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 에세이 3집
1. 꽃이 지는 날
2. ‘쇼(Show)’를 하라
3. 불타버린 자존심
4. 고향이 간다
4. 고향이 간다
5. 법주사와 팔상전
6. 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7. 꽃 양귀비
8. 환생한 경천사지십층석탑
9. 워낭은 종이었다
10. 독신과 결혼생활
11. 누가 노무현 전대통령을
12. 야만인과 문화인
13. 절명가
14.
15. 가을꽃에는 가을 소리가
16. 노송천을 부탁해
17. 원서문학관 가는 길
18. 날씨가 차가워진 다음에야 (추성부도와 세한도)
19. 나는 이렇게 글을 쓰려한다
20. 고대 이집트인들의 행복 -행복의 진화 1
21 차마고도의 삶과 예술 -행복의 진화 2
22. 행복을 그리다 -행복의 진화 3
23. 화가들의 천국 -행복의 진화 4
24. 어디에도 없다, 지금 여기 뿐 -행복의 진화 5
25. 아름다운 통일
1 꽃이 지는 날
꽃잎들이 휘날린다. 길가에 쌓여 있던 벚꽃잎들이 앞차가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에 뒹굴며 날고 있다. 바람 없이는 어디 멀리도 못 가는 것을. 그러나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바람 탓이 아니다. 나무 가지에서 이미 피어나는 이파리들 등쌀에 꽃잎은 밀려날 수밖에. 꽃잎이 나비처럼 날다가 떨어진다. 바람은 어떤 현이든 닿기만 하면 무슨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바람에 실려 나가는 꽃잎의 아련한 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린다. 어차피 떠나야 하는 길, 바람과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랴!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어라' 했던가, 아니 꽃이 지는 날은 울고 싶지 않으리. 마음속 어딘들, 몸속 깊은 곳 세포의 어느 켜에서 틈이 벌어지는 감(感)을 받아들이며 깊은 침묵에 잠겨야 한다, 먼 하늘가를 그리며.
아이들이 한 단계 성장할 때마다 성장 통이 있듯 생명이 자라는데 어찌 아픔이 없을까. 흔들리지 않고 꽃잎이 피지 못하듯. 꽃망울의 꿈이 자라고 활짝 피어 빛나는 환희를 맛보는 현실을 누리는 것으로 낙화할 때의 충격은 다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게다. 늙어서도 나는 성장통을 앓는다. 사실 늙는다 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늙는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니까. 꽃이 질 때는 나무도 성장하리라. 아이들이 잠을 자면서도 크는 것과 같겠지. 나무가 크는 소리가 나지 않는가. 꽃잎이 떨어질 때는. 꽃이 피고지고, 자란 잎이 다 커서 낙엽지는 동안 나무는 기꺼이 앓으며 잎을 떨어트릴 것이다. 꽃이 지지 않으면 어찌 꽃이라 하겠는가!
복사골에 살 때다. 산의 싸리꽃 등을 병에 꽂아 장식하곤 했지. 어느 봄 날 아침 현관을 나간 그가 얼마 후 다시 돌아와서 개나리 한 가지를 쑥 내밀고는 아무 말도 없이 웃으며 다시 나갔던 적이 있었지. 그이에게 받아본 처음의 꽃다발이자 마지막이었다. 복사꽃이 필 무렵이면 동네 집집마다 개나리가지가 담 밖으로 넘어와서 동네가 화사했다. 누군들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샅을 나가다가 한 가지 꺾어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이젠 개나리 한 가지 꺾어다 준 사람 다시 만날 수도 없다.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므로.
올 봄 개나리 색은 유난히 찬란하다. 이렇게 눈부신 봄날 벚꽃이 피었고 꽃비가 내리는 이런 봄날에 또 한 문우가 떠났다. 님과 나는 같은 세대 같은 학번 쯤이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 때 님이 부산에서 피난살이 할 때의 추억을 보면 그랬다. 님도 부산의 재첩국을 그리워 했다. 그 시절 어린 나도 부산에 살았다. 그 때는 재첩국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동네 고샅을 누비며 '재첩국 사이소'를 외치며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아침 해장국으로 그만인 재첩국을 내 아버지께서는 자주 드셨다. 벚꽃 사태 일어나는 섬진강 변에는 재첩국이 유명하여 몇 년 전에는 맛좋은 국을 맛볼 수 있었다.
행촌문학 모임이 있은 후 어느 날 고순자님께서 자리를 마련하여 우리는 셋이서 추어탕을 들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후 다시 그렇게 만나자고 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이라도 볼 걸. 그렇게 떠날 줄 어찌 알았단 말인가. 이렇게 섬진강에 벚꽃이 흐드러질 때 같이 화사한 봄날을 즐기며 재첩국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 피난 시절의 '제첩국 사이소'에 대한 추억을 나누면서 말이다. 누구라도 이 세상에 있다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쉽고 또 아쉽다. 사실 자주 만나지도 못할 형편이었지만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다시는 볼 기회가 없다는 것 아닌가. 그 단절감이 이리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프면서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며 나그네 길을 가야 하는가보다.
