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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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살 다림화 2010. 4. 25. 12:17

강백년 姜栢年- 1603-1681 호 雪峰. 좌참찬을 지낸 청백리 차인.

지재당 강씨 只在堂 姜氏- 호 只在. 賈島의 시 '只在此山中'에서 두 글자씩 제호
고종 때 김해 기생, 此山 배문전의 소실이 된 시인. '지재당고'에 시 100여 수

구양수 歐陽脩- 호는 醉翁, 六一居士. 中國 宋나라 때 문인. 唐宋八大家의 한사람
최초의 시화집 '六一詩話', 저서'歐陽文忠公集'

권상하 權尙夏- 1641-1721 호 遂菴. 송시열의 수제자, 출사하지 않음.

경봉선사 鏡峰禪師- 1892밀양 출생-91세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서 입적.
13세에 한학을 공부, 15세 어머니 별세하자 16세 통도사(자장율사 창건)에 출가
62세 극락암 선원 조실로 추대됨. 스님의 가풍은 참선과 불학, 염불, 기도, 다도
등 불가의 모든 방편이 한데 어우러진 참으로 깊고도 넓은 화엄의 바다였다.
한국의 근 현대 고승인 혜월, 만공, 용성, 만해, 현암, 제산, 효봉, 동산, 향곡, 전강,
청담, 일타 스님 등과 격외의 편지를 왕래 했는데 그 기록들은 소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성철 스님이 흐트러진 禪風을 진작시킨 분이라면 경봉선사는 중생교화에
진력하신 분이다. 그의 차시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 허공에 흩어지니/ 달은 천강의
물 위에 어려 있고/ 산은 높고 낮아 허공에 꽂혔는데/ 차 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
길이 통했네'

경봉정석 鏡峰靖錫- 1892-1982 속명 金鏞國, 호 경봉.
어려서 한문 공부, 16세 통도사로 출가, 20세 구족계를 받고 전국을 두루 다님.
1935년에 통도사 주지가됨. 시와 글씨에 능해 작품을 남긴 다승이다.
'계수나무 짙은 향기 달빛 따라 피어나고/ 흰구름 떠 흐르는 물가에 멍청히 앉았다네/
겹겹이 싸인 산과 골 사람 자취 없는 곳에/ 손을 만나면 차권하며 맑은 바다 가르치네

경암응윤 鏡巖應允- 1743-1804 속성 민씨, 법호 경암, 15세 출가. 여러 선승의 지도를
받고 정진하여 대종사가 됨. 저서 '경암집'

금명보정 錦溟寶鼎- 1861-1930 성 김씨, 호 금명, 자 茶松,
유가의 적손이었으나 가난으로 15세 송광사로 출가, 여러 큰 스님들에게 배움.
송광사 주지도 지냄. 저서 '다송시고' 등 , 전하는 차시가 70편을 넘는다. 일제하의
어두운 때의 것도 많아서 조선의 차문화가 줄기차게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茶松銘> '솔잎 한 바랑에 차 한 병으로/ 온갖 인연 끊고 절집에 누웠다네/ 결사하여
수행한 옛사람들 우스우니 / 새 지저귀고 꽃핀 것 무슨 방해되리'
'달 지면 촛불 밝히고/ 나무 쪼개어 차 달이네'

금원당 김씨 錦園堂 金氏- 1804- ? 김덕희의 소실, 經史와 시문에 능함.
여인으로 태어남을 한탄 1830년 남장하고 금강산을 유람
그의 별장 三湖亭에서 운초, 瓊山, 竹西, 瓊春 등의 여류 시인들과 시를 읊으며 보냄
'湖東西洛記'를 남겼는데 30여 편의 詩가 있다.

기대승 奇大升- 1527(중종22) 광주 송현동 출생-1572(선조5). 호 高峰
1558(명종13) 대과 1등 급제, 32세에 성균관 대사성 퇴계(58세)를 찾아간다. 이후
장장 8년간 四端七情(본성 仁, 義, 禮, 智/ 감정 喜, 怒, 哀, 樂, 愛, 惡, 欲) 논쟁을
벌인다. 幽居雜詠 15수 중에 詩한수 '해가린 소나무는 장막 같고/ 마루에 이른 대나
무는 발과 같네/ 벽에는 서자徐子의 자리를 달았고/ 꽃은 적선(謫仙:이백)의 처마에
춤추네/ 학을 길들이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차 달이며 시냇물을 더하네/ 사립문 온
종일 닫고 앉아/ 홀로 봉의 부리 뾰족함을 감상하네' 유적지 장성 월봉서원

김간 金幹- 1646-1732 호 厚齋. 우참찬.

김득신 金得臣- 1604-1684 자 子公, 호 栢谷. 진주목사 金時敏의 손자. 시인
급제하여 안풍군에 봉해졌으나 뒤에 화적들에게 살해됨.

김대렴 金大廉- 삼국사기에 흥덕왕 3년(828년)에 사신 大廉이 중국(唐)에서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최초로 심었다는 기록.

김만기 金萬基- 1633-1687 자 永淑, 호 瑞石. 숙종의 장인, 증조부는 사계 장생.
조부는 참판 槃, 아버지 益兼(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자폭). 송시열의 문인.
딸이 仁敬王后로 國舅로 光城府院君에 봉해져, 대제학. 伯父 益熙가 이름난 차인.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자 重叔, 호 西浦. 익겸의 유복자, 萬基의 아우.
삼남의 어사를 지냄. 공조판서, 대사헌 지냄.정쟁으로 유배와 등용 반복.
남해에 유배 때 어머니를 위해 '九雲夢'을 쓰고 배소에서 병사 했다. '謝氏南征記'

김상용 金尙容- 1561-1637 자 景擇, 호 仙源, 成渾의 문인
과거에 급제 벼슬길,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明에 성절사로 다녀와 형조판서 지냄
-우의정, 병자호란 때 왕족을 호종해 강화로 갔다가,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김익겸과 더불어 자폭. 글씨를 잘 썼고, 시조 몇 편이 남아 있다.
이집안의 다풍은 대대로 전승되어 4대 창흡 형제들에게 와서 크게 꽃핀다.
<至月雪水煎茶> 산 동자 눈 맞으며 샘물 새로 길어서/ 돌솥에 활화로 용단을 다리네/
솔소리 내며 향기 피어 뜰에 가득하고/ 한 사발의 산뜻한 풍취가 신선되어 오르는 듯.

김상헌 金尙憲- 1570-1652 자 叔度, 호 淸陰, 尹根壽의 문인, 상용의 아우.
과거에 급제 서인으로 도승지, 대사간, 대제학, 이조. 예조 판서를 지낸 척화파로
청에 두번이나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영의정 역임, 친명파로 글씨를 잘 쓴 차인.
'늙어서 글은 쓰지 않으면서/ 술잔과 찻잔만은 옆에 두며 웃는다네'

김수항 金壽恒- 1629-1689 자 久之, 호 文谷, 수흥의 아우.
服喪문제로 남인 윤선도를 귀양가게한 서인. 좌의정, 청나라 다녀옴. 경신대출척
으로 영의정이 되었다가 己巳換局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됨.
전서를 잘 쓴 차인으로 집안 대대로 다풍을 이어받음.

김수흥 金壽興- 1626-1690 자 起지, 호 退憂堂, 상헌의 손자.
서인, 벼슬은 영의정, 기사환국 때 장기에 유배 되었다 다음해 죽음.
'한가로운 구름과 날아드는 새는 같은 취향이고/ 조촐한 식사에 좋지 않은 차로
편하게 지낸다네'

김시습 金時習- 1435-1493 호 五歲, 梅月堂, 설잠雪岑(非僧非俗), 生六臣의 한사람
성균관 부근에서 출생, 세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에 세종에게 불려가 전지를 받음
13세 까지 대사성 김반 등 스승들에게 사서삼경 등을 배운다. 15세에 어머니가 죽자
3년 시묘살이를 한후, 훈련원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 삼각산 중흥사에서 학문에
힘쓰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보고 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설악산 오세암으로 출가
역마살 만행하다 책을 구하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간곡한 권유로 내불당에서
불경언해를 돕다 현실에 절망 31세 경주 금오산으로 들어가 매월당을 짓고 7년을
은거한다. 거기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시편을 모은 '유금오록'을 남김.
그후 서울로와 10여년 보내다 47세에 안씨를 맞아들여 환속 한다. 2년 만에 '폐비윤
씨' 사건이 나자 다시 방랑길- 마지막 찾아든 곳 충청도 공주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
茶詩 <養茶> "해마다 차나무 새 가지 자라는 데/ 그늘에 키우느라 울을 엮어 보호하여
/ 육우의<다경>에는 색과 맛을 논했는데/ 관가에서는 창기만을 취한다네/ 봄바람 불
기전에 싹이 먼저 피고/ 곡우 돌아오면 잎이 반쯤 피어나네/ 조용하고 따뜻한 작은
동산을 좋아하니/ 비에 옥 같은 꽃 드리워도 무방하리니"
<茶詩> 솔바람 불어오니 차끓이는 연기/ 팔락팔락 가로 비껴 물가에 떨어지네/ 동창
에 달 떠도 잠 못 이루고/ 병 들고 가서 찬 샘에 물 긷네/ 날 적부터 티끌세상 싫은 걸
스스로 괴이쩍게 여겨/ 입문하여 봉鳳자 쓴 게 벌써 청춘 다 지나갔네/ 차 끓이는 누
른 잎새 그대는 아는가/ 시 쓰다 숨어 삶이 누설될까 두렵네.

김육 金堉 1580-1658 본관 청풍, 자는 백후伯厚, 호는 潛谷, 선조 38년(1605)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실학자이자 개혁정치가, 기묘사화 때 조광조
와 함께 사화를 당한 대사성 김식의 3대손이자 대쪽 같았던 참봉 金興宇의 아들이다.
水車를 만들고, 화폐를 유통시키고, 수레를 제조, 時憲曆을 제정,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인 유원총보類苑叢寶를 편찬하였다. 여기에 茶편이 있는데 다경의 육우,
차의 효능, 차의 일화 차세茶稅에 얽힌 얘기 등 총 1730여자로 기록돼 초의보다 2백
여년 전에 차를 소개해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정보를 주고있다. 이목의 茶賦와 초의
선사의 동다송이 차를 개인의 정서에 접목시킨 문학적인 다서라면 김육의 차에관한
다양한 지식은 사전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가평 잠곡에 晦靜堂을 짓고 은거,
익산 함라면에 불망비가 있다.

김이안 金履安- 1755-1845 호 三山齋. 판서, 지중추부사

김익희 金益熙- 1610-1656 자 仲文, 호 創注. 沙溪 長生의 손자.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했고, 대사성, 이조판서를 지낸 차인.

