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고대 이집트인들의 행복
-행복의 진화 1-
바랑을 짊어지고 떠나는 선재동자처럼 행복의 근원을 찾아 떠나볼까? 선재동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긴 구도의 길에서 많은 선지식들을 만난 끝에 보타낙가산의 관세음보살을 만났다. 선재동자의 선험적인 구도행각의 원력으로 현대에서는 마음먹기만 한다면 보타산은 우리 곁에 늘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먼저 고대 이집트인들이 추구했던 행복의 길을 밝혀보자.
2009년 7월 10일, 서울에 도착하여 중앙박물관에 먼저 들렀다. 박물관의 하늘 계단은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로 장식되어 있었다. 낙타가 줄지어 가는 모래사막 위의 피라미드의 실루엣은 언제 보아도 이국적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닌가. 드디어 노을의 색조로 채색된 피라미드 계단을 지나서 이집트의 문명전 <파라오와 미라> 속으로 들어선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선물이었다. 나일강이 삶을 일으켰고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바라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그들만의 세계관을 지니게 되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아이콘인 피라미드, 미라, 스핑크스, 이집트 신화 등은 나일강과 더불어 형성하였던 것이다.
한동안 시공을 잊고 파라오와 함께 순장 당했던 영혼이 잠시 유물 속에서 부활하는 기분을 느낀다. 230여 점의 유물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이집트의 신', '신의 아들 파라오', '이집트인들의 삶', '영원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 18조 왕인 호렘헤브 왕이 매의 머리를 하고 하늘과 태양의 신으로 추앙되었던 호루스와 나란히 앉아 있다. 왕의 손이 호루스 신의 손과 겹쳐져 있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파라오의 의미를 상징한다. 기원 전 3000년에 통일국가로 발달되어 국왕인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로 국민에게 절대 군주로써 군림하였다. 파라오는 죽어서도 화려한 왕릉인 피라미드에 묻혀 다시 신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연장이었다. 육체는 영혼과 정령, 그들의 말로 카ka와 바ba가 즐길 수 있도록 무덤 내부에 일상용품을 풍요롭게 준비하였으며 언제라도 미라가 부활되었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무덤 안에 장식하였다.
파피루스 나무는 물가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대나무처럼 생겼는데 그 나무 껍질에 그들의 사연을 꼼꼼히 적었다. 파피루스의 기록에 의하여 이집트인들의 생활상을 후대인들이 알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밀의 생산으로 빵과 맥주를 즐겨 먹었다. 종교적인 의식과 청결함을 사랑하는 국민성으로 인해 머리털을 짧게 깎거나 아주 밀어버린 후 전체 가발을 썼다. 그림이나 도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발머리는 가발이었다. 두껍고 빳빳한 천으로 만든 머리수건(커치프)를 썼던 것이다. 축제 때는 향유 병을 머리에 장식하여 더운 기후로 인해서 향료가 녹아 온 몸에 발라지도록 했다. 화장술도 발달하여 청색 아이새도로 눈화장을 하여 시원하게 보일 뿐 아니라, 곤충의 접근을 막고 가발과도 조화를 이루도록 꾸몄다. 신체 노출은 장식 욕을 야기 시켜 상류층에서는 신분이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독수리 날개를 형상화한 '파시움'이란 목걸이로써 넓은 칼라 모양으로 목과 가슴을 장식하였다. 두발뿐만 아니라 여하의 털도 매일 밀었으나, 수염은 신성을 뜻해서 신의 아들인 왕은 가짜 수염을 달았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와 같이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도 남자의 수염은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풍습은 남아 있다.
