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겠지요. 햇살이 하 좋아 나갔다가 친구 집에서 잠깐 茶談을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 텐데 저녁이나 먹고 가지...... “봄기운 들어오라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깐 나왔는데...” “뭐, 가지고 갈 것이 많은가봐!” “그런 건 아니지만, 기다리는 것은 많아...“
천리향이 창 바깥 햇살 따라 멀리 퍼져 가라 했거든요. 천리향 입이 뾰족이 열리기 시작하면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이월 동안 내내 좁쌀만 한 꽃잎이 모여 꽃숭어리를 매달고 있다가 이제 막 열리고 있습니다. 오므리고 있을 때는 절대 향기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지요. 붙잡는 친구의 손을 마다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좀은 쓸쓸한 것 같았지만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꽃향기가 안겨오니 온 몸이 환해집니다. 그 어떤 대상이 이렇게 날 아늑하게 맞아줄까 싶습니다. 아침에 벌여 놓은 찻상에서 꽃나무와 마주앉아 남은 차관에 물을 넣어 세 번째 차를 우렸습니다.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고요로운 청복입니다. 야생 화단의 천리향은 나뭇잎이 누렇게 뜨고 이지러진 잎도 많기도 하고, 아직 꽃잎이 벌어질 기미가 없습니다. 온실 것은 잎 색깔이 초록색이고 곱기는 합니다만 나무 둥치는 크게 자라지 않습니다. 드넓은 대지에 뿌리박고 가없는 하늘의 태양과 바람을 받고 온갖 시련을 견뎌내어야 굳건한 큰 나무로 자랍니다. 서둘러 꽃 피우려고 조바심 내지도 않습니다. 우리 도시인들은 저처럼 온실의 꽃나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향기 내는 꽃을 피우고 고운 자태를 하고 있을지라도 생명이 지닌 역량을 한껏 펼치지도 못하겠지요.
오늘은 2008년 3월 4일, 내일이 경칩입니다. 어제는 초등학교 아이들 입학식이 있었지요. 아침의 상큼한 싸늘함이 맑은 하늘과 함께 새봄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천리향이 꽃잎을 매일 많이 열어 향기도 짙어집니다. 베란다의 햇살로 나왔지만 햇빛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하늘을 보니 해가 검은 구름 층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더니 잠깐 사이 구름이 하늘을 덮고 얼마동안 굵은 눈발이 세차게 내리는 겁니다. 동해안 쪽 폭설의 영향입니다. 춘삼월에 내리는 때늦은 눈발입니다. 그리고 또 잠깐 사이 나타나던 태양은 구름 속에 갇혀 버립니다. 정말 봄은 언제나 올 듯 말 듯 하면서 주춤거리는 겨울과 숨바꼭질 놀음을 하면서 와야 자랑스러운 가 봅니다. 창안은 꽃향기 가득하고 춘란분에서 새 꽃 촉이 조심조심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참 변덕이 심한 날이었어요.
2008년 3월 8일입니다. 꽃들을 지켜보면 야생이든 온실이든‘열흘 이상 가는 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봉오리들이 한 열흘 만에 다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꽃은 만발했고 천리향의 영화가 절정을 넘습니다. 식탁에 앉아 햇살이 내려앉은 베란다 숲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춥지 않아 창문을 활짝 열어 직접 나뭇잎들에게 싱싱한 햇빛을 안겨줍니다. 겨우내 농축된 영혼의 향이 창밖 만리까지 퍼지도록 말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년의 아이들이 어린이 집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지요.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아이와의 전쟁’을 호소하는 젊은 부모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약 95퍼센트가 실내에서 생활한다고 하지요. 따라서 요즈음 아이들의 부모 역시 거의 대부분 온실의 화초처럼 살면서 온실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왔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도시생활 자체가 모든 일들이 자연과는 분리된 생활이어서 적극적으로 단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게 하여서는 진정한 사람으로 자라기 어려울 것입니다. 덕(德),체(體),지혜(智慧)를 갖춘 사람의 향기는 만리(萬里)를 간다고 하지요. 위대한 선각자들의 향기는 세대를 초월합니다. 온실의 천리향처럼 자란 사람들이 어찌 사람의 진정한 향기를 지닐 수 있을 지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과 여행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마비시키는 습관을 헤어날 수 있도다.” 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씩씩하게 훈련해 가면 좋겠지요. 