김장생 金長生- 1548(명종3)한양출생- 10대에는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고
20세쯤에 대사헌을 지낸 아버지계휘의 권유로 이이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후 창릉참
봉을 지내다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를 다녀온 뒤 정산현감, 다음해 임진왜란 때는 호
조정랑이 되어 명나라 원군의 식량조달을 담당, 전란이 끝난 뒤 유성룡의 천거로 宗
親府典簿가 되고, 2년 후 1602(선조35) 익산군수로 나갔다가 북인이 득세하자 사직
하고 연산으로 내려간다. 정묘호란 때는 80노구를 이끌고 兩湖號召使를 맡아 의병을
모으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했다. 후에 형조참판 한달만에 낙향하여 예학 정립과 제
자 양성에 전념한다. 호 沙溪. 학자였지만 서인의 영수격, 저서: 상례비요, 가례집람,
전례문답, 의례문해 등 거의 예학에 관한 것, 그가 제자를 양성한 연산 돈암서원은
우리나라 3대 서원 중 하나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되었던 곳이다. 대표 제
자로는 우암 송시열. 가례집람에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삭망 차례 때 신주 오
른쪽에는 술잔을, 왼쪽에는 찻잔을 놓는다고 해서 茶禮인 것이다. 또한 예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祭器圖에는 찻잔과 차선, 茶托, 茶碗
등 다구들이 구체적으로 나와 차에 대한 지식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 金正喜- 1786(정조10)-1856(철종7). 호 阮堂, 秋史, 禮堂, 詩庵, 老果, 農丈人,
天竺古先生, 勝雪, 苦茶老人,覃齋, 茶門, 一爐香室 등 백여개, 벼슬 이조참판. 자 元春
서화에 뛰어나 拙撲淸高한 추사체 대성. 저서 阮堂集, 金石過眼錄, 覃연齋詩稿 등
병조판서 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金魯永의 양자가 된다. 아우 命喜도 차인
24세 때 동지부사인 아버지 따라 연경에 갔다가 청의 巨儒 翁方綱과 阮元을 만나
고증학에 눈을 떴으며, 조선 金石學의 태두가 된다.(신위, 권돈인, 전기 등)
그는 실학을 주장, 경학, 문자학, 사학, 금석학에 심취해 秋史體를 창안했다.
1819(순조 19)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벼슬길. 부친 노경이 윤상도의 옥사
에 배후조종을 한 혐의로 추사는 고금도로 유배 갔다 순조의 배려로 해배 되어 판의
금부사로 복귀, 이후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 역임하다 헌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윤상도 사건이 재론되어 1840(헌종6)-1848(헌종14) 까지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
유배길에 일지암에가서 하룻밤-초의는 덖은 차를 품고 제주도에 세번이나 다녀온다-
또한 역관 李尙迪이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에게 歲寒圖를 그려줌.
1851(철종2) 영의정 權敦仁의 사건에 연루되어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아 또다시 함경
도 북청으로 2년간 유배. 돌아와 부친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한다.
유적지- 예산 추사고택, 봉은사 편액 [板殿] 글씨는 古拙美 넘치는 죽기 3일전 쓴 것.

김종직 金宗直- 호 점畢齋, 도학의 정맥을 이은 사림파의 宗祖로 불린다.
함양군수 시절 백성을 위해 조성한 官營(1431-1492) 차밭 만들어.
'신령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코자 하는데/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다/
이제야 두류산(지리산) 아래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네'

김창집 金昌集 형제들- 1648-1722 영의정, 辛壬士禍 때 사사. 金壽恒의 맏아들.
김창협 金昌協- 1651-1708 자 仲和, 호 農巖. 三洲. 李端相의 사위
이조정랑, 교리, 대사간, 영풍부사. 문학과 유학에 깊었다. 기사환국 때 영평에 은거.
'오늘 어이하여 이렇게 평온한가/ 술은 없으나 차가 있어 한 모금 마시고 책을 읽으
니/ 모든 사기로움 없어지네/ 어저께 바람 심하더니/ 오늘 아침 맑고 깨끗해졌네'
김창흡 金昌翕- 1653-1722 자 子益, 호 三淵. 李端相에게 배움. 기사환국 때 은거.
이황과 이이의 절충설을 주장함. 수많은 차시 남김.
'술은 연꽃 핀 정자가 좋고/ 차솥은 대숲 속에 건다네/ 아득한 아포에 비 내리고/
내 마음 하늘가에 있다네'- 白月四時詞
김창업 金昌業- 1658-1721 자 大有, 호 老稼齋. 그림 잘그려 산수, 인물 남김.
1712년 큰형 따라 중국에 다녀와 '연행일기'를 통해 산천, 사관, 서적 등을 기록함.
'동산에는 구르는 듯 새 지저귀는데/ 발 밖엔 어지럽게 떨어지는 꽃이라네/
뜰 가득한 소나무 그늘엔 손 하나 없고/ 맑은 샘 길어 홀로 우전차 달인다네'

김춘택 金春澤- 1670-1717 자 백우, 호 북헌.
서인 집안, 당쟁으로 여러번 귀양살이.종조부 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역

길재 吉再-1353-1419 해평 길씨, 호 冶隱, 金烏山人, 자 再父, 11세 도리사에서 글 배워
18세 박분에게 논어, 맹자 익히고 ,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문
하에 들어가 학문의 깊이를 더한다. 1374(공민왕 24) 생원시, 1383(우왕 9) 사마감시
에 합격, 2년 후 진사시에 급제하여 청주목사록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한 마
을에 살던 이방원(조선 태조)과 교분이 두터워진다. 이후 成均學正, 成均博士. 창왕 1
년(1389) 門下注書가 되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이듬해 고향 선산으로
낙향. 1400(정종 2) 나라가 바뀌어 방원이 그를 불러 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임금
을 섬기지 않겠다는 소를 올려 거절한다. 31세 고향 금산에서 혼인, 三隱이 모두 차인
이었다. 유적지는 금산(옛 금주) 淸風書院과 태어난 선산
산문 <山家序> "회오리바람 일지 않으니, 비좁은 방도 편안하고/ 밝은 달이 뜰에 다가
오니, 홀로 느리게 거닌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이따금 베개를 높여 꿈을 꾸고/ 산
에 눈이 펄펄 흩날릴 땐, 차 달여 혼자 마신다"

나옹선사 儺翁禪師- 1320-1376 법명 惠勤, 호 나옹, 속성 아牙씨, 이름 元慧
영해부(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사람, 거처하던방 江月軒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을 느껴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
25세 때 회암사로 가 4년만에 대오한다- 중국 연경 법원사로가 인도승 指空에게 인가
받음.-다시 임제의 법맥을 이은 자선사의 處林을 만남. 유적지- 여주 신륵사
<차시> "본래 天然으로 조작된 것 아니니/ 어찌 밤을 향해 玄旨를 구할 것인가/
다만 一念으로 마음에 일 없으니/ 목 마르면 차 달이고 곤하면 잠을 자리.
<토굴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남용익 南龍翼- 학자, 자 운경, 호 호곡.
일본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다녀와 '扶桑錄'을 쓰고 그속에 당시의 일본 차풍속을
소개함.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역임. 기사환국 때 명천으로 유배돼-거기서 죽음.
문장과 글씨에 능한 차인.
'눈녹여 차 달이는 흥취/ 북쪽산 찾은 나그네 마음이라네/ 우연히 선비 모임 이루어져
/ 서로 꽃다운 얘기 토한다네'

노동 盧仝- 자호 옥천자. 中 唐. 차품평을 잘함. 차를 예찬한 '茶歌'유명

두보 杜甫- 자호 杜陵布衣. 中 唐. 詩聖. 문집 杜工部集

만해용운 卍海龍雲- 1879-1944 속명 韓유天, 호 용운, 별호 만해. 시인, 소설가, 독립운
동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동학혁명에 가담했다 실패. 17세 오세암에 출가함.
백담사, 유점사 등에서 계를 받고, 일본에 다녀옴. 후일 일본이 우리 불교를 조동종에
복속시키려 하자 저지에 힘쓰며, 종교지 '惟心' 간행. 중국에 가선 독립군관학교를
방문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돌아옴, 3.1운동 때는 불교대표로 33인으로 활동하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썼다. 신간회에도 참여하고,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함.
1933년 남향이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북향집 심우장을 지었다고함.

목대흠 睦大欽- 1575-1638 문신, 자 湯卿, 호 茶山, 竹塢.
참판 첨의 아들, 서흠 장흠의 동생. 광주목사로 있다 광해군 때 낙향. 이조 때에 조참
의, 강릉부사 역임. 시문에 뛰어남.
'사양 많이 해도 주인은 손에게 권해/ 함께 찻잔 들고 봄 품경 감상하네'

무경자수 無竟子秀- 1664-1737 속성 홍씨, 법호 무경, 운문사 추계유문의 법을 이믕.
차인으로 '무경집' '불조선격'을 남김

묵암최눌 默庵最訥- 1717-1790 속성 박씨, 법호 묵암, 14세 출가. 풍암, 용담, 상월 등
에게 배움. 화엄학에 깊었다. 저서 '묵암집' '화엄과도' 등

민우수 閔遇洙- 자 士元, 호 蟾村, 貞菴. 大司諫 鎭厚의 아들
김창협의 문인, 음보로 관직에 올라 대사헌 지냄.

죽서당 박씨 竹西堂 朴氏- 호 半啞堂. 朴種彦의 서녀, 후에 徐箕輔의 소실이 됨
일생 병치레, 경사와 시문을 탐독 한유와 소식의 풍을 따름. '죽서집'에 시 180여 수

박세채 朴世采- 1631-1695 호 玄石. 소론의 영수, 좌의정. 예학에 밝음.

박영희 朴映熙- 호 應松. 저서 '동다정통고'

박장원 朴長遠- 1612-1671 문신, 자 중구, 호 구당.
강원관찰사, 이조, 공조, 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 개성유수로 재직 중 죽음.
<樓上吟>'영주루에서 꿩들 바삐 나는 것 보고/ 날마다 올라 넘어가는 해 보낸다네/
금정물 길어 달인 차 벌써 잔이 식고/ 옥서 펼친 곳에 차 연기 피고 비 펄펄 날리네'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실학자, 소설가. 자 仲美, 호 燕巖.
妻叔 李君文에게 수학하고, 30세에 홍대용에게 신학문을 배움
1790년 進賀使 朴明源을 따라 청에 다녀옴. 선공감감역, 의금부도사, 안의현감,양양
부사.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
소설: '熱河日記' '許生傳' '虎叱' 등

백곡처능 白谷處能- 1617-1680 법호 백곡, 속성 김씨, 유학을 공부 해 문장을 잘씀.
벽암각성에게서 법을 배우고, 팔도선교도총섭을 지냄, 대흥사에 오래 주석함,
억불정책에 부당함을 주장함. 차시 몇편이 있다.
'봄 강가에 어린 풀 곱게 돋고/ 저무는 모래벌판엔 옅은 연기 피네/ 어느 때쯤 우리
도반들과 손잡고/ 햇차 달여 서로 권하며 마시리'

백암성총 栢庵性聰- 1631-1700 법호는 백암, 속성 이씨, 16세 출가, 취미수초에게 법을
받음, 임자도에 표류해 온 불전들을 얻어 많은 불서를 간행함.

백파 白坡- 1767(영조43)-1852(철종3). 12세 선운사에서 출가. 이긍선 백파는 法號

범해각안 梵海覺岸- 1820-1896 성 최씨, 법호 범해, 완도 청해 출신, 14세 대흥사로
출가. 호의시오의 법을 이었고, 초의에게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다맥을 이으음.
차시 20여편 남김. <茶具銘> '내 생애 맑고 한가로워 몇 말 찻잎을 만들었네/ 헐어진
화로 걸어놓고 약하고 강한 불 담았다네/ 질 다관은 오른 쪽, 자기 다완 왼쪽에 두고/
오직 차에만 힘쓰니 무엇이 나를 유혹하리'

보우 普雨- 1515-1565 虛應堂 봉은사 주지,
15세 금강산 마하연사로 출가 6년 정진 깨달음 얻고 화엄경 등 모든 대장경을 섭렵,
이후 주역까지 통달 유학자들과 널리 교유한다.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대비의 신임으로, 없어진 승과제도를 부활시켜 서산대사(청허
휴정선사)와 사명당(유정선사) 등 걸출한 고승이 나왔다.
400여건이 넘는 상소문에 물러나 있다 문정대비가 죽자 체포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 며칠만에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함.
차시 "그 누가 나처럼 이 우주를 소요하리/ 마음 따라 발길 마음대로 노니는데/
돌평상에 앉고 누워 옷깃 차갑고/ 꽃핀 언덕 돌아오면 지팡이 향기롭네/ 바둑판 위
한가한 세월은 알고 있지만/ 인간사 흥망성쇠 내 어찌 알리/ 조촐하게 공양을 마친
뒤에/ 한줄기 차 달이는 연기 석양을 물들이네."

