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실향민 (나의 살던 고향은) 토마토 밭에서 도라지야, 도라지야 모종을 할 때는 지금 나에게서 나에게로
무지개 뜨는 마을 황야에서 낙원으로 상상해봐요 이 순간, 바로 여기에 바로 이거야
어깨를 끼고 달리면 편하다 줄탁동시
1 실향민 (나의 살던 고향은)
조 윤 수
나에게 있어 귀향은, 유대인들이 긴 노예생활을 탈출한 것과도 같은 혁명적인 새 출발이었다. 모든 것이 서툴고 불편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신선한 감동의 원천이 되었다. 추억의 고향과 같은 마을에서의 전원생활 십여 년은 구도자들의 수행처럼 진지한 것이었다. 드넓은 하늘 아래 흐르는 냇물에서 빨래를 흔들어 빨고, 허드레 물을 마당에 확확 뿌리는 맛은 어찌나 통쾌하고 시원했던지. 봄이면 밭두렁에 앉아 한가로이 나물을 뜯는 내 등을 따뜻이 감싸주던 태양, 너그럽기만 한 대지의 온기, 5월의 솔바람에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는 기분, 그리고 한여름의 비지땀 속에서 다가올 가을을 그렸던 일들. 옛날 옛적 꿈 속 같은 날들의 재현은 적어도 나에게는 신 귀거래사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의 살던 고향은 노랫말뿐이었다. 부모님의 휘어진 등과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을 대가로 도시에서 성공한 아들들이 다시 그리워지는 그들의 고향은 여전히 도시에서의 출세와 더 많은 황금의 기회를 찾아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이 늘고 아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빈 고향이 되어가고 있었다.
옛날의 자급 농업에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 존재를 가치 있게 하는 보편 원리가 내재되어 있었다. 경제 원리를 초월하는 그것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가령 콩을 심을 때는 한 구멍에 세 알을 심는데 '한 알은 땅에 사는 벌레를 위해, 한 알은공중을 나는 새를 위해, 나머지 한 알은 인간을 위해'라는 마음 씀씀이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이러한 보편 가치는 사라지고 말았다. 자연 속에서의 순환과 생존이 아니라 오로지 화폐의 증식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대규모 농업에서는 상품이 될 작물이 성장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은 농약으로 모두 죽여 버린다. 그리하여 안개비에 옷이 적셔지듯 우리의 환경은 병들어 가고 있다.
봄이 되어 저자거리에 모종들이 나올 때면 마음이 바빴다. 파종을 한 다음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싹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호박씨를 묻어 놓고는 궁금해서 흙을 살며시 들쳐보기도 했다. 이른 아침 새들이 창을 두드리면 눈을 비비면서 먼저 밭으로 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할 때는 자연은 더 이상 예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자연의 일부로서 흙 자체가 되어야 했다. 해거름 때가 되고 둥지에 모여든 새들의 재잘거림이 잠잠해질 때 호미를 든 채 밭둑에 주저앉아 반딧불이를 기다리며 앞산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모기가 손등을 꼬집으면 그때서야 집안으로 들어왔다. 쓰레기 더미에 떨어진 호박씨 한 알이 싹이 나서 호박이 넝쿨 채로 들어올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아무것도 버려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순환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쓰레기 문제도 정성스럽게 다루게 되었다. 각종 쓰레기가 땅에서 썩는 기간에 대한 보고가 있다. 종이는 2-5개월, 귤껍질 6개월, 담배필터 10-12개월, 우유팩 5년, 종이컵 20년 이상, 플라스틱 50-80년, 캔은 80-100년 이상, 기저귀도 100년 이상, 치솔도 100년 이상이다. 그리고 병 은 500년 이상이다. 물 쓰듯 물을 쓰다 결국 물도 모자란다. 마음놓고 먹을 물이 없어 사 먹어야 하는데 사는 물은 또 어디서 나오는가. 함부로 버려진 물이 다시 우리 앞에 순환되기까지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하지 않은가. 이 얼마나 심각하고 다급한 일인가. 말로만 들어오던 신토불이(身土不二)가 내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흙과 함께 하는 생활은 그지없이 단순하고 진실하다. 자연의 순리를 알고 그에 적응하려면 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나 혼자는 성립될 수 없는 더불어 사는 조화의 이치를 배우게 된다. 자연이 순환되는 원리를 배워 익히고 그 이치에 맞게 작물을 가꾸던 옛 농부들은 생물을 돌보듯 나를 기르고 사람을 기를 줄 알았다. 자급 소(小)농업이야말로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로움 속에서 진정한 공생공존이 이루어지고 상생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잡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 모두와 함께 번영하는 행복한 삶의 바탕은 농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 모두는 실향민이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고, 순박한 농경사회로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 있었던 그 무엇인가를 다시 찾고 싶은 탓이리라. 이제는 모든 문명을 수용하고 활용하여 진보된 의식에 걸맞은 새로운 고향을 만드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실향민들이 고향을 찾아왔을 때, 그 때의 그 집터 그 나무와 그 정자에 조상들의 위업과 추억이 설화로 남아 있고, 멱 감고 놀던 시냇물에 전설로 흘러 자자손손으로 이어지는 심물(心物)이 풍요한 고향을 가꾸고 싶은 희망이 일면 좋겠다. 막연한 그리움으로 찾아온 고향 언덕에서 더욱 사무치는 향수를 안고 돌아서지 않도록 말이다.
