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 에세이 2집

에세이 2집 5부, 망각의 여행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8. 00:41

5부

                

1. 땅끝마을 통신

2. 난 그리고 현대인

3. 그들은 누구인가

4. 우리 자식

5. 오! 필승코리아

6.  윈윈(Win Win) 낙원촌 운동회

7.  기쁜 소식

8.  훈풍인가 삭풍인가

9.   동짓날의 설난

10. 서울 1945

11. 강남 하숙생

12. 망각의 여행


 

 

 

 

 

1

땅끝 마을의 통신





통신 (1)


"삶은 만남이라고

꽃이 바람에게 바람이 비에게

속삭입니다.


만남 속으로 흘러 들어가

임 아닌 것 없는 세계를

흠모합니다."


땅끝 마을에서 온 선물 상자 속,

많은 만남의 이야기

망초꽃 한 잎, 이파리 한 잎을 붙인 편지지에

황토물이 들어 있어요.


흰 감자 알들, 붉은 감자 알들,

양파 님 몇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가루가 되도록 자신을 부시고 짓이기고

삭혀서 만든 된장이 한 통 놓여 있어요.


그리고 또

그 모든 님들은

헤아릴 수 없이 다정한 만남의 손길


삶은 만남이라고

감자 한 알, 양파 껍데기에 붙어 있는

황토 님들이 내게 속삭이고 있어요.


(2005년 6월 18일)





통신 (2)



  “삶은 만남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어느 고구마는 굼벵이와 만나 쓴 물을 몸에 입고 지도처럼 훈장을 입었습니다. 생에 있어서 어느 무엇과 어떤 만남을 긴밀하게 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모습을 하게 되겠지요. 만남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팔월의 밤고구마를 환영합니다.”


  오늘 해남에서 보내온 고구마를 만나서 맛있는 만남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생명들은 무수한 만남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해지는 것인가를 알아 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랑하기 위해서는 고구마처럼 캄캄한 땅속에서도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성공할수록, 좋을수록 붕 떠 있을 수 없는 것일 테지요. 오히려 겸손하게 땅으로 다시 내려 올 줄 알아야 하겠지요. 세월이 갈수록 얻어 채우고 벌어 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사라져 가는 것이 있으며 잃어 가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세월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우리 영혼에 차곡차곡 쌓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타고난 존재 자체의 외로움이 운명이라면, 혼자 있으면 외로움 하나이지만 둘이면 외로움이 둘이니 사랑하면 할수록 고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독에 익숙할수록 오히려 더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고독해진다는 것은 결코 고립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진정한 고독에서 참사랑이 시작되는 지도 모릅니다.


  땅속에서 고구마는 어린 싹일 때부터 많은 만남을 통해 자신을 살찌웠겠지요. 그것은 여름날의 매미가 땅 속에서의 전생을 체험해야만 했던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만의,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생을 살았으며 드디어 땅 위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자신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오늘 8월의 고구마의 방문을 받고 참 고독한 행복을 맛봅니다. (2005년 8월 30일)



통신 (3)


  오늘 두륜산 기슭으로부터 선물 꾸러미가 도착했습니다.

네모난 상자를 풀었습니다. 꼭 찹쌀떡 같은 모양으로 빚은 청국장 덩어리가 6개 말간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어김없이 통신이 들어 있습니다.


청국장 맛있게 드시는 법


1.  멸치와 다시마 청국장을 함께 풀어 신 김치 서너 개와 푹 끓인다. (식성에 따라 두부를      넣습니다. 서로 잘 어울림)

2.  마지막에 청국장 한 숟갈을 더 넣어 살짝 한소끔 더 끓인다.

(살아있는 미생물을 몸으로 받아 모심)


꼭  해야 함 !!!


*  콩밭 사이 일렁이는 바람의 땀 냄새를 맡을 것

*  햇빛으로 구워진 여름 콩밭과 시원한 비 오염 안 된 흙 알들, 두륜산 그늘 벌레 님의 왕     성한 활동을 가슴으로 느낄 것

*  유기농 볏짚과 콩 님이 사흘 밤낮을 옴짝 안하고 소통하였습니다


그 님들이 정성으로 만나듯

삶에서의 모든 님과 사건과 형편과 정성스럽게 만나고자 합니다.   000 올림


  이랑을 춤추듯 오락가락 하는 땅끝 마을 님들을 떠올리며 청국장을 끓입니다. 부드러운 찰떡같은 청국장을 한 수저 뜹니다. 진득한 살결 세포 사이로 정말 바람의 땀 냄새가 베인 듯합니다. 뜨거운 햇볕에 잘 구워진 원래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햇빛에 달구어진 바람의 땀에 젖는 콩 대에 달려서 아직 어릴 때부터 맑은 흙 알들이 보내준 영양과 빗물 타고 오신 하늘의 뜻을 담고 무럭무럭 자랐던 때. 천둥번개가 몰고 오는 태풍 폭우를 이기고 드디어 낱알이 모여서 얼마나 많은 연단 끝에 얻은 반지르르한 잘 난 얼굴을, 오래 간직하지도 못한 채, 또 가루가 다 되도록 자신을 다 바쳐 변신했습니다. 그리고 또 삭히고 죽어서 다시 볏짚과 사흘 밤낮을 옴짝달싹도 않고 밀월을 보냈겠지요. 사랑도 지극합니다. 아니 지독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결실이 바로 내게로 온 청국장 님입니다. 청국장이 되기까지 혼신을 다하여 정성을 모아 삶의 과정 모든 님들과 상황과 만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환경과 사건과 형편과 다를 것이 없는 삶입니다.

난 그들처럼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삶을 만났던가 부끄러웠습니다. 이제라도 그 엄숙한 삶의 의례를 청국장이 된 콩 님처럼 하고 싶습니다. 잘 발효된 청국장처럼 나의 모든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하루살이 속의 나를 만나는 것을 정성스러이 소통하여야겠습니다. 볏짚과 콩 님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청국장에 살아있는 미생물 님을 정성스레 모셔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미생물을 다치지 않고 모시기에는 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아직 잘 발효되어야 할 삶의 여지는남았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마지막 남은 것은 희망입니다. 세상을 여위는 순간에도 그랬으면 합니다. 청국장의 사랑이 새해를 다짐하며 내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2005년을 보내며 12월 29일)


통신 (4)


  "2월 말 쯤 이중 하우스에 고구마를 묻었습니다.  (고구마 순 기르는 일)

풀들이 먼저 나왔습니다. 일주일 후쯤 아기 손 같은 고구마 순이 올라왔습니다.

고구마 순과 풀님들 … . 4월 말에 이어 5월 초에 본격적인 밭으로 고구마 순들을

잘 심었습니다. (고구마 순을 잘라서 밭에 심음)

우리들을 잘 돌봐주시던 여든 여덟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맞는 고구마 풀뽑기, 심기, 거두기입니다. 우리 동네에서도 다른 동네에서도 그 아짐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는데, 많이 생각났습니다. 아짐의 손이 거쳐 간 농작물들도 그러했겠지요?

긴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고구마는 스스로 잘 견뎌야 했습니다. 주로 산아래 황토밭에 살고 있거든요. 캐고 보니 검은 먹점도 생겼고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대체 봄에서 가을까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잘 살고 있었을까요? 그의 몸을 보면서 그가 다녀왔을 '그 어딘가'를 상상합니다. 고맙습니다. (카페/다음/다이룬집, 흙살림인증유기농))"


<바람의 커튼>에 햇 봄에 만든 차 한 봉지를 고이 싸서 보냈습니다. 잘 익었을 차 맛이 이 가을쯤에 향기가 더 발효되었을 것 같았습니다. 누구보다 귀이 그 차 맛을 보아줄 이이기에. 한밤중을 마다 않고 달려온 고구마님들입니다. 그들이 다녀왔을 '그 이딘가'를 차잎들도 나도 다녀왔을 것이며, 또 다닐 것이며 '그 어딘가'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어딘가'를 이 세상 끝에서 찾아 나설 날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침에 속살 노오란 고구마와 한 몸으로 만났습니다. 참 달았습니다. 차 한 잔과 나누는 이 가을 맛입니다. (2008/10/10)



 


2

난蘭 그리고 현대인





  땅 속이 들썩거리는 기운이 돌면 괜스레 마음이 서성거려진다. 나무 가지 끝으로 물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면 내 몸 속의 세포 사이에서도 생긋거리는 봄기운이 느껴진다. 이제는 텃밭을 가꾸지 않는데도 촉촉한 땅을 뒤집고 싶다. 모종이 나올 때쯤이면 더욱 그렇다.