요가 사부였던 J선생과 나는 크리슈나를 좋아했다. 한 번도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으로 그의 글을 통해서 그의 행보를 통해서 그 높은 의식을 사랑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날 도장에 들어서는 순간 J선생이 말했었지. "크리슈나뮤르티가 떠났습니다. 세상이 텅 빈 것 같습니다." 라고. 후에 j선생은 인도에서 7년 간 명상하면서 크리슈나뮤르티의 센타와 그의 흔적을 답사하였다. 나에게 J선생은 크리슈나를 닮은 사람으로 비쳤다. J선생이 인도에 머무는 동안 나는 겨울만 되면 인도에 가서 살다 와야지 했었다. 그가 한국에 돌아오면서 인도의 향을 선물했었다. 이제는 인도에 갈 의미가 없어졌다. 지금은 인도에 더 이상 성자는 없더라고 그가 말했기에.
벚꽃잎들이 날리는 날, 책을 정리하면서 유달리 떠난 문우의 글이 새롭게 눈에 밟혔다. 섬진강 따라 80리 벚꽃 길, 분당 탄천의 벚꽃 길, 에버랜드 벚꽃 길과 금산사 가는 길에서도 꽃비는 하염없이 내렸을 것이다. 하루 새 산벚꽃도 사라지고 온 산이 녹색 양탄자를 뒤집어 쓴 듯하다. ( 2008년 4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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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쇼Show를 하라 |
아침부터 쇼를 했다. 뒤뚱 뒤뚱 원맨쇼에 늘 바쁘다. 집에서 입던 채로 죽림온천에 다녀오고. 막 점심을 차려 먹으려고 하는데, 급한 전화다. 늦게 알려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직 점심 먹지 않았으면 나오라고 한다. 집 밖을 나서면서부터는 무대가 펼쳐지기에 계절 따라 남에게 거슬리지 않는 최소한의 무대복장을 갖춘다. 그런 때 다른 때 같으면 나갈 수가 없다. 어차피 만나야 할 일이 있어 가려던 참이었기에 허겁지겁 달려갔다. 숨이 가빠 점심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쇼를 하라' , 광고 방송에서 연속 '쇼를 하라'고 했다. 무슨 쇼를 하라는 거지? 처음엔 관심이 없었다. 이제 내가 얼마나 필요한 것이 있기에 광고를 귀담아 들을까. 핸드폰 회사의 이미지 변신 광고임을 저절로 알게 됐다. 이미지 시대요 정보시대라니! 매일 달라지는 정보에 다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얼마 전부터 핸드폰에 문제가 생겼다. 운전 중일 때나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를 생각하여 별로 쓰임새도 없지만 휴대하고 있어야 한다. 핸드폰 시장이 가장 쉽게 빠른 변신을 하는 것 같다. 노후 세대를 위한 요금제도 있다. 일을 마치고 오후 내내 쇼를 했다. 막상 선택하려니 단말기 선택부터 요금제 선택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공짜' 선전문구의 프랑카드를 단 가게 앞에서 그야말로 '쇼'가 시끄럽다. 그동안 나는 십 초 당 65원짜리 선불요금제를 쓰고 있었다. 그래도 한 달에 만원이면 남을 때도 있다. 단말기만 바꾸면 되었다. 결국 '공짜'에 이끌려 간편한 요금제에다 최신형 영상통화도 되는 'Show'를 선택했다. 신규 가입으로 단말기가 공짜이니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내가 전화번호를 알려야 하는 일은 내가 선택하면 된다. 내가 필요하고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은 사람에게. 마음에 꼭 드는 것이어서 다행이다. 몇 시간 동안 선택하는데 회사별로 비교도 해야 하고 각 요금제와 단말기 값도 비교해야 하는 일이 무척 머리가 아프고 피곤했다.
우리들은 평생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야 한다. 정보에 밝아야 하니 결정하기까지의 여러 가지 일 자체가 완전한 쇼인 것 같다. 어떻게든 눈가림으로라도 우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술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소비자가 쉽게 알아차릴 수도 있지만, 복선이 깔려 나중에 낭패 당하는 일도 많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코가 베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나가는 세상이다. 요즈음 말썽이 많은 BBK나 삼성비자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누구의 '쇼'가 진실을 나타내는 것인가. 하긴 '쇼' 라는 자체가 지닌 말부터 거품이 담긴 말이니. 그 속에서 어떤 진실을 우리는 찾아야 하는 건지. 진실한 수사의 결과가 나올 풍토인지……. 선택하는 것은 필요한 물건만 아니다. 태어나는 것만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언젠가의 생에서 그 부모에게 태어나는 것을 선택한 것은 나였다고 본다. 어쨌든 태어나면서 부터 선택하는 일이 사람살이에서 주요한 일이다. 말을 못해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아기는 울음으로 표현해야 하고 부모와 교통을 잘 해야 한다. 놀이 감도 친구도, 학교도, 애인도, 결혼상대자도 선택해야 한다. 이제 대통령을 누구를 뽑아야 하는 지를 선택하는 일이 바로 눈앞의 과제다. 매일 TV를 본다면, 우리는 한 달 동안 후보자 캠프의 무대에서 펼치는 '쇼'를 심심찮게 볼 것이다. 무대장치도 각 후보에 맞는 로고송을 제작하여 '쇼'다운 쇼를 하는 것 같다. 거리에도 지지자들이 영상을 세워놓고 쇼를 하는 곳이 많다. TV에서는 000의 정책토론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도 많다. 과연 실현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식견이 짧아 선택하기 어렵다. 난 이럴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그분의 말대로라면 00는 절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근데 나도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은 그의 평생의 흔적이나 성품이나 진실 등이 얼굴에 나타나기도 한다. 물증을 몰라서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역시 고민이다.
