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수필집<바람의 커튼>

<바람의 커튼> 3부 제비가 보고싶다

차보살 다림화 2009. 9. 7. 19:04

<바람의 커튼> 3부, 제비가 보고 싶다   2008/11/11 19:27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ysjo43/3486113

3부

 

제비가 보 싶다

겨울 속의 봄

그대가 옆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봄날은 간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넝쿨장미

가을에는

명절이 두려워요

삼십 년, 그리고

노부모는 찾아오지 말래

 

 

 

1

제비가 보고싶다
   - 사부곡-
                                                             
                                         조윤수

 

 

  "제비 앞장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봄이 가고 여름이 다 지나도록 제비 한 마리 볼 수 없다. 제비 소식을 수소문해보아도 아무도 모른다.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지지배배 거리는 제비를 볼 수 없다.
  명덕리에 살 때는 제비도 우리 가족이었다. 한 입 한 입 지푸라기와 흙을 실어 나르는가 하면, 어느 사이 둥지가 완성되었다. 그 정교한 솜씨에 놀라 숨죽여야 했다. 둥지 안에는 새끼들의 앙증맞은 머리가 옹기종기 샛별 같은 눈을 반짝였다. 처마 밑 제비 둥지 바로 옆에는 못이 한 개 박혀 있었다. 땅거미가 짙게 내려 마당 끝을 알아 볼 수 없게 되면 어김없이 아빠제비는 그 못 위에 앉았다. 언제나 그렇게 새끼들의 둥지를 지키며 그 못 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게 되자, 제비들은 가까운 빨랫줄까지 날았다. 아빠제비는 새끼들과 나란히 비행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다음엔 좀 더 먼 전깃줄까지. 그렇게 해서 비행기술과 먹이를 구하는 연습을 시켰으리라.

  마루 끝에 서서 멀리 날아가는 제비를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교통수단도 없었던 40년 전, 큰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두 동생과 함께 마산으로 이사해야 했다. 부산에서 타향인 전주로 온 지 삼 년 되던 때였다. 남원을 통과 할 때, 아버지는 광한루를 구경하며 기념사진도 찍고 가자고 했단다. 이사를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런 여유와 낭만을 즐길 수 있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스포츠도 다양하게 좋아 하셨다. 특히 축구와 유도는 수준 급이었다. 외아들을 어렸을 때부터 양손을 쓰게 하여 야구 선수로 키우려 했던 꿈도 가지셨다. 한국 축구 신화를 이룬 붉은 악마들의 함성을 하늘에서도 들으시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셨으리라.

  전후(戰後)의 격동기에 아버지는 영호남을 직장관계로 몇 번을 오가야 했다. 자연히 일찍부터 영호남을 잊는 가교 역할을 하신 셈이었다. 그 인연으로 내가 전주까지 와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며, 결국 전주 총각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잦은 전근으로 어머니와 우리 5남매는 헤어져 살았던 시기가 많았다. 아버지는 3남 2녀 중 차남으로 진주의 큰들(상평동)에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사헌대부의 벼슬로 큰들의 땅을 하사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큰들은 함안 조씨 집성촌이 되었단다.

  "아! 그래서 한 번도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었구나!"
  처음으로 들어보는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전설같이 들렸다. 증조 할아버지는 일찍 할머니를 여의시고 잇따라 큰아들과 며느리마저 잃었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32세 34세로 5남매만 고스란히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단다.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 손에 자라셨다. 윗대부터 부농이었으므로 농사는 머슴들이 짓고 증조 할아버지는 지극 정성 5남매를 키우시느라고 여우란 별명을 얻기까지 했단다. 동네에서 늘 여우할아버지라 불리었다 한다. 그 여우할아버지 덕에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사촌 올케언니가 실타래 풀 듯 풀어내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겨우 우리 친정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있었다. 문득문득 궁금했던 아버지의 외로움과 그리움까지 넘실대는 남강의 강물이 되어 밀려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늘 가을하늘 같은 낭만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증조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어머니의 오랜 병상생활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독감과 더불어 우리 5남매를 지켜보는 외로움의 짐을 벗을 수 없었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늘 100살까지는 살아야 한다고 술 한 잔 드실 때마다 말씀을 하셨다. 겨우 68세까지 밖에 못 버티셨지만.
  인민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기 직전에 부산으로 전근을 가게되어 일촉즉발 목숨을 구하게 된 아버지는 그렇게 얻은 목숨의 대가를 평생 치러내야 하셨다. 부산에서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왜, 또 어디로 이사를 해야 했는지 몰랐다. 어린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의문이었다. 대나무 숲 소슬바람이 아버지의 성격을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곧은 심성 때문에 주어진 그대로 마다 않고 전근을 받아들였으리라. 요즈음 공무원 같았으면 그 멀리까지 가지 않고 자신의 연고지 근처에 남아 있도록 미리 손을 썼을 텐데 말이다.

  전선이 어떤 변동이 생길지도 모르는 6.25의 전시 상황이었다. 서울이 탈환되고 압록강까지 국군이 밀고 올라갔다. 아버지는 정보통이었으므로 다시는 그럴 일 없다는 확신과 믿음으로 9.28수복 때, 임신 중이었던 엄마와 어린 네 자매를 줄줄이 데리고 개성까지 올라갔다. 때마침 귀한 운송수단까지 얻을 수 있었으므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얼마나 무모한 대 이동이었는가. 이 사건이야말로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서 실패를 하게된 3대 사건 중의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회생 할 수 없는 일생 일대의 타격이었다. 몇 달 사이에 가산을 탕진하고 맨 손이 되어 다시 그 이듬해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으니까 말이다. 오로지 가산을 통째로 쏟아 부으러 간 이동이었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이면 떨어진 땡감을 줍기 위해 돌아다녔던 고향집 고샅길과 과수원 길은 지금은 자동차가 즐비하게 굴러다니고 있다. 대나무 숲 속 길을 가로질러 가면 강가가 나왔었다. 그 대나무 숲은 넓은 자동차길이 되고 높이 쌓은 둑 아래로 길게 남강 물줄기가 햇빛을 받고 나른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다. 강 언저리에 지금도 남아 있는 한 두 줄기의 대나무가 그곳이 옛날의 대숲의 자리였음을 말해준다.
  홍수에 잠겨버린 김해의 한림면을 보면서,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까지 더하여 절절한 내 가슴에도 흙탕물이 넘치는 것 같다. 남강 언저리에 해마다 심었던 아버지의 미류나무 모종들도 그렇게 홍수에 떠내려갔겠지. 그래도 심고 또 심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시다가 끝내 포기하셨다. 강 하구 읍내로 이어지는 길도 물에 차버리면 치마를 둥둥 걷고 첨벙대며 건너갔던 기억이 아물거린다. 디벼리 고개 벼랑끝에는 울창한 나무 이파리들이 옛 얘기를 해줄 듯 나풀거리고 있다.