미라를 대하면서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잠시 잊는다. 몸 안에 심장만 남기고 다른 내장은 약품 처리하여 항아리에 담고 항아리 표면에는 장기의 수호신을 그린다. 시신은 아마포 붕대로 친친 감고 그 위를 회반죽을 바르기도 한다. 시신을 감는 붕대는 농구코트를 덮고도 남을 정도라니 그 일만으로도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으리라. 얼굴을 닮은 마스크를 만들어 두부에 붙여서 후에 영혼이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한다. 미라 관을 장식한 온갖 주술이나 도안의 기술은 천재적인 수준으로 치밀하게 그려진다. 미라 관은 사람모양으로 생긴 것과 네모나 석관 등이 있다. 이런 미라를 만드는 방법은 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까지 여러 나라로 전파된다. 이집트인들은 성수(聖獸)숭배사상이 성하여 개, 고양이, 말, 뱀, 매, 학 등 그들이 신성시하는 조수나 물고기를 미라로 만들기도 했다. 왕관을 쓴 하얀 따오기의 생생한 눈초리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어떻게 그 초능력적이고 과학적인 사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걸까. "이집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그 대답이다. 그리스인 학자들처럼 철학이나 과학을 오늘날과 같이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생각도, 그들의 예술품에 이름을 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굳건한 믿음이 엄청난 과업을 수행하는 원동력이었다고 해석할 뿐이라고 학자는 말한다.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현대인들이 가져야만 하는 덕목인데도 가지지는 못하는 '하심', 즉 나를 낮추는 생활 속의 종교심이다. 그런 종교심이 대단한 문화유산을 남기게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집트 박물관의 이층을 점유한다는 투탕카멘의 전시물과 람세스2세 때의 유물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빼고는, 이집트의 문명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현장을 주마간산으로 다녀온 것 이상으로 충분하다.
문화 유적이 찬란한 나라일수록 그 당시의 일반 백성들의 삶은 불행했다. 고대 문명의 폐허에 남은 예술적 가치에 왜 우리는 감동을 받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과 희생이 녹아 점철된 삶의 궤적에서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아련한 아픔과 그리움까지 예술의 원형이 되어서일까. 생명의 역사를 거듭하는 동안 사라져간 사람들의 마음에 쌓인 갈망의 주술이 현대인들에게 찬란한 예술품으로 남게 된 것인가.
20.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삶과 예술
-행복의 진화 2-
티베트의 고원의 행복은 어떤가. 중앙박물관의 하늘광장을 사이에 두고 왼쪽 기획전시실은 이집트요 오른 쪽의 본관에는 티베트 고원이 포장되어 있다. 이집트의 사막을 지나 나일강을 넘고 서아시아를 지나서 마침내 히말라야산맥을 순식간에 넘고 티베트의 고원에 닿는다. 꿈길을 지나듯 차마고도茶馬古道의 도정에 오른다.
차마고도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전시장 입구에는 티베트의 종교적 도구인 마니차가 설치되어 있다. 그것을 한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그들은 믿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나도 마니차를 돌림으로서 경전을 다 읽지 못한 것을 대신한다. 룽다 체험도 해본다. 룽다는 불교의 경전이나 소망을 적어 걸어놓는 오색 천을 말한다. 이 천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바람이 경전을 읽고 가는 소리'라고 한다나. 다섯 가지 색은 우주의 원소를 나타내는데 빨간색은 불, 흰색은 구름, 초록색은 바다, 파란색은 하늘, 노란색은 땅을 상징한다. 차마고도를 넘는 고비마다 어김없이 룽다가 펄럭이는 것이다. 나도 다섯 가지 색종이에 소원을 쓰고 높은 곳에 매달았다. 나에게도 차(茶)는 나를 지켜주는 영약이자 정신이기 때문이다.
차마고도의 마방의 일원이 된다. 실크로드박물관에서 건너 온 그들의 유물들도 하나같이 예술품이다. 마방을 꾸리고 원정을 떠나기 전에 그들은 독특한 예배의식으로 마음을 준비했다. 차마고도를 통하여 전해진 인도의 불교는 티베트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특히 눈에 띠는 불상 '금동 관음보살 입상'은 어찌나 관능적으로 표현했는지 금방이라도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춤이라도 출 것 같다. 반면에 부처의 모습은 말쑥하고도 엄숙한 자세다. 주술적인 문양이 새겨진 말머리 장식과 화각 말안장 그리고 부적들. 말갖춤과 어울리는 복장으로 성장을 하고 부처 앞에서 의식을 치르고 길을 떠난다. 차도구들을 챙기고 몇 날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길 떠날 차비를 한다.