북한에서 온 김철호(?)가 그랬다. 남한 사람들은 인간미가 없다고. 매일 옆 눈으로 훑어 보고 비교하며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을 선택하는 일에 신경이 날카로우니, 그럴 수밖에 없을까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모든 이념을 초월하는 완전한 제도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각각의 사람의 의식이 달라져야 하는 일이다. 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런 날을 위해서 비교와 경쟁에서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일에 노력하며 꾸준히 성실한 '쇼'를 진행할 일밖에 없을 것 같다. 눈을 뜨고 오늘의 일과부터, 하루 종일 쇼의 연속이다. 인생이 연극이요, 일장춘몽임에. 요새말로 '쇼'를 잘 해야 한다. '쇼Show'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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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타버린 자존심
설 연휴를 넉넉히 보내는 동안에 마(魔)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 밤 tv에서 우리의 국보 제 1호인 숭례문이 화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습니다.
처음 불길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얼마든지 진화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쳐다보고
우왕좌왕하다 끝내 현판이 떨어지는 참담함을 보아야했습니다.
숭례문의 현판은 조선의 첫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글씨였습니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마주 보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세웠답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600여 년 동안
도성을 지켜주었는데 이제 기 기운이 다했다는 걸까요. 한국의 상징인 문화재. 국보 1호, 숭례문은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600여 년을 지켜온 한국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 같습니다.
이토록 문화재와 그 보호에 대한 몰이해와 대책 없음이 한국인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끔찍함이
참괴(慙槐)하기 그지없습니다. 청계천 복원 비에 몇 백 억이 들었다는데, 소중한 한국의 자존심인
국보를 보호하는 비용이 단 1억 원이었다니요. 기가 막힙니다. 숭례문 현판이 떨어지던 순간 조선의
자존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2001년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것도 꼭 저렇게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테러로 인한 방화였습니다. 미국은 자국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 한동안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세계에는 테러가 끊길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우리의 국보도 영화처럼 불타버리고 화강암 축대 위는
잿더미만 쌓였습니다. 현대식 빌딩이란 더 좋게도 건축할 수 있다지만, 조상들의 얼이 녹아있는
문화재란 간단한 문제가 아닐 줄 압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의 반복적인
문화재 방화범이었다니, 이 또한 얼마나 우리 사회의 한 면을 부끄럽게 드러내는 일인가요. 우리의
문화재 소실이 있을 때마다 그 대책이 논의된 바 있었건만. 우리는 너무나 심한 안전 불감증에 몇
제곱의 불감증인 것 같습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매년 문화재 보호를 위한
소방 실습도 행해진다고 합니다. 엄청난 피해를 본 후, 3년을 걸려서 200억 원을 들여서 복구한다
해도 이젠 그보단 좋을 수는 없겠지요. 국보 1호의 진정성은 사라진 후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을
지키던 숭례문의 소실로 인하여 정말 찾아야 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학생들의
교과서의 수정도 내년 분에는 바뀌게 되겠군요.
대부분의 사고에서 늘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소통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사람 생명을 담보하는
의료사고의 예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진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의료과실은
기술적 실수가 아니라 의사의 사고 결함에서 비롯된다고 '닥터스 씽킹'에서 말한다고 합니다.
오진 사례의 80%는 의사가 자신의 고정관념대로 끼워 맞춰 진단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정확한 진단 사례 100건 중에서 의학지식 부족이 원인이 된 사례는 4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입에서 병력에 대한 첫 단어가 떨어지기 전에 이미 의사의 마음속에는
진단에 대한 가정이 형성'되는 것이 현실이다. 환자에 대한 첫 인상, 부족한 진료시간,
제약업계의 마케팅에 영향 받은 부적절한 처방 등이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대형 참사사건의 현장이나 사고처리 과정과 후의 조사 등에 대한 뉴스만 접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관련된 사람들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점과 각자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는 등 생각과 마음이 통일되지 못하여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도
전에 사고의 발단이 터지는 소지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고의 원인이 우리 이웃의 한 사람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또한 소통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이런 원한을 가지게되는 일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까. 또 그렇다고 그 원한을 풀어나가는
방법에 대하여 그토록 생각할 힘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방치되어 있는지, 스스로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우리 국민의 수준에 대한 치욕입니다. 나라 살림하는 사람 탓만 할 것도 없습니다.
그 모두가 나의 수준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화재청과 사설경비업체 등 허술한 관리가 낳은 인재(人災),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란 보도입니다. 그러나 책임이 사건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 대책을 세우고 또 세워도
담당하는 사람들의 사명과 사회의 지극한 애정어린 관심으로 보살피는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런 일은 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
설 연휴를 넉넉히 보내는 동안에 마(魔)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 밤 tv에서 우리의 국보 제 1호인 숭례문이 화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습니다.