(2004. 5. 25)
2
토마토 밭에서
조 윤 수
우리들의 채소밭에는 상추, 쑥갓, 비트 케일 등이 자라고 있다. 옮겨 심은 고추와 토마토 모종도 막 뿌리를 내린 것 같다. 몇 년째 우리는 낙원촌 마을을 오가며 채소 돌보는 법을 배워 왔다. 올 봄에는 우리 지역에서도 직접 해 보기로 하였다. 나는 토마토에 흥미가 있어 잘 해보고 싶었다. 토마토는 수박과 같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속을 다 알 수 있어 좋다. 맛과 영양도 좋아서, 서양속담에 토마토가 발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파래진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터질 듯이 발갛게 익은 토마토를 보면 여름 낙원촌 아이들 얼굴들이 떠오른다. 성장한 방울토마토의 키는 매우 크다. 다년생 나무처럼 커서 가지와 열매가 많이 달린다. 한여름 내내 토마토 숲을 헤치며 예쁜 열매를 따는 즐거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저자거리에 모종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언제나 마음이 설레어 바빠진다. 모종을 옮겨 심어야 할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옮겨 온 몸살을 치러낸 후 뿌리가 내려질 때부터 잘 보아 나가야 한다. 키가 크고 가지도 생겨나면서 그 사이에 필요 없는 곁가지도 생겨난다. 처음에는 어떤 것이 곁가지인지 몰라 싹을 잘라버린 실수를 하여 마음 아픈 적이 있었다. 밭의 작물은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있는 것은 그만큼 때에 맞는 잔손질과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곁가지를 제 때에 잘라주지 않으면 그것은 뿔이 되어서 열매가 달리는 가지의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나무도 잘 크지 못하고 열매도 많이 열리지 못하고 부실하게 되고 만다. 심어 놓기만 하고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을 볼 때, 그 여러 가지 형상에서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어떤 나무는 아예 처음부터 두 가지로 뻗어 두 개 다 연약하게 커버린 것도 있다. 어떤 것은 곁가지가 이쪽 저쪽으로 뻗어 주 기둥과 얽혀 있는 것도 있다. 바로 잡아주기에는 그 시기가 지나버린 것이다. 과연 나는 그 모습들 중 어느 부류에 속해 있을까. 휘어져 그 무게가 느껴졌을 때에 이미 내 아이들에게도 숨겨진 곁가지가 보여 오는 것이었다. 토마토를 돌보면서 아이들 성장을 생각 하게 된다. 아이들도 유년 시절에 바르게 자라도록 곁가지가 나오지 않게 봐주어야 했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 노력하면 바로 잡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사람이 동식물과 다른 것은 인간은 그 고유한 지능을 가지고 마음을 변혁함에 따라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학교에서는 양심적이고 인격을 갖춘 지성인의 양성을 중요 시 하는 것은 형식적이 되고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이 성행하고 있다. 오 백년 전의 퇴계 선생의 철학이 오늘 다시 조명되고 있으며, 서구에서도 퇴계 사상이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그 분은 본질적 학문을 하기 위한 기초를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에 역점을 두었다. 소학의 내용이 바로 어린 시절에 일상생활에서 지키고 실천해야 할 기본적 예절에 관한 것이었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법, 물 뿌리고 청소하는 법 등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몸으로 체득하고 익혀 제 2의 천성을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한 사람의 일생을 나무에 비유할 때 그 뿌리부분이 어린 시절이 아니겠는가. 유년시절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부모들은 청소하는 법은커녕,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고 있지 않는가. 자연에서 배운 것을 실천해 가는 정신을 길러 가고 싶다. 채소밭을 가꾸듯이 마음의 뜰을 가꾸며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아야겠다. 뜰 안에는 봄부터 겨울까지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겠지. 뜰 한 옆에는 방울토마토도 심고 봉숭아 꽃씨도 뿌려야지. 한여름 밤 별빛이 내려앉은 평상 위에서 빨간 토마토를 깨물며 아이들의 마음에 봉숭아물을 들여 줄 것이다. (2002) <행촌수필> 2002년 창간호 발표
3
도라지야, 도라지야!
조 윤 수
너희를 처음 만났을 때 너희 모습은 손으로 셀 수 없는 아주 작은 갈색 알갱이였지. 따뜻한 봄 날 푹신푹신한 침대를 마련하여 고이 뉘어놓았지.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이불도 잘 덮어주었어. 나는 날마다 너희가 언제 깨어날까 침대 밭 주위를 서성거렸단다. 어느 날 새들이 내 창을 두드리며 아침을 깨웠지. 눈을 비비면서 얼른 너의 밭을 살피러 갔었어. 놀랍게도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한껏 키면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일어나고 있는 것은 너희뿐만 아니었어. 언제 숨어들었는지. 풀씨들도 같이 마구 일어나고 있지 않니. 난 정말 애를 많이 먹었단다. 풀잎 속에 뒤엉켜 있는 너희 여린 떡잎을 가려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단다. 서늘한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레 풀을 뽑아 주고 많은 떡잎들도 함께 뽑아내었다. 너희가 제대로 자라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의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침 이슬에 씻겨져 반짝이는 너희 얼굴들을 보는 즐거움은 내 일상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었지. 키가 자라고 줄기와 잎이 무성해질 때 내 가슴은 마냥 부풀었지. 너희가 내 뜰 안의 가족이 되었을 때 아무런 기대는 없었지만, 너희 어린 모습에서 언젠가 시골길섶에서 보았던 해맑은 흰빛 보랏빛 꽃송이를 그려볼 수 있었단다. 한낮의 햇살이 따가워지던 어느 날부터 작은 키에 꽃망울이 맺기 시작하였다. 여기저기에서 예쁜 미소를 지으며 피어났어. 너희 미소는 내 가슴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호수를 이루게 하였지. 그렇게 피어서 가을이면 돌아갔다, 봄이 오면 더 큰 모습으로 자라 꽃도 더 많이 피워냈지. 그 다음 해는 더 성숙한 자태로 자라 내 뜰 안을 장식하였다. 하늘하늘 나부끼는 꽃물결이 담장의 능소화와 어우러져 초여름부터 상큼한 풍경을 그려주었단다. 너희가 태어난 지 몇 번의 봄이 다녀갔을까. 낙엽 진 꽃대 끝 너희 꽃자리에 너의 전체, 처음 왔을 때 그 모습으로 응집시켜 남기고 너희는 떠났어. 새 봄이 왔어. 나는 무심코 꽃밭을 메다 걸리는 뿌리를 발견하였단다. 아하! 너희 도라지의 실체! 여러 해 맑고 예쁜 모습으로 많은 기쁨을 선사해 주었는데! 땅 속에서 그 생명의 결정체로 또 다른 몸을 살찌우고 있었다니! 이제 더 이상 땅 속에만 있을 수 없다는 듯 속살을 내미는 것이었지. 너희 마지막 역할을 몸짓으로 알려오는 것 같았다. 네 몸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도 좋은 때를 기다렸을까?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너희를 끌어안았단다. 흙 묻은 너의 몸은 정성껏 닦아주고 깨끗하게 단장시켰어. 내가 너희를 심을 때 난 너희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단다. 너희가 나서 자라고 놀던 그 땅에서 나도 같이 놀았고 너희가 호흡했던 공기와 물, 햇볕을 나도 마셨지. 한여름 시원한 바람에 땀을 씻으며 마주 손 흔들며 즐거웠단다. 처음부터 우리는 같은 운명을 먹고 살아온 거야. 한 하늘 아래 땅 위에서 같은 성품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의 형상들이 이렇게 다양한 뜻을 너희는 알겠니? <행촌수필> 2002년 창간호 발표
4 모종을 할 때는 지금 (딸기를 먹으며) 조 윤 수
요즈음은 정말 철없는 과일들이 많다. 딸기는 벌써 겨울 과일이 된지 오래다. 언 땅이 녹을 무렵부터 랩으로 포장된 딸기는 시장에 나오기 시작해서 4월이 넘으면 딸기 철이 끝나는 것 같다. 철 이른 과일은 왠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딸기를 먹을 때마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내 기억으로는 6월 6일이 현충일인 공휴일이라서 해마다 그 날은 친구들과 수원의 딸기밭으로 놀러 가는 날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 입구로 들어서면 노송지대가 펼쳐지고 그 가까이에는 딸기밭이 있는 유원지가 있었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으니, 그 거리를 지금은 알아보기가 어렵다.
몇 년 전에 텃밭에서 딸기를 키웠던 때가 떠오른다. 노지 밭에는 새 풀잎과 함께 딸기 잎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호미로 풀을 매주려다가 새순까지 뜯어버리는 수가 많았다. 딸기는 땅 밑에서 뿌리가 뻗어나가 새순이 여기저기 올라오기도 하고, 땅위에서 줄기 하나가 옆으로 쭉 뻗어나가 뿌리를 내려서 한 포기가 되기도 한다. 서로 끈으로 다 이어져 있다. 늙은 끈과 낙엽을 거둬주고 무더기로 모여 있는 딸기 순들은 한 떨기씩 모종을 떠서 옮겨주어야 서로 제 구실을 한다. 나중에 많은 열매를 기대하기보다는 지금 이 딸기를 모종해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맨손으로 모종을 잡으면 뻗어나가고 싶은 딸기모의 생명력이 손끝에서 온 몸으로 전해지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들을 옮겨주며 나도 함께 자라는 기운을 받게 되었다. 서로 살리며 살려지는 순간이 아니던가.