명랑하게 한 공간 한 공간을 통해 잘 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2009년 3월 8일 일 년 만에 다시 새 봄의 마술을 맛봅니다. 1월부터 천리향 꽃눈이 맺기 시작하여 2월 중순 부터 눈을 뜨기 시작하여 고유한 향을 풍겼습니다. 동시에 그 향의 울림을 듣고 솟아오른 춘란의 새 촉도 함께 봄의 교향곡을 합주하는군요. 올해는 꽃 시기가 좀 빠른 것 같아요. 천리향은 2월 21일부터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제주도 비바리들이 제주시내 천리향 가까이 가서 '아이 향기 좋아라' 하며 천리향 아래서 코를 발름거리면 다음 날 전라도 완도까지 향기가 건너간다 고, 시인 고은이 노래했습니다. 나도 우리집 천리향 아래서 향기 가득 담고 제주도로 건너가니 거기 천리향이 이미 퍼지고 있었지요. 지난주는 남녘의 순천, 진주, 통영의 미륵산 정상까지 퍼져나가 매향과 조우했습니다. 부산에서 전주까지 올라오는 동안 가로의 산수유가 활짝 피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봄에는 물가에서 놀아야 멋있다고 했는데요, 근래는 가물어서 마른 개천이나 저수지가 보기 안타깝습니다. 고향 마을 큰들의 진주남강 물도 줄어서 강의 밑바닥이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섬진강 댐 옥정호의 붕어 섬도 갈증에 시달리고 있더군요. 들 물이 붇고 줄어 넘친 흔적이 붉은 맨 바닥으로 층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강바닥만 본다면 어찌 새 봄의 못이라 할 수 있을 지요. 성긴 수풀이 뿌리까지 서리 맞아 황량하고 밋밋한 늦가을 풍경에 봄물이 차올라 힘찬 새 출발을 준비할 때인데... '春水萬沙澤'이란 절구가 무색했습니다. 냇가에는 바야흐로 '柳枝絲絲綠'이나 단원의 그림 <少年行樂>의 화제처럼 '春日路傍情'을 만끽할 수도 없는 것은 옛 산천과 옛 사람이 아니어서 일까요. 베란다의 천리향이나 춘란도 언제까지 내 옆에서 새 봄을 구가할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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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겠지요. 햇살이 하 좋아 나갔다가 친구 집에서 잠깐 茶談을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 텐데 저녁이나 먹고 가지...... “봄기운 들어오라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깐 나왔는데...” “뭐, 가지고 갈 것이 많은가봐!” “그런 건 아니지만, 기다리는 것은 많아...“
천리향이 창 바깥 햇살 따라 멀리 퍼져 가라 했거든요. 천리향 입이 뾰족이 열리기 시작하면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이월 동안 내내 좁쌀만 한 꽃잎이 모여 꽃숭어리를 매달고 있다가 이제 막 열리고 있습니다. 오므리고 있을 때는 절대 향기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지요. 붙잡는 친구의 손을 마다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좀은 쓸쓸한 것 같았지만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꽃향기가 안겨오니 온 몸이 환해집니다. 그 어떤 대상이 이렇게 날 아늑하게 맞아줄까 싶습니다. 아침에 벌여 놓은 찻상에서 꽃나무와 마주앉아 남은 차관에 물을 넣어 세 번째 차를 우렸습니다.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고요로운 청복입니다. 야생 화단의 천리향은 나뭇잎이 누렇게 뜨고 이지러진 잎도 많기도 하고, 아직 꽃잎이 벌어질 기미가 없습니다. 온실 것은 잎 색깔이 초록색이고 곱기는 합니다만 나무 둥치는 크게 자라지 않습니다. 드넓은 대지에 뿌리박고 가없는 하늘의 태양과 바람을 받고 온갖 시련을 견뎌내어야 굳건한 큰 나무로 자랍니다. 서둘러 꽃 피우려고 조바심 내지도 않습니다. 우리 도시인들은 저처럼 온실의 꽃나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향기 내는 꽃을 피우고 고운 자태를 하고 있을지라도 생명이 지닌 역량을 한껏 펼치지도 못하겠지요.
오늘은 2008년 3월 4일, 내일이 경칩입니다. 어제는 초등학교 아이들 입학식이 있었지요. 아침의 상큼한 싸늘함이 맑은 하늘과 함께 새봄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천리향이 꽃잎을 매일 많이 열어 향기도 짙어집니다. 베란다의 햇살로 나왔지만 햇빛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하늘을 보니 해가 검은 구름 층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더니 잠깐 사이 구름이 하늘을 덮고 얼마동안 굵은 눈발이 세차게 내리는 겁니다. 동해안 쪽 폭설의 영향입니다. 춘삼월에 내리는 때늦은 눈발입니다. 그리고 또 잠깐 사이 나타나던 태양은 구름 속에 갇혀 버립니다. 정말 봄은 언제나 올 듯 말 듯 하면서 주춤거리는 겨울과 숨바꼭질 놀음을 하면서 와야 자랑스러운 가 봅니다. 창안은 꽃향기 가득하고 춘란분에서 새 꽃 촉이 조심조심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참 변덕이 심한 날이었어요.