나무로 된 찻잔과 잔 보관용기가 그들에게는 안성마춤이다. 해마다 봄이면 차마고도를 떠나는 심정으로 차밭을 다니는 나도 갖고 싶은 도구다. 끈이 달린 나무잔과 보관용기는 옆구리에 늘 차고 다녔으리라. 독수리 발 모양을 손잡이로 된 뿔잔은 그들만이 형상화할 수 있는 찻잔이다. 차를 끓여서 버터와 차를 섞는 차통. 손수 만들었을 발끝에서 모자까지의 의복, 먹을거리와 교역품을 담는 자루와 소금 주머니 등이 지금은 모두 생활 예술품으로 남았다. 티베트에서 중국의 윈난과 쓰촨으로 이어지는 길. 횡단산맥을 넘고 매리설산(梅里雪山)을 바라보며 묵묵히 길을 간다. 위험한 길목마다에서 펄럭이는 룽다는 그들의 기원을 하늘에 올린다. 바람이 경전을 읽고 구름에게 전했을 그들의 기도를 하늘과 땅은 알았으리라.
차마고도, 윈난-티베트 길은 매우 험난하다. 산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우기에도 덥고 유행성 질병이 난무하여 사람과 말 모두가 쉽게 질병에 걸린다. 절벽을 자른 산허리 틈, 위험천만한 좁은 길, 한 발만 삐끗하면 낭떠러지다. 해발 4800미터의 이에라산의 아흔아흡 굽잇길. 새와 쥐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 조로서로(鳥路鼠路)를 통과한다. 아! 드디어 싱그러운 초원을 만난다. 샹그릴라 북쪽에 있는 신비의 호수, 나파하이는 마방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휴식처이다. 풀들이 자라는 넓은 초원은 겨울엔 늪지가 되어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을 수 있는 곳이다. 우기가 되면 이곳은 호수가 된다. 지상에서 가장 높고 험하면서 아름다운 이 길을 세상 사람들은 차마고도라 하지만 이 길은 그들의 삶의 길이자 희망의 길이었다.
티베트인들의 격언 중에 ‘짜다러, 짜사러, 짜러!’라는 말이 있단다.‘차는 피요, 고기요, 생명이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티베트인들의 삶에서 차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다. 해발 3000m가 넘어가면 차는 자랄 수 없다. 티베트인들이 마시는 차는 모두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과거에는 마방들에 의해 중국에서 티베트로 차가 공수됐지만, 지금은 트럭으로 운반된다. 그래도 여전히 위험한 길이다. 라싸의 뒷골목 시장에서도 중국의 대형업체가 상품화한 차를 팔고 있다. 끊임없이 전쟁을 했던 고대 중국은 전쟁에 필요한 강한 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대신 티베트인에겐 중국인의 말馬처럼 차茶가 필요했던 것이다. 티베트에서 중국 한나라(BC202-AD220) 이전부터 중국 내륙지역으로 팔려간 수많은 말들이 세월이 흐른 후에 그들을 지배하는 무기가 될 줄이야 그때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유리관 속의 '인골피리' 앞에 선다. '인골 염주'와 '인골 공양구'도 있다. 몇 년이 걸려도 아랑곳없이 오체투지의 수행으로 신이 계시는 라싸의 조캉사원을 향하였던 사람들. 다다르지 않고 중도에서 죽을 수도 있는 길을 오직 순수한 믿음 하나로 그들은 영혼의 고향으로 향한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살림이 곤궁한 처녀가 시집가기를 포기하고 사찰에 몸을 팔았다. 좋은 환생을 위하여. 처녀의 몸의 살은 독수리에게 주어지고 남은 뼈로 피리를 만들고 다른 공양구를 만들었다. 인골 피리 앞에서 나는 오체투지로 울고싶다. 순결한 처녀의 뼈에서 나는 영혼의 소리가 내 뼈 속 어딘 가로 전이되는 듯하다. 조캉사원에서 불교행사가 있을 때는 찬불가나 축제 음악으로 인골피리로 연주한단다. 티베트인들의 소원을 담은 영혼의 소리는 오색 룽다에 실려 바람을 타고 하늘을 울리고 땅을 적시겠지. 높은 고갯마루, 오색으로 휘날리는 깃발은 영혼들에게 하늘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아름답고 처연한 이정표이다. 문득 티베트의 음악가 나왕케촉의 명상음악의 가락이 들려온다. 몇 년 전 전주의 경기전에서 가졌던 그의 음악회에서 관중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그 깊고도 고요한 울림. '바람이 경전을 읽고 가는 소리', 룽다가 펄럭이는 소리는 뼈 피리에서 나오는 흐느낌이었던가. 결코 슬픔만이 아닌 간절함으로……. 티베트의 독립을 위한 소원을 피리와 나팔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그의 음악은 바람의 경전이었던가.