딸기모의 뻗어나간 끈을 자르면서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엄마와 아이를 잇고 있는 배꼽 줄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어머니와 아이가 연결되어 있는 탯줄을 잘라야 아이는 독립된 개체가 된다. 열 달 동안 이어져 있던 탯줄 아니, 그 이전부터 점지되어 왔는지도 모를 그 탯줄의 끈끈하고 진한 사랑은 아이가 젖을 뗀 후에도 계속된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엄마들의 사랑은 여러 가지 색깔을 띠고 아이들에게 칠해져서 서로 엉겨 붙어 있는 딸기 모처럼 되는 경우가 많다. 딸기 잎을 손질하고, 끈을 자르고, 모종을 해주며, 자라는 환경을 조금 거들어 주었을 뿐 모든 생명은 저절로 자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멀리 가 있는 아이들이라도 부모 자식간의 정은 감응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사랑이란 미명아래 엄마 마음의 배꼽 줄을 끊지 못하여 고무줄 같이 당겼다 놓았다 하며 부모 마음대로 조종하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관계이든 붙어 있으면 서로 성장할 수 없는 이치를 식물을 돌보며 깨닫는다.
촉촉한 단비가 내린 뒤 아침 해가 들을 물들여 오면 풍성한 푸르름에 묻히는 날을 그린다. 모종을 할 때는 지금. / 비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온 세상에 춤춰라,/ 모든 생명들이여. 식물들이 비좁은 모판에서 제 자리로 정식(定植)을 해 가듯이 인간들도 모종을 할 때를 만난 것 같다. 6.25이후, 황폐화된 우리나라를 위해 일했던 젊은 서양인들이 많았다. 피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던 엄마와 이웃들을 돌보아 주시던 수녀님들과 벽안의 신부님이 있었다. 지금 다시 그리워지는 전쟁고아들의 대부였던 알로이시오 신부는 한국 소년의집을 창설하였다. 한국 자선회에서 우정을 나누었던 미국의 월쉬 아저씨와 영국에서 온 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제주도로 와서 주민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시돌 신부. 강원도의 아쳐토리 신부. 그토록 한국을 사랑하며 열심히 일해 주었던 그들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내게 남겨주었다. 수많은 선진국의 젊은이들이 함께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아름다운 젊음을 바치려 기꺼이 자기나라를 떠나왔었다.
이제 선진국의 진입로에 들어서는 우리나라의 공항에서도 어떤 이유에서건 해외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떠났던 수많은 이민 1세대처럼 코리안 드림을 안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코시안 (한국인과 아시아인 사이에 태어난 2세들을 말하나 한국에 들어와 있는 아시안들을 일컫는 범칭어로 쓰인다.)들이 있다. 가끔은 제 삼 세계에서 어려운 이웃들과 고락을 같이 나누는 진보된 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의 리포트를 전해 듣는 것은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집은 모자라는데 가정은 비어가고 거리는 술렁대고 있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농촌에서는 아이들 소리가 끊어진지 오래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빈집을 지키고 있는 곳이 많아진다. 친환경이란 말이 사회에 널리 알려진 지도 퍽 오래다.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는 밀집해 가기만 하고 어릴 때부터 조기유학 붐이 일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난다. 모종을 할 알맞은 터와 시기는 식물의 일생을 좌우한다. 사람의 일생도 유년기의 토양과 성장이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 모판에서부터 튼튼하게 자란 모종이 넓고 좋은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철든 어른으로 성장해가기 위하여, 철든 생명이 되기 위하여 모판과 모종이 자랄 환경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2002년 3월)
5 나에게서 나에게로 조 윤 수
명덕리에서 텃밭을 일구고 살 때. 대문 밖 한 귀퉁이에 밭으로 가는 쓰레기를 모으는 장소가 있었다. 언제 심지도 않은 호박 넝쿨이 거기서 왕성하게 번져나갔다. 후덕한 어머니의 얼굴 같은 황금빛 호박꽃이 여기저기 피기 시작했다. 마치 숨바꼭질하는 아이들같이 호박열매는 널따란 이파리 밑에서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했다. 그 해 나는 의외로 호박 따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리고 버려지는 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설악동의 민박집 주인아저씨가 생각났다. 몇 년 전 여름휴가를 설악산 쪽으로 갔을 때였다. 밤중에 그 민박집에 들어갔었다. 각 방에는 집을 사용하는 방법과 쓰레기 처치에 대한 방법을 쓴 팻말이 걸려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당에 나가보았다. 백여 평 남짓한 아담하게 가꾸어진 텃밭이 정원처럼 한 눈에 들어왔다. 밭고랑을 거닐며 유심히 살펴본 텃밭의 정경이 살갑게 느껴졌다. 밭 둘레는 제법 큰 유실수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토마토 밭에는 빨간 열매들이 먹음직스럽게 달려있고, 고추밭에는 붉은 고추들이 주렁주렁 익어가고, 각종 야채들도 옹기종기 잘 가꾸어진 밭에서 제 맛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한 쪽에는 방의 팻말대로 퇴비가 될 수 있는 젖은 쓰레기장이며 분류 통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다. 아저씨의 솜씨와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아침 일찍 아저씨는 옥수수도 따고 그 날 필요한 만큼의 채소들을 따서 한 바구니 부엌으로 날라다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말끔한 차림으로 자동차를 몰고 나가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속초시의 모 기관장이었다. 그 분의 얘기인 즉, 분리수거 봉투 때문에 오히려 일 년에 설악산만한 쓰레기 산이 생겨난다며 비닐봉투 사용의 부당성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의 직장에서 할 수 있는 한 쓰레기 처리에 대한 계몽활동을 자비(自費)를 들여서 하고 있었다. 깨끗한 고장을 만들어 가는 그 분의 노력에 고개가 숙여졌었다. 그 후부터 나도 쓰레기 문제에 대하여 철저한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게 되었다. 동네 별장에 놀러오는 젊은이들에게도 가지고 온 쓰레기는 꼭 가져가게 하며 맥주병이나 캔 속에는 담배꽁초를 넣지 않도록 일깨워 주기도 하는 것이다. 분리수거용 비닐 봉투는 그 재질이 땅 속에서 빨리 썩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 갖가지 쓰레기들을 모두 담아내어 그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어 버린 것 같다. 아마도. 쓰레기봉투 속 풍경은 우리들 마음의 환경인지도 모를 일이다. 산안마을의 한 어른은 그 마을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면 꼭 하는 일이 있다. 쓰레기통을 점검하는 일이란다. 쓰레기통을 뒤적여 보면 사람들의 인식이 얼마큼 달라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어느새 물 부족 국가로 지명 받고 있다. 자동세탁기가 처음 나왔을 때 물 걱정이 되었었다. 마침내 물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 중의 하나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50 년 전 만해도 처마 밑에 물통을 놓아 빗물을 받아썼던 우리네였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자원의 남용과 개발은 본래자리로 순환되어지는 통로를 여기 저기 끊어놓아 우리 삶의 터전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주차장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질의 풍요 속에 있으면서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가난한 삶이 될 것이다.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다 준 풍요와 편리함에서 얻은 여유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앞으로의 자연 환경의 운명, 곧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잘 못 살게 되면 지구에 던져진 인간쓰레기가 될 지도 모른다. 쓰레기 더미에서 무심코 버린 것이 나를 비추듯,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와 행동도 반사되어 늘 나를 비춘다는 것을 되 챙긴다. 나에게서 나간 것이 그 순간부터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나로부터 다음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한다. 자연의 일부로써 내가 돌아갈 때도 본래의 '나'에게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순리의 삶을 찾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200l년 9월) <행촌수필> 2002년 창간호 발표
