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에세이 3집

에세이 3집 11-18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8. 11:51

11. 누가 무엇이 그를 벼랑으로 몰았는가

 

 

 

 

 

                                                    

  컴퓨터를 켜니  다음 시작페이지 대문자가 모두 검정 글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다.

추모의 글 남기기에 나도 짧은 추모글을 남겼다. 오전에 주로 TV를 잘 안 보기 때문에 5월 23일

낮 12시 무렵까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몰랐다. 서울에서 아이들이 내려와서 시내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내 음식점에서 아이들 삼촌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었다. 너무나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점심을 잠깐 뒤로 미루고 뉴스를 경청했다. 전후 사실을 알고 정말 비통 참담

슬펐다. 통곡하고 싶었다. 많은 국민들이 애도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봉하마을까지 내려가는

입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권력의 싸움에 희생되는 사람과 불행한 사람들이 있어야 할까.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보복 수사가 잇달아 일어나는 일을 언제까지 보아야 할까. 모두들 그렇게 아는 듯 모르는 듯,

언론도 현 정권에 맞추어 보도하는 것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에 대하여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말이다. 마치 계획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 같이 정치권을 둘러싼 게이트 사건들의

뉴스가 그랬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전 시대나 다른 이들을 공격해서 불행한

사태로까지 몰고 가야만 할 것인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은 싸워서 지켜나가야만 그야말로 자유스러운

사회가 되기 마련인가. 그 과정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비참하다.  정치에 대하여서는 어떤 의견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주장도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바람이야 없겠는가. 굳이 말하고 싶다면 정치는 자신을 잘 정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철인(哲人)정치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으면 한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나

인도의 간디 같은 철인들이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백성들의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국민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국민들이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죽음의 의미는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한 역할을 당당히 담당해온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는 현실을 보면서 애석하기 그지없다. 작년에는 국민 배우 최진실이 상황에 떠밀리어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끝내 죽음으로 우리들을 슬프게 했다. 올 3월에는 만나면 금방 친구가 될

것 같았던 화가 김점선이 투병하다 죽었다. 현대 전위예술작품 같았던 그의 일생이 무대를 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5월 9일에는 장영희 교수가 국화꽃 한 떨기 같은 희망의 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전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도 어떤 면에서 우리의 스타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스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너무나 극단적인 죽음 앞에서는 국민 누구나가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죽음에는

그럴만한 상황과 이유가 있으며 또한 어떤 죽음도 죽음으로만 할 수 있는 무언의 말이 있는 것 같다.

이름 있는 사람과 이름 없이 지금도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뉴스는 볼 때마다 안스러운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끝내는 고향마을 부엉이바위까지 떠밀려갔다 뛰어내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인가. 극단적인 죽음은

정치인들과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정치에 대하여 정치인들에 대하여 무엇이

어떻다고 할 수 있는 판단과 비판을 할 견식은 없지만, 그리고 참여할 입장도 아니기에 그가 지난

2002년대선 때부터 재임기간 동안 보여준 행보와 인상을 추억하며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싶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선 때의 광고 캐릭터였다. 내가 좋아하던 영국 팝가수였던 존래논의

'IMAGINE'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 한 방울을 주르륵 흘리는 노무현 후보의 모습이었다. 이메진

노래는 나의 이상을 그대로 담은 노래였기에 내 첫 수필집 <바람의 커튼>에도 관련된 수필을

세 편 수록한 바 있다. 그만큼 그도 순수한 자유와 평화를 이 땅에 도래하는 것을 강렬하게 희망했다.

서민의 대통령이 당선되기까지 투표 결과를 지켜보면서 아슬아슬하게 반전하여 승리했을 때 지지자들과

환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 번 지지했으면 끝까지 해내야 했다. 재임기간 동안 열린우리당이

분열되는 과정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보면서 정치현실에 눈감았다. 개혁의 깃발을 내걸고 권위의식을

탈피하여 고른 지방발전을 내걸었지만, 역시나 기득권과 권위주의 세력과 싸우는 과정은 눈물겨웠다.

잘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보완하며 함께 잘 해나갈 수 있는 풍토는 어느 조직이든지 마땅히 해내야

할 일인 것을. 사람들의 조직에는 언제나 진보와 보수, 기득권과 추종자들의 서로 다른 의견이 있기

마련. 예술의 분야에까지 사람들의 조직의 운영에는 운영자들의 편리에 따라서 행해지기가 십상이지

않은가. 어찌 말단의 일원이나 아무 힘도 없는 서민들의 입장을 고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재임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제발 좋은 고향의 모델을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나의 살던 고향의 프로젝트에 대한 꿈을 이웃들에게 말하던 모습이 참으로 아깝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쯤은 돼야지 않습니까, 나의 살던 고향이 감나무가 썩는 곳, 하면

되겠습니까?" 퇴임 후 오히려 고향에서 소탈한 밀집모자 모습이 그의 인기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니

예의 주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 성웅 이순신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이 겹쳐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이순신 장군도 그 당시 정치적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회생하기가 불가능했던 해전에서의

연승으로 그는 국민의 추앙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백의종군하는 입장에서 전쟁이 끝나고 영웅이

되어 국민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없었던 이순신의 마지막 선택. 전장에서 갑옷도 입지도 않은

채 선상의 죽음을 맞이하려던 비장한 입장은 어땠을까. 그 당시의 사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많은

이들은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앞으로 살아갈 일이 너무나 힘들고

비참해질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차피 죽은목숨이었다. 어찌 시체로 살아남기를 원할 수 있었겠는가.

너무나 힘들어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었고, 말할 수도 없고, 불면의 날을 보내야 했던

그였다.   

  아이들이 서울로 올라간 뒤 일요일 하루는 뉴스를 통하여 고인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쉬고, 월요일

아침 일찍 금산사 분향소로 향했다. 명부전에 마련된 빈소에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분향하며 헌차

공양 올렸다.  너무 좋은 5월은 너무 슬프기도 하다. 이 좋은 철을 택하여 그렇게 귀천하시는가.

사람에 의해 아픈 계절이 되게 한 점 천지간에 몹시 부끄럽다. 신록의 찻잎을 채취하면서 추모의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이른봄에 꽃핀 나무에는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고 5월에 나타나는 뻐꾸기가

다른 새들의 소리에 맞춰 세상을 뜬 사람들에게 애도의 곡을 토하는 듯했다. 소쩍,쏘쩌억, 뻐어꾹,

뻑꾹. 뻐어꾸욱.  삼가 고인과 유족들에게 추모의 정을 보낸다. (5/26/2009)

 

 

 

 

누가, 무엇이 그를 벼랑으로 몰았는가

                                                    

  컴퓨터를 켜니  다음 시작페이지 대문자가 모두 검정 글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다.

추모의 글 남기기에 나도 짧은 추모글을 남겼다. 오전에 주로 TV를 잘 안 보기 때문에 5월 23일

낮 12시 무렵까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몰랐다. 서울에서 아이들이 내려와서 시내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내 음식점에서 아이들 삼촌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었다. 너무나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점심을 잠깐 뒤로 미루고 뉴스를 경청했다. 전후 사실을 알고 정말 비통 참담

슬펐다. 통곡하고 싶었다. 많은 국민들이 애도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봉하마을까지 내려가는

입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권력의 싸움에 희생되는 사람과 불행한 사람들이 있어야 할까.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보복 수사가 잇달아 일어나는 일을 언제까지 보아야 할까. 모두들 그렇게 아는 듯 모르는 듯,

언론도 현 정권에 맞추어 보도하는 것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에 대하여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말이다. 마치 계획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 같이 정치권을 둘러싼 게이트 사건들의

뉴스가 그랬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전 시대나 다른 이들을 공격해서 불행한

사태로까지 몰고 가야만 할 것인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은 싸워서 지켜나가야만 그야말로 자유스러운

사회가 되기 마련인가. 그 과정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비참하다.  정치에 대하여서는 어떤 의견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주장도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바람이야 없겠는가. 굳이 말하고 싶다면 정치는 자신을 잘 정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철인(哲人)정치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으면 한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나

인도의 간디 같은 철인들이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백성들의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국민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국민들이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죽음의 의미는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한 역할을 당당히 담당해온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는 현실을 보면서 애석하기 그지없다. 작년에는 국민 배우 최진실이 상황에 떠밀리어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끝내 죽음으로 우리들을 슬프게 했다. 올 3월에는 만나면 금방 친구가 될

것 같았던 화가 김점선이 투병하다 죽었다. 현대 전위예술작품 같았던 그의 일생이 무대를 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5월 9일에는 장영희 교수가 국화꽃 한 떨기 같은 희망의 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전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도 어떤 면에서 우리의 스타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스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너무나 극단적인 죽음 앞에서는 국민 누구나가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죽음에는

그럴만한 상황과 이유가 있으며 또한 어떤 죽음도 죽음으로만 할 수 있는 무언의 말이 있는 것 같다.

