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수필집<바람의 커튼>

제6부, 뿌리를 찾아서 <바람의 커튼>

차보살 다림화 2009. 9. 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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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 (ysjo43)  
차를 사랑하는 사람 생의 길목에서 소중한 것들과의 대화를 수필로 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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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 수필집    블로그형  게시판형  리스트형
수필집 6부 뿌리를 찾아서   2008/10/17 13:17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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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1. 뿌리를 찾아서

2. 망년지우

3. 기차는 8시에 떠나네

4. 전시관 나들이

5. 의 기도

6. 고목에 핀 꽃

7. 소나무야, 소나무야

8. 이념의 갈등 (마음의 통일)

9. 지구방위대

10. 이상한 마을, 이상한 사람들



 

1

뿌리를 찾아서                        


                                                                  조윤수



  햇볕이 여전히 따가운 가을 문턱이었다. 할아버지는 후원의 과수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대청마루에 누워서 부채질을 하다가 곤한 낮잠에 빠졌다. 배나무 꼭대기에서 용이 짙은 안개 속에서 용트림을 하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깬 할아버지는 마루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 꼬마가 집 앞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거, 배를 따고 있는 게 뉘 집 아들인고?"하고 물었다. "아버지가 맹 희자 도자입니다."하고 아이는 겸연쩍어 하면서 배나무에서 내려와 정중히 절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방금 꾸었던 꿈과 아이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다.

  최영 장군은 이렇게 어린 맹사성을 지켜보다가 후에 손녀사위로 삼았다.  그 최영 장군이 살다가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는 고택(古宅)은 늦가을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만 바스락거렸다. 집 앞의 우람한 느티나무는 자신의 잎을 떨구어 우리들 발걸음을 포근하게 맞이해 주었다.

  공자의 뜻을 이어받아 자신도 은행나무를 심고 후학을 가르쳤다는 행단(杏亶). 600년 동안 맹 정승의 정신이 알알이 맺힌 듯, 떨어진 은행 알이 마당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 은행 알을 보노라니 벼슬에서 물러난 맹사성이 낙향하여 기른 제자들의 얼굴들이 연상되었다. 수많은 세월동안 거기에서 글을 읽었던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보이는 듯했다.

맹사성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조선조 초기 극심한 혼란기에 당당하게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의롭고 청렴한 관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드러운 성품과 지혜로운 예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맹희도가 정몽주와 동문수학하여 벼슬하던 사람이었지만, 정몽주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에도 맹씨의 집안은 후세까지 청백리(淸白吏)의 귀감으로 전해오고 있다. 비록 역사가 흐르는 동안 몇 번의 보수공사가 있었겠지만 깊은 산골을 가는 듯, 맹사성의 고택은 옛 자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고택에 들어서서 걸어본 구석구석, 땅 속 깊이까지 배여 있을 발자국소리가 더듬어지는 것이었다.

  문득 맹사성 집안의 여인네들의 삶이 생각났다. 관리직으로 있을 동안 평생을 집 한 칸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며 살았던 살림살이 규모를 생각하면 얼마나 인고의 세월을 안으로 삼키며 살았을까. 내 아버지의 삶이 또한 그러했기에 나의 어머니를 함께 떠올리며 그 시절 여인들의 삶을 되살리니 애잔한 마음이 사무친다. 맹씨의 부인이 최영 장군의 손녀였으니, 그 성품 또한 상상할 만 하지 않은가. 황금을 돌같이 여기라던 최영 장군이 아니었던가. 요즘 같으면 돌도 황금같이 알아야 할 세상이니 그 격세지감이 또 어떻게 음미되어야 할까.

  맹씨가 비록 현대에는 가문의 빛을 잃고 있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사라져버린 건 아닐 것이다. 옛날 봉건제 사회에서부터 성씨는 남자의 성을 따라야 했고, 남자만이 가문을 대표하고 문중 정신을 이어왔다. 그러나 남자들만이 역사를 만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남자 옆에는 반드시 여자가 나란히 같이 해온 세월이 있다. 수 없이 여자들이 섞이고 인구가 불어나 세분화하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뿌리가 흔들리는 나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맹씨의 어머니가 흥양 조씨이니 우리 함안 조씨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중국에 연원을 두고 있으니, 맹자의 54대 후손이 맹사성이다. 어떤 중국인은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면서 중국에서는 조씨가 으뜸가는 성씨라고 추켜세우기도 했었다. 앞으로 호주제도가 없어지면 여자가 호주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미 서양은 보편화되고 있는 예가 많은 현대에, 한 가문의 의미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하물며 국제결혼도 보편화되고 있는 세계화시대인 것을…. 그러니 어찌 중국이나 먼 나라까지도 남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거슬러 근원까지 찾아 올라간다면….

  맹씨 행단에서 나는 우리들의 할아버지 맹씨를 떠올리며 그분의 뜻을 기리고 있었다. 맹씨 할아버지가 사시던 그 시절, 나는 과연 어디에서 무엇이었을까? 그 시절의 나는 그 누구의 딸도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맹씨 할아버지가 사셨던 고려조와 조선조 초기에는 인구가 지금같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길러준 부모님과 모든 이웃, 세세 대대로 이어져온 자연 환경까지도 어찌 축복이 아니랴. 그리하여 '나의' 가 아닌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우리 가문의 역사만을 꼭 전해 줄 것을 고집하고 싶지 않다. 아버님께서 손자를 위해 손수 써주신 현판,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현의 말씀을 나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손자손녀들이 삶의 지표로 삼도록 그대로 물려주고 싶다.




가문에 대하여


  자라면서 거의 들어보지 않았던 외가를 찾은 적이 있다.  내 큰언니의 추억을 더듬어 찾아갔던 화동(花洞)은 이름대로 꽃동산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대나무 숲이 배경을 이루어 주자가례를 이어받을 만 했다. 한 마을이 모두 주씨뿐인 집성촌이었으며 마을 가운데 시제를 올리는 사당이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안(新案)주(周)씨로 함안 조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어머니는 꽃골 댁이란 택호로 불렸다. 어머니가 17살까지 살았다는 집터 근처의 우물가에 다다르니 마치 어머니가 마중 나올 것 같은 착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신안 주씨의 세조(世祖)이신 성현 주자의 증손인 청계공(淸溪公) 잠(潛)이 동국인 우리나라의 주씨 시조이다. 주씨 종친회에서는 청계공 내외분 천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의 '주자 묘 성묘단'을 모집하여 성묘여행을 서두르고도 있었다. 성씨로 본다면 조씨와 주씨의 몸과 정신을 이어받은 나는 전주 이씨에게 시집와서 전주에서 살게 됐다. 전주 이씨는 또 어떤가. 너무나 잘 알려진 대로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소는 전북의 보물로 지정된 조경단(肇慶亶)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시절, 소풍지로 으뜸이었던 장소였다. 건지산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한은 신라시대에 사공(司空)벼슬을 지내면서 대대로 벼슬을 해왔다. 이한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기 때문에 그가 모셔진 조경단은 태조이래 역대 왕들이 정성을 다하여 보호했었다. 고종은 1899년 5월에 단을 쌓아 당상관을 배치하고 비석을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조경단이라 명명하였다. 수많은 왕자와 왕녀를 배출하여 방대한 씨족사회를 이룬 것이다.

