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에세이 3집

에세이 3집 대한민국을 24-26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8. 12:15

24

대한민국을 참배하다
-반남면고분군을 다녀와서-
                                                                                                                                          


  영산강의 지류인 삼포강을 지난다. 드디어 영산강 삼백리 어머니 같은 젖줄이 있어 선사인들이 등 붙일 수 있었구나 싶은 실감이 다가왔다. 내려오는 도중, 차창으로 들어왔던 풍경은 드넓은 겨자 빛 들녘과 논둑에서 긴 줄을 서서 은빛을 반짝거리는 억새풀들만 인상에 남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풀이 마치 이정표처럼 우리를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나주시 반남면고분군은 반남면의 자미성을 둘러싼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일대에 산재해 있는 40여기의 고분군을 일러 말한다. 반남면은 반남 박씨의 시조묘도 있는 반남 박씨의 본관지이기도 하다. 백제에 복속되기 이전 최후까지 마한의 세력이 남아 있었던 영산강 유역이다.
  거대한 고분 앞에 서자니 그제사 출토되어 유물로 말하고 있는 박물관의 기록들이 시원한 호흡을 하며 다가와서, 나도 비로소 큰 숨을 내쉬었다.  마한(馬韓)이라면 삼한 중의 가장 강력하고 크게 자리를 잡았던 54개국 연맹체였으며, 우리나라의 이름이 대한(大韓)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된 삼한의 한(韓)이 근원이었다 는 것 외에 알 수 없었다.  이번에(2009년 9월 22-11월 29)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국내 최초로 '마한의 숨쉬는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네 주제, 즉 l. 마한, 그 시작, 2. 삼한의 으뜸, 마한, 3. 마한 사람들의 삶과 신앙, 4 백제 속의 마한 등을 통하여 마한과 백제와 주변 동아시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 전시와 연계된 유적 답사로써 반남면고분군에 오게 되었다.
  반남면고분군의 특징은 고구려 장군총, 공주 송산리 고분군, 신라 경주대릉원에 견주어 손색없는 대 능원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은 국가가 형성되기 전의 부족국가가 통일국가로 발전하지 못해서였다고 보아야 할까. 백제에 흡수되어 가는 과도기의 삶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이 말해주었다. 마한의 기록은, 우리의 기록이 없을 때는 언제나 들먹이는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이며 우리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대와 <삼국유사>혁거세조이다. 
  마한의 묘제의 특징은 단연 옹관묘이다. 마한에는 왕관은 없지만 옹관은 있다고 했다. 경주의 왕릉이나 부여의 능이 한 왕을 위한 능이었다면 마한의 묘제는 한 분구에서 여러 기의 옹관이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한 분구를 같은 부족이 시대를 두고 계속 매장을 하였다는 것은 이 얼마나 애틋한 부족간의 끈끈한 가족애를 말하는 것인가. 까마득한 고대인들의  어떤 정이 내 속의 어디에 숨어서 숨쉬는 듯하였다. 그러기에 무덤의 형태도 커다란 원형에서 방대형, 사다리꼴, 장고형 등이다. 신촌리 고분들의 규모는 길이 10.5미터에서 35미터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내부시설이 대부분 여러 개의 옹관으로 구성되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 하나의 분구 밑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이 흐르게 했다. 띠를 두른 것이 분구의 장식 같다. 그 부족들의 주거지는 대체 어디쯤이었을까. 나주읍성 땅속을 파보면 단서가 될 어떤 유물들이 나올까. 그 거대한 옹관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었을까.
  박물관 전시장도 거대한 옹관으로 들어가는 듯한 구성으로 되어서 흥미롭다. 지금까지 막연하였던 마한의 그 이전과 이후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전시장 입구는 옹관의 입구처럼 좁게 들어가게 되어 넓은 영역으로 인도된다. 처음 입구의 영상에서 만날 수 있는 '말모양허리띠' 장식은 그들에게 절대적이었던 말에서 마한의 으뜸이었음을 느낀다. 전시장 가운데 거대한 옹관이 있고 주변의 유물에서는 마한의 삶과 신앙을 알며 그후로 백제 속의 마한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거대한 옹관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강력했던 지배세력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지금도 그런 옹관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2년 전에 광주박물관에서 만났던 신기한 금동관이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보니 마한의 세력이 다시금 생각되기도 한다. 옹관은 있지만 왕관은 없다는 기록은 이제 다시 쓰여지게 된다. 마한의 역사 기록이. 이 금동관이 후에 국가 시대의 임금들의 관모의 전형이 된 것을 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뿐 아니라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금반지 봉화문환두대도, 청동 팔찌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마한인들 만난다. 1996년 신촌리 9호분을 재 발굴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토기 28개가 출토되었다. 이 원통형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나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전쟁의 비밀의 실마리도 될 수 있다 고 한다.
  복암리 고분인 방대형 고분의 정상에 오른다. 작은 야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평평한 정상에 서니 상쾌한 바람이 밀려와서 사위를 둘러본다. 주변의,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한 영산강의 지류가 보이는 곳까지, 사방이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어찌 이 평야를 사랑하지 않았으랴! 3호분이라는 이 거대한 분구는 96-97년 확인된 구내유일의 다양한 묘제 32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금동신발, 관모, 삼두환두대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마한과 백제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단서들이 된다. 한 분구 안에 마한계의 옹관묘와 백제계의 석실분의 융합된 묘가 매장되었다는 것이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몇 세대를 걸쳐 완성된 분구였다. 4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조성된 집단묘적의 성격과 시기에 따른 옹관묘의 형태 그리고 석실분까지 그 변천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을 제공한 유적이란다.
  얼마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창군 봉덕리 고분은 더욱 신기하다. 언젠가 나는 길을 잘못 들어 아산면에서 선운사를 가기 위하여 그 길을 통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야트막한 야산이 고분이었다니! 주변의 야산을 눈여겨보시라! 혹시나 선사시대의 고분인지 누가 알랴! 작은 구릉 옆을 돌아서니 길옆에 잡풀이 무성한 야산이 하나 있다. 아직 발굴하지 않은 분구가 옆에 발굴하고 있는 분구와 쌍을 이루고 있다. 조각이 찬란한 투조기법의 금동제 신발이 여기에서 나왔다. 대형 옹관 안에 시신을 누이고 금동관을 입고 금동신발을 신고 곡옥을 포인트로 한 구슬 목걸이를 걸었던 사람. 대도(大刀)를 차고 손칼도 들고서 중국제 청자와 호와 은제 탁잔을 거느리고 옹관 안에 누워서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 사람은.
  경주에 갔을 때 나는 진평왕이나 선덕여왕 무덤에 가고 싶었다. 주변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 일행이 왕릉에 가봐야 볼 것이 없다 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오늘 답사는 종일 마한(韓)을 열었던 사람들의 무덤만 참배하는 성묘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대한민국을 통으로 참배하는 기분이었다. (2009년 10월 13일)