보우선사 普愚禪師- 1301-1382 , 홍주 출생, 법명 普虛, 호 太古, 시호 圓證國師
太古寺 창건, 13세 출가 양주군 회암사에서 광지화상에게 불법 배우고 가지산 보림사
에서 도를 닦음, 1325(충숙왕12) 승과에 급제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용문산 상원암과
개성의 감로사에서 고행 33세 때 첫 깨달음 얻고, 38세 無 자 화두로 오도송 터뜨림,
삼각산 중흥사 주지로 주석한 뒤,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5년간 정진한다.
46세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 청공을 만나 보름 만에 인가를 받는다. 48세 귀국 용문산
에 소설암을 짓고 정진하던 중 56세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봉은사에 주석하면서 왕사
로 책봉된다. 그후 16년만에 국사로 책봉되고, 12년 후인 82세에 용문산 소설암에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열반. <열반송>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머럼 빈 것이어서/ 팔십
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 네/ 죽음에 다다라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둥글고 붉은 해
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그의 차시 중> ...늠름한 추위는 뼈에서 생기고/ 소소한 눈발
은 창을 두드리는데/ 깊은 밤 질화로에/ 달이는 차향기가 다관을 새어 나오네.
'太古庵歌' 19수도 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길상사(송광사) 1세 社主, 자호 牧牛子, 시호 佛日普照
8세 때 사굴산파의 종휘 스님에게 나아가 승려가됨, 명종 12년(1182) 25세 승과에
급제. 광양 상백운암.

부용당 金雲楚- 당호 芙蓉, 자 雲楚, 이름 미상. 金履陽을 흠모- 소실
성천의 기생으로 시재가 뛰어나 '운초시집'에 200여 편의 시가 있다.

사마천 司馬遷- 자는 子長. 중국 전한 때의 역사가. 부친 司馬談을 이어 史記를 완성

사명대사 四溟大師- 1544(중종39)-1610(광해군 2년) 법명 惟政, 당호 四溟
15세 어머니, 16세 아버지를 잃고 직지사로 출가, 2년만에 승과에 합격한 뒤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다. 이후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대사(휴정)의 제자로 3년간 정진,
43세 때 옥천 상동암에서 소나기에 떨어진 꽃을 보고 무상의 도리를 깨달아-
49세 임진왜란 맞아 재약사(표충사)에서 의병들을 모아 서산대사의 휘하로 들어간다.
50세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 벼슬이 堂上職에 오른다.
51세 1594(선조 27년) 울산 서생포에 있던 加藤淸正을 만나 적정을 탐지한다.
62세 1604(선조 37년) 대마도를 거쳐 왜의 본토로 들어가 德泉家康을 만나 화친을
맺는다. 동포 3천여명과 귀국하자 선조는 가의대부 품계를 내린다.
1607(선조40년) 치악산으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지만 더 깊어져 합천 해인사로 내려
가 요양하던 중 1610(광해군 2년)에 홍제암에서 입적함.
밀양은 사명대사의 고향이자 茶의 고장이다. 茶竹里, 茶院洞, 茶村, 사명대사의 생
가터 이웃마을 茶禮里 등 차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가남긴 차시 한 편 -
'조계(혜능)를 이어 나온 먼 손(孫)/ 행장 이르는 곳마다 사슴과 벗을 삼네/ 사람들아
헛되이 날을 보낸다 하지 마오/ 차 달이는 틈에 흰구름 본다네'

서거정 徐居正- 1420(세종2)-1488(성종19) 호 四佳亭. 23년간 문형을 지냄
저서 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 사가집 등

서명응 徐命膺- 1716-1787 학자, 자 君受, 호 保晩齋. 실학을 연구 북학파의 비조로
불림. 1755년 청에 서장관으로 다녀옴. 대사헌, 황해도 관찰사, 이조, 호조,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봉조하에 오름.

서산대사 西山大師- 1520-1604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별호 서산대사
아명은 운학, 다선일여의 경지를 읊조린 차시가 많다. 해남 대흥사에 자신의 가사
와 발우를 보관하라고 제자유정(사명당)과처영에게 유언. '승려의 일생은 차 달여
趙主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함.

서성환 徐成煥- 1924-2003 호 粧源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성장, 화장품 가내수공업 이어받아 1945년 해방
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업에 헌신, 마침내 태평양화학(아모레퍼시픽)을 세워 국산
화장품 브랜드를 창출한 사업가로, 또한 일찍이 제주와 호남에 차재배 단지를 성심
으로 일구어, 말년의 모든 열정을 우리 차문화 전통을 되살리는데 힘을 쏟았다.
특히 차의 대중화를 위하여 크게 공헌했는데
1980년 제주도에 차밭을 일구고, 1982년 4월 '동다송'과 '다신전'을 번역 발간하고
1983년 봄부터 '설록차'를 시중에 선보이며 대중화를 선도했다.
1984년 '생활다례', 1987년 '한국의 차시'를 엮어 발간함.
2001년 테마공간 <오' 설록 티뮤지엄>을 설립해 무료관람 관광지를 만들었다.

설암추붕 雪岩秋鵬- 1651-1706 속성 김씨, 법호 설암, 열살에 출가, 묘향산 보현사의
월저도안의 법을 이었다. 선교 양종에 통달하고 총림의 종사로 추앙받은 차인이다.
대흥사의 대종사로 '설암잡저' '설암난고' 등을 남김.

소식 蘇軾- 호 東坡. 中 北宋의 문인. 唐宋八大家. 서화에 능함. 저서 소동파전집
부친 蘇洵, 아우 蘇轍과 삼소로 일컬어짐

소요태능 逍遙太能- 1562-1649 속성 오씨, 법호 소요, 시호 慧鑑禪師(효종이 내림)
백양사에서 출가, 부휴선수에게 배우고, 휴정 밑에서 20 여년 공부, 임진왜란 참여,
연곡사에서 입적. 禪의 고승으로 차를 가까이함. 문집 '소요당집'
<우영조주차> '만나는 사람마다 차 마시고 가라지만/ 청평일곡을 아는 이 거의 없네/
불문의 손님 대접 이와 같아서/ 수많은 세월을 가풍으로 전해오네'

소이 蘇이- 中 唐나라 사람. 행적 없다. 저서 '十六湯品'
茶書 十六湯品을 통해 '茶經'에 기록된 煮茶法을 분석 16가지로 설명

송명흠 宋明欽- 1705-1768 학자, 자 晦可. 호 역泉. 浚吉의 후손
이재의 문인. 경연관, 서연관 등을 거침. 그는 드물게 차를 마시고 中得에이르고,
中和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즉 中正을 얻어 和에 이름)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호 尤庵 사적 대전 남간정사, 서인의 영수, 사후 그를 제향
하는 서원이 전국에 70여개소, 사액서원만도 37개소, 1744(영조20) 문묘에 배향됨.
문집 宋子大全에 숭륭(손飡-밥을 물에 만다는 것)은 번거로우니 차를 사용하는 의례
를 권장.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출생 26세 까지 살았다.
학문은 8세 친척 송준길의 집에서 12세 부친에게 격몽요결 등을 배움, 혼인 후 김장
생 문하에 들어가 예학을 배우고, 김장생의 사후 아들 김집에게 학문을 마쳤다.
27세 생원시에 장원급제 곧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됨. 벼슬은 효종 때 이조판서,
현종때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잠시 관직에 나아갔을 뿐이다. 조대비의 1,2차 예송에
서 남인에 패배해 삭탈관직되고 유배- 서인 재집권 정계복귀- 이후 기사환국 때 제
주도 유배중 83세 때 서울로 압송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 '예가 문란하게 되
면 정치가 문란하게 된다'고 서인과 남인, 서인 중에 노론과 소론 등 당쟁의 중심에
섰던 우암이다.

숙선옹주 淑善翁主- 1793-1836 정조와 綏嬪 박씨 사이 태어난 순조의 여동생.
12세에 홍현주와 혼인 아들 하나를 남기고 44세에 졸. 시문에 능해 200여 수의 시남김

신경준 申景濬- 1712-1781 실학자, 자 舜民, 호 旅庵.
聲律, 의복, 법률, 기서 등 통달. 지리학 연구, 좌승지, 제주목사 역임.
저서- '八道地理志' '東國輿地圖' '訓民正音韻解' 등

신광수 申光洙- 1712-1775 자 聖淵, 호 石北. 서화에 뛰어남
가난해 왕이 집과 노비를 하사 승지가 됨. 대표작 '關山戎馬', 제주에서 쓴 '浮海錄'

신숙주 申叔舟- 1417(태종17)-1475(성종6) 호 보한재 1462(세조8) 영의정. 의정부에 묘
나주 출생, 7세 대제학 윤회 문하에서 공부하다 16세 윤회의 손녀와 혼인, 23세 때
친시문과에 급제-종7품 전농직장-집현전 부수찬-부제학 등 역임하다-1452(문종2)
동갑인 수양대군이 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며 야심가로 변모.
어린 단종이 폐위되자, 역모에 가담한 신숙주는 한글창제와 여진을 토벌한 공로 및
탁월한 경륜으로 6대왕을 섬긴다. 그러나 '숙주나물보다 못한 변절자'로 회자-
저서: 보한재집, 북정록, 해동제국기, 사성통고,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고려사절요
등 수많은 서적 편찬이 업적을 남겼지만 유학자로서 절의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
<차시> 도갑산 절 작설차와/ 옹기마을 울타리에 떨어진 눈 속의 매화꽃은/ 마땅히
내게 고향 생각의 뜻을 알게 하니/ 남쪽 고을 옛일들이 떠올라 기뻐하노라.

신위 申緯- 1769(영조45)-1845(헌종11).호 紫霞, 警修堂 掃落葉頭陀. 자 漢수, 본관 평산
병조참판, 호조참판. 경수당전고, 焚餘錄, 유적지-시흥 자하산장. 申崇謙 시조, 少論
부친은 대사헌 大升, 1799(정조23) 알성문과 급제 抄啓文臣으로 발탁됨, 1812(순조12)
주청사 서장관으로 청나라 연경에가 대학자 翁方綱 부자를 만나 학문의 눈이 열렸
으며 이후 詩書畵 삼절로 불림, 묵죽화를 중국인들이 욕심냈다고 한다.
벼슬은 순탄치 못해 병조참지-곡산부사-승지-춘천부사-병조참판-강화유수 등
유배를 가면서도 차도구를 가지고 다닐정도로 풍류를 즐기는 차꾼.
1831(순조31) 4월 해배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나 草衣詩藁 서문을 써준다.
'警修堂全藁'에 실린 그의 시 400여수 중에 차에 관한 시문이 백십여수나 된다.
대표적 시인 : 신라 최치원, 고려 이규보, 이제현, 조선의 신위.
'돌냄비에 차 달이니 떡차향기 나고/ 구리병에 길은 물은 금옥 부딪치는 소리 낸다/
문서들로 몸이 피로하여 하품과 기지개 켤 때/ 이미 솔바람 소리 나고 두 번째 찻물이
끓네'
그는 초의와 교신이 잦았는데 이는 후배인 추사와도 관련이 있다. 茶山傳法 차도만듬
신유한 申維翰- 1681-1755 자 周伯, 호 靑泉.
급제해 제술관으로 통신사행 따라 일본에 다녀오면서 '海游聞見雜錄'을 씀.
'나라 안의 귀천 남녀를 막론하고 물을 마시는 법이 없고 모두 차를 마신다. 그래서
집집마다 차를 준비해 두는 것이 곡물보다 심했다. 차는 곧 작설 같은 것으로 푸른
잎을 따서 말려 보드라운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신다. 혹 긴 잎은 끓여
서 건져내고 마신다. 매 식후에 한 잔씩 마시는데 시중 도로에 이르면 솥을 걸고 차
를 달이는 자가 길게 늘어 있다. 크고 작은 사신 행차의 수백명이 날마다 푸른 차 한
홉과 푸른 찻잎 한 묶음을 받았다. 관을 지날 때는 따로 다승을 두어 밤낮으로 차를
달여서 기다렸다. 그들의 풍속의 일상적인 예법이 차의 예와 같았다.
(류건집: 한국차문화사)

신익성 申翊聖- 1588-1644 문신, 자 군석, 호 낙전당. 영의정 欽의 아들.
선조의 딸 貞淑翁主와 혼인 東陽尉에 봉해짐.
척화 5신중 한 사람- 청에 붙잡혀 갔다 돌아와 詩와 茶酒로 소일.

