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 에세이 2집

에세이 2집 6부, 조용한 사랑의 혁명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8. 00:49

 

6부


1. 조용한 사랑의 혁명

2.  잔인한 4월 (숲이 사라진다 - 1)

3.. 신음하는 우리 국토

4.  소나무 무덤

5. 노아의 방주

6.. 목숨의 교향시

7. 여수에서 만난 여수

8. 쓰나미

9.  지구촌을 무대로

10. 새망게징게

11. 자연에의 경건으로 이루어지기를

12.  이명처럼 들리는 워낭소리

 

 

 

 


 

1

조용한 사랑의 혁명


   여성해방은 곧 남성해방이다.                                      

  

   친정아버지는 같은 년 배의 동료보다 한 세대 일찍 도시로 진출하셨다. 전쟁 중에도 직장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개성까지 올라가야 했다. 6.25의 후유증으로 언니들은 학업을 제대로 잇지 못할 형편이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나는 부득부득 공부만 하려 한다 해서 내 어머니는 '저것이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하고 가끔 말씀 하셨다. 네 자매와 막내 남동생이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남녀차별이 없이 가정에서부터 아버지의 격려를 받으며 자랐다. 4.19 학생운동과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도 아버지는 내 주위를 암행어사처럼 살피며 격려를 해주셨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외국회사에서 수년간 근무하였다. 영국이나 미국의 남성들은 일을 같이 하는데 계급과 남녀차별이 없었다. 더구나 Lady first 가 아니던가. 일을 잘하고 싶도록 하는 기본적 태도가 체질화 되어 있었다. 잘한 일에 대하여는 Wonderful과 Beautiful을 연발했다. 한국 남성들의 무표정하고 지배적인 태도에 비하여 상냥하기까지 했다. 20세기 들어 앞서 개척한 미국 여성해방운동가들의 힘이 세계로 퍼져가던 시기였다.

  나는 직장을 선택할 때 한국기관이나 기업은 피했다. 당당히 1위로 합격했던 선망의 직장이기도 했던 모 은행본점 외국부의 자리와 KIST를 서슴없이 거절하였다. 그 당시 우리 사회일반적인 직장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차나 나르고 남자들의 각종 심부름이나 감당해야하는 분위기였다. 그 때는 여성의 권리나 여성의 입장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실력을 높이기에 더 열중하였다. 당시 교사의 월급은 내 직장보다 거의 반절 수준이었다.

  60년대 초부터였던가? 한국일보에는 해외 만화인 '블론디'가 연재되었다. 영어와 한국어 번역이 함께 실렸었다. 재미가 있어 독자들의 인기가 높았다. 나는 직장동료로부터 가끔 '블론디'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블론디는 미국가정의 대표적인 귀엽고 재치가 있는 아내의 표상이었다. 나는 그렇게 귀엽고 예쁘지는 않았지만, 남성들과 대등하게 일하는 모습에서 그런 느낌이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블론디는 어디에서든 남자들을 상대하는 지혜와 위트가 매력적이어서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었다.

 

  30년 전 서울에서 전주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아직 전주는 전형적인 소도시적인 시골이었다. 가스레인지가 있어도 그것을 사용할 수도 없었으며, 입식부엌도 보편화되지 않았다. 나의 결혼생활에는 가정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기록이 배어있다. 서양문화의 혜택을 일찍 받았던 나는 비로소 '내가 왜?' '여자가 왜?' 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시아버님은 당시 변호사 개업 중이셨다. 아버님의 사랑방 한 쪽 벽에는 내가 어설프게 쳐서 보내드린 란(蘭)분의 족자가, 다른 한 쪽에는 소학(小學)의 서예작품이 걸려 있었다. 한 번은 사건을 의뢰하기 위하여 상담하러 온 여자가 있었다. “그 집에 남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오게 하시오.” 하는 아버님의 말씀에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의 말씀이 비현실적이며 비합리적인 것일 때에도 언제나 '예!' 하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전형적인 유교적 가부장제 가풍이었다. 아버님은 언제나 어려운 사람들 입장에서 일하셨고, 사회가 잘 되는 일에 적극적이셨다. 공직에 계실 때에는 청백리로서 가문의 마지막 선비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셨다. 그처럼 엄한 시아버지께서 나의 사회활동에는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셨으며 보이지 않는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직장에서는 블론디로 통하였으나 결혼생활에서는 블론디가 될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학년 동기였으나 정신적으로는 한 세대나 차이가 있었다. 매사에 정서의 아귀가 맞지 않았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아버님 흉내만 내는 듯한 태도는 둘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어 갈 뿐이었다. 아버님께는 무조건 '예!'하면 끝나는 일이었으나, 남편에게는"예!'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탁구계 호프였던 이에리사 정현숙의 콤비가 세계를 제패했던 시절, 남편과 탁구장에라도 가게 될 때면 남편은 자기가 이길 때까지 계속 하자고 졸랐다. 벽에다 공을 세게 던지면 공도 반사적으로 같은 힘으로 튀어나온다. 계속 공격해 오는 공은 가볍게 붕붕 더 높이 띄운다. 너무 높은 공을 내려치면 빗나가기 마련이다. 직사포를 쏘아오면 곡사포로 대응한다. 나는 매번 이겼고, 그는 이길 때까지 하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적당히 저줄 수도 있었는데. 게임에서 터득했던 지혜를 생활이나 부부 관계에서 왜 그때는 구현할 수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부부관계가 동지와 적이라는 양면성을 지니는 가운데서 격정적인 갈등의 병을 앓기도 했다.

  나는 중학교의 영어 교과서에 나왔던 두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첫째 이야기는 'Charity begins at home.'(봉사는 가정에서부터). 급진주의 여권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부인들이 남자의 생활을 흉내 내려다 가정의 본분마저 팽개치는 일부 계층의 사회 활동에 따르는 부작용을 꼬집는 내용이었다. 둘째 이야기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삼 형제 이야기였다. 세 형제는 언제나 식사 후 개수대 앞에서 나란히 서서 접시 닦기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나는 살면서 가끔 이 일화들을 끄집어내어 화제에 올리기도 했지만, 요즈음은 너무나 보편적인 일이 되었다. 이제는 표면적인 일보다 질적으로 삶의 질을 높여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애 대하여

 

  15년 전부터 우리가 참여해 온 행복회의 운동은 조용한 사랑의 혁명이었다. 세계의 근대화와 한국의 근대화에 앞장서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처럼 표면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대열에 서지는 않았지만, 행복운동에 참여해 온 기간의 열정은 뒤돌아보아도 참 아름다운 도전이었다. 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민주화와 여성해방운동이 또 한 편의 희생과 이면의 어두움을 낳은 것과 달리, 행복운동은 성별을 초월하며 개인과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사회와 지구 전체의 문제를 바닥에서부터 동시에 해결해 가는 일이었다. ‘자연과 인위, 즉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를 도모하여, 풍부한 물자와 건강과 친애의 정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게 가져오는 것을 취지로 한다.' 남자와 여자, 아이도 싸워서 상대를 바꾸기보다, 개개인이 자신의 내부를 먼저 바꾸어 실천함에 따라 누구와도 사이좋게 할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결과 보다 해 나가는 과정의 즐거움을 누린다. 누구도 떨어지거나 희생되어서는 성립될 수 없는 운동이기에, 全人행복운동이다. 힘든 수행이지만 재미있고 즐거우며, 신나게 할 수 있다.