6 무지개 뜨는 마을 조 윤 수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진 뒤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흩어지는 먹구름 사이로 해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 아! 쌍무지개!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하늘에 걸린 아름다운 가교. 나는 마냥 무지개를 쫓아가고 있었다.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꿈의 상징처럼, 한 때 아름답던 추억처럼 사라져버렸다. 어린 시절 강가에 떠 있는 무지개를 떠올리며 소녀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했다. “무지개는 천국으로 가는 다리란다. 사람이 죽으면 무지개 문을 지나서 천국으로 가는 거란다.” 무지개에 얽힌 전설은 많지만 무지개가 선 곳을 파면 금은보화가 나온다는 전설을 가진 나라도 많다. 무지개의 전설을 따라 나는 무지개가 선 곳을 찾아 다녔다. 성경에서 그랬던가. 보물이 묻힌 밭을 알았다면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사라고.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낙원을 선물하자는 간절한 꿈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자식은 귀엽지만 자식보다 손자를 더 귀여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생명을 이어가고픈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무지개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은 1987년 여름방학 때부터였다. 전국 각 곳, 이웃 나라에서까지 모여든 아이들과 어른들이 100명에서 200명, 대가족이 되어 한 마을에서 생활했다. 친애의 정으로 연습했던 공동생활 체험을 통하여 만들었던 가지가지 추억들은 무지개 빛 무늬로 우리들 마음속에 새겨졌다. 우리들이 여름, 겨울 방학 때마다 8일 동안씩 한 가족으로 보내는 기간. 테마는“나와 내가 만드는 맑음· 맑음· 맑음 사회, 나는 합니다, 모두와 함께”였다. 이 공동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프로그램들은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여느 캠프와는 달랐다. 프로그램 자체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집에서 일방적이다시피 한 보호를 벗어나 무엇인가 자기 역할을 함으로써, 그 공동생활이 성립될 수 있다는 한 가족의 일원으로써, 얻는 기쁨을 일상생활 속에서 맛보도록 짜여졌다. 우리는 그 생활을 낙원촌생활이라 명명했다. 낯선 얼굴들이 이 거리 저 거리에서마을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집에서는 공주요 왕자들이었다. 학교에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이겨야 하는 경쟁심과 비교의 줄다리기에 익숙한 아이들임은 두 말 할 것도 없었다. 어른들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지식과 분별들을 주입시키게 되어,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은 많아도 행동할 수 없는 나약한 모습으로 자라도록 조장해왔다. 끊임없이 좋다, 나쁘다 하는 판단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주었다. 어린이들을 향한 지나친 보살핌은 생각하는 일조차 어른들이 대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이 물어오는 것을 스스로 해보고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답을 구하여 아이의 손에 쥐어주려 했다. 그렇게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8일 동안이지만, 누구와도 사이좋고 즐겁게 생활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지 싶었다. 매일 매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장 생활해 나가기 곤란한 것들을 아이들은 하나하나 체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일들의 중요성. 예를 들면 세탁, 식사준비, 화장실 청소, 목욕탕 청소, 식기 닦기 등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전혀 해보지 않고도 지낼 수 있었다.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역할로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아이들은 ‘놀기부대’ 역할로 맘껏 놀게 했다. 하루가 지나자 그 아이들은 심심해했다. “나, 식기 닦기 할래요.", 혹은 "청소부대 할래요."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여자 아이는 화장실 청소가 재미있다며 8일 내내 화장실 청소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넓은 자연의 품에서 동식물과 접해보고, 오감으로 숲 속의 탐험을 한다. 구슬땀을 흘리며 닭장에도 가보고 채소밭에도 가본다. 자기가 자는 방을 청소도 하며, 식사준비도 해본다. 좋아하는 음식은 두어 가지 뿐이며, 싫은 음식은 먹기 싫고, 식욕도 없어 몇 숟가락 뜨다 마는 아이도 어느새 무엇이든 잘 먹는 아이로 변한다. 이렇듯 이전의 생활이 소극적이었던 아이들이 새로운 것들을 해보고, 먹어보고, 느껴본다. 싸우는 아이들이 있을 때는 화해의 방으로, 우는 아이는‘우는 방’에서 실컷 울고 스스로 기분이 좋아져서 나오게 한다.
일단 무언가 마음속의 감성이 살아나면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본래 스스로 배우고 자라는 힘이 있었다. 그리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찾아 나서는 자신 있고 밝은 어린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과도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게 되었다. 모두가 자기가 최고, 최선의 아이로 자라는 동안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가족애를 느끼고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칠 때는 학년 별로 모여 앉아 연찬회도 열어 그 날의 감상도 발표한다. "일찍 일어나 체조를 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자는 방을 청소하니까 보람이 있었다.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어 좋았다. 처음 계란을 꺼내보았다. 따뜻했다. 이 따스함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내일이 기대된다." 등등이었다. 지금도 귀 기울이면 들려올 것 같은 황혼의 콘서트. 매일 식기 닦기를 끝마친 시간, 연지 빛 노을이 깔리고 자연스레 모여든 아이들의 노래는 하루의 절정을 이루는 즐거운 집회로 이어졌다. 언니, 오빠, 어른들이 모두 모여 노래와 춤, 촌극 등으로 그 날의 생활을 재현하는 행진이 행해졌다. 신선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창작예술의 밤이 매일 밤 그렇게 이루어졌다. 별빛이 쏟아지는 여름밤에는 서로의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주었다. 손가락을 싸맨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무지개 빛 꿈을 꾸는 듯한 아이들의 잠든 얼굴이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아이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몸에 붙여 가는 연습이 필요했다. 