이름 있는 사람과 이름 없이 지금도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뉴스는 볼 때마다 안스러운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끝내는 고향마을 부엉이바위까지 떠밀려갔다 뛰어내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인가. 극단적인 죽음은

정치인들과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정치에 대하여 정치인들에 대하여 무엇이

어떻다고 할 수 있는 판단과 비판을 할 견식은 없지만, 그리고 참여할 입장도 아니기에 그가 지난

2002년대선 때부터 재임기간 동안 보여준 행보와 인상을 추억하며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싶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선 때의 광고 캐릭터였다. 내가 좋아하던 영국 팝가수였던 존래논의

'IMAGINE'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 한 방울을 주르륵 흘리는 노무현 후보의 모습이었다. 이메진

노래는 나의 이상을 그대로 담은 노래였기에 내 첫 수필집 <바람의 커튼>에도 관련된 수필을

세 편 수록한 바 있다. 그만큼 그도 순수한 자유와 평화를 이 땅에 도래하는 것을 강렬하게 희망했다.

서민의 대통령이 당선되기까지 투표 결과를 지켜보면서 아슬아슬하게 반전하여 승리했을 때 지지자들과

환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 번 지지했으면 끝까지 해내야 했다. 재임기간 동안 열린우리당이

분열되는 과정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보면서 정치현실에 눈감았다. 개혁의 깃발을 내걸고 권위의식을

탈피하여 고른 지방발전을 내걸었지만, 역시나 기득권과 권위주의 세력과 싸우는 과정은 눈물겨웠다.

잘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보완하며 함께 잘 해나갈 수 있는 풍토는 어느 조직이든지 마땅히 해내야

할 일인 것을. 사람들의 조직에는 언제나 진보와 보수, 기득권과 추종자들의 서로 다른 의견이 있기

마련. 예술의 분야에까지 사람들의 조직의 운영에는 운영자들의 편리에 따라서 행해지기가 십상이지

않은가. 어찌 말단의 일원이나 아무 힘도 없는 서민들의 입장을 고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재임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제발 좋은 고향의 모델을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나의 살던 고향의 프로젝트에 대한 꿈을 이웃들에게 말하던 모습이 참으로 아깝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쯤은 돼야지 않습니까, 나의 살던 고향이 감나무가 썩는 곳, 하면

되겠습니까?" 퇴임 후 오히려 고향에서 소탈한 밀집모자 모습이 그의 인기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니

예의 주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 성웅 이순신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이 겹쳐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이순신 장군도 그 당시 정치적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회생하기가 불가능했던 해전에서의

연승으로 그는 국민의 추앙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백의종군하는 입장에서 전쟁이 끝나고 영웅이

되어 국민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없었던 이순신의 마지막 선택. 전장에서 갑옷도 입지도 않은

채 선상의 죽음을 맞이하려던 비장한 입장은 어땠을까. 그 당시의 사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많은

이들은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앞으로 살아갈 일이 너무나 힘들고

비참해질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차피 죽은목숨이었다. 어찌 시체로 살아남기를 원할 수 있었겠는가.

너무나 힘들어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었고, 말할 수도 없고, 불면의 날을 보내야 했던

그였다.   

  아이들이 서울로 올라간 뒤 일요일 하루는 뉴스를 통하여 고인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쉬고, 월요일

아침 일찍 금산사 분향소로 향했다. 명부전에 마련된 빈소에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분향하며 헌차

공양 올렸다.  너무 좋은 5월은 너무 슬프기도 하다. 이 좋은 철을 택하여 그렇게 귀천하시는가.

사람에 의해 아픈 계절이 되게 한 점 천지간에 몹시 부끄럽다. 신록의 찻잎을 채취하면서 추모의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이른봄에 꽃핀 나무에는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고 5월에 나타나는 뻐꾸기가

다른 새들의 소리에 맞춰 세상을 뜬 사람들에게 애도의 곡을 토하는 듯했다. 소쩍,쏘쩌억, 뻐어꾹,

뻑꾹. 뻐어꾸욱.  삼가 고인과 유족들에게 추모의 정을 보낸다. (5/26/2009)

 

 

 

 

 

12

절명가

                                          

  2400여 년 전, 중국의 초나라에 굴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뛰어난 정치가요 비극 시인이었다. 간신들의 중상모략으로 두 번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다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기가 너무나 힘들구나!" 초나라가 망하는 꼴을 그대로 볼 수 없어 마침내 돌을 끌어 안고 멱라수 깊은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되었다. 중국의 단오절은 굴원에서 비롯되었다. 물고기가 굴원을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애통한 초나라 사람들은 쫑즈를 만들어 강물에 던졌다. 오늘날까지 쫑즈는 단오절의 절식이 되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후대에 길이길이 회자되어 애모를 받고 있다고 한다. 조선의 문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이 주었다. 그리고 이런 절명가를 남겼다.
 
     "온 세상 모두가 흐려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했으며,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은 정신 깨어 있어서
     그만 이렇게 추방당한 거라오."
     - 중략 -
     그러니 어찌 이 깨끗한 내 몸으로
     저 더러움을 받을 수 있으리요?
     차라리 상수(湘水) 물가로 달려 가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이 희고 깨끗한 내 몸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쓸 수 있으리요?"
     어부가 듣고서 빙그레 웃고는
     돛대를 올리며 가면서 노래하길
     '창랑의 물결이 맑을 때라면
     이 내 갓끈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결이 흐릴 때라면
     내 발이나 씻어보리라.'
     마침내 가 버리곤 말이 없구나.  -어부사(漁父辭) 중에서-
 
  굴원의 초사(楚辭)에는 귤을 칭송한다는 귤송(橘頌)이 있다. "하느님이 좋은 나무인 귤을 보내와 먹게 하심이여! 명을 받아 옮기지 않고 남녘에서 나네, 깊고 굳세어 옮기기 어려운데 다시 한결 같은 뜻, 푸른 잎 흰 꽃 분화(紛華)로움 기뻐할 만하네. -생략-" 옛 중국의 다인(茶人)들이 차나무를 칭송할 때 굴원의 귤송을 인용하면서 차나무는 귤나무 덕성을 닮았다고 썼다. "하느님 좋은 나무에 귤 덕성 내리시니, 명 받아 옮기지 않고 남녘에 살며, 잎 촘촘 싸락눈 겨뤄 삼동 푸르게 뚫고, 흰 꽃 서리 씻겨 가을 영화로 피었네."
  


  또한 조선 성종 때, 한재(寒齋) 이목(李穆)은 가뭄이 들었는데 정승 윤필상의 작태를 보다못해 임금께 고한다. "윤필상을 삶아야 비가 내릴 것이옵니다!" 우연히 길에서 윤필상을 만났다. "네가 정녕 내 늙은 고기를 먹기 원하느냐?" 하자 이목은 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갔더란다. 결국 윤필상의 모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오사화 때 절명가 한 수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검은 까마귀 모이는 곳에
     흰 갈매기야 가지마라.
     저 까마귀 성내어
     너의 흰빛을 시샘하나니
     맑은 강물에 깨끗이 씻은 몸이
     저 더러운 피로 물들까 두렵도다."