  배롱나무 꽃 화사하게 핀 강변 둑을 거닐어 본다. 둑 아래를 가리키며,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 논길이 나 있었단다." 등뒤에서 내 언니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말을 타고 고향에 새 소식을 가지고 자주 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동네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새로운 농작물에 대한 새 정보가 있을 때마다 모종을 구하여 고향의 큰집에 가지고 오셨다. 언제나 큰집에서는 새 품종을 먼저 재배하는 선구자였다고 올케 언니는 그 때를 회상했다.‘아버지!’하고 부르면 강둑 저 끝에서 멋진 말을 타고 편자소리도 당당하게 울리며 달려오실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버지가 그렇게 조실부모하셨기에 얼마나 우리 5남매를 애틋하게 생각하셨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언니들을 일일이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시거나 손잡고 다니셨다. 우리 남매들의 이름에는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아버지의 작명 솜씨도 배어있다. 해방 후 태어난 동생 둘의 이름은 무궁화‘근(槿)’자를 씀으로서 그 기쁨을 나타내셨다. 내가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마산에서, 부산에서 일부러 올라오셔서 4.19의 혼란기를 잘 보내라는 교훈을 잊지 않으셨고,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도 암행어사처럼 자취 집에 불쑥 나타나시곤 하셨던 아버지였다.
  전후의 혼란기, 아버지의 휴직시기는 끼니거리를 걱정해야 했다. 한 여름 아버지는 흥부가족처럼 우리를 데리고 큰집을 찾았던 것이다. 내가 살면서 늘 그리워했던 고향의 즐거운 추억은 부모님에게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철모르고 자매들이 흩어져 보냈던 그 시기, 들판을 뛰어다니며 입가에 보라 빛 가지 물을 들이면서 놀기에만 바빴었다. 아름답고 그립기만 했던 그 여름이 밥을 얻어먹기 위하여 찾아간 흥부가족의 형님 댁 방문이었다. 부모의 나이를 다 살아본 후, 그 추억의 사진이 가슴 저미도록 되새겨지는 아픔으로 다가올 줄을 그 때는 알 수 없었다.
  제비는 아버지에게 시시 때때 알맞게 박 씨앗 대신에 새 정보를 날라다 주었을 게다. 공해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서 제비들이 오지 않는 걸까? 제비들이 다시 찾아오는 풍성한 들판이 되면 아버지 소식 담은 편지를 물고 올텐데. 정년퇴직 때 아버지의 사진이 신문 한 구석에 청렴 공무원상으로 게재되어 있었다. 먹을 것과 집을 걱정하지 않았던 우리는, 아버지가 노후에 살 수 있는 집 한 칸을 재직 중에 장만할 여유를 갖지 못한 이유를, 그 사진으로 인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느 해 여름, 시아버님께서 절선(節扇)을 부산의 아버지께 선물하셨다. 아버지는 시조 한 수로 이렇게 화답을 하셨다. 合竹扇風 嶺湖南 / 長霖大水 何故延 / 齊雨然名 到三伏 / 尊堂萬福 遠祝耳 (합죽선 바람은 영호남을 잇고/ 긴 장마는 어찌된 연고로 이리 길꼬/ 비 개고 삼복 더위에 이르니/ 귀 가정에 만복이 깃들기를 멀리서 축원합니다.) (2002년 여름)
<전북문단> 2003년 제 42호

 

 

 

 

 

 

2
겨울 속의 봄
 
                                            조윤수


  겨울 속에서 봄을 캔다. 지난번의 혹독한 추위와 폭설의 자취가 산그늘에 희끗희끗 남아 있다. 화분갈이를 하려고 흙을 담으러 내려왔다가 밭두둑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냉이를 발견했다. 두껍게 쌓였던 눈 속에서도 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흙을 털자 뿌리는 하얀 맨살을 드러냈다. 추위를 이겨낸 냉이가 향긋한 봄 냄새를 풍긴다.
  눈이 쌓이고 땅이 얼게되면 모두 출퇴근 차량 운행에 긴장해야 한다. 도시인들은 단 하루도 백설 속에서 마음을 비울 시간조차 없다. 길이 막혀서 소동이 일고 교통사고가 여기저기에서 터지기 일쑤다. 그래도, 그리움의 정령들이 춤추는 듯 눈 내리는 하늘을 볼 때 아! 하는 그 첫 느낌은 놓치지 말일이다.

  물탱크에서 내려오던 호스가 얼었었다. 폭설이 연이어 내렸던 그 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은  고향을 생각나게 하였다. 날이 풀어져야 호스는 녹았다. 마당 가운데 있던 수도에서 물을 받아다 집안의 물독에 담아두고 사용해야 했다. 춥고 불편했던 일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백의 향연을 어찌 생활의 불편 때문에 투덜대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나와 놀아도 좋다는 백설의 꼬임에 빠져버렸다. 오랜만에 보는 눈꽃들의 세상나들이가 아닌가. 기쁘게 축제를 벌이자고 눈발은 나를 꼬드겼다. 생활의 번거로움과 분주함도 이 고요한 순백의 평화에 스르르 잠겨들 수밖에 없었다.

  백설은 순백의 나라를 연출한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기다렸던 백설의 하강이었던가. 그래서 내려올 때 그토록 살풀이하듯 윤무(輪舞)를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쌓인 눈은 사랑의 덩어리였다. 사랑으로 하나되고 사랑의 힘을 확인한 적설(積雪)은 새 삶을 꿈꾼다. 가을이면 돌아가야 할 사연을 안고 왔던 푸른 잎처럼 적설도 본래로 돌아가야 하리라.  햇볕을 받아 녹으면 땅을 적시고 땅속으로 스며들어 생명수로 흘러야 한다. 만나는 풍광을 감격의 눈물로 맞이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며 숲의 정령들과의 은밀한 랑데부도 즐기리라. 시냇물이 되어 멋진 바위와도 만나고, 청아하게 흐르는 소리를 내며 달빛을 적시리라. 드디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어 사공의 뱃노래에 한 숨 돌리기도 하겠지. 때로는 벼랑에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가 되어 아름다운 곡예(曲藝)도 펼친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물은 귀향가(歸鄕歌)를 읊조리리라.

  거실 가득 들어온 햇살이 포근하다. 잠시의 향연은 언제나 찬란했다. 묵묵히 기다렸던 태양의 따사로움이 얼마나 고마운가. 눈의 잔치는 뒤풀이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그렇다. 축제는 늘 그렇게 왔다 가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육신으로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갈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은 엄연한 생명의 순환법칙까지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한다.

  얼마 전, 신문이나 TV뉴스에서는 인간복제 이야기로 떠들썩했었다. 그 배경과 진위야 알 수 없으나 과학적인 사실로 증명할 수 없게 되어 그 사실 여부가 스스로 꼬리를 감춘 듯하다. 구약성서 창세기 편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의식을 닮은 영원한 생명 성을 부여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 복제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은 과학혁명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불임부부의 걱정을 씻어준다고도 했으며, 불치병 치료나 장기이식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다고도 했다. 또한 유전자의 의도적 조작으로 생명의 연장과 위대한 능력을 소유한 자의 재생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질서를 잃어 가면서 눈앞의 시급한 문제들만 해결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힌다면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다. 인간성의 회복이 시급한 현대에 더욱 타락의 길을 재촉하는 과학기술이 된다면 인류의 발전을 꾀하는 과학이 앞으로 큰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연일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아! 이 적설이 녹지 않으면 어쩌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것은 마치 생명들이 태어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상해 보라. 순리대로 순환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순리에 역행하려는 인간만이 괴로울 뿐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할 것 같다.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을 회복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리라. 생명나무를 찾을 수 있는 밝은 혜안이 필요할 것 같다. 육신으로는 단 한 번뿐인 생이다. 천수를 다 할 때까지 서로에게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으련만. 사람이 무덤으로 돌아갈 때 생의 찬미를 부르며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백설의 귀향(歸鄕)처럼….
  잔설 속에서 캐낸 냉이국이 새 봄의 서곡이 되어 내 안에서 감돌아 흐른다.
 (2003년 1월)

 

 

 

 

 

 

 

 

 