 

 

 

25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기찻길 옆 텃밭에서-

 

                                                                                  
  ‘코스모스 우거진 철길의 고향 열차’가 내 앞으로 다가온다. 밀려오는 꽃바람이 가슴으로 스민다. 경남 하동 북천역은 ‘코스모스 기차역’이란 애칭을 하나 더 붙였다. 코레일 열차가 들어오는 기찻길을 따라 가보고 싶어진다. 마지막 열차가 사라지는 기찻길 레일을 쭈욱 따라서 내 마음의 시선은 벌써 먼 북쪽으로 내달린다.

  개성 땅에 묻어둔 우리의 살림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만, 마치 고향처럼 그리움으로 북녘을 바라볼 때가 있다. 오늘처럼 기찻길 영상을 볼 때나 기차 여행을 할 때가 그렇다. 반세기도 훨씬 넘은 일인데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은 6□25 난리 중에 전근되신 아버지를 따라 9□28 수복 때 개성까지 올라갔다가 바로 다음 해 1□4 후퇴 때의 피난 길 때문이다.

  나의 유목민 생활은 그때부터였을까? 우리는 개성에서 힘겹게 걸어 내려왔다. 겨우 문산까지 와서야 뚜껑 없는 열차나 짐칸에 탈 수 있었다. 난 그때 여덟 살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열차 판때기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순간 철거덩하고 기차가 움직여서 레일 옆 자갈밭으로 내가 떨어져버렸다. 그때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는 전연 기억이 없고 단지 부상 하나 없이 가족이 흩어지지 않은 것만 천운으로 생각했다. 아찔한 순간을 지켜보았던 가족들은 털거덩하는 열차 소리와 동시에 가슴이 철렁했다고 회상했다. 우리 자매들은 이산가족이 될 뻔했던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얘기한다. 서울 마포까지 당도하였으나 언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매일 용산역에 나갔다고 큰언니가 말해주었다. 겨울이 깊어지고 동지가 되었는데 용산 역구내 한데에 솥을 걸고 팥죽을 끓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날이 걸려서 부산까지 내려갔는지도 모른다. 엄동설한에 열차가 가다가 중지하면 기찻길 옆에 내렸다. 근처에서 물을 길어오고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서 항고(군사용 밥통)에 밥을 끓여 먹기도 했다. 모두가 굶고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조금씩 나누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언니는 말했다. 내 기억에 선명한 첫 인생열차는 그렇게 민족의 수난과 함께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아버지는 다시 전주로 전근되셨는데 3년 만에 도로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나는 언니의 직장 따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주에서 살았다. 그 당시의 학교도 철길 밑에 있어 수업 도중에 기차가 지날 때면 귀를 막곤 기차 소리 흉내를 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갔다. 전주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지금도 전라선을 타고 대전에서 경부선으로 갈아타야 한다.‘대전발 영시 50분’이란 노래까지 유행할 정도로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의 교차점이었다. 기차는 유일하게 먼 곳으로 혹은 고향으로 우리를 실어다 주었다. 밤기차가 대전역에서 잠깐 쉬는 틈을 타서 구내에서 먹는 추억의 우동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까? 하얀 백선을 단 교복을 입은 채 순식간에 먹어야 했던 그 우동 맛을 그 후론 다시 맛볼 수 없었다. 그 때는 좌석을 예매할 수도 없는 완행열차였지만 밤새 서서 가도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복잡한 시내버스처럼 그 시절의 열차는 서서 가야 하는 사람들로 빽빽했다.

  후에 열차 종류도 많이 생겼는데, 우리 삶의 옛 풍속도와도 같은 완행열차는 없어진 지 오래고, 비들기호나 통일호도 사라졌다. 지금은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애용되고 있다. 기찻길에서 바닷길까지 연결되는 관광열차도 운영한다. 2004년부터 초고속 KTX가 생겨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반이면 가니까 기차 여행의 풍속도도 많이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종일 기차에서 지내야 했다. 내 조카들은 긴 기차 여행 때의 먹을거리 중 꼭 챙기는 것이 고추장에 찍어 먹는 오징어였다. 옛날에는 증기기관차였기 때문에 발차할 때 증기를 하늘로 쏘며 내는 기적소리도 ‘삐익’하고 길게 울렸다. 멀리까지 퍼지는 기적소리는 만남과 이별을 상징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애틋하게 했다. 긴 여운을 긋는 기적소리가 새겨진 급수탑도 이제 근대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덩굴식물로 뒤덮인 연천역의 급수탑은 사찰의 돌탑 못지않게 격동기의 애환이 서려 있었다.

  

  전주로 시집을 와서 다시 전주살이를 하게 된 지 37년째다. 고속버스가 많아져서 전주에서 부산까지 한 번에 갈 수도 있지만 처음엔 단 칸의 버스 여행이 무척 힘들었다. 전국이 일일권에 진입한 지 오래여서 빠른 길도 많지만 내가 서울에 갈 때는 꼭 기차를 탄다. 자녀와 자매들이 모두 서울 경기지역에 살기에 자주 서울나들이를 한다. 철도는 여러 가지 할인 요금제도 생기고 기차역에서 바로 연결되는 지하철은 무료 혜택을 받는 나이가 되었다. 나라가 발전한 덕이니 퍽이나 편안하다.

  기차를 타면 느긋해서 좋다. 구내에서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맛은 순수한 자유 그 자체다. 요람 속의 천진함으로 되돌아가는 듯 아늑한 그리움으로 일상의 모든 번거로움이 싹 가신다. 지루해질 때쯤 도착하는 새 역에서는 내리는 사람과 새로 타는 사람들이 엇갈리면서 그 지방색과 땅 냄새도 따라오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어쩜 내 삶의 보따리를 실어 날랐던 일은 기차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두 레일 위로만 달려야 하는 기차처럼 내가 걸어온 인생의 열차도 그런 레일 위를 달려 왔다고나 할까. 내가 타야 했던 나의 열차. 인생의 여로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선택한 열차이기 때문에 자신의 레일에서 이탈할 수 없었다. 열차를 탈 때마다 내가 가는 방향의 기차가 맞는지 확인한다.