  이른 봄 어느 날, 평생교육원 문을 나서자 길거리에 채란 묘목이 허연 뿌리를 내놓고 수북히 모여 있었다. 발가벗겨져 채취되어 온 춘란이었다.직접 난을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내 큰 형부께서 평생 난 분을 가까이 두고 꽃을 피웠었기에 늘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또 사모하기도 했었다. 선인들이 수없이 화선지에 그렸던 묵란(墨蘭)의 실체가 아닌가. 관념적으로 그렸던 채란도(菜蘭圖)를 반가웠다. 허가를 받고 한 일이라며 가계 주인은 차분히 난을 분에 옮겨 심고 있었다.


  심산유곡에서 고고하게 피어있어야 할 춘란이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 나신으로 들어 누어 있다.  빨리 분에 옮겨 내 옆에서 가까이 보고싶은 욕심이 일었다. 지난해 봄에도 산 나들이를 갔다가 제비꽃을 옮겨와서 화분에 심었었다. 야생화를 온실에 갖다놓으니 잎만 크고 꽃은 피지 않았다. 그 때, 아차 싶어 들에다 다시 옮겨준 적이 있었다. 생명은 모두 자기 조건에 맞아야 잘 자라는 것을……. 집으로 와서 한 포기씩 난 포기를 떼어서 화분에 옮기니 세 분이 되었다. 오랫동안 난치기를 해보았어도 그 같은 난 잎을 그리지 못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낭창한 난 잎을 바라보노라니 안쓰러운 마음이 솟아났다. 꽃이 절정일 때 뿌리 채 흔들려 몸살을 앓는다면 그 생명으로서는 얼마나 치명적인 아픔일까.


  섭이 아빠가 생각났다. 그는 외국의 여러 나라를 많이 여행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계곡 언덕에 집을 짓고 돌담을 쌓았다. 미국식의 침실과 거실, 호주와 같은 잔디로 꾸몄다. 마당 가운데 의연한 자태로 서있는 감나무는 보기가 좋지 않다 하여 파내 버렸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고급 정원수와 느티나무와 선이 좋은 소나무들을 옮겨다 그림같이 배치하였다. 그는 또 큰 개를 좋아했다. 자신의 작은 체구를 대신이라도 해줄 것 같은 마음이었는지, 거금을 들여서 세퍼드를 구해놓았다. 유럽풍의 호랑이 개에다, 진돗개, 일본 종의 아끼다까지 집을 호위하는 파수꾼으로 두었다. 그는 손님을 접대할 때나 그 집을 사용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을 팔기 위해서 그렇게 치장을 했었던 것이다.


  도시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자 모두 불편한 한옥과 단독주택을 떠났다. 아파트 안은 거의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백화점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성(城)을 쌓고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즐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거래하기 좋은 사람끼리 가끔 교류한다. 거래 인생을 살고 있으니 언제나 허전한 구석을 안고 따로따로 섬처럼 그리움만 키워가고 있을까? 다양한 모습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우리다. 혼자 자기 식으로 하는 것은 쉬우나 누구든지 함께 하는 일은 힘들어 담을 쌓아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대다. 차라리 애완동물이 내 마음대로 하기 편리할지도 모른다. 귀찮은 것은 다 떼어버리고 맞춤장난감처럼 성형을 해서까지 옆에 두고 만지작거린다니 …….


  아파트 안은 자연을 축소해 옮겨 온자연 전시장 같기도 하다. 수족관이며 새장, 기이한 형상의 분재와 수석, 수많은 자연의 이미지들, 자연에서 채취해 온 것들 등. 문명인은 같은 구조물에서 같은 프로그램의 영상을 보며, 같은 브랜드의 옷과 음식을 찾는다. 인생의 내용도 판에 박은 듯 획일화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다 바쳐 자연을 애완 하는 삶을 살고 있지나 않은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밟고 있는 과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평생 집 한 칸 장만하여 살 때쯤이면 병들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날 문득 인생이 한여름 밤의 꿈인 것을 알았을 때는 너무 멀리와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던 걸까.


  "문명인들은 끈으로 목을 졸라매고, 발에는 가죽으로 족쇄를 채우고, 개미굴 같은 데로 기어 들어간다"고 말했던 남태평양 섬 어떤 추장이 지금도 살고 있을까? 문명의 진화는 급물결을 타고 흘러 그 물살을 타려면 힘도 많이 든다. 넓은 우리를 막고 있는 벽의 메뉴는 날로 늘어가서 각자의 울을 관리하기 바쁘다.  세계의 구석구석 자연한 오지까지 문명이 파고들어서 그 추장도 우리와 같은 문명인이 되어 어떤 별천지를 꿈꾸는 사람이 되었을지...


  난도 꽃을 피우려면 시련이 필요하다는데 몇 년이 되도록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잎만 살아 있는 춘란 분은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인가? 편안한 것이 결코 행복이 아닐진대 생태의 조건이 달라진 그 난분의 진정한 행복을 사람이 빼앗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돈만 밝히는 요즘 사람들의 상혼(商魂)에 동참한 것은 내 욕심인지도 모른다. 온실이 살 곳이 못된다고 시위라도 일으키면 그들의 고향을 찾아주어야 할까. 꽃이 필 시기가 오기 전에 극기 훈련이라도 시켜야 할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켜주는 식물도 탐욕의 마음으로 가까이 두려는 사람의 마음은 알고 있으리라. 그래도 맞춤형 개량종의 식물은 사람에게 공헌하는 바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인지, 사람의 애완용으로 전락했다 할 것인지 모르겠다. 세한(歲寒)지정을 느껴야할 사군자 중의 하나인 난은 이로써 군자의 덕을 잃어가고, 군자 같은 사람도 만나기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3

그들은 누구인가?




  햇볕이 아직 뜨거운 한낮 나는 시장에 나가 어떤 가게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손님들과 주인은 세상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지역의 연쇄적인 절도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집은 어떤 식으로, 다른 집은 다른 식으로, 금품뿐 아니라 사람까지 말 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해치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 류의 뉴스에 우리는 놀라워하지 않을 정도로 면역이 되어 있다. 그런 우리네 정서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 핵심은,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사회의 불안과, 그런 범죄자들은 모두 잡아서 없애야 한다는데 있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아'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범죄자,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하고.