  중종 때 와서 윤필상은 진도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았다. 물론 이목도 모든 벼슬을 추증받았으며 숙종 때는 정2품의 관직을 추가 추증 받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재 이목은 어린 시절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종직이 함양에서 백성들의 차세(茶稅)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차밭을 조성한 바도 있다. 이목은 김종직의 차생활과 성정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목은 장원급제한 후 연경에 유학하여 중국의 육우의 다경을 읽고 심취하였다. 중국의 차산업을 둘러보고 조선에서 최초로 차(茶)에 대한 부(賦)를 남겼고 후대의 다인들에게 차의 대부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목을 중조로 둔 전주이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차(茶)를 접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차를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마차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가던 성섬문의 절명가를 보자.
     북소리 둥둥둥 죽음을 재촉하고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길엔 주막 한곳 없다 하는데
     오늘밤은 어느 집에 묵고 간단 말인가...

 이러한 절명가를 남긴 사람은 또 누구인가?
     .............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조각 아니겠는가?
     ..........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모두들 굽은 학문을 하고 세상에 아부하며 이리 휘고 저리 휘는 무리들 중에 이런 사람도 있어 저리도 애절하게 추모하는가. 그들은 굴원처럼, 이목처럼 자기 몸을 던졌으니…….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구차하게 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조금만 유념했더라면……. 우리는 절대로 있을 때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있을 때 잘 해 라는 노래말이 유행하지만 있을 때는 모르기 때문에 노래까지 부르는 것이 아닌가. 없어져 봐야 있을 때의 가치가 드러나고 지난 것은 아쉽고 그립다. 그리워서 안타깝고 애절함과 고뇌를 삼켜야 하는 인생이 아름답다. 어쩔 수 없이 대를 거듭하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람의 운명인가 싶다.

  생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라. - 서산대사  -

(2009년 6월 4일)

 

 

 

 

13.

야만인과 문화인

                                  

 
  살아서 꾸물거리는 주꾸미들이  커다란 접시에 담겨왔다. 난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생선회를 좋아한다. 처음 전주에 왔을 때는 정말 싱싱한 생선을 먹기가 어려웠다. 요새는 교통이 편리해져서 하루 안에 산지로부터 바다 고기들이 공수되어온다. 그러나 살아서 꿈틀대는 생물은 아직 한 번도 먹지 못했다.
  누들(국수)로드에 의하면 인류 최초로 발견된 화석의 글자는 '먹는다'였다고 한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 그 자체의 행위이기에 당연한 일일 터. 우리나라 말로 '먹는다'는 말처럼 여러 의미로 쓰이는 말도 드물 것이다. 모든 행위가 '먹는다'는 말과 연결된다. 사랑하는 일도 미워하는 일에도 모두 '먹는다'는 말이 쓰인다. 스포츠 게임에서조차 '골'을 '먹는다'.

  주꾸미는 즉석에서 끓는 물에 데쳐서 먹는, 이른바 '샤브샤브'요리를 하는 것이다. 산 것을 그대로 냄비에 넣는 것은 처음이다. 우선 내 앞으로 기어오는 주꾸미에게 '그래 오늘 나와 한 몸이 되자' 라고 인사를 했다. 요즈음은 쫄깃쫄깃한 것이나 질긴 음식은 먹기가 싫다. 그러나 주꾸미를 충분히 죽여서 먹는 맛이 괜찮았다. 또 싱싱한 냉이를 즉석에서 데쳐서 먹었다. 냉이는 땅에서 채취한 순간 절명하였으나 아직 팔팔 살아 있는 향이 있어 시커먼 주꾸미 국물 맛과 잘 어울렸다. 같이 간 문화인 한 여인은 징그러워서 주꾸미를 영 못 먹었다.
  먹는 것은 남의 살이 제일 맛있다고 했다. 사실 먹는 것 전부가 남의 살이다. 그러니까 죽은 것보다 산 것을, 제 살 닮은 것, 그대로 먹는 맛이 으뜸일까?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식인종(食人種)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은 고대 제국들이 무서운 전쟁을 치른 후로 도시국가들의 영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세계는 지금까지 전쟁놀이판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스포츠,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도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가짜 전쟁 놀음에서 출발하였다.
 
  "각자는 자기가 죽인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와서 자기 집 문에 매달아 둔다. 그들은 포로를 오랫동안 잘 대접해 주고 나서, 자기 친지들의 대회를 소집해 놓고, 포로의 양팔을 밧줄로 동여매어, 덤벼들지 못하도록 몇 걸음 떨어져 있게 하고, 팔 하나를 그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내어준다. 그리고 그들 둘은 회중들 앞에서 그를 칼로 쳐서 죽인다. 그렇게 하고 나서는 그것을 구워서 함께 먹고, 오지 않은 친구들에게 조각을 보낸다." 나도 옛날에 그런 장면을 영화에서 본 것 같다. 복수전에서 승리한 절정의 쾌감을 맛보기 위하여 원수를 잡아먹는 승전 식이었던가. 그들 동료들이 지켜보는데서 우리가 주꾸미를 끓는 냄비에 넣는 것처럼 전리품인 사람을 산 채로 끓는 가마에 넣었다. 그때는 저들은 문화가 없는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산 주꾸미를 죽여서 먹는 것도 야만행이지 않는가.
  몽테뉴는, 나는 이러한 행동이 흉측하고 야만적인 행위인 것을 주목하며 언짢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은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잘못은 잘 비판하면서, 우리들 자신의 야만행위는 주목하지 못하는 일이 슬프다. 나는 산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사람을 죽여서 먹는 것보다 더 야만이라고 본다. 아직도 아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신체를 고문과 고형으로 찟고 조금씩 불에 굽고, 개와 돼지에게 물어뜯어 죽이게 하는 일이 사람을 죽은 뒤에 구어서 먹는 것보다 더 야만스런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글에서 읽었을 뿐 아니라 생생하게 우리 눈으로 보았고, 그것은 옛날의 적들 사이가 아니라 우리 이웃 사람들, 같은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더 나쁜 일로는 종교의 경건한 신앙심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강호순이란 연쇄살인범에 대한 뉴스가 들끓었다. 이웃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고 잘 생긴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범죄 심리학이나 범죄 과학에서는 그를 두고 싸이코패스라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진단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흉악 범죄자였다. 이런 강력 범죄 뿐 아니라 패륜적인 사건들이 전에 없이 성해지는 사회에는 그럴만한 요소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고대인처럼 이웃과 원수간의 치열한 복수전을 한 것도 아니다.  인류 사회에 전범들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유전자 탓일까. 고대 사회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의 원혼이 깃들었을까. 어쩌면 사회에 대한 잠재적인 복수심이 범죄 때마다 번개같은 힘을 분출할 수 있게 했을까. 가장 원기 왕성한 나이 때 넘쳐나는 에너지를 그렇게 쓰게된 배경에는 어렸을 때부터 잘못 길들여진 무언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는가, 옳은 생각을 하도록 훈련되지 않았거나, 주위로부터 어떤 보살핌을 받아왔는가에 따라서 앞날에 가야할 길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현대 문화인의 지능적인 심리적 고문, 전략적인 사리사욕 행위 등 사람 잡는 일도 문명과 함께 날로 발전하는 양상을 본다. 난 그와 같은 뉴스를 보면서 '저런 나쁜 놈이 어디 있나' 하고 쉽게 말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몽테뉴처럼 내 안의 심리는 어떤가 하고 깊은 명상 속에 잠겼다. 같은 생명의 종(種)이란 슬픔 때문에.
 