처음 불길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얼마든지 진화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쳐다보고
우왕좌왕하다 끝내 현판이 떨어지는 참담함을 보아야했습니다.
숭례문의 현판은 조선의 첫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글씨였습니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마주 보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세웠답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600여 년 동안
도성을 지켜주었는데 이제 기 기운이 다했다는 걸까요. 한국의 상징인 문화재. 국보 1호, 숭례문은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600여 년을 지켜온 한국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 같습니다.
이토록 문화재와 그 보호에 대한 몰이해와 대책 없음이 한국인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끔찍함이
참괴(慙槐)하기 그지없습니다. 청계천 복원 비에 몇 백 억이 들었다는데, 소중한 한국의 자존심인
국보를 보호하는 비용이 단 1억 원이었다니요. 기가 막힙니다. 숭례문 현판이 떨어지던 순간 조선의
자존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2001년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것도 꼭 저렇게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테러로 인한 방화였습니다. 미국은 자국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 한동안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세계에는 테러가 끊길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우리의 국보도 영화처럼 불타버리고 화강암 축대 위는
잿더미만 쌓였습니다. 현대식 빌딩이란 더 좋게도 건축할 수 있다지만, 조상들의 얼이 녹아있는
문화재란 간단한 문제가 아닐 줄 압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의 반복적인
문화재 방화범이었다니, 이 또한 얼마나 우리 사회의 한 면을 부끄럽게 드러내는 일인가요. 우리의
문화재 소실이 있을 때마다 그 대책이 논의된 바 있었건만. 우리는 너무나 심한 안전 불감증에 몇
제곱의 불감증인 것 같습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매년 문화재 보호를 위한
소방 실습도 행해진다고 합니다. 엄청난 피해를 본 후, 3년을 걸려서 200억 원을 들여서 복구한다
해도 이젠 그보단 좋을 수는 없겠지요. 국보 1호의 진정성은 사라진 후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을
지키던 숭례문의 소실로 인하여 정말 찾아야 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학생들의
교과서의 수정도 내년 분에는 바뀌게 되겠군요.
대부분의 사고에서 늘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소통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사람 생명을 담보하는
의료사고의 예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진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의료과실은
기술적 실수가 아니라 의사의 사고 결함에서 비롯된다고 '닥터스 씽킹'에서 말한다고 합니다.
오진 사례의 80%는 의사가 자신의 고정관념대로 끼워 맞춰 진단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정확한 진단 사례 100건 중에서 의학지식 부족이 원인이 된 사례는 4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입에서 병력에 대한 첫 단어가 떨어지기 전에 이미 의사의 마음속에는
진단에 대한 가정이 형성'되는 것이 현실이다. 환자에 대한 첫 인상, 부족한 진료시간,
제약업계의 마케팅에 영향 받은 부적절한 처방 등이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대형 참사사건의 현장이나 사고처리 과정과 후의 조사 등에 대한 뉴스만 접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관련된 사람들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점과 각자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는 등 생각과 마음이 통일되지 못하여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도
전에 사고의 발단이 터지는 소지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고의 원인이 우리 이웃의 한 사람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또한 소통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이런 원한을 가지게되는 일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까. 또 그렇다고 그 원한을 풀어나가는
방법에 대하여 그토록 생각할 힘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방치되어 있는지, 스스로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우리 국민의 수준에 대한 치욕입니다. 나라 살림하는 사람 탓만 할 것도 없습니다.
그 모두가 나의 수준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화재청과 사설경비업체 등 허술한 관리가 낳은 인재(人災),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란 보도입니다. 그러나 책임이 사건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 대책을 세우고 또 세워도
담당하는 사람들의 사명과 사회의 지극한 애정어린 관심으로 보살피는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런 일은 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만이 문제이기도 하고 사람만이 희망이기도 합니다.
(2008년 2월 12일)
4 고향이 간다 |
늦은 오후 터덕터덕 전주역으로 간다. 울림에 온몸을 내맡기자 정점을 막 넘어가는 늦여름 풍경이 한 장 한 장 유리창을 스친다. 서울이 가까워지자 큰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나야, 전주…. 내일 뭘 하실려우? 나랑 '페르시아'나 가게… " "응? 아휴, 내가 요즘…… 갈 수 있으려나?" 활발한 것 같으나 안정되어 있지 않은 목소리다. "혼자 갔다 오렴. 나, 너 오면 밥도 못해주겠다. 다음 날 제사도 있고 준비도 해야 해!" "알았어, 내가 내일 오전 중에 구경하고 오후에 가서 도와줄게. 내가 밥 해줄게." 씩씩하게 말했다. 지난 주말에 문학행사에 갔다 오던 길. 차안에서 들은 한 문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안의 사인동 마을이 고향인 임씨가 설날에 고향의 이웃집에 세배를 갔다. 그 집 벽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최종성 할아버님 금년부터는 제사를 인천 최종성(할아버님의 장손자)이네 집에서 지내게 됐으니 이제는 그쪽으로 가세요." 무슨 얘기 끝인지 생각나지는 않으나 명절과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셈이었다. 우리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각자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렇게 써 붙이지 않아도 귀신은 다 알고 있다. 혹은 귀신이니까 벌써 마음먹은 순간부터, 형편을 다 알았을 것이다 |
늦은 오후 터덕터덕 전주역으로 간다. 2008년 맑은 8월의 마지막 주다. 털거덕거리는 열차의 울림에 온몸을 내맡기자 정점을 막 넘어가는 늦여름 풍경이 한 장 한 장 유리창을 스친다. 서울이 가까워지자 큰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나야, 전주…. 내일 뭘 하실려우? 나랑 '페르시아'나 가게… " "응? 아휴, 내가 요즘…… 갈 수 있으려나?" 활발한 것 같으나 안정되어 있지 않은 목소리다. "혼자 갔다 오렴. 나, 너 오면 밥도 못해주겠다. 다음 날 제사도 있고 준비도 해야 해!" "알았어, 내가 내일 오전 중에 구경하고 오후에 가서 도와줄게. 내가 밥 해줄게." 씩씩하게 말했다.