십수 년을 그렇게 방학 때마다 낙원촌생활의 스탭활동을 하는 동안 안개 걷힌 내 마음의 하늘에도 무지개가 떴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로 했지만 사실은 내 자신이 돌봄을 받아 정말의 부모다운 부모가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되었다. 서로에게 맞추고 부딪치는 고통을 극복하며 이루어낸 생활이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이 있었다. 이 낙원촌생활은 어릴 때부터 핵가족으로 살아 온 나와 아이들에게는 신(新)고향마을체험이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날의 풍경 또한 잊을 수 없다. 이산가족처럼 아쉬움을 안고 다음 방학을 기약하게 되었다. 여름에는 날씨도 변화무쌍하여 비가 오면 비로, 해가 뜨면 땀을 흘리며 행진은 이루어졌다. 아이들을 먼 타향으로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되어 손을 흔드는 언덕 위의 하늘에 늘 무지개가 뜨곤 하였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어지는 무지개 가교는 죽어서 가는 천국의 문이 아니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으로 이어진 둥근 무지개의 반원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2003년 9월)
7 황야에서 낙원으로
조 윤 수
누구에게나 자기만이 건너야 하는 사막이 있다고 했던가.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체득하면서 건너야 하고 그리하여 자기만이 찾을 수 있는 오아시스가 있는 것일까. 전쟁 후 부산의 거리는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가뜩이나 폐허 같은 도시 한 가운데 국제시장에 불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연기가 나고 있는 시장바닥을 뒤집고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구경을 갔었다. 매캐한 냄새가 피어나는 시장의 잿더미를 멀거니 쳐다보며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때부터 내 내면에 사막이 자리 잡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를 구덕산 기슭의 임시 천막학교에서 보내야 했다. 졸업할 무렵에서야 본교를 찾았고 졸업식은 큰 강당에서 했던 것만 기억할 뿐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도 꿈도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시험 보는 날 내 뒤통수에 대고 세수 물을 뿌리면서 "시험에나 톡 떨어져라!" 했을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했던 것은 내 책가방을 소중히 간직하는 일이었고, 책가방은 나의 피난처였던 것을 어머니는 알 수 없었으리라.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일 말고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으니까. 그런 날 보기에 얼마나 한심했으면 “저것이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수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셨을까. 봉사하러 다니는 천주교 수녀들이 얼마나 보기 좋고 부러웠으면 딸이 많으니 딸 하나쯤은 수녀로 하느님께 봉헌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을까. 그 시절 나의 유일한 위안이 있었다면 가끔 송도 앞 바다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것이었다. 모래사장을 걷다보면 바다를 건널 것 같은 착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머니의 비원의 기도가 내 생의 저변에 면면히 흘러 구도자 같은 정신으로 사막을 건너는 순례를 하게 되지나 않았을까 하고 후에 생각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보면서 비로소 난 아이들의 천진무구한 성정 속에서 낙원을 보았다. 아! 어쩌면 저 낙원을 지켜줄 것인가. 매일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같이 놀면서 꿈꾸었다. 제도 속의 유치원도 학교도 온전히 맡길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걸어온 배움 속에서 나는 낙원을 볼 수 없었으니까. ‘애아(愛兒)에게 낙원을 선물하자’는 슬로건을 내건 모임에 내 정열을 불태울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낙원이라고 하면 우리는 언제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여 향기로운 봄날의 푸른 동산을 생각한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맑은 샘물이 넘쳐서 갈증에 대한 결핍이 전연 없는 곳을 낙원으로 여긴다. 고단한 시험도 없고, 시련도 없으며, 우리를 규제하는 어떤 속박도 없는 곳. 자유와 평화만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낙원이란 영어의 ‘파라다이스’는 페르시아 말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본래의 의미는 황야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런데 나는 낙원촌을 만드는 현장에 가서 보고 참여해 보고서야 그 말의 절묘한 뜻을 알 수 있었다. 황야가 어찌 낙원을 뜻하는 말이었는가를. 뭔가 역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노력은 필요치 않았다. 헐벗은 고향의 대지가 황야처럼 권태로워 찾아 나섰던 꿈의 도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 대열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쉴새 없이 뛰어야 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시골 구석구석까지 비추는 동안 하늘의 별빛은 희미해지고 갈증을 풀어줄 오아시스는 멀기만 했다. 도시의 뒷골목이나 마천루에서 황야를 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낙원을 꿈꾸겠는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애(渴愛)의 근원이 무엇이었던지……. 유년의 순수하고 걱정 없었던 시절, 그 오아시스! 되돌아 갈 수 있는 고향도 없고, 되돌릴 추억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떠나는 일이었다. 떠나온 본향을 찾아서라면 지구촌의 끝까지 갈 수 있었다. 모든 애착을 끊고 소유에서 풀려나는 곳이 지구촌의 끝이 아닐까 싶었다. 일체의 걸림이 없는 대 자유에서 비롯한 행복한 세상. 누구도 훈련 없이 자유를 찾은 자 없다고 어떤 선구자가 말했듯이 그것은 거저 오는 것은 아니었다. 물의 근원이 산골짜기에서 시작하여 흐르다가 강물이 되고, 사막에 닿은 강물은 모래 속에 스며들고 만다. 근원인 바다에 닿기 위해서는 증발하여 다시 빗물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의 뿌리인 근원에 닿기 위하여 강물이 증발되듯 우리에게도 반드시 비약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실제로 우리가 해본 낙원촌 생활에서는 일본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참여했다. 어린이들은 일본의 언니, 오빠, 형들이 참 좋다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일본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배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들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북한의 아이들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지난 해 50년 동안 막혔던 철망이 열렸던 날, 북한과 남한의 어린이가 서로 포옹하는 장면은 눈물겨웠다. 정치적 이념을 모르는 아이들은 일상생활을 같이 하는 동안 지역과 혈연을 넘어서 어느 날 문득 알고 보니 누구나 다 형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낙원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숨은 그림을 찾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미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했듯이 혼탁한 세상에서도 마음에 낙원을 본 자는 낙원을 살고 그 낙원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힘쓴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 내 마음에서부터 낙원은 시작된다.