  몽테뉴의 명상은 참으로 현대적이었다. 몽테뉴의 수상에 인용된 한 고대인 포로의 노래가 그렇다. 오래된 미래가 이런 것이다. "나는 포로 하나가 지은 노래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용감하게 다가와서 함께 모여 자기를 먹어치운다. 왜냐 하면 자기는 그들의 아비와 할아비를 잡아먹고 컸으니, "이 근육, 이 살점, 이 힘줄은 너희들의 살이다. 저 꼴의 가련한 미치광이들아, 너희들은 너희들 조상의 사지의 실체가 아직도 내 살 속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글쎄, 잘들 맛보아라, 너희들 자신의 살맛이 여기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도저히 야만이 느껴지지 않는 시상(詩想)이다."
  이는 얼마나 불교적 사유에서 나온 말인가. 자연(自然)전인(全人) 일체(一體)사상이 아닌가. 사실의 진실이 그렇다. 아프리카의 세린게티 초원의 동물들의 먹이사슬이 자연 모두를 살리고 있다. 먹이 사슬의 한 장면만 본다면 모두가 야만 행으로 보인다. 사람들만 유일하게 고상한 척하지만 우리도 자연의 먹이사슬의 한 고리에 놓여 있다.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지키는 일은 단순히 죽이지 말라 가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여 일체가 되는 일이다. 원한으로 혹은 이기심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으로 살리는 죽임이 되는 일이 아닌가. 격포항 나들이에서 주꾸미와 냉이와 한 몸이 되었으니, 나도 내 조상의 살을 먹었다. 전주에 도착하니 나는 다시 허기가 졌다. 뭔가 진짜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20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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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에는 가을 소리가
 
                                    
  모든 꽃들은 아름답다. 이름 없는 작은 풀꽃이라도 사람의 시선을 끌어 모은다. 그러나 꽃이 다투어 핀다는 봄꽃에서 느끼는 매력과 가을꽃이 주는 맛은 사뭇 다르다. 봄여름가을겨울 모두 각각의 모양과 빛깔이 있다. 그러나 같은 빛깔이라도 봄꽃 빛과 가을꽃 빛이 다르다. 가을꽃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 빛깔은 미묘한 빛 무늬를 만든다. 왜 그럴까. 코스모스,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각종 대국에서 작고 귀여운 소국들까지...
 같은 하양 색이지만 봄꽃이 주는 맛과 가을 국화나 흰 코스모스와 하얀 구절초에서는
소리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가을 소리……. 봄부터 소쩍새 소리를 듣고 천둥 번개 소리를 듣고 자라서일까. 가을꽃에서는 가을 달밤을 울리는 쓸쓸한 풀벌레와 방울벌레 소리도 담고 있다.
 여러 모습과 마음 빛을 담고 다양한 매력을 지닌 사람들처럼, 봄꽃 같은 사람, 여름 꽃 같은 사람, 가을꽃 같은 사람 그리고 겨울 꽃 같은 사람이 있다.
 
  봄꽃에서 느끼는 마음의 빛깔은 어쩌면 노랑 결이지 않을까. 같은 노랑이지만 봄의 노랑은 힘찬 희망의 깃발을 들고 피면서 생동감이 일렁이게 한다. 가을꽃의 정서는 뭐라 할까. 구절초의 빛깔이 하양, 분홍 보랏빛이 있지만,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빛이 주는 아릿함이 더한다.
  지평선을 물들이는 금빛 나락 물결이 파도치는 누른 들판은 가을 과실들과 더불어 풍요로움을 준다. 배고파도 배고픈 줄 모른다. 가을 들판을 채색한 황금빛에서는 봄의 개나리에서 느끼는 찬란함은 없다. 그보다는 말할 수 없는 뿌듯함과 넉넉함 뒤에 오는 허기진 마음, 곧 뒤따라올 비움의 또 다른 넉넉함이 기다리는 맛이다. 깊고 고요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맛. 뜨거운 물만 있으면 자꾸만 우러나는 찻물처럼,  그윽한 그리움의 맛이다.
 구절초는 여인들에게 좋은 약재가 되는 풀이다. 맑은 녹차와도 잘 어울린다. 해서 벌나비와 작은 벌레들이 왕왕거리며 서로 어울려 즐긴다.
 
 초등학생들이 하교 길에 이 꽃밭을 지난다. 아름다운 모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아이 셋을 세워놓고 험한 말씨와 눈초리로 아이 하나를 혼내고 있었다. 서로 싸운 것을 보고는 자기 딸이 피해를 보았다고 같이 싸웠다는 다른 아이를 혼내고 있었다. 아이들 싸움에 아버지가 나서서 역성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혼난 아이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 좋은 구철초와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풍경 옆에서 그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저씨, 서로 싸우다가 일어난 일인데, 또 다른 아이를 그렇게 울리고 가시면 되겠습니까?" 어저씨는 그 장면을 보았느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렇지만 주의를 주었으면 서로 사이좋게 놀도록 다 다독거려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 좋은 가을날에 아이와 함께 꽃밭이라도 거닐다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넌지시 한 마디 건넸다. 잠시 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닌다면 어떨까 싶었다. 꽃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 누구하고라도.
 
  우리동네 상관면보건지소와 상관초등학교 사이에는 구절초 밭이 있다. 이름난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조촐한 이 꽃밭이 너무 사랑스럽다.  좋은 사진 장면을 찾느라고 나무 사이를 헤치다가 거미줄을 만났다.  거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거미들도 가을에는 예쁜 옷을 갈아 입는 걸까. 검은 거미만 보았는데, 참 아름다운 초록빛에 빨간 무늬를 지닌 옷을 입은 거미다. 왕거미도 가을에는 가을 옷을 입는가보다. 거미는 어디서 나서 이렇게 거미줄을 스스로 치고 일생을 줄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운명일까. 형언해내기 어려운 육체미와 팻션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재주를 가지고서 얼마나 살면서 어떤 역할로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창작해낸 설계대로 치밀하게 조형한 거미줄에서 얼마만큼의 세월을 살아내는 걸까. 사람들 사이에도 저런 거미줄 같은 인연 줄을 만들면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득 비단벌레 생각이 난다. 통일신라시대 때의 지체 높은 사람의 허리띠 장식에는 비단벌레의 날개를 부쳐서 만든 것이 있다. 지금까지도 그 찬란한 빛깔을 자랑한다. 만드는 과정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벌레를 얼마나 잡아야 하는지, 수많은 날개를 모아서 촘촘히 붙였다. 그래서 멸종이 되다시피 했던 비단벌레의 운명이었다. 최근에 어떤 남쪽 지방에서 다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 거미들은 날개가 없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저 아름다운 몸체의 껍질을 모아서 사람의 장신구로 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인가. 현대인들이 너무나 바쁜 탓으로 저 거미줄까지 손이 미치지 않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아이야 울긴 왜 울어! 꽃밭에서 꽃들과 노래해봐.  금방 친구들과 사이좋게 될거야. 꽃과 함께 가을의 소리를 들어보렴. 도시에서 나는 가을 소리는 가을 폭탄 세일을 외치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시작하는 지 몰라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살펴보면 진정 들리는 가을 소리들이 있다.
 
  구양자가 밖의 스산한 가을 바람 소리가 이상해서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나가서 알아보아라."
  "별빛과 달빛이 환히 비치구요,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어요. 사방에 사람 소리는 도무지 없구요, 숲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요."
  "슬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니라."
                                            (2009 깊어가는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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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천을 부탁해

                                     

   "완전의 땅, 전주는 완산(完山) 더하기 전주(全州)라 해서 완전(完全)이다. 완산과 전주라는 명칭은 완(完), 전(全)이란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가장 살기 좋고, 풍요로우며, 자연재해가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도시라고 한다. 전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 도시, 전통문화도시, 예술의 도시, 학문의 도시, 건강의 도시 등으로 명성이 높다."
   43년 동안 전주에서 살아본 나의 경험으로는 잘 알 수 없었다. 30여 년을 넘기면서부터 서서히 그 전주를 대표하는 말의 뜻의 일부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연 재해가 많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최근에 지구 전체의 온난화 영향으로 몇 년 전 여름에 전주천이 범람하는 경우를 처음 보게 된 사실 뿐.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으나 최근 몇 년은 그 눈도 줄어들었다. 우리 자매들은 전국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전북 지방에 오면 먹거리가 안심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봐도 전주 사람들 같이 김치를 맛있게 담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처음 교동에서 신접살이 할 때  동네 어느 한 집에서 김치를 담는 날이면 이웃 잔치 날 같았다. 확독에 즉석에서 갈은 고추양념에 버무린 김치를 한 그릇 씩 돌리는 것이었다. 그 때 고구마 줄기로 김치 담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정겨운 풍경은 지금은 맛볼 수는 없다.

