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유쾌한 인문학

차보살 다림화 2010. 1. 5. 00:24

'유쾌한 인문학'은 상쾌한 저녁 바람이었다

                                                                                             

 

걷고 싶은 길, 돌아보는 문명
-유쾌한 인문학 2탄 - 

 

 

    평생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상급학교에 가기 위한 입시를 위하여 공부해야 한다거나 또는 직장을 얻기 위하여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공부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할 수 있다는 것이 늘그막에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인 것 같다.
   유쾌한 인문학이라! 매주 화요일 저녁 시간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전주시평생학습센터로 향하는 발걸음도 유쾌하였다. 제 2탄의 강좌부터 수강하게 되었다. 신록이 무르익어 갈 무렵에 시작한 '유쾌한 인문학' 강좌가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로 익혔던 열매와 단풍들이 모두 제 자리에 돌아가고 겨울 나목이 푸르른 지난날을 기억하듯 '유쾌한 인문학'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걷고 싶은 길, 돌아보는 문명', 이 얼마나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며 잘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잘 모르는 내용인가. 나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행로만 해도 그랬다. 이번 강좌 내용은 모두 내가 걸어온 길의 반성이기도 했으며 돌아본 나의 인생의 길이 인문학적으로 어떤 길 위에 있었으며 어떻게 걸어온 길이었는지를 복습하는 일이었다. 잘 모르고 지나쳤던 길과 지나왔으면서도 의미도 모르고 지나온 길을 다시 걸어보는 길이었으므로 참으로 흥미로웠고 다시 걷고 싶은 길이었다. 우리 앞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지만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은 한 길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찾고, 길을 가고 있는 중에도 산모롱이를 휘돌아 나 있는 굽은 길을 보면 그 길을 걷고 싶은 것이다.
  두 달을 공부한 후 마무리를 답사로 마친다는 것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걷고 싶은 길, 그전에 걸어볼 수 없었던,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길을 걸어 보고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일은 다음에 펼쳐질 새 길을 내다볼 수 있는 준비를 위하여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내가 몸담고 있는 가까운 지방, 전북지방을 중심으로 해 볼 수 있었던 진지한 답사는 그래서 큰 의미로 다가왔다. 물길 따라 걸어본 강경 포구와 춘포 역 그리고 전주군산 간의 벚꽃 길의 의미를 뒤돌아보았다.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용 댐인 대아저수지와 고산에서 옥고 저수지까지 65키로미터 대간선수가 만들어졌다. 뱃길이 운송 수단이었던 때 융성했던 강경포구와 춘포역은 일제의 식량공급전진기지로 농민은 등이 휘었고, 대아저수지에서 옥구 불이농장까지 긴 수로를 흘러내려야 했던 강물은 온 힘을 다해 제 몸을 쥐어짯던 것이다. 물길 대신에 훤칠한 신작로가 곧게 뻗어나고 곡선으로 흘러야 할 물길은 흐르다가 말라가고 있었다.

 시대가 일구어온 문명의 길이 진정 앞으로도 우리 민족에게,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행복의 길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비비정

 

 

 

 

 강경포구  옛수문

 

 

 

 금강에서 옛 강경포구로 내려오는 물길

 

 

 일제 시대에 축도된 대아저수지 곡선 댐. 마침 물이 빠졌을 때여서 휘어진 댐을 볼 수 있었다.

 

 

 

 

 

 

 


상징과 염원의 세계, 불교미술
- 유쾌한 인문학 제 3탄 -

 

 

  '상징과 염원의 세계, 불교미술' 은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평소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약간의 기본 상식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기회였다. 불교미술의 심미안이나 건축미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으므로 막연하게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했다. 이 강좌로 인하여 더욱 그 심미안을 열게 되어서 기뻤다. 마무리 답사로서 전북지방에 있는 부안의 개암사와 내소사 그리고 귀신사는 가 본 곳이기는 하였지만 불교 건축을 공부한 후여서 다시 보는 문화유적은 새로운 의미였다. 답사하는 날 뜨거운 태양 아래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답사의 묘미는 뜨거운 여름날이어야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가 간 목적지가 절집이라면 더욱 그렇다. 오르막길을 오르기도 하고 산문을 지나 드디어 나타나는 본전 앞에 서는 기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이 싹 가시면서 가슴이 열리는 맛을 한꺼번에 느끼는 것이다. 개암사 대웅보전 앞에 선 기분이 그랬다. 파란 하늘을 인 울금바위에서 뛰어내렸는지 아니면 큰 바위를 쩍 가르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내려온 봉황이라 해야 할지. 개암사의 대웅보전은 막 날개를 펴는 전설의 붕새 같았다. 아침 햇살이 바로 처마 밑의 공포조각의 미감을 유감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 마리 새가 활짝 열리는 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어진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의 청량함과 그 길옆의 연못에서 만난 오롯한 수련. 수련의 청신함이 있기에 여름이 정겹다.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수런거려도 수련 옆에 앉으면 마음은 벌써 염화시중의 부처의 마음 속에 들지 않을 수 없다. 목을 길게 내민 연꽃보다도 수면 위에 얼굴만 내민 수련은 청초하면서 요염하며 수줍어하면서도 대담한 향을 머금고 있다. 청정도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수련이 있다. 절집에서는 요사스런 모양이나 자극적인 색깔은 사용하지 않는다.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도 청정하다. 그러나 산문으로 가는 길에는 수련이 피고 있다.  세속을 향한 마음에 빗장을 질러야 하는 수도승에게는 보고도 마음 뺏기지 않는 용단심을 기르는 기회가 되리라.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안고 있는 연심을 닮아야 하리라. 연못에서 부처님의 상징인 연심을 그려보았던 날이었다. 대웅보전 꽃창살 무늬는 수행자들의 미소였을지…. 내소사 대웅보전의 불상 뒷벽의 백의관음은 뜻밖의 환희심을 품게 했다.

