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화암사’
조윤수
그를 알기는 십수년 전부터였다. 몇 번을 만나러 갈 때마다 동행에 따라 느낌이 달랐지만, 조용히 몰래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몰래 찾고 싶은 숨겨진 연인 같았다. 그래서 안도현 시인도 <내 사랑, 화암사>라고 읊었을까.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은근한 당부였는지 모른다. 몇 번 만났다고 말할 수 있으랴. 지금도 나는 말할 수 없다.
‘홀로 적적하게 찾고 싶은’ 절집. 드디어 그렇게 찾았다. 조용한 시골 길로 접어들면서는 차도 인적도 드물다. 유명세를 치르는 절집이라면 시끌벅적한 상가나 음식점 등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구멍가게 하나도 없다. 들깨나 옥수수밭 사이로 멀리 보이는 앞산만이 푸르름에 넘실댄다. 불명산(佛明山)이라 이름 지었으니, 깊은 산에 불명을 감춘 곳일까.
화암사는 완주군 고산 현 동북쪽 불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들길이 끝나고 갑자기 울창한 숲속 길로 접어들면 저절로 탄성이 가슴 밑에서 올라온다. 시원한 숲 터널이 일주문이다. 피서 철이지만, 작은 주차장에는 자동차도 넉 대 뿐이다. 아이들과 피서 올 곳은 아니기에, 조용하고 한가로워서 마음에 꼭 든다.
이 길은 조선 시대 이전 그 이전부터 선(禪)객과 선(仙)객들의 발자취로 돌바닥이 매끄럽다. 투벅 투벅, 터들하고 삐죽한 돌길을 밟아야 한다. 마을의 잡다한 일상은 바윗돌을 걷자마자 사라지고 일심이 되어 저절로 선객이 된다. 벼랑 벽과 벼랑 사이로 난 바위골짜기 사이를 비집고 오른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크고 작은 물줄기가 작은 소를 만들고, 숨이 찰 만 하면 돌 의자에 걸터앉아 산바람을 마시면 다시 걸을 힘이 솟아난다. 겨울에 왔을 때 벼랑을 타고 내려오던 물길이 하얗게 얼어붙어서 빙벽을 이루었는데, 봄이 되면서 녹아 흘러 땅 위 생명의 젖줄이 되었겠지. 산팽나무, 산벚나무, 댕강나무, 갈참나무 등, 노거수들이 만든 짙은 그늘 사이로 조각난 빛이 스칠 뿐이다.
매미가 인기척을 들었는지, 반기는 듯 외마디를 지르고. 바위벽을 타고 내리는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정다운 인사말처럼 들린다. 바윗길을 20여 분 쯤 걷다 보면 철 계단이 나타난다. 철 계단은 1983년에 조성했다니, 그전의 객들은 얼마나 어렵게 바위를 타고 올랐을까. 그 감회를 생각하면 지금은 가벼운 산책로처럼 과분하다. 철 계단의 철벽 망에 붙은 연꽃이 곳곳에 환하다. ‘꽃 비 내리는’ 절이 아닌가.
150여 개의 계단이 끝나는 곳에 작은 개울을 건너는 너럭바위 네 개가 있다. 이 징검돌을 해탈교라 이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미 골짜기 산문을 어렵사리 올라왔으니 절집 앞의 일주문, 사천왕문 등 겹겹의 문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징검돌을 건너면 계단 길 위에 우화루(雨花樓)가 올려다 보인다.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 이름이 전설을 담고 있다. 바위에 꽃이 피는 절집? 연꽃이 핀 바위 위에 지은 절. 옛날 임금님이 꿈에 공주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연꽃을 찾았다. 부처님이 꿈에서 알려주었다는 곳. 깊은 산 속 바위 위에 연못의 용이 올라와서 연꽃을 키웠다는 이야기. 그 연꽃을 따와서 공주의 병은 낫게 되고 임금님은 그 바위에 절을 지었다. 깊은 산 속 연화대에 앉은 절집이다.