  산비탈 밑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3년 전부터 이곳 전라선 신리역 앞에서 살게 되어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자주 본다. 기찻길 옆 텃밭에서 서너 시간 가량 이웃집 가실 일을 돕는 동안 대여섯 번이나 기차가 지나간다. 열차가 철거덩거리며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일어서서 기찻길을 바라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기차는 뚜껑이 먼저 보인다. 그러면 옛날 개성에서 내려와 문산에서 탔던 지붕 없던 열차가 떠오른다. 언제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개성까지 갈 수가 있을까.

  부산에서 기차를 타면 서울과 신의주까지 시원히 달릴 수 있는 기찻길이 빨리 이어졌으면 좋겠다. 압록강 철교를 지나서 시베리아 횡단선을 갈아타고 유럽까지, 혹은 중국을 통하여 티베트까지 달릴 그날은 언제쯤 올까. (2009/10/16)

 


 

 

기찻길 옆 작은 도서관

 

  ‘기찻길 옆 작은 도서관’이 생겼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전라선이 통과하는 전주역 남쪽 첫 작은 간이역 앞에 있다. 주민을 위한 도서관을 아파트 관리실 옆에 마련하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이름만 들어도 참 낭만적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는 노래가 저절로 떠오른다. 지금은 그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없지만 옛날 어렸을 때 자주 부르던 노래다. 예전에는 오직 기차를 타야만 멀리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동요도 생겼다. 그래서인지 기찻길이라면 왠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기차가 들녘을 가로지르면 멈추어서 한참 그 열차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다. 마치 뒤따라가려는 듯이. 신리역은 간이역이기 때문에 하루에 많은 기차가 지나가지만 오전 6시에 여수행 기차가 한 번 서고 저녁 9시에 여수에서 올라오는 기차가 신리에서 선다. 여수에 가려면 오전 6시 기차를 타고 가서 하루 종일 관광을 하고 저녁 9시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고 오면 낭만적인 하루 여행이 될 수 있다. 2년 전에는 오전 9시에 통근 열차가 있어 집에서 바로 역까지 걸어가서 그 기차를 타고 익산에서 서울행을 갈아타면 편리했었는데 지금은 그 기차가 없어졌다. 코레일에서는 관광열차도 운영하고 있어 현대에 탈 것들을 하루에 다 타 볼 수 있는 재미난 여행도 할 수 있다.

 

  기차가 지나가는 모양이다. 털커덩거리는 열차가 ‘빠앙‘ 기적 소리를 토해 낸다. 신리에서 전주로 나갈 때면 슬치에서 내려오는 대흥천을 따라 한벽당 앞으로 지나는 자동찻길로 다닌다. 기찻길이 산 밑으로 나 있기 때문에 자주 기차가 지나는 것을 본다. 어떤 때 멈추어서 산기슭을 휘감고 달리는 열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추억의 기찻길이 이어진 열차 칸처럼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방학 때마다 전주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대전에서 경부선을 갈아타고 열차 안에서 밤을 새던 일들. 추억의 수학여행 길, 기차가 멈추었을 때 열차의 문에 서서 사진을 찍었던 일. 경주까지 가는 동안 사과밭을 지날 때 아이들이 모두 열차 밖을 내다보며 ’야! 사과다!“ 하며 소리쳤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 때 사과밭을 처음 본 아이들이 많았다.

  내가 다녔던 전주여중과 전주여고는 지금 전주 리베라호텔 자리에 있었다. 근 50년 전 일인데 엊그제일 같기만 하다. 매일 지나는 지금의 6차선의 자동찻길이 기찻길이었다. 학교 운동장은 아래였고 기차 길은 높은 둑이었다. 기차가 지날 때면 일제히 올려다보면서 아이들이 부르는 우스개 노래가 있었다. 전주 사람을 웃기는 노래였다. 전북대학교 문리대 건물 하나가 생겼을 때, 졸업 사진을 찍기 위하여 코스모스 우거진 새로 생긴 대학에 한 번씩은 다 다녀오기도 했다. 왜 그때는 철길로 걸어 다닐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두 레일 위에서 서로 손을 잡고 걸었던 적도 있었고, 침목을 세며 걷기도 했었다. 지금 한벽루 근처의 작은 터널도 그 당시는 철길이었는데 거기에서 모두 한 번씩 사진을 찍었다.

 

  서울 언니 집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부산에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조카들과 자주 경부선 기차를 탔었다. 아이들은 긴 기차여행 중에 먹을거리를 준비하는데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구운 오징어와 고추장이었다. 열차 안에서 거의 하루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안방에서처럼 편안하게 지낼 채비를 하였다.