“장차 올 평화스런 왕국.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리라.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 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치고 젖 뗀 어린아이가독사의 굴에 겁(怯) 없이 손을 넣으리라.(이사야서 11장)
8 상상해 봐요
조 윤 수
"상상해 봐요. 경계가 없는 하나의 세계를!" 지난 대선 때 눈물 방울을 주루룩 흘리면서 기타를 뜯는 노무현 후보의 영상 광고를 TV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배경 음악으로는 존 래넌의 '이메진'이 흘렀지요. 그 광고는 우리의 감성을 파고들기에 충분한 효과를 냈습니다. 그 분도 분명 존 레넌이 상상했던 세상을 꿈꾸었을 겁니다. 나는 그 무렵 존 레넌의 옛 테이프를 꺼내서 'Imagine'을 들으며 내 젊은 날의 추억에 빠져 보곤 했습니다. 우리 세대들의 청춘(1960년 대)을 뒤흔들었던 비틀즈의 리더 멤버였던 존 래넌. 대중음악에 있어 비틀즈의 위상은 예나 지금이나 가히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존 래넌은 단순히 뮤지션의 영역을 넘어 기존 전통과 인습을 해체하려는 실험적, 자유주의적 젊은이들에게 문화적, 메시아적인 존재였기에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습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존 래넌의 음악은 브람스나 베토벤, 바흐의 작품처럼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그 때는 멋 모르고 좋아했지만. 어른이 된 후 나는 비틀즈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음악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없지만 비틀즈의 노래는 열정의 선율을 타고 식은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 같습니다. 진리의 말을 담은 가사가 정말 좋습니다. 실제로 비틀즈 멤버들은 인도에서 명상수련까지 한 것을 후에 알았습니다. 존 래넌은 일본인 전위예술가인 오노 요코와 운명적인 사랑으로 비틀즈를 탈퇴했습니다. 그들 부부가 상상하던 세계를 그려본 노래가 'IMAGINE'이었지요. 그 후 불후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Imagine there's no countries 국가 같은 건 없다고 상상해봐요 / It isn't hard to do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예요/ Nothing to kill or die for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고 /무언가를 위해 죽을 일도 없다고/ No religion too 또 종교마저 없다고 / Imagine all the people 상상해봐요 그대, 모든 사람들이/ Living life in peace ... you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걸 꿈꿔봐요"
“상상해봐요. 벽이 무너진 하나의 세계를!" 국가라는 경계가 없다면 나라를 위해 죽을 것도 없고, 신념을 위해 몸을 바쳐 죽을 일도 없습니다. 국가가 없다면 대통령도 없습니다. 신분의 높낮이도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깨어난 의식을 지닌다면 그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웃은 미워할 대상도 아니고, 더욱 침범할 대상이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일 테지요. 지구를 축소해서 한 마을로 생각해 본다면, 한 가족으로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면……. 사실 지구를 보십시오. 경계가 어디 있습니까? 남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을 지니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아름다운 한탄강은 지금도 도도히 남으로 흘러내립니다. 마침내 임진강과 합류하고 하나의 물줄기를 이룹니다. 사람이 그려놓은 지도에는 경계선이 있지만 지구 상 어디에도 땅과 땅 사이, 바다와 바다 사이에 경계는 없습니다. 새들은 자유로이 어디든 날아다니지 않습니까? 단지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만 경계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지적(知的)혁명이 필요하다고 고대로부터 성현과 철학자들은 외쳤습니다. 태양은 만물 위에 고루 퍼져 생명을 기릅니다. 혼탁한 와중에 휩쓸려 난무하며 내리는 겨울의 백설도 놀라운 통일체를 이룹니다. 바람과 공기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살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고도로 진화하여 순수이성(純粹理性)으로 빛나는 세상이 된다면, 사랑의 빛으로 여울진다면……. 그런데 꿈과는 반대로 세상은 자꾸만 험악해집니다. 가정과 사회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 경제구조와 정치의 갈등, 더 나아가 국가 간의 갈등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수채화 같이 보냈어야 할 어린 시절에 보았던 수많은 주검들은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영상으로 남았습니다. 이라크에서 폭죽 같은 불꽃이 터질 때마다 존 래넌의 노래가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이라크에 터지는 폭격이 매일 TV에 비친 것은 전쟁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도시가 산산조각 나는 불꽃놀이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막은 내렸지만 무대 밑에서 다른 막이 준비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6.25 때, 무서워서 멀리서 손가락 사이로 지켜보았던 시체더미를 실은 트럭과 피난길이 떠올랐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은 뼈아픈 세월의 흔적을 안고 지금도 남북이 갈라진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남북이 하나로만 되어도 얼마나 좋을까요?
오천 년의 고도인 바그다드! 불타버린 바그다드는 우리의 자화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옛날, 샤흐라자드 왕비의 천일야화가 샤리아르 왕을 녹였듯이 침략적인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현대의 천일야화는 없는 것일까요? 어쩌면 수많은 나라가 지금까지 자국의 이익만을 잣대로 그런 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개인이 지닌 가짐에서 비롯되었고 사회의 욕망이었습니다. 침략의 행위는 우리의 개개인 안에 숨겨진 극단적인 이중성과 이기심, 소유와 탐욕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내 안의 뿌리 깊은 이기심을 참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염 속에 태워야 할 것은 우리의 요망스런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존 래넌은 그렇게 요절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나 봅니다. 노래 속에 영원히 살아서 오늘도 우리를 꿈꾸게 합니다. 존 래넌과 이상향을 그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립습니다. "You may say I'm a dreamer / 나를 몽상가라고 하시겠지요 / But I'm not the only one하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녜요 /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 그대 언젠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래요 / And the world will be one / 그러면 온 세상이 하나가 될 거예요."
9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조 윤 수
다시 존 래넌의 'IMAGINE'을 음미해 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국의 국보라면 존 레넌은 영국의 국보일 만큼 팝 아티스트로서 신화적인 인물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절, 60년대에 반전운동가로, 사상가로 그는 일본인 부인과 함께 전 유럽을 돌며 열렬하게 베트남 반전운동을 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극단적 사상으로 사람들의 폐부를 흔들었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 정점의 나이에 요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하나의 세계를 꿈꾸는 노래는 강물같이 우리 곁에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오랜 동안 꿈꾸고 노래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이제는 노래와 구호만을 내건 것이 아닌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삶의 현장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조용한 사랑의 혁명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마음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세월은 내 생애의 보람이었습니다.
"Imagine there's no heaven 천국 같은 건 없다고 상상해 봐요 / It's easy if you try 하려고만 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예요 / No hell below us 지옥이 우리 발밑에 있는 것도 아니고 / Above us only sky 우리의 머리 위에는 단지 빈 하늘만 펼쳐 있을 뿐 /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aa - 모든 사람들이 오늘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걸 꿈꿔보세요"
"상상해봐요.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세계를!" 천국이 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일을 위해 기도만 하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에 가려고 기도하는 시간도 없이, 단지 머리 위에 파란 하늘만 있고 오늘만을 위해 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지금 이 순간뿐, 삶도 지금 이 순간을 남김없이 사는 것이라면 그것이 종교가 아닐까요. 금강경에서 그랬던가요? 이름이 마음일 뿐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 현재심(現在心) 불가득(不可得),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이라 했지요. 지나간 일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을 걱정만 하다 보내는 오늘이기에 슬픔과 괴로움, 혼란의 연속이 되고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가 천국이 될 수 있다면 종교분쟁이나 전쟁도 없을 것입니다.
"Imagine all the people / Living life in peace…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화 속에 살아가는 걸 꿈꿔보세요"
오늘뿐인 삶을 최선으로 살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평화이며 행복이련만, 왜 그리 되지 못할까요. 모든 생명들은 깊은 평화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도 평화의 원천에 대한 혼란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화가 난 사람이라도 원하는 것은 평화일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투쟁을 하고 전쟁을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떤 행동으로 나타날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평화의 원천에서 나왔으므로 평화를 재창조하는 것도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내가 평화롭고 싶지 않다거나 평화로워지지 않고서는 남에게 평화를 줄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더더욱 '이메진'을 간절하게 노래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 속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봐요." 이 대목에서 '유후! ∼…….' 하며 길게 울리는 고조된 음색이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을 뭔가 가득 차 오르게 합니다. '상상해봐요'
"You may say I'm a dreamer 나를 몽상가라고 하겠지요 / But I'm not the only one 하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 게 아니랍니다 /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그대 언젠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래요 / And the world will be one 그러면 우리의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10
바로 이거야
조윤수
아직도 정열적인 아름다운 여인. 70세의 나이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지난 2003년 6월 20일 존 래넌의 부인인 오노 요코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전위 예술가인 그녀의 회고 작품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오노 요코는 분단의 운명을 살고 있는 한국의 여성을 만나보고 싶어했답니다. "예술은 건강한 컴뮤니케이션을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존 래넌이 살아 있을 당시 오노 요코는 존 래넌과 함께 평화를 위한 일련의 일을 펼쳐나갔습니다. 그 후로 그녀는 예술과 일상의 범위를 확대하고 모든 관심사를 평화와 반전(反戰)에 집중하였습니다. 'IMAGINE'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전시회에 가보고 싶습니다. 마치 존 래넌을 만나는 기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렘이 있습니다.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그녀의 고독한 예술작업의 과정이 상상되어 가슴이 찡했습니다.