해마다 열리는 시제에 아버님은 전주에 계시므로 그 준비를 함께 하셨으며 참례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지금과 같이 성역화 되기 전에도 집안에서 그 묘각을 지키는 일을 아들에게도 시키면서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아버님은 전주 이씨 중에서도 시중공파로 그 갈래를 따지자면 복잡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친정아버지와 시아버님께서는 각 집안의 마지막 선비였지 않았나 싶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황금으로 벼슬을 사기도 하여 새롭고 허울만 좋은 가풍을 만들었던 예도 많았다. 오늘날 경제논리가 모든 분야의 일을 좌지우지하는 때에 가문이며 학연이며 지연이 무슨 뜻이 있을까만…. 그래도 모이면 연줄을 묻는 습성은 처음 대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여는 주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인사말이 되어 첫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단군이 하늘나라에서 가지고 내려온 천부경 이외 여러 경전은 제쳐놓고라도, 근대에 와서 불교의 뒤를 이어 서양 종교가 들어왔다. 기독교는 극단적인 순교의 발자취를 이 땅에 새기며 보편적인 진리를 전파하여 왔다. 대가족이 세분화하여 핵가족이 되고 전통의 맥을 잃어 가는 가운데 종교분쟁은 가족 내에서도 갈등의 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등 몇 대만 거슬러 올라가 헤아리다보니까 내 뿌리의 끝은 너무나도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다. 더 찾을 수 없는 자리, 끝을 알 수 없는 끝 너머, 무한히 고요한 힘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다. 어떻게 만나야 할 인(因)이 있어 가족의 연(緣)으로 만났을까. 그리고 같은 시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을 생각하면 애틋한 연민의 정을 금할 길이 없다.  (2002년 11월)



 2

망년지우(忘年之友)

                                          

                                                             조 윤수



   사진첩 속으로 추억의 여행길에 올라본다. 옛 선비들의 맑은 우정을 찾아 나섰던 그 시절, 그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함께.

  전남 강진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을 찾는다. 초당 뒤, 다산(茶山) 정약용이 자신이 머물렀음을 증언하기 위하여 암벽에 새긴 정석(丁石)이란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다. 다산의 정갈하고 꼿꼿한 기품이 느껴지는 듯한 글씨다. 지금도 그 바위는 이끼가 낀 채로 다산의 정신을 담은 글씨를 품고 있으리라. 그 바위 언덕을 내려오면 다산초당이 단아한 선비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처음에는 초당이었으나 후에 와당으로 바뀌었다. 초당 옆의 연못을 배회하면서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서 있다." 고 말한 다산의 절절한 고독을 상상했었다. 다산이 스스로 파서 만든 약천의 물과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차 부뚜막은 지금도 여전한지…….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차로서 다스리며 다선삼매(茶禪三昧)를 즐겼을 모습은 인적이 드문 산 속의 차나무 한 그루이거나 한 포기의 난이었으리라.


   다산이 유배지에서의 외로움과 시름을 달래기 위해 틈틈이 동암 옆의 산마루에 올랐는데 그 장소에 세워진 것이 지금의 천일각이다. 우리도 천일각에 올라 강진만의 갯벌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더 없이 좋은 풍광을 바라보며 말없이 그 시절의 한을 그렸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온 지 8년 만에 당시 백련사 주지이던 혜장스님이 지금의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 마을 뒷산으로 안내했다. 이 때부터 다산은 혜장스님과의 인연이 깊어졌고 유배의 시름에 겨울 때마다 백련사에 와서 차를 나누게 되었다. 그 때 다산의 나이 44세, 혜장의 나이 34세였다. 첫 만남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불교와 학문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두 사람은 이후 혜장이 죽을 때까지 서로를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거처를 오가면서 다산은 혜장에게 주역을 가르쳐주고 거칠고 분방하던 혜장의 시심을 일깨워주었으며, 혜장은 다산에게 불교의 선사상과 아울러 차의 맛과 멋을 가르쳐주었다.

  혜장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다산은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으며 취성재라는 누각을 지어 그곳에 거처하면서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저술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조선의 유배제도가 없었던들 다산이 그처럼 수많은 저술과 실학사상을 집대성할 수 있었을까. 그의 유배생활은 개인을 떠나 한국인으로서 보자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겠다. 어쩌면 맥이 끊일 뻔한 차문화(茶文化)의 중흥도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다산과 혜장과의 만남, 당시 학승이었던 초의선사와 다산과의 만남이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만남은 다시 다산의 아들들과 초의선사의 우정으로 대물림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다서와 명문들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다산은 우리 차의 우수성을 지적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한다' 는 말을 남긴 국산 차 예찬의 선구자였다. 다산은 특히 이곳에서 나온 차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가 떠난 뒤에도 18명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 을 만들어 선생을 흠모하고 해마다 다산에서 나는 햇차를 보낼 정도였다. 그의 제자들이 남긴 '다신계절목'은 당시의 차 제조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었다.


  다산초당 천일각 옆으로 빠져 고즈넉한 오솔길을 한 마장쯤 걸으면 옛 건축미가 아름다운 백련사에 닿게 된다. 그 오솔길 주변에는 차나무가 많이 있었다. 지금쯤 뒤 꼭지가 너무 매력적인 하얀 차 꽃들이 한 해 동안 영근 차 씨앗들과 한 가지에서 만나 소담스럽게 옛 지우(知友)들을 그리고 있을 게다. 수 없이 그 길을 오가며 상념에 젖었을 다산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젖었던 그 때가 또다시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백련사의 선방에서 찍은 사진을 보자니 다산과 혜장과의 망년교(忘年交)를 닮았던 십 년 연하인 J선생님과의 우정이 되새겨진다. J선생의 서가는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였고 그 분에게 요가와 명상방법을 배우면서 내면을 가꿀 수 있는 힘을 쌓았었다. 그 분은 정기적으로 우리 소리마당을 위한 모임을 주선하여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좋은 차 맛을 제대로 내어 드리고, 차를 알리는 일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인도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우리 차를 보내드리기도 했었다.


  법정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감동적인 한 편의 지음지교(知音之敎)도 떠오른다. 옛날 중국에 거문고의 명수인 백아와 그의 음악을 누구보도 잘 이해한 친구인 종자기 사이의 이야기다. 백아가 태산의 북쪽으로 놀러갔다가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 비를 피해 바위 아래 머물게 되었다. 마음이 슬퍼져 곧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장마 비의 곡조를 타다가 나중에는 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었다. 곡조를 연주할 때마다 종자기는 곧 그 뜻한 바를 알아냈다. 그러자 백아는 거문고를 내던지고 말한다. "참으로 훌륭하도다. 그대의 들음이여! 내 뜻을 알아냄이 마치 내 마음과도 같구나. 내 거문고 소리는 그대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네." 훗날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이해해 주던 친구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세상에 자기 음악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음을 통곡했다고 한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그 삶이 든든할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런 친구 한 사람쯤은 가졌으리라. 좋은 수필을 쓰지는 못하지만 내가 쓴 글을 읽어주고 내가 쓰고자 한 바 이상으로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어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혈연과 나이를 뛰어넘어 존재와 존재로서 깊이 이어져 있는 친구 같고 연인 같은 나의 망년지우(忘年之友)들.  훗날 우리도 백아처럼 일손을 멈추고 통탄에 빠질 날이 있으리라. 내가 만약 늦게 남게 된다면 다산처럼 두문불출하고 떠난 자들을 그리며 죽는 날까지 글을 쓰게 될 수 있을까. 사랑이 떠난 뒤 사랑을 노래한다는 시인들처럼.  (2003. 11.14)

 

 

 

 

 

 

 

3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조윤수


  "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8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기차를 타고 떠난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 떠난 연인은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려고 떠난 투사인 모양이다. 결국은 돌아오지 않을 연인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매일 같이 기차역으로 나가는 그리스 여인의 여심(女心)인가. 역시 이 노래는 그리스 여가수가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신화의 땅에서 열렸던 올림픽이 새로운 신화와 수많은 추억을 만들고 있는 동안, 나는 금싸라기가 깔려 있을 듯한 크레타 섬의 해안을 서성거렸다. 그리스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누구나 근원을 찾아 떠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꿈에서라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세계문화유산 제 1호인 파르테논 신전 주위와 아프로디테가 수호한다는 밀로스 섬을 동경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스가 위치한 지중해 동쪽의 발칸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집결하는 교차로에 있다. 섬 하나가 세계문화유산이 된 나라. 나라 전체가 노천 박물관 같은 나라. 그리스라면 너무나 많은 문화 콘텐츠를 품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유럽문화의 발상지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민족이다. 대영제국 박물관과 루불 박물관에서 그리스 조각상을 가져온다면 그 박물관이 텅텅 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은 다시 한 번 인류의 문명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터키의 지배를 400년이나 받기 전까지도 역사의 질곡 속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피로 물들었던 지중해 연안을 배회하자니 알 수 없는 회한이 밀려온다. 어쩌면 반도 국가인 우리나라의 지나온 운명과도 비슷하여 같은 정서를 느낀 것일까.