 

  산란을 하는 양계장에서 우리는 일을 해보고 탐구하였다. 수탉과 암탉이 함께 살아가는 양계장을 보면 수탉 몇 마리에 암탉은 그 수가 몇 배 많다. 수탉은 키가 크고 머리에는 붉은 색의 벼슬이 기세 좋게 달려있다. 발 갈퀴는 암탉과 달리 발 뒤쪽 악간 높은 뒤꿈치에 송곳 같은 짧은 뿔이 하나 붙어있다. 머리를 들고 멀리 내다보며 어슬렁어슬렁 걷는 모양은 늠름하고 멋지기까지 하다. 마치 적병을 감시하고 자신들의 울타리를 보호하는 듯한 태도는 뚜렷한 기상을 지닌 소대장 같다. 반면에 암탉의 엉덩이는 분주한 잔걸음으로 흔들거린다. 부지런한 농가의 아낙네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상사회의 축도로서의 이 양계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이란 남자는 남자로 살고, 여자는 여자로 산다는데 있다는 것을 체득해게 되었다. 물론 능력을 발휘하는데 남녀 구분은 있을지라도 차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양성이 가장 잘 살아나서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때가 남성이 남성답고 여성이 여성다워져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여성은 여자만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보석을 지니고 있어 갈고 닦을수록 빛을 발할 수 있다. 아이를 잉태하여 낳고 수유를 하는 것은 여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행복이다. 아이를 돌보며 가정 일을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여성이 더 잘하게 되어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어울리는 잔일들이 끊임없이 많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표시 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하루만 손을 놓아도 금방 눈에 띈다. 여성의 능력개발로 인하여 역할이 다소 바뀔 수는 있으나 고유의 특성만은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뭐니 해도 나긋나긋하며, 부드럽고 상냥해야 제 맛이 아닐까?

  전통적으로 남성의 특성을 보면 사냥을 하고 집을 짓는다.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오며 집을 지켰다. 진취적이고 멀리 내다보는 능력이 있으며 미래를 계획한다. 남성은 체력적으로 강인하다. 평생을 통하여 남성다움을 단련한다. 남성이 뚜렷한 남성다움을 발휘할 때 여자는 절로 여성다워진다. 나무토막을 자르는데도 나무토막을 잡은 손과 톱을 잡은 손이 서로 호흡이 맞아야한다. 가정에서 건 사회에서 건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을 어느 쪽으로 쓰느냐에 따라 주변 환경이 파괴되기도 하고 살려지기도 한다.

 

  전인全人행복운동은 여타 다른 사회적 운동처럼 실험 없는 허구적인 구호는 아니었다. 자연에 접해서 구체적인 실행을 순환 원리에 맞도록 해보고, 그를 통하여 나를 검토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이나 사실에 직면하여 정말은 어떤가 하는 올바른 사고방식을 갖게 한다. 아무 것도 단정 짓지 않고 검토하고 근저까지 구명해나가는 자세. 정말은 어떨까? 고정된 관념을 깨는 아픔과 시원함을 겪으면서 사고방식을 전환한다.

  우리 가족은 차례로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왔다. 여하한 경우에도 화가 나지 않는 이유를 가정에서 중요한 테마로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한 인격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마음의 통로가 만들어진다. 젊고 귀여운 '블론디'가 아니라 어느 사이에 하얀 머리칼이 희끗거리는 퓨전 '블론디'로 변화되고 있었다.

 

  미국의 여성운동가 글로리아는 평생 독신으로 활약하였다. 2년 전 66세인 그녀가 61세인 기업가와 결혼했다. "진정한 사랑은 남녀가 평등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고 술회했다. "남녀가 서로 평등한 동반자 (신랑 신부가 아니라)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는 신념이 결혼함으로써 더 확고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고 했다.

  간디를 이해하기 위하여 물레 잣는 법을 배워서 사진을 찍었다는 여기자처럼 서로의 물레를 배우는 일은 요즈음 우리사회에서는 기본인 것 같다. 90년 대 이후 급격하게 여성 진출이 많아져서 여성 상위 시대를 방불케 한다. 도덕적인 면과 더불어 지적으로도 많이 성숙하였으며 사회적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그에 따른 많은 문제들도 복잡다단하게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21세기는 음의 시대라고 해서 여성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시대라고 한다. 집은 하숙집이 되어 있고 가족은 제 각기 바쁘다. 비어 가는 가정의 기능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표면적인 성숙에 따른 의식의 수준은 그에 못 미치는 것 같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호주제가 존속하며 그 불합리성을 주장하던 여성계의 노력 끝에 우리의 호주제는 폐지되었다. 구체적 실현 과정에서 여러 가지 논란을 거쳐야 할 문제가 많으리란 것은 누구나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남과 여를 이원성으로 대립하여 보는 편견은 서로를 구속할 뿐이다. 여성은 모든 남성들의 어머니며 누이며 동생이므로 결국 인간 전체의 문제이다. 이 시대야말로 가정에서부터 의식과 행동의 기초를 재검토하여 현실에 맞고 미래에도 지켜나갈 정신적 기틀을 가꾸어 갈 때가 아닐까. (2001)



 

2

잔인한 4월

-숲이 사라진다 1-


                            

  봄나물을 뜯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차례로 피는 봄꽃을 차분히 음미할 여유도 없이 바라보는 눈길도 바쁘기만 하다. 남녘의 매화 잔치며 산동 마을의 산수유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목련,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앵두꽃에 이어 벚꽃까지 한꺼번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어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아이들의 몸짓처럼 여기저기서 각가지 웃음꽃을 피워내고 있다. 꽃 잔치의 수런거림에 마음도 덩달아 술렁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만, 시차도 두지 않고 피지 않으면 안 될 조급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4월의 잎새 없는 꽃들이 물러간 뒤, 조용히 올망졸망 어여쁜 꽃잔디는 피었었다. 한 때 꽃잔디 전도사처럼 여기저기 꽃잔디를 옳겨 심었던 때가 있었다. 우리 동네 화단에도 어김없이 옮겨 심었던 꽃잔디가 많이 번졌다. 5월에 피어서 한 달 내내 피고 지고하던 꽃잔디도 일찍부터 덩달아 피고 있다. 피어나는 꽃들을 반기지 않을 이는 없으리라. 작은 꽃망울들이 탱글탱글 부풀어 모여 있는 것들이 여간 귀엽지 않다. 머리 위로 새들은 즐겁게 짹짹거리며 노닐고 검부러기와 묵은 낙엽을 걷어주는 손길도 새들의 장단에 춤추는 나비가 된다.


  화단이 좁아 지난 해 늦봄, 큰 화분에 심었던 모란에서 새 순이 돋아났다. 죽은 줄만 알고 잊고 있었는데, 너무나 기뻤다. 서둘러 잡풀을 거둬주고 새 흙을 채워주었다. 모란꽃이 피기 전에는 진정 봄을 맞지 않았다 했던가. 호미를 들고 뒤란으로 가보았다. 화분에 있었던 구절초, 원추리와 국화를 들로 옮겨주었더니 왕성하게 뿌리를 뻗고 새 순을 피워냈다. 옹달샘물이 퐁퐁 올라오는 듯한 기쁨이 인다.  들꽃 한 포기에서도 함께 살아 숨쉬는 온정이 이렇게 고귀한데.