  전주에서 살게 된 지 벌써 37년째다. 서울 경기 쪽에 자녀들과 친정 자매들이 살기 때문에 나는 자주 서울행 기차를 탄다. 기차요금을 많이 할인해주기 때문에 편하고 저렴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요즈음은 미리 좌석을 예매하니 안전하고 편하다. 책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생각나는 글을 메모하기도 한다. 눈이 피로하면 차 창 밖의 풍경을 즐기기도 하면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는 풍경과 함께 지난 일들도 회고한다.

 
   기차는 기찻길로 자동차는 자동찻길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길이 아닌 길을 갈 수는 없다. 우리 인생도 저마다 가야할 자신의 길이 있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다보면 여러 갈래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 정상에서 만나듯이, 그리고 정상에서는 올라온 모든 길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 도중에 내리거나 중단해서는 자기의 유일한 길이 좋았다는 것을 모른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탔으면 서울에서 내려 그곳에서 볼 일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인생 열차는 중간에서 갈아타기가 쉬운 게 아니다. 때때로 길을 잃어 새로운 풍광과 풍물을 만나는 재미도 있다. 여가를 이용한 여행이라면 그런 즐거움이 있겠지만 단 한 번의 인생길은 되돌릴 수가 없다.

  여행에는 반드시 목적과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은 더욱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 그것을 이루어내야 한다. 언젠가 기차여행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가 오면 마지막 열차에서 다음 하늘로 오르는 은하철도 999호로 갈아탈 수 있으면 좋겠다.

  기찻길 옆 작은 도서관은 기차소리 때문에 책 읽는데 불편하지는 않다. 옛날에는 기찻길 옆에 살면 형제자매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밤마다 들리는 기차소리 때문에 부부가 밤중에 자주 잠이 깬 탓일 것이다. 이제 우리 동네 기찻길 옆 작은 도서관도 낭만적인 추억을 많이 쌓아가게 되려니 싶다.  (2009년 10월)

 

 

 