  각종 매체에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승전보와 아울러 그리스 문화 탐구도 함께 진행되었다. 특히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그리스 음악에 젖다 보면 지중해 연안이 배경이 되었던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의 요트를 타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작렬하는 태양과 어긋난 청춘의 야망이 끝내 좌절하고, 유난히 따갑게 보였던 지중해의 태양은 그 다음에 올 먹구름을 품고 있었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지중해 연안 유람선을 타보고 싶다는 그 짙푸른 바다가 그리스 음악에 실려 있었다.

그리스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작해야 신들의 조각상과 서양철학의 기초가 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 정도였다. 그리고 올림포스 산에 살고 있다는 신들의 복잡한 족보.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플라톤이 제자의 물음에 답하였다는, 유명한 표어가 된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라는 말도 떠오른다. 그보다는 내가 늘 가까이서 느끼는 그리스의 가수 '나나 무스쿠리'를 생각한다. 지난겨울 발을 다쳤을 때도 한 밤을 그녀의 음악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 검은 테의 안경을 쓴 총명하고 맑은 모습의 그녀도 벌써 70세가 되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 평생 그리스 노래를 세계에 알렸던 그녀는 지금도 조국 그리스를 위한 아니, 이제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노래하고 있다. 떠오르는 또 한 사람, 뉴에이즈 음악의 주자인 야니도 그리스인이란다. 여러 문화가 교차되고 어우러지는 지역의 특성 때문인지 음악도 독특한 맛이 융화된 풍성한 폭이 느껴진다.


  아테네 올림픽은 그 어느 때보다 문화올림픽이었음을 가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다. 월계관을 쓴 승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경기장에서는 경기 사이사이 관중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수많은 음악이 울려 퍼졌는데.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우승자를 축복하는 음악이 올해 79세인 그리스 국민음악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영화음악 '그리스인 조르바'였다고 한다. 자유의 혼을 담은 그의 음악은 군부 독재 시절에는 금지 곡이 되기도 했으며 그 역시 7년 동안 국외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리스에는 자유가 찾아왔지만 세계 곳곳에는 평화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음악가들이 있어 그리스인들이 어두운 질곡을 헤쳐 나오는 데 힘이 되었으리라.


  조수미가 불러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고'를 이번 여름에는 자주 들었다. 그리스의 애환이 담겨 있는 여심을 노래한 것이어서 인지 언제나 가슴을 적셔주었다. 바로 그 노래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곡이란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리스인들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며 조국을 사랑하는지 '키스'란 말이 들어 있는 이름이 많은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름의 뜻도 '가장 첫 키스'라나 뭐라나, 그리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이름이라고나 할까.

  어디를 가나 그리스인들의 모임에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음악과 춤이 있었다. 한 사람이 돋보이는 노래와 춤이 아니라 함께 어깨를 맞대고 호흡을 맞추며 즐기는 것이다. 그 오랜 투쟁의 역사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남녀노소가 음악을 통해 공감하고 희로애락을 음악으로 풀어낼 수 있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국악이 단지 한(恨)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 한을 통하여 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의 음악에서는 세계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의 전통 악기인 부주키의 연주에서는 우리의 아리랑에서 느낄 수 있는 슬픔과 한이 있었고, 멋과 낭만이 있었다. 지중해 연안을 휘돌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의 선명한 바다 빛도 느낄 수 있었다.


  올림픽도 끝났으니 나도 지중해 연안을 그만 헤매야겠다. 이제 해질녘이 되면 풀새들의 연주를 들으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여름의 여운을 삭이고, 수풀을 가르고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리라. 자유의 혼을 태우는 사람들에게 키스를 보내며.

"그 여름의 유람은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지난 8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2004/9/3)








4

전시관 나들이


                                                                     조윤수


1.                                 


  한강을 건너 남산 외곽 도로를 지나 도성에 이르렀다.  숭례문은 태평로 주위의 거대한 빌딩에 둘러싸진 전시관 안에서 외소하게 앉아 있는 듯하다. 멀리 북악산 아래 청와대가 보이고 광화문 앞부터 세종로와 태평로까지 빌딩과 자동차의 물결로 넘친다. 옛날의 건물들이 새로 들어선 높은 건물들 사이사이에서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은 드물다.

‘9.18 광화문으로’라는 전단지를 받는다. 비로소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선다.  회관 앞 인도와 계단에는 인파로 덮여 있다. ‘9.18 광화문으로 가자. 국가보안법폐지 반대’를 외치는 구호가 허공을 맴돈다. ‘노사모’‘박사모’등 요즈음은 사모라는 말이 유행이다. 하기야 사모처럼 아름다운 말이 또 어디 있는가. ‘박사모’의 프랭카드가 걸려 있다. 데모의 위험을 방지하려는 전경들과 장갑차가 무거운 거리의 풍경을 대변하고 있다.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서 이룬 물결일 텐데 나는 웬 지 그 전단지를 받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세계보도기록사진전’을 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전시관 앞에서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길다.  전시관 밖의 그 모습 자체가 전시물이다.

  우리의 목적한 곳 세종회관의 컨벤션 홀 안도 사람들의 물결이 일고 있다. 생의 한가운데를 비껴나 한적한 생활을 하다 가끔 이런 곳을 오는 것 자체가 전시실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삶의 깊은 흐름을 느낀다. 특별한 모임에 온 사람들의 얼굴은 서로 닮아 있는 듯하다. 천장이 높은 홀의 크기가 시원하다. 높은 단상에서 서치라이트를 받고 앉아 있는 주최 측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 있고 객석에서는 그 높은 단상의 사람들의 무엇을 감상하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모 문학단체의 문학상과 신인상을 발표하는 장이다. 높은 단상에 앉으면 사람도 높아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 낮은 곳의 대중들에게 그들이 스타로써 구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나도 언젠가 그 단상에 앉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일지 않는다.

  내빈 소개가 있다. 느닷없이 불려지는 나와 동료의 이름에 갑자기 유명인사라도 된 듯 일어나 앞뒤로 인사를 한다. ‘역시 다르구먼, 서울에서 하는 행사는 세련되었어!’ 비 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축하객으로 와주었다는 감사를 그렇게 표시해줄 줄 알다니! 꽃다발 속에 둘러싸인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플래쉬가 연속 터지고 시끌벅적 전람회는 막을 내린다.



2.


  샤갈을 다시 만나는 것은 정확히 33년 만이다. 1971년 8월 21부터 한 달 간 그의 특별전이 있었다. 그의 나이 80세 무렵에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회고 전을 했으며 서울에서도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 때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했는데. 그 미술관이 덕수궁 안에 있었는지, 경복궁 안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가는 길. 당시 시청 앞 빌딩에 내 직장이 있었기 때문에 광화문에서 시청 앞 주변에는 내 청춘의 향기를 추억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 때로 돌아가 있는 듯 설레는 마음으로 샤갈을 만나러 간다.

  30여 년 전에 막연히 회색 톤으로 앞날의 꿈을 그리던 내게 다가왔던 그의 그림 ‘탄생’에서의 연인들의 모습은 환상적인 분위기였다. 마치 악몽을 그대로 그린 것 같은 ‘전쟁’의 포스터와 함께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으면서 옛날을 추억하기도 한다. 지금 그는 유명을 달리 하고 있지만 다시 살아 서울시립미술관에 와 있다.

