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수필집<바람의 커튼>

송광사 백련정에서

차보살 다림화 2011. 7. 18. 12:44

 깨달음의 꽃

 

깨달음의 꽃

                                                                                             조윤수

 

 

  청정무구한 연꽃향기를 마신다. 진흙의 정기가 빚어낸 초록 잎에 밤새 고인 이슬로 순백의 연향蓮香)을 우려낸다.

감로차 한 잔에 몸과 마음이 순간 환해진다. 심청의 혼백이 푸른 치마 받쳐입고 흰 구름 타고 연 방죽에 내려앉은 듯. 이름 모를 삼세(三世)의 부처들이 삼복더위에 연화대에 앉은 듯. 방죽을 뒤덮은 연잎은 부드러운 파도가 넘실대듯이 바람에 일렁인다.

 

 

 

 

모든 생명은 종족 번식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활짝 피기 시작하면서 짝을 부르는 몸짓을 한다. 꽃은 성숙의 절정을 이루어낸 뒤, 그의 결실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한가.

 

 

 

연꽃은 잎에 기대지도 않고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물 속에서 외롭게 긴 시간 투혼을 불사르며 떠오른다. 어두운 미망을 걷어 헤치고 밝은 빛을 보기만 하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희망을 안고 일심(一心)으로 정진한다. 탄생부터 연꽃은 꽃과 종자가 운명적으로 인과(因果)가 된다. 삶의 시작은 죽음을 동반하고, 또 다른 생명의 태동은 기다림을 위한 은혜의 강물에 고요히 잠겨든다. 삶과 죽음사이의 거리가 본래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 고통과 번뇌를 짓고 부수고 부대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백팔 번뇌의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진흙탕에 떨어졌다. 시궁창 흙탕물을 서로 튀기면서 허우적거렸다. 문득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빛을 향하여 나르는 연습을 해야 했다. 수영을 배울 때 수영장 물 속에 뛰어 들어 바닥을 차면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려가야 했다. 밑바닥까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연못가를 산책하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알 수 없는 미소가 절로 번지는 나의 얼굴을 향하여 꽃들은 고개 짓을 한다. 옛날 그 때, 나의 모습을 기억이나 하듯이.

 

 

 

연지(蓮池)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살았던 나는 동네 아이들과 더불어 덕진공원을 자주 드나들었었다. 연꽃이 필 때면 우리는 덕진 연못에서 자주 만났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잠 못 들어 할 때면, 그 연꽃은 나를 불렀다. 그는 결코 말로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찻잎을 따고 정갈하게 빚은 햇차를 부처님 전에 공양 올렸었다. 그리고 초파일 전야를 연등으로 밝혔다. 초파일 절에서 만난 스님께 친구처럼 스승처럼 끌렸던 매력이 수행의 향기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스님이 참 부러워요." "암, 부러워해야지." 당당하고 낭랑한 목소리는 연잎에 내린 진주 이슬 구르는 소리 같았다. 한 떨기 아리따운 연꽃으로 내 안에 아로새겨져 다시 살아나는 향기가 초록의 가교를 밟고 시공(時空)을 초월한 피안(彼岸)으로 나를 이끌었다.

 

 

 

 

 

 

 

 

 

 

 

 

야무지게 다문 입가에 미소를 띈 채 열릴 것 같지 않던 봉오리가 배시시 열리는 것을 볼 때, 숨 죽여야 했다. 반쯤 열려 가운데는 텅 비고 꽃술과 여린 열매는 긴 목으로 흙탕에서부터 그윽한 향내와 순백의 빛을 뽑아 올리고 있었다. 활짝 열려 화려한 꽃잎에 담았던 화엄의 세계는 하늘로 터지고 한 잎 두 잎 연화 정토의 찬가가 수면으로 잦아들었다. 마침내 여린 연자(蓮子)는 노란 꽃술을 달고 깊은 속내를 속삭이며 꽃잎을 여의었다. 몇 천년을 넘나든다는 연실은 그로부터 백일기도에 들어갔나 보다. 회향을 향하는 기원은 천년의 고독을 담아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향기는 더욱 그윽하고 은은했다. 솔 산도 대나무 숲도 향기에 젖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겼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연꽃은 진흙에 뿌리를 두고서도 물들지 않고 다른 종을 섞지 않는 영원한 순종이다. 고귀한 깨달음의 꽃을 피운 부처들은 그래서 모두 연화대 위에 앉아 법음(法音)을 설하는가 보다. 연꽃은 부귀도 탐하지 않고 요염하기를 거부하며, 서로 엉겨 비벼대는 거추장스러움도 없다. 저만치 떨어져서, 누구도 근접할 수 없다. 붙어 있지 않아 끈적이지 않고 무겁지도 않다. 서로 마주 보기도 하며 나란히 하늘을 우러러 시방세계를 자비의 향으로 넘나든다. 철저히 홀로 이면서 하나를 이룬다.

 

 

 

 

 

 

 

 

 

 

 

 

연잎은 가지를 치지도 않고 줄기도 뻗지 않으며, 다른 잎을 감는 덩굴도 뻗지 않는다. 오로지 곧은 외줄기로 올라온다. 물 속에서는 꼭 말아 쥔 손가락 같이, 단호한 의지를 품은 입같이 다문 채 올라온다. 짙푸르게 성숙해진 잎은 결코 연화(蓮花)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햇 연근(蓮根)의 신선한 생기는 꽃에게 양보하고 오래 묵혀 둔 지혜를 살려 꽃을 더 꽃답게 빛내는 즐거움을 연엽(蓮葉)은 알고 있다. 커다란 치마 자락을 벌려 이슬을 받아 두었다가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을 꽃잎에게 적셔주려는지….

 

 

 

 

 

 

 

 

 

수많은 사람들의 입빠른 칭송이 청정한 연심(蓮心)에 누가 될까 저어된다. 연꽃을 따라 이쪽저쪽에서 긴 안테나까지 세우고, 멀리서 가까이서 찍어대는 사진사들은 꽃 마음엔 아랑곳없다. 진초록 잎에 드리운 꽃 그림자에 앵글을 맞추고 빛과 그림자의 예술을 네모난 쪽지 위에 재창조한다.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는 여린 씨앗에 붙은 꽃잎 하나와 다 말라버린 꽃대를 대비시켜 또 한 장의 예술이 창조되고 있다. 아침에는 반짝이는 햇살 속의 이슬 젖은 꽃잎을 연출하고, 노을지는 황혼녘에는 타 들어가는 빛 속의 꽃잎을 담아낸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연화장(蓮花藏) 깨달음의 세계는 담을 수가 없다.

결코 잡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연꽃의 숭고함을 내 문학의 앵글로 담아낼 수 있을까. 차라리 두 눈 딱 감고 조용히 내 마음 속에다 연꽃 한 송이를 고이 담아둘 걸 그랬나보다.   - 글, <바람의 커튼>  중 '깨달음의 꽃'

 

사진 (완주송광사 연못) -  송광사는 신라 진평왕 시절, 백련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던 것의 의미를 되찾아 2008년 이 연못지를 매입하였다.

   (2011년 7월 16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안락과 깨달음의 세계가 널리 펴지기를 기원하여 연꽃을 심고 백련정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