  민들레가 피는 들길에서 노란 민들레는 냉이꽃, 제비꽃과 다른 풀꽃들과 올망졸망 모여서 지난겨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봄노래를 합창하고 있는 것일까? 따뜻한 봄날을 즐기고 있던 어느 날 노랑나비가 자기 민들레를 찾았지만 민들레는 찢겨져 있었다. 어느 손길이 그랬을까? 활짝 피어난 후 민들레 홀씨 되면 하늘을 날고 흩어져 자기 길을 찾아 나설 터인데…. 그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줄 수 없었을까. 온전한 하루의 봄날을 마음껏 누릴 수도 없었다.


  봄철 이맘 때 언제나 일어나는 산불은 임야를 태우고 숲을 앗아간다. 장수의 봉화산에서 어린이들이 어린 묘목을 심고 있었던 식목일에 다른 쪽에서는 산불이 여러 곳에서 났다. 술렁이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숲은 깨끗한 공기, 맑은 물, 휴양 공간을 제공하며 많은 동식물의 안식처가 된다. 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은 언제나 말썽의 꼬리표가 붙어 다닐까. 산불의 경우도 인재로 인하여 일어나는 예가 더 많다고 한다. 산불이 나는 광경을 보자면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아픔을 어찌할 수가 없다. 아이를 길러보고 화초 한 포기라도 길러본 사람이라면 숲이 타버리고 발가벗은 산이 다시 살아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리라.


  전주 근교 소양면 일대는 묘목 장사를 하는 집들이 많다. 벼농사보다 수익이 좋다하여 논에다 각종 묘목을 재배하는 농원이 많아졌다. 봄이면 어린 철쭉 밭에 나란히 줄을 지어 할머니들이 김을 매고 있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소양면은 이제 철쭉 마을이 되었다. 명덕리 시절 이웃집 철쭉 묘목을 심던 날, 나도 그 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우리 집 텃밭에도 한 두렁 철쭉 묘목을 심었었다. 한 뼘 정도 되는 어린 묘목이 어느 정도 커서 정원수 구실을 하기까지는 4, 5년 이상이 걸렸다. 하물며 산의 나무가 숲을 이루기까지이랴! 아이가 성년이 되는 것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나무는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아이들 키우는 일 같이 풍진을 이겨내는 세월과 돌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류사를 빛냈던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큰 강의 하류였고, 원래 숲이 울창하였으며, 물이 풍부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숲을 무분별하게 파괴해왔다. 숲은 건축물이나 배를 만들고 필요한 목재로 사용되었으며 땔감을 얻는 곳이기도 했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숲의 파괴가 확대되었으며 이로 인해 홍수와 가뭄의 피해가 날로 심화되었다.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던 숲이 그렇게 사라지므로 해서 사막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낙원을 잃어가고 있다. 고대문명이 사라진 것은 전쟁이나 화산폭발 같은 이유보다도 숲이 사라짐에 따라 농토의 생산력이 떨어져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것이 더 큰 이유라 한다. 숲은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요건이며, 이러한 숲을 잘 보호하고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가꾸지 않으면 아마 문명도 사라지고 우리의 삶도 위기를 맞을 것이다.


  겨울의 안락한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봄. 4월의 꽃들과 새 순이 자신의 껍질을 뚫고 깨어나는 순간은 숨 죽여야 하는 아슬아슬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틔우는 축복의 계절, 수 없이 고통 받는 생명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애절한 봄날의 푸르름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타이르는 듯하다.  (2003. 4월 식목일에) 전북문단 2005 제 46호



 


3

신음하는 우리의 국토

-숲이 사라진다 2-



  35년 전엔 작은 어촌이었다. 우리나라 남녘 끝 고요한 바닷가에 이 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기념하여 세운 충렬사는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충렬사가 시멘트 숲 속에 가리어져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곳으로 그 주변은 변모되어 있었다. 새 고속도로가 뚫려서 전주에서 통영까지는 4시간만 달리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4시간을 달려가는 도중의 곳곳에서는 지금도 도로 확장하는 곳이 군데군데 있었고 길가의 야산은 깎아지고 있었다.


  꽃들이 떠난 자리는 무성한 잎이 채워져서 시원한 나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신록을 예찬해야 하는 계절에 신음하는 우리 산들의 영상들을 떠올려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원시림을 자랑하는 설악산 진동계곡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을 지녔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숲은 생명을 품고 있다. 원시림이 사라지면서 희귀종이 된 까막딱다구리가 이 산에 사는 이유는 집 지을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토종벌도 나무에 집을 짓고 털두꺼비, 하늘소도 나무에 산다. 원초적 귀향 본능을 가진 생명들은 산골에 모여들기 마련이다. 내설악 주변에는 도시생활에 식상한 예술인들이 여기저기 새 둥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숲의 주인은 나무이다. 나무가 있는 곳 그곳에 산이 있다. 산은 이름 없는 생명에게도 넉넉한 품을 주고 먹고 먹히는 그들 나름의 질서가 있는 곳이며 대자연의 영역이다. 그런 산이 위기를 맞고 있다.


  굽이굽이 산이 이어진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잇는 자원이자 뼈대인 한반도의 등줄기이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땅과의 조화가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곳이란다. 봄비가 후줄근하게 내린 후 산뜻해진 초여름의 산야는 석간수를 마시는 듯 청량하기만 한데, 지금도 산자락을 자르고 있는 광경은 우리의 국토 여기저기에서 계속되고 있다. 도시 외곽을 조금만 나가다 보면 뭉텅뭉텅하게 발간 살이 잘려나간 산자락에 거대하게 서 있는 아파트 군락지를 볼 수 있다.


  백두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진 허리 부분에 자병산이 있다. 하늘에서 본 그 산봉우리는 송두리째 산자락까지 허연 맨살을 드러냈다. 뼈가 드러난 곳. 산은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산세가 아름다운 추풍령의 금산도 산 반절이 사라졌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산 뒤쪽은 평지가 되어 있다. 마치 내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럽고 아팠다. 삼척시 신기면 일대도 아예 산봉우리가 반으로 잘려나갔고 석회석 채취로 수난을 겪고 있었다. 거대한 도시를 방불케 하는 시멘트 공장을 세우고 돌을 채취하는 곳이었다. 인구증가와 세분화에 따른 개발을 앞세워 황금을 쫓아 속수무책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영광의 산업화. 도로와 도시건설, 수많은 아파트.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시멘트는 산과 맛 바꾼 셈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살을 깎아 만든 집에서 살고 있는 거와 다름없지 않은가. 우리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갇히고 만 것은 아닌지. 다음 대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 놓고 봄을 노래하고만 있을 수가 없다.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속리산 인근의 화양 계곡은 넓은 돌과 아름다운 계곡으로 유명하다. 국립공원에서 한 계곡을 넘은 화양 계곡에 15년 전 채석장이 들어섰다. 상상을 초월하는 불법행위로 계곡을 막아버린 다음 돌을 가공하는 공장 사무실을 쌓았다. 물길을 막아 생태가 파괴되고 계곡 주변 나무 풀은 모래에 덮였다. 산이 훼손되어 마을도 변했다. 마을 앞 계곡은 물고기가 살지 못하고 돌가루만 흘렀다. 마을 뒷산의 기암괴석은 사라지고 바위와 함께 있어야 할 소나무도 사라졌다. 주민들이 반대 운동을 하여 특별감사를 한 결과 불법 진입도로 허가로 중진계를 받았지만 해당 공무원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실이라 한다.

