 코스모스 꽃잎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꽃대만 남겨둔 채 어찌 떠날 수 있었을까. 길가의 마른 풀잎 하나도 차마 스러지지 못하는 것은 아직 못다 함이 있는 걸까. 물기 마른 억새풀들이 허수아비처럼 서서 빈 들녘을 지키고 있다. 돌아가 버린 잎새들의 소식이 다시 올 때까지 겨우 내내 빈 몸을 서걱대리라.


  어디쯤 가고 있을까? 터 자리까지는 잘 닿았을까. 날아가다 험한 골짜기 돌 틈새에 차곡차곡 쌓여서 눈발의 구원이라도 기다리지나 않을까. 가다가 빈 모서리 터의 품안이 차라리 아늑하여 그냥 주저앉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날들의 추억, 치열했던 한여름의 이야기들을 빈 들판은 쉽게도 삼켜버린다.

비어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는 편안하다는 것을 벌써 겨울 들판은 터득해버렸다. 목련나무에서 바스락거리던 잎새들이 다 떨어지자 빈 가지에 털 보송보송한 꽃눈이 가지마다 맺혔다. 매실나무 빈 가지에도 어느새 총총히 맺힌, 아직 꿈을 꾸기에도 애처로운 꽃눈이, 눈 시려 실눈을 배시시 언제까지 감고 있어야 할까. 어찌 긴 겨울 동안 꿈이라도 제대로 꿀 수 있을지. 산 너머에서 밝아오는 여명의 빛깔처럼 그려지는 꿈속의 이야기. 황량한 바람이 가슴속을 에이 듯 스쳐 가는 겨울 들판에서 도리어 꽉 차 오르는 알 수 없는 공한(空 )을 느낀다.


  지금은 동안거 중. 솜사탕 같은 눈송이가 펄펄 날고 있다.  빈 들녘이 갑자기 활기를 띄며 술렁대는 것 같다. 사랑했던 이들의 소식인 양 눈발이 난무한다. 몇 생을 살다 가도 못다 한 남음이 너무 많아 침묵의 춤사위로 날아온다. 무거운 커튼을 드리운 채 자신의 일에만 여념이 없는 사람들은 창을 두드리는 낌새도 들리지 않는다..

  저 하늘가의 별이 되기 전에 다시 되돌아 온 걸까. 눈 내리는 날 호수 가의 벤치에 가면 사랑했던 이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다. 세상 떠난 이들과 사랑했던 이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엔 바다까지는 못 가도 호수에라도 가본다 . 물결이 찰랑거리는 호수에서 청둥오리떼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하늘을 가득 나부끼며 내리는 눈발을 맞으며 노닌다. 눈구름이 하늘을 덮고 호수 면까지 내려와 건너편 산도 기슭의 외딴 집도 모두 숨겨버린다. 차창을 두드리는 눈발들의 손짓이 분주하다.

  세월의 한 마디가 맺히는 길목의 밤. 교회의 첨탑에 달린 별꽃 잔치에 들뜬 도시의 요란함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땅에 자리 할 수 있을까. 하늘을 우러르지 않아도 별들의 잔치는 도시 상가의 골목마다 빛난다. 언덕 위의 학교 건물의 꼭대기에 내려앉은 동방박사의 큰 별 아래 줄지어 선 불꽃놀이가 아름답다. 금가루로 만든 별꽃들이 오히려 구원을 요원하게 하지는 않을까……. 구세주 오신 이래 세상은 얼마나 구원받고 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생명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골짜기에는 오늘도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지구 반대편의 전쟁게임은 잠시 소강상태인 것 같지만 언제 사막의 폭풍이 일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바뀌니 나라 안은 더 시끄럽고 정치권은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것만 같다. 그건 내가 정치나 경제에 대해 무식하여서인 지도 모른다. 금강산 관광 10주년 동안 그나마 열려 있던 남북의 통로도 되려 얼어붙고 말았다. 언제나 정치권은 태풍을 몰고 올 것만 같지만 실지로 불지는 않는다. 년 초부터 수입소고기 파동에다 멜라민 소동까지 년 내내 시끄러웠다. 미국 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곧 바로 우리 '목줄'을 죄고 있다는 뉴스도 야단이지만 결코 남의 탓만은 아닐진대, 우리 목은 실지로 성성할 것이다. 고대로부터 언제나 현실은 혼탁하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봄은 언제나 왔다.

  지난 11월 미국의 대선에서 흑인 출신인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어 전 세계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무위원과 국회의원들에게 그의 정책을 배우기 위해 '오바마 배우기'의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지구촌의 인구가 그에게 축하를 아낌없이 보내는 이유는 그가 절망을 희망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노력의 결과에 있다. 우리 경제계에는 10년 전의 위기보다 더한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고도 한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말 '오바마 정책 배우기'보다 앞서 '오바마 인간 승리'의 내용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강 건너 불을 보듯 뻔한 세상일지라도 멀리서 보이는 마을의 불빛은 정답게 다가온다. 모든 사태는 좀 거리를 두고 볼 일이다. 그러면 세상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 사랑했던 이들과 길 떠난 이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호수에 갔더니 강풍에 휩싸인 눈발이 휘날린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각종 사기 극이 눈발처럼 난무하는 빛이 닿지 않는 으슥한 뒤안길에도 하얀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눈발이 앞을 가려 길은 잘 보이지 않고, '사랑이 내려오네……,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외치는 듯 귓전을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