40여 년 전, 오노 요코와 존 래넌의 사랑은 세기적인 것이었지요. 비틀즈를 탈퇴하고 잠시 실의에 빠졌던 존에게 오노는 새로운 음악 환경 속에서 음악적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래넌은 그것이 자신의 음악이 나아갈 방향이었다고 했습니다. 존 래넌의 아내로 그의 그늘 아래서 너무나 유명했지만 무명한 작가로 평생을 살았던 오노 요코. 그러나 그녀는 존 래넌을 통해 최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존 래넌과 그녀의 혼이 담긴 평화의 노래인 'IMAGINE'을 말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된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불러봅니다. 언젠가 존 래넌이 이야기하길 '이메진'은 이 세상에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라고 했다는 군요. "바로 이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상상해 봐요 Imagine no possesions / 그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I wonder if you can / 탐욕도 없고, 배고픔도 없는 No need for greed or hunger / 인류의 형제애가 가득한 A brotherhood of man /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이 세상을 Imagine all the people / Sharing all the world... you"
"상상해봐요."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없는 세계를.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해봅니다. 존 래넌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지구를 100명의 축소된 마을로 생각해 본다면 지금도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죽기 직전이며, 그러나 15명은 비만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을의 모든 부(富) 중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이랍니다.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 나눠가졌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도 그 74명중에 들어 있을 것 같군요. 그래서 오히려 삶의 방향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생활고로 인하여 가족이 동반 자살한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란 말이 무색합니다. 고귀한 생명을 그렇게 헌신짝같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펼쳐볼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가 비정한 것일까요? 슬픈 일입니다. 인간의 갈등과 전쟁의 역사도 이 소유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두 손안에 쥐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가짐의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옛날에 어느 분으로부터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소유란 부자들에게 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요. 거지가 밥을 빌어먹는 깡통 하나라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 소유의식에서는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있다면 말입니다. 소유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라는 에고(Ego)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은 영원한 나락에서 헤맬지도 모릅니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많은 혼란을 겪은 후에야 알았습니다. 남녀의 차이를 모르고 적과 동지를 오가며 부부간의 갈등으로 감정을 소모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또 아이들을 키우며 내 아이부터 먼저 보는 욕심과 내 틀에 맞는 아이이기를 얼마나 원했던 지요. '나'라고 하는 것까지도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소유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한국전쟁의 수난과 인류 역사를 점철하고 있는 전쟁의 씨앗도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 '나'란 에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불렀을 '이메진'의 후렴에서는 저도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꿈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만인이 꿈을 꾸면 얼마든지 현실로 가꿔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선명한 그림을 가지고 꿈꾸는 사람이 아직 모자라는가 봐요. 오로지 순수하고 간절한 꿈이 아니어서일까요? 상상해봐요.
11 어깨를 끼고 달리면 편하다
조 윤 수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왜 안나오는 거야?" 아직 시계는 아침 여섯시 반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다시 시계를 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주방의 시계는 분명히 7시 반이었다. "어머 어떻게 하니? 내 침실의 자명종 시계가 한 시간 앞당겨 맞추어져 있는 것을 몰랐구나." 우리는 아침 7시 50분 기차를 타기로 했다. 순간 서로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는 시간이었다. 몇 년 만에 2박 3일의 휴가를 얻은 딸은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해방되어 나와 명상여행을 같이 하기로 했다. 강원도 태백에는 초 교파적인 영성수련원이 있다. 거기까지 갈려면 하루 종일 두 번의 기차를 갈아타고 가야 한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나는 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나 혼자 낯선 길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이며 꼭 가야할 이유는 없었다. 함께 가고 오는 과정을 즐기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이었으나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혼자 떠나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거라고 딸을 다독였다. 아쉽지만 이번 여행은 혼자 다녀오라고 일러두고 다음 기차를 탈까 하고 길을 나서다가 되돌아오고 말았다.
어렸을 때는 내가 데리고 다녔는데 이제는 오히려 엄마를 챙겨주는 딸이 되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 낙원촌 캠프에 가는 날이었다. 집에서부터 같이 출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 날은 유난히 길이 막혀 시간이 촉박해져 마음도 약간은 조급했다. 기차역 앞에 당도하니 정말 몇 분이 안 남았었다. 우리는 둘이 손을 잡고 달렸다. 플랫폼에 나오니 기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열차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차가 스르르 움직였다. 그 때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을 달리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길을 나서보면 언제나 많은 사림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무엇 하는 사람들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두 바쁜 표정으로 누구보다 빨리 갈려고만 한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남보다 앞서 가서 선두(先頭)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길을 나서면 빨리 가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빨리 도착해야 할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먼저 도착한 사람이 행복을 모두 차지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뒤에 쳐져 있는데 혼자 외로이 달려서 잡은 결과가 행복일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되새겨지는 이야기가 있다. 내 인생의 지평을 더 넓게 펼쳐주었던 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이야기는 어느 역인지 모르지만 또, 이 경우에 정확한 역의 이름은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햇살이 뜨거운 여름 길을 땀을 훔치면서, Y씨와 몇 사람의 동행자가 역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자. "찌는 듯한 먼지투성이의 길은 시가지 가운데까지 계속되었다. 시간을 재촉하면서 걷는 듯해서, 가끔 시계를 보는 사람도 있다. '자, 앞으로 3분밖에 없다.' 그래도 모두는 각별히 초조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고, 조금 보폭이 커지고 속도도 빨라진 정도였다. 드디어 역의 구내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어떤 다른 사람이 '열차가 들어왔다.'라고 외쳤다. 그때 Y씨는 간발의 틈도 없이 '어깨를 끼고 달리자'라고 해서 몇 사람이 함께 어깨를 끼고 달렸다. 역 머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이상한 광경으로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버스나 기차시간에 늦어진다고 했을 때, 달려가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이럴 때 모두 어깨를 끼고 달린 적이 있는가. 