  산은 깎이면 복구가 어렵다. 시멘트가 황금으로 바뀐 뒷자리의 복구는 눈가림만으로 제쳐둔 채 지금도 여의도 27배나 되는 산이 해마다 사라지고 있단다. K랜드가 추진하는 골프장은 30만평의 산을 깎아야 한다. 추진 중인 스키장을 위해 골프장의 2배가 깎여야하는 백운산이 있다. 수령이 20년이 넘은 곳은 개발허가를 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사업주는 그것을 눈가림하고 추진하려고 한다. 눈이 많고 추운 곳에 사는 천연 보호림인 주목나무가 백두대간 고산지대에 서생 한다. 스키장이 들어서는 것은 주목이 서식하는 산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두대간 허리인 대관령은 3월에도 눈이 온다. 10만 그루 인공 숲을 32헥타르 특수조림을 한 곳이다. 대관령을 넘는 바람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다. 바람이 한 방향으로 심하게 불기 때문에 나무 가지도 한 방향으로 쏠려진다. 그런 점을 생각하여 묘목을 심을 때 바람막이를 설치하여 20여 년 만에 기적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훼손하기는 쉽지만 한 그루 나무를 키워내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를 대관령은 말해줬다. 감동의 드라마를 본 것 같았다.


  나무를 숲으로 키워내는 것은 산이다. 아이들처럼 희망인 것이다. 단 몇 시간만 달리면 통영의 아름다운 한려수도뿐 아니라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는 도로망이 설치되었다. 한 곳에 붙박이 된 삶이 행복의 조건이었던 농경사회는 사람들의 향수에 묻었다. 산업사회의 상징인 도로망 위로 정보화에 따른 레저 사회가 뒤따라오고 있다. 신노마드(新遊牧Nomad)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지 않은가. 집 떠나면 고생이 아닌 호강인 시대. 길 위에서 진정 무엇을 위한 레저이어야 할까.

  30여 년 동안 우리는 빠르고 편리함에 안주하여 산이 깎이는 아픔을 잊고 있었다. 온갖 나무들이 빽빽한 숲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도시의 빌딩 숲이 즐비해 갈수록 그만큼 울창한 숲이 사라진다. 우리 생명의 품인 산이 잘려나간다.

(2003년 봄)










4

소나무 무덤

-숲이이 사라진다 3-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진입한지 오래다. 지구촌도 비행기만 타면 하루 만에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칠레 과일을 매일 먹을 수 있고, 보르네오 목재, 이태리 대리석과 가구, 유럽의 명품, 미 대륙의 공산품 등 모든 물류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이미 중국산 식품은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질병과 해충까지 경계 없이 들고 난다. 미국의 루이지애나에서 발견되었다는 재선충이 수입 소나무와 함께 들어와서 우리 소나무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6년 전, 뉴질랜드 오크랜드 공항에서 입국절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근사한 도포를 걸친 개 한 마리가 줄곧 내 뒤를 따랐다. 영문도 모르고 나는 개를 피해 자리를 옮겼지만 그 개는 계속 내 뒤를 따라다녔다. 관리원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 등의 쌕(등가방)을 펴보라고 했다. 나는 가방 속에 들어 있었던 비상식품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뉴질랜드는 알다시피 음식물 반입은 절대 금지다. 관광버스 내에서도 음식물은 먹지 않는다. 훈련된 개 한 마리가 수많은 양떼들을 몰고 다니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환경 지킴이 역까지 해내고 있다. 오늘날 호주나 뉴질랜드의 관광객의 7,80%가 한국인이란 놀라운 관광열풍에 비하면 우리 국민의 환경에 대한 의식 수준은 아름다운 국토를 보존하는데 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이제 해충까지 세계화 시대를 맞고 있으며 동식물도 토종은 찾기가 힘들다 하지 않는가. 신토불이와 환경문제도 지구촌을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얼마 전, 부산에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는 마산 앞 바다에 들러 진주를 돌아왔다. 경남 진주 일대에서 겨울에도 짙푸르던 소나무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신경이 쓰였다. 우리 자매가 태어나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진주시 근교의 산, 소나무 군락지에는 많은 소나무 무덤이 비닐을 둘러쓰고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남아 있는 무덤 주변의 소나무들이 안전하게 유지될지 걱정이다.


  울주군 녹지진흥과는 병든 소나무를 많이 베어냈다. 50년 생 소나무가 그렇게 빨리 죽는 것은 처음이란다. 나무를 베어내면 가지와 흩어진 잎도 모아서 소각해야 한다. 50년 넘은 나이테를 지닌 소나무가 해송, 적송 등 한꺼번에 죽어나가도 속수무책이다. 산림청은 베어낸 소나무를 훈증작업을 해서 소나무 무덤을 쌓아가기 바빴다. 8개월 이상 비닐로 덮어주어야 균이 죽는다. 산이 소나무 무덤으로 변하고 있다. 피해 소나무는 목질부분의 병충해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감염된 나무는 강도가 낮아 목재로 사용하지도 못한다. 재선충(材蟬蟲)은 나무에서만 사는 기생충이다. 영양분과 수분의 이동을 막는 소나무 에이즈로 불린다. 일단 감염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피해는 울주군 정촌면, 부산, 진주, 사천, 김해, 전남 목포 유달산까지 번졌다. 국제무역항을 통하여 전 세계로 재선충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경우, 재선충 제로(0) 대 작전에 들어간 결과 1년 만에 그 성과를 보았다. 연구기관은 연구에 몰두하고, 자원봉사자들에 의하여 5년 목표로 자기 고장의 소나무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깊은 산 속이라도 피해 소나무를 베는 조직이 되어 있다. 나무를 조사하고 재선충 예방액을 투입하는 등 자원봉사자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주민들이 직접 발로 뛰며 지켜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한다. 이들은 재선충에 걸리지 않는 종자와 저항성 소나무 개발을 연구한 결과 이미 묘목이 자라고 있다 한다. 부러운 일이다. 숲의 나라답다. 우리는 재선충의 심각성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뒷동산을 산책하다 보면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무덤들을 만난다. 주인도 모르는 무덤 앞에 묵연히 앉아 그리운 님들의 모습을 더듬는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나는 한 번도 그 무덤에 가지 않았다. 오랜 병상 생활을 하셨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았었다. 방학 때와 휴가 때나 어머니를 만나러 갔기 때문에 지금도 달려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언제나 마음속에 함께 살고 계신 어머니를 무덤에 가서 찾고 싶지 않았다.