신익전 申翊全- 1605-1660 문신, 자 汝萬, 호 東江. 영의정 欽의 아들, 익성의 아우.
김상헌의 문인. 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갔다 돌아와 광주목사, 도승지 역임.
역학에 능, 문장과 필법에 일가. 집안이 모두 차를 즐김.

신정 申晸- 자 白東, 호 汾厓. 익전의 아들.
전라도 관찰사. 서인, 청에 사신으로 다녀옴. 대사성, 예조, 공조, 이조 판서를 지내고
강화부 유수로 죽음. 시문에 능, 글씨를 잘 쓴 차인.
<獨夜> '섣달의 매화가 사람 향해 웃으니/ 등불과 함께하여 내 마음 曲盡하네/
추운 집에 눈녹여 차달이는 흥은/ 값비싼 장막 속의 따뜻함에 비교가 되리'

신정하 申靖夏- 1680-1715 호 恕庵. 김창협의 문인

신흠 申欽- 1566-1628 자 敬叔, 호 象村, 玄軒. 개성사람.
明에 다녀오고,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 영의정 역임. 정주학자, 한학4대가
차를 마시며 대대로 전하고, 차시도 많이 남겼다.
'처마에 비 듣는 소리 아직도 남았는데/ 10월의 추위는 그래도 견딜만 하다네/
오리 모양 향로에선 용연향 피어나고/ 풍로에 끓는 차는 둥근 게눈 맺힌다네'

심육 沈육- 부친이 영의정. 차를 좋아하고 문장에 능해 '樗村先生集'을 남김
'몸은 산처럼 우람하나/ 언제 병조로 돌아갈지 모르네/ 차가 익어도 오는 이 없고/
좋은 집에서 애오라지 잠만 잔다네'

양팽손 梁彭孫- 1488(성종19)-1544(인종1년) 호 學圃, 1510(중종5) 생원시 1등(조광
조는 진사시 1등)29세 문과에 급제, 공조좌랑,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등 역임 홍문관 교리 재직중에 기묘사화-상소문 대표로 삭탈관직-고향 능주로 낙향
쌍봉마을에 독서당을 짓고 詩畵潛心(글과 그림으로 마음을 닦는다), 능주로 유배와
사약받은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거둔 차의 성품을 닮은 '맑고 향기로운 사람'
화순 학포당.

연기조사 緣起祖師- 구례 화엄사 창건주이며 長竹田에 차를 심었다.
황룡사 출신 승려이며 경덕왕(742-765) 때의 인물, 의상의 제자. 또한곳 야생차밭인
효대孝臺(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는 효성스러운 모습의 석물이 조각돼
붙여진 이름)가 있다.

연담유일 蓮潭有一- 1720-1799 속성 천씨, 법호 연담, 18세 출가. 많은 고승들에게 배움
저작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제경회요' 등
'발 밖엔 구름 일고 개울에는 달 비치네/ 반에 나물 있고 솥에는 끓인 것 있고 병에는
차가 있어 기쁘다네'

영수합 서씨 令壽閤 徐氏- 1753-1823 관찰사 徐逈修의 딸. 足睡居士 洪仁謨의 부인
자녀 석주, 길주, 원주, 현주 등 모두 차인으로 길러,
'족수당집'의 '令壽閤稿'에 詩가 190여 편

예용해 - 1960년대 초반에 신문 지상에 차에관한 글을 연재한 지식과 견문을 가졌으면
서도 평생을 차인이라 자처한 법이 없었던 소탈한 차의 세계를 걸음.

오도일 吳道一- 1645-1703 자 貫之, 호 西坡. 영의정 允謙의 손자.
지평, 대사간, 도승지, 병조판서 역임. 중국에도 다녀옴.
문장에 뛰어나고 술을 좋아한 차인.
<선화당우중>'비 내리는 마을 터엔 버들잎만 푸르고/ 물 깊은 관가 못엔 연꽃 막
피려하네/ 속병으로 술 끊은 것 싫지 않으며/ 쇠솥에 새로이 눈차 달인다네'

오암의민 鰲巖毅旻- 1710-1792 속성 김씨, 법호 오암, 모친 죽음보고 출가.
많은 불경 공부해 嶺南宗正 추앙받아, 부친에 대한 효심 지극함.

오원 吳瑗- 1700-1740 호 月谷. 부제학. 泰周와 明安公主의 아들, 明나라에 다녀옴

오효원 吳孝媛- 1889- ? 호 小波. 초명 德媛. 의성의 吳時善의 딸로 서울에와 곤경에
처한 아버지를 구한 효녀로 문재가 출중 했는데, 일본에 건너가 기부금을 받아서
돌아와 명신학교를 세웠다. 1918년 윤명은과 결혼. 1929 '소파여사시집'간행 473수
저명인사들과 교유 이토히로부미, 이완용과 친분, 당시 유행하던 다화회도 더러 참석

옹방강 翁方綱- 호 覃溪. 중 청나라 때 대학자. 김정희와 교유
저서 兩漢金石記, 精義考補, 復初齋全集 등

용악혜견 龍岳慧堅- 1830-1908 성 김씨, 법호 용악, 어려서 출가, 토굴에서 금강경을
읽음, 통도사-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 4부를 간행. 차시 20여편, 저서 '용악집'

원감국사 圓鑑國師- 충지沖止 1226-1292 송광사 16국사 중에 茶詩를 가장 많이 남김
스님 문집에 20편의 차시가 전해짐. 전남 장흥출신 위씨, 9세부터 공부 17세에
司院試에 합격, 19세 장원급제 영가서기로 부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 벼슬이
금직옥당에 이름, 29세에 출가. 승주 송광사 감로암.

원효대사 元曉大師- 617-686 속성은 설씨, 아명은 서당, 불지촌(경산시 자인면)출생
소년 시절 화랑이 되었다가, 648(진덕여왕2년) 황룡사로 출가. 34세에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고구려군에 잡혀 귀향, 44세에 해로로 유학길에 나섰지만 밤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다'고
깨닫고는 의상과 헤어져 돌아오고만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백제와의 전투
에서 남편을 잃고 상심해 있던 요석공주와 정을 나누고 설총을 낳는다. 이때부터 자
신을 복성거사라 칭하고 광대복장을 하고 민중속으로 뛰어들어 無碍歌(모든 것에 거
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는다)를 부르며 다닌다.
和諍을 부르짖은 반전주의자엿던 그는 다도란 차 한잔에 분열을 씻어버리는 것-
입적 때까지 저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1백여부 240권(10부 22권 현존)
수도한 부안 개암사 뒷산 울금바위 중 오른쪽 원효방(정남향 다섯평 정도의 동굴)

원천석 元天錫- 1330-? 원주출생, 호 耘谷, 치악산에 묘소.
고려 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치악산으로 숨어 부모를 봉양하며 ...
일찍이 이방원(태종)을 가르친 적이 있어, 후일 치악산까지 찾아왔으나 출사하지 않

<차시> 그리운 서울 소식 숲 속의 집에 이르니/ 가는 풀에 새로 봉한 작설차라네/
식후에 마시는 한 사발은 더욱 맛있고/ 취한 뒤의 세 사발은 더더욱 맛있다오/
마른 창자 적신 곳에 찌꺼기 없고/ 병든 눈 맑아져 현기증이 없어지네/ 이 물건 영묘
한 공덕 헤아리기 어렵고/ 시마詩魔가 다가오니 수마睡魔는 없어진다네.

유도원 柳道源- 1721-1791 학자, 자 叔文, 호 蘆涯. 參議 觀鉉의 아들.
만년에 僉知中樞府事. '常變通考'를 쓴 동생 柳長源, 柳致明 등의 차인을 배출함.

유정원 柳正源- 1703-1761 학자, 자 淳伯, 호 三山. 錫龜의 아들. 집안에 많은 차인 배출
1735년 증광문과에 급제 지평, 수찬, 대사간을 역임.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천문, 지리,
음양, 복서, 주수로부터 병률, 도학에 까지 정통함. 저서 '三山文集''河洛指要' 등
茶山은 '牧民心書'에서 조선 淸白吏의 대표적 인물로 삼산을 꼽았다.

육우 陸羽- 호 景陵子, 아호 桑苧翁, 東岡子, 東園先生 등. 中 唐. 茶神으로 받들어짐
저서 茶經(760년 上中下 3권), 顧渚山記, 南北人物志, 吳興歷官記, 源解 등

윤두서 尹斗緖- 1668(현종9)-1715(숙종41) 호 恭齋. 윤선도의 증손. 시문, 그림 잘그림
玄齋 沈師正, 謙齋 鄭敾 과 함께 조선의 삼재로 불림

윤봉구 尹鳳九- 1681-1767 학자, 자 서응, 호 병계. 권상하의 문인
급제해 청도군수, 판서에 이름.

윤선도 尹善道- 1587-1671 문신, 자 約而, 호 孤山, 海翁. 남인가문,
진사로 권신 이이첨을 탄핵하다 경원, 기장, 영덕 등지에서 20여년 유배. 19년의 은거
생활. 호조참의, 동부승지. 복식문제로 유배되 나이 80에 풀려나 보길도로 들어갔다.
漁父四時詞, 山中新曲, 五友歌 등 많은 단가와 시조남겨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삼대
가인歌人. 五友(물, 바위, 솔, 대나무, 달)라는 자연을 벗 삼아 선비의 삶.
완도 부용동 세연정, 綠雨堂, 동천석실.

이경석 李景奭- 1595-1671 문신, 자 尙輔, 호 白軒. 德泉君의 6대손
김장생의 문인. 척화파로 김상헌과 청에 1년간 구금생활, 후에 이조판서- 영의정을
지냄.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밀고하여, 책임을 지고 청에 다시 감금되었다 풀
려나 기로소에 들어감. 그의 다풍은 증손 眞望과 다음대 匡德에도 이어졌다.
'개울에선 옥 굴리는 물소리 들렸는데/ 꽁꽁 언 얼음 아래 아직 그 소리 남았네/
차 달여 마셔보니 옛 맛 그대로고/ 취한 술이 곧 깨어 한기 스미네'
<寒松亭> '신선들의 차 부뚜막 아직도 남아 있고/ 차 달이던 샘물은 지금도 솟아나네
/ 오늘의 한송정은 적막에 쌓였는데/ 바다 위의 달만은 변함없이 비치네'

이경전 李慶全- 1569-1644 호 石樓.
산해의 아들, 형조판서, 명에 다녀옴.