이집트인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 내세관인가. 삶과 죽음은 수레바퀴처럼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으로 그들은 삶 앞에 겸허하고 죽음 앞에 의연하다. 티베트의 장례풍습은 천장天葬 또는 조장(鳥葬)이다. 육신은 껍데기일 뿐, 삶의 허물을 벗은 육신은 자연에게 고스란히 돌려보낸다. 자연의 환경에 따른 그들다운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황량하고 메마른 땅의 보잘것없는 공간일 수도 있는 안식처의 화롯불 가에서는 아침마다 버터차와 보릿가루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 나온다. 소박하고 단순한 그들의 생활용구. 차를 끓일 수 있는 주전자와 차와 버터를 섞을 수 있는 긴 차통(돔부)은 그들만의 고유한 그릇이다. 험하고 먼 길, 말과 노새와 함께 했던 긴 마방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그 길 위에서 늘 그리워하는 그들의 따뜻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의 TV에서도 '차마고도'를 제작하여 너무나 유명해진 길. 차(茶)와 말(馬)을 바꾸기 위해 장사를 다니던 오래된 길.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무역로. - 우리, 티베트는 마실 차(茶)가 필요해요. 우리, 중국은 말이 필요해요. -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서 차와 바꿀 것인가. 드디어 차의 고향, 중국의 남부지역 윈난과 쓰촨에 도착한다. 채소가 없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차는 생명의 잎사귀이다. 그들은 말과 찻잎을 맞바꾸고 이 찻잎을 다시 티베트로 가져간다. 눈, 비를 맞으며 가져가는 동안 차는 자연스럽게 발효된다. 그들에게 차는 신이 내린 잎사귀인 것이다.
21. 행복을 그리다
- 행복의 진화 3-
2009년 7월 14일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었다. 19세기 인상주의 대가로 알려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회고전>이 전시 중이었다.
19세기 후반기 미술사의 격변기를 살았던 뛰어난 대가들 가운데서 ‘비극적인 주제를 그리지 않은 유일한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르누아르는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그림은 사람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환희의 선물이어야 한다." “그림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평소에 늘 말했다 고 한다.
르누아르라면 너무나 유명하게 알려진 그림 <피아노 치는 소녀>와 <욕녀> 등 누드화가 떠오를 것이다. 문예관에 가는 날은 은행의 뒷문을 통하여 일층 사무실을 통과했다. 조용한 사무실 벽에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어 꼭 미술관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모네의 <인상 - 해돋이>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모사 작이었지만 요즈음은 기술이 좋아져서 진품을 보는 기분이 든다. 내가 전주박물관의 <텃치 뮤지엄>실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방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사국(삼국과 가야) 시대의 국보급 유물을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유물을 만지면서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동안 옛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하고 그들과 교감하는 것이다.