26

아름다운 통일을 위하여

 
서울 1945 이후

  삼족오(三足烏)가 다시 비상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와 삼족오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던 우리에게 갑자기 한꺼번에 고구려가 몰려오고 있다. 지상파 방송 세 채널에서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주몽'과 '연개소문'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조영'이 그것이다. 중국이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위하여 대규모 고구려 왕성 정비에 집중했고,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작업인 동북공정에 착수하여 대대적 홍보에 나서게 되자 우리나라도 다급해진 것이다. 뒷북치는 일 같지만 아직 늦지 않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 55년 동안 우리는 고구려를 잊고 있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난 그 해,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버지는 경남 진주에서 막 부산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북에게 진주성을 빼앗기기 직전에 부산으로 오시게 되어서 구사일생이 된 셈이었다. 남쪽 끝에 있으면서 어디로 피난을 가는가 하고 어린 나이에 의문스러웠다. 어찌된 셈인지, 우리는 트럭에 짐을 싣고 개성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또 다시 아버지는 개성으로 발령을 받으신 것이다. 그 때가 소위 9.28 서울 수복 때였다. 그 난리 통에 가족을 다 데리고 가셔야 했던 아버지의 입장을 안 것은 내가 어른이 다 되고서였다. 아버지는 친척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으셨다. 다시는 국군이 밀리지 않을 확신을 가지셨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의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때 진주고보를 다니셨던 아버지는 수학여행을 금강산으로 가셨다. 그 금강산에 다시 가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어찌 두 달 후에 중공군이 개입하여 후퇴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인가. 우리는 맨 몸으로 1.4 후퇴의 행렬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그 개성을 그리워한다. 단 두 달 머물다 온 그도시를.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는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었다. 남쪽은 마치 섬처럼 대륙과 떨어져 북쪽을 외면하고 살았다. 북한 공산당들은 멸공해야 할 대상으로 교육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멸공 포스터나 멸공 표어 짓기 등이 초등학교 때의 그림 그리기나 글짓기가 아니었던가. 초등학교를 기억한다면 내게는 전쟁시 병원으로 쓰였던 본교 건물과 부산 구덕산 기슭의 천막교실만 생각날 정도이다.
   반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예술 장르에 그 전쟁이 소재가 되었던가. 그럼에도 우리 현대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실체에 대하여 잘 몰랐다. 그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왔음에도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면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오류 속에 살아오지 않았을까. 2006년에 KBS에서는 그 현대사를 조명할 수있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서울 1945. 나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입장에서 안타까워하며 재미있게 보았다. 우리 세대가 잘못 알고 있는 편견과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신세대에게는 올바르게 그 시대를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따뜻한 인간애로 남북을 바라보는 관점이 좋았다.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고 민족을 위하는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이념을 달리하는 것이 우리를 그렇게 바다 가운데 섬처럼 살게 했던 것이다.
   남북의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교류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저으기 놀랐다. 북쪽의 사람들이 TV에 나올 때나남북 친선 경기가 있을 때, 북쪽의 응원단이 왔을 때, 어머! 우리와 똑 같구나! 어쩜 저럴 수가! 신기하기만 하였다. 우리가 서로 그렇게 적대시하고 타도해야만 하는 상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뇌되었던 결과였을까. 그만큼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드디어 사상 처음으로 지난여름 평양에서 북한의 국보들이 내려오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간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의 교류를 꾸준히 희망해왔으며, 그 결실로써 북한이 자랑하는 중요 문화재 90점이 출품되어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남북 유물들이 통일된 한 공간에서 뜨겁게 해후했다. 전시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가슴이 뛰는 듯 흥분을 느꼈다. 