이관명 李觀命- 1661-1733 호 屛山.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옴. 좌의정을 지낸 차인

이광덕 李匡德- 1690-1748 자 聖賴, 호 冠陽. 景奭의 후손이며 眞望의 아들
급제하여 영조의 신임 받아 교리, 전라도 관찰사. 청에 부사로 다녀옴. 여러대 茶家

이광사 李匡師- 1705-1777 호 圓嶠. 양명학 연구. 진도 적소에서 평생.
'圓嶠體'를 이룬 서예가

이광수- 1892-1950 호 春園
현대문학의 거봉, 천주교 신자, 해방전 불교로 귀의 등 양면성 보임.
그는 금강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쫓기던 8촌동생 운허 스님을 만난다. 해방후 친일
변절자라 하여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운허스님이 머물고 있던 남양주 봉선사로 몸을
숨긴다. 그가 묵었던 방은 茶經香室. 이때 1946.9.18일자 '산중일기'에 연시조 차시를
남긴다. '화로에 불 붙어라 차 그릇도 닦았으라/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산중에 외로이 있으니 차맛인가 하노라...'
그도 한 때는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상해임시정부에 일조했다고 옥살이
도했었다.
'산중일기' 9월20일자의 글 '화로에 물을 끓여 미지근히 식힌 뒤에/ 한 줌 차를 넣
어 김 안나게 봉해놓고/ 가만히 마음모아 이 분 삼 분 지나거든 찻종에 따라내니/
호박이 엉키인 듯 한 방울 입에 물어/ 혀 위에 굴려보니/ 달고 향기로움 있는 듯도
없는 듯도/ 두 입 세 입 넘길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 미미한 맑은 기운 삼계에 두루
차니/ 화택 번뇌를 하농안 떠날러나/ 차 물고 오직 마음 없었으라/ 맛 알리라 하노라

이규보 李奎報- 1168-1241 여주 출생, 호 白雲居士, 강화도에 묘가 있음.
사마시에 네번째 응시 수석 급제-관직 못얻고 25세 개경 천마산으로 들어가 장자의
걸림 없는 경지를 흠모 호를 백운거사라 짓고 차살림을 하다 1년만에 개경으로 나와
독서로 소일, 그때 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음.
그는 거문고까지 애지중지하여 스스로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렀다.
저서'동국이상국집'에 茶詩 40여편을 포함 2천수 이상의 시를 남겼다.
당나라 白樂天을 스승으로 삼아-해동의 배낙천이라 불림.
40여편의 차시는 당시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早芽茶, 떡차 만드는 법, 차의 포장법, 차살림의 茶具들, 백성을 괴롭히는 茶稅 등.
<차시> 납승이 손수 차 달여/ 내게 향기와 빛깔을 자랑하네/ 나는 말하노니 늙고
목마른 놈이/ 어느 겨를에 차 품질을 가리랴/ 일곱 사발에 또 일곱 사발/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

이단상 李端相- 1628-1669 문신, 자 幼能, 호 靜觀齋. 대제학 明漢의 아들
교리, 정랑,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연구에 힘썼다.
문하에 학자 김창협, 김창흡, 임영 등 배출.

이단하 李端夏- 1625-1689 자 季周, 호 畏齋, 松磵. 植의 아들. 宋時烈의 문인.
서인으로 정쟁에 말려 귀양-복직, 좌의정 역임. 대대로 전승된 차인.
'시로 겨루고 술 많이 마시는 것 옳지 않으니/ 흥이 지나면 병폐가 되니 어이하리/제
일 좋은 것은 문 닫고 한가로이 앉아/ 눈녹여 차 달이며 물 끓는 소리 듣는 것이라네'

이덕형 李德馨- 1561-1613 호 漢陰.
이산해의 사위, 명나라에 두번 다녀온 차인.

이만부 李萬敷- 1664-1732 호 息山. 역학에 조예, 서예 잘함.
여러번 벼슬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

이명한 李明漢- 1595-1645 자 천장, 호 백주. 정구의 아들.
공조좌랑, 폐모론으로 파직, 인조반정 후 다시 출사. 도승지-대제학-이조판서 역임.
척화파로 청에 수차 구금됨.성리학 깊이 연구. 시문에 뛰어남.
<夜過樂全>'은하수 처음 돌고 북두가 기울어지니/ 등불 밝힌 그윽한 방엔 웃고 얘기
하는 소리라네/ 햇찻사발 드니 추위 좀 가시는데/ 좋은 손님 못 가게 차를 권한다네'

이목 李穆- 호 寒齋. 1471(성종2) 김포-1498년(연산4) 戊午士禍로 28세에 참형을 당함
14세에 점필재 김종직 문하 도학 공부. 19세 과거 갑과합격. 도학 이념의 강골.
1494(성종25) 24세 중국 燕京에서 유학. 25세 문과 장원급제하고 다부를 지어 문명을
떨치기도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자 윤필상을 탄핵하려다 오히려 공주로 유배를 간
다. 1495(연산1)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1497년 27세 賜暇讀書 한뒤 典籍과 宗學司誨,
영안도(함경도) 평사 등을 역임하다 1498(연산4)28세 윤필상의 모함으로 무오사화에
희생-1504(연산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비극을 맞지만 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된다.
문집 '李評事集' '寒齋文集', 1495년경 저술 '茶賦' (1321字 동다송보다 340여년 앞선
茶書)- 서문에 이어 중국차의 품종과 산지 및 풍광, 煎茶와 七修, 차의 공과 덕, 결말
에 차를 예찬함과 동시에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로서, 겉으로는 육신의 찌꺼기 씻어
내고, 병마를 몰아내며, 정신의 고통까지 덜어내는 茶는 上品이든 次品이든 무슨 상
관이랴. 그러니 차야말로 군자들이 반드시 가까이 해야 할 것이라 했다. 2004년 한국
차인연합회에서 茶仙으로 추대 매년 獻酌, 공주 유배지에 충현서원이 있다.
<다부 중 차 달이기 부분> '차를 끓이는 순간만은 세속의 먼지를 털고 깨끗한 정신으
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손수 찻사발을 씻는 것이니, 이는 자신의 淨化를 뜻한다.
서두를 것이 없다. 예부터 차를 끓이는 것은 물을 끓이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조용히 깨끗한 石泉水 길어다 끓이며 한가로이 煎茶三昧에 빠져 즐기는 것이다....'

이민구 李民求- 1589-1670 문신, 자 子時, 호 東洲, 지봉 李粹光의 아들
교리- 이조참판 지냄. 詞賦에 능한 차인이었다.
'성스런 물 인성도 바꾸나니/ 능히 탁한 것을 맑게 한다네/ 찻사발 멈추고 마시고
싶지 않음은/ 내 원래 총명함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네'
'예부터 성현들은 편한 자리 없었는데/ 지금은 온 세상이 못할 일이 없다네/ 차화로
술그릇도 몸에 관한 물건이니/ 이사할 때 언제나 종들 보기 부끄럽다네'

이민보 李敏輔- 1720-1799 자 백눌, 호 상와. 단상의 증손
음보로 벼슬길 輔國崇祿大夫

이민성 李民宬- 1570-1629 자 관보, 호 경정.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시문과 글씨에 능한 차인.

이백 李白- 자는 太白, 호 靑蓮居士. 中 唐 시인. 詩仙으로 불림. 저서 李太白詩集

이상적 李尙迪- 1804(순조4)-1865(고종2) 자 惠吉, 호 藕船.
스승인 김정희가 그를 위해 歲寒圖 그림,
문집 24권 안에 750여 편의 시문 중 차에관한 것 30여 편이 있다.
세습적인 역관 집안 출신,중국에 12회나 사행으로 다녀옴. 저서 恩誦堂集

이상정 李象靖- 1710-1781 자 景文, 호 大山. 李裁의 문인.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낸 후 낙향, 퇴계 학통을 받은 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裁
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연구 柳致明에게 전함. 高山에서 학문을 닦고 차를 즐김.
그의 글속에 당시 영남에도 상식에 물로 차를 대신했음을 기록함.

이색 李穡- 1328-1396 호 목은, 찬성사 곡穀의 아들, 이제현의 문인, 대사성.
진사가 된 후 원나라로가 성리학을 연구, 3년 만에 부친 부음을 듣고 귀국한다.
이후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에 등용된다.
대제학 때 학칙을 제정한 성균관에 정몽주, 이승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 유학의 보급
과 성리학 발전에 공헌케 함. 1389(공양왕1) 위화도 회군사건으로 이성계 일파가 세
력을 잡으면서 장단에 유배-이듬해 청주 옥에-장흥으로 유배되었다가 태조(이성계)
의 명으로 韓山佰으로 봉해지면서 석방되나 조선 조정에 끝내 나가지 않고 여강으로
가던 중에 생을 마감한다. 유적지-여주 신륵사, 한산 문헌서원, 장단 임강서원 등
훗날 不事二君을 지킨 고려 충신을 말할 때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三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척불론자임에도 스님들과 교유가많았다(나옹선사, 행제선사, 담선사, 영공 등)

이수광 李수光- 1563-1628 문신, 자 潤卿, 호 芝峰.
병조판서 希儉의 아들. 과거 급제 벼슬을 하고 임진왜란 때 황간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진위사로 明에 다녀옴. 인조반정, 정묘호란을 치르고 이조판서가 됨.
중국에 수차 다녀오면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얻어와 '지봉유설'을 간행했다.
차를하며 많은 기록도 남김. 후일 가문의 후손들이 차를 즐겨마셔 차의 명문이 된다.
<閑居> '산중의 부귀는 금은초이고/ 길옆의 풍류는 여기화라네/ 흥이 다해 돌아올 땐
숲 그늘이 석양인데/ 아이 불러 물 길어서 햇차를 달인다네'

이승훈 李承薰- 1756(영조32)-1801(순조1) 호 蔓川. 세례명 베드로. 한국 천주교 창설
자의 한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신유사옥 때 참형. 저서 만천유고

이승휴 李承休- 1224-1300 자 休休, 호 動安居士 모두 불교용어로 불교에 심취했다.
경산부(성주) 가리현 출생, 12세 희종의 셋째아들인 원정국사의 절에서 名儒 신서
에게 좌전과 주역을 배우고, 14세 부친 여읜 후, 종조모인 북원군 부인 원씨의 도움
으로 공부를 계속한다. 29세 급제하여 어머니가 계신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지만
몽고군의 5차 침입으로 강화도 길이 막혀 두타산 구동에서 농사로 10여년 은거한다
이후 관직을 맡다가 원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간다. 충렬왕 때 우사간, 충청도안렴
사가 되나 실정을 간언하다 파직된다. 이후부터 호를 동안거사라 하고 삼척 구동으
로 들어가 당호를 容安堂이라 하고 '제왕운기', '내전록'을 저술함.

이식 李植- 1584-1647 문신, 자 汝固, 호 澤堂. 인조반정 후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지냄
한문학의 대가, 대대로 내려오는 차인 집안이다.
'한낮의 그늘 드리운 고요한 붉은 대문엔/ 늦게 핀 꽃 헤치며 어린 제비 들쭉날쭉/
홀연히 부엌에서 새 불 피운 소식 듣고/ 새 물 길어 햇차 달이라 재촉했네'

이안눌 李安訥- 1571-1637 문신, 자 子敏, 호 東岳.
明에 다녀와, 동래부사, 강화유수. 연산군 때 은퇴- 인조반정 후 복직. 중국에 다녀와
예조판서.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했다. 詩에능해 권필과 쌍벽이었고 청렴한 차인.
'낚싯배에 비 지나니 온 섬은 꽃밭이고/ 차화로에 연기 이니 달빛 창에 비치네.

이의현 李宜顯- 1669-1745 호 陶谷. 영의정. 청에 두차례 다녀옴. 김창협의 문인
'一杯三椀氣淳和' 술 한 잔 차 석 잔에 기가 평온히 된다

이이 李珥- 1536-1584 호 栗谷, 태어난 강릉 오죽헌(보물165호)
어머니 신사임당을 16세 여의고- 19세 금강산으로 입산 잠시 불교 공부
해동의 공자라 불릴 만큼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심화되고 주체적으로 수용했건 것
인조 때 전국향교에 비치한 '격몽요결' 부록 祭儀抄에서 제례와 차례 때 차를 쓰라함
병조판서 때는 선조에게 십만양병을 경연석상에서 건의함.
아홉번 과거시험- 매번 장원급제함. 퇴계와 달리 理(본질)와 氣(현상)를 분리할 수
없다는 理氣之妙를 주장했다. 母子가 모두 화폐에 오르는 인물이 됨.
차시:나는 오막살이 돌밭 다시 가꾸어 차 마시며/ 한평생 가난 속에 자족하며 살리라

이익 李瀷- 1681-1763 호 星湖. 벼슬 않고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한 실학자.
'星湖僿說'을 씀

이자현 李資玄- 1061-1125 자 眞靖, 호 息庵, 청평거사, 희이자希夷子.
1089(선종6) 과거에 급제하여 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에
아버지가 지은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치고 당과 암자를 짓고 은거한다.
예종이 차와 향, 금가 비단을 보내 불렀으나 거절한다. 사촌 이자겸 일문은 백여년
세도를 부렸음에도 권문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사적 새긴 '文수院重修碑'에 고려
예종과 인종이 차를 하사(賜茶)한 기록과, 뒷면에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셨다. 묘용이 종횡무진하여 그 즐거움에 걸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茶道와 禪學, 노장사상에도 심취했다. 부귀공명을 버리고 산 은둔거사이자
욕심을 버려 무엇에도 자유하며 산 신선같은 차인이었다. 그에게 벗은 오직 자연과
禪, 그리고 차뿐이었다.