3
그대가 옆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조윤수

 

 

  봄 햇살의 맛은 막 구워낸 슈크림을 먹는 것 같습니다. 창문을 활짝 엽니다. 훈훈한 봄바람에 흙 내음이 실려옵니다. 구석구석 끼어 있는 겨울먼지를 봄바람에 날려보내렵니다.
  뒤창으로 보이는 대나무의 머리칼이 갈색으로 염색되었습니다. 앞뜰의 복숭아나무 가지에 까치가 내려앉아요. 꺅!꺅! 파다닥! 날갯짓이 나를 불러냅니다. 도랑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들이 봄 노래처럼 울려 퍼집니다. 햇살을 포근하게 받은 땅 밑에서 수런거리는 듯 봄이 열리는 소리에 마음도 수런거립니다.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도 봄바람 타고 창 밖으로 날아갑니다. 봄이 벌써 내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나는 봄이 그립습니다. 봄을 만지고 싶습니다. 봄을 마시고 싶습니다. 마음이 바빠집니다. 손놀림도 분주해집니다. 사랑하는 님과의 약속도 아닌데 그보다 더 설레는 마음입니다.
  까치와 풀꽃과 놀려면 까치 같은 옷을 입어야겠지요. 아니 까치는 너무 멋쟁이라서 나는 그런 차림은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한 때는 패션의 거리에 어울리게 멋을 내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들꽃과 새들은 그런 멋쟁이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풀꽃 같은 옷을 입어야겠지요. 새들을 가까이 보려면 허름한 옷을 입고 화장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류학자는 말했습니다. 아마도 마른 갈대 옷 같은 낡은 옷이면 가까이 있어도 낯설지 않겠지요. 차라리 머리를 볶아서 새둥지처럼 만들면 그 위에 날아올지도 모르겠지요?
  겨우내 가볼 수 없었던 언덕길을 올랐습니다. 언덕 밑의 외딴집, 그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안녕하세요? 저 밑에 있는 빌라 3층에 살아요. 창으로 매일 쳐다보다 오늘 이 언덕에 올라오고 싶었습니다." 과수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주인이 반겨주었습니다. "냉이를 캐시면 어때요? 호미와 바구니까지 챙겨주는 마음이 봄바람 같았습니다.
  과수나무 밑의 연두 빛이 매일 짙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잎이 작은 풀들이었지요. 냉이를 찾다보니 풀꽃이 잔잔하게 피어있었습니다. 작은 샛별 같은 하얀 꽃, 보라 꽃들이 퍼져 있었습니다. 풀꽃이 눈 안에 가득 차니 별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이 꽃들은 밤하늘의 별빛을 마시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눈보라 이겨낸 남녘의 매화가지에서 꽃잎 터지는 웅성거림이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일찍 피어난 꽃이 있었다는 것을 이 풀꽃 잔디밭에 앉아보고야 알았습니다.
  새삼스레 풀꽃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름 불러주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예쁘게 그냥 피어있을 수 있는 풀꽃. 풀꽃들이 속삭입니다. 그래요! 그래요! 밤마다 시린 달빛과 별빛이 친구지요. 낮에는 따뜻한 햇빛이 안아주고요, 목마르면 봄비가 부슬부슬 목을 축여주지요. 복사꽃 피어나면 꽃향기 먹고 자라요. 아마도 복숭아 열매의 빛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인지도 몰라요.
  앞뒤도 없이 동산은 구릉을 타고 이어져 있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 아래, 마른 쑥대머리들이 널브러져 있었지요. 새 쑥이 수북수북 돋아나 있었어요. 한 자리에 앉아 한 잎 한 잎 뜯었답니다. 마른 쑥대머리들은 뿌리를 지키려고 지치도록 스러져있었던 걸까요?
  동산에 올라 사위를 휘 둘러보면 양지바른 쪽 전망이 좋은 곳은 어김없이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네요. 햇볕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어느 무덤 옆에 살며시 등을 대고 누워보았어요. 그대로 땅 속으로 빠져든다 해도 편안할 것 같았어요. 차마 하늘이 너무 파랗다고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얀 조각달만 이미 중천에 떠있어요. 마른 가지가 새 움을 틔우려고 쌕쌕거리는 소리를 새들도 아나봐요. 새 한 마리가 삐익! 소리를 내며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더니 멀거니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어요. 또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짝을 지어 이내 파닥거리며 같이 날아갑니다.
  내 품을 떠난 아들도 저렇게 짝을 만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혼자가 아닌 둘이 날아가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아요. 내 아들과 며느리도 한 쌍의 기러기 같이 살아갈 거라 믿습니다. 새들이 날아간 빈 하늘이 어찌나 내 마음의 심연으로 파고들던 지요. 허전함만은 아닌 공허감이 밀려들었어요. 더 이상 꼭 잡아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비우면 그만큼 언제나 채워지는 공간은 있습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넉넉하게 차 오르는 공(空)의 너비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알 수 없는 진공의 하늘, 투명함이 얼마나 깊은 층을 만들어 저토록 아름다운 색이 될는지. 어떤 말로도 감당할 수 없는 빛깔은 나를 속속들이 비춰내는 것 같았습니다. 하늘의 뜻에 불충했던 젊은 날들의 상흔조차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뒤엉켜서 또 다른 그리움을 낳습니다. 이제 이 유한의 세상에는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어떤 일도 없는 걸까요. 자꾸만 하늘바라기가 되는 걸 보면, 끝간데 없는 그 너머가 한없이 그리워서인지도 모르지요.
  봄이 열리는 수런거림은 꽃잎 벙그는 사이로 연두빛 그리움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바구니에도 봄이 가득 담겼습니다. "이것은 냉이가 아니에요. 맡아보세요. 이것은 맵싸하고요, 이것은 향긋합니다." 아주머니는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냉이가 아니라고 내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어우러지면 더 짙은 봄 맛이 될 거니까요.
(2003. 3월 초)

 

 

 

 

 

 

 

 4

봄날은 간다

 


                                                  조윤수

 

 

  빛나는 4월의 아침을 달린다. 전주시가지를 벗어나자 상록수 우거진 산 숲 아래 분홍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가 환한 봄 길을 열고 있다. 산 벚꽃이 숲 사이사이 화사하게 수놓아 봄 산도 수런대는 듯하다.
  남쪽 바다 통영시. 자랑스런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베어있는 통영 앞 바다, 청마 선생과 세계적 작곡가인 윤이상 등을 탄생시킨 통영으로 달려갔다.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저녁 8시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오늘의 중요한 코스였던 소매물도를 가기 위하여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관광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줄을 서고 있다. 날씨 좋은 일요일 봄날, 관광 철의 피크 속에 끼어 왔음을 실감하였다. 우리의 일정은 여지없이 어긋났다.

  여행이란 언제나 그렇다. 길을 나서면 예기치 못한 상황도 벌어진다. 여러 가지 풍경과 많은 길손들을 만나게 마련이다. 코스를 바꾸어 시내를 관광하기로 하였다. 통영은 구경거리가 많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풍광이 좋다. 바다 바람을 마시고 가슴으로 안아보기만 하여도 일상을 떠나온 효과는 충분하리라. 미륵도는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관광지 외의 용도로는 개발을 허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방향을 돌려 우리는 수산과학관으로 갔다. 가는 곳마다 빨간 동백꽃이 점점이 피어있는 동백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다. 수산과학관 전망대에서 사방 시야에 들어오는 섬과 섬 사이를 쪽빛 바닷물이 도도한 물결을 이루고, 고깃배와 유람선이 떠가는 바다는 시원한 그림이다. 바다 내음 같은 그리움도 유람선을 타고 먼 수평선으로 날아간다. 과학관의 진기함과 해양 생물에 대한 신기함보다 옛날 같으면 천리 길이었던 이 먼 곳에 서 있는 이 순간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귀하게 느껴진다.