  무덤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상기시켜주는 상징이어서 무덤을 찾는 것은 오히려 내겐 단절을 되새겨주는 것 같았다. 생명은 영원하다는 관념적 희망이 아득한 뜬구름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만상이 생멸을 거듭하면서 달리하는 모습, 드러난 모양에 애착을 놓고 본다면, 제행(諸行)이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리하여 물결처럼 수놓아지는 삶의 무늬가 처연해질수록 그저 망연하기만 하다. 밀려드는 그리움의 여울에 흠뻑 젖어서도 냉철한 이성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끝없는 순환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기쁨과 희망의 근원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국토는 무덤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많아졌다. 무덤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 소나무 무덤까지 늘고 있다. 소나무들도 차라리 사라짐으로 해서 더욱 뚜렷하게 마음속에 새겨지는 소망이 되고 싶은 것인가. 소나무도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삶을 누려야 하는데……. 제대로 성장하며 그 푸르른 기개를 드높여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우리의 희망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을. 생이 무르익으면 우리의 생활 속에 되살아나야 한다. 영원히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최후의 몫도 사람에 달려 있지 않을까. 사람도 살아서 죽을 수 있다면 진짜로 산다 했다. 살았을 때 끝까지 잘 써져서 또 다른 삶으로 태어나야 할 것을. 병들어 잘 죽지도 못하고 강제로 무덤이 되어버린 소나무들이여! 참 면구스럽소이다. 우리 모두 같은 운명인 자연의 일부로서, 그대들에게 한한 일만 아닌 것을 어찌하랴! 

(2003. 6.)



 

5

노아의 방주


  빗물이 방울져 맺혀 있는 창가. 아기 손바닥 같은 빨간 앤드륨 꽃이 안개 젖은 산을 내다보고 있다. 연 4일 집중호우가 계속되고 있다. 계곡과 바다에 몰려 있는 피서객들은 하늘의 게릴라 작전에 포위되고 말았다. 도시에서 땀 뻘뻘 흘리다가 잠시 휴식을 찾아든 피서객들을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버리는 뜻은 무얼까. 올해는 호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려 나 했다. 애써 가꾸어 오던 농작물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넋 놓아야하는 농심은 어디서 위로 받아야 할까. 곳곳에서 비 피해의 수치가 올라가고 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利器)들은 자연의 호령에는 속수무책이다.


  비 오는 날이면 비안개 속의 덕수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곤 했다. 근무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꿈을 꾸는 새장 속의 새처럼. 비 오는 날 오후 세시, umbrella(우산)란 별명을 가진 청년이 생각난다. 그의 umbrella는 늘 비를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 우리들 사이에 그는 umbrella라 불리었다. 그는 지금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정신과병원의 의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혹은 지금까지도 마음의 행로, 어떤 길목에서 그의 우산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기다란 우산을 꼭 들고 있어야 하는 그는 영락없이 우산이었다.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홍수의 피해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추억의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뭇 생명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너무나 치열할 것 같다.  지구의 여러 곳에서 홍수에 잠기는 동안 적도 부근의 나라는 가뭄에 타고 있다 한다. 어떻게 저 홍수를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단 말인가. 떠내려 보낼 것은 인간의 오만인지도 모른다. 흙탕물이 노도와 같이 농경지를 삼킨다. 도시의 거리가 물에 잠긴다. 자연이 어찌 전쟁을 해야 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은 인간에게 해마다, 있는 힘과 마음과 지혜를 다하여 자연을 지켜달라고 우르릉대고 있지 않은가.

  그 옛날, 흠이 없고 완전한 사람으로 하느님이 어여삐 여겼던 노아는 하느님의 예언을 믿고 튼튼한 방주를 만들어서 대홍수에 대비했었다. 문명과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어찌 미리 대비하는 정보에는 그렇게 어두울 수가 있을까.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기 바빠서 하늘을 볼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지식인들과 기능인들이 넘쳐나건만, 노아처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현대의 문명인들은 어떤 방주를 만들어야할지 생각해 볼일이다.


   새들도 세찬 비 줄기에 놀라 꼼짝 못하나 보다. 숲 속의 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둥지를 붙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호우로 어린 새끼가 등지에서 떨어져 죽는 슬픈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 속의 산초나무에 공존 공생한다는 곤충들도 비 벼락을 맞아 서로 부둥켜안고 있으려나? 이렇게 비가 쏟아져 내릴 때는 차라리 바다 속 고기들을 부러워해야 할까?  치어들의 은신처가 되는 해조들과 해파리들은 떠내려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인지.


   빗물 소리가 저 멀리 떠내려간다. 먹구름 속을 뚫고 나오는 높은 곳의 밝은 빛 한 줄기가 안도의 숨을 고르게 한다. 그래도 우리는 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해야 할 뿐이다. 땅위의 뜨거운 기류가 올라가 찬 공기와 충돌해서 만들어지는 갑작스런 호우란다. 얼마나 탁한 신음을 토하고 또 토해야 했을까. 인간의 혼탁한 신음소리, 취하지 않으면 하루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수많은 마취제들의 잔여물들이 하늘 중간에 모였겠지. 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오염된 구름층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땅위에 사는 인간들이 지혜를 모으면 뜨거운 열을 내릴 수 있는 길이 있을 런지. 마음을 모은다면, 하늘이 비를 필요할 때마다 내려줄지 누가 아는가. 천둥번개는 하늘을 갈라야 하고 파도는 넘쳐 나서 바닷물을 뒤집어야 한다. 우리도 가끔은 세상을 뒤집어 바라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맑은 세상을 위하여.


  홍수에 떠내려간 목숨이 슬픔의 빗물이 되어 다시 내린다. 주룩 주룩 더욱 세차게 내린다. 유리창이 아픔에 겨워 깨어질 듯 금을 긋는다. 밖이 뿌옇다. 쏟아져 내리는 비 줄기를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건너편 산 속으로 앤드륨 화초도 나도 안개 속으로 스며든다.

(2002년 8월7일)


6

목숨의 교향시


 

  화급한 목소리, '차 빼요, 차 빼야 되요. 아줌마! 지하주차장에 물 찼어요.'  잠결에 받은 전화통에서 쏟아진 작달비 한 줄기였다. 303호 아줌마의 목소리란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새벽에 깊은 잠을 자느라고 사람이 찾아와서 벨을 울린 것도 몰랐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으로 덤벙덤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차바퀴는 아직 물에 다 차지 않은 상태. 강물 속을 달리듯이 흙물보라를 헤치고 나왔다. 차를 공터에 옮겨 놓고 우산을 받고 있는데 온통 비에 젖는다. 이미 다른 차들은 모두 대피해 있었다. 놀라서 미끄러질 듯 비틀대었더니 옆집 아줌마가 다친 줄 알고 걱정이다. 자동차가 아니라 힘없는 내가 자다가 그 지경이 되었다면 그대로 조용히 질식했을 것이다.  이 맥없음이라니! 6개월 전 쓰나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잠자리도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소식인데... ... . 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변화에 말문이 막힐 뿐이다.


  삼층에서 내려다보니 늪지대의 밭이 강이 되었다. 비가 그친다. 밖으로 나와서 동네 고샅을 빠져나가자니 아저씨 한 분이 온 몸이 젖어서 삽을 들고 지나신다. 민망해서 고생하신다는 인사를 공손히 하고, 태권도 학원에 다녀오는 이웃집 아이에게도 안도의 숨을 쉬며 무사히 잘 다녀오느냐는 인사를 건넨다. 마치 죽음에서 살아 나온 사람을 만나는 듯 감격 벅찬 마음이었다.