  전주시의 명칭이 전주부에서 전주시로 변경된 지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전주역사박물관에서는 지난 9월과 10월 동안 전주시의 60년 사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친구와 같이 사진을 쭉 둘러보다가 우리들의 고등학교 시절의 자화상들이 걸려 있는 사진 앞에 섰다. 전주여중과 전주여고가 지금의 리베라호텔 자리였을 때의 사진들이었다. "야! 우리들 사진이 저기 있다!" 하며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들떠서 그 때의 이야기들로 잠시 즐거웠다. 지금은 문화주택 자리가 된 인봉리 저수지가 메워져 공설운동장이었던 때에 한복을 입고 또는 고깔모자를 쓰고 마스케임 연습할 때. 운동장에서 전국대회가 열려 연습하던 때. 졸업사진으로 쓰기 위하여 전동성당에서와 다가산에서 하얀 모자에 가슴에 백선을 달고 나란히 찍은 사진들. 구도청 앞에서 전주여고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사진들. 나는 그 때 중대장으로 한 중대 앞에 서서 '우로 봣'을 외쳤다. 
  리베라호텔 자리에 학교가 있을 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50년 전, 학교 마당 위쪽은 철길 둑이었다. 운동장에서 뛰놀다 기차가 지나가면 올려다보면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전주 사람 밥만 먹고 똥만 싼다. 북대도 대학이냐, 멸치도 생선이냐." 왜 이런 가사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 시절의 세태를 나타낸 것일까. 그로부터 50년 뒤, 지금은 그 철길이 남원으로 내려가는 대로가 되고 전주와 남쪽을 통과하는 주요 도로가 되었다. 그 때는 전주천의 물길이 서쪽으로 돌아가는 도중 오목대에서 북으로 흐르는 작은 물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노송천이라고 불렸다.

  옛 사진을 보니 그 노송천을 따라 아침저녁으로 등하교를 하였던 것이다. 서노송동에서 중앙시장과 중앙성당 옆으로 와서 코아호텔 옆으로 리베라호텔까지 제법 큰 천이 흘렀다. 그 노송천의 좁은 길은 사람들이 딱 걸어다니기 좋은 길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학교까지 갔다가 노을을 등지고 어스름 저녁에 그 길로 돌아왔다. 여고를 졸업하고 난 후에는 전주를 잊고 서울에 살면서 부산으로 다녔다. 다시 전주에 와서 살게 될 줄이야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60년대 서울에서는 청계천이 복개되어 명동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삼일고가 도로가 생겼다고 우리는 일부러 그 길을 구경하기 위하여 그쪽으로 다니기도 하였다. 그 무렵 전주에서도 노송천이 복개되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고속도로와 각 지방에서도 도로 정비가 편리하게 이루어진 때였다. 두 세대를 지난 지금은 그 도로 밑으로 흐르는 천을 복구해야 해야 도시의 숨결을 되살리게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시대 환경과 시대 정신은 변화해 가고 있다. 지금 전주시는 노송천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도시 미화나 환경 등의 깊은 속내까지 전문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렇게 중지를 모아서 진행하기로 했으니 해보고 살아보고 또 다음의 변화에 따라야 할 것인가 보다. 생성과 소멸과 건설과 파괴를 되풀이하면서 우리가 나아가는 그 곳은 어디이며 무엇일까. 단지 자연의 생명부양 능력이 고갈되지 않는 범위를 알아채면서 해 가면 좋겠다.
  늦가을이면 전주시는 노란 은행나무 잎으로 뒤덮인다. 경기전을 중심으로 한옥마을과 향교까지 이어지는 노란 은행나무 잎 사이로 보이는 한옥 지붕이 천년 전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은행나무가 전주인들의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은 인상도 준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전주 정신을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어렵다. 사람은 자연과 떨어져서 살 수 없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천지의 기운에 맞는 먹거리에 따라서 몸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환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마음먹고 행동하는 양식에 따라서 정신을 만들고 영혼의 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전주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은 무엇일까.

  때를 맞추어 전주역사박물관에서 10월 14일에 전주정신 대토론회가 있었다. 장명수씨가 대 발제를 한 후, 각 분야의 전문인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를 핵심으로 전주정신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하지만 뭐라고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토론회가 끝나고도 석연치 않았다. 선비정신문화와 아전문화, 민중문화에 대하여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통인가 예향인가 학문인가. 아니면 저항정신을 말할 것인가. 모든 것이 융합되는 비빔밥 정신인가.
  문화해설사들은 관광객들에게 해설할 때 경기전에 가서는 왕조실록을 지켜낸 선비정신을 이야기 할 것이며 경기전 맞은 편의 유럽 고딕식 건축물 근대문화유산인 전동성당에 가서는 조선의 선비 정신에게 박해받았던 천주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해야 한다. 결국 전주시는 많은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도 문화미를 향유할 수 있는 도시다 라고 한마디로 마무리 발언을 하게 된 이종민 교수의 발언에 박수를 쳤다.
   전주방송국에서는 전주시 60주년을 맞아  '노송천을 부탁해' 라는 다큐를 제작하였다. 본의 아니게 나는 노송천의 역사의 증언이 되어 잠시 출연하게 되었다. 노송천은 다시 불러올 수 있건만 그 때의 흘러간 물과 세월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2009년 11월 16일)

참조:    2009년 11월 21일 밤 11시 30분   JTV(전주방송국) '노송천을 부탁해"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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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문학관 가는 길
 
                                                       

  장마 기간이어서 우리 자매는 미술관을 산책하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도 만나서 박물관에 가기로 약속했다. 동생을 만난 자리에서 2009년 6월 전  북문인협회대동제가 열렸을 때 전국시인협회장인 오탁번 시인의 문학강연이 참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당장 애련리에 있는 그의 문학관에 가자고 서둘렀다. 동생 친구가 시인의 아내였다. 제천시 애련리에 있는 그의 문학관에 친구 따라 갔다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다녔던 폐교가 된 학교를 사들여 문학관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낭만적인 사연인가.
  
  경기도 분당에서 출발한 시간이 오후 1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장마 비 사이 반짝 개인 틈이어서 좋은 여름의 풍광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도를 살펴보고 충주호를 끼고 가는 제천시로 향했다. 치악산 주변을 스쳐 청풍명월의 고장을 뚫고 지나는 길을 만났다. 초록이 짙은 시원한 벚나무 숲을 지나고 산과 산 사이를 굽이굽이 도는 길은 말 그대로 맑은 바람 속이요 밝은 달밤이 어울려야만 마땅할 곳이 제천시 가는 길이었다. 치악산을 어미로 삼고 그 어미가 낳은 작은 산들이 주변을 줄지어 능선을 잇고, 가깝고 먼 산 능선이 둘러쳐진 청풍 호반을 돌았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수운의 요충지로 도호부를 두었던 곳이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었다. 1980년에 충주댐을 건설하기 위하여 수몰지구의 유적을 모두 조사하여 후에 청풍문화재단에 이주시켰다. 청풍문화재단은 청풍호수에 떠 있는 하나의 섬 같은 형태로 많은 문화유적을 배치하고 자연 숲을 형성하는 산책로 등이 잘 꾸며진 사람들의 휴양지로 좋은 곳이었다. 각 방송사의 역사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그 안을 들어갈 수는 없었고 팔영루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청풍호반의 하프현 같은 현수교를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분홍꽃술이 수없이 달린 자귀나무가 흰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에 그림처럼 떠 있었다.
 
   어렵사리 백운면사무소를 찾아들었다. 시인의 이름을 대니 '원서문학관'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첩첩 산골을 한참 내려갔다. 옛날을 그려보자니 얼마나 깊고 외진 곳이었을까 싶게 인적이 드문 산골이었다. 개천을 따라 훤칠한 느티나무가 나타날 때까지 조심스럽게 달려갔다. 청정한 외진 곳이 도시인들이 선호하는 곳이기도 한 요즈음이어서 제법 넓은 천을 따라 난 길 왼편 산자락에 현대식 팬션들이 옹게종게 지어진 곳이 있었다. 비로소 당도한 느티나무 앞. 잘 생기고 건장한 나무의 굵은 등걸 하나에 튼튼한 빈 그네가 외롭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오후 벌써 서녘이 붉어오고 있는 시각이었다
 아직도 눈에 선한 빈 마을의 빈 그네. 작은 학교가 있었을 것 같은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느티나무 밑은 개미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뙤약볕 아래 정갈한 논에서 벼포기들이 한여름 열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우리가 그 옛날의 학동이 되어 그네를 번갈아 탔다. 노을을 남기며 서녘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마주하고 마을의 전설을 주저리주저리 엮었다.  우리가 따라온 천(川)이 원서천遠西川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흐르는 물 이름을 따서 '원서문학관'이라 한 모양이었다. 철대문 앞에 문학관 이름을 새긴 선돌이 떡 하니 우리를 맞았다. 대문은 잠겨 있고 동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불통이었다.
 