전시는 르누아르 예술의 진수로 여겨지는 인물화와 욕녀(浴女)시리즈 위주의 누드화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하였다. 최고의 걸작들 118점을 한 자리에 모은 초대형 전시였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 첫 선을 보이는 작품들은 르누아르 예술의 걸작품으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상주의 시기의 대표작품 <시골 무도회>(1883), <그네>(1876), <햇살 속의 누드>(1875-1876)를 비롯한 <피아노 치는 소녀들>(1892), <광대복장을 한 코코>(1909) 등 르누아르 작품의 시기별 대작들이었다. 그림에 나타난 인물들이 모두 행복하고 편안하고 풍요롭게 보여서 보기에 넉넉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내 마우스는 <뱃놀이 일행의 점심>이 인쇄된 패드 위에서 화기애애한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고 있다. 모든 인물은 최상의 기분에 젖어 있는 듯하여 보는 사람도 행복의 느낌이 전염되는 것이다. 그의 < 욕녀도>와 <대수욕도>는 누드화라기보다 고전의 신화를 재해석하여 자연과 하나로 어울린 태초의 행복을 현대에 옮겨놓았다고 하면 좋을 듯 싶었다.
'가장 이상적인 빛과 육체의 조화'를 표현하여 현대에는 걸작이 된 작품,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 그림 앞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었다. '빛을 머금은' 피부의 관능성과 생명력은 후대에 가서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자세히 관찰하면서 오랫동안 감상하지 않으면 잘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다. 실제로 르느와르는 아름다운 곡선미를 가진 여성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여자들의 아름다운 유방 선과 허리의 선이랑 엉덩이가 없었다면 그는 후대에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화가가 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시골 무도회>는 전시는 되지 않았지만 <도시의 무도회>와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행복한 남자와 풍만한 여자가 촌스러운 모습으로 애교 있는 웃음을 띠고 춤을 추고 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즐겨 그린 이유는 뭘까. 그 당시의 부르주아 신분의 가정에서는 피아노를 사치품의 하나로 여겨서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로 여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서구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할 때 그런 유행이 있었다. 너나 없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 했었다. 아마도 르누아르는 일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때를 포착하여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르누아르의 행복한 그림의 원천은 가족이었다. 그는 아내 알린느의 충실한 남편이었고, 세 아들의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그의 집 곳곳에서도 그런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부엌의 테이블과 찬장, 벽난로 등 집에 놓인 가구들은 특이하게 모서리 부분이 모두 둥글단다. 당시에 7세였던 코코를 위하여 모서리를 깍은 의자가 아직도 그의 미술관에 남아있다고 한다.
작가들의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작가의 인생 역정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르누아르미술관 큐레이터 주르니약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 아프게 감동을 주었다. 르누아르의 집, 병 치료 목적으로 지은 집이지만 말년의 12년을 살았던 현재의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은 11점과 아들들의 도자기 작품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각 국에서 화가의 체취를 느끼기 위하여 1년에 4만여 명의 사람들이 찾아온단다.
르누아르의 말년 그림은 멈춰 있지 않았다. 1870년대 작품이 인상주의, 1880년대 작품이 윤곽선을 강조한 전통적 스타일이었다면, 말년에 그는 인상주의와 고전주의를 종합한 새로운 화풍을 보여준다 는 해석이 그럴 듯 했다. 주르니약은 "르누아르는 아주 현대적인 정신을 가진 작가였기 때문에 마티스나 피카소도 좋아했던 작가"라고 말한다. 르누아르는 말년에 예술적으로 큰 성취를 거뒀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련이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간 두 아들이 큰 부상을 당한 채 돌아왔고, 1915년에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병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도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주르니약은 그는 어쩌면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르누아르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림으로써 고통을 뛰어넘고자 했다. 그것이 우리가 그를 '행복의 화가'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일 거라는 말이 참 감동적이었다.