이재 李栽- 1657-1730 호 密庵. 퇴계학통

이재 李縡- 1680-1746 호 陶庵. 이조참판. 김창협의 문인, 후기 성리학의 대가

이제현 李薺賢- 1287-1367 처음 이름 之公, 자는 仲思, 호 익제. 14세 성균시 장원 15
세 병과 급제한 뒤 과거를 감독하던 권보의 딸과 혼인, 판관, 녹사를 거쳐 司憲糾正
에 발탁되어 관료로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다. 28세 상왕인 충선왕의 명을 받아 원나
라 수도 연경에 간다. 거기서 萬卷堂을 짓고 원나라 선비 학사 원맹선, 글씨로 유명한
조맹부 등과 교유하고 견문도 넓혔다. 또한 충선왕을 따라 아천의 아미산, 절강의 보
타산, 감숙성까지 다녀왔다. 과거를 주재하는 책임자를 知貢擧라 하는데 그가 뽑은
대표적인 인물이 이색이다.
문장의 宗祖라고 칭송받은 그의 영정이 봉안된 보은 念修齋가 있다. <茶詩>
"주린 창자는 술 끊으니 메스꺼워지려 하고/ 늙은 눈으로 책 보니 안개가 낀 듯하네
누가 두 병을 말끔히 물리치게 할까/ 나는 본디 약을 얻어 올 데가 있다네/ 동암은
옛날에 녹야의 벗이었고/ 혜감은 조계산의 주지 되어 갔네/ 빼어난 차 보내오고
아름다운 서찰 보내오면/ 긴 시로 보답하고 깊이 사모했내/ 두 늙은이의 풍류는 유
불의 으뜸이고/ 백 년의 생사가 오직아침 저녁 같구나/ 향 맑으매 일찍이 적화 전의
봄에 딴 잎이라네/ 부드러운 빛깔은 아직 숲 아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우우
솔바람 소리 울리고/ 오지사발에서는 어지러이 맴돌아 젖빛 거품을 토하네"

이정구 李廷龜- 1564-1635 문신, 자 聖徵, 호 月沙, 保晩堂.
대제학, 좌의정. 중국에 여러차례 다녀와 '朝天紀行錄'씀.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다.
대대로 차를 애용한 명가로 이어진다.

이종성 李宗城- 1692-1759 호 梧川. 영의정

이진망 李眞望- 1672-1737 자 久叔, 호 陶雲, 景奭의 증손.
형조판서 때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옴. 영조의 잠저시절 사부, 좌참찬 역임.

이천보 李天輔- 1698-1761 자 의숙, 호 진암
이조, 병조 판서, 영의정.- 후에 다시 영의정-장헌세자의 원유사건으로 자결함

이하곤 李夏坤- 1677-1724 문인 화가, 호 澹軒. 鄭선, 尹斗緖 등과 교유함

이하응 李昰應- 1820(순조20)-1898(광무2) 호 石坡. 고종의 아버지. 1843년 興宣君에
봉해지자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서원을 정리함. 書畵에 능하고 난초를 잘그림

이헌경 李獻慶- 1719-1791 호 艮翁. 대사간, 한성판윤. '杞井記'를 씀

이형상 李衡祥- 1653-1733 호 甁窩. 한성부윤. 영천에 洪然亭을 짓고 차를 즐김

이현석 李玄錫- 1647-1703 자 夏瑞, 호 游齋, 粹光의 증손자.
삼사의 벼슬을 역임. 후에 경상관찰사- 형조판서를 지냄. 글씨를 잘쓴 차인.

이현일 李玄逸- 1627-1704 호 葛菴. 이조판서.

이후 李후- 1694-1761 호 鰲隱거士
船橋莊을 지은 효령대군의 11세손 무경 이내번李乃蕃의 손자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만석의 농토를 재력삼아 풍류를 즐긴 은둔거사였다.
추사 등 한양의 선비들이 강릉 먼곳에 찾아왔는데 편액과 수많은 茶詩들이 남아있다.
차를 마시는 전용공간인 茶亭 活來亭(궁궐누각 부용정을 본뜸)은 1816(순조16)년
오은의 나이 46세에 지어져, 당시 다산초당의 정약용, 일지암의 초의선사, 정조의
사위인 해거재 홍현주, 차시를 가장 많이 남긴 자하 신위 등 차인들이 차문화를 격조
있게 끌어 올렸던 시대이다.
<烏川 鄭熙鎔의 칠언시> 가지마다 밝은 꽃과 빽빽한 대나무 들어 있는데/ 주인은
작은 연못 속의 정자에 있네/ 구름이 걷히니 푸르름이 산봉우리에서 그림처럼
드러나고/ 비가 내린 후 붉은 꽃은 젖어서인지 온갖 풀이 향기롭구나/ 느지막이
휘장 치고 동자 불러 차 한잔 얻으니/ 난간에는 퉁소 부는 객이 있어 차향 속에 잠겨
있네/ 그중에서 신선의 풍류 얻을 수 있으니/ 아홉번이나 티끌 세상이 헛되이 긴 줄
알겠구나. - 활래정에서 차를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상원 任相元- 1638-1697 문신, 자 공보, 호 염헌. 지평 중의 아들.
대사간,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오고- 도승지- 공, 형조 판서. 좌, 우 참찬을 지냄.
차를 너무 좋아해 언제나 곁에 두었다고 한다. 차시도 70여 수 전한다.
'전원에 늙어가며 미투리 한 켤레에/ 관복 벗어버리고 두건 하나 썼다네/
마시고 난 찻사발 베개 삼아 누우니/ 펄펄 나는 새 그림자 창을 자주 지나네'

임수간 任守幹- 1665-1721 자 用譽, 호 돈와. 相元의 아들.
1711년 통신 부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東사日記' 남겨- 일본 견문과 차문화를 소개
우승지 지냄. 문장과 경사에 밝고 병법, 지리에 정통.
'나이 드니 마음 쓸 곳 없고/ 가난하니 그윽한 것이 좋다네/ 시제를 찾아 먼 산 바라
보고/ 찬 샘물 길어 차 달인다네'

장원 張源- 中 明나라 포산사람. 호 초해산인. 산속에 숨어 제자백가를 공부, 여가에
차를 즐기며 유유자적함. 저서 '茶錄'

장유 張維- 1587-1638 문신, 자 持國, 호 溪谷. 仁宣王后(효종비)의 아버지.
金長生의 문하. 딸이 봉림대군에게 출가 신풍부원군이됨. 우의정에 임명되자 18차례
나 사직소 올림. 천문, 지리, 서화 까지 능한 차인.

장의순 張意恂- 1786(정조10)-1866(고종3) 호 艸衣, 海翁, 紫芋山房, 一枝庵. 자 中孚.
15세 남평 雲興寺로 출가. 19세 大興寺의 玩虎에게서 具足戒와 초의라는 호를 받음.
24세 茶山을 만나 경서와 시문을 공부하고 이때부터 차를 가까이 했을 것임.
1815(30세) 처음 한양에 상경 폭넓게 교유하게 된다.(秋史 형제, 申緯, 洪顯周 형제)
1823(39세) 일지암을 짓고 10년간 선과 다도경전에 전념, 많은 詩藁를 씀.
해남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에서 40년간 수행. 다선일미의 경지를 추구함.
저서 茶神傳(明代 中國의 茶에 관한 것), 東茶頌(1837년, 52세, 500여자), 一枝庵遺稿
차를 직접 만들어 선사해 많은 사례의 글을 받았다. 자신의 茶詩는 20여편에 불과함.
茶詩 '펼쳐놓은 四時는 걷어갈 날 없으니/ 맑은 봄 한 켠에서 화로에 차 끓이네'

정래교 鄭來僑- 1681-1757 문인, 자 潤卿, 호 浣巖.
1705년 일본 통신사의 역관으로 다녀옴. 승문원 제술관. '완암집'에 차시.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호 圃隱 본관 영일, 출생지 영천, 충절지킨 丹心歌 지음.
1360(공민왕9) 문과에 장원급제-예문관 검열, 수찬-여진토벌에 종군-典寶都監判官
부모상 관직 놓고 3년상 시묘살이(임금이 정려旌閭(효자문)를 내림)-이듬해 예조정랑
과 성균박사 겸임-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 오던 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 살아-
권신들의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유배-九州(규슈)로 가서 왜구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고려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킴-기울어가는 고려를 바로잡고
자 동분서주하다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 선죽교에서 격살된다.
차시 <讀易> 돌솥에 찻물이 끓기 시작하니/ 풍로에 불이 붉다/ 감(坎:물)과 이( 불)
는 천지간에 쓰이니/ 이야말로 무궁무진한 뜻이로구나. 차시 石鼎煎茶도 유명하다.
유적지- 개성 선죽교, 광주 충렬서원. 목은 야은과 함께 三隱이라 부른다.

정범조 丁範祖- 1723-1801 자 법정, 호 해좌.
정언, 대사성, 개성유수,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지냄.

정약용 丁若鏞- 1762(영조38)-1836(헌종2) 실학자, 자 美鏞, 頌甫, 호 三眉子, 茶山,
俟菴, 紫霞道人, 苔수門巖逸人, 탁翁, 鐵馬山憔. 당호 與猶堂, 四宜齋. 세례명 요한.
진주목사 재원의 아들, 이승훈의 처남. 벼슬 수찬, 경기암행어사,곡산부사, 형조참의
1801(40세) 신유박해 뒤 해미, 장기, 황사영 사건 으로 강진 등 18년간 유배생활.
당시 형 若銓도 원적되고, 若鐘은 옥사 함.
1801년 강진에서 보은산방으로(1805), 이학래의 집으로(1806), 1808년 봄에 茶山으로
옮겨 10년을 지내는 동안 茶山草堂을 짓고 차를 마시며 학문과 저술에 전념했다.
해배되기 얼마전부터 제자 18인을 중심으로 다신계를 만들고 그 절목을 기록하여
그 후 100여년간 규약이 지속되었다.
1818년 고향으로 돌아와 陽明學과 북학파 이론을 흡수 집대성하고, 퇴계와 율곡의
이기론을 합성했다. 1910년 文度公 시호를 받음.
학문에 몰두 500여권 저술 '牧民心書 1821년 총48권', '與猶堂全書 1934-1938 총154
권 76책 활자본'간행. '經世遺表' '欽欽新書' '雅言覺非' '我邦疆域攷' 등 그안에 차에
관한 글이 70여군데나 된다. '차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 갈파
1809(48세) 초의(24세)를 만나 유학과 시도를 가르치기도 함.
'바다 위에 뜬 달 얼굴에 환히 비추고/ 성긴 머리카락 바람에 날리네/ 차 석 잔 기울이
고 보니/ 종소리 온 세상에 울려 퍼지네'

정약전 丁若銓- 1758(영조34)-1816(순조16) 본관 나주. 호 손암, 연경재, 현산.
정약용의 형. 병조 좌랑. 1801년 신유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 거기서 죽음
저서: 현산어보 총3권, 송정사의

정태화 鄭太和- 1602-1673 호 陽坡. 영의정 지냄, 사은사로 청에 두번 다녀옴.