 

 

 내소사 대웅보전

 

 

 

 꽃창살

 

 

 

 백의관음보살 벽화

 

 

 

 김제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

 

 귀신사 대적광전 앞의 배롱나무

 

 

그리고 다음 도착한 귀신사에서는 믿음으로 귀의함으로써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김제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는 친정처럼 자주 갔었던 절집이었다. 차(茶)하시는 스님께서 주지로 계시는 동안 우리는 茶道를 공부하고 차를 만들고 했던 곳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 날은 문화유적 답사 차로 갔었기에 전에 몰랐던 건축에 대한 의미와 절집의 역사까지 알게 되었다. 歸信寺는 통일신라 때는 금산사보다 규모가 컸으며 금산사가 오히려 말사였다는 것. 그래서 진리의 상징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대적광전을 세웠다. 통일신라 후에 고려 때가 되어서 다시 백제 사찰인 금산사가 융성해진 것이다.

 

 

 


 

 

 

 

 

 

 

 

 

 

 


동아시아 대중문화, 길을 묻다
- 유쾌한 인문학 제 4탄 -

 


 
  길 위에서 우리는 늘 길을 묻는다.  어느 덧 달려온 길. 어느 만큼 걷고 달리고 가늠하다가 또 하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제 4탄 '대중문화사'  '동아시아 대중문화, 길을 묻다',  종교의 길을 지나고 대중문화의 길에 섰다. 나이 들어서 대중문화에 접하는 일이 드물다. 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인지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 지를 가깝게 느끼게 해주었다. 자주 영화를 보는 기회도 없는 때에, 강의를 통하여 동아시아 대중문화를 이해하게 되어서 현재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영화와 대중음악을 통하여 사회상을 이해하는 일은 생경했다. 중국의 영화와 대중음악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의 현대사의 줄거리를 따라잡는 일은 숨가쁜 일이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라고 생각되었다. 중국이라면 나는 늘 고대 중국의 문화사를 생각하면서 고향처럼 그리워한다. 어쩌면 중국의 송나라가 조趙씨의 나라여서 인지도 모른다.  고대 중국 당,송,명,청나라 등의 인물이나 유적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현대 영화와 음악을 통해서 알게 된 현대중국이 너무나 신기하였다. 우리가 조선을 넘어 일제를 겪어낸 후 현대에 도달한 것처럼 중국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중국과 북한은 철의 장막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북쪽이 막힌 섬나라 같이 살지 않았는가.
 

  '대중문화, 길을 묻다' 의 답사는 목포였다. 목포라면 누구나 '목포의 눈물'로 대표되는 가수 이난영을 떠올린다. 그만큼 '목포의 눈물'은 한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로 끝난 것이 아니라 민족의 노래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수 이난영은 우리 민족이 겪은 식민지의 애달픈 사연을 노래했기 때문에 '목포의 눈물'은 한 여인의 정한情恨이자 민족의 삶이었다. '목포의 눈물'과 이난영은 노래와 가수가 일체화하여 목포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가 목포의 가수로 공고하게 자리를 굳혔다는 것은 일제시대에 발표된 대중가요 가운데 목포를 제목에 사용한 '목포의 눈물'과 '목포의 추억', 그리고 '목포는 항구' 등 세 곡 모두 이난영이 불렀기 때문이다. 49년의 그녀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처럼 파란만장하게 펼쳐져서 그의 사후(1965년 사망) 영화화되기도 했다. 난영가요제도 개최되었고 일시 중단된 가요제는 1991년 목포문화방송이 주최하여 현재 20회에 이르고 있다. 목포시의 문화인들은 경기도 파주에 있던 그의 무덤을 목포의 삼학도로 이장하였다. 삼학도의 이난영의 나무는 배롱나무였다. 그 나무 아래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의 가사가 새겨진 선돌이 두 개 서 있다. 그 자리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게 장치한 기기가 있어 단추를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온다. 삼학도에서 듣는 목포의 눈물은 그 시절의 애환을 느낄 수 있어 애틋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을 정도였다. 이난영의 삶은 영화와 방송, 소설 연극에서도 묘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난영의 모습을 정립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작업과 함께, 보다 객관적이고 공적인 영역에서 이난영을 '목포의 눈물'로 상징화하고 기념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969년 '목포의 눈물' 노래 비碑 건립이었다. 1960년대에는 대중가요를 노래 비로 새운다는 것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건립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으며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 비였다. 유달산 팔각정 아래 노래 비에 올라가서 다시 목포의 눈물을 들으면서 노래 비에 새겨진 가사를 읽을 수 있었다. 노적봉을 바라보면서.
 