  일상의 집이 너무 무거워 어깨가 늘 아팠던 차(茶)선생인 후배의 이야기가 언뜻 떠오른다. 빚을 내어 15일의 인도 여행을 감행했단다. 정말 인도사람들은 기차시간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다반사인지 그리고 늘 기다려야 하는지가 궁금했단다. 갤커타에서 봄베이로 이동하고자 예매했던 기차를 타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기차는 어김없이 연착이었다. 처음에는 두 시간, 다음은 네 시간, 그 다음에는 알 수도 없고 떠날 때 떠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리를 깔고 드러눕기도 하고 웅크리고 마냥 앉아 있었다. 밤을 꼴깍 지새기도 하였다. 너무나 난감하였다. 주위에 기다리고 있는 인도 사람들의 얼굴을 눈여겨보았다. 그네들에겐 그것이 일상이었다.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네들의 눈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깊고 그윽하리 만치 고요했다. 순간 그는 깨달았단다. 그래! 어차피 여행인 것을……. 일상에서 떠나온 15일은 어째도 좋았다. 당장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으니 물결치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허락된 시간이었던 것이다.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수많은 일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살이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일어난 상황에 적응하여 그 상황의 의미를 찾아야 할 일도 아등바등 대며 흐르는 물을 거스르면서까지 기어오르려고 했던 지난 삶의 모습이 보였단다. "아, 그래! 나도 저렇게 고요히 명상하듯 기다릴 수도 있어."  "돌아가면 이렇게 여행하는 것처럼 살아야겠다." 는 다짐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알 수 없는 어깨의 짓눌림은 사라지고 가벼워졌단다.
  어차피 인생도 순례의 길이 아닌가. 길다면 긴, 백 년도 채 못되는 짧다면 짧은, 세상나들이 길이다. 여행 길이 힘들고 험했다면 더 많은 체험을 할 수 있으니 온 곳으로 되돌아가야 할 집이 더욱 기다려지리라. 지난 시간은 어째도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그래서 여행은 즐겁고 언제나 마음의 산소 같은 설렘이 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늑한 기다림인가.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서 환호성을 이룰 때쯤 봄비가 내려주어야 잔잔하게 마음을 갈아 앉힐 수 있다. 비에 젖은 벚꽃 잎이 길 바닥을 깔게 되면 복사꽃이며 배꽃이 사뿐히 그 꽃길을 밟고 내려온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에게도 길이 있다. 인생 길의 모든 도반들도 서로 방해받지 않고 살려나가는 아름다운 하나의 생명 길이었으면 싶다.
 밤이 이슥해지고 달리는 차창 안으로 기어드는 먼 마을의 불빛에 떠나온 바다의 향수가 스며드는 듯했다. 그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그 날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여행길에서 무엇을 탓하랴! 꽃이 진다한들 바람을 탓할 것인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하얗게 일었다 부서지는 물거품처럼 봄날이 가고 있다.  (2003. 4. 16) <행촌수필> 2003년 제3호

 

 

 

 

 

 

 

 

 

 

 

 

 

5
목련꽃 그늘 아래서 
                                                      
                                      조윤수

 

 

  완연한 봄이다. 새소리를 듣고자 날마다 창문을 연다. 연둣빛 산이 매일 짙어간다. 3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창 밑, 화단의 백목련이 피어나는 것을 매일 지켜본다. 같은 마당이건만 한 발 건너 목련이 다르고 한 발 앞이 다르다.  같은 나무에서도 꽃송이들은 자리마다 피는 때가 다르다. 높은 곳에 있다 해서 먼저 피는 것도 아니요, 낮은 곳에 있다 해서 늦게 피는 것도 아니다.
  마른 가지 속으로 흐르는 생명의 기운을 햇살이 불러내야 나무는 생기를 뿜는다. 한꺼번에 부를 수 없어 하나 하나 부른다. 꽃잎이 벙글어지는 순간은 사람이 보기 힘들다. 아침에 보았던 봉오리가 한낮에 보면 활짝 피어있다. 먼저 피었다고 뽐내지 않으며, 늦게 피어서 앞서 핀 꽃을 시샘하지 않는다. 먼저 피고 떨어진다 해서 나무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봉오리에서부터 반쯤 벙근 꽃과 활짝 열린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목련나무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어젯밤의 꽃샘바람이 좀 세찼나보다. 우리의 가슴에도 봄바람이 들어서인지 번갈아 가며 재채기를 해댄다. 아침에 창 밖을 내려다보니 탐스럽게 피어나던 목련꽃들이 만개(滿開)의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한 채 된서리를 맞아 누렇게 변색해버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아들과 며느리가 우리와 머물다 떠나는 날, 목련꽃 그늘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아이보리 빛 보드라운 꽃잎. 며느리는 꽃잎 한 쪽이 살며시 벙글려고 미소 짖는 목련꽃 같았다. 며느리를 맞은 것이 아니라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이었다. 저 여린 꽃이 어젯밤의 찬바람에 지쳐버린 목련꽃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지금 알았던 것을 그 때 알았다면….” 그렇더라도 봉오리가 낙화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스스로 인생의 묘미를 터득해가야 하리라. 둥지를 떠난 새를 부모 새가 어찌 잡을 수 있는가. 부모의 삶과 자식의 삶이 세대를 달리하지만 조상과 부모와 전연 상관없는 삶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세대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마음의 세계가 있을 것이 아닌가. 멀리서 지켜 보아주는 힘이 부모의 역할이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이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 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캄캄한 밤에 줄곧 떠나지 않고 내 마음 속에서 머문 성서 말씀이다.
  한 부모에서 난 형제도 서로의 길이 다르며 자식들이 가는 길도 또한 다르다. 부모가 다르고 태어난 지방이 달라도 인간이 찾아가야 할 길, 서로가 다 통하는 사랑의 길은 있을 것 같다. 정신적으로 모든 생명은 같은 큰 생명의 같은 자손이지 않은가. 한 포도나무의 다른 가지들처럼. 가지도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인류역사는 지금까지 흔들리는 가정, 사회 계층 간의 갈등, 종교간의 반목, 나라간의 전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래저래 4월은 역시 잔인한 달인가보다. 그래서 '찬란한 슬픔의 봄', 아름다운 봄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구체적인 길들이 많다. 그 많은 여러 길을 남 따라 걸어갈 수는 없다. 자기의 힘으로 인생의 올바른 길을 찾아가야 하리라. 가는 길이 다를지라도 끝까지 가다보면 길은 다 통하기 마련이다. 진리에 이르는 참다운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닐까. 가는 길이 험하고 힘들지라도 도반(道伴)이 좋으면 반은 이룬 것이라고도 했다. 가리키는 손은 많으나 그 손에 걸리지 않고 자기가 찾아야 한다. 많은 성현들이 남긴 진리의 말씀과 조상의 말씀의 의미를 찾아 듣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실천해 간다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있으리라.
  "견선여갈(見善如渴)/문악여농(聞惡如聾)/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유학을 실천하시던 아버님께서 친히 손자인 내 아들에게 써주신 좌우명이다. 세대가 바뀌어 학문의 범위와 교육의 풍토가 달랐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역시 성서의 말씀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빛을 찾았던 것 같이 인생의 진정할 길을 아들과 며느리도 같이 찾아가기를 바란다.
   봄꽃들이 서로 다투듯 피어난다. 다른 모습의 봄꽃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 듯, 내 아들내외를 비롯하여 새 봄을 맞아 신혼을 이룬 모든 젊은 부부들도 한 포도나무의 햇 가지가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의 일원이 되기를 기원한다.
(2003년 4월) <참 좋은 사람> 2003년 5월호