  얼마 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한 소년이 집중 폭우에 자살해야 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그 소년을 맡았던 담임선생의 절규를 통하여 우리 어른들의 자세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소년은 번번이 학급우의 도시락을 훔쳐먹었고, 수업료를 훔쳐내어 말썽을 일으켰다. 차비가 없을 때면 으레 선생님에게 빌리기만 하고 갚을 줄 몰랐다. 마침내 급우들은 학부형들의 배려 하에 등교거부에 나섰다. 학부형들의 압력에 따라 교직원회의에서 소년에 대한 퇴학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소년의 심정을 이해하는 담임은 학교에서 마저 쫓아내면 누가 그를 받아 주겠는가? 한 번만 더 기회를 더 주자고 호소했지만 끝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 소년은 순수하고 착한 아이였다.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는 반신불수였으며, 누나가 공장에 다니며 그를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도시락은 언제나 아버지를 위해 제공되었다. 수업료는 습관적으로 훔치는 것이 아니었고 오직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그것도 때마다 부잣집 아이 것을 선택하는 것이 소년의 정당성이었다. 현상적인 내 것과 남의 것을 분별 못하는 소년을 담임은 끝까지 선도하려 하였고 소년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 사회학자는 말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죄가 있다면 무관심, 무절제, 무기력이라고. 그렇다면 누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인간과 사물과 현상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나의 행위와 소유물을 함부로 쓰거나 생명을 낭비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 죄인인 셈이다. 나는 곧 남의 바탕이며, 남은 나의 다른 모습이다. 존재란 바로 너와 나의 관계이며 뭔가를 주고받는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결국 나의 책임이다


우리 마음 속의 경계를 풀어버리지 않는 한 끝없는 혼란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의 이야기하듯 말하는 자, 듣는 사람, 이야기 중의 사람,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 1988)




4

우리 자식




  우리나라 말은 사물의 심층구조를 참 잘 나타내고 있다. <얼>은 <한>의 뜻을 담는다. 곧 하늘을 뜻한다. 이 <얼>이 공간적으로는 <울>이 된다고 한다. <우리>라는 말은 <울>의 풀이말인 셈이다.


  가장 좋은 계절이며 가정의 달인 오월에 우리자식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식, <얼의 자식>은 근원적으로 하늘의 자식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태는 어떤가? 말은 우리 자식이라 하면서 행동은 나의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하듯 소유물로 착각하고 있는 상태다. 소유물이라 할지라도 넓게 보면 나의 것은 원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분수에 걸맞게 소비함으로써 생산사업에 이바지하는 미덕이 될 수는 있으나 낭비해서는 안 된다. 내 자식은 하늘의 자식, 곧 나에게 맡겨진 하늘의 자식이므로 내 욕심이나 생각의 틀에 맞추지 말아야 한다. 정말 깊이 헤아려 볼 일이다.


  며칠 전 밤늦게 TV 청소년문제 좌담회를 잠깐 보았다. 어떤 분이 그 <문제>라는 단어가 유독 청소년이란 말 다음에만 붙는 것인가? 라고 말했다. 오히려 청소년들은 잘 되어가고 있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 거쳐야 할 고민들을 풀어가고 있기 때문이란다. 사실은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으므로 더 나쁜 현상이 야기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고 해결해 갈 일이다.

  유독 내 아이만은 돋보여야 하고, 모든 분야에 우수해야 하고, 몰래 과외 시켜 출세하도록 해야하며,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마음은 집착에 가깝다. 학교에서마저 서로 경쟁의식을 불어넣어 성적을 올려 학교의 명예를 높이려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결국 대립과 투쟁을 잘 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하고 있지나 않는지?


  <얼버이>에서 나온 말이다. 어버이의 뜻을 모르고 하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효>는 인간의 근본이다. 행사가 많은 달, 자칫 행사를 치르는데 급급하여 내용을 담지 못하면 즐거워야 할 날이 번거롭고 힘들기만 할 것이다. 연례행사로 되풀이만 하고 지나치면 무슨 의미와 발전이 있겠는가? 선물에는 마음과 행동이 포함되어야 하리라. 어버이께 꽃을 달아주는 마음이 행동의 열매로 맺어 익을 수 있어야 할 일이다. 곧 <얼>의 뜻에 맞는 것이면 마땅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어린이들의 마음이 그 순수성을 잃지 않도록 맑고 균형 있게 자라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사람이 순리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날, 특정한 날이 없어지고 본래의 아름다운 사람살이가 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를 이 가정의 달에 바래 본다.

(1988년 5월 전북일보)




5

오! 필승 코리아.



  초록 운동장을 둘러싸고 파도치는 홍색 물결, 그 뒤를 잇고 있는 거리 응원단의 붉은 깃발은 전국 방방곡곡 해외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8.15 민족의 해방 이후, 이렇게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물밀듯이 거리를 메우며 태극기를 흔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골을 넣는 그 순간의 전율, 보아도 또 보아도 통쾌한 짜릿함, 오! 필승 코리아, 따닥, 따닥, 딱, 대 - 한민국!두 팔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어찌 하늘인들 감응이 없었겠는가. 얼마나 굶주렸던 승리의 기쁨이었던지. 얼마나 오랫동안 억눌렸던 민족의 한이었던지. 한국축구의 승리는 한국인의 마음의 해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감격의 눈물 속에서는 갖가지 멍울 진 마음들이 씻겨지는 흐느낌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 하였다. 붉은 깃발의 물결은 개인과 개인, 가정에서, 사회에서, 계층 간의 갈등을 넘어 남북의 벽을 무너뜨리는 촉매제가 되어 평화의 물결로 이어질 것이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고 있는 2002년 6월. 한국 축구 역사의 신화가 창조되었다. 한국은 더 이상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다.

  백의민족의 색깔인 흰색은 붉은 색으로 물들여졌다. 장롱 속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간직되던 태극기가 거리의 열린 패션 무대에서 갖가지 응원 쇼를 연출해내고 있다. 예기치 않았던 우리 축구의 발전과 새로운 응원문화에 세계의 이목은 놀라움을 토해내고 있다. 새로운 코리아 이미지가 창조되고 있다. 붉은 색과 악마에 대한 선입견과 두려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붉은 악마는 귀여운 애칭에서 느껴지는 만화적 인격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렇게 월드컵은 이념적 허구와 종교적 도그마에서도 벗어나게 하는 고정 관념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얼마니 놀라운 변화인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체육 선생님이 맡았던 핸드볼 팀으로 스카웃 당하게 되었다. 주장이었던 내 단짝이 맨투맨 마크를 당하자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골게터가 되어서 승리한 적이 있었다. 우리 여고는 전국 무대에서 2연패를 거두어 학교의 이름이 전국을 흔든 적도 있었다. 학교의 다른 역할은 모두 반납하고, 수업도 반납하며 출전을 앞둔 훈련을 위해서는 기숙사 생활도 하였다. 그렇게 선수가 되어 활약하게 되자, 힘든 연습에 나는 실증이 나게되고 뺑소니치기도 하여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걱정을 끼친 적도 있었다. 비록 학창시절 한 때의 일이었지만, 한 개인과 학교의 대표로서의 입장은 크게 달랐다.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의 명예와 친구들의 희망은 나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고 말았다. 영광의 뒤안길엔 언제나 고된 훈련과 승리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그로 인하여 공부가 밀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스포츠라면 머리를 돌려버리게 되었다.


  축구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을 볼 때마다, 저 운동장을 맨발로 뛴 적이 있었다니, 하고 끔찍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린 필드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는가. 그 때 신었던 운동화는 지금 학생들의 실내화 수준이었으니 어찌 맨발의 청춘이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흙 묻고 뻣뻣한 체육복은 빨기가 힘이 들었다 아버지의 격려와 달리 어머니는 운동을 그만 두라고 하셨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로 정신은 끝까지 경쟁하여 살아 남아야 한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기업을 대표하는 스포츠도 당연히 기업 경영체제를 갖춘다. 오늘날 스포츠는 많은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종의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는 치열한 경쟁이 이어진다. 순수해야 할 예술분야와 스포츠가 젊음의 호연지기를 기르기보다 돈과 관련되어  작품 값과 몸값을 겨루게 된다. 그 본래의 목적과 반대로 가는 점도 없지 않다.


  무대에서 갈채만 받아본 나는 한 번도 응원단의 대열에 섞여서 소리쳐본 적이 없었다. 월드컵 D데이를 헤아리는 뉴스들은 내 귓전을 스치고 지날 뿐이었다. 폴란드와의 첫 경기 때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나의 귀속을 흔드는 함성이 있었다. 쾅, 쾅, 쾅 대-한민국. 오 필승 코레아! 붉은 악마들의 열기 넘치는 외침은 나를 감동시켜 내 시선이 TV화면을 지켜보게 만들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4강까지 오르는데 최대한의 능력을 이미 써버린 탓일까. 비록 3위는 놓쳤지만 태극전사들의 열정과 높은 수준의 응원질서를 포함한 경기운영은 한국축구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축구 역사에 길이 장식될 스페셜 드라마는 훗날의 속편을 기대하며 막을 내린다. 텅 빈 무대를 뒤로하고 세계의 찬사가 쏟아지는 거리에서 거리로 아쉬움을 담은 기쁨의 행진은 밤을 샌다.