정홍명 鄭弘溟- 1592-1650 자 子容, 호 畸庵. 松江 鄭澈의 아들. 宋翼弼, 金長生의 문인.
지평, 수원부사, 대제학 역임. 古文에 밝은 차인.
<暮雪> '휘몰아치는 눈 아득하여 하늘이 저무는데/ 어지럽게 부는 바람은 굴뚝 연기
몰아가네/ 외로운 회포 근심스러워 잠자리 냉랭하여/ 혼자서 차솥에 손수 달인다네'

조경 趙絅- 1586-1669 호 龍洲.
이조판서, 우참찬.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옴.

조문명 趙文命- 1680-1732 자 숙장, 호 학암. 김창협의 문인
우의정 때 청에 다녀와 좌의정. 탕평책에 공 세움. 글씨를 잘 쓴 차인.
<야심독좌>'종남산 기슭엔 눈이 쌓였고/ 빈 처마엔 외로운 달 하나/ 늙은 느티나무
문을 덮었고/ 창 앞엔 따뜻한 차화로라네'

조식 曺植- 호 南冥 1501(연산군 7년) 합천 삼가출생- 19세때 기묘사화로 숙부 彦卿이
파직당하는 것을 보고, 과거공부 단념, 30세 때부터는 김해 신어산에 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길렀으며, 여러번 제수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와 쌍벽을 이뤘던
그는 61세 때 여생을 보내려고 산청에 세칸 기와집 山天齋를 지어 敬과 義를 지키며
살다 72세에 운명.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주역)
그는 그림을 좋아했다. 차와 바둑, 쟁기질하는 그림이 산천재 마루 벽에 그려져 있다.

조찬한 趙纘韓- 1572-1631 호 玄洲.
선산부사, 문무겸전, 글씨에 능함.

조태억 趙泰億- 1675-1728 문신, 자 大年, 호 謙齋. 이조참판 가석의 아들.
대사성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옴. 경상감사, 우의정, 좌의정 역임. 초서 예서 그림
'논에 비충분해 모 다 심고/ 굽이진 물가 시원한 데 낚시하기 좋다네/
소찬과 조악한 차에 스스로 만족하지만/ 오랜 가난 맡은 늙은 아내 근심이라오'

조현명 趙顯命- 1690-1752 자 치회, 호 귀록.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움, 도승지, 이조판서, 우의정과 영돈령 부사로 두번 청에
다녀온후 영의정을 지냄.

조희일 趙希逸- 1575-1638 문신, 자 怡叔, 호 竹陰.
예조좌랑, 중국 사신 접반사, 인조 때 예조참판, 강릉부사 역임.
시문과 서화에 능한 차인.

지장법사 地藏法師- 696(신라 효소왕 5년)-794(원성왕10) 99세 열반. 이름 金守忠
성덕왕의 맏아들로 출생, 18세 당 현종 때 숙위로 당에 갔다가 어머니 성정왕후가
폐비되어 출궁된 소식을 듣고 3년만에 귀국- 왕자의 신분을 잃어 왕도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한다. 신라 절에서 지장이란 법명을 받은 뒤 720(성덕왕19) 24세 때 바다
를 건너 중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 唐 至德 연간 (신라 경덕왕 때) 구화산에 이르러,
고행 끝에 구화산 전체를 지장신앙의 성지로 일구고 唐 貞元 10년(794년) 7월 30일
열반. 오늘날도 연간 70만여명의 참배를 받고 있다. 고행한 동굴은 구화산 老虎洞
스님은 불법과, 신라에서 금지차와 黃粒稻, 오차송 소나무 씨를 구화산에 퍼뜨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를 남겼고, 最古의 漢詩를 지었다.
중국의 4대 불교명산의 하나인 九華山은 스님의 발원에 의해 지장신앙의 성지로 성역
화되어 있다. 특히 1200년전 신라에서 가져간 금지차金地茶가 지금도 '地藏佛茶'
'九華山茶'로 판매되고 있다. 또한 九華街의 상점마다 지장보살을 외는 唱佛소리와
茶 상품으로 넘친다.
754년 詩仙 李白이 54세 때 구화산에 들러 60세 노승 지장스님을 찬탄한 시도 있다.
'...홀로 오랜 겁을 지내며 중생을 구해주는데/ 이 모든 것이 지장보살의 자비라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의 宋高僧傳, 神僧傳에 기록되어 있다.
中國의 全唐詩에 수록된 <送童子下山>이란 詩
'...암자가 적막하니 부모생각 나겠지/...단지에 찻물 끓이며 하던 장난도 그쳤네/
잘 가거라, 부디 눈물일랑 흘리지 말고/ 늙은 나야 벗 삼는 안개와 노을이 있느니라'

진각국사- 1178(고려 명종 8년 화순출생)-1234(56세 입적) 일찍이 진사인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공부, 1201(신종4년) 司馬試를 마치고 太學館에 들어감, 이후 길상
사로 어머니의 49재를 지내러 갔다가 보조국사와 인연이 되어 출가함. 고종 때
大禪師가 되어 나라의 명에의해 여러 절을 전전하며 수많은 제자를 가르침.
그의 茶詩 <인월대隣月臺> '우뚝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그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탁월한 대시인이며, 직접 茶泉을 파기도함. 승주 송광사 광원암.

진감선사 眞鑒禪師- 774(신라 혜공왕 10년)금마(익산)출생-850(문성왕 12년)77세 입적
법호는 慧昭, 시호 眞鑒, 탑호 大空靈塔(국보 47호 최치원이 비문지음), 빈한가정 생
선장사, 804(애장왕 5년) 歲貢使 선단의 뱃사공이 되어 당나라로가 마조의 선맥을 이
은 神鑑선사의 제자가 된다. 810(현덕왕 2년)에 숭산 소림사로 나아가 구족계를 받고
道義를 만나 함께 수행, 830(흫덕왕 5년) 귀국. 長柏寺(상주 남장사)에 머물렀다가 옥
천사(쌍계사 전신)를 창건한다. 왕의 부름에 번번이 하산하지 않음.
하동 쌍계사, 花開는 지방 관아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茶所로 지정되었던 곳.
차나무가 사오십리나 잇달아 자라고 있다고 동다송에 기록되있다.
<비문> '성품은 꾸밈이 없고 말 또한 꾸며하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라도 따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겨와 싸라기라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채소 반찬은
두 가지가 없었다.

진묵대사 震默大師- 법명 一玉, 1562(명종17)-김제 만경출생-72세 입적.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차공양함. 일생동안 기인의 면모보여, 유학에 밝았고
술도 穀茶라 하여 늘 대취 만행했다고 전해짐.
<술에취하여 부른 노래>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아/ 달을 촛불
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하노라'

채양 蔡襄- 中 宋. 시문을 잘 지음. 자 君謨. 개봉부, 福州, 泉州, 杭州 등을 다스림
저서 '茶錄 상하 2편' '여枝譜' '채충혜집' 등

채제공 蔡濟恭- 1720(숙종46)-1799(정조23) 문신. 자 伯規, 호 樊巖. 묘소 경기도 용인
과거 급제, 교리, 호서암행어사, 도승지, 예조, 호조 판서를 지내고, 동지사로 청에
다녀옴. 정조 즉위 후 벽파의 왕 시해 사건을 사전에 적발하고 수궁대장이 됨.
홍국영의 실각후 왕을 보필 여러 공을 남김.
좌의정 때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앙의 묵인을 주장 보호함- 영의정을 지날 때
까지 10여년간 조용 했으나- 1801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후 박해가 심해졌다.
5대조 忠衍부터 종조부 彭胤을 거친 차의 명가에서 태어나 차는 다반사로 즐겨마심.
저서 '번암집'권두에 정조어찰과 교지 수록
'가벼운 추위에 술기운 좋게 오르고/ 바람 자니 차 연기 간들간들 퍼지네/
뜰의 대나무는 무슨 사연 그리도 많아/ 밤이 들면 창 뒤에서 혼자서 읊어대나'

채팽윤 蔡彭胤- 1669-1731 자 仲耆, 호 希菴. 형조참판.
시와 글씨에 능해 '대흥사사적비문'을 찬함.

천리휴 千利休 센리큐- 日 1522-1591 茶道를 거의 완성된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
그의 와비는 값비싼 명물(호화)도 아니고, 값싼 조잡품도 아닌 것에서 새로운 미를
발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친조선파로 제자 풍신수길에 의해 할복함.茶書 '남방록'

철감선사 澈鑒禪師- 798-868 속성은 박씨, 漢州출신, 집안은 대대로 호족, 18세 출가
10년간 화엄학을 익히다가 회의를 느껴 28세 때 사신 일행의 배를 타고 당으로 건너
가 남전의 문하로 들어갔다. 남전 스승이 열반한 뒤에도 13년간 당나라에 머물다가
문성왕 9년(847)에 귀국. 22년간 유학 생활. 귀국후 금강산 장담사에서 제자 징효와
대중들에게 가르침- 신라 구산선문의 사자산문의 개산조, 천년 고찰 쌍봉사의 창건
주, 경문왕 귀의 받아- 국보57호 사리탑지정된 철감선사탑(정교하고 웅장한 부도)
중국 안휘성은 철감선사가 유학을가서 남전의 회상에서 조주와 함께 정진했던 땅
이다. 남전은 '平常心이 道'라는 가르침을 폈던 고승이다. 또한 남전의 정신을 이은
조주는 불법을 물어오는 제자들에게 '차나 한잔 마시게- 끽다거 喫茶去'로 가풍을
일으켜 화두로 정착시킴. 화순 쌍봉사

철선혜즙 鐵船惠楫- 1791-1858 성 김씨, 법호 철선, 14세 출가, 완호에게 배우고,
수룡색성의 법을 받음. 20년 좌선에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초의와 가까움.

최규용 - 호 금당.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조용히 차생활을 영위하여 바른 차인의
본보기를 보임.

최명길 崔鳴吉- 1586-1647 문신, 자 자겸, 호 지천. 이항복, 신흠의 문인.
병조정랑 때 폐모론으로 파직,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 이조참판. 정묘호란 때
강화 주장- 항복이 결정되자 항서를 초안했다-심양에 다녀와 영의정, 중국 다녀와
완성부원군. 문장과 글씨 이름나
'샘물로 세속의 시끄러운 소리들은 귀 씻고/ 차로서 익힌 음식 먹은 창자 축이네/
남은 생애 이로서 만족하거늘/ 어찌 도를 굽혀서 상하게 하리오'

최범술 崔凡述- 1904 다솔사 앞마을 출생-1979 입적. 호 曉堂
1915 곤양보통학교 졸업-1916년 다솔사로 출가-승려신분으로 일본 유학(大正大學
불교학)-귀국 박열의 천황 암살계획 돕다 8개월 옥고-단재 신채호 유고 간행 또 고
초겪어-만해 한용운의 제자로-해방후 해인사 주지 등 다양한 경력-1960(56세) 부터
1979년 입적 때까지 다솔사 조실 주석, 여생을 차로 회향한다.
연기조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 茶僧들이 머물렀던 사천 다솔사 (법당 뒤로 차밭)
다양한 이력: 승려이자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배포 등 독립운동가, 제헌국회의원
으로 활동한 정치가, 국민대학교를 창설한 교육자, 茶道人 등이다.
그의 다도는 엄격 했고, 차맛은 짜기로(진한맛) 유명했다. 다솔사 작설차(般若露)맛
에 자부심. 또한 차 대중화를 이끈 일등공신으로, 한국차인연합회 발기인으로, 창립
회원으로 적극 도와 이나라 최초의 차단체 발족에 기여함.
그는 "공연히 바쁠 것이 없는데 자기가 만들어서 바쁜 거이지" 飮茶란 느림으로 돌아
가서 자기를 성찰하는 행위이다. 차를 국물 마시는 것처럼 훌쩍 들이켜서는 안 된다.
차의 五味를 다 느끼기 위해서는 혀를 충분히 적신 다음 아주 서서히 감사한 마음으
로 마셔야 한다. 고 했다. 해방후 처음 다서인 '한국의 다도'를 출간.