그가 ‘도시 위에서’를 그렸을 때의 나이 때 나도 비슷한 나이로써 같은 꿈을 꾸었지 않나 싶다. 어둡고 어려웠던 유년 시절의 고향 ‘비테프스키’를 초월하여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기하학적으로 서로 안고 하늘을 날고 있는 그림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화가나 작가처럼 유명한 사람은 되지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꿈을 안고 살면서 자유와 평화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내면적으로 깊이 만나는 것 같다.‘도시 위에서’의 연인들이 50여 년 후에 ‘생 폴 드방스위의 부부’에서는 아름다운 인생의 꽃다발을 피우고 굳건히 붉은 땅 위에 서서 형제애를 나누고 자유를 구가한다, 푸른색의 하늘에 서로 붙어 서서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막연했던 청춘의 회색 꿈에서 생기발랄한 밝은 색조의 꽃을 피워낸 것처럼 나의 내면에도 아름다운 자유와 평화의 꽃밭을 키워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대가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점은 시작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출발했지만 마침내 전인애(全人愛)에 도달하여 세계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내고 큰사랑을 호소하는 메시지에 있는 것 같다.



3.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전시장은 캄캄하다. 국보 83호와 78호인 반가사유상이 실물로 높은 탁자 위에 앉아 있다. 싯다르타의 '생노병사’의 고뇌를 형상화했다는 그 조각상. 그 보살은 과연 누구인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한 옛 사람들, 삼국시대 때의 사람들의 사유였던가 싶지만,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사유케 하고 있지 않은가. 두 보살이 깊은 사유에 빠져 앉아 있는 곳에만 조명이 내려 비추는 극적인 효과에 숙연해진다. 80여 평의 넓은 전시관에 단 두 점의 사유상만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 둘레 사방에는 앉을 의자가 몇 개씩 놓여 있어 관객들이 오래 감상하며 함께 사유할 수 있다.

83호는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다. 머리에는 연꽃 형상인 듯한 삼면관의 모자를 쓰고 있다. 정면에서 앉아 보면 이 사유상은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으면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띈 얼굴이다. 얼굴을 받치고 있는 손끝과 오른 쪽 발을 왼 쪽 다리 위에 얹은 발끝에서 생기가 도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깊은 평온 속에 잠겨 있어 고요한 표정이다. 그런데 옆으로 가까이 가서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 완연한 미소가 번지는 얼굴이다. 조각의 세련미에서 오는 풍만한 얼굴의 입체감, 그 오묘한 미소가 내 마음 속으로 물결쳐 와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미묘한 감격에 싸인다.

  78호인 오른쪽 사유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옷의 어깨선이 바람에 날리는 듯하다. 날개 같이 어깨를 덮은 옷 선이 나비처럼 금방 날아오를 것 같다. 사람이 앉아서 저 어깨선과 등선을 어찌 흉내 낼 수 있을까. 등선이며 어깨 선, 허리의 곡선, 이 곡선의 미가 한국의 선의 인상이라 했던가. 이 사유상은 많은 치장을 했지만 너무나 단아하고 아름답다. 정면에서는 미소 짓고 있지만 가까이 옆에서 보면 또 달리 담백하고 신비한 표정이 나온다. 나는 몇 번이고 가까이 갔다 뒤로 물러났다, 한 참 앉았다 하면서 그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의 울림에 젖는다. 그 사유상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치더라는 어떤 분의 말이 실감난다. 가장 얇은 면의 두께가 2mm 의 청동으로 저렇게 살아있는 듯한 내면의 미(美)까지 어찌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 과연 동양의 불상으로 독보적인 작품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미술시간에 데생을 하면 서양 인물을 모델로 해 왔다. 아그리파나 비너스를 그리면서 얼굴이나 몸에 근육의 부피감을 그리기에 급급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선을 그리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손뼉이라도 치고 싶다. 우리의 선을 조형미술품에 잘 나타낸 것이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반가사유상이라지 않는가. 우리도 반가사유상을 석고로 조각하여 데생의 모델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반가사유상이 전시되는 동안 불교조각실에서는 매 월요일 사유상의 사진 찍기와 그리기 대회를 열고 있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어떻게 저 반가사유상들을 밀로의 비너스 상에 비유하겠는가, 그 문화의 차이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이번 전시관 나들이를 즐겁게 마무리 해준 것은 우리 ‘예준’이다. 샤갈을 보고 있는 동안 밖에서 예준이가 기다리고 있어 더 보고 싶은 것을 멈추었다. 예준이는 내 손녀딸이다. 살아 있어 그 모든 전시물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살아 있는 우리가 서로 만나 기쁨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정말의 살아있는 전시관이다. 예준아! 하고 부르면 기어가다가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비틀어 앉아서 생긋거리며 쳐다본다. 예준이 아빠, 큰 공주인 엄마, 아기 공주‘예준'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볼거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2004/9/18/)







5

돌의 기도


                                                                      조윤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떨떨하다. 타임머신에 착 달라붙어 뒤로 달려서 약 2500년 전 쯤 어느 마을을 떠돌다 갑자기 툭 떨진 느낌이다.

  고창과 부안의 문화유적 답사 여행은 전북 지방에 대한 나의 메마름을 적셔주었다. 언제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 멀었던 곳이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유적을 접하고 보니 정보를 통하여 보는 것보다 훨씬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고창의 고인돌 군집 앞에 서서 해설사의 열의에 찬 해설을 듣자니 내가 과연 누구였던가 하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거석문화에 대한 옛사람들의 정신이 읽어졌다. 거석(巨石)의 정령에 대한 믿음이 만물숭배의 신앙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지구 역사로 볼 때는 어쩜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세월일지 모르지만 또 한편은  너무나 아득한 세월이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살다 간 우리 조상들의 숨결들이 돌 틈 사이사이에 베어있는 듯했다. 공동무덤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묘표석들은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이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말은 그럴 듯했다. 인류가 거석을 이용하여 시도한 건축의 시발이었으리라.

  천여 개의 공동 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거의 반경 4 킬로미터까지 돌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으로 이루어진 고인돌들의 축조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 전체가 모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쉬이 상상할 수 있으며 공동체적 삶의 모습 또한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만한 야산 에 죽음의 공간을 마련하고 제단을 쌓아 마을 사람 모두 신을 만나고 경배하면서 무엇을 빌었을 것인가. 고창천이 내려다보이는 강가에 마을을 이루고 삶의 풍요와 자손대대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논과 산림의 경계선상의 완만한 사면에 취락과 밭이 동서로 길게 자리하는 땅, 고인돌은 농지 사이의 경계선상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죽음 공간은 삶의 공간을 안고 있기도 하고, 삶의 공간은 죽음의 공간을 우러러볼 수 있기도 했다.