지난겨울에 우화루 앞의 도랑을 건너는 나무다리가 튼튼한 돌다리로 바뀌었다. 새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어쩌랴! 우화루의 바라지창이 활짝 열렸다. 반갑게 객을 맞아주는 것 같아 환해지는 마음이다. 처음으로 화암사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아 이제 내가 그를 만났다는 말을 누구에게 해도 될 것 같다. 우화루 밑은 성벽을 쌓은 듯하다. 세 칸이지만, 가운데 칸의 중심부에 기둥 하나를 더 세워서 네 칸처럼 보인다. 우화루 옆으로 붙은 세 칸의 여염집이 붙어 있는데, 두 칸은 살림집이고 한 칸이 대문 격이다. 여남은 계단을 올라 우화루 옆으로 들어가면 밑에서는 이 층으로 보이던 누각은 일 층이 되어서 네모난 마당의 귀퉁이에 선다.
작은 마당에는 극락전과 우화루가 남북으로 마주 본다. 적묵당과 불명당이 동서로 마주 보아 네 건물이 공평하게 마당을 나누며 서로 처마 끝이 닿을 정도다. 극락전의 용마루가 우화루 보다 약간 높고, 적묵당 지붕이 불명당보다는 약간 높은 듯하여 그 격의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또한 본래 부처의 뜻 같지 않은가. 좁은 마당을 둘러싼 네 건축물이 전혀 답답하지 않다. 극락전과 불명당 틈으로 철영제가 보이고, 우화루와 불명당 사이로는 명부전이 훤히 보이는 여유가 있다. 적묵당 마루에 앉아서 한참 숨을 고른 뒤 극락전에 들어서 참배를 한다. 절로 몸을 낮추어 경배하게 된다.
절을 하면서 올려다본 아미타불, 부처를 안치한 닫집은 화려하고 신비하다. 꿈틀거리는 용 한 마리가 부처의 머리 위에 머물고, 주위를 날고 있는 비천상과 화려한 연꽃 등이 환희심을 일으키게 한다. 바위에 연꽃을 키웠다는 전설의 용일까. 부처를 장식하는 탱화나 장식의 문양 등은 알 수 없는 비밀 암호 같다. 극락의 세계를 상징한 표상이지 싶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현실에 있는 형상이 아니기에 초현실적인 추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리라. 부처를 표현하는 형상과 문양은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끝없는 수행으로 마음을 밝히라는 불명의 뜻일까 싶다. 험한 세상 속에서도 깊이 감추어진 부처의 세계를 찾으라는 뜻일까.
극락전 뒤를 돌아보았다. 육중한 처마를 받치는 백제식의 하앙식 공포라는 것. 앞 쪽은 용의 얼굴 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했지만, 전각 뒤의 공포는 단순하게 처리했다. 주변에 여름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어 오랜만에 절집은 잔치를 맞은 듯하다. 뒤안길에는 잎을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가 곳곳에 무더기로 피어서 산자락 뒷길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 극락세계가 사철 꽃동산을 이루면 얼어붙는 빙벽 길에도 불명의 꽃비를 내릴 것이다. 바라지창이 활짝 열린 우화루에 달린 목어도 오늘따라 생기를 얻어 날카롭게 삐져나온 이빨이 애교스럽게 보인다.
해우소 뒤 언덕으로 오르면 화암사 중창사적비가 서 있다. 중창비에서 화암사의 내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화암사는 아마도 삼국시대 말엽부터 절터가 있었던 듯하다. 원효와 의상이 기도했다는 원효대와 의상암이 있었다는 중창비의 한 구절이 전해진다. 이 절은 고려 때 첫 중창이 이루어졌다. 수 세기를 거치는 동안 전란에 소실되는 비운을 맞은 뒤, 1611년에 와서야 우화루와 극락전의 중건을 이루었고. 그 뒤로 몇 번의 복원과 중수를 거치고 오늘에 이르렀다. 모든 건축물은 복원 중수하면서 전 시대의 양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게 된다. 이전에 백제의 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백제식의 하앙식 공포가 남아 있게 된 것이 그 이유이다. 백제계 건축 요소의 인식을 환기하는 촉매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단청을 덧입히지 않은 절집은 시인의 말처럼 잘 늙은 절집.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겉은 늙었으나 그가 지닌 정신은 날로 새롭다. 저리 곱게 늙어가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래전에 불교 신자도 아닌 내게 법명을 지어서 보내준 큰스님 한 분이 떠올랐다. 바위골짜기를 쉬엄쉬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수월관음을 만난 선재동자처럼 환한 마음으로, 화암사는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도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계단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