  세계인의 축제는 끝이 났다. 균형이 흔들리지 않는 진보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가져온 열성과 통합성, 민첩한 청년들의 창조성을 바탕으로 우리 국민의 의식을 업  레이드 시킨다면 멋진 세계화를 이루리라 믿는다. 세계화란 모두 외국으로 나가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과 해외에 나가 있는 많은 국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다. 우리의 생활 현장, 지금 이 곳에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나라의 이미지에 걸맞은 의식을 가진 국민으로서 그에 합당한 언행으로 새로운 사회의 기풍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한국추구의 4강를 이룬 성과로 들썩거리고 있는 지금, 3위까지도 이룰 수 있는 실력이 없지도 않았다. 한꺼번에 올라서는 감격의 흥분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었음을 미리 예고라고 해준 것일까. 빨리 빨리 때문에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줍고 찾기 위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때인지도 모를 일이다.


  '운동 경기는 전쟁이 아니다. 이길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게임을 즐겨라.' 히딩크의 명언대로, 긍정적인 사고와 선수들을 끝까지 믿어 준 그와 같이, 우리도 젊은 주역들이 인생 무대에서 해나가는 과정을 즐기며 그들의 역할을 잘 성취해 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믿음으로 지켜볼 일이다. (2002년 6월)



 


6

윈윈 (Win Win)




  여기는 베이징. 연일 올림픽 방송뿐이다. 난 도저히 열이 오르지 않는다. 기본 방송 채널만 보는 나는 쉬는 시간, 볼 방송 프로가 없다. 이건 개인의 취미와 자유가 박탈당하는 기분이다. 응원을 하지 않거나 올림픽 방송을 청취하지 않는 행위는 반국가적으로도 몰릴 뻔할 것 같은 시기가 이럴 때가 아닐까.

  시끄럽고 떠들썩한 프로는 썩 기분이 맞지 않는 나이가 된 탓이다. 스릴을 만끽하거나 대표 선수의 메달이 내 것 같은 대리 만족이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탓일까. 요즈음에 와서는 이기고 지는 긴장감을 느끼는 것이 싫다. 괜한 감정 소모로 건강을 해치고 싶지 않다. 육체적인 힘의 표출이 젊음의 상징만은 아닐 진데 …….


  탁구만큼 마음 조이게 하는 경기가 또 없을 것 같다. 채널을 돌리자 우리나라와 싱가폴의 단체전이 진행 중이었다. 김경아와 싱가폴의 리자웨이의 경기. 게임 스코아가 2대 1로 한국이 지고 있는 상황. 진행되고 있는 4번 째 전에 이겨서 동점을 이루고 마지막 게임을 이겨야 한다. 김경아는 침착했다. 어떤 골이 들어와도 컷트 해 나가는 실력이 대단했다. 반면에 리자웨이는 더 젊고 도전적이었다. 실력으로는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리자웨이는 공격적이었다. 계속 공격하는 골을 김경아는 받아내면서 상대의 실수를 유발했다. 어쩌다 공격할라치면 실점을 냈다. 옛날 중학생이었을 때 나의 입장이 꼭 저랬었지 싶어서 끝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마음 조이면서도.

  중학교 시절, 내가 학교 대표 탁구선수로 뛴 것은 참 우연한 일이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었다. 학교강당에서는 탁구선수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와 탁구를 처음으로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방학 도중 매일 학교에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수인 친구와 게임을 하게 되었다. 그 친구를 이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 날부터 대표선수의 일원이 되었다. 단체 결승전이었던 것 같다. 나와 겨루게 된 상대 선수는 대단히 공격적인 플레이에 능숙하였다. 두 번째 세트에서도 스코어는 거의 하프 게임이었다. 나는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벤치에서 코치 선생님의 신호를 받고 작전을 바꾸었다. 게임 스코아가 2대 0이었는데 세 게임을 연속 이겨야 했다. 포기하고 싶었던 때에 작전대로 상대의 실수연발을 유도해 낸 것이었다 나는 드디어 역전승으로 그 게임을 따냈다. 학교의 영예를 높이게 된 것이다. 김영아 선수도 꼭 그와 같은 경기를 하고 있어 박수를 치게 되었다. 개인의 운명과 국가의 영예가 걸려 있는 현대의 스포츠 경제는 결코 즐기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여름 어린이 낙원촌 캠프의 운동회 날. 온 마을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함성을 난 결코 잊을 수 없다. 여러가지 게임의 장소가 마을 곳곳에 마련된다. 물통을 같이 들고 골문을 돌아오는 경기, 긴 막대기 위에 여러 명이 한 발씩 올려놓고 보조를 맞추어 뛰어야 하는 경기, 마법의 양탄자 즉 아주 좁은 양탄자 위에 한 팀원이 모두 올라가야 하는 게임,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외치기 그리고 모양 만들기, 예를 들면 세탁기나 선풍기 등이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 모형을 만드는 게임도 할 것이다. 경기 종목은 전부 한 팀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힘을 합쳐야 성립이 되는 경기들이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먼저 달리려고 한다. 이기려고 안간힘을 다하여 힘이 소진되고 혼자 따로따로 열을 뿜는 아이들이 많다.

  모두의 의견을 모으는 아이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아이들은 점 점 옆을 돌아보게 된다. 형은 동생을 돌보며, 아우들은 형들을 잘 따르게 되어 한 팀 한 가족으로 마음을 모은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 팀이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다 같이 이루어내야 하는 과정에 열중하게 된다. 어린이들의 맑고 순수한 아이디어는 기발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그 팀의 장점이 나타나는 개성을 살리기 위하여 숫자 아닌 점수를 후하게 넘치도록 준다. 누구 하나 탈락되는 아이 없이 기쁨의 함성을 울리며 꽹과리를 쳐댄다. 정말 흥미로운 운동회였다. 어느 가정에서나 자기만이 왕자며 공주였던 아이들이 캠프가 끝나는 날이면 어느새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이다. 마중 온 부모들은 서로 안고 석별의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변한 모습에 오히려 낯설어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모두가 이기는 윈윈 낙원촌의 운동회는 언제나 신나는 날이었다.


  백년을 기다렸다는 중국의 올림픽. 불연패의 한국 양궁을 중국이 일 점 차이로 이겼다.

안간힘을 다하여 세계 최고를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중국이다. 우리는 또 어떤가.  금메달을 추가해야 한다는 데 온 신경이 몰려 있는 것 같다. 2002연 월드컵의 신화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있는 듯도 해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정부수립 60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새로운 목표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선진국이 되는   조건을 여러 가지 들고 있지만. 김진애씨의 말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경제 성장도 이루어야 한다. 돈도 벌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 가에도 생각을 모아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시적인 성공보다 내용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익성이나 공정성을 사회에 구현하기 위한 개개인의 의식진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를 이루는 제도는 국민이 선출한 정치인들의 몫이니까 더욱 정치인의 투명성이 절실하다. 이제는 뜻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 미래를 지고 갈 젊은이에게 나라 안의 작은 테두리만 가지고 옥신각신 할 게 아니라 보다 큰 목표와 꿈을 가질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될 일. 우리는 섬나라 같이 살아왔다. 북한을 고려하지 않고 세계로 나아가기가 어렵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림픽에 뉴질랜드의 선수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스포츠로 자신의 나라를 선전하지 않는 나라다.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이 즐겨서 한다. 이미 그 나라는 모두가 인정하는 선진국이다. 만약에 올림픽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자비로 참가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시장 경제적인 체제에서 건전한 스포츠 정신이 '하나의 꿈, 하나의 세계'를 이룩해 가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경주해야 할지 그 내용이 문제일 것이다. 비교 경쟁적인 자극을 받지 않고도 자기 최선과 최고를 실현하며 발전을 꾀하는 낙원촌 운동회를 다시 하고 싶다.   (2008/8/15)


7

기쁜 소식


                                             


  반가운 제비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년 만에 듣는 안부입니다. 낙동강 어귀 고령군 다산면 호촌 마을에는 봄마다 제비가 날아온다고 합니다. 그 마을은 들이 넓습니다. 밭작물을 많이 재배하는 마을입니다. 그 마을 이장님은 환경 지킴입니다. 농약을 되도록 하지 않도록 마을 사람들을 독려하고 있어요. 제비집 호구 조사를 일일이 한답니다. 어떤 집은 제비 둥지가 열한 개나 되는 집도 있습니다. 놀랍지요? 제비 똥이 암에 좋다고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네요.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지지배배 거리는 제비가 정말 보기 좋답니다. 들에는 먹거리가 많을 거라고 합니다. 