2008년 3월 8일입니다. 꽃들을 지켜보면 야생이든 온실이든‘열흘 이상 가는 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봉오리들이 한 열흘 만에 다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꽃은 만발했고 천리향의 영화가 절정을 넘습니다. 식탁에 앉아 햇살이 내려앉은 베란다 숲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춥지 않아 창문을 활짝 열어 직접 나뭇잎들에게 싱싱한 햇빛을 안겨줍니다. 겨우내 농축된 영혼의 향이 창밖 만리까지 퍼지도록 말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년의 아이들이 어린이 집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지요.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아이와의 전쟁’을 호소하는 젊은 부모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약 95퍼센트가 실내에서 생활한다고 하지요. 따라서 요즈음 아이들의 부모 역시 거의 대부분 온실의 화초처럼 살면서 온실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왔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도시생활 자체가 모든 일들이 자연과는 분리된 생활이어서 적극적으로 단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게 하여서는 진정한 사람으로 자라기 어려울 것입니다. 덕(德),체(體),지혜(智慧)를 갖춘 사람의 향기는 만리(萬里)를 간다고 하지요. 위대한 선각자들의 향기는 세대를 초월합니다. 온실의 천리향처럼 자란 사람들이 어찌 사람의 진정한 향기를 지닐 수 있을 지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과 여행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마비시키는 습관을 헤어날 수 있도다.” 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씩씩하게 훈련해 가면 좋겠지요. 명랑하게 한 공간 한 공간을 통해 잘 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2009년 3월 8일 일 년 만에 다시 새 봄의 마술을 맛봅니다. 1월부터 천리향 꽃눈이 맺기 시작하여 2월 중순 부터 눈을 뜨기 시작하여 고유한 향을 풍겼습니다. 동시에 그 향의 울림을 듣고 솟아오른 춘란의 새 촉도 함께 봄의 교향곡을 합주하는군요. 올해는 꽃 시기가 좀 빠른 것 같아요. 천리향은 2월 21일부터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제주도 비바리들이 제주시내 천리향 가까이 가서 '아이 향기 좋아라' 하며 천리향 아래서 코를 발름거리면 다음 날 전라도 완도까지 향기가 건너간다 고, 시인 고은이 노래했습니다. 나도 우리집 천리향 아래서 향기 가득 담고 제주도로 건너가니 거기 천리향이 이미 퍼지고 있었지요. 지난주는 남녘의 순천, 진주, 통영의 미륵산 정상까지 퍼져나가 매향과 조우했습니다. 부산에서 전주까지 올라오는 동안 가로의 산수유가 활짝 피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봄에는 물가에서 놀아야 멋있다고 했는데요, 근래는 가물어서 마른 개천이나 저수지가 보기 안타깝습니다. 고향 마을 큰들의 진주남강 물도 줄어서 강의 밑바닥이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섬진강 댐 옥정호의 붕어 섬도 갈증에 시달리고 있더군요. 들 물이 붇고 줄어 넘친 흔적이 붉은 맨 바닥으로 층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강바닥만 본다면 어찌 새 봄의 못이라 할 수 있을 지요. 성긴 수풀이 뿌리까지 서리 맞아 황량하고 밋밋한 늦가을 풍경에 봄물이 차올라 힘찬 새 출발을 준비할 때인데... '春水萬沙澤'이란 절구가 무색했습니다. 냇가에는 바야흐로 '柳枝絲絲綠'이나 단원의 그림 <少年行樂>의 화제처럼 '春日路傍情'을 만끽할 수도 없는 것은 옛 산천과 옛 사람이 아니어서 일까요. 베란다의 천리향이나 춘란도 언제까지 내 옆에서 새 봄을 구가할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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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 양귀비
“따르릉, "
"언니, 꽃이 활짝 피었어!" 싱그럽고 명랑한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응, 오후에 갈게." 반갑게 화답하고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운동을 겸해 아침 명상을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었다. 전 날 하루 종일 유적 답사를 다녀왔기에. 오늘 하루 외출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볼 일을 마치고 3시에 만나기로 했다.