  신작로로 나오니 교통순경이 길 안내를 하고 있다. 박물관까지 십여 분 동안 시냇물을 가로지르듯 지나야 하는 곳이 두세 군데, 포크레인이 산에서 흘러내린 흙을 치우는 곳도 있다. 삼천 천이 황하 되어 다리 교각을 가득 메우고 자랑이나 하듯 넘실대는 급물살은 으르렁댄다.

  박물관 일을 마치고 시내를 들러 왔다.  KBS 앞이 보이자, 친구가 거북바위를 봤냐고 물으면서 그 바위를 가리켰다.  옛날에는 그 거북바위 밑으로 강물이 흘렀고 그곳에 나루터가 있었다. 거북바위는 전주의 들목 높은 언덕에 앉아 수로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상을 지켜본 온고을의 지킴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물줄기를 밀어내어 지금의 전주천이 되었다니……. 이렇게 물난리가 나서 야단이지만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듯 거북바위는 허울만 남았다.


  천년의 요새 전주. 삼천천 너머로 전라북도청이 이전하고 무지개다리까지 놓여서 강변 풍경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천 년 동안 이름이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온고을의 신화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에서 예외는 못되는 것 같다. 해마다 전주는 대란(大亂)이 피해간다 했더니……. 다른 고장과 비교하면 이 정도로 대란이랄 수는 없을 게다. 비 내리는 천변을 바라보며 사치스런 감상에 젖는 따위는 이제 그만 걷어치워야겠다.

  네 곳의 언더패스가 모두 물에 잠겼다. 오후까지 차가 밀리고 있다. 으르렁대던 천둥번개 속에 엉겼던 무거운 덩어리들이 다 쏟아졌을까. 산천을 강타하고 집 더미를 질타하고 논밭을 뭉개버린 벼락 물이 황하를 이루어 무사들의 춤사위처럼 칼날 세운 물살을 만들고 다리를 삼킬 듯 급하다.

  언제나 강가에 나가면 함께 호흡하고 위안을 받는 우리들. 산 그림자와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처럼 강물에 젖어 함께 노닐려면 그 노도와 같이 흐를 수밖에 없는 흙탕물까지 사랑할 줄 알아야 하리라. 이왕이면 인간사 헝클어져 있던 갈등의 뭉치들이나 그 흙탕물처럼 쏟아져 급물살에 흘려버려라! 흐르는 물살 밑으로 분명 투명한 은결이 찰랑대는 소리가 있으리라.


  잠시 천변에 앉아 황토 빛 급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방금 들었던 아름다운 선율이 물살 위로 펴져 나간다. 몰다우 강이 들린다. 프라하 시를 관통한다는 몰다우 강을 노래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교향시 중의 두 번째인 몰다우. 클래식을 처음 듣는 사람도 그 누구나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인 아름다운 강의 흐름을 형상화한 음악. 처음 잔잔하게 시작하는 조용한 악기가 한 줄기의 수원(水原)을 나타내면 클라리넷이 또 한 줄기의 물줄기를 나타내며 시작된다. 풀숲 사이로 흐르던 작은 시내 둘이 강기슭에서 서로 만나고 아름다운 물 요정들이 춤을 추다가, 한데 어울려 강은 넓어지고, 드디어 프라하 시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을 선율로 나타낸다. 전주천과 삼천의 수원을 더듬어 본다. 두 천도 여러 다리 밑을 흘러서 합수하고 다시 만경강을 이루다가 서쪽바다로 이어지겠지.


  그래도 한얼님은 역시 한얼님이시다. 밤사이 퍼붓고는 낮 동안에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숨을 돌리신다. 그 위력이 어떠냐고 묻기도 하고, 어서 열심히 힘을 합해 보라고도 하는 등. 시험하시는가, 놀리시는가. 낮 동안 날이 개이니 어느새 물살은 급히 빠져 도망쳐버린다. 해님에게 흙탕인 채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그리 급하게 흘러가다 피곤하면 어느 강기슭이나 바위틈에 숨어들어 몰아쉰 숨 내쉬기도 하고 다시 여행할 힘을 추스르기도 하겠지.

  태양이 배꼼이 눈치를 보다 나뭇잎 사이로 찬란한 빛살을 뽑아낸다. 높은 나뭇가지에 딱 붙어 있었을까, 매미도 살았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목청을 뽑아낸다. 아직 뒤쳐진 개울물도 마지막 힘을 내며 소리 내어 흐른다. 금속악기 속을 뚫고 나온 인공 음악이 아닌 이 사실적인 합주곡 속에 함께 하는 나의 숨결. 서로 숨을 주고받으며 화음을 이룬 벅찬 목숨의 교향시.


  밤이 이슥해진다. 강물이 어둠을 삼키고 있으면 도시의 불빛이 강물에 환상의 생기를 준다. 강변에서 물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물 빠진 둔치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어젯밤의 폭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안부를 잊은 채.  (2005년 8월 3일)







 

7

여수(麗水)에서 만난 여수(旅愁)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네 자매는 변산 바닷가를 향해 달린다. 피서객들이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빠져나간 뒷자리는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약간 어수선하게 보인다. 구름 사이에 걸려 있는 저녁놀이 어스름 달빛 같이 바닷물을 적시고 있다. 아직 후끈거리는 여름 막바지의 열기를 받은 바닷물은 적당히 시원하다.


  땅거미가 낙조를 물 속으로 쓸어내리고 있는 서해를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달린다. 앞이마에 지혜의 흰 머리칼이 한 가닥씩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네 자매는 해마다 여름 끝을 따라 조각 그림 맞추는 휴가 여행을 한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의 그림은 늘 짝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나와 동생의 그림은 이쪽으로 저쪽으로 여러 번 돌려 맞추기가 바빴다. 나와 동생은 언니들과 그림의 색조와 시절의 배경이 다르다. 우리는 현대의 핵가족처럼, 어렸을 때부터 쉰 세대가 될 때까지 신세대처럼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으니까.


  고창 선운사 앞이다. 밤이 이슥하여 저녁식사 시간이 넘어버렸다. 사방은 깜깜한데 풍천 장어 집 만 휘황찬란한 네온 빛을 반짝이며 저마다 ‘원조집’이라고 손짓하고 있다. 식성의 취향이 같아서 우리는 구미에 맞는 음식점을 찾는데 장단이 잘 맞는다. 여행길에서는 언제나 볼거리와 먹거리가 잘 어울려야 제맛이다. 산딸기 술 한 잔에 장어구이와 생채와 갖가지 숙채들이 저녁 잔치의 맛을 내기에 충분하다. 계곡에서 들리는 폭포수의 리듬 따라 추억의 그림 찾기는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며, 풀려나가는 테입의 소리같이 더듬거리다 스르르 여름밤의 늪에 잠겨버린다.