  보통의 강은 동서로 흐르는데요, 낙동강은 남북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철새들의 통로가 된답니다. 올해는 제비가 한 보름 더 일찍 왔습니다. 5월에 부화를 해서 가을까지 두 번 더 부화한다고 합니다. 제비는 날아다니면서 넓적한 주둥이로 벌레를 잘 잡습니다. 우리 사람에게 해로운 곤충만 먹기 때문에 이로운 철새입니다. 농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올해는 수 천 마리의 제비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을 이장님은 기대가 대단합니다. 바람이 싸늘해지는 추위가 오면 베트남 쪽으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다음 해 봄을 싣고 어김없이 날아 올 거라고 합니다. 맑은 환경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에 너무 고맙습니다.


  몇 년 전부터 반세기 동안이나 소식을 몰랐던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몰랐던 철새들의 소식도 이렇게 반가운데요. 생이별을 하고, 그 오랜 세월 얼마나 애태운 가슴이었겠습니까. 반백 년 만에 만나는 남편과 아내를 만났습니다. 2살과 8살에 해어졌던 딸들을 50년 후에야 60이 다 된 나이에 만나다니요! 남의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나의 부모를 만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자매를 만난 듯 가슴이 벅찹니다. 그 어린 나이에, 하마터면 이산 가족이 될 뻔했던 위기의 순간을 경험했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일이 될 뻔한 이야기입니다. 목소리만 듣고도 오빠인 것을 알아 본 시각장애인 동생이 있습니다. 오빠의 등에 업혀서 피난 가다가 해어졌던 기억 하나만을 가지고서 알아 볼 수 있었던 혈육의 정이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제비들은 다시 따뜻한 지방으로 그들의 옛 둥지를 찾아 날아가겠지요?

철새들은 원하는 대로 자유로이 날아갑니다. 우리들의 이산가족들은 언제나 자유로이 마음놓고 만날 수 있을까요? 이념의 벽은 언제나 완전히 없어질까요? 조금 트여지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조급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랫동안의 갈증에 조금 적셔주는 몇 방울의 물이 더 많은 물을 벌컥 벌컥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마셔야 할 일입니다. 체하지 않게 말입니다. 바가지의 물에 나무 잎을 띄우는 지혜가 필요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밤엔 차오르는 달을 볼 수 있겠습니다. 가족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위하여 이 땅은 또 얼마나 몸살을 앓아야 할지 걱정도 됩니다. 벌써 명절 중후군을 앓는다는 주부들도 많다고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않는 딱 한가위만큼만 되기를 빌어봅니다. (2002년 추석날에)



8

훈풍인가 삭풍인가

                  

   때 아닌 봄꽃이 피고 있다. 남녘에는 4월에 피고 진 벚꽃이 다시 피고 있단다. 가로수 밑 꽃잔디에서도 드문드문 작은 꽃이 핀다. 북녘에서는 단풍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말이다. 하얀 뭉게구름 수놓인 하늘 밑의 코스모스의 맵씨를 시샘하는 걸까? 긴 겨울 동안 잊혀질 꽃들의 존재를 한 번 더 되새겨 주고 싶은 걸까? 이상 기온이 가져다주는 꽃 소식이 흔쾌하게 반갑지만은 않다.

유난히 길고 거세었던 지난여름의 폭우와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과수와 곡식이 여물어 가는 들녘은 그래도 처절하게 아름답다. 어김없이 한가위 달은 차올랐다. 휘영청 맑은 달은 말없이 이 혼란스러운 세상의 밤을 고요하게 잠재우고 있었다.

  한반도의 끊어진 철로가 다시 이어진다는 쾌거는 분단 57년 동안 타향에서 애끓는 심정을 안고 명절을 맞이해야 했던 실향민과 우리 민족에게 큰 추석 선물이었다.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복원 착공식이 남북 동시에 개최되었다. 남북 경계령 통문이 열리는 순간 빙하가 녹아 흐르는 것 같은 서늘함이 가슴을 적시다가 눈가장자리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57년간 한반도는 허리가 묵인 채 혈액이 통하지 않는 신체처럼 얼마나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세월을 신음하였던가!

  서울에서 문산을 통과하여 개성까지 육로가 열리게 되면, 한국전쟁의 휴유증을 앓았던 우리 자매들도 한 맺힌 그 길을 다시 걸어볼 수 있을까? 전쟁의 소용돌이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정몽주의 피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선죽교를 찾았던 그 때가 아련하다. 철마가 달리지 못하고 녹슬어 가는 동안, 57년간의 고통의 대가로 온전히 살아남은 곳이 있다면 비무장지대와 민간통제지역인가 한다.

  세계화 추진위원회는 이 지역에 대한 개발 논의 등 논란에 대해 이 지역을 개발하지 말라고 정부에 건의 했고, 이곳은 마땅히 보존 복원 되어야 한다 했단다. 통일원은 통일기반조성을 이유로 비무장지대 안에는 남북공동 농업경영사업, 평화시 건설, 설악산, 금강산 일대의 광광특구 지정 등 이들 지역에 대대적 개발구상을 연구하는 민간통제 지역 주민들과 인근지역 지주들을 중심으로 개발요구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다.

  비무장지대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천연생태를 유지하고 있어 유엔환경계획과 유네스코

국제 자연 환경공원과 생물권보전지역 설정을 제안한 곳이라고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매년 66조 달러라는 천문학적 계산이 나왔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약 7경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1경은 1조의 만배). 전세계의 국민총생산액(GNP)이 36조 달러(약 3경)이고 보면 자연이 주는 경제적 혜택은 그 2배가 되는 셈이다. 이 연구를 주도한 미 메릴린대 로버트 콘스탄자 박사는 이 수치는 자연의 가치를 최소한 평가한 것이라 밝히고 각 나라는 이 연구 결과를 경제개발계획에 꼭 참고하기 바란다고 전 나라에 경고했다." 우리나라도 남북 공히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도  비무장지역과 민통선지역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그 순수성을 잃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얼었던 땅을 녹이는 훈풍이 때때로 꽃샘바람을 일으키는 삭풍이 되었던 예를 남북의 관계에서는 자주 보아 왔다. 추석맞이 남북교향악단의합동연주회의 3부에서 남북의 연주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와 자리하고 아리랑과 밀양아리랑을 연주하였다. 평양에서의 연주와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북한의 선수들을 보며 이제 북한 사람들에 대한 그 '낯섦'이 '낯익음'으로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남북간의 예술인들과 스포츠 교류 등을 기점으로 통일에의 희망이 산산한 가을바람에 나부낀다. 하지만 삭풍 속의 훈풍인지 훈풍 속의 삭풍이 언제 소용돌이 쳐 질지도 조심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주변의 바람도 예사롭지만은 않은 것이 가을에 피는 봄꽃을 흔쾌히 맞이할 수 없는 기분 같은 것을 어찌하랴. 꽃샘바람이 살 속을 후비기는 하지만 오고야 마는 계절 앞에서 결코 힘을 오래 쓰지 못하는 것이 꽃샘바람이 아닌가.