   정말 조용하고 애련한 산골 마을의 작은 학교. 시인이 다녔던 60여 년 전의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일제시대 때의 분교였으니 요즈음의 방 두 개 정도였다. 대문 밖에서 안을 살펴보자니 정원의 한 쪽은 텃밭도 있고 오른 편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각가지 야생화로 꾸며진 제법 정성들인 정원이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그리워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시인이 이 정원을 꾸미면서 그 옛날의 추억을 얼마나 떠올렸을까. 시인의 고향의 추억은 전래동화였다.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서울서 한달음에 달려온 우리가 아닌가. 철대문 밑바닥을 거의 누워서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빨간 벽돌 건물은 교실 두 개와 교무실 한 개인 것 같았다. 들어가는 복도 입구에 현관문을 달고 유리창에 '원서문학관'이라고 새겼다. 저녘 햇살 때문에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문학 행사도 가졌던 흔적도 있었다. 외지 사람들이 자주 다니기는 불편한 거리임에…. 살림집 현관에 쪽지를 남기고 건물을 둘러보았다. 교실에서 그 조그만 걸상에 앉아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즈넉한 빈 뜰을 거닐다가  시인의 시비 앞에 섰다.         
   설날 차례 지내고 / 음복 한잔하면 / 보고싶은 어머니 얼굴 / 내 볼 물들이며 / 떠오른다    /설날 아침 / 막내    손시릴까봐 / 아득한 저승의 숨결로 / 벙어리장갑을 / 뜨고 계신 / 나 의 어머니 / (설날 전문)
   시인의 어머니가 그에게는 시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생을 도시에서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면서 詩作(시작)에 매진했다. 마침내 그 어려웠던 그 시절의 그 땅,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어서 진외가에 자주 가서 허둥지둥 밥 먹는 모습을 '하동지동' 이란 어린 詩語(시어)를 사전에서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는 시인이다. 모교로 돌아온 것은 금의환향이었을까?
   소나무 옆  반반한 돌 의자에 앉았다.  교실 앞 잔디 마당엔 삼층 돌탑 한 쌍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인 냥 돌탑이 하나 놓여 있고 물에는 수련 꽃봉오리가 곧 열릴 듯 열리고 싶지 않은 듯 애련히 떠 있었다. 나무 가지에 메어 둔 빈 새 둥지와 사람 발자국 그리운 야생화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무리 지은 하얀 들꽃이랑, 노랑, 분홍 하양 원추리꽃, 청초한 흰도라지 파랑 도라지꽃들이 여기저기서 한창 뽐낼 나이건만. 그 꽃들을 뒤에 두고 떠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대문 밑을 다시 기어 나왔다. 어디쯤 그 시인의 옛집이 있었을까. 그의 진외가는 또 어디에 있었을까. 동네를 둘러보며 원서천에서 송사리떼와 놀았을 시인과 그의 친구들을 그려보기도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음에도 그의 시적 고향의 옛 일이 도저히 실감나지 않았다. 너무나 시적인 그의 어린 시절의 원서천과 느티나무 그늘 옆의 작은 분교. 그 시절엔 그런 그네도 없었을 것이다. 그 작은 분교의 아이들은 몇 명이었을까.  종소리가 울리자 교실로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들이 어딘가에서 막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문학관 앞의 굽어진 길을 지나면 또 다른 마을이 나올 것이고 가보지 않은 그 길을 우리는 갈 수 없었다. 원서천이 멀리 서쪽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고 그때 흘러간 물이 어느 강에 닿아 돌아서 어떻게 바다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시인만은 흐르다가 더 흐를 곳이 없어 연어처럼 회귀하여 이곳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여전히 사람 소리 귀한 외딴 마을로.
  문학관 현관 옆의 선돌에 새긴 시인의 어머니의 흉상이 내 어머니처럼 그리웠다.
  - 잣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두레반>의 구절에서 

 

 

 

 

17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1. 늦가을의 소리
 
  먹구름이 하늘 가득한 날, 바람 소리만 웅∼웅∼ 우웅!, 쌩 쌔엥, 심란하다. 창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세찬 바람에 나무가 한 쪽으로 사정없이 쏠리고 있다. 침대에 편히 누워 있자니, 고요한 가운데 요상한 소리가 귓속을 헤집는다. 바람이 길을 찾지 못하여 빌딩 벽을 치고 높은 건물 사이를 헤치며 아우성대는 소리일까. 세찬 파도가 벼랑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저렇던가. 숲 속의 바람이 저럴까.
  언제 오라고 기다리지도 않았건만 단풍물 뿌리면서 왔다가는 낙엽을 굴리면서 떠나는 늦가을 바람의 심술인가. 이럴 때의 마음의 풍경을 그림 한 폭으로 그릴 수 있었던 옛 선비들을 생각한다.
   몇 년 전엔가, 호암미술관에서 보았던 한 전시회, <그림 속의 글>이란 테마 전이었다.  늦가을 스산한 바람소리만 난무하는 이런 날은 그때 보았던 추성부도(秋聲賦圖)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마침 전시회 때의 전단지가 옆에 있어서 사진 속의 추성부도를 다시 들춰본다. 추성부도는 보물 1393호로 지정된 김홍도가 불우했던 말년에 그린 그림인데, 가을밤의 스산함과 인생무상을 읊은 중국의 송대 문인 구양수의 시 추성부를 묘사한 것이다. 그림 말미에 단정한 행서체로 쓰인 추성부를 나는 읽을 수는 없으나 그 글씨체들이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추성부는, 어느 날 밤 글을 읽던 구양수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동자에게 알아보라고 하니, 동자가 밖에 인적은 없고 나무숲 사이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자, 구양수는 이 소리가 가을의 소리임을 깨닫고, 산천이 적막해지는 가을의 자연현상과 인간사를 연관시켜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라고 한다. 그것으로 보아 단원 자신이 불우했던 말년과 연결하여 구양수의 시의(詩意)와 같은 심사를 그림에 표현하였으리라.
  쓸쓸한 가을 달밤의 분위기에 휩싸여 그림을 그렸던 그의 심정이 깊이 와 닿는 날이다. 우뚝 우뚝 솟은 건물들을 나무숲으로 상상해본다면 그 속의 한 초옥에서 추성부를 어찌 생각하지 않으랴! 화면 우측 집에 조용히 앉아 있는 구양수의 모습은 단원 말년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늘 나는 아파트촌이 생기기 전의 시절로 돌아가서 산 마을의 숲에서 이는 바람소리를 연상하며 추성부 속을 거닌다. 오늘 같은 센바람이라면 휘어질 듯한 대나무 가지의 댓잎은 서걱거리기도 힘들어 어떤 무선 통신을 전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낙엽수에서 떨어지는 잎새들은 사연을 남길 여유도 없이 사방팔방 정신 없이 휘날리고 있으리라. 갈잎들은 뿌리 채 흔들려서 사치스런 가을의 연정으로 살랑거릴 수도 없으렷다. 연륜이 깊어짐에 따라서 계절이 주는 느낌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려니 싶다.
  추성부를 생각하면 바로 이어지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한도는 진품을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영인본은 널리 알려져 있다. 추사선생의 유배 가옥에도 잠시 머물러 보았지만 그 작품에 대하여 어떤 감상도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젊었을 때 문인화를 이해하고자 서체와 사군자 그리기를 습작해본 적은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 속의 글자, 특히 어려운 한문 때문에 항상 난감하였다. 요 근래 와서야 그림 속의 글을 해석한 것으로나마 이해하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아져서 새삼 가슴으로 들어오는 묘미를 느낀다. 세한도 역시 그랬다. 그 그림은 일반인들이 결코 좋아할 그림은 아니다. 인생의 후기가 되어서야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 시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기에 다시 보는 작품이다. 김정희에게 제주도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어찌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의 유배제도가 낳은 인간 승리요 학문과 예술의 성취 중의 하나였다.