  30톤이 넘는 고인돌의 거대한 상석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성인남성 300여명이 동원됐을 것으로 생각된다는데, 그렇다면 천여 명이 넘는 인구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조직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조직을 갖췄을 것으로 생각되는 청동기 시대의 그러한 집단은 후에 나라를 형성하는 모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인돌의 기원 및 성격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했다. 2천5백여 년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살아왔던 수많은 조상들은 사라져 갔지만 오늘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언뜻 지난겨울 메소포타미아 문명전에서 보았던 서사시 한 구절을 생각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도시국가인 우르크의 왕이자 영웅이었던 길가메시의 서사시였다. 길가메시는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영생을 찾아 광야를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보잘것없는 여인의 충고를 듣는다. "길가메시여, 당신은 생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주었습니다.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도록 남겨두었지요.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밤낮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 줄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안에 꼭 품어주십시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그렇게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현실 문제를 중시하였으며 도시국가마다 수호신을 섬겨 현세에서의 행복을 빌었다고 했다. 기원전 3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최초의 도시국가 수메르 인들도 현대에도 불가사의한 문명을 일으켰고 거대한 지구라트(Ziggurats)라는 탑을 쌓고 홍수가 날 때는 피난처로 삼고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안녕과 행복을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의 발상지였던 비옥한 땅은 지금도 유혈이 낭자하고 폐허의 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인류의 문명이 몇 천년동안 발전해온 물질문명은 한편으로는 부족간의 투쟁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져온 전쟁의 역사 속에서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명체들이 고갈되어 가는 시점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차고 넘치는 물질의 홍수에 휩쓸려 가는 우리 시대 우리들이 과연 옛날 고대인들보다 문명의 발달만큼 정신적으로 풍요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할 일은 저 고인돌무덤에 제단을 쌓고 빌었던 그 당시의 사람들과 길가메시의 서사시 말고 더 해야 할 일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동양 최대의 고창 고인돌 집단 군락지는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도 중요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고대사를 복원하는 방안의 하나로 보존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단지 고인돌이 문화유적으로 관광의 대상으로만 여겨 지나치고 만다면 너무나 막대한 손실을 우리는 거듭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이 묘지로 둔갑할 지경에 처해 있는 묘제(墓制)문화는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묘제문화 만큼 변화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 않은가. 당시 사람들도 주검을 묻고 묘제로서 거대한 돌로 무덤을 축조하고, 조상을 숭배하기 위함이었건, 아니면 지배층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서였건, 그것은 조상숭배와 영생의 의미를 극대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구태여 타임머신을 타지 않아도 정신이란 곧 바로 여기 지금에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옛날의 정신에서 오히려 현대에 구현할 새 정신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인돌 당시의 묘제의 정신이나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오늘날 다시 찾아야 할 새로운 정신문화 유산이 아닐까. '가장 오래 된 것이 가장 현대적이다.'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2004)














고목에 핀 꽃                  


                                                                             조윤수



  금산사 미륵전 앞에는 내 키 만 한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이것 무슨 나무죠?” 묻는 사람은 많은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앞으로 다가서는데 한 사람이 나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갸륵하기도 하지, 이렇게 속이 다 파진 몸을 하고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다니! 한 쪽 몸은 거의 껍질만 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걸." 정말 그랬다.  속이 다 파진 두 밑동 사이는 치료를 받은 큰 상처가 있었다. 골고루 열려있는 빨간 열매들은 무리를 이루어 만개한 꽃밭 같았다. 찔레꽃 열매보다 약간 더 큰 열매를 가득 달고 있는 고목은 눈부신 자태로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이 '꽃사과'라고 하면서 지나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산사나무라고 한다.

  나무에 잎이 피지 않는 가지가 있으면 틀림없이 그 가지 쪽에 해당하는 뿌리부분이 상한 까닭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산사나무는 비록 몸체의 밑 부분 한 쪽이 거의 반절이 없어져 있을망정 뿌리만은 모두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년의 세월을 지탱하기 힘들어서 쓰러질 듯했던 미륵전은 아름다운 새 단청으로 치장하고 파란 가을 하늘을 이고 있어 더욱 굳건한 모습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전면 해체보수가 완료된 것이 3년 전이었다. 법당 내부 지하에는 솥 모양을 한 연화대가 있어 솥을 만지는 모든 사람은 숙세(宿世)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 성취한다고 전해 온다. 미륵전의 터는 본래 용이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어떤 고승의 가르침에 따라 참숯으로 연못을 메워 용을 쫓아내고 미륵전을 건립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부도탑과 5층 석탑이 자연 그대로 언덕 위에 있을 때, 우리는 차 공양의례도 가끔 하였고 탑돌이도 했었다. 그 때 미륵전 앞을 많이 거닐었는데도, 산사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무의 수령을 추정할 수는 없으나 백년은 넘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미륵전 밑이 참숯으로 메워져서 땅 속이 맑게 정화되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어린 기도와 미륵불의 가피까지 층층이 쌓여졌을 터전에 깊이 뿌리가 내려져 있기에, 세상의 온갖 풍상에 그리 망가졌어도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가.


  일전에 만났던 600살이나 된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까지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맹사성의 고택에서 보았던 고목이다. 한 쌍의 은행나무가 두 왕조의 역사와 더불어 흘렀던 한 가문의 만고풍상(萬古風霜)의 사연들을 안고 늠름히 서 있었다. 많은 세월, 해마다 무성한 잎을 피워 그늘을 만들고 수많은 열매를 맺고 익혀내기에 그토록 온 몸을 삭혀냈을까. 한 아름도 넘는 세 기둥의 밑동 하나는 속살이 다 파져 있고 그 자리에 돌비석이 그 속살을 대신하고 있었다. 산사나무처럼 앞으로 보면 돌비석이 가운데 놓여있는 것 같으나 그 뒤는 껍질만 남은 밑동이었다. 그러나 높은 나무 가지 끝을 보면 아직도 떨구어 내지 않은 열매가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같이 탑돌이와 차 공양을 시연하였던 내 차(茶)스승이자 벗이었던 비구니 스님이 생각난다. 그 분은 서울에서 카톨릭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앞둔 어느 날 수덕사에 가게 되었다. 수덕사 앞에서 한 그루의 고목을 만났다. 고목에서 피어난 잎을 보고서 인생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는 아리따운 청춘의 나이에 세상의 덧없음을 보았고, 고목에서도 꽃을 피운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새 삶을 살고자 그 날 출가를 결심하였다. 나의 다원을 처음 찾았을 때 우리는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서로 반했다. 내가 차(茶)맛에 반하고 연꽃에 매료되는 것처럼 그에게 반한 것은 그가 이미 깨달음의 꽃을 피워내고 수행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노란 물감으로 뒤덮인 은행나무 옆에 빨간 열매가 아기자기한 산사나무를 배치하고 나는 그 아래에 앉아본다. 오랜 삶을 같이 해온 친구처럼 마음이 통할 것 같다. 동병상련일까, 내 발에 남긴 흔적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고목들이다. 세상살이 풍상에 힘들었던 시절에 나도 그렇게 힘을 소진했던가.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느라고 일생에 써야 할 최대한의 힘을 일찍 쏟아냈던 것일까. 비록 속살의 힘을 잃어 오래 서서 버틸 힘이 없지만, 마음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는다면 고목 같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밑동이 파졌지만 의연한 산사나무나 은행나무처럼….

나무의 나이테는 자신이 놓인 환경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단다. 기후 조건이 좋았던 해는 나이테가 넓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갑작스레 좁아진다. 나무가 한창 자라야 할 시기에 극심한 가뭄이나 병충해와 서리 등 환경이 나빴을 경우 가짜 나이테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모양을 이용해 지구환경변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내 인생의 나이테에는 어떤 삶의 무늬가 새겨지고 있을까. 나이가 든다는 것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시간들 속에서 삶의 굴곡을 이겨내고 지혜를 쌓아 가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마을 어귀에 소리 없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도 역사와 더불어 지금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고목들에서 내가 되어갈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천지와 조화하는 나이의 순리와 삶의 지혜를 생각하게 한다. 뿌리가 좋은 정토에 내려져 있는 고목처럼, 내 의식의 뿌리도 영원한 생명에 튼튼히 이어져 있어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빛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리라. 묵묵히 살아가는 나무처럼 땅이 나무에게 구속이 아니듯이 내 자리에서 그렇게 살리라. 고목의 생명력이 내 마음에 환희와 희망을 준다.

  사람은 노년이 될수록 몸이나 마음도 약해진다. 작은 일에도 섭섭하고 참을성도 없어지기 마련이며 고집만 강해져가기 쉽다. 푸른 숲보다 단풍들고 낙엽 지는 가을 숲이 더욱 아름답다지만 사람의 경우, 모든 노년이 다 아름답지만은 않다.