    여수까지 내려가 보기로 한다. 아름다운 물. 여수의 첫인상은 정리되지 않은 도시풍경 같다. 오래 전, 몇 년 만에 들렀던 부산의 거리와 비슷하다. 아직도 개발 중인 항구도시의 어수선함. 유명한 만성리 해수욕장의 이정표 따라 찾아간 해수욕장은 이미 폐허의 그늘이 짙다. 한 때 영화를 누렸던 옛 잔영 만 을씨년스럽게 우리를 쳐다본다. 물가 한 쪽에 어선이 두 척 지친 듯이 서 있다. 우리는 좀 더 먼 해안을 안내 받고 그리로 간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래바닥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다. 호수 물 같은 잔잔한 바다는 수영하기에 알맞다. 고무 날개를 타고 파란 하늘을 가르며 수면 위를 낮게 나는 물새가 되어 본다. 아! 그런데 피부가 가렵다고 이구동성이다. 이끼 낀 듯한 바다의 녹조현상은 한가로운 물새들의 꿈을 앗아가 버린다. 문득 동해바다가 생각난다. 모래가 깨끗한 강원도의 바닷가에서는 파도가 밀려나가면 살아있는 멸치 치어를 주워 먹을 수도 있었다. 수돗물로 씻지 않아도 피부가 매끈거리기도 하였다. 아쉬움을 달래보려고 찾아본 여수 해변의 다른 해수욕장들, 세 곳은 모두 비린내 물씬거리는 스산한 풍경만이 하품을 하는 듯하다. 맑은 물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해안의 오색 현란한 네온 빛에 비치는 돌산대교는 검은 밤하늘을 배경 삼고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던가. 낮의 어지러움을 삼켜버린 돌산대교의 밤 풍경이 차라리 이국의 정취를 안겨준다. 언뜻 떠오르는 추억의 그림 한 장, 뉴질랜드의 오크랜드 항구에 상념의 닻이 내려진다. 수많은 별들이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밤하늘을 날듯, 오크랜드의 한 복판, 에덴동산의 정상을 향하여 달렸다. 동산의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오크랜드 시, 항구의 밤 풍경이 돌산대교와 겹쳐 펼쳐진다. 영롱한 별들이 수놓인 남국의 밤하늘에서는 우리들의 별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오크랜드는 낮에도 바다의 표정이 살아있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항구에 정박한 선박들과 요트들이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물새들과 잘 어울리는 정갈한 그림을 연출하였다. 짙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집들은 단풍 빛 가을동화를 꾸미고 있었다. 오크랜드의 5월이었다


  향일암을 향하여 달리는 차창 밖으로, 구불구불한 해안을 끼고 있는 산모퉁이들과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아스라이 아침 안개 속에 깨어나고 있다. 보이는 풍경에 즐거운 감흥이 일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 그 물 속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여수란 도시는 그 이름의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아키타 현에는 청수(淸水)가 솟아나는 곳을 코스로 만들어 맑은 물을 이용한 관광상품을 개발한 곳도 있는데 말이다. 무분별한 어촌의 개발로 인하여 아름다운 본래 모습을 잃은 여수가 안타깝다. 5년 전에 보았던 여수의 돌산이 아니라고 동생은 애처로워하기까지 했다. “산자락의 밭 둘레에는 돌탑이 쌓여 있어 돌산다운 운치를 지니고 있었지.”하며 못내 떨쳐버려지지 않는 아쉬움을 삭이며 산 어구를 돌아 나왔다.


  여수! 아름다울 ‘려(麗)’, 물 ‘수(水)’이니 아름다운 바다여야 옳다. 여수(麗水)를 찾아 헤매다 돌아온 여수(旅愁)가 개운하지 않음을 어이하랴. (2004년 여름)






 

8

쓰나미

-새해의 태양은 찬란히 떠올랐지만-




  바닷가에서 사는 어떤 아이는 바다쪽으로 난 창을 닫아둔다. 바다에서 생업을 하며 고난을 겪어온 사람이라면 쉴 새 없이 날뛰는 파도가 두렵기도 할 것이다. 산더미 같은 해일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해변의 풍경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2004년 12월 26일, 해일로 인한 아시아 지진 대 참사. 아니, 지구 대 참사였다. 인도네시아 주변국과 섬을 비롯해서 인도, 스리랑카, 몰디브, 필리핀, 관광지로 유명한 태국의 피피섬,  푸껫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 불어닥친 재난이다. 처음에 피해자 수가 몇 천 명이나 된다고 하더니, 세계 각 국으로 피해자가 파급될 뿐 아니라 현지에서는 매일 사망자와 수재민의 숫자가 산더미 같았던 해일만큼이나 높아가고 있다.


  지구는 약 2억 년 전에는 모든 대륙이 붙어 있었다 한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5대양 6대 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해마다 3, 4cm 정도 이동하고 있다 한다. 미국의 지질학자에 의하면 고속철도의 두 배나 빠른 이번 해일의 속도로 지구 표면이 무려 1,200km나 달라졌다고 한다. 수마트라 섬이 통째로 36m나 옮겨졌다지만, 어찌 과학이나 이치로 그 까닭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 없고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없으나, 단 하나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진리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변함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언젠가 태양도, 지구도 사라지는 날이 있을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큰 변화를 실감할 수 없는 우리는 그저 흥청망청 살아도 될 것인가.

  이런 다국적 동시다발 피해는 다음에 일어날 여진과 2차 적 전염병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 더욱 걱정이라고 한다. 바티칸과 국제기구들을 비롯해서 전 세계가 구호를 해나갈 태세를 갖춘다.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스리랑카 근로자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생활용품들을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줄을 서는 모습이 안타깝다.


  2005년도 달력을 걸었다. 절에서 받아온 것인데 불경에 있는‘부모은중경’으로 구성된 것이다. 첫 장을 자세히 보니 그림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여래(如來)정례(頂禮)’ 부처님께서 여러 신들과 보살들의 합장 배례를 받는 가운데에서 한 무더기의 뼈를 보시고 오체투지로 예배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뼈는 전생에 나의 부모였느니라.” 하신다. 이건 무엇을 뜻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서로 누구에게 누구일까.

  매일 닦지 못하여 한꺼번에 방구석을 닦자니 먼지가 굴러다닌다. 먼지를 닦아내며 이 먼지와 뼈가 또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먼지에게 오체투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먼지든 뭐든 제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이다. 오랫동안 종이를 물고 있었던 스테플러 철심도 묶었던 종이를 놓아주고 제 자리로 돌아간다. 청소를 할 때마다 “구석구석 닦아 빛내라.” 는 선사의 말씀을 떠올린다. 먼지를 쓸어내니 개운하고 내 기분부터 좋아진다. 이 기분 좋음은 활동의 윤활유가 되어 정신을 맑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구석구석 닦아 빛내면 사람의 마음도 사물을 담고 있는 환경도, 모든 것이 제 자리에서 제 개성과 역할이 드러나서 다양성 안에 조화를 이룰 것일텐데……. 어두운 마음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


  뼈에 오체투지하는 부처님 그림을 보고 문득 원각경의 구절이 떠올라 다시 펴들고 읽어본다. 대장경 중 ‘원각경보안보살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보안보살이 여러 보살과 말세 중생들을 위하여 수행할 차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선남자여, 새로 공부하는 보살과 말세 중생이 여래의 청정한 원각심을 구하려면, 생각을 바르게 하여 모든 환을 멀리 여의어야 할 것이니라. 고요한 방에 잠자코 앉아 항상 이런 생각을 하라. 지금 이 몸뚱이는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된 것이다. 터럭, 이, 손톱, 발톱, 살갗, 근육, 뼈, 골수, 때, 빛깔들은 다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콧물, 침, 고름, 피, 진액, 거품, 담, 눈물, 정기, 대소변은 다 물로 돌아갈 것이며, 더운 기운은 불로 돌아갈 것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대가 뿔뿔이 흩어지면 이제 이 허망한 몸뚱이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또 법구경에는 "육신은 물질이나 오래지 않아 모두 흙으로 돌아가리니 몸이 허물어지고 정신이 한 번 떠나면 해골만이 땅 위에 뒹굴 것이다."