말년에 혼자 걸을 수도 없이 휠체어에 몸을 싣고, 스스로 붓을 갈아 잡을 수도 없이 류마치스로 고생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만을 그렸던 르누아르. 현실이 참담할수록 지상의 낙원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긴 전시장을 걷기 힘들어 나도 휠체어를 빌려서 편안히 감상할 수 있었다. 집에서도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기도 힘들다. 조화로운 몸의 균형을 잡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하루하루를 최고, 최선으로 산다. 미술작품을 해석할 능력은 없지만, 그의 말년의 12년의 활동이 내게 큰 감동과 메시지를 안겨주었다. 르누아르의 작가정신은 이 전시회가 나에게 준 큰 선물이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그림 그리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림 그릴 이유가 없다."라고 평소의 생각을 생의 마지막까지 실천한 화가. 그는 철저한 예술철학으로 삶의 기쁨과 환희를 현란한 빛과 색채의 융합을 통해 무려 5,000여 점이 넘는 유화작품을 남겼다 고 한다. 지상낙원을 꿈꾼 화가처럼 몇 년이 될 지도 모르지만 르누와르와 같은 작가정신으로 지상 낙원을 꿈꾸면서 생의 끝 날까지 수필을 쓰고 싶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모두 화려한 색채를 특징 한다는 것은 희미하게 알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인물화에 나타난 빛의 효과였다 .'빛을 머금은' 피부의 관능성과 생명력은 후대에 가서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살롱전에서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했다. 전나(全裸)의 젊은 여성은 긴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선 채 상반신이 나뭇잎 속을 투과한 빛을 받고 있다. 팔과 유방에서 반짝이는 빛의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어찌 그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빛만 받은 부분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었던지……. 얼핏보면 빛이 닿지 않은 부분은 멍이 든 듯한 색채 같이 보이고 눈자위도 멍든 듯 그림자가 짙게 드러났다. 좀더 자세히 감상할수록 그 색채의 묘미가 드러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살이 통통한 팔과 배부문과 아름다운 유방의 모습은 관능미 그 자체였다. 참으로 예쁜 유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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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천국
-행복의 진화 4-
인류 탄생이래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꿈꾸고 갈망하는 행복. 시대에 따라 행복이란 개념은 변화와 진화를 거듭해 왔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여전히 인간의 삶이 추구하는 이상은 행복이다. 행복의 개념은 어디까지 진화해 왔는가.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피카소, 마티스, 샤갈, 미로 등 20세기 최고의 화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대 화가들이 구현하고 있는 천국이 모인 자리였다. 2008년 11월에서 2009년 3월까지, 역시 서울시립미술관이었다. <화가들의 천국>, 천국의 이미지인 아르카디아Arcadie. 서양문화에 나타난 '아르카디아 - 천국'의 모든 개념을 총망라하는 자리라고 했다. 황금시대·낙원·풍요·허무·쾌락·전령사·조화·암흑·되찾은 낙원·풀밭 위의 점심식사 등 총 10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현대 작가들의 눈에 비친 서양의 낙원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20세기 이후 서양문화에 나타난 정신적 흐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내가 가끔 전시회장을 찾는 이유였다. 오늘날 모든 문화가 혼재되어 가는 지구촌 마을을 생각해 볼 때 우리와 나의 자리를 다시 확인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서양에서 황금시대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던 공간이었던 천국 즉 아르카디아는 동양의 '무릉도원'과 유사한 '천국' 또는 '낙원'을 가리키는 말로 실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섬이었다. 그러나 20세기로 들어서면서 '현대성'이라는 시대정신과 연관을 맺게 되었고, 기계화된 노동의 시간 속에서 여가를 찾는 현대인들이 꿈꾸는 이상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이다.
아르카디아의 이미지에 대한 개념이 알려졌다는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1628-1629, 귀동냥으로만 알았던 작품이 그런 의미였구나! 하면서, 푸생은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시조'로 여긴다는군. 그 작품의 부제인 <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있다>는 '비록 천국일지라도 바로 죽음이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황금시대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던 공간이었던 '천국'이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에 이르는 광범위한 근원적 장소'로 변모했다고 본다.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은 현대로 넘어오는 전령사였던 것으로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이해하기 힘들었다. 단지 두 작품 앞에서만 한참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현대작가 세 사람이 패러디 했다고 해야 하는지, 하여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 정말 재미있었고, 하나의 큰 의미를 준다고 생각했다.