지난 주말에 문학행사에 갔다 오던 길. 차안에서 들은 한 문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안의 사인동 마을이 고향인 임씨가 설날에 고향의 이웃집에 세배를 갔다. 그 집 벽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최종성 할아버님 금년부터는 제사를 인천 최종성(할아버님의 장손자)이네 집에서 지내게 됐으니 이제는 그쪽으로 가세요." 무슨 얘기 끝인지 생각나지는 않으나 명절과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셈이었다. 우리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각자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렇게 써 붙이지 않아도 귀신은 다 알고 있다. 혹은 귀신이니까 벌써 마음먹은 순간부터, 형편을 다 알았을 것이다 란 등등. 예부터 제사는 옮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이제 시대에 따라 각자 형편 따라 달라지고, 사람의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제사를 맡아 하던 며느님이 나이 들어 힘들어지고 자신이 제사 받을 지경이니 어찌 할 것인가. 그것도 세대 교채를 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생의 전선에서 은퇴 하면 자식이 가장이 되고 부모의 보호자가 되지 않는가. 큰언니를 만나면 그 벽보의 이야기를 꼭 해줘야겠다 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옛 제국인 페르시아까지 가는 데에 오전이 다 걸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니 정오가 다 되었다. 중앙박물관 본관과 기획전시실 사이의 20여 개쯤 되는 계단을 오르면 넒은 전망대가 운동장 같다. 뒤편으로는 남산 타워가 훤히 보이고 왼편으로 멀리 북악산도 보인다. 아래는 보기 좋게 꾸며진 박물관 뒤뜰이 보인다. 바람이 시원한 전망대의 돌의자에 앉아 도시락부터 먹었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면 멀미가 날 것이니 단단한 여행 준비가 필요하다. ' 이란의 옛 제국 페르시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다 놓았다고 4월부터 광고를 했다. 폐막을 며칠 앞두고 바삐 나선 길이다. 이렇게 과거 몇 세기로의 여행 선에 오를 때마다, 옛 인류 조상들의 위대한 흔적을 대하는 일은 바로 그들을 추모하는 제사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리우스 왕이 말한다: "이것이 내가 다스리는 왕국이다: 소그디아나를 건너 스카타이부터 에티오피아까지. 신드에서 사르디스까지." 다리우스 대왕의 명문에 이렇게 써 있단다. 인류 최초의 문명에서 뻗어 나와 아랍을 넘어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 심지어 그리스에까지, 아니 우리 신라에까지 분명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문화. 인류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와 7일을 한 주로 묶어 요일마다 다른 이름을 붙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이 페르시아를 통해 펴져 나갔다. 7000여 년 페르시아 제국의 문명의 길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위대했던 인물들의 인적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유물에 새겨진 그들의 정신과 문화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선사 때부터 채색 토기에 문양을 새기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동물들을 왜 그리도 숭배했던지, 많은 동물 모양의 토기들이며 동물무늬를 새긴 빛나는 황금 그릇들. 그토록 훌륭한 의식용 그릇을 사용하여 빌고 빌었지만 다리우스는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의 이란은?
오전 중에 페르시아의 여행을 끝내고 큰언니 집에 가기로 했던 것을 까먹고 있었다. 거대했던 제국, 페르시아 속으로 들어갔으니 간단히 나올 수가 없었다. 조공을 바치려 '만국의 문'으로 드나들었던 수많은 고대의 여러 국가 사절들처럼 유물 참배의 줄에서 간단히 이탈할 수가 없었다.