마치 55년 전 개성에 묻고 내려와야 했던 내 부모님의 유물이 돌아온 것 같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헤어져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궁금해하던 평양에 온 것 같았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민족사 전 시기에 걸친 대표적인 유물은 북한에서도 외부로 나들이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해방 이후 북한은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이 우리 고조선의 역사를 신화화한 작업을 극복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보존된 '고려 태조 왕건상'이나 중국 원나라의 라마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아 온몸을 장신구로 화려하게 꾸민 대리석 '관음사 관음보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발해의 웅비에 관한 유적 그리고 남한에서도 늘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조선의 작가들의 작품을 북한에서도 공유하고 있었다.마지막으로 '평양성도(平壤城圖)' 앞에서 나는 배회하였다. 평양성 안팎을 그린 회화 식 지도였다. 회화 식 지도는 조선 후기에 걸쳐서 유행한 듯하다고 한다. 평양, 진주, 전주 등 유명한 명승지가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평양성도는 여러 본이 있다는데, 그 중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도 소장된 것과 공통된 점이 많다고 한다. 고구려의 전성기 때를 연상하게 하는 평양성과 오늘의 평양 사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공을 잊고 대동강변을 거닐고 있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
   너무도 여실한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였다. 분단된 남북이 같은 역사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동질성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금방이라도 이념의 벽이 무너질 듯한 통일의 당위성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성

  

   오늘 다시 그 평양성을 눈으로 밟고 다녔다.

   고구려 역사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맞춰, 남북 역사학자의 고구려 유적 공동답사를 통해 고구려 역사, 문화의 역동성과 계승의 문제를 조명한 'KBS 스페셜'이다. 평양의 일부는 보도를 통하여 단편적으로는 알 수 있었다. 고구려의 유적인 산성과 고분을 간접적으로나마 답사하며 전성기 때의 고구려의 생활상을 상상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영상으로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 천도하였다는 평양성. 왜 평양성이었던가.
  "성의 북쪽은 금수산 최고봉인 모란봉과 만수대, 청류벽 등의 절벽을 끼고 있으며, 동, 서, 남에는 대동강과 그 지류인 보통강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평양성은 북쪽으로부터 북성·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으로 이루어진 복곽식 산성으로, 성벽의 바깥 둘레가 약 16km, 각 성곽 사이의 성벽까지 합치면 무려 23km에 달한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평지성과 산성으로 이루어진 도성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평상시에도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양성은 전통적인 도성 방어체계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새로운 형태의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회화 식 평양성도의 설명이다.
그림으로 평면만 보았을 때는 그 구석구석을 들여다 볼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직접 답사한 영상을 보게 되니 생생한 유적의 현장에 있는 것 같았다.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조명한 설명까지 곁들여서 고구려의 발자취를 같이 걷는 듯 했다. 고구려가 정말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500여 년 전의 고구려의 전성기를 영상으로 복원해서 볼 수 있어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평양에 가보고 싶다.
절반이 산성이고 절반이 무덤이라는 고구려. 평양성은 산성의 나라 고구려가 만든 철옹성으로, 북한의 국보유적 제 1호다. 한양의 관문인 남대문이 우리 국보 제 1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평양성은 고려, 조선을 거치면 개 보수를 했지만 전성기 고구려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서울의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이 아름답듯이 평양성의 대동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평양을 에워싸고 있는 대동강이 또한 아름다웠다. 평양시 자체가 하나의 성이었다. 언제 평양엘 가서 을밀대에 올라 사방이 확 트인 평양을 내려다 볼 수 있을까. 그립기만 하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살아서는 결코 평양성을 둘러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동안 민간교류의 결과로 금강산은 관광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아쉽다. 나에게는 전설로만 남을 뻔했던 금강산보다는 개성과 평양에 더 가고 싶다.