알랭 자케(1939-2008), 프랑스 출신 작가군! 이름도 생소하다. 현대작가를 내가 알 턱이 있나. "1963년, 알랭 자케는 미술사 속의 아이콘들과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풍자적으로 겹쳐 놓는 방식으로 <위장>이라는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지오르조네부터 마네에 이르기까지 목가적인 테마로 많이 사용되었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기계적인 과정을 통해 제작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두 남자는 정장을 한 신사인데 왜 여자는 그들 옆에서 나체의 몸으로 팔 하나를 턱에 괴고 있는 거야? 서치라이트를 환하게 받으면서 ……, 한 여자는 속옷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고 있고…….
자케는 이 작품을 '메카니컬 아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도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을 이용하여 캔버스 위에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찍어냈다. 인쇄할 때 만들어진 망점으로 인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였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원본의 이미지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이를 통해 자케는 추상과 구상이라는 전통적인 형태 개념까지도 제거하려고 했다 는 것이 참으로 현대적이다.
또 하나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2002, 캔버스 유채 300x500cm.
러시아 출신의 두 화가의 합작품이다. 블라디미르 두보사르스키(1964-) & 알렉산더 비노그라도프(1963), 아이쿠 이름도 적기 힘들다. 재미있게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는 이 대형 그림 앞에서 나는 한참 머물렀다. 전체적으로 주황색 톤으로 약간 퇴색한 듯한 느낌을 준다. 풀밭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상주의 화가들을 등장시킨 점이 흥미롭다.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풀루즈 로트렉,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리고 폴 세잔.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마치 바캉스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벌거벗은 채 빙 둘러 앉아있다. 막 점심을 끝내고 후식 시간인지 싱싱한 젊은 여자가 큰 수박을 자르고 있다. 일상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듯한 불손한 광경이 두 화가들의 꼼꼼한 표현으로 서슴없이 적나라하게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숲 속의 큰 사자, 키 큰 기린, 사슴, 고양이 고슴도치와 새들. 지상의 생명들이 다 어울려 있는 낙원의 모습이다.
성서에 나타난 낙원의 모습(이사야 서 11장) 이 문득 떠올랐다. 일찍이 성서의 작가도 '장차 올 평화스런 왕국'을 꿈에서 미리 보고 이렇게 예시하지 않았을까.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현대적이다.', '오래 된 미래' 이것이 현대의 시대정신인가 싶다. 이 그림을 보면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우리들의 조상 석기시대사람이 갑자기 세련되어 부활하였다고나 할까.
23
어디에도 없다, 지금 여기 뿐
- 행복의 진화 5-
이집트의 돛단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서 차마고도를 넘고, 예술의 고장, 남부 프랑스에까지 도달하여 만난 것은 행복의 화가 르누와르였다.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만난 듯이 그렇게 ……. 2009년 7월을 한 토막내었다. 깨어나야만 하는 꿈 같은 꿈이라면 아예 꾸지도 말아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찾아다녀야 할 행복한 곳과 행복한 시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지금 이 순간과 여기를 떠나서는……. No where를 붙이면 Nowhere, 띠어 쓰면 Now here이다
아직도 돌아다닐 힘이 남아 있다면 내가 살아보고 싶은 땅은 중국의 윈난 지방이다. 중국의 고대 도시 리장이 그대로 숨쉬고 있는 곳. 샹글리라와 라파하이 호수를 이웃한 차마고도의 출발지, 茶의 고향인 운남성은 기후가 따뜻해서 차가 많이 생산될 뿐 아니라 연중 내 꽃이 많이 핀다고 한다. 꿈 같이 마니차를 돌려보고 소원을 담은 룽다를 그 하늘에 담았으니 헛된 꿈일랑 꾸지 말 일이다.
더운 여름이라지만 집에 가만히 있으면 추울 정도로 서늘한 때가 많다. 그러니 가만히 집에 있는 것이 피서이다. 젊은이와 아이들은 그냥 있을 수 없으니 어디든 가야하고 무엇이든 해야 한다. 여름날 외출에서 돌아오면 바로 땀을 씻을 수 있는 시설이 얼마나 고마운가. 바깥을 속 시원히 씻어내고 편히 누워서 잠시 심수한적(心手閑寂)을 만끽하는 일은 무엇에 비길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다. 거기다 차 한 잔이면….