 

 

 

 

 

 

 

 

 

 


6
넝쿨장미
- 어머니의 기도 -
 
조윤수

 

 

  어머니, 불현듯 달려간 부산이었습니다. 어머니 가신지 30 수 년, 저희의 인생도 흘렀고 세상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여학교 시절에는 전주에서 부산에 가려면 기차에서 밤을 꼬박 새웠었지요. 어머니께서는 그 옛날 기차 타기도 멀미난다고 부산에서 서울의 언니 집에 다니러 오실 때 화장실 칸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지요. 지금은 경부선을 타도, 고속버스를 타도, 길 주변의 산과 들은 토막 나고 시멘트 구조물이 이어지는 곳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산야가 보이는 언덕의 하얀 찔레꽃들은 푸른 언덕이 면사포를 쓴 듯 화사했습니다. 남녘으로 내려갈수록 철길 주변에는 넝쿨장미가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부산의 거리거리마다 유난히 빨간 장미꽃밭이 많은 것은 어머니께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강렬하게 말하는 듯했고 저희 마음을 허전하게 했습니다.

  장미의 계절이면 언제나 어머님이 성모님께 바쳤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미꽃다발을 떠올리곤 합니다. '동정 마리아의 장미꽃다발'(The Rosary of the Virgin Mary)이라고 부르는 기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에 일어난 두드러진 사건들을 한 가지씩 마음속으로 묵상하면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을 외우며 손가락으로는 기도의 번 수를 세었지요. 구슬을 한 바퀴 돌리는 동안 '성모송'을 50번 읊습니다. 그 오랜 병상 생활동안 한 번도 묵주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으니 얼마나 많은 꽃다발이 되었겠어요. 어머님께서 성모님의 치맛자락 붙들고 애원하듯 바쳤던 기도의 넋이 담장마다 장미꽃 화환이 되어 걸려있는 듯합니다.
 
  어느 사이, 이순(耳順)을 바라보기도 하고 넘기도 한 나이로 같이 늙어 가는 5남매가 오랜만에  다 모여 밤새 추억의 사진을 놓고 웃고 울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기일을 보낸 다음 날 올케가 마련해준 도시락을 가지고 우리는 기어이 그 눈물의 고개를 찾았답니다. 마산 가포 앞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요양소 말입니다. 아직 어머니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던 어린 동생과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인 막내가 마산 시가지의 끝에서 바닷가를 따라 산을 넘고 어머니를 만나러 다녔던 길. "바로 여기야, 여기쯤이 버스 종점이었을 거야, 여기서부터 우리는 걸어서 저 고갯길을 넘어갔었지." 한적한 숲 속 고갯길을 둘이 손잡고 터벅터벅 걸어갔던 그 길을 손수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동생은 또 중얼거렸습니다. 뜨거워지는 우리들 가슴을 바닷바람이 쓰러내려 주었지요. 큰언니는 연신 '상전벽해(桑田碧海)야! 상전벽해!'를 연발했지요. 그 고갯길은 약간 가파를 뿐 아스팔트로 반짝였고 아래 동네는 현대식 유원지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었습니다.
  요양소의 마당을 거닐어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계셨던 병동 뒤, 훤칠하게 키 큰 소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는 듯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숲 속으로 산책길이 나 있어 지금도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조용한 산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시절은 이산가족으로 살아야 할 처지여서 우리는 한 번도 같이 어머니를 만나러 올 수 없었지요. 이제야 마당 한가운데 나란히 서서, 돌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가슴 저미는 손짓을 해야 했던 그 고갯마루를 어머니께서 하셨던 것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자식들을 마음껏 끌어안아 보지도 못하고 항상 바라보기만 했던 어머니의 가슴은 그 동공이 메워질 날이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그 때는 하지 못했습니다.

  녹음이 우거진 6월은 산과 바다, 강 그리고 들녘 어디를 보아도 활기찹니다. 도시의 아파트 담장마다, 동네 집집마다 뻗어난 넝쿨장미도 초록빛 흐르는 하늘을 아름답게 채색을 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뻐꾸기는 꼭 장미꽃철이면 찾아와서, '뻑국, 뻐 - 뻑' 하다 '꾹' 하고 그만 입 다물곤 합니다. 그것은 전쟁으로 빚어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넋들의 절규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전운의 소용돌이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최남단 피난지였던 부산을 두고 개성까지 올라가야 했던 사유를 어른이 다 된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국군이 후퇴하여 단 두 달만에 가산을 다 쏟아놓고 다시 남하하게 되었지요. 엄동설한에 막내를 임신한 몸으로 동생을 업고 줄줄이 어린것들과 맨 몸으로 내려오게 된 부모님의 입장을 어른이 된 뒤에야 헤아려졌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피멍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도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가끔 그 때의 어처구니없던 정황을 생각하면 밥 먹다가도 새삼 통곡이 터질 듯합니다.

  어찌 저희들의 상처와 어머니의 한 뿐이겠습니까. 아직도 피비린내 가시지 않는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임을 유월의 하늘 밑, 핏빛보다 더 진한 장미넝쿨은 알겠지요. 반 백 년이 넘도록 끊겨진 남북 간의 철도가 이어지고 남북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세계에 유일한 분단 국가로써 여전히 불씨도 남아 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수난을 다시는 거듭 하지 않아야겠지요. 어머니의 사랑의 로자리는 찬연한 색깔로 피어나 저희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집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장미꽃다발기도'는 평화의 상징으로 하늘을 울리고 땅으로 이어질 겁니다.
 (2003년 5월)

 

 

 

 

 

 


7
가을에는
                                               

 

                                                      조윤수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아요. 절집에 들어서면 여러 문을 거칩니다. 문안을 보면 언제나 한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한 폭의 그림에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의 위치가 절묘한 데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그림의 일부처럼, 풍경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하나의 돌처럼,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풍경 속으로 여러 님들이 보입니다.  살면서 만났던 모든 인연이 서로의 인생에 의미가 되었기에 소중합니다.