우리 형제에게 엄마 역할이었던 큰언니께서 건강이 매우 안 좋아졌다. 동생내외와 함께 외식을 하며 나는 전에 들었던 임씨의 말을 그대로 옮기며 웃기도 하고 다음 세대의 일을 도모해보기도 했다. 제사는 다음부터는 아들에게로 옮긴다고 고해야 하지 않겠냐고. 식당에서 나오는 깔끔하고 맛좋은 부침개를 제사용으로 쓰려고 한 접시 샀다. 모두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함이 아닌가. 살아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이 명언이겠다. 살아서 예수제를 행하듯 참 삶의 길을 간다면 죽은 뒤의 일이 무슨 걱정이 되랴! 사찰에서는 예불 때 '축원' 이란 것이 있다. 신도가 몇 십 명만 되어도 줄줄이 주소부터 손자까지읽어대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성법스님은 '어디 사는 아무개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처님 전에 축원을 안 하신다. 말이 축원이지 중생들 귀 즐겁게 해주는 것 아닌가 하신다. 몇 십분 동안 염불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더 불교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디 사는 아무개라고 꼭 밝혀야 '말 귀'를 알아듣는 부처라면, 그깟 부처를 무슨 대수라고 믿을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대신 저는 큰 법회 때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불자와 가족 등....'이런 식으로 우리말로 다 알아듣게 축원합니다." 과연 그렇다. 귀신들이 구천을 헤매다가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잘 살면 제대로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편안하리라. 벽에다 써 붙여야 안다면 귀신도 아니지. 살아 있는 사람 마음 문제다. |
늦은 오후 터덕터덕 전주역으로 간다. 2008년 맑은 8월의 마지막 주다. 털거덕거리는 열차의 울림에 온몸을 내맡기자 정점을 막 넘어가는 늦여름 풍경이 한 장 한 장 유리창을 스친다. 서울이 가까워지자 큰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나야, 전주…. 내일 뭘 하실려우? 나랑 '페르시아'나 가게… " "응? 아휴, 내가 요즘…… 갈 수 있으려나?" 활발한 것 같으나 안정되어 있지 않은 목소리다. "혼자 갔다 오렴. 나, 너 오면 밥도 못해주겠다. 다음 날 제사도 있고 준비도 해야 해!" "알았어, 내가 내일 오전 중에 구경하고 오후에 가서 도와줄게. 내가 밥 해줄게." 씩씩하게 말했다.
지난 주말에 문학행사에 갔다 오던 길. 차안에서 들은 한 문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안의 사인동 마을이 고향인 임씨가 설날에 고향의 이웃집에 세배를 갔다. 그 집 벽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최종성 할아버님 금년부터는 제사를 인천 최종성(할아버님의 장손자)이네 집에서 지내게 됐으니 이제는 그쪽으로 가세요." 무슨 얘기 끝인지 생각나지는 않으나 명절과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셈이었다. 우리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각자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렇게 써 붙이지 않아도 귀신은 다 알고 있다. 혹은 귀신이니까 벌써 마음먹은 순간부터, 형편을 다 알았을 것이다 란 등등. 예부터 제사는 옮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이제 시대에 따라 각자 형편 따라 달라지고, 사람의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제사를 맡아 하던 며느님이 나이 들어 힘들어지고 자신이 제사 받을 지경이니 어찌 할 것인가. 그것도 세대 교채를 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생의 전선에서 은퇴 하면 자식이 가장이 되고 부모의 보호자가 되지 않는가. 큰언니를 만나면 그 벽보의 이야기를 꼭 해줘야겠다 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옛 제국인 페르시아까지 가는 데에 오전이 다 걸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니 정오가 다 되었다. 중앙박물관 본관과 기획전시실 사이의 20여 개쯤 되는 계단을 오르면 넒은 전망대가 운동장 같다. 뒤편으로는 남산 타워가 훤히 보이고 왼편으로 멀리 북악산도 보인다. 아래는 보기 좋게 꾸며진 박물관 뒤뜰이 보인다. 바람이 시원한 전망대의 돌의자에 앉아 도시락부터 먹었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면 멀미가 날 것이니 단단한 여행 준비가 필요하다. ' 이란의 옛 제국 페르시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다 놓았다고 4월부터 광고를 했다. 폐막을 며칠 앞두고 바삐 나선 길이다. 이렇게 과거 몇 세기로의 여행 선에 오를 때마다, 옛 인류 조상들의 위대한 흔적을 대하는 일은 바로 그들을 추모하는 제사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리우스 왕이 말한다: "이것이 내가 다스리는 왕국이다: 소그디아나를 건너 스카타이부터 에티오피아까지. 신드에서 사르디스까지." 다리우스 대왕의 명문에 이렇게 써 있단다. 인류 최초의 문명에서 뻗어 나와 아랍을 넘어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 심지어 그리스에까지, 아니 우리 신라에까지 분명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문화. 인류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와 7일을 한 주로 묶어 요일마다 다른 이름을 붙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이 페르시아를 통해 펴져 나갔다. 7000여 년 페르시아 제국의 문명의 길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위대했던 인물들의 인적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유물에 새겨진 그들의 정신과 문화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선사 때부터 채색 토기에 문양을 새기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동물들을 왜 그리도 숭배했던지, 많은 동물 모양의 토기들이며 동물무늬를 새긴 빛나는 황금 그릇들. 그토록 훌륭한 의식용 그릇을 사용하여 빌고 빌었지만 다리우스는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의 이란은?
오전 중에 페르시아의 여행을 끝내고 큰언니 집에 가기로 했던 것을 까먹고 있었다. 거대했던 제국, 페르시아 속으로 들어갔으니 간단히 나올 수가 없었다. 조공을 바치려 '만국의 문'으로 드나들었던 수많은 고대의 여러 국가 사절들처럼 유물 참배의 줄에서 간단히 이탈할 수가 없었다.