  지난번 국립박물관에서 전시되었던 일본의 국보가 되어버린 안평대군의 작품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몇 겹의 줄을 선 것을 보았다. 그림의 감상보다도 그 유명세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몽유도원도'가 명품이 된 이유 중의 하나도 '그림 속의 글'때문이기도 하다.
   세한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용산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 때에 <세한도>를 전시한 바 있었다. 결코 일반 관람객이 선호할 성격의 작품이 아니었음에도 그 <세한도>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것이다. 세한도가 작품이라기 보다 거의 '신화'가 되다시피 한 것은 그동안 축적된 <세한도>에 대한 연구와 보존된 과정의 배경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도  미술적인 감상이 주는 정서보다 그 작품이 지닌 이력이 신화적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에게 넘어간 '세한도'를 서예가 손재형씨가 동경의 후지스카 집으로 발이 닳고 무릎이 닳도록 백 날 동안 문안하여 넘겨달라고 간청하였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무조건으로 넘겨주었다. 그 석달 뒤 후지스카 집이 폭격을 맞았고 후지스카가 소장했던 모든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지만 세한도만  살아남게 되었다. 하늘이 지켜준 명품이란 극적인 이야기다. 그 외에 제자 이상적과의 감동적인 관계.  중국 문인들과 한국 근대 기 애국지사들의 찬문(撰文) 등이 세한도를 신화로 만든 것 같았다.
 
 

 


2.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 동안 서로 잊지 말자)'
 
  국보 제180호가 된 추사 김정희 작품 <세한도歲寒圖> 는 제주도 유배 때 그렸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전나무와 소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구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천한 모양으로 쇠한 나이 육십에 꽉 찼는데 육 년을 바다에 칩거하여 이제까지 이르니 역시 이상한 일이로세. 연초에 까닭 없이 모진 병이 파고들어 꼭 죽는 줄만 알았는데 무슨 인연인지 되살아나기는 했으나……. 게다가 입과 코의 풍화는 한결같이 덜함이 없어 이미 3년이 되었으니, 이는 또 무슨 병인고란 말인가? 온 몸과 감각 중 편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 도저히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 시기의 김정희의 삶을 대변하는 한 줄기의 글이다.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의 추사는 당시의 최고의 문화적인 향유를 누리면서 당당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인적도 드물고 뱃길도 험난하여 누구도 자주 올 수 없는 섬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변함 없이 중국의 책들을 구해주던 제자 이상적의 정성은 참으로 갸륵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그런 이상적에게 자신의 심사를 표현해서 그려준 그림이다.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보자면 다음에 올 세한이 자연스레 그려지는데, 나는 세한도의 전형처럼 추성부도를 보게 된다. 추성부도에 나타난 집이 세한도에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지며 추성부도에서 초옥 한 채와 나무 네 그루만 남겨두면 그대로 세한도 같기 때문이다.  물론 추사의 세한도가 중국의 예찬이란 사람의 산수 전통에 영향 받았다고 하지만, 김정희는 이미 북경에 형성된 예술품 시장과 중국의 문인 지식인과의 접촉이 있었던 만큼 중국의 고서화를 그보다 많이 접한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김홍도의 그림을 낱낱이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기에 세한도를 그리면서 김홍도의 추성부도도 어찌 떠올리지 않았으랴 싶은 것이다.
  마음으로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간결한 그림.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암울하고 쓸쓸한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처절한 심정을 볼품 없는 조그마한 집 한 채와 늙은 소나무로, 제자의 고마운 행동은 지조의 상징인 우뚝 선 소나무와 잣나무로 표현하였으며 '너와 나'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은 집 이외의 아무것도 없는 겨울 배경으로 표현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림의 제일 오른쪽에 찍은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니 이제 와서야 세한도의 소박하면서도 초탈한 듯한 깊이 있는 격조가 내 감수성에 와 닿는다. 제자 이상적에게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 라고 했던 뜨거운 마음만이 제주의 풍상을 어루만졌던 것인가.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유배시절의 김정희의 나이를 넘고 보니 그 세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밤낮이 없는 시멘트 건물 군 사이로 뜨는 현란한 인공 빛들 속에서는 늦가을의 소리와 세한지정 같은 심사가 생길 틈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옛 선비들이 마음에 품고 있던 정신을 그림으로 말할 수 있었던 그 시대의 예술혼이 아련하게 그리운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이라고 빌딩 숲을 헤치고 아우성치는 겨울바람 소리에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 심정을 안다 듯이 인생의 후렴을 살게 될 때가 되어서야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누군들 세상살이의 풍파를 거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자연 바람, 인공 바람, 모든 관계에서 생기는 잡다한 바람들. 세상살이 바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람이거늘, 바람이 삶을 일으킨다. 바람의 종류와 강약은 다르겠지만 강풍이 아닐지라도 사람 마음의 크기에 따라서 바람맞는 자세도 다르리라.
  돌이켜 보면 내게는 1970년대 전주 살이 자체가 유배생활 같이 생각될 때가 있었다. 처음 서울에서 전주에 오니 허허벌판 같았다. 아마도 문화적 향유를 누리던 김정희가 갑자기 외딴 섬에 내려졌을 때와 같았다고나 할까. 시대가 다르니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결혼 생활 자체를 엮어나가는 동안 가족과의 정서적 갈등과 경제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불편이 심했다. 현실의 교육이 못마땅하여 아이들의 낙원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한쪽으로 사정없이 쏠리는 나무처럼 뿌리가 흔들리는 충격도 맛보았지만 그 시기야말로 오히려 밑바닥부터 내 영혼을 치열하게 고양시킬 수 있었던 호기였다.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스스로 만든 감정의 유배였지 외부의 조건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부모가 되는 고갯마루를 넘는 수행이었다. 파도가 쳐야 바닷물이 맑아지고 먹구름이 지난 하늘이 맑다. 봄날의 외진 언덕에서 가시 돋친 찔레가지는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워냈고 겨울이 오는 동안 새빨간 열매를 익혔다. 친정붙이 하나도 없는 먼 고장에서 서울에서 변함 없이 나를 후원해준 자매들은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과도 같았다.
  언젠가부터 유배지 같았던 전주가 고향처럼 아늑해졌으며 전주가 지닌 전통의 문화미에도 푹 젖어 지내고 있었다. 단풍잎 오그라드는 인생의 가을이지만 겨울 나목이 되어도 소나무 의 푸른 정신과 붉은 심장만은 잃지 않을 것 같아 세한도는 그리지 않을 것 같다.
   귀양살이하는 하와의 자손을 굽어살펴 달라는 천주교 기도문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하와이기에 세상 유배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본성을 잃고 헤매는 인간에게는 세상살이 자체가 유배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상향의 에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마저 먼저 취하고 독점하려는 듯 인간의 소유에 대한 집착과 진보를 향한 욕망들이 만든 문명의 굴레가 에덴으로 가는 길을 오히려 더 멀게 하고 있다. 유배시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조선의 선비들만큼이 아니라도 세상살이 동안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 이란 붉은 마음만은 남기고 싶다.  (2009/11/29)

 

 

 

 

 

18

나는 이렇게 글을 쓰려 한다.

                                       

                                                                                                                           
 
  요즈막에 컴퓨터 방에 출근하기가 참 두렵다. 그래서 하는 일이 헌차(獻茶)의식을 스스로 행하는 일이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시작했던 처음의 마음은 석 잔의 차를 우리는 동안 벌써 찻물 속에 언제 녹아버렸는지도 모르고, 차 맛의 여운만 남을 때가 있다.
  다신전(茶神傳)을 강했던 칠불사 스님 말씀을 자주 떠올린다. 스님도 후학들을 위해서 글도 쓰고 경전도 새로 번역하는 등 할 일이 많으시다. 그런데 선배 부휴스님 말씀이 늘 떠오른다고 하신다. 깊은 산 속에 앉으니 모든 것이 부질없고 있는 것은 오직 심(心) 경(經) 하나요 차 한 잔 뿐이라는 말씀이다. 50여 년 지나면 책도 낡아버릴 것이니 모든 것은 변하고 만다. 참으로 남아 있을 것이 무엇인가. 진정으로 세상사는 동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심경(心經)과 차 한 잔의 의미를 챙기기 전에 가졌던 마음의 업(業)이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청산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변명 아닌 이유로 대신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 작가라는 어울리지 않은 이름을 달고 글을 쓴 지도 벌써 7년 째 접어들고 그동안 수필집도 한 권 발간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몰라서 갖는 용기였다. 그로 인하여 더욱 글 쓰는 일에 대한 책임이 무거워졌다.
  신문지상에 처음 글을 발표한 것은 1985년도 전북일보의 생활 단상이었다. 전북지방에 처음으로 다도(茶道)를 시작했던 일로 인하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의 전신이었던 전북대부속 여성강좌에 다도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원고를 청탁 받았던 것이다.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 지도 모르면서 원고지 6매 짜리 글을 세 번 연재해야 했다. 그때마다 마감 일에 임박해서야 밤새워 썼었다.  그때는 참 선무당 같았다.
 