  가을이면 언제나 지난날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풀벌레들이 생의 축제를 벌렸던 들녘이 보드라운 가을 햇살로 풍요롭게 익고 있습니다. 가지런히 고개 숙인 노란 벼이삭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가을의 전설을 부르는 억새풀의 연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챌 듯한 작은 들꽃들의 속삭임. 뭉게구름 흩어지는 사이로 비치는 하늘빛이 그윽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부산에서 조카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동생과 큰언니가 전주로 와서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경상남도가 고향인 자매들이 집안 행사가 있으면 우리는 전국을 일주하는 여행을 하게 됩니다. 마침 제부가 운전을 해주어서 우리들은 편안한 가을맞이 유람을 하게된 셈이었습니다. 자매들과의 여행은 언제나 어릴 때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요. 큰언니가 들려주는 부모님에 대한 추억은 낯선 옛 이야기 같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낙동강 하류에서부터 저희의 태생지인 진주 남강으로 해서 깊어 가는 가을 산과 섬진강 물길 따라 올라 왔습니다. 2박 3일이 짧았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을 지나고, 강가에서 들길에서 쉴 때 지난날들이 영상처럼 스쳤습니다. 코스모스 투명한 꽃길을 지날 때는 지평선에 노을지던 꽃길도 생각했습니다. 하얀 메밀꽃들이 찰랑댈 때는 저 달밤의 메밀밭에서 걷기 명상에 잠기던 일행이 그림처럼 떠올랐습니다.
  이제 막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 산이 올 따라 유난히 가슴 뻐근하게 합니다. 산은 그토록 익어 가는데 즐거움만은 아닌 쑥부쟁이 꽃 물이 가슴 밑바닥을 적시는 것 같았어요.
   시인의 말처럼 가을은, "사랑하기에는 언제나 늦으며, 사랑을 포기하기에는 언제나 빠르다. 해질녘에 천릿길을 나설 수도 없으며, 해질녘에 침상에 들 수도 없다." 우리의 인생이 가을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여행이 그렇고, 산에 오르는 것도 그래요. 혼자 오르지 못하는 산도 여럿이 함께 오른다면 기꺼이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원들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도록 서로 돌보아 가는 것이라고 했지요. 험난한 여정 중 자신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한 도전 정신도 물론 중요합니다.
 인생 여정도 그와 같다고 하는 우리입니다만……. 같은 기차를 타야 할 처지라면 혼자 빨리 간다고 달려도 혼자는 여정 동안 즐거움도 누릴 수 없겠지요. 결국 다음 사람을 또는 일행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불편한 것 같지만 '어깨를 끼고 달리면 편하다' 는 것을 터득하라 했습니다. 정말 함께 해야 할 처지라면 차를 탄대도 같이 탈 것이고 차를 놓쳐도 같이 놓칠 거니까요. 그러니 어깨를 맞대고 달리려면 홀가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좋겠지요.
  피치 못할 일이라면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인생을 충실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 혹은 여행을 하는 동안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보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상황를 더 많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장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동반자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할 수 있는 유쾌한 마음을 지닐 수 있으면 좋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삶이 만남이며 만남의 연속이라면, 나를 지탱케 하는 모든 생활용품부터 시작하여 내 시선이 머무는 모든 인연들이 내 다른 일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힘든 것은 왜 그럴까요. 길 가다가 풀잎에게 물어봅니다. 풀꽃을 보려면 풀꽃의 높이에서 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나무에게 대답을 구하려니 나무 밑에 앉아봐야 하구요. 골짜기로 흐르는 물에게도 물어보니 물길이 흐르는 쪽을 봐야 했습니다.

  생명을 길러내는 태양이 이 가을에는 더욱 은혜롭습니다. 고대인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며 종교 의식으로 승화하였다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었어요.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는 일몰과 일출의 경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경탄합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장면에 우리는 웃고 울곤 합니다.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눈앞의 나쁜 상황들도 기꺼이 넘어갈 수 있겠지요. 우리들이 상황의 조건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섣부른 행동을 해버린다면 거듭 혼란만 계속될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본래 성품인 한없는 마음의 세계를 믿습니다. 좀 더 일찍 그 믿음이 있었다면 생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테지요. 여생(餘生)이 아니라 새 출발의 지평을 넓혀 가도록 그 본성이 발현되는 삶이고 싶습니다.

  짧은 가을을 결코 아쉬워 할 수만은 없습니다.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기 위하여 고운 단풍은 떨구어야 합니다. 논두렁에 앉아 청명한 가을 햇살을 끌어 모아 보려고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쏟아져 내리는 빛살에 벼이삭처럼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한 포기의 벼이삭이 되어 이 가을은 참회와 감사함으로 보내야겠습니다. "가을은 사랑을 포기하기에는 언제나 빠릅니다. 해질녘에 벌써 침상에 들 수는 없습니다."
 (2005. 10. 12)

 

 

 

 

 

 

 

 

8
명절이 두려워요
                            
                                                    조윤수

 

 

   섣달 그믐날 이런 흥결에 젖어있는 여인을 보았는가? 백설기 떡가루 같은 실눈이 부슬부슬 내리는가 했더니 함박눈이 되었다. 하늘에서부터 뒷동산의 대나무 숲과 온 마을이 눈발로 가득 메워져서 멋진 설경이 펼쳐진다. 유리창 안으로 눈송이들이 날아들 것만 같다. 이런 날이면 그리운 사람이 더 그립다.

  중국의 동진 때,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 휘지가 그랬다. 그는 산 속에서 살았는데 어느 겨울밤에 큰 눈이 내렸다. 뜰에 나가 시(詩)를 음송(吟誦)하다가 갑자기 한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는 멀리 있었는데 그는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저어 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 집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친구를 부르지 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아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꼭 친구를 만나야만 하겠는가?” 눈 내리는 밤의 감흥을 같이하고파 친구가 그리워진 그때의 그 순수하고 소중한 감정을 혼자 즐기고 돌아온 왕휘지의 마음. 그런 감흥이 일어나는 섣달 그믐날이다.

  올 설날은 며느리의 출산과 겹쳐 우리 가족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상대기 중이었다. 다행이 어제 무사히 건강한 딸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은 하얀 천사가 눈발이 되어 내려오듯 딸이 귀한 집안에 훌륭한 선물이 됐다. 아들과 며느리는 설 연휴를 병원에서 보내야 할 형편이지만….
  나에게는 명절에 대한 즐거운 추억이 별로 없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유년시절, 언니들과 설날에 널뛰기를 하며 담장 너머를 흘깃거렸던 한 컷의 기억이 있을 뿐, 제사지내는 일을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다. 단지 아버지께 인사 오는 부하 직원들이 술병을 들고 찾아오던 줄이 길었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그 줄이 짧아지더라는 것 정도이다. 언제나 아버지는 언니들만 데리고 고향엘 다녀오시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동생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언니, 우리는 참 외계인 같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옛날부터 우리는 핵가족으로 살았으니 첨단의 신세대로 살아왔어. 이제는 부모님의 고향도 흔적이 없어졌으니 말이야.”
  서울 큰언니 댁에서 학교와 직장을 다닐 때는 제사가 많이 있었다. 제사가 끝나고 큰 양푼에 나물과 탕국을 촉촉이 넣고 밥을 비벼 나누어 먹는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결혼하여 새댁 때도 시댁은 종가가 아니었으므로 시 백부 님 댁의 기제사나 명절 때 가끔 갔었다. 시 백모 님께서는 언제나 자상하게 제사음식을 싸주셨다. 집에 와서 이이들과 먹는 그 음식이 참 맛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백부 님 한 분의 제사에 남편은 꼭 참석하였는데 돌아올 때 사촌동서가 싸준 음식을 받아먹는 맛을 늘 잊지 않았다.

  언젠가 백부 님이 큰어머님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음 생에는 내가 부인이 될 터이니 당신은 남편이 되소. 그리하여 이 생에 다한 힘든 일들을 그 때 내가 하리다.” 큰어머님은 아들 5형제를 잘 기르시며 종부로서 역할을 평생 조용히 해내셨던 것이다. 그런 큰어머님께 미안해하시던 백부 님의 마음이었다. 백모 님이 돌아가신 후 종가의 제사는 서울의 큰아들에게 옮겨졌다. 고향의 선산과 향교를 돌보시던 백부 님은 전주의 아파트에서 다른 아들과 기거하시며 명절 때 서울로 가시니 우리도 차츰 뜸해졌다.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시자, 장례식에서부터 의견차이로 집안 사람들 간에 말이 많았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가족 간에도 의식의 차이가 나게 드러나게 되어있으므로 앞으로 가족 간의 사이를 어떻게 원만하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늘 생각해왔다. 모두의 마음을 헤아려 보편적인 진리에 맞게 좋은 점을 살려나가는 것에 중점을 두도록 보이지 않는 내조 역할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기도 했다.