  삶의 예술이 가장 뛰어나고 진기한 예술이라고 '칼 융'은 말했으며, 극소수의 사람만이 삶의 예술가가 된다 했다. 젊음은 매력적이지만 노년은 눈부시다. 삶의 예술을 빚어온 사람의 노년 주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벽빛이 퍼져 있다 했거늘. 조화로운 삶을 빚어내어 본보기가 되어준 헬렌 니어링의 얼굴의 주름은 실로 경이로운 삶의 예술가다운 모습이었다. 산사나무에 핀 꽃을 보면서 내 황혼의 나무에는 어떤 꽃을 피울 수 있을지 그려본다.  (2002년 10월)











7

소나무야, 소나무야

-숲이 사라진다 2 -


                                                                        조윤수



  아카시 향을 머금은 송화 가루가 흩날린다. 녹음 우거지는 사이사이 산 찔레꽃도 송화가루를 맞고 있다. 이름 모를 풀꽃들의 도란거림도 바람결에 사라지는 송화 가루처럼 아카시 꽃 숲으로 사라지는 해거름. 잡을 수 없는 그윽한 향기, 아카시 꽃 눈물 흘러내리면 세월의 꼬리도 잡을 수 없으리라. 희뿌연 저녁 안개가 내리는 언덕 위, 꾸불꾸불한 붉은 몸체로 서 있는 소나무도 자신의 향보다 진한 아카시 향에 취해 있는 듯하다. 울타리처럼 서 있던 소나무들이 다 죽어 있는 한 무덤 앞에 앉아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아쉬워한다. 장사도 치르지 못하는 소나무들의 넋이 허깨비 되어 서있는 것 같다. 며칠 전에 보았던 해안지대의 소나무 무덤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가 아닐까? 소나무는 솔잎에서 송화 가루까지 우리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식품과 약용으로 쓰임새가 많은 나무다. 한국의 건축자재로 소나무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소나무를 대신할 재료가 많이 있지만 천연 재료밖에 없었던 옛날에는 궁궐이나 사찰, 일반 가옥의 건축에 주로 소나무를 많이 썼다. 저 유명한 거북선도 소나무로 만들었다. 모든 나무 중의 우두머리인 소나무를 신격화하여 모심으로써 집의 안전과 가문의 번창을 기원했고, 경남 지방의 '성주신'설화는 이러한 소박한 민간신앙의 일면을 반영한다. 그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성주풀이'는 소나무 탄생의 신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지조와 충절, 꿋꿋한 선비의 이미지는 조선시대의 기본이념으로 삼은 유교사상과도 잘 맞아떨어졌기에 오랜 세월 관상용·정자목·신목으로 심어왔다. 그래서일까, 내가 시집온 해 시아버님께서는 송판으로 만든 책꽂이를 선물해 주셨다. 집안의 가훈처럼 충절을 잘 지키라는 뜻이었을까?


  그 오랜 세월, 소나무와 함께 살면서 만들어낸 이야기와 시, 노래, 그림 등 소나무의 자취는 짐작할 만하다. 전설처럼 들리지만, 우리 민족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소나무와 더불어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음미해 본다. "한국인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났고, 푸른 생솔가지를 꽂은 금줄을 치고 지상에서의 첫날을 맞고, 산모의 첫 국밥도 마른 솔잎이나 솔가지를 태워 끓이고, 아이가 태어난 지 사나흘 째인 삼일 날이나 이렛날인 칠일 날에는 소나무로 삼신할미한테 산모의 건강과 새 생명의 장수를 빌고, 그 아이가 자라면 솔방울을 장난감 삼아 놀면서 솔 씨를 먹고 허기를 달랬다. 소년이 되면 봄마다 물오른 소나무가지를 잘라 껍질을 낸 뒤 송기를 먹고 갈증을 달래며 유년의 봄을 보냈고, 어른이 되어서는 소나무 껍질은 귀한 양식이 되었으며, 소나무를 먹고 솔 연기를 맡으며 살다 죽으면 소나무 관에  육신이 담겨 솔숲에 가 묻히는 생(生)을 살았다. 죽어서는 무덤가에 둥그렇게 솔을 심어 이승에다 저승을 꾸몄다.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인연을 함께 하였다." 정동주 님의 소나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소나무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우리민족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굴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소나무 숲은 고갈되었으므로 소나무에 대한 관심은 조선시대에 들어 급격히 많아진다. 나라에서 꼭 필요한 용재였으므로 엄격히 보호 시 되었다. 이렇게 보호되던 소나무는 조선시대 말기에 송진이 들어 있어 불땀이 좋고 주변에 쉽게 구할 수 있어 땔감으로 마구 베어졌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인 수난이 시작되었다. 일제는 우리의 아름드리소나무를 마구 베어 전쟁말기에 땔감으로 쓴 것이다. 이러한 소나무 수탈은 극에 달하여 궁궐의 좋은 소나무 숲까지 모두 수탈하였다. 새로 들어선 정부 역시 유실수를 심자는 삼림정책을 폈고, 이를 이용하여 소나무를 베어 팔려는 장삿속이 맞물려 소나무 수난은 한층 가중되었다. 소나무를 괴롭힌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송충이로 시작해서 솔잎흑파리의 피해로 큰 위기를 맞아 많은 소나무가 빨갛게 죽어갔었다. 겨우 회복되어  가는가 했더니 또다시 소나무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한다. 이번에는 해외에서 들어온 '루이지애나 재선충'이다.


  마을 뒷산 소나무가 죽어 가는 곳이 많다. '조선 사람은 소나무다' 하리만큼 소나무는 우리 자신의 일부처럼 가까운 나무이지 않은가. 수 십 년 뒤 한반도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 민족을 아우르는 소나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값지고 귀한 일이다.


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소나무가 흰눈을 덮어쓰고 묵묵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든든하고 아름다운 정경인가. 소나무에 한가위 달 오르면 솔잎이 채 질 하는 달빛 마시며 솔잎을 따서 송편을 빚어야 하는데……. 하루 종일 새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고, 아름다운 백로들이 배회하는 소나무 숲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함께 생명을 구가해주면 좋겠다. (2003년 5월)






8

이념의 갈등


                                                                    조윤수


  자꾸만 고개가 뒤로 돌려졌다. 아무도 없는 산언저리에 한 남자를 내버려두고 일행은 멀어져 갔다. 한참 서서 그 남자를 바라보다 일행의 꼬리가 가늘어지면 뛰어가곤 했다.

오랏줄에 손목이 묶인 죄수들이 개성에서 서울까지 호송되고 있었다. 한국동란의 1.4 후퇴 때의 일이다. 우리 가족도 그 행렬과 함께 걸어야 했다. 어머니는 내 여동생을 업었고, 막내 남동생을 캥거루 같이 배속에 품고 있었다. 어머니의 머리에는 박스형 라디오가 얹혀 있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보다 산에 버리고 온 그 병든 아저씨가 불쌍해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산등성이를 향하여 한참을 올라갔다. 수풀을 헤치고 쫓아오는 인민군들의 추격을 피해 허겁지겁 달려야 했다. 그리고 산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저씨를 부축하고 가야 했다. 나는 힘이 빠져서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꽉 붙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이불깃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그런 꿈을 가끔 꾸었다. 그런 후면 언제나 아무도 없는 산자락에 웅크리고 있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버려져야 했던 일행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의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내 마음 한 구석에 각인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무수한 주검을 가득 실은 트럭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내 동생을 이끌고 그 곳으로 가 보자고 했다. 궁금하였지만 무서워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두 눈만 뜨고 내다보곤 했었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우중충했다. 입학할 때 근사했던 학교가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전쟁 부상병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고 있었다. 우리는 부산의 구덕산 중턱의 천막 분교에서 공부를 했다. 왜 우리는 전쟁을 해야 했는지 학교에서 배웠다. 인민군은 빨갱이들, 남한을 침략한 나쁜 놈들이라고 배웠다. 왜 빨간색은 빨갱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는지 알 수 없었다. 선홍색 빨간 장미 빛이 이념의 굴레를 쓰면 왜 적색의 위험 신호로 둔갑해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북한은 베일에 가려졌고, 알아서는 안 되는 금기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반공포스터 그리기와 반공표어 짓기로 사상을 강화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몇 십 년이 지나고 나서 TV로 보게 된 북한사람들이 얼마나 낯설고 신기했는지 몰랐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마저 믿어지지 않았다. 거꾸로, 우리를 알게 된 그들은 또 얼마나 신기했을까. 대한민국 축구 4강의 신화가 창조되고 있는 사이, 서해에서는 북한과의 교전이 벌어졌다. 남북, 양쪽의 많은 젊은 생명들이 또 희생되었다. 한 젊은 영혼은 한 달이나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마지막까지 밝은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는 어느 중사 부모들의 아픔을 어떤 보상이 대신 할 수 있겠는가.