이렇게 달린 끝에 시간에 맞추었는지 어떠했는지는 들은바 없지만 Y씨는 '어깨를 끼고 달린 쪽이 편하고 빠르네요.'라고 말한 것 같다. 나의 경험으로는, 이런 때, 얼른 자기 나름으로 달려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해서 시간에 맞추었지만 발이 늦은 사람 때문에 모처럼 달려온 자신까지도 늦게 되는 경우가 있다. 먼저 도착했다 해도, 나중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것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실생활 그 자체이지 않을까. 내가 정말 그렇구나 생각한 것은 이럴 경우에 '어깨를 끼고 달리면서 편하고 빠르다'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깨를 끼고도 달리면 편하고 빠르다' 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대체 무엇을 향해서 '빠르다'라고 말하는 걸까. 우리들 인류는 21세기를 어떠한 시대로 맞아들여, 무엇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목적도 수단도 잘못 취하고 있는 착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시작도 ·도정도 가야할 곳도 '사이좋음 한줄기', 이 편하고 간단한 길을 다음대의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라 안에서, 아니 온 인류가 유일무이한 '행복의 열차'에 모두 타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해의 마지막 날, 영원의 시간, 0시를 통과하는 의례가 아무리 시끌벅적해도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같이 내 마음에도 새 태양이 밝아오지 않는다면 새 날은 오지 않으리라. 묵은해와 새해 사이는 어떤 틈도 없건만 마치 새 세상이 확 다가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희망의 열차'는 기다리고 있었다. 2004년 4월이면 우리 철도의 100년 역사에 크나큰 전환점이 될 초고속철도가 운행된다. 단 두 시간 반 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릴 수 있게 된다. 혼자 빨리 달리다가 나는 넘어져서 발을 다치고 말았다. 하느님은 너무 앞서 간다고 내 발목을 잡고 쉬라고 하신다. 누군가하고 사이좋게 같이 팔짱이라도 끼고 걸었다면 다치지는 않았겠지. 같이 가야할 사람을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혼자 서둘러 갈 필요도 없었다. 이 겨울 마른 풀덤불에 길게 누워서 아직도 오지 않은 사람을 새봄을 기다리듯 기다려야 하나보다. 꽃피는 사월이 되어 부산 가는 '희망의 열차'를 타러 가자고 할 사람이 오면 나도 '어깨를 끼고 달리자' 라고 말해볼 꺼나. (2004년) 격월간 <좋은 문학> 2004년 4/5월호 발표
12
줄탁동시(口卒啄同時) 조 윤 수
닭의 해를 맞이하는 감회가 새롭다. 닭씨들이 진짜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18년 전, 내 인생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닭씨 가족과의 사귐. 닭씨로부터 받은 소중한 알 하나에서 '나'를 찾게 될 줄이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새벽닭들의 '꼬끼오' 소리에 잠을 깨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바스락거렸다. 닭장 문을 '똑 똑' 두드리며 "모이 가지고 왔어요."라고 인사말을 하고 들어가서 푸른 풀과 사료를 듬북 안겨 주었다. 닭장에 들어갈 때는 깨끗한 몸과 순수한 마음으로 발을 소독하고 조심조심 들어갔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 생전 처음으로 만난 닭씨들이었다. 나올 때는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알을 처음 끄집어낼 때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는 얼마나 행복한 느낌이었는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 따스함을 전하고 싶었다. 닭씨들은 용케도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 싫어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들어올 때면 마구 쪼다대었다. 닭씨들을 먼저 쾌적하게 해주니 그들도 생명의 알을 사람에게 선물하였다. 구구대는 닭씨들의 소리가 잠잠해지고 어둠이 내리면 개 짖는 소리가 피곤한 눈꺼풀을 내리게 했다. 하루를 마감한 마을은 깊은 강물 위에 내린 산 그림자 같이 고요한 정적 속에 파묻혀 행복한 내일을 꿈꾸었었다.
설날을 맞이하여 국립전주박물관은 본관 한 쪽 벽에 유신(酉神)상 액자를 걸었다. 기획 전시실 입구에서는 대형 닭씨 가족사진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12간지 중에서 닭의신은 끝이 뾰족한 쇠몽둥이를 휘두르고 닭 머리에 사람 몸뚱이 모습의 '진달라(眞達羅)'이다. 진달라는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원을 가진 신. 갑옷을 입은 무시무시한 진달라가 올해의 수호신이다.
불교에서도 닭의 이미지는 깨달음이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의 공안(公案)을 참구 할 때 절실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마치 닭이 알을 품듯…, 어머니가 아이를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뚫고 나아갈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미 닭이 알을23일 정도 품으면 부화하는데, 알맞은 환경과 온도가 절대적이다. 60여 년 전, 일본에서 야마기시란 분이 이러한 닭의 생태를 실험하고 벼농사에 적용하여 전후 일본 사회에 기여했다. 그리고 알의 부화과정을 인간에 적용하여 전통적인 종교인이 아닐지라도 선가의 깨달음을 삶의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인연이 닿아 그 '특별강습연찬회'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 기간 동안 수련자들을 잘 보아주는 안내자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수련자들의 관계가 어미닭이 알을 품어주는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 수련과정은 알에 갇혔던 자의식에서 깨어날 수 있는 짜임새로 구성되었다. 연찬 내용은 선가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것을 축약해 놓은 듯한, 생을 통하여 반드시 우리가 뚫어야 할 몇 가지 과제였다. 일정한 기초 과정을 연수한 다음 연찬학교에 입학하는데, 그 학교는 입학은 있지만 졸업이 없다. 아마도 깨달음의 여행은 끝이 없다는 뜻인 듯 했다. 그 과정을 체험한 사람들은 삶을 통하여 무고정(無固定) 전진(前進)을 계속할 수 있는 수행을 해 간다. 누구나 다 인생학교의 학생이랄 수도 있겠지만 교과 과정에 따라서 학과가 달라질 뿐이다. 수련은 닭의 삶을 집중하여 관찰하고 같이 해 보는 작업이며 대부분 일상의 현장이나 자연 속에서 행하는 일들인데 마치 불교의 '비파사나 명상' 같은 것이다. 해보고 어떤지, 자기 관념과 사실의 세계는 정말 어떤지를 찾아내어 서로 연찬하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딱딱한 껍질이나 틀이 무엇이란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을 깨고 벗길 수 있었다. 고정된 틀을 깨는 일이란 생각과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훈련 없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자 아무도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힘들어서 넘어야 할 고개마다 도중하차하고 싶은 때가 많았지만 진퇴양난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수행이었기에 상쾌한 고통이었다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힘이 나고 산뜻한 기분이 든다. 참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겨우 맞았다고 생각했다. 난 그때 '벽암록'에 나온다는 '줄탁동시'란 공안의 이야기를 체험으로 알았다. 어미와 병아리의 관계를 수행승을 도와주는 스승과의 관계에 비유한 것은 너무도 적확하였다. 야마기시란 분은 절묘하게도 그것을 간파하여 현대인에 맞는 수행방법을 창안했다. 위대한 발견이었다.
알다시피 줄탁동시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가 되어서 안에서 쪼아대고, 밖에서 어미 닭도 함께 쪼아줄 때 껍질이 깨어지고 병아리가 살아 나올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줄탁동시는 때가 성숙했을 때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이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너무 일찍 나오게 되면 병아리는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이나 동물도 자랄 때 그 성장점을 잘 보아 돌보는 이가 적시적기에 불필요한 잔가지를 쳐주어야 한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서로서로 돌보아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였다. 안락함에 취해 자칫 방심하는 동안 우리들은 부화하지 못하는 알인 채로 몸만 자라는 인생을 보낼 수가 많은 것이다.
우리 가족은 10여 년 방학 때마다 야마기시 마을에서 열리는 어린이 낙원촌 캠프를 체험한 바 있다. 우리는 닭에게서 배운 행복한 삶을 실행하도록 노력한다. 계란의 따스함을 통하여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그 무엇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많은 세월 사람들은 뭔가의 귀신에 씌어서 진짜가 뭔지를 잊고 있다. 암컷과 수컷, 음양의 조화가 있고, 쾌적한 자연환경에서 싱싱한 먹거리를 먹으며 행복한 삶을 누리는 닭씨들의 풍성한 선물. 갓 낳은 알에서 따뜻한 봄 햇살을 마신다. 아기의 눈망울 같이 반짝이는 생명력이 전해진다. 진달라대장이 쇠몽둥이를 휘둘러 진짜인 척하는 모든 가짜 귀신들을 몰아내어 밝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늠름한 벼슬을 단 잘 생긴 수탉과 부지런한 암탁 그리고 예쁜 병아리들의 가족사진이 참 멋지다.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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