  이제 내가 세배를 받아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나는 다음 대에 어떤 명절을 물려주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최후의 보루인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가 무너지고있는 현 시점에서도 인간 고유의 귀소본능의 발로는 명절 때마다 되풀이되는 민족의 대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향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누가 탓하고 막을 것인가. 다만 그 마음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탐구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전통적으로 지켜온 미풍양속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나 살기 어려운 형편에 명절 치르기와 제사에 맹목적으로 평생을 몸 바쳐 헌신해왔던 사람들의 괴로움. 명절 때마다 선물과 뇌물 사이를 오가는 독버섯 같은 갈등들이 해결되지 않으니 세월이 흘러도 그 노력이 빛을 내지 못하는 것 같다. 기꺼이 우러나오는 정성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보다 의무적인 일이 되니까 명절증후군이란 신조어가 나왔나보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 폭설이 겹쳐서 최악의 귀성길이 된 고속도로의 진풍경이 안타깝다. 하루 내 텔레비전에서는 귀성전쟁의 소식을 수시로 알려주고 "명절이 무서워요!"라는 제목 하에 정신과 의사와 부인들의 토론이 진행되고있는 것은 물질만능 시절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도 그런 말이 있다.“내게 제물을 바치러 오기 전에 너의 형제와 이웃과 화해하고 오라.” 살아서 모두가 사이좋게 살고 한을 남기지 않는다면 형식이야 모두 중지를 모아 좋은 관습으로 발전시켜 가면 되지 않겠는가. 특별한 날이 특별하지 않은 날마다 좋은날이 되도록.
  혼자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섣달 그믐날을 감사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은 창 밖의 눈 때문만은 아니다. 눈 내리는 소리에서 선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며 모든 은혜에 감사하고 싶다. 오늘은 밤까지 눈이 펑펑 내릴 것 같다. 노를 저을 수만 있다면 나도 친구를 찾아갔던 옛사람 같은 감상에 젖고 싶은 밤이다. (2004. 1)

 

 

 

 


9
삼십 년, 그리고

                                   

 

                                                                   조윤수            

 

 

   60년 동안 아기는 어디에서 어떻게 있다가 우리에게 왔을까?
  眞손주(이예준) 의 돌 파티가 있어 서울에 다녀왔다. 예준이와 나는 띠 동갑인 셈이다. 요즈음 돌잡이 때는 전통적인 것 외에도 마이크와 컴퓨터 마우스까지 등장했다. 익살스런 진행자는 아기의 아빠와 엄마에게 아이가 무엇을 잡기를 원하는 지를 물었다. 아빠는 요즈음 경제가 어려우니 돈을 집었으면 했고, 엄마는 웬일인지 마우스를 원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아마도 예준이는 마이크를 잡을 거라고 예감했다. 예준이는 목소리가 낭랑하기 때문이다. 예측대로 아이는 한 마디 하려는 듯 서슴없이 마이크를 잡고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돈은 잡는 대로 아빠를 주었다.
  어쩌다 혼자 나가면 동네 사람들은 "아니, 아기는 어디에 두고 혼자 나왔수?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더니…." 하며 의아해 했었다. 그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 아기가 아빠가 되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을까.

  산을 바라보는 것도 한 삼십 년은 바라보아야 산이 보이고, 강을 바라보는 것도 한 삼십 년은 바라보아야 물이 보인다고 하셨단다. 법랍 삼십 년이 넘은 스님도 큰 어르신의 그 말씀을 떠올리시며 스스로에게 준엄한 음성으로 자신의 현재를 묻고 계신다. 나에게 있어서 삼십 년 세월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삼십 년이란 주기는 여러 가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삼십 년 더하기 삼십 년. 뒤돌아  보니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걸어 온 생이었다. 삼십 년은 철없이 흘러간 세월이었고, 또 한 삼십 년은 삶을 깨달아 가는 세월이었다. 여자가 결혼하여 김장 삼십 번 담고 나면 인생이 다 간다고 누가 그랬다. 그러나 나는 삼십 년이란 세월을 김장만 잘 담는 일에 쏟지는 않았으나 삼십 번은 해봤고, 첫 아들이 삼십 세가 넘어 결혼을 함으로써 한 세대가 흘렀다.
  아들은 결혼식을 서울의 명동성당에서 하고 싶어했다. 명동성당에서 혼배미사로 올려진 엄마의 결혼사진이 참 보기 좋았다는 것이다. 삼십 년이 지난 오늘날의 사정은 그 때와 많이 확대되었다. 성당도 한편으로 결혼식장의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옛날엔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지금은 최소한 6개월 전에 예약을 하고 일정한 교육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우리 때는 결혼식을 마친 후 하객들에게 답례품을 선물했는데, 그것은 다후다(나이롱천의 일종) 천으로 된 보자기였다. 그것도 그 때는 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보자기가 상품의 포장용으로 흔하게 쓰이고 있다. 결혼식을 전국 어디에서 해도,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먼 곳의 하객들을 편리하게 모시기도 한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대역사가 시작된지도 30여 년이 지났으니,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고속도로 망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한꺼번에 이루고자 숨가쁘게 치달아온 세월이기도 하다. 지구촌도 48시간이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세월 동안 초고속 인터넷망까지 세계화되어 우리는 정보화 시대에 들어와 있게 되었으며, 요즘 여자들은 집에서 김장을 담을 시간조차 없다.

  삼십 년 동안 산과 강을 바라본 것처럼 그렇게 지극히 삼십 년을 보냈으면 인생을 말할 수도 있으련만…. 어쨌거나 삼십 수년의 굴곡진 세월을 뚫고 나오는 동안 김장이나 어떤 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그래도 그동안 두 아이들이 성혼하여 각자 가정을 가졌으니 내 의무는 끝난 셈이다. 가족들 밥 때문에 때에 꼭 맞추어 성급히 집에 가지 않아도 되고, 다시 하고 싶은 공부한답시고 이 방 저 방 늘어놓아도 남편의 잔소리마저 듣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도 세월 탓인가 싶다. 서로 티격태격 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인생이 익었다는 것인지, 다 살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된 것이 흡족하여 축하하고 싶다.