2년 전 이맘 때였지. 너무나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어느 지인이 자랑을 했다.
우리를 그미가 자기네 집으로 안내했다. 과연 별장 같이 비워둔 그 집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러 색깔의 꽃양귀비들이었다. 그해 가을 꽃씨를 받아두었다고 해서 얻어 온 것을 여러 곳에 나누어주었었다. 나도 베란다 화분에 씨를 묻어두어 한 해는 꽃을 볼 수 있었다. 지난해 꽃씨를 준 후배네 집에 그 꽃이 핀 것을 보러 갔었다.
그 때는 꽃이 작았지만 참 신기했다. 올해는 더 크고 잘 자란 꽃들이 환상적으로 여러 모습으로 자태를 연출하고 있다. 봉오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무게를 지니기에 꽃대는 힘이 들 테지만, 꽃잎이 열리게 될 때까지 그 황홀함의 기대로 봉오리의 무게를 기꺼이 지닌다. 때가 되면 무거웠던 꽃대에서 봉오리는 날아갈 듯이 활짝 날개를 편다. .
꽃씨를 주면서 꽃이 필 때는 연락하기로 약속했었다. 드디어 꽃이 피었다고 알려와서 같이 꽃을 즐기면서 차를 함께 마실 수 있는 것은 한 하늘 한 땅에서 세상사는 즐거움의 하나다. 각각의 색깔대로 배경을 달리 해서 꽃 사진을 찍었다.
"따르릉" 아침 시간이 분주하다.
"언니, 사진이 너무 좋아, 눈물이 날 것 같아!" 감성이 보드라운 후배는 영락 시인이다.
"꽃이 더 많이 피었을 때 오전에 다시 연락할게."
사진을 컴퓨터에 올려달라고 부탁을 받고 밤늦도록 사진 작업을 해서 메일로 보낸, 다음날 아침 전화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꽃 사진을 그 때 또 찍기도 했다. 자기 마당에 피어 있는 꽃 사진을 메일로 받아보고는 너무 좋아했다. 그미는 그 사진을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문학 사이트에 송부하고 많이들 찬양을 받았다고 해서 나도 즐거웠다.
바라본 사실을 재구성하고 각도를 달리하여 형상화한 후 다시 보는 맛이 예술을 하는 맛일까? 사진예술도 주제를 잘 살리기 위하여서는 필요한 배경만 넣어야지 여러 가지를 많이 넣으면 주제에 손상을 주게 된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 그렇게 되기 쉬웠다. 한 장면에 욕심껏 많은 것을 넣으려고 한다. 수필을 쓸 때도 그랬다. 나중에 보면 삭제하고 줄여야 할 것이 수두룩하다. 글을 나중에 수정할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정보를 다 써도 좋다. 하지만 사진은 신중하게 잘 찍어야 한다. 포인트를 잘 살리기 위하여 초점을 흐트려서도 안될 것이다. 내 글이나 사진이 예술적인 감동을 주는 데에 미치기는 아직 멀었다. 주제의 어느 각도가 포인트를 잘 살릴 수 있을 지는 수없이 실습을 해야 할 일일 뿐. 많이 찍어도 좋은 사진 한 장 얻기가 참 어렵다. 많이 써도 좋은 수필 한 편 얻기도 힘들다.
과정을 즐길 일이다. 인생에 있어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사실에 맞추어 행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리라 싶다. 그것이 삶의 포인트가 아닐까. 예술로 형상화하는 일 자체가 인생의 목적은 아닐 터. 자칫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기술보다는 생각과 마음으로 찍을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예술의 모든 장르가 다 그러하리라. 무엇을 어떤 재료로 어떤 방식으로 형상화할 것인가. 완성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예술을 하는 과정이야말로 인생의 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징검다리가 아닐까.