 

 

 갓바위

 

 삼학도에 있는 이난영 나무와

노래 비 앞에서

 

 

 

  유달산 중턱에 '목포의 눈물' 노래 비가

 

 

 

  沙工의 뱃노래 감을거리며/ 三鶴島 파도 깁히 숨어 드는 때/ 埠頭의 새악씨 아롱저진 옷자락/ 離別은 눈물이냐 木浦의 서름
  三栢淵 願安風은 露積峰 밋헤/ 任 자최 宛然하다 애닯흔 情調/ 儒達山 바람도 榮山江을 안으니/ 任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2연의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밋헤'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가사로 불리게 된 사실은 의미 깊은 일로 회자되어 우리 민족의 한을 더욱 사무치게 해왔다.
 

  목포은 항구였다. 1920년대 말 번성했던 목포항을 짐작할 수 있는 거리를 걸어 보았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었던 건물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74호로서 중앙동 2가에 있다.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역할을 담당하며 일제의 침략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여 민족의 수난사를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일제의 영사관으로 쓰였던 빨간 벽돌집은 근대건축미를 갖춘 근대적 색깔로 유럽풍의 미감까지 풍겼다. 건물 뒤쪽의 방호 굴은 흘러간 역사의 자국으로 남아 우리 민족의 멍울처럼 보였다.
  목포 문화원 자리를 뒤로하고 내려오자 바로 우리 앞의 길이 우리나라 국도 1호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길 가운데 둥그런 표시판이 박혀 있었다. 그 역사적인 시발지점을 두발로 짚어보는 감회를 맛볼 수 있었다.

 

 유달산에서 보이는 삼학도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묙포 거리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일제의 영사관 건물 한 때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

 

 영사관 뒤 땅굴

 

 

 

 

 

 

 

 

 

 

 

 

 밥상문화의 향연
-유쾌한 인문학 제 5탄 -

 

 


  이제 우리가 걸어본 인문학적 길을 거슬러서 되돌아본다. 그 길 위에서 혹은 머무르면서 우리가 일으켜온 삶을 지탱케 해준 양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무엇을 기르면서 먹고 마시고 했는지 알아볼 차례가 된 것이다. 하여 다음 5탄의 강좌는 '밥상문화의 향연'으로 이어졌다. 끔찍했던 고대의 식인종들의 이야기까지 들추어내어서 살펴본 밥상은 이 문명의 시대에까지 오는 동안 무수한 전쟁 향연과 무작위의 탈취 행위를 벌여온 것 같았다. 현대에 일어나는 자연의 재난은 지구촌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걸어온 문명의 길은 자연을 깎아 만든 물질의 풍요였다. 이대로는 안전하게 밥상의 향연을 벌릴 수가 없는 지도 모른다. 인류 최대의 풍요를 누린다는 이 시점에서 이번 인문학 강좌는 우리가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제 심도 있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화폐 가치보다 삶의 질을 높여 인간다운 삶의 향연, 참 삶의 길이 펼쳐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밥상문화의 향연' 강좌의 답사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남도의례전통음식보존연구회'를 방문하고 전통다식 만들기 체험이 있었다. 최영자 (무형문화재 제 17호)의 연구소였다.
  담양으로 내려가는 길은 온통 은빛 물결이었다. 혼자라면 눈 구경길이 어려웠을 것이다.
무형문화재이신 최영자씨의 마중을 받은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따뜻한 방에서 각가지 전통 문양의 다식판에 우리 고유의 송화가루와 콩가루 등으로 마련한 다식을 판에 찍어 보았다. 맛도 그만이었다. 각자 만든 것을 한 판씩 기념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명인이 차려주신 음식은 정말로 어머니의 밥상다운 밥상으로 포근한 정이었다.  옛날 음식 맛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소박하고 평범한 밥상이 맛깔스러웠다. 직접 기른 유기농 배추와 무로 담은 김치와 동치미가 너무 맛있었다. 고등어 찌개와 시래기 국은 영양 면에서도 손색이 없었다. 재료의 맛 그대로 본래의 맛이 살아 있는 진미였다. 점심 후 인근에 있는 우리 전통 정원인 소쇄원을 눈바람에 산책할 수 있었다.  소쇄 처사도 먹었을 것 같은 그 시절의 음식을 방금 먹고 온 길이어서였는지 이웃 친구 집에 마실 온 것 같은 마음으로 정자의 곳곳을 들여다보았다.
  전주시평생학습센터와 담당 교수진 그리고 진행 담당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2009년 12월 17일)

 

 

 

 

 

 

 

 

 

무형문화재 제 17호이신 최영자 어머님께서 차려주신 밥상

 

 

 

 

 2009년 6월에 불기 시작한 ‘유쾌한 인문학’ 바람은 12월 눈바람으로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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