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망해사 가는 길

차보살 다림화 2013. 7. 28. 20:37

망해사(望海寺) 가는 길

 

                                                            

 

   출렁이는 금물결 바다 그 자체다. 집합미의 절정이다. 가을의 꽃으로는 단연 코스모스다. 늦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코스모스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자주 가까이서 보는 꽃이지만 가을에는 꼭 금만경 들녘을 달려봐야 한다. 이 나라 어디를 가도 이런 지평선 들녘을 볼 수 있겠는가. 코스모스의 사열을 받고 일렁이는 누런 들판이 지평선까지 닿는다.

   거룩하게 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축하라도 하듯이 코스모스 꽃길이 행진한다. 소리 없는 아우성 아닌, 우주 꽃들이 금빛 바다를 향하여 살살이 축포라도 터트리듯 꽃잔치를 베푼다. 코스모스는 밝은 햇살 속 파란 하늘 아래 벼이삭들과는 딱 맞는 궁합이다. 살랑대는 결이 이루는 화음이 사랑의 화음으로 울려나오는 감동에 실려 함께 신의 축복 속에 감싸인다.

   고대이집트인들은 황금을 태양신의 땀방울이라고 믿고 황금을 믿고 숭배했다지. 태양을 숭배했던 모든 고대민족들이 최고 권력의 상징, 행운의 상징, 종교의 상징 아울러 최고의 아름다움 그 이상으로 숭배하여 그들의 최고의 신에게 바치고 장식했다지. 그 최고의 상징이자 아름다움 그 이상인 황금들판이 여기 펼쳐져 있다. 태양신의 사랑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땀방울 같은 볍씨를 내리고 어루만져 열매로 익혔으니 아름다움이 현현할 때는 신의 뜻에 맞는 놀라운 비결이 숨어 있으리라.

   코스모스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여덟 장의 꽃잎이 한 송이를 이루는 단순한 모양을 한 이 꽃은 하양과 진분홍 색깔 등 몇 가지 색으로도 만 가지 빛을 풍겨내는 무한한 진리의 표상 같기도 하다. 가을의 들녘이 익어갈 때 김제에 오면 배가 고파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가을 들녘이 지평선 축제이다. 무한히 뻗어나갈 김제 밥의 향기가 이어나갈 듯하다.

   가을 들판은 한여름 뙤약볕에 땀방울과 눈물인 것 같은 볍씨를 달고 혹독한 태풍과 폭우을 이겨냈다. 筍輿時過稻花香(순여시과도화향) 가마 타고 지나가다 벼꽃 향기 맡네. 얼마 전에 보았던 이서구의 한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보이는 것 모두가 시 자체이니 나는 감히 어떤 말로 이 풍성함과 감격을 글로 나타내지 못한다. 단지 옛사람의 글이라도 대신 떠올리며 그 심정을 같이 해본다. 始信鄕園風味好(시신향원풍미호),   이제야 시골 살이 참맛 알게 되었으니 하며 남은여생을 농사짓다 늙고 싶다고 했단다. 연암과 더불어 실학의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았던 그였으니 당연했으리라. 벼슬살이 한 것도 평생의 한으로 생각한 그였다니 아니 그럴까. 그 나이의 내가 되고 보니 같은 심사요. 섬돌 앞 오동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 아니어도 가을 소리가 지천이다. 자동차 물결에 나부끼는 코스모스 꽃물결과 누런 평야가 살살이 마음바다를 만든다.

   사랑이 꼭 좋은 일만 이어진다면 어찌 사랑이라 할 것인가. 봄부터 가을까지 국화를 피우기 위해서처럼 그렇게 천둥과 먹구름도 이겨냈다. 사철의 희로애락을 같이 했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자연물의 하나인 사람도 그 자연에 속해서 그 영향 아래 사랑을 익혀왔다. 사랑의 모든 기억들이 파도처럼 벼 이랑의 물결처럼 인다.

   진봉면 심포리로 오면 망해사까지 가게 되어 있다. 어느 해 그 가을에 전망대 언덕에서 황홀했던 노을을 오늘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망해사,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며 그리워해야 할 대상을 불러보는 곳일까. 사랑의 모태는 하나였으니 신의 존재라도 좋고, 대상을 가릴 수가 없다. 망해사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요가 캠프를 열고 단식 수행을 공부했던 곳이다. 그때는 이 절의 의미는 몰랐으나, 심포의 해산물이 좋았고 절 마당 아래로 바위덩어리를 밟고 해안으로 내려가 바닷물과 놀 수도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나무였던지, 그 팽나무 그늘에서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고 놀았던 마당은 지금은 엄격한 둘레를 치고 지엄한 공간의 예배 대상이 되었다. 옛날 고향의 마당 같은 정취와 편안함이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다.

   망해사는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곳이다. 대사가 이곳에서 출생하여 완주 봉서사로 출가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분이 지은 낙서전(樂西殿)의 이름으로 보아 서해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었건만 천년 세월의 사연을 저 팽나무는 제 몸에 옹이를 만들면서 그 많은 사연을 몸에 새겨왔으리라. 그 한 토막의 사연에는 우리들이 놀면서 수행자들의 마음을 익혀본 일이라든지. 저 황금 들녘을 놔두고라도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의미를 이곳에서 배웠다는 사실도 있으리라. 그리고 많은 날들이 지나고 새삼 사랑의 추억이라도 만든다고 찾아다닌 흔적도 알리라. 앞으로 망해사는 더 이상 망해사(望海寺)가 되지 않는다는 사연도 아프게 새길 터이다.

   망해사에는 최근 몇 년 전에 절 입구에 해우소를 지었다. 나는 이곳에 오면 그 해우소에 앉아 칸막이 창살 사이로 밖의 풍경을 보는 일이 즐겁다. 지금은 새만금 축조 때문에 내해가 되어 출렁대는 바다를 볼 수가 없다. 가운데 쯤 섬처럼 보이는 곳은 땅으로 변해가는 어중간한 모습이며 포크레인도 멀리 보이지만, 아직 어느 해안 같다. 얼마 전에 축조된 범종도 이제 그 운명을 달리하여 없어지고 그 기단의 흔적이 을씨년스럽다. 낙서전의 공포가 단순하지만 예스러운 멋도 있건만 이제 그 이름처럼 바다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사라지리라. 그 즐거움을 어떤 풍경이 대신해줄까? 망해사 해우소에서? 망해사(望海寺)는 망해사(亡海寺)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낙서전은 방향을 바꾸어 가을 황금 들녘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려야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지. 망화사(望禾寺)라 하는 것이 더 낳을지도 모르겠다.  (2012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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