8. 환생한 경천사지십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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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동관 내의 '역사의 길'에는 조형이 너무나 아름답고 웅대한 '경천사지십층탑'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에 들어오는 사람 누구나 그 탑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박물관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그 아름다운 탑의 조형에 사로잡히기보다 잠깐 혼란에 빠졌었다. 60년 대 내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닐 때 분명히 본 탑인데, 그리고 그 탑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는데……. 어느 날 그 옛날 사진을 찾아냈다. 그건 분명히 경복궁 안(지금의 민속박물관 앞) 에 있었고 누구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친구와 같이도 찍고 독사진도 찍었다. 오랫동안 그 탑의 역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경천사지십층석탑은 모든 병을 낫게 하였다고 일명 '약황탑'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개성 부소산에서 1907년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고, 1918년 고국으로 반환되었던 것을 1960년 경복궁에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그러니 막 경복궁에 복원되었을 때 우리는 경복궁에 다니면서 국전을 보고 그 탑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산성비와 여러 이유로 1995년 다시 해체 되어 10년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수리한 후 2005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 개관할 때 실내에 복원하였다. 그러니 민족의 현대사와 더불어 만고풍상을 같이 겪어온 셈이다. 국내이거나 외국에서나 유물 반출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유물 이동은 경찰 호송 하에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마어마한 보험액이 걸린다. 유물이동은 그래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고 한다. 경복궁 내의 박물관에서 용산으로 이전할 때도 그랬고, 더욱이 이 경천사지 석탑을 복원한 과정은 아슬아슬한 위험을 겪었다고 한다.
경천사지십층탑은 그 조형미가 복잡하고 뛰어나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사각 탑보다 원형 탑이나 팔각 탑이 많다. 월정사 9층탑이 그렇고 경천사지십층탑 또한 그러하다. 십층탑에는 각 층 4면에 부처상이 많이 조각되어 있으며, 모서리마다 나무로 조각한 듯 세밀한 조각 솜씨가 무엇을 형상화했는지도 알 수 없이 아득하기만 하다. 이 탑을 박물관 내에 복원하는 일을 담당한 박물관 사람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한다. 포크레인으로 작업을 하는데 이미 완성된 건물 안에서 작업을 해야 하니까, 대리석 바닥에서 하는 작업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만 해보아도 아찔한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사실 복원 작업을 마친 박물관 담당자는 그 탑이 본래 '약황탑'이었기 때문에 사람도 탑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마쳤을 것이라고 후일담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성공적으로 완수한 작업이었기에 그렇게 쉽게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탑의 위력은 오늘날까지도 위력을 발하며 여전히 탑 앞에 서면 부처의 위력에 공손해지고 그 탑의 조형미에 감동된다. 우리나라도 왕국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삼국 모두 받아들인 불교는 문화적 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선진 종교였다.
평생을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는 팔만사천의 법문이 불경으로 들어왔다. 문자가 없는 세상에서 문자를 사유해야 하는 세상으로 일약 도약을 하게 된다. 샤마니즘의 주술은 불경 앞에 머물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불, 법, 승 삼보를 들여와 공손히 모시는 전당을 마련하고 포교를 하니 불경 같은 책 만드는 법, 붓글씨 쓰는 법, 종이 만드는 법, 기와집 짓는 법, 연꽃무늬 기와 만드는 법, 절집의 벽채에 그림 그리는 법, 불교행사 때 춤추는 법, 지금까지 보도 듣도 못한 수준 높은 온갖 것이 함께 들어온다. 어찌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랴! 컴퓨터 자판으로 이렇게 글을 두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어찌 원고지에 또박또박 글자를 새기고 있겠는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손도 아프다. 그러니 누구나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을 공부해야 한다. 오늘날 정보사회를 이룩한 근거도 문화의 약진, 인쇄술에서 출발했다고 할 만 하다. 세계에 유례 없는 우리의 인쇄술이 불경을 새기기 위하여서였다. 서양에서 성경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발견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그러한 것처럼.
삼국시대 정복 국은 백성을 다스리기에 불도를 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불교가 성행하였고 사찰과 석탑조성의 경쟁이 심했다. 신라의 불국정토 구상은 천년의 역사를 지탱한 원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불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니 세습되는 왕권에도 도전할 수 있는 희망을 몰래 가져볼 만하기도 했다. 부족마다 자기 부족에서 왕을 추대하려는 혁명적인 일도 벌어졌다. 불교는 그렇게 우리나라에 퍼져 들어갔다. 서서히 흡수된 이슬비는 모래밭을 적셨고, 강물 위에 번지는 물방울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절을 세우는 곳마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세워졌다. 불경에는 조탑공덕경이 있고 불경을 사경 하는 공덕이 있다. 지금도 절에는 각종 불경을 사경 하는 인쇄물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재의 모든 부분이 불교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절집의 처마 밑에 서서 올려다보는 처마 선이며 공포의 조각들이 그리도 아름답고, 낙조에 홀로 선 석탑의 실루엣이 그리도 아름답다.
그러나 왜 이렇게 세상은 혼탁한가.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 소식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듣고 있어야 하고 모이면 남의 탓이요, 모일수록 투쟁을 일삼는 일이 많아진다. 아름다운 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감상만 하고 아무도 부처 되기를 마다해서 그런가. 그리도 빌기를 몇 천년을 해 왔건만, 스스로 부처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없어서일까. 하긴 미륵이 하생하려면 석가모니 열반 다음, 56억 만년 후 라 했던가?