우리 형제에게 엄마 역할이었던 큰언니께서 건강이 매우 안 좋아졌다. 동생내외와 함께 외식을 하며 나는 전에 들었던 임씨의 말을 그대로 옮기며 웃기도 하고 다음 세대의 일을 도모해보기도 했다. 제사는 다음부터는 아들에게로 옮긴다고 고해야 하지 않겠냐고. 식당에서 나오는 깔끔하고 맛좋은 부침개를 제사용으로 쓰려고 한 접시 샀다. 모두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함이 아닌가. 살아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이 명언이겠다. 살아서 예수제를 행하듯 참 삶의 길을 간다면 죽은 뒤의 일이 무슨 걱정이 되랴!
사찰에서는 예불 때 '축원' 이란 것이 있다. 신도가 몇 십 명만 되어도 줄줄이 주소부터 손자까지 읽어대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성법스님은 '어디 사는 아무개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처님 전에 축원을 안 하신다. 말이 축원이지 중생들 귀 즐겁게 해주는 것 아닌가 하신다. 몇 십분 동안 염불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더 불교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디 사는 아무개라고 꼭 밝혀야 '말 귀'를 알아듣는 부처라면, 그깟 부처를 무슨 대수라고 믿을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대신 저는 큰 법회 때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불자와 가족 등....'이런 식으로 우리말로 다 알아듣게 축원합니다." 과연 그렇다. 귀신들이 구천을 헤매다가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잘 살면 제대로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편안하리라. 벽에다 써 붙여야 안다면 귀신도 아니지. 살아 있는 사람 마음 문제다.
"애들 아버지, 올 추석은 연휴가 짧아서 서울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성묘는 김포의 한재사당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아버님 모시고 그리로 오세요. 중조이신 그분의 사당에서 조상 대대께 다례를 올리면 그도 뜻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도 벽에다 이렇게 써 붙여놓고 갈까. 조상이 고향이니 무덤이 고향인가. 고향이 움직인다. 페르시아 유물들의 나들이처럼 살아있는 유물이 움직여야지. 고향이 간다. (2008년 9 /9)
5 법주사와 팔상전
속리산 법주사 하면 절 풍경보다 입구에 있었던 40여 년 전의 정이품 소나무 자태다. 4년 전 춘삼월의 폭설 때 이 소나무의 가지가 부러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이 일었기에 그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옛날과는 너무나 변화된 주변 환경이어서 그 소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처음엔 알아볼 수 없었다. 비록 한 가지가 잘려나갔지만 여전히 그 수관(樹冠)은 수려하다 하늘을 가린 참나무들이 울긋불긋한 오리 숲 터널. 계곡에 물은 많지 않으나 맑은 하늘을 인 나무숲이 거꾸로 선 물 숲의 음영이 어찌 저리도 아름다운가. 어젯밤 유난한 안개가 내려서인지, 낙엽의 향기와 숲이 품어내는 향기가 참으로 폐부 깊숙이 베어들어 몸과 마음이 맑아진다. 숲의 향기가 하루 내 코끝에 맴돌아 거룩한 향공양을 받는 기분이다. 맑게 정화된 마음으로 '호서제일가람' 이란 편액이 붙은 일주문을 들어선다. '속리산대법주사'란 전서로 된 편액은 서산에 있는 개심사 편액의 글씨와 너무나 흡사하여 숲을 지나는 동안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고쳐 세워 준다. 오리숲길에서 가다듬은 마음으로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통과한다. 아! 만나고 싶었던 '팔상전' 1984년 화순의 쌍봉사 목탑이 불타버렸다는 비보를 들은 후 유일한 예로 남은 국보로써의 목탑이 팔상전이기에……. 보통 사찰에 들어서면 대웅보전 앞에 석탑이 있기 마련이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부처님의 무덤이기에 부처님의 몸을 상징한다. 법주사는 석탑이 없는 대신에 이 팔상전이 목조 오층탑인 셈이다. 몇 십 년 전에 스쳤던 팔상전을 늘 사진으로 소식으로 접하다가 드디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인 성도 과정을 참배하게 되었다. 신라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이래 임란 때의 소실과조선 인조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을 거쳐 1969년 무렵 해체 복원한 것으로 안다. 이층 기단 위에 5층 목탑, 각 층마다 점점 좁아지는 처마 선이 활짝 피어난 꽃잎 같아 화려하게 핀 연꽃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각 층마다 네 귀의 공포 조각은 또 하나의 꽃 같이 아름답고 목조 특유의 부드러움과 아늑함이 있어 친근하고 포근하다. 석가모니의 성도 과정의 깨침을 뜻하여 팔(捌) 자는 깨칠 팔 자라 한다. 물론 여덟팔로도 쓴다. 각 층의 모서리에 귀면 상을 붙여 모든 악을 물리치고 있다. 쌍계사, 선암사, 범어사에서도 볼 수 있었고, 다른 큰 사찰이라면 팔상도가 걸려있는 전각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 다 한 눈에 팔상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법주사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성도 과정인 팔상도를 한 눈에 다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우선 팔상전 앞의 배례석에서 예의를 갖추고 육바라밀을 의미한다는 여섯 계단을 올라 전각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한 눈에 팔상도八相圖를 다 볼 수 없다. 특이하게도 밖에서는 5층으로 되어 있으나 안에서는 한 통으로 되어 있다. 마치 금산사 미륵전이 밖에서는 3층인데 안에서는 한 통속인 것과 같다. 그리하여 가운데는 4면 벽으로 된 통 기둥이 상륜부까지 이어져 있다. 한 면의 벽에 두 폭씩 석가모니의 팔상이 걸려 있다. 