  학창시절도 겉발림의 문학공부였지 글 쓰는 일을 동경하지도 않았다. 아예 작가가 되려는 것은 꿈에도 없던 일이다. 사회에서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은퇴한 후 집에서 가정 일만 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수필창작반을 만나게 된 것이 제 2의 운명을 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행운도 행복도 아닌 그냥 해야 하는 필연이었다.

 
  '나는 이렇게 수필을 쓴다' 라고 논리적으로 피력할 자신은 아직 없다.  나라면 최소한 내 마음에 먼저 들도록 써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도 힘들고도 긴 여정이 따른다. 독자들을 생각해서 쓴다는 것은 고단수일 것이다. 어떤 독자들의 마음을 끓어들일 것인가. 수필은 자기의 삶과 자신의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삶의 과정이 다 다르고 같은 세대, 같은 나이래도 삶의 단계는 다르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좋아하고 어떤 이에게는 생소하다. 나만의 체험을 모든 이에게 익숙한 듯 쉽게 쓰는 일이
쉽지 않다. 어려운 고전들을 보면 처음에는 어렵지만 읽을수록 깊은 맛을 느끼는 때가 많다. 그런 글이 좋다. 그 이상 어떻게 쉽게 쓸 것인가 싶기도 하다. 글을 쓰는 사람들
에게는 자신의 팬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작품을 사랑해주고 다음 책을 기다리는 나의 팬을 위하여 나는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내가 내 글의 첫째 팬이다.

 수필이 어떤 글이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글들을 통하여 알게 된 것도 같지만 나로서는 어떤 글이어야 한다는 것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평론가의 글이 글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을 더 어렵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배운 수필작법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대로 될 수도 없는 것도 잘 안다. 그나마 듣고 읽고 배운 대로 뭔가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언제나 돛대 없는 배가 망망대해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하여서는 다독, 다작 그리고 깊은 사유가 필수적임은 누구나 다 안다. 완당 김정희가 추사체를 완성하기까지 벼루 열 개를 뚫었으며 천 개의 붓을 닳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귀감이 되는 말이다. 불광불급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나이 들어 눈(眼)이라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눈뜨고 있는 것 자체가 노동이기도 하다. 그래도 내게 읽는다는 것은 곧 쓰는 일이다. 컴퓨터를 켜고 창이 뜨는 시간의 기다리는 틈에 읽던 책 몇 페이지라도 읽는다. 대자연을 읽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어찌 알아듣기가 쉽겠는가. 화가에게 우주는 캔버스가 된다는 것과 같다. 농부가 농기구로 땅을 경작하듯 하늘과 땅에 그림을 그리듯 쓰고 싶다.  많이 읽지 못하니 많이 쓰고 잘 쓰는 일도 어렵다. 그러니 잘 쓰려는 욕심은 안 가진다. 정성을 다해서 써야 하지만 혼과 피를 말리면서 어찌 글을 쓰는가. 어렵기 때문에 나만큼만 즐기면서 쓰고 싶다

  글 쓰기에 필수적인 것이 메모와 자료수집이다. 2년 전부터 나는 메모용으로 간단한 디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감동적인 장면들과 자료들을 디카에 담는다. 집에 돌아와서 블로그에 사진 편집을 하는 것이 내 수필 작업의 한 부분이 되었다. 때로는 디카 에세이를 편집하여 문학단체의 카페에 올리기도 한다. 이것이 기본 자료가 되어서 나중에 수필 한 편이 되기도 한다.
  글 쓰면서 내게는 공부하는 일이 평생직업이 된 것 같다. 세계의 역사지리 문화에 관심이 많아졌다. 따라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기본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는 일은 즐겁기도 하거니와 공부의 일 부분이다. 아마도 내가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면 어떤 학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 늦게 학문하는 재미를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시는 태어나지 않도록 완전한 삶을 살아낸 위대한 영혼들이 부럽다. 그들은 스스로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지 못한 중생이니 무엇으로든 열심히 정진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만나는 모든 사람과 물상들에 대한 관심이다. 많이 할 수 없는 대신 작은 일에도 깊은 관심으로 관찰하는 일이다. 나에게 맞는 주제와 소재들을 만나게 되면 그 씨앗이 마음 속에 착상한다. 그러고는 머릿속에 구성이 떠오를 때까지 오랜 동안 사유를 거치기도 하지만 엉뚱하게도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때로는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비우는 일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마음에서나 머리에서 꽉 차서 밖으로 삐죽삐죽 글 머리가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달음에 초벌이 써질 때는 새벽이 될 때가 있다. 요즈음은 주로 낮 시간을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건강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이 쓴 <록천관집서(綠天館集序)>에 "옛 것을 상고하지 못했노라"를 읽고 바로 그것이다라고 쾌재를 불렀다. 전라감사를 두 번이나 지냈던 이서구는 젊어서 연암에게 글을 배웠다. 그가 쓴 綠天館集을 연암에게 가져와서 평해 달라고 했다. 당시 이서구는 옛글을 답습하지 않는 새 글을 썼기 때문에 기존 문인들에게 핀잔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연암은 그의 제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로 인하여 전하지 못하던 옛날 학문이 계승될 것임을 칭찬하였다.

   지난 여름 수필의 날에서 들었던 윤재근씨의 '수필정신과 기법'도 나의 수필 지침이 될 것이다.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齊隨筆)을 들어서 수필의 수(隨)와 필(筆)을 다시금 천착(穿鑿)해 보기를 논지(論旨)로 삼고자 한 내용이다. 난 아직도 그 글을 다 소화하지 못했으나 그 핵심은 그 때 받아들이고 정말 공감했다. "수필인은 여론(輿論)을 노리고 수필을 짓지 않는다. 수필인은 늘 새롭게 말하는(言志) 수필을 창작하고자 다양한 기법들을 자유롭게 운용(運用)하여 백인백색(百人百色)으로 하여금 헤아려 새기게 하는(習懷) 것이다." 수필의 수(隨)는 자기를 닦는 일이라는 것이다. 심신을 닦기도 바쁜데 언제 글을 쓸 것인가.

  마지막으로 윤재천 교수의 수필론을 귀에 담고 싶다. "수필이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글만 고집하다 보니 개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웰빙시대에 맞는 수필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김학 교수의 비빔밥 같은 수필도 웰빙시대에 맞는 수필임을 기억한다. 비빔밥에도 격이 있기 마련이다. 웰빙이란 만남이고 만남은 다양하다. 인간과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장르와의 만남을 말한다. "논리적인 수필과 상상력이 있는 수필을 써야 한다. 깊고 다양하게 논리를 수용하면 철학적이라고 비약하겠지만, 논리적인 수필을 써야 수필의 가치와 위상이 격상된다."  또한 상상력은 자궁에서 태어난 생명력이라고 했다. 자기에게 맞는 수필을 써야 하며 자기만의 틀은 웰빙시대의 수필이다 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논리가 부족한 나에게는 꼭 필요한 지침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 글 솜씨는 맨 처음 신문에 멋모르고 썼던 글보다 별반 나아진 것 같지도 않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많이 쓸수록 쓸 것이 많아진다는 것이며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배웠다는 혹은 좀 안다는 일이 더 걸림이 되는 수도 많다. 설익었기 때문이리라. 앞으로 23년은 더 써봐야 알 것이다. 이미 수필집에 들어간 글도 끄집어내서 고친다.(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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