그러나, 그래도 미륵님 하생하여도 미륵이 대신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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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은 종鐘이었다
조윤수
영화 '워낭소리'는 시종 ‘늙은 소’와 ‘늙은 농부’의 40년 동거 끝 무렵의 모양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지막한 산허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들만큼이나 낡고 허름한 농가 속에서의 4 계절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늙은 할머니’의 투정 어린‘팔자타령이 나레이터 역할로 이어져서 관객들을 웃게 만들지만, 할머니의 외침은 바로 우리를 향해 외치는 메시지로 들렸다. 늙은 라디오 와 닳아빠진 검정 고무신은 생의 험난한 여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리가 나지 않는 라디오를 든 할아버지께 할머니가 소리친다. "두드려 보소!, 라디오도 고물, 영감도 고물, 소도 고물'. 모두 고물이 된 농가의 모습은 마치 도시의 고물상 같았다. 햇살 좋은 봄날 화사한 진달래 개나리가 핀 언덕 뒤에서 맑게 울리는 뻐꾹새 소리가 없다면.
할아버지는 이 시대의 마지막 자급 小농업인이지 않을까. 할머니가 소에게 밥과 막걸리를 준다. 할아버지는 "너무 많이 주지 마" 너무 많이 주면 해로워, 소 죽이려고 그렇게 많이 줘? 하며 핀잔을 준다. 옛날 농부들은 할아버지처럼 생물을 자연의 이치에 맞게 돌보고 자신을 기르면서 자식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몰랐다. 문명이 발달하자 자식들은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도시로 나갔다. 휘황한 불빛 속에서 어떤 행복을 추구했던 걸까. 9남매 자식들은 병주머니가 된 할아버지의 몸과 소의 일생을 대가로 출세했지만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리는 일이 겨우 소를 팔자는 주장이었다. 아무도 같이 농사를 짓고자 하는 자식은 없다. 할머니도 늘 영감 잘 못 만나 고생이라는 푸념 속에 살았다. 소죽 끓여 먹이기 힘들다며 '우리도 사료를 먹이소!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없이 묵묵했다. 손수 꼴을 베어 져 나르고, 꽃 진 민들레를 뿌리 채 캐어서 소에게 먹였다. 할머니는 16살에 시집와서 머리만 백발 되고 주름만 늘었다 하며 "내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갔느냐" 고 외쳤다.
영화는 영상미가 뛰어났다. 대비적인 장면과 크로즈업 해야 하는 장면을 잘 드러냈다. 그런 장면들을 통하여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밭을 갈아야 하는 봄 날 불편한 다리를 끌며 소를 뒤따라 기면서 밭을 가는 할아버지. 이웃 밭에서는 밭가는 기계 소리가 유난히 높다. 때맞추어 할머니의 나레이션, "우리도 기계로 하소!" 외치지만 풀이 성해지면 할머니는 손수 풀을 뽑는다. 그러나 이웃 밭에서는 기계로 농약을 친다. 할머니 왈, '우리도 농약 치소!' 라고 외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일 그만 하고 쉬라고 하고 소는 그만 부려먹으라고 해도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꿈적거려야 해' 했다. 할아버지는 단순한 고집 뿐 아니라 나름대로 소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삶의 철학이 있었다. 사는 동안은 꿈적거려야 한다는 지론은 철학적이었다. 몸이 있는 한 움직여야 하고 움직일 수 없으면 죽음인 것이다. 소와 할아버지는 서로를 살리고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와 소로 인하여 할머니도 살아왔다.
할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가는 날. 소달구지는 할아버지를 태우고 자동차들이 즐비한
도로를 덜거덕거리며 병원엘 갔다. 까만 세단 자동차가 세워져 있는 병원 주차장 옆 칸에 당당히 세워져 있는 소달구지의 모습도 대비적이었다. 저녁 무렵 어스름을 안고 돌아오는 달구지와 빈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는 소의 끝 날을 예고한다.