 

 

고구려 고분벽화

  

 

  1500여 년 전 위대한 고구려인이 죽었다. 땅 속 돌무덤에 묻혔고 천장과 사방 벽에 그림을 남겼다. 기록은 왜곡이 될 수 있지만 그림은 거짓 없이 1500년 전을 증언한다. 고구려 벽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왜 중요한지를 몰랐다. 고구려 벽화 모사본의 전시회를 본적도 있으며 박물관에서 고분 모형 속 고구려의 벽화를 보았지만 그들의 문화와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KBS 스페셜을 통하여 그 벽화의 의미와 정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벽화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다시 고구려 사람이 살아나서 우리에게 그들의 정신과 문화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도굴되고 파손을 당하였지만 벽화를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고구려의 색채와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영원한 정신성이 담긴 그 벽화를 가져갈 수는 없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고분은 중국 집안 권이 30기, 평양 권은 73기로 중국이 다수일 것이라는 예측을 뒤집는다. 북한은 벽화 중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벽화 전시회에서도 내가 인상깊게 보았던 것은 사신도(四神圖)에 나타난 상상의 동물이었다. 스페셜 방송의 고구려 벽화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림 앞에만 서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을 부릅뜬 백호는 꼬리에까지 힘이 넘친다. 남쪽을 지킨다는 날카로운 부리와 힘이 뻗어나는 벼슬을 가진 주작. 6세기에 그려진 소나무. 소나무 그림으로써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그림이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의 소나무 사랑은 그때부터였을까. 두 그루의 소나무는 소나무 그림 중 최고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산수화에서도 뛰어난 고구려인의 소질을 엿보게 한다. 북쪽은 현무 한 쌍, 거북은 음(陰)을 뱀은 양(陽)을 의미한다. 청룡은 동쪽을 지키며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 무덤을 쌓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 것은 그 때부터였던가 싶다. 이렇게 강서대무덤 안은 벽화의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그것은 회칠한 벽에 그린 것이 아니라 판석 위에 직접 그림으로 생동감이 넘치기 때문이다.특히 눈과 입을 강조하여 무덤 입구로 향하여 돌진할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이 압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돌 깎는 기술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4년에 북한의 철령에서는 쇠말 54개와 4개의 청동 말의 모형을 발굴했다. 조선력사박물관에 전시된 기마군단은 3개 대열로 편성되어 남쪽 방향으로 진군하는 모습이었다. 일반에서도 사신은 방위신을 제시한다는데, 고구려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실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전투 부대가 사신의 돌봄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동쪽은 청룡을 서는 백호, 남은 주작을. 그래서 군대의 대열 앞쪽에 주작을 배치하는 것은 군대가 남쪽을 향하여 진군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으로써가 아니라 실제로도 사신의 수호를 받는다는 믿음을 실물로 만든 첫 번째 사례라고 볼 수 있다는 것. 벽화에 그려진 사신은 실제로 그들 곁을 지켜주어 반 만 년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광활한 중원의 땅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안악 3호의벽화에도 철갑기병을 앞세운 다음 차례로 창수, 공수, 부월수로 이어지는 대행렬도를 볼 수 있다.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평양 곳곳의 고분의 벽화에 그들만의 정신세계를 그려 넣었을까. 한 고분에는 감실이 있었다. 감실은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죽은 자를 새로운 세상으로 보내는 의식을 했다는 뜻이다. 예불도에서는 부부가 여래 앞에 절을 하는 모습이다. 천장에 그려진 수많은 연꽃은 환생을 기원하였다는 뜻이리라. 하늘 민족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고구려인은 천장의 별자리에도 나타난다. 북두칠성은 죽음을 의미하고 남두칠성은 삶을 나타내어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았다. 하늘 세계는 신선이 산다는 세상으로 알고 그들도 죽으면 신선이 된다고 믿었다. 죽으면 또 하나의 이상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죽은 자를 영혼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신은 무덤을 지키고, 사신이 살아 움직이는 무덤 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였다. 무덤 안에서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고구려인의 참 모습이 살아 숨쉰다.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여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숭고한 의식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것이 세계인이 주목한 북한의 제 l호 세계문화유산에 '고구려'라는 이름을 새긴 이유였다.