  철새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유로이 철조망을 넘나든다. 지구촌 어느 곳도 끊어져 있는 경계는 없건만 오로지 한반도만 허리가 두 동강으로 잘려있다. 지도 상 그럴 뿐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거의 잊고 살았었다. 여러 나라에서 만든 각 자국의 세계지도를 처음 보았을 때 으아 했던 기억이 있다. 호주의 세계지도를 보면 호주가 한 가운데에 있다. 모든 나라가 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세계지도만 보았던 나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신기하고 놀라웠다.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의 뜻이 이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난 예가 또 있을까 싶었다.


  서독과 동독이 통일이 된지가 벌써10년이 넘었다. 통일독일의 10년을 결산해보는 인터뷰 마당에서 독일의 한 인사가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마음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동독인 남자와 서독인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동독인 남편은 말했다. “분단되었던 세월동안의 쌓였던 사고(思考)의 벽과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입니다”라고. 마음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시간 또한 분단의 세월만큼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예를 들었다. 서독인 부인은 생활 가전제품을 먼저 들여놓고 사용하면서 카드로 지불하자고 했다. 동독인 남편은 왜 그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을 모아서 그 제품을 살 형편이 되었을 때 사야한다는 것이다. 두 의견이 다 일리가 있다. 생활의 차이가 사고방식의 차이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럴 때 생각은 다르나 두 사람이 마음의 통일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일은 한 가정, 한 사회, 어느 곳에나 있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 틀에 맞추려고 감정의 소모를 자초했으며, 내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살고 있는가.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다양하다는 것은 창조성을 키워나갈 기회가 더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우리는 감정을 상하거나, 싫어하거나, 마침내는 갈라져야 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남북한의 끊어진 철도가 신의주까지 연결되고 시베리아 벌판, 아니 유럽까지 연결될 희망이 보인다. 소식조차 몰랐던 북녘동포들이 남녘을 찾고 있다. 아시안 게임에 북한도 한 국가의 대표로 참가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남과 북의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체육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얼마나 자주 내왕을 하고 있는가? 더구나 이산가족들이 서로 남북을 오가며 얼마나 한 서린 피눈물을 흘리던가?

  철새들은 이념을 모른다. 그러기에 그들에겐 마음의 경계가 없다. 생각을 바꾸면 마음을 통일할 수 있는 길이 보일 텐데 그게 이리도 어렵다. 남과 북 칠천 만 겨레의 염원인 통일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끊어질 때는 순간이지만 이을 때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마음 하나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건만 서로 그 마음을 열기가 왜 그렇게 힘든 것일까?   (2002년 10월)



 

 

9

지구방위대


                                                            조 윤 수


   고향 마을을 생각하면 외지로 떠나보낸 님과 아들을 기다리는 고개 마루가 떠오른다. 뒷동산에 오르면 열리는 딴 마을이 있었고, 마을을 끼고 도는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 신작로로 이어진 새 세상이 열려있었다. 우리는 그런 고향의 고개를 넘어 다리 밑의 강물처럼 흘러왔다. 농경민족이었던 우리에게 마을은 세계의 전부였다. 근대화는 곧 도시화였으므로 마을은 산업사회에서 더 이상 우리네 삶의 터전이 되어주지 못했다. 도시로 바뀌지 않은 마을도 구성원은 도시로 상당수 빼앗겨 농촌마을은 그만의 공동의식, 풍습, 유대관계를 잃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을 찾아 떠났던 파랑새의 꿈은 낯선 사람들이 가득 찬 도시에서 부초처럼 떠도는 삶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시생활자들의 여러 꿈 중 하나가 시골마을에서 사는 일이다. 부단한 유년 회귀에의 그리움을 안고 이미 가버린 유년기의 단순함과 걱정 없었음이 까마득하게 낙원으로 회억되는 것이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끼리 다시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은 너무나 당연한 세계적인 추세인지도 모른다. 마을을 떠나온 사람들이 다시 만드는 고향은 어떤 마을일까.

 

   새로운 사회, 새로운 고향마을이 세계 각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한 마을이 점(點)에서 시작하여 선으로, 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 나고야 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삼중현의 도요사토에는 일본에 있는 40여 군데의 새 고향마을 중 가장 규모가 큰 마을이 있다. 십 년 전(1992년 가을) 나는 그 마을의 세계 박람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마을의 외관이나 형태에 있어서는, 모든 건물들이 현대적이란 것 외에는, 다른 일반의 농가와 다름이 없었다. 이미 일본의 일반 농가는 완전히 현대화되어 안팎이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들이었다. 이 마을은 숙사와 축사가 가까이 있었지만 마을 전체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양계장에서도 축사에서도 울음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고 축사 특유의 냄새도 거의 없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마을사람들은 저녁 식사 전에 목욕을 하는 것이 일상의 일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하였으므로 우리 일행도 목욕탕에 안내되었다. 첫 날은 어린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작은 목욕탕, 다음 날은 온천 목욕탕을 사용하였다. 천명이 넘는 식구들이 사용하는 장소인데도 전연 혼잡한 일이 없고 조용하고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아무도 관리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데도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처음과 같이, 그 때 마다 스스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탈의실에서 벗은 빨래 감은 이름표를 달아 종류별로 분류함에, 속옷까지도, 내놓으니 만 하루 d만에 내게로 돌아왔다.

   축제가 있는 날이나 행사가 있는 날 사용하는 대형 식당에는 식탁들이 몇 십 개나 배치되어 있었다. 중앙 앞에는 무대도 있었다. 20여명이 한 식탁 한 가족으로 여러 가족을 이루어 대 가족의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식당입구에는 그 날 상차림의   먹거리 재료들이 진열되어 있어 어떤 음식이 식탁에 올려지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먹는 음식의 배경까지도 함께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주식에서 후식까지 모두 자연전인일체(自然全人一體) 순환농법에 의한 생산물을 먹는다.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이 곳에서는 누구나 한 가족이 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 넘겨주고 넘겨받으면서 정겨운 식사를 즐기게 된다. 먹거리들이 생산되어 조리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르기까지 자연의 힘과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 전해 받은 우리는 음식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과 하나로 이어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어짐의 둥근 고리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식사가 끝난 식기들은 남겨진 음식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주방 입구에서 조용히 민첩하게 순환되고 있었다.
   나는 식당 뒤쪽에 있는 식탁에 자리하였다.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는 대 가족의 식사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니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얘기로만 듣던 천국의 장면이 이런 것이 아니겠는 가 했다. 천국에 가면 식사할 때, 기다란 젓가락만 있어 자기 스스로 먹기가 어렵기 때문에 상대를 먹여주면 쉽다 했다. 실제로 우리는 젓가락만으로 식사를 하였으니까.