달구지에 마른 나무를 가득 실었다. 할아버지도 나무 짐을 가득 실은 지게를 업고 뚜벅뚜벅 걷는다. 보폭도 소걸음과 꼭 같다. 마치 무거운 장송곡에 맞추어 걷는 것 같다. 겨울 땔감을 가득 그렇게 해놓고 다음 날 소는 신음했다. 늙은 소의 퀭한 눈동자를 영상은 놓치지 않았다. 소와의 이별을 직감한 할아버지는 워낭을 풀었다. 그러자 소는 숨을 거둔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고통스러운 희생을 되풀이하는 고향이 아니다. 이웃 농가처럼 자연에 맞지 않는 사료를 먹여서 소득을 올리고 농약을 쳐서 땅이 죽어 가는 농촌도 아니다. 9남매가 돌아오고 싶은 고향이어야 한다. 누가 그런 고향을 만들 것인가. 할아버지 부부도 소도 행복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신세타령은 행복하다는 말의 역설로 들렸다. 그러나 할머니 자신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묵정 밭을 갈기 시작한 것은 고향을 만드는 행복한 사람과 행복한 소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22년 전 일이다. 일본의 야마기시 마을은 자연 순환 농법을 하는 마을이다. 이런 마을이 삼각을 이루는 세 지점에 생기면 그 삼각 안의 땅이 모두 살아난다. 물론 소가 밭을 가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발명된 모든 문명은 자연을 회복하는 일에 쓰인다. 사람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일을 하게 한다. 내가 만난 행복한 소는 프리스톨이란 침대에서 생활한다. 푹신한 침대의 소재는 소의 배설물이 합해져서 좋은 거름이 되어 땅으로 돌려진다. 거름을 퍼내면 다시 톱밥 같은 재료를 투입한다. 소는 잘 생기고 표정도 밝다. 소를 돌보는 사람은 소와 한 몸으로 소통하며 소를 행복하게 해주면 소는 자신을 선물로 바친다. 소나 돼지는 고기가 되는 것을 자청하여 잡으러 오는 사람에게 안겨온다. 소등을 두드리며 "가서 고기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와 다오" 하면 기꺼이 달려나간다. 그러려면 불가의 '기우귀가'의 깨달음을 얻은 사육자의 심정이 되어야 했다. 야마기시 마을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최고의 진선미를 실현하는 수행자들이었다.
워낭은 사람이 소에게 달아준다. 움직이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워낭’은 소나 말 염소 같은 가축들의 턱 아래 매달아 놓은 작은 풍경을 말하는 우리말이란 것을 이 영화 때문에 알게 되었다. 주로 소에게 매달기 때문에‘쇠방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워낭은 방울이 아니라 종이었다. 작은 종. 소와 오랜 동안 같이 생활하는 농부는 워낭소리에 따라서 소가 원하는 뜻을 알고 서로 교감한다 고 한다. 소의 맑고 어진 눈동자에서 눈물 한 줄기를 흘리게 했던 '워낭소리'. 그 작은 종은 우리에게 어떤 경종을 울리고 있는가. ('9/4/14)
(에세이스트 2009/6)
10
<독신과 결혼생활>
김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는 사람 물결을 보면서 다시금 읽게된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결혼과 독신생활>이다. 서양의 수필 선구자였다는 몽테뉴와 영국의 베이컨의 글이 이제야 깊히 음미해볼 만하게 되었다. 수필을 몇 년 공부한 덕이다.
"처자를 가진 사람은 이미 운명에 인질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처자는 선(善)하건 악(惡)하건 대사업에 장해물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주 휼륭한, 가장 공공(公共)에 이익이 되는 사업은 결혼하지 않은, 또는 자녀 없는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은 애정에 있어서나 재산에 있어서나, 공공과 결혼하고 그것을 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가진 사람들이 장래의 시대에 대해서 당연히 큰 관심을 가지리라는 것은 대단히 이유 있는 이이다. 그들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미래의 시대에 내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신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한 평생밖에는 생각지 않고 장래의 시대에 대해서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인 사람이 있다. 확실히 처자는 인간성을 수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독신자는 물자의 소비가 적어서 몇 배나 더 자선적일 수 있지만 반면에 한층 잔인하고 몰인정하여 준엄한 심문 관이 되는 것이 적당하다. 그것은 그들의 애정을 불러일으킬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200년 뒤, 영국의 베이컨을 이어 수필시대의 중흥을 연 찰스 램(1775-1834)은 젊은 때 첫사랑에 실패한 뒤 독신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베이컨이 말한 대로 대사업을 이룩한 사람은 독신자들에 의해서였다 라고 본다면, 영국의 수필시대에 업적을 남긴 것으로 그의 독신생활도 빛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기혼자의 행동에 대한 독신자의 불평'이란 수필에 이런 대목이 있다. "- 전략 - 내가 방문하는 기혼자들의 가정에서 가장 나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전혀 성질이 다른 종류의 결정이다. 즉 그들이 지나치게 의(誼)가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의가 좋다는 것이 어째서 나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에게서 자기들만이 따로 떨어져서 자기들 둘만이 노는 것을 마음껏 즐긴다는 행위 그 자체는 이 세상 전체보다도 둘이서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 최고의 칭호를 붙인다 하더라도 일종의 독점이며, 나의 비위에 거슬리는 그런 유의 독점이다. 월등한 지식이라든가 잘 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도 상대방에게 충분히 굴욕감을 주는 수가 있다." 마침내는 신혼으로 해서 절친한 교우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램의 기혼자 중에서 항상 변치 않는 성의를 믿을 수 있는 기혼의 친구는 모두 신혼기를 지내고 나서 교우관계를 맺은 사람뿐이다 고 했다. 신혼의 줄거움도 자식으로 인한 즐거움도 잠시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는 생활을 이야기하였다.