 

 

역사문화전쟁

  

  중국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고구려의 유적은 국내성을 포함하고 있어 앞으로 역사전쟁이 확대된다면 고구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여 벽화에 남긴 고구려의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하여야 할지 생각하여야 할 때이다.
   기술이 발달하여 우리는 그 유적만으로도 1500년 전의 고구려인을 오늘날 만날 수 있게 되고 그 정신을 알 수도 있게 되었다. 벽화에 나타난 말타기 대회를 보면 알 수 있듯, 143번의 전쟁을 치른 고구려는 언제나 전쟁에 대비하여야 했고 평화시는 그 속에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얼마나 많은 전사자들이 있어 죽음을 애도했으며, 얼마나 많은 장군들이 벌판에서 사라졌던가. 이름도 장군총의 돌무덤으로 남아 장군과 전사들의 넋이 중국의 높은 하늘에 서려 있으리라. 그 넋들이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강건하기를 기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인은 궁궐 짓기를 잘 하였고 돌 쌓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삼국지의 기록이 말한다. 고구려의 역사는 궁궐 짓고 평지에서부터 겹겹이 산성을 쌓고, 돌무덤을 만들다가 끝난 역사 같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성기의 평화시에 뛰어난 문화와 예술의 경지를 펼쳤다는 것은 얼마나 높은 기상이었던가. 주름치마를 입고 얼굴에 곤지를 바른 귀부인과 박쥐모양의 우산을 들고 따라가는 시중들의 모습에는 고구려인의 얼굴 표정, 복식 등이 그대로 살아 있다. 안악 3호분의 벽화에는 1500년 전의 부엌 살림살이와 외양간 등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릉의 벽화에 나타나는 645개의 연꽃은 신격화된 위대한 시조 왕의 환생을 기원하였으리라. 오늘날까지 동명왕릉에는 백성들이 개인적인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도 끊임없이 찾아 든다고 한다.
그래픽 영상기술이 지하 궁이었다는 안악 3호 고분을 복원하여 우리의 고구려에 대한 상상력을 일깨운다. 애니메이션으로 그때의 생활상도 생생히 나타낼 수 있어 고구려가 부활하여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게 한다. 역사 공부시간에 외었던 이름들. 그 전설의 이름들이 구체적 역사 속의 생활인으로써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보게 된다. 있음직한 사실을 상상해서 그 때 그 시절의 사람으로 돌아가서 같이 호흡하게 한다. 그 모든 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과 기록을 통하여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700년이라는 세월, 전성을 누렸던 고구려는 결코 사라진 역사가 아니다. 고구려를 이어받은 발해가 300년의 역사를 이어 왔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흡수한 고려가 고스란히 그 문화를 이어 발전했고 조선을 거쳐 오늘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고조선 이전의 역사까지 거슬러 유적을 발견한다면 그 유구한 역사 속의 남북이 갈라져 있었던 반세기는 우리의 역사문화를 갈라놓을 시간이라고까지 할 수도 없다.

   한민족의 반 만 년의 역사 중심에 있던 700년의 고구려 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시점에서 마땅히 남북이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야 한다. 한 하늘 아래 하나인 땅을 어찌 갈라놓을 수 있는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임에 틀림없음을 우리는 바로 인식하여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사랑함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아니 지금이야말로 '빨리빨리' 정신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닐까. 전쟁으로 얼룩진 인류사에 역사와 문화까지 전쟁을 해야 하겠는가. 그 옛날의 고구려, 천손 민족의 상징이었던 삼족오의 깃발을 중국의 하늘에 날게 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고구려인들이 벽화를 그렸듯이 통일의 기원을 새긴 삼족오를 새겼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 평화의 물결이 넘실댈 때 고유한 개성(個性)이 빛나는 각 나라의 문화예술이 하나된 인류의 미래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2007년 l월 5일)

[제4회 동상작] 아름다운 통일을 위하여 (대학/일반 부문) | 공모전 당선작  
‘KBS 스페셜 고구려의 부활’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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