내가 자주 가는 콩나루 식당에는 가끔 한 할머니가 찾아온다. 지팡이를 들고 등가방을 짊어지고 밥을 얻으려 오시는 할머니다. 주방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비닐 주머니에 밥을 담아드린다. 그런 광경을 보며 나는 중얼거린다. '그래, 밥을 얻어먹을 기운만 있어도 행복이다.' 라고 꽃동네의 선돌에도 써 있다 했지.
한 끼 식사를 해결한 할머니는 행복한가. 사람이 맨 처음 움직이면 배고픔을 면하는 일을 생각하고 그 다음은 안일과 더 나은 행복을 찾는다. 원하던 바 욕심이 이루어지거나 고생 끝에 도달한 목표점이 낙이라고 한다면, 그 낙이 다른 욕망을 부르고 그것은 다시 고생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기본 의식주에 걱정이 없어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더 나은 의식주, 거기다 권력과 명예욕까지 일어난다. 인간이 욕망의 폭풍에 시달리는 일은 선사이래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압력에 의하여 본래의 이상을 찾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윤회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톱니바퀴처럼 제 자리만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통 문명과 생활과의 연계성을 말하곤 하는데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의 생활은 그만큼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진다. 흔히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혼동하기도 하는데, 문화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며 나라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각자 처한 시대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명은 그 정도에 따라 우열을 가리지만 문화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일례로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식 습관에 견주어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아랍의 식 습관을 비위생적이다 할 수 없으며 첨단과학문명의 생활에 비교해 원시문명의 생활을 얕잡아 볼 수 없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해서 행복이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행복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얼마나 보람을 느끼고 얼마만큼 만족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피부색과 언어와 문명을 떠나 우리는 서로의 문화를 존중해야 하며 각자의 행복을 중요시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는다.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삶의 조건이 열악하기도 손꼽지만 상대적으로 행복지수는 최고 수준이라고 조사된 바 있다. 티베트의 고원지대 사람들은 일 년에 몇 번 씻지 않고도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옛날 옛날에 우리도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 가나의 시골에는 화장실로 욕실도 없는 곳이 허다하다. 그래도 즐겁게 살고 있다. 행복이란 삶의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님이 증명 된 셈이다.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지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같은 문화권 내에서도 개인의 차이에 따라 문화적 환경이 다른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한 쪽에서는 행복감에 젖어 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인류의 행복 그 자체가 구현되지 않았기에 개인의 행복이 보장될까.
평소에 나는 '행복하다' 는 낱말을 잘 쓰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조건이 되면 행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행복하다고 말하는 순간은 언제나 조건에 따른 행복감(幸福感)을 말함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말하는 순간은 어쩜 기분이 좋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그 감感은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른 개별적인 행복감이 아닐까. 행복감을 찾아다니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인간은 끝없는 갈애(渴愛)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라도 조건에 굴복하지 않고, 불행하다거나 속상하다 거나 하는 불평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냥 살아내고 있는 동안이 말이 필요 없는 행복 그 자체였다.태초부터 청정한 마음, 본래면목에는 한 점 바람도 일지 않는다 했는데, 인간의 욕망의 바람을 어찌 잠재울 수 있는가. 일상의 작은 행복감은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어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정신적 자기 구현을 통해 두려움이 없는 마음의 평안을 확대하여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이상향은 현대 '화가들의 천국'에 나타난 자유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성서의 작가도 그린, 시대를 초월한 모두의 꿈이었기에 반드시 '장차 올 평화스런 지구촌'을 그렸으리라. 충분히 행복한데도 내일이라면 더욱 행복할 것을 기대한다면 행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자아실현'을 이루어야 하는 일, 인간 전체의 자아실현 이후에 진정한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이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냥 사는 삶.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말씀이 세상 자체가 된다면, 비로소 인류의 행복의 진화는 더 높이 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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