팔상을 다 보려면 한 바퀴를 돌아야 하고 그리되면 자연히 부처님 일생을 참배하는 탑돌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두 면의 팔상도 밑에 부처님의 법륜상이 앉아 있고 나머지 앞면은 항마촉지인 상과 뒷면은 열반상이 누워 있다. 법주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한 의신조사의 뜻대로 속세를 떠나 인도로부터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를 펼 수 있는 터임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천여 년의 세월을 넘기면서 소실되고 중창을 거처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펼쳤던 불법의 진면목들이 있었다면 어디에서 구현되고 있을까. 속세를 떠나 깊은 산에서 불도를 닦으며 진리의 빛을 밝혔던 법력에 의해서 오늘날 이 세상이 이렇게 발전했을까. 이 가람에 석등이 네 기나 있는 것은 그를 입증하는 것도 같다. 특히 국보 5호로 지정된 쌍사자 석등의 아름다운 조각이 대변하듯, 진리의 빛을 드높이 올려 두루 비추려 쌍사자가 온 힘을 다 해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지 않은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사자 둘이 서로 무슨 말을 하는 듯도 하며, 두 발에 예쁜 신발까지 입고 키 발까지 세워 화사석을 돌리고도 있는 것 같다. 그 오랜 세월 키 발로 석등을 받치고 있노라 힘들었을 텐 데도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리하여 천 오백여 년 동안 세상은 변하여 조용하던 절 집 문턱 앞까지 자동차와 사람물결이 밀려드는 것일까. 대형버스가 물밀듯 들어오며 오리숲길 앞에는 저자거리가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번뇌가 곧 보리(깨달음)이며 중생이 부처이고, 승속(僧俗)이 하나가 된 세상이 된 듯하다. 언뜻 보기에 법주사의 가람 배치가 어수선한 것 같음은 원래의 배치가 후에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원통전 앞에 '희견보살상'이란 석조인물상이 있다. 이는 보살상과는 거리가 먼 형상이다. 이 석조인물상이 희견보살이라 명명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 새로 해석된 신앙을 나타낸 것이란 설이다. 이 석조인물상은 '봉(捧)향로 공양자상'으로 부를 수 있으며 불법의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온 몸을 태우며 공양을 드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의 사진을 보면, 당시에는 석조인물상의 앞쪽에 본래 미륵불상을 모셨던 전각, 산호전(용화전)이 있었다. 가람 배치 면에서 미룩불과의 관련성이 있다. 따라서 석조인물상은 미륵불을 향해 향을 공양하는 모습의 공양자를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동서 축을 일직선으로 석등과 석연지의 존재, 석조인물상 뒤에 석등, 석연지를 한 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미륵불에 대한 일련의 공양 (향공양, 등공양, 정수공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시의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었다. 통일 신라 이전에는 이 지역이 삼국의 접전 지였으므로 백제 유민들이 미륵하생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륵도량을 세웠다는 설이다.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백제 유민으로써 미륵사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금산사에서 이룩하고자 했던 뜻을 법주사의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잇고자 하였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지금은 가람배치 축이 달라졌다. 일주문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일직선 상 금강문과 사천왕문, 팔상전과 쌍사자 석등이 배치되고 옆으로 원통보전과 미륵불이 배치되어 있다. 뭐니 해도 사찰의 주 전각은 대웅보전이다. 이 전각의 지붕은 2층이지만 내부는 통청이다. l층이 높아 2층 탑 같은 형상이다. 공포가 많은 다포식이어서 화려하고 계단 돌도 예쁘다. 이런 전각은 마곡사에서도 같은 형태의 대웅보전을 볼 수 있다. 마곡사에는 대웅보전 아래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명광전이 따로 있다. 대웅보전에 들어가서 예를 올렸다. 보통 대웅보전의 주불은 항마촉지인 상의 석가모니불인데, 주불을 비로자나불로 모시고 있다. 수인의 지권인도 왼손을 감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 보아 '대적광전'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대웅보전의 삼존불이 이 사찰의 품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시대가 부르는 것은 화엄사상일 지도 모르겠다만, 화엄사상과 미륵사상, 불교의 법 전체가 한 통으로 형상화된 것으로도 보인다. 법주사는 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삼라만상의 대응과 조화의 이치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이치에 인간이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모든 아름다운생명들! "단풍이 들고 국화가 만발할 때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것이 봄에 꽃과 버들을 즐기는 것과 한가지다. 사대부 가운데 옛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중양일(음9월9일) 에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짓는다."라고 <일양세시기>에도 말했지. 시월 마지막 날의 밤안개를 가르고 이른 11월의 첫날 오늘의 나들이가 그런 날이었던가 싶다. 부처님을 참배하여 마음도 맑히는 은혜를 입었고 단풍도 즐겼다. 찹쌀 전병에 감국을 눌러 부친 감국전이나 그윽한 국화주을 대신한 머루주와 찹쌀 떡 한 조각과 맥주 한 잔에 마른안주 등이 충분한 감흥을 돋우어 주었다. (2008/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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