최석정 崔錫鼎- 1646-1715 자 汝和, 호 明谷. 영의정 鳴吉의 손자. 陽明學 연구
남구만, 박세채의 문인. 이조판서. 우의정으로 奏請使로 청에 다녀옴. 영의정으로
소론의 영수가 되어 파란겪음. 8차례 영의정 역임. 문장과 글씨에 능함. 차인 집안.

최치원 崔致遠- 857년(신라 헌안왕 1) 경주 사량부 출생- 호 孤雲
12세 당나라로 유학 17세 때 과거에 급제, 당의 혼란과 부모의 병환으로 28세 때
귀국(헌강왕)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42세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족과 가야산으로
입산, 지리산에도 들어가 청학동과 삼신동, 고운동계곡, 천왕봉 아래 법계사, 차
밭이 드넓은 화개동에서 차를 마시며 신선처럼 산다.
합천 해인사 紅流洞 계곡가에 표지석이 서 있다. '孤雲崔致遠先生遁世地' (외로운
구름처럼 떠돌다 간 고운 최치원이 은둔한 땅)

최한기 崔漢綺- 1803-1879 호 惠崗. 실학 연구로 많은 저서 남김

풍계명찰 楓溪明察- 1640-1708 속성 박씨, 법호 풍계, 금강산 풍담의심의 법을 이음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 시문을 잘하고 차를 즐김. '풍계집'이 전한다.

하진 河진- 1597-1658 문신, 자 晉伯, 호 台溪.
효성이 지극하여 사임과 출사를 반복 持平을 지냄.

한영정호 漢永鼎鎬- 1870-1948 성 박씨, 호 한영, 법명 정호.
한국 근대불교 교육에 평생을 바침. 유학을 공부하다 19세 출가. 금산, 환응, 경운에게
수학하고 설유처명의 법을 이음. '해동불교' 창간, 불교전문학교 교장 역임.
우리 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키려 하자 만해와 함께 반대운동을 폈다.
敎正에 추대됨, 백양사에서 입적. 저서 '석전시초' 등.

한유 韓愈- 中 唐. 唐宋八大家. 古文운동 주도. 저서 '창려선생집'

한창기 -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
우리문화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안목을 갖춘 교양인으로 차보급에 앞장섬.

함월해원 涵月海源- 1691-1770 속성 이씨, 법호 함월, 14세 출가, 환성지안에게 배워
법을 이음. 특히 화엄과 염송에 통달, 저술 '천경집'
<백양산> '한 줄기 차 연기는 대와 어울려 냉연하고/ 시내에 맑게 비친 반달은 넝쿨
사이로 보이네'

함허선사 涵虛禪師- 1376-1433 충주 출생, 법명 己和, 호 得通, 당호 涵虛
성균관에 입학 공부하다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관악산 의상암으로 입산- 이후
회암사로가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여러 절을 거쳐 회암사로 돌아와 깨달음.
현등사와 강화도 淨水寺에 부도, 봉암사에 비가 있다.
저서를 많이 남김: 顯正論, 儒釋質疑論, 원가경소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함허화상어록 1권 등. <그의 차시>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어라/ 마땅히 이 차 한 잔 한번 맛보시게/ 한번 맛
보시면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난다네. <차시> ...화로에 차 달이는 연기 향기로운데
/ 누각 위의 옥전玉篆의 연기 부드러워라/ 인간세상 시끄러운 일 꿈꾸지 않고/
다만 선열 즐기며 앉아서 세월 보내네.

허균 許筠- 1569(선조2)- 호 교산, 저서 홍길동전
부친은 서경덕의 제자로 동지중추부사 許曄으로 명문가 출신이다. 일본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온 許筬이 이복형, 許봉과 蘭雪軒은 동복형제다.
9세에 시를 짓고, 학문은 유성룡에 배우고, 시는 이달에게 익혔다.
문과 重試에 장원, 후일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 학식과 글재주 떨침.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는 감찰을 받아 몇번의 파직과 복관을 거듭하다 결국은 역적
모의 죄명으로 동료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그가 于筒水(남한강 발원지-진부 상원사 염불암)의 물로 차를 마시고 싶다 는 차시
'...봄 지난 수풀의 꽃은 병든 눈을 닦아주고/ 비 갠뒤 산새들은 그윽한 잠을 청하네/
차단지에 달인 차로 소갈증을 없에고 싶지만/ 어찌 제일로 치는 우통의 샘물을
얻으랴'
허목 許穆- 1592-1682 호 眉수. 전서를 잘씀

허백련 許百鍊- 1896-1977 호 毅齋, 무등산 춘설헌, 5만여평 三愛茶園, 의재미술관.
고종 때 진도에서 태어나 해방후 격동기를 살다간 호남화단의 단군신봉자였다.
소치 허련이 종고조뻘, 11세에 소치 아들 미산 허형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힘-일본
메이지대 입학 법정학 3년 수료후 미술로 진로 바꿔 동경 6년간 일본 남종화의
대가인 小室翠雲에게 인정받아 그의 화실에 기숙하며 영향을 받는다. 귀국후 1922
서울에서 일본 유학때 알게된 동갑 인촌 김성수를 우연히 만나 그의집 2층에 기숙
하며 그림을 그리다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수화를 출품하여 1등 없는 2등에
입상 각광받아. 노산 이은상과는 다우였다. 노산의 詩 <무등차의 고향>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내어 초의선사 茶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잔 향내 맡고 茶道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그는 남종화 뿐만 아니라 초의선사의 차맥도 잇는다. 여러 차맥 중 호남의 남종화
맥을 따라 소치-미산-의재의 춘설차로 이어진 것. 육당 최남선도 <무등차>연시조중
'차 먹고 아니 먹은 두 세계를 나눠보면 富盛한 나라로서 차 없는데 못 볼러라
茗葉이 無關世道라 말하는 이 누구뇨'- 차야말로 세상의 道와 무관치 않다.
평소 제자들에게 '고춧가루를 많이 먹으면 국민들의 성질이 급해져서 나라가 망하
고 차를 많이 마시면 정신이 차분해져서 나라가 흥한다'고 당부 했다.
화업을 잇고있는 손자 許達哉에게 '내 그림이 최고로 보일 때는 손이 앞서 간 것이고,
내 그림이 작게 보일 때는 눈이 앞서 간 것이다'라고 경책- 손과 눈을 떠나 마음으로
그리라는 말이다.

허련 許鍊- 1809(순조9년)-1892, 호 小癡, 진도 雲林山房은 그가 말년에 은거한 작업
실이다. 이곳에서 아들 米山 許瀅, 손자 南農 許楗으로 대를이어 南宗畵의 진경을
보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윤선도 고택에 초동으로 들어가 그림과 인연, 가까운
대흥사 일지암 초의선사 茶童으로 차인수업, 1839(헌종5년) 31세에 추사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배워, 1842년 權敦仁 집에서 헌종에게 그림보여 궁중화가가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정2품 무관직), 다산의 아들 학연,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
과 교우,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 초의가 만든 차를 가지고 세번이나 바다를 건너가 스
승을위로함, 남종화와 산수수묵화의 효시인 중국 왕유를 본떠 허유로 개명.

허준 許浚- 1539-1615(광해군7) 본관 양천(가양동), 자 청원, 호 구암
조부와 부친 무과 출신, 그는 29세 의과에 급제-의관-어의가되어 왕의 신임과 명성
을 얻어 堂上의 품계를 받고 사헌부, 사간원의 상소에 시달림-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 扈從功臣이 된다. 1596(선조20) 선조의 명을 받아 의인들과 함께
[동의보감]편집에 들어갔으나 정유재란을 만나 중단되고 혼자서 1610(광해군2)에야
25권 25책을 완성한다.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 집대성한 한방의학서로서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5편으로 편집됨. 곧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는 '물은 생로병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찻물의 으뜸으로 천기가 충만한 새벽에
처음 긷는 정화수, 그다음으로 寒泉水를 들었다.
東醫寶鑑-2009. 7. 31(금) 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한국의 기록유산 7번째)
차에관한 내용- 차나무의 성질은 약간 차고 ,맛은 달고 쓰면서 독이 없는 식물이다.
그 성질이 쓰고 차면서 기운을 내리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한다. 또한 소갈증을 멈
추게 하고, 잠을 적게 해주며, 화상 입은 곳에 독을 없애준다.
차의 공덕- 머리를 맑게 해준다. 귀를 밝게 해준다. 밥맛을 돋운다. 소화를 촉진시켜
준다. 술을 깨게 해준다. 잠을 적게 자게 해준다. 갈증을 없애 준다. 피로를 풀어준다.
추위와 더위를 덜 타게 해준다.
入手足厥陰經에 차는 반드시 뜨겁게 마시라. 차게 마시면 담痰이 모이고, 오래 마시
면 사람에게서 지방을 빼서 여위게 한다.
차나무는 치자와 같고 겨울에 잎이 나는데 일찍 딴 것을 차라 하고, 늦게 딴 것을 명
茗이라 하며 그 이름은 5가지가 있다. 차茶, 가, 설, 명茗, 천 이다. 유적지-구암공원

허차서 許次서- 중국 명나라 사람. 해적 없다. 저서 다소茶疏

허초희 許楚姬- 1563-1589 호 蘭雪軒. 동지중추부사 허엽의 딸, 許筠의 누이다
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풍으로 명작을 남김. 어려서부터 차에 익숙함.
明의 朱之蕃이 '蘭雪軒集'을 출간 격찬을 받았고, 일본서도 간행돼 애송되었다.

혜장선사 惠藏禪師- 1772(영조48)-1811(순조11). 성 金. 호 蓮波, 兒菴. 두륜산 대흥사
에서 출가, 1805년 유배온 정약용과 교유 법호 아암을 받고 역경을 배움. 이 만남은
후일 초의와 추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조선 후기 차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됨.
儒佛에 달통, 40세에 요절. 저서 '아암집' 강진 백련사, 다산도 반한 차 만드는 솜씨

홍량호 洪良浩- 1724-1802 자 漢師, 호 耳溪.
교리, 경흥부사, 대사간 때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옴. 평안도 관찰사.
1794년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에 다녀옴. 글씨, 고증학에 깊었다.

홍위 洪위- 1620-1660 호 淸溪. 경상 관찰사.

홍원주 洪原周- 호 幽閑堂 洪氏. 洪顯周의 누이, 沈宜奭의 부인
어머니 영향받아 시재를 발휘 '幽閑集'에 190여 편의 시를 전함.

홍현주 洪顯周- 1793-1865 본관 豊山, 자 世叔, 호 約軒, 海居齋, 해거도인
정조의 둘째딸 숙선옹주와 혼인 영명위에 봉해짐, 1815(순조15) 지돈녕부사가 됨.
그의 집안은 모두 차인들이었다. 7대조 洪桂元, 영의정을 지낸 조부 樂性, 부친 仁謨
는 여류시인 令壽閤 徐氏와 혼인 슬하에 우의정 지낸 奭周, 吉周, 原周, 顯周를 둔
명문 차인집안으로 수백편의 차시를 남겼다.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세도가들과 교우가 넓었고, 특히 초의선사와는 차로써 우정
을 나누었다.- 東茶頌을 지은 동기도 그가 茶 만드는 법을 물은 데서 연유한다.
다산 정약용이 57세에 해배되어 양수리 부근 고향집으로 돌아오자 자연스럽게 친교
있는 차인들이 모여든다. 草衣禪師, 추사 金正喜, 아우 金命喜, 丁若鏞의 아들 學淵,
學游 형제와 東樊 李晩用, 威堂 申櫶, 苕泉 金履陽, 檀園 金弘道, 楓石 徐有구 등과
돈독했고, 청의 석학들과도 시문과 선물을 주고 받으며, 일반인과는 달리 경제적으
로 여유가 있었다.

황호 黃戶- 문신, 자 子由. 호 漫浪. '만랑집', '東사錄' 성리학자, 관은 諫議大夫,
일본과 중국에 사행으로 다녀와 그나라에서 보고 느낀 茶에 관한 詩가 많다.

출처 : 茗田의 차사랑
글쓴이 : 茗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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