그건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의 연을 끊고 수행한 결과 큰 깨달음의 세계를 열었고, 영원한 행복이 무엇이라는 것을 열어 보였다. 진정한 수행자들은 무위도식하는 것 같지만 큰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환추기경님은 내가 젊었을 때 마산교구의 신부님시절에 잠깐 가까이 뵌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스승과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는 성직자 분들이 있었다.
내 아파트의 창문으로 보면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상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80년 대 초에는 주변이 모두 농토와 과수원만 있었던 걸로 안다. 그때 이 곳에 아파트가 생겨 내가 살게 될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당시 상관성당의 신부님의 사업을 도우러 전주에서 출근한 적이 있었다. 난 그때 젊어서 종교에 대한 비난 섞인 비판의 말을 잘 했다. "그러니 제도 속에 있지만 제도에서 자유스럽자는 거야!" 라고 하시면서 그런 나를 어여삐 보시고 당신의 성서 번역 출판을 돕게 했던 것이다. 성서의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나에게 잘 묻곤 하셨는데, 그는 생활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쉽게 사용하는 말로 대답해 드리면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보시곤 했다. 책상에 앉으시면 끝낼 때까지 목이 뻣뻣해지도록 그대로 계셨다. 목운동을 권유하면 그럴 시간도 아깝다고 하셨다. 내가 글을 쓰게 되면서 그분의 그때 입장을 가끔 생각하기도 한다.
스님들은 기독교 성직자들과는 좀 다른 수행과정을 거친다. 내가 가까이서 함께 했던 스님을 생각하면 보통사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쌀쌀맞을 정도로 냉철하고 맑은 정신을 느낀다. 그건 베이컨의 말대로 "독신자는 한층 잔인하고 몰인정하여 준엄한 심문관이 되는 것이 적당하다." 는 말과 상통한다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분들의 내면 깊숙이는 천진 성과 대정(大情)이 깔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0여 년 전에 송광사에서 법정스님과 독대한 적이 있었다. 그분이 지나실 때는 찬바람이 난다고 할 정도였다. 아주 찬 것과 아주 뜨거운 것과는 통한다. 냉온탕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같은 온도가 된다. 그때는 인연 법에 끄달렸을 때였다. 인연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형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출가를 하려면 아이가 잡는 저고리고름을 끊어야 한다고 한다. 반대로 자식이 출가할 때는 어머니가 잡은 옷소매를 잘라야 한다고 한다. 결국 베이컨의 말대로 대사업을 하려면 가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은 것 같다.
부처님의 초기경전에도 그랬다. 자식이 기쁨이지만 자식이 곧 근심이다. 법정스님은 그때 속가의 사람들도 출가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추기경님도 그랬다. 일반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 한 적도 있었지만, 현대의 성직자 중 그 누구보다 예수의 삶을 보여주신 분 같다. 가정을 가진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위험에 빠질 경우가 더 많다 고 신부님들은 말한다. 가정은 오히려 좋은 수행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의식만 한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한다. 나와 다른 성과 함께 산다는 것은 내 생각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이 생기면 더욱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자식을 키우므로 해서 자신이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은 무고정 전진의 수행이다.
김수환추기경님의 관이 닫히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해진다. 다시는 그분의 행보를 들을 수 없게될 것이다. 참 어른으로 존경할 분들을 마주할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우리시대이기 때문에 저 많은 인파들이 조용히 작별 인사를 들이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같이 따로 홀로 제멋대로 사는 인구가 늘어나는 때 큰 교훈을 남기시는 것 같다.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져보면서 애도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먼저 가신 모든 영령들께도 안부를 전하고 싶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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