 


9

동짓날의 설난(雪亂)



  오늘도 하루 종일 눈이 내린다. 해야 할 집안일도 많은데 자꾸만 창밖을 기웃대며 서성댄다. 강풍이 동반된 폭설이라는데도 포근한 정서가 느껴지는 것은 웬 지 알 수 없다. 차가운 흰눈을 바라보는 정서가 따뜻하다는 것은 겨울의 또 다른 묘미라 할지.

  닷새 동안 서울에서 지내다 왔더니 대설과 한파로 수도계량기가 터졌다. 아침에 수도계량기 수선을 하는 동안 눈을 맞으며 눈 쌓인 길에 국화문양을 그리면서 눈을 만져보고 그 감촉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 포근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찾아낼 듯이. 수돗물이 잠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봄까지 기다려야만 한대도 나는 옛날처럼 물 길러 다닐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은 불심이 돈독하여 몸소 황룡사 법당에 나가서 조석예불을 드렸다. 그 날도 여왕이 저녁 예불을 드리러 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여왕의 행차를 가로막으며 소란을 피웠다. 연유를 물었더니 미천한 신분의 지귀라는 청년이 고백하기를, 여왕을 짝사랑하여 날마다 여왕의 행차를 숨어서 지켜보다가 오늘은 더 참을 수 없어서 직접 여왕께 사랑을 고백하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여왕은 어쩔 수 없어서 그 지귀라는 청년에게 “황룡사 9층탑 앞에서 기다리면 내가 예불을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궁중으로 데리고 갈 테니 그리 알라.” 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여왕은 나오지 않고 애욕으로 기다리다 지친 지귀는 심화로 그만 타 죽었다. 죽은 후 지귀는 역질 귀신이 되어 신라 백성을 집집마다 다니면서 행패를 부렸다. 신라 백성들은 평소 붉은 팥을 싫어한 지귀 귀신의 행패를 막기 위하여 팥죽을 쑤어 문에 뿌리고, 먹고 하여 귀신의 행패를 막았다. 이리하여 1년이 다 가는 동짓날에는 팥죽을 끓이게 되었다. 그래서 절에서는 한 해를 되돌아보며 새해를 다지는 동지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늘 동짓날 팥죽 공양을 부처님께 올리고 우리 주변의 지귀 귀신의 행패도 막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역질 귀신들도 몰아 내는 기도를 올린다.


  나는 본래 경남 진주 산인데 초등학교 시절은 부산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직장으로 인하여 부산과 전주 그리고 마산으로 이동을 몇 번이나 했다. 6.25 때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버지는 부산에서 개성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전시(戰時)였는데, 마침 9.28 수복이 되어서 주변의 만료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이 개성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그리고 가산을 그대로 놓아둔 채 그 해의 김장을 땅에 묻어 두고 1.4 후퇴 때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 내 어머니로서는 두 달 만에 일생에서 회복될 수 없는 큰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어른이 다 되어서야 그때의 상황을 알게 되니,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할 때마다 애통하는 마음이 일곤 하였다.


동짓날이 되니 그 때가 다시 떠오른다. 내 막내 동생을 임신하고 바로 밑의 여동생을 업고, 가장 중요한 재산 목록 중의 하나였던 라디오를 머리에 인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는 개성에서 서울 근처까지 걸어야 했다. 뚜껑 없는 기차에 오르다가 떨어져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곤 했다. 최근에 큰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서울에 당도하여 부산까지 내려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 날마다 용산 역으로 나가야 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기차역이라곤 지금 같이 안락했겠는가. 칼바람 휘날리는 벌판에서 동짓날이 되었다고 빈터에서 솥을 걸고 팥죽을 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노랫말에도 있듯이 오늘과 같은 연속 강추위에도 모두 굳세었다. 그런 추위의 전쟁 속에서도 우리의 소박한 세시풍속은 이어졌던 것이다. 귀신 쫓자고 생긴 팥죽 끓이는 풍속이었는데 전쟁이 터졌으니 그보다 더 험한 귀신의 행패가 어디 있을 것인가. 그 속에서도 나대지에서 팥죽을 쑤었다니 전쟁 귀신들께 공양 올린 셈이었으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사를 가면 팥죽을 쑤어서 뿌리곤 하였다. 새집의 액을 막기도 하고 이웃과 나누기도 했던 미풍이었다. 내가 팥죽을 손수 끓여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웃과 나누기 위하여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잡곡식을 자주 하게 되는 식생활이고 보니 꼭 세시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오늘날은 귀신 때문만은 아닌, 별식으로 찾고 있는 셈이다.


  열흘 이상 내리는 설난(雪亂). 첫눈의 낭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대설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사람이 일으키는 전쟁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자연의 재난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 같다. 자연 재해로 피해를 입는 농가들의 입장과 도시와 도로의 교통난이 전쟁의 참혹함을 떠올리게 한다. 팥죽을 쑤어서 뿌리는 곳엔 적설의 험한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는 오늘 당장 팥죽을 쑤리라.

  그보다 우리 안의 잡귀들인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 탐내고(貪心), 성내고(嗔心), 어리석은(癡心) 마음, 온갖 허위 말, 이간질 등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팥죽이 문제이겠는가. 지귀귀신처럼 될 일은 아니다. 정신을 차려서 마음과 뜻을 모아서 대설의 난을 잘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2005년 12월 22일)


 


10

서울 1945



  “탈출은 실패했다. 수용소로 돌아가라. 포로교환이 진행중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 곧 휴전이 된다. 이게 끝이 아니야. 북에서 니가 할 일이 있을 꺼다. 우리 그 책임을 나누어지자. 너도, 나도 이 시대를 살았던 우린 그 의무감을 저버릴 수 없는 거다. 내 앞에서 죽지 마라. 제발 운혁아. 총 버려라.”

  “이 참혹한 전쟁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건 우리 민족에겐 너무 혹독한 운명이겠지. 다시 한번 새로운 희망을 찾아 볼 기회가, 그럴 의무가 있는 거겠지.” 그렇게 말한 운혁은 힘없이 총을 버렸다. 두 팔을 들고 돌아 서 가다가 자기편의 남은 후배가 멀리서 동우를 향하여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운혁은 동우를 덮쳤다. 동우가 맞을 총을 운혁이 맞았다. 순간 동우는 오열하고 통곡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같이 땅을 쳤다. 얼마동안 ‘서울 1945’ 드라마의 여운에 젖어 있었다. 아직도 진정한 해방이 되지 않은 조국, 남북이 여전히 논란거리를 낳고 있으며. 핵문제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 그렇게 끝난 전쟁은 휴전 상태이다. 드라마의 장면마다 그때 나도 저기에 있었는데, 그랬었구나 하면서 안타까움과 슬픔을 같이 했다.

  우리 현대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해방 직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 어지러운 시대의 한가운데 어느 지점, 한정된 공간에서 운 좋게도 총탄을 피했고 굶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내가 그때에 그 나이였다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올바른 교육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없는 것 같다. 반세기 동안 모든 예술 장르를 통하여 전쟁의 비극을 다루어 왔지만,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면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오류 속에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이번 드라마는 기성세대에게는 편견과 오류를 바로 잡고 지난 역사를 바로 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신세대에게는 올바르게 그 시대를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드라마의 주인공 해경, 운혁, 동우, 석경이라는 각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어지럽게 얽힌 그 시대 상황을 구체화함으로써 그 시대 환경을 개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하였다. 두 영웅들이 두 여인과 함께 엇갈린 사랑을 고뇌하면서도 자신의 이념을 숭고하게 지켜 나가며 서로 인간적으로 배려하는 장면들은 눈물겨웠다. 엎치락뒤치락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면서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을 겪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내었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꼭 찾아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던 철석같은 약속에 희망을 걸고, 연인과 부모와 형제들이 남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나면 서야 그들 이산가족이 만 날 수 있는 역사적 기회가 오늘날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가졌던 운명적 책임과 희망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가.