   아침 일찍 우리는 마을참관을 하였다. 초겨울 날씨, 아직 안개도 걷히지 않은 때 중등부 여자아이들이 맨발로 딸기 모종을 정식(定植)하고 있었다. 참관하는 한 엄마는 자신의 딸이 대비되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했다. 대형 유리 온실에서는 고등부 남학생들이 파이프 연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밝고 싱싱한 그들의 표정에서 활기에 넘치는 젊음의 매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길을 신나게 달리고 있는 유년의 아이들 모습이 저 만치 길모퉁이를 휘돌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 바람을 가르며. 아득했던 유년기의 단순함과 걱정 없었음이 아침 안개 속에서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단하게 유년 회귀에의 그리움을 안고 찾았던 낙원이 바로 눈앞의 그 아이들 속에 살아 있었다.

   저녁에 강당에서는 학생들의 코러스 공연이 있었다. 아침에 춤추듯 밭이랑을 오갔던 아이들이 토마토 모양을 하고 그들의 하루 일과를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것이었다. 고등, 대학부 아이들도 전원이 무대에 올랐다. 무대 양옆에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과 전면에서 온 몸으로 합창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역동적인 열기에 가득 찬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작곡 작사한 옛날을 추억하는 것이 아닌 바로 자신들의 생활 자체를 노래와 연극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온 몸에서 뿜어 나오는 정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자연의 이(理)에 맞는 고향 만들기를 하는 지구방위대의 기수들이었다. 강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관중들의 감동과 환호 또한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시었다.

 

   아직도 눈에 선한 야외식사, 아름답게 가꾸어진 과수농원 감귤 밭에서 마련된 즉석 바베큐 요리, 각종 야채 등, 자연에 인위를 더하여 마음이 담긴 전체의 맛을, 한 인격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황금 빛 귤들과 아마가끼(단감)들이 탐스럽게 달려있는 산책길을 거닐며 즉석에서 따먹어 보는 유쾌한 맛도 감동이었다. 아무도 욕심껏 따 가지려는 사람은 없었다. 철따라 열리는 과수 밑에는 마을 사람들이 평소에 야외식사를 즐겼던 베베큐 기구나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봄에는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고, 여름에는 포도덩굴 아래서, 초겨울까지는 노란 단감과 감귤 밭에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태초의 에덴동산을 찾은 듯했다.

 

 

 

 

10
이상(理想)한 마을, 이상한 사람들

                                                          

                                                                       조 윤 수

 

 

   강을 건너면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만남과 이별의 추억을 간직한 다리는 언제나 뭔가 기다려지는 그리움이 서려있다. 11월이 겨울로 들어서는 징검다리인 것처럼 나에게 11월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열망을 열게 해준 마음의 징검다리이기도 하다. 십 년이 지나도, 세월이 흐를수록 생생해지는 우리의 노래 소리. 일본 아이들이 우리말로 불러주었던 ‘나의 살던 고향’과 ‘아리랑'. 초겨울 쌀쌀한 바람에도 팔다리의 맨살을 그대로 내놓은 채로 씩씩하게 우리 일행을 전송하던 노래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일본의 한 낙원촌마을, 생산물 공급 출하장. 학교가 시작하기 전의 아침 시간을 활용하여 학생들이 채소와 계란 등을 선별하고 있었다. 코너에 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목적: 전인행복, 목표: 한 시간에 00봉지, 포인트: 마음을 담아서. 그것은 마을 사람 모두 삶의 목적과 구체적 목표와 일하는 내용 등, 생활 속에서 빠져서는 안 될 핵심을 의식하며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민첩한 손놀림으로 작업을 하는 아이들에게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여하한 경우에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자타일체(自他一體)의 이(理)를 생각하는 이 마을에는 아픈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마을의 의사는 도시 병원으로 출근한다. 이 의사는 출근 전 아침 시간에 소 젖 짜는 일을 돕는다. 아침운동으로써 아주 즐겁단다. 그 의사는 우리에게 물었다.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까? 미워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병입니다.”
   도시에서 중견 화가로 활동했다는 한 중년의 남자는 이 마을에 이주하기 전에는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서라도 이 마을의 삶을 택하고 싶어 했단다. 처음에는 누구나 닭 키우는 일부터 익힌다. 이 마을의 양계장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기본 도리를 배울 수 있는 이치의 짜임새가 있다. 화가 역시 처음엔 서툴고 힘들었으나 점점 신나고 즐거워졌다. 후에 그는 경관이 좋은 산 중턱에 멋진 화실을 갖게 되어 다시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양계나 농사일은 아침저녁으로 운동 삼아 즐겁게 한다고 했다. 물론 그의 화풍은 양광이 찬란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의 화실에서 그림도 감상하고 그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 전경의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하였다.

   마을의 백화점엔 생활용품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다. 이 곳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많으므로 마을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의 가전제품들은 나날이 창고에 쌓여간다. 관리 담당자는 있겠지만 아무도 지키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다. 쓰고 제 자리에 갖다 놓기도 하고 제안하면 새로 구입할 수도 있다. 소유에서 자유스러워지는 연습은 이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물질에서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것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누구하고라도 더욱 사이좋을 수 있는 연습이 생활 속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계사(鷄舍)와 계사 사이 통로 위는 포도 넝쿨이 덥혀 있는 곳도 있었다. 축사의 통로 길가에는 감나무들이 보기 좋게 줄지어 있었다. 발길이 닿는 길모퉁이마다 계절의 꽃들도 다정하게 다가왔다. 동물과 작물들도 사람에게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아이에서 어른까지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형은 특정 연예인이나 위인전의 간접 인물이 아니었다. 같은 마을의 바로 손 위 형이나 오빠, 아저씨가 그 모델이 되고 있었다.

   자동화와 기계화된 일터에서 일하며 문명의 이기를 인간위주 만이 아닌 모든 생명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여 인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일에 더욱 힘쓴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경쟁과 비교 대신 사이좋음과 개성(個性)이 살아나는 아름다운 지구촌 고향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해간다면 마음이 풍요해져서 물질도 넘쳐나고 자유와 평화로운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야말로 대안적인 실현 가능한 방법으로 보였다. 실제로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는 조용한 움직임이 지구의 축을 흔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떨어뜨리고 떨어지는 사람 없이 전체의 행복 안에 나의 행복도 영원한 것이다. 산의 정점이 최고의 지향점이라면 산의 주변으로 모여와서 정상으로 오르는 과정 동안 끊임  없이 마음의 변혁을 해 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는 마음 바탕이 이상향을 만드는 필수 조건인 셈이었다. “무소유의 진정한 실천만이 우리를 자유의 빛나는 들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재물과 명성과 권력은 잠시 우리에게 필요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위해 당신의 삶 자체를 맞바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신이 진정 소유해야 할 것은 당신 자신의 삶입니다. 이제 당신이 쓸데없이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손에서 놓을 때입니다.” 라고 했던 칼릴지브란의 말처럼 이 마을의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상(理想)한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이상한 사람들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현재만으로도 내게는 이상(理想)하지만, 이상은 언제나 전진(前進)이 있을 뿐이니까.

  

  어느 누구든 다 내밀하게 간직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요나컴플렉스인 지도 모른다. 차가운 거리를 헤매는 나그네의 돌아가야 할 집과 어머니는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이다. 낙원 회귀의 욕구는 모든 문화 현상의 근저에 깔려 있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이리라.
   지금도 귀를 기울이면 되살아나는 청년들이 부르는 소리. 친구야, 너와 내가 그리는 세계. /친구야, 솟아오르는 아침 해 속에서 기쁨을 나누세/. 그리고 아이들의 노래 가락, 돼지는 꾸울 꾸울, / 송아지는 음메 음메. / 병아리는 삐약 삐약. / 우리들은 사이좋아. / 튀어 오르는 흰 우유, / 그대에게 전해 주리,/ 계란의 따스함을. / 지렁이가 땅을 일궈대며 / 햇빛과 빗물이 채소들을 뿌리내리게,/ 다 같이 살리고 살려지면서 / 사이가 좋은 세상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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