  어떤 일의 기(機)에 익숙하게 되는 데에 십 년은 걸린다. 그 기술이 지극하면 예술(禮,藝)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예가 지극하면 도(道)에 이른다. 삼십 년의 세월의 공책을 채워보지 않고서 무엇을 알 수 있다 할 것인가. 해서 산을 바라보는 것도 한 삼십 년을 바라보아야 그 뜻을 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참 인생의 시작이 60부터라고도 했을까?
  초의선사의 말에 "차(茶)에는 인생의 다섯 가지 맛이 있으니 차(茶)의 맛을 아는 것이 곧 인생을 아는 길이다." 라고 했다. 쓴맛, 단맛, 떫은맛, 신맛, 매운맛이 그것이다. 차를 잘 우려내면 처음의 맛은 입안에 감겨드는 듯 감미로운 맛을 보고, 두 번째는 잘 익은 맛으로 은은한 향기와 그윽한 단맛에 약간 쌉쏘롬한 맛이 우러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쓴맛과 다음은 떫은맛까지 우려내어 마시게 된다. 그 맛을 모두 포함한 것이 차 맛이다. 단맛만 탐하게 되거나 좋은 향미(香味)만 찾으면 진정한 차의 맛을 알지 못하여 차의 진수(眞髓)를 놓치고 말 것이다. 여러 가지 특성의 맛이 한 맛으로 어우러진 고유의 차 맛을 알게 된다는 뜻이리라. 차(茶)를 안다는 것도 그와 같아서 기본 다사(茶事)에 익숙해지는 것만도 십여 년이 걸린다. 글 쓰는 일도 그와 같을진대, 십여 년의 기본 수련은 쌓아야 문예(文藝)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차지기(茶知己)를 만나러 춘향로를 가끔 달린다. 내게로 다가오려던 산은 옆으로 살짝 비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품 넓은 가슴을 활짝 벌리기도 한다. 산은 또 작은 내(川)를 풀어내기도 하고 강물을 토해내기도 한다. 겨울 산은 제 속을 훤하게 다 내보이고 있지만, 그의 이야기를 나는 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 강물이 결코 산을 거스르지 않고 산기슭을 휘감고 흐르는 뜻을 어이 다 헤아리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삼십 년 그리고 또 삼십 년 후에 나는 어디서 어떻게 있게 될 것인가.
(2005년 4월)격월간 수필과 비평> 2005년 7/8월호  <행촌수필> 2005년 제7호

 

 

 

 

 10
노부모는 찾아오지 말래

                                    

 

 

                                 조윤수

 

 

  새로 이사간 동생 네 집에서 네 자매가 모여서 며칠을 지냈다.
  동생이 집 길 처까지 마중 나왔다. 요즘 말이 많은 대표적인 고층 주상복합상가아파트가 있는 분당지구 정자동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노부모는 찾아오지 말라는 뜻이래." 빌딩의 이름을 주어 대며 동생이 말했다. 잘난 아들들이 노부모님들 찾아오지 못하게 어려운 이름들을 붙였다는 말이다. 좀 한다 하는 부모 앞에서는 프랑스 말로 이야기하는 아들 내외도 있다는 말이 떠돌 지경이란다.
  '아이 파크'와 '제니스', '파크 뷰' 등은 알아들을 만 했다. '아데나 루체', '쌍데폐뷰(?)', 등 한 동 건너 국적을 알 수 없는 간판들이 글씨등불에 반짝이고 있었다. 특권층에 드는 사람들은 국적도, 나라말도, 부모도 몰라도 된다는 모듬살이 흐름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일까. 국민성의 뿌리는 튼튼하지 못해도 빌딩은 어찌 그리 높이 올라 갈 수 있었는지, 참으로 기술이 놀랍기만 하였다.
  우리는 또 다른 주상복합아파트 '파라곤'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동생 네 아파트는 그 악명(?) 높은 주상복합아파트 단지 근처의 소박한 복합아파트라지만 어깨의 높이는 다르나 내용은 이웃사촌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자신이 살고있는 동네니까 그렇겠지만, 나는 속으로 참 길도 잘 찾아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섞갈림 길을 돌고 도는 것 같았다. 나도 노부모가 되어간다는 낌새이리라. 시골 노부모들이라면 최첨단의 시설 속에 있는 복잡한 이름을 찾기가 귀찮아서도 잘난 아들네를 찾고 싶지 않겠구나 싶었다.
 분당의 강남이라는 지역은 싱가폴이나 뉴욕의 맨하턴과 엇비슷하다고도 한다. 사실 분당이란 곳은 행정상 경기도 성남시의 분당구이다. 그런데 신도시로 개발 된 후 '분당' 중에서도 분당의 강남지구라면 사람들 사이에는 잘 난 사람들이 모인 곳 중의 하나로 마치 부의 상징처럼 여기게 된 곳이라고도 일컫는 것 같다. 시골 사람이 가끔 찾아간다면 보기 드문 구경  거리를 연출해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법도 하다.

  하루는 나 홀로 동생 네 집에 머물게 됐다. 문간을 여는 것부터 서툴러서 집안에서 쉬면서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사용하는 알림 책을 넘겨보았다. 이건 보통의 그림책 한 권 부피 남짓하다. 공부를 상당히 해야할 것 같았다. 전자기기나 핸드폰을 새로 구입하면 그 사용법이 적힌 책자가 한 권이듯이 요즘 신 주택들의 알림 책이 그렇다.
  "유럽풍 저택형 아파트 분당 정자 파라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품격 주거 공간, 파라곤의 자부심을 누리십시오, 동양고속 건설." 'Living Advice' 가 그것이다. 이삿짐 운반에서 입주 시 필요사항, 집안 내용물 사용법에서 생활 길잡이(지침)까지. 복잡했다. 필요 이상으로 색다른 모양의 부속품들, 좀 더 편리한 기능,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으로 고품격 화하여 일반 주택 값까지 부추긴다. 현대는 이미지로 살아가는 시대이니 이미지와 편리를 좇아가다 졸아 들것은 인간 본디의 마음바탕일 테다. 결국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을 자랑삼아 스스로 위안하면서 우리의 품성을 나약하게 하는 일을 가속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택의 짜임이 센서 화되어 있으니 노부모는 그런 아들네 집이라면 찾아갔다가 창살 없는 감옥살이가 될지도 모른다.
 
  한 번은 정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좁은 땅을 빈틈 없이 설계한 각 모퉁이(코너)의 뜰 꾸밈이 재미있어 이웃의 상가 아파트 사이를 다 둘러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보니까 눈으로 표시해둔 입구가 아리송했다. 출입문도 공동 문간에서 번호를 찍고 들어간 후 하나하나(개개인) 문간을 찾아가야 한다. 두리번거리다가 경비소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여 들어갔다. 주상복합아파트의 경비원들은 모두 싱싱한 젊은 청년들이었다. 눈썰미를 잃어버린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곳의 경비원 노릇도 할 수 없으렸다! "그러니 노모는 찾아오지 말라는 거야!" 하고 동생이 말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서울의 아들네 집에 찾아갔을 때도 문간에서 해프닝을 한 적이 있었다. 센서 작용이 끝나기 전에 손잡이를 돌렸다가 경보 음이 울리기도 하고,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거듭 찍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기도 했다. 오랜만에 사용하자니 또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여러 가지 대책이 시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농경시대처럼 노인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는 지났는지, 옛날에는 노인들이 젊은이들 걱정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부모들이 아들들의 속을 썩히지 않아야 하는 때란다. 그러나 선인들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가 모두 현대에 와서는 축적된 지식으로 정보화되어 있지 않은가.
 
  아들인 듯한 남자가 노모를 부추기고 건널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 기사가 말했다."똑똑한 아들은 저렇게 노모를 모시지 않아요. 좀 모자란 듯한 아들이기에 저렇게 노모 옆에 남아 있거든요." 하는 것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겸해서 미리 서울에서 지내고 전주에 돌아왔던 참이었다. 내일이 어버이날이어서 운전기사에게도 그 장면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가 싶었다.
   전주시 삼천동에 내리니 밤 공기가 상쾌했다. 개구리들이 어둠 속에서 합창으로 반겨주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아늑한 고향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어도 끝까지 허리를 굽히지 않던 갈잎들이었다. 우리동네 갈대밭에도 5월이 짙게 내리자 늙은 갈잎 밑에서 새잎들이 힘차게 밀고 올라왔다. 마침내 늙은 갈대도 때가 되니 힘없이 고개가 꺾인다. 싱그러운 5월이 흐르고 있다. 계절의 여왕도 한 때일 뿐.
(2005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