  내가 초등학교 2학 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고 내 아버지는 경남 진주에서 부산으로 오시게 되어 전쟁의 위기를 모면하셨다. 남쪽 끝에 있으면서 어디로 또 피난을 가는가 하고 어린 나이에 의문스러웠다. 9.28 서울 수복 때 개성으로 발령을 받으시고  그 난리 통에 온 가족이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가 겨우 두 달 만에 세간을 다 버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지옥 같은 두 달이 내 어머니에게는 평생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 되었고 지금 내 나이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 형제들은 각자 다르게 힘든 기억을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그 개성을 그리워한다. 우리의 가산이 그 땅 어디쯤 그대로 묻혀 있을까 하면서. 발굴하면 현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할진대 가족이 남북으로 헤어져서 평생을 기다려온 그때 그들의 아픔과 그리움은 가슴을 곳곳에 찢어 놓지 않았을까.


  그땐 모두가 조국을 위했다. 방법이 달랐을 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젊은이들에게 그때만큼 치열하고 가슴 뜨겁고 눈물겹게 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신대로 나라를 위해 울었고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의 목표를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적대시하며 한 세월 멸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왔다. 남북의 교류가 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너무도 신기했다. 우리와 똑 같구나! 반공과 멸공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으니까 어찌 안 그랬겠는가. 북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잘 모르면서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 많은 세월을 먹고살기에만 급급했던가.


  드디어 사상 처음으로 지난여름 평양에서 국보들이 내려오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간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의 교류를 꾸준히 희망해왔으며, 그 결실로써 북한이 자랑하는 중요 문화재 90점이 출품되어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남북 유물들이 통일된 한 공간에서 뜨거운 해후를 나누었다. 전시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가슴이 뛰는 듯 흥분되었다. 마치 헤어졌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기만 하였고 여기가 평양인가 서울인가를 잊었다. 선사 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민족사 전 시기에 걸친 대표적인 유물은 북한에서도 외부로 나들이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무도 여실한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였다. 분단된 남북이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동질성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까마득한 일인지는 모르나 통일의 당위성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로 흘러간 자신의 과거에 매달려 있을 순 없다.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일은 과거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중요한 창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서울 1945’의 작은 영웅들처럼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통일을 대비하는 역사인식을 다져 주었으면 좋겠다. (2006/10월)





 

 

11

강남 하숙생

                                                           

   내가 동생 집에 갈 때는 싱가폴에 여행 간다고 말한다. 이국적 도시 같은 분당의 봄은 탄천

변의 벚꽃과 개나리가 장식한다. 주변에 주상복합아파트들이 즐비한 빌딩 사이의 아치 터널을

지날 때, 목련나무 꽃 등이 동네의 야경을 아름답게 비추기도 한다. 내 동생은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파트는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두 아들이

결혼 적령기를 넘었지만 큰아들은 따로 나가서 원룸 생활을 한다. 동생 집에 며칠 머물 때도

아이들 얼굴 보기는 힘들다. 둘째 아이도 직장 때문에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 모를 때가 많다.

  동생 네 이웃에 50대 중반의 부부가 있다. 그 집의 아들은 내 조카아이보다 13살 정도 어린,

20대 초반인데도 혼자 마음대로 살겠다고 따로 나갔다. 부인은 요식업을 하니까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 남편은 인테리어 업을 하는데 시어머니가 아들 밥을 해준다. 생활 싸이클이 맞지

않아서 단  한 시간도 같이 할 시간이 없다. 완전히 모두 다 하숙생인 셈이다.

    1960년 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잠시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서울에서 72년까지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나도 큰언니 집의 하숙생인 셈이었다. 그때는 서울 남산에 오르면

서울의 전경을 거의 다 볼 수 있었다.  강남까지 건너 갈 일이 전혀 없었다. 한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뚝섬 근처엘 간 적이 있었다. 한강 주변은 설국(雪國) 같았고 강은 꽁꽁 얼어서

강 가운데까지 걸어갈 수도 있었다. 그 후 결혼을 하여 나는 전주로 내려왔다. 그런데 내 동생은

부산에서 부모님과 있다가 서울 총각을 만나서 결혼생활을 서울에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남이나 분당의 인구 중 30퍼센트 정도가 집은 있으나 가족들이 제각기 하숙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한솥밥을 먹긴 한데 '따로 밥상'인 경우도 많고, 아예 외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식탁문화가 없어져 가고 있다. 그것은 집은 있으나 가정이 없다는 이야기다. 한 식탁에서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없으니 대화할 시간도 없고 가족들이 서로 이해할 시간이 없다. 판소리

마당엘 가보면 소리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추임새에 따라서 서로 흥을 돋구어 가며 주객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한 밥상에서 어머니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넘겨주고 챙겨주면서 허물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그렇게 서로 추임새를 주고받으며 반응하는 일로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정을 쌓아 가는 일이다.

   음식을 나누는 일은 영혼을 나누는 일이란 말이 있다. 예전에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는 한솥밥을

나누어 먹었던 밥심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면 우선 차를 나누면서 대화를 트고, 밥을 같이 먹는 일로

해서 가까워진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나 동료들이 만나면 같이 밥을 먹는 일이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가족 밥상이 없어지고 직장 동료와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는 장년층의 바쁜 생활이나 외식

산업은 사회 분위기를 한편으로 삭막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경제발전이 우선이므로 모든

의식주 형식이 편리한 아메리칸 스타일로 되어갔고 정신마저도 근본이 없어져 가는 풍토에

서서히 젖어들었다. 앞으로 중국처럼 아침을 모두 사먹게 되는 삭막한 시대가 되지 않을까.

가족이 한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는 일들이 아이들을 바로 자라게 하며 가정의 힘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드러나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 30퍼센트라면 흐르는 물줄기를 주도할 수 있는 힘이다

그 30퍼센트의 사람들이 나아갈 길은 어디일까. 1970년 대, Y유치원 엄마교실의 김여옥 선생은

말했다. 빈 둥지를 나서는 오후 3시 병이 앞으로 올 것이라고. 예전에 했던 여자들의 일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불을 떼거나 물을 긷거나 밭에 나갈 일이 없어졌다.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현재 40대나 50대 초반의 사람들이 애인 없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도 흔하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이혼으로 인한 갈등과 전처 아이들을 놓고 빚어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맘마미아가 그런 이야기를

극적으로 나타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한 세대가 30살이라면, 중추역할을 해야 할 40대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지역이 서울의 강남과 신도시 일대라고 한다. 영토가 좁은 우리나라는 언제나 서울이 모델이 된다.

유행의 파급은 일일권내의 나라 안에서는 바로 번진다. 아니 유행은 바야흐로 지구촌내에서

삽시간에 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통과 통신이 자유스런 현대는 조용하던 전국의 중소도시와

시골까지 그런 현상의 유행이 재빨리 송달된다. 그것은 직장 따라 가장이 따로 살아야 하고, 집

구조가 그러하듯, 가족의 핵분열의 진행이기도 하다. 

  경제가 발전해야 문화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은 틀림없지만 그 경제로 인하여 상실한 문화도 많다.

그러한 경제 발전의 풍토에서 자란 핵가족의 3세들은 지금 어려움도 모르는 자유 아닌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핵가족의 3세대의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적인 잇슈가 있을

때마다 이리 저리 몰린다. 촛불 문화를 주도하는 집단의 구성원들도 그들이 아닐까. 핵가족 3세

엄마들이 유모차에 아이를 싣고 거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은 그런 자유를 만끽하는 일면도 있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강남의 30퍼센트의 하숙생들은 다음 어디로 갈 것인가.

  벌써 3년 째 나도 나 홀로 가구로써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아파트에는 내가 아는 나 홀로 노인 가구들도 많다. 나 홀로 가구는 점점 늘고 나 홀로

'따로 밥상'도 늘고 있지만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 절실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차피 지구의 하숙생인 것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진정한

지구의 생태에 맞는 인간의 바람직한 삶의 형태가 있을 것이다. '희망의 밥상'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발전된 경제로써 '죽음을 부르는 화려한 만찬'을 살 것인가. 희망의 밥상을

위하여 거친 땅을 밟을 것인가. 강남의 젊은 하숙생들이 어디로 가는 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008/11/24)





12

망각의 여행



  '백제의 성'을 넘고 '고려관'의 간판을 스치고 조선의 정자에서 쉬면서 하루를 여행한다. 대한민국 동쪽 땅 끝, 울진군 후포리는 옛 신라 땅이라고 해야 할까. 국경을 넘어서 하루 종일 걸려서 이곳 해안으로 들어서자니 눈에 익은 고향 언저리 어디쯤 되는 듯하다.  오늘밤은 '신라의 달밤'이 될 것 같다.


  2008년 8월 9일 아침 5시 30분쯤. 바알간 얼굴을 붉히며 빛을 안으로 꼭 껴안고서, 먼 바다 끝 물 속인가 하늘 어디쯤에선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저 태양의 인상. <인상-해돋이>를 탄생시켰던 모네는 캔버스에 빨간 유화 물감으로 빗금을 그었을 뿐이었는데도 이런 인상이었다.

신라의 하늘 끝은 동해 바다의 끝이다.  같은 하늘과 산이었는데 오랜만에 들어서는 옛 신라 땅이련가. 눈에 익은 듯, 낯선 듯. 역사를 거듭해서 수많은 바다 사람들에게 생의 전 의미가 되었던 해안. 숫한 사연들이 저 바닷물 속 깊숙이 잠겨 이제는 물결이 되었다. 그래서 바닷물은 더욱 짙푸르고 해안마다 맑고 깨끗한 모래톱이다.


  출렁출렁,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알 수 없어도 알 것도 같은 파도의 소리와 물거품. 떠밀려 와서 몸 풀고 나면,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너무나 몸집이 거대한 바다는 저 혼자 바람 타고 뒤척뒤척 철썩인다. 길 건너 광도사 큰법당 앞에까지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더위도 실려 나간다. 젊을 때부터 가족같이 지내던 연꽃 같은 스님이 울진의 바다 가의 광도사를 맡으셨다. 자주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도 아니어서 일주일을 지내다가 왔다. 나만의 맞춤의 일상을 내던지고 그곳 사람들 일정에 따라 지내는 것도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나를 비우는 시간의 여행이 되었다.


  해안의 밑바닥이 완만하여 해수욕하기 딱 알맞다. 이른 저녁을 먹은 후, 해질 녘에 하루의 끈끈함을 이 바다 물과 함께 놀면서 파도와 한 몸이 되어보면 진정 나란 개체는 의미가 없어진다. 신들의 땅인 하늘 지붕 아래에서 발원한다는 갠지스 강물에 속죄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인도사람처럼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서 파도 세례를 받는다. 바다 어디쯤에서 한 몸을 이루어낸 갠지스 강물이 이 바닷물 속에도 녹아 있으리라. 신의 기원이, 신들의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아니, 바다 그 자체가 무한을 품은 절대 존재이지 않은가. 세상에서의 사랑과 평화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고요롭기만 한 것이 아니다.  바닷물이 해변의 모래에 부딪치는 것처럼, 저 헤아릴 수 없는 모래알들, 헤아릴 수 없는 물방울들의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들어 보라!

  물과 놀려면, 물이 함축하고 있는 다양한 물결들의 흐름, 그 각각의 차이 나는 흐름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마음을 비우고 물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우리가 저절로 수영을 능숙하게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팔을 날개 펴듯 50번쯤 저어 깊은 바다로 나아갔다. 더 이상 발끝이 모래 바닥에 닿지도 않았다. 내 힘의 한계를 알아야 했다. 바닷물을 받아들여 그 물결에 나를 맡기고 그냥  떠 있을 수만은 없다. 잠시도 몸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바닷물의 흐름대로 움직여야 한다.

  방향을 돌려 바닷가 쪽으로 다시 헤엄쳐 나왔다. 물이란 타자와의 조화를 잘 맺을 수 있을 동안 행운처럼 함께 떠 있을 수 있었다. 그건 정말 행복이었다. 어떤 청년이 그런 나를 보고, "수영 잘 하시네요!" 하는 것이다. 그건 수영하는 방법을 교본에서 익혀서 된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물과 조화롭게 노는 것은 갑자기 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식 운동도 어떤 방법이 써있는 교본이나 경전을 가지고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비움'이나 '망각'의 수양론이 필요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몸으로 익히는 수양론, 바닷물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조화로운 연결을 위해서. 등소평은 평소에 바다 수영을 즐겼다 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망각의 수양이었을까. 우리의 박태환 선수가  여러 개의 메달을 획득하게 된 과정을 보라! 목적이야 다르겠지만.

  모래에 박힌 발자국을 파도는 끝내 지우고 만다. 파도와 바람을 맞으면 우리의 흔적은 사라진다.  새로운 발자국을 찍기 위한 새 평지가 펼쳐진다. 하늘의 구름처럼 바닷물이 출렁인다. 물결처럼 구름도 파도친다.  저녁노을이 바닷물을 적셔 하늘빛도 바닷빛도 븕으레 긴 휴식의 밤을 맞아들이고 있다.


   여행은 낯설기 작업이다.  낯 선 곳에 들어서면 복잡하고 힘들었던 우리의 일상은 그 낯 섬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파도의 포말처럼. 그 낯섬에 하루하루 익숙해지다 보면 다시 낯 섬이 또 하나의 일상의 두터운 옷을 입게 된다. 돌아와야 할 자신의 현재에 다시 여행지처럼 설 때 자기를 에워싸던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참으로 자신의 일상을 깊이 관조하게 되어서야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우리의 내면의 의식에서도 그와 같은 비우고 버리는 망각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과 마주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의식의 여행 말이다. 단순히 망각하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 아니다.

  망각 상태로 있는 시간의 달콤한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다시 새로운 관계로 연결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만 하는 일이다. 문학에서도 '낯설기'의 장치가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 낯설기의 묘를 창출해내는가, 참 애매모호한 작업. 어렵기만 하다. 기교를 써서 낯설기 장치를 쓰는 일이 꼭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낯설기를 연출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듯 글쓰기의 장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망각의 무정 상태는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다.  '망각의 수양론'이 필요한 이유는 다시 연결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옛 나라 같기만 그 곳, 한 때는 고향 가까운 곳이었고 지금은 이곳 옛 백제 땅이 고향이 되었다. 그곳이 때때로 그립듯이. 언젠가 또 이곳이 그리울 때도 있으리라.


(2008년 여름, <수필시대>)




 

들꽃 언덕에서


들꽃 언덕을 찾았습니다. 값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자라고 있어요.

유난스레 까치들이 까악 까악

낮게 날고 있어요. 과수원 집 아저씨의

가지치기하는 소리가

싹둑싹둑 빈 하늘을 울립니다.


아이 손을 잡고 아직은 빈 언덕에 올랐습니다.

동네 아이 하나가 쫄랑쫄랑 따라옵니다.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곳을 내려다보며

아이는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는 ‘물, 물’

개울 옆 마른 풀더미에 쪼그리고 앉아

흐르는 물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호미로 냉이를 캡니다.

아이는 맨 손으로 흙 찐빵을 빚고 있어요.

나 하나 너 하나  맛있게도 '냠 냠 냠'


마른 풀잎 사이에 새 풀꽃이 피었어요.

아이는 손가락으로 꽃을 가리킵니다.

별꽃 같은 작은 꽃이 반짝반짝

아이 눈망울이 반짝반짝

햇볕은 따스한데, 북녘바람은 살 속을

파고드는 듯 아이는 맑은 콧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풀밭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2003.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