   백년, 이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무엇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저렇게 자연의 위력 앞에 소중한 생명들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무참하고 허망하게 나뒹굴게 되다니!  과학의 힘으로 미리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던 일이다. 한 두 시간 전에 알아차릴 수 있는방법도 있었다는데 말이다. 하느님은 이 일로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것일까. 인류 전체가 마음을 모아 지구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노력해 보라고 새해의 숙제를 내주는 것 같다. 어느 철학자처럼 지구가 내일 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마음만 있으면 될지 모르겠다.

  결코 심심한 지구가 아닐 텐데,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지구의 몸부림일까. 자연의 위력이 두렵다. 나라 안의 국회만 보아도 그렇고 지구에 몸 붙이고 있는 나도 그렇다. 너나 나나 모두 한 통속에 몸을 담고 있어도 정신이 각각이니 어찌한단 말인가. 아우성치며 죽어 가는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기에도 무력한 심정이다.

  그러하니 법구경의 말씀이라도 마음에 새겨본다.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웃으랴! 목숨은 언제나 불타고 있나니, 캄캄한 어둠에 둘러싸여도 등불을 찾을 줄 모르는구나.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뜻을 알지 못하면 무슨 소용 있으랴! 단 한 마디의 법을 들어도 그대로 행하면 깨달음 얻으리.”

이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 없고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없으나, 단 하나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진리이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변함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언젠가 태양도, 지구도 사라지는 날이 있을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큰 변화를 실감할 수 없는 우리는 그저 흥청망청 살아도 될 것인가. (2005년 1월1일)

 













9

새망게징게


                           


  정말 지도가 바뀌는구나!  지난 2006년 4월 21일,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는 날, 축제 팡파레를 울리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었다. 지금 그 뉴스의 현장에 와 있다. 변산면에서 가력도, 신시도, 야미도, 비응도 등 고군산도를 이어 군산항까지 세계 최장의 방조제 33km. 현대에 모세의 기적을 맛보다니!  바다 위를 달려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새만금 방조제는 17년 동안 전라북도의 키워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랜 세월 개발성장에 밀려 있던 전라북도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하여 '전북의 성장 엔진'이 될 새만금에 생명을 걸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방조제 사업을 이끌어내었다. '동북아의 허브', '새만금 동북아의 두바이 인프라 구축' 등 이런 구호가 비로소 내게 들려왔다. 새만금 전시관에서 구체적인 새만금공사추진상황을 들으면서 뉘우쳐졌다. 직접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나도 방관자처럼 관심 없이 귀 밖으로 들어왔구나. 그동안 몇 번 이 바다에 오긴 했지만 풍경만 감상하며 스쳤구나 싶기도 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이었던가. 갯벌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환경론자 쪽이었나. 개발 쪽이었는가. 아니면 양다리를 걸치는 기회주의자 편이었던가. 아무 쪽도….


  전주에서 김제를 지나 부안을 거처 변산반도까지. 이 땅을 밟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렸을 때 부산 앞바다를 보고 자랐으나 벼 물결 끝의 지평선은 몰랐다. 김제의 가을 들판은 코스모스 길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노란 바다가 되곤 한다. 처음 벽골제의 둑에 올랐을 때, 망망한 누런 벌판이 고대에 저수지였다는 생각으로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었다. 그 옛날 벽골제의 역사(役事)가 남긴 전설들이 지평선을 삼키는 노을에 붉게 붉게 출렁여 또한 가슴 뭉클했었다.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섬진강댐 아래 섬진강은 늘 목이 탄다 /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 떠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댐으로 섬진강이 마른 것을 이렇게 노래했다.  섬진강은 3개 도의 지방 마을에 60여개의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고 임실 옥정호(섬진강 댐)로 모인다. 섬진강에서 빠져나간 물이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의 젖줄을 이루는 것이다.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조일전쟁(임란) 때문에 생긴 구호지만 '징게망게'* 평야로 해서도 타당한 구호였다. 그  만경 광활 땅과 김제 평야보다 더 큰 땅이 된다 해서 새만금이다.  벽골제가 축조되어 풍요를 누렸던 농경사회가 1600년 세월의 강을 흐르다가 마침내 섬진강을 마르게 하고, 오늘날은 이 시대 문명에 걸맞은 초현대식 벽골제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인가.


  공사 규모나 시설에 해당하는 숫자는 머리가 아팠고, 바다 밑에서부터 돌과 흙을 쌓아 물을 막는 공사를 볼 때 어지러웠다. 그리고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막상 가력도 갑문에 올라서 상상할 수 없는 무게의 배수갑문이 바닷물을 막고 있는 것을 보자니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에 낭만이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사정이 허락지 않아 가력

도에서 우리는 되돌아왔다.


  불교의 관음성지는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도량으로 대개 바닷가에 있다. 변산반도에  얽혀 있는 관음연기설화는 불교가 백제에 전래된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음상을 실은 돌배(石舟)가 바닷가에 닿았는데 내소사의 창건주인 혜구두타가 내변산 실상사로 인도했단다. 변산반도의 돌출된 부안 격포 죽막동에는 중국의 보타락가산처럼 '수성당'이란 당집이바다를 향해 있어 우리의 관세음보살인 계양할머니가 그 바다의 안전을 빌고 있었다. 수성당 앞 깎아지른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물살이 거칠다. 계양할머니의 일곱 딸들을 주변의 각 섬에 배치하여 바닷길을 수호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수성당' 옆에는 또한 고대의 제사 유적지가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죽막동 제사 유적지의 유물들은 고대 해양왕국이었던 백제의 전성기의 흔적을 잘 알려 주고 있다.


  변산반도의 바닷길은 격포와 위도 사이에 열려 있다. 격포와 위도 사이에 임수도라는 무인도가 있으며 임수도와 촛대바위 사이에 위치하는 바다를 '인당수'라고 부른다. 위도 사람들은 그곳을 심청이가 빠진 인당수로 믿고 있다고도 한다. 그 부근 해역은 유난히 수심이 깊어 바닷물이 빙빙 돈다고 한다. 실지로 1992년 위도를 떠난 배가 침몰하여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었던 사고가 있었다. 고대로부터 그 바닷길로 중국의 남경 상인들이 교역을 했다. 변산반도 앞 바닷길은 한중(韓中) 해상교류상에서 매우 중요한 항로지점이었던 것이다. 중국 청자를 실은 선박이 침몰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송화섭씨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 위도 해안도로를 조성하다가 바다 속에서 인양된 3구의 대리석 석인상이 인양되었다. 그 돌은 부안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중국 상인들이 바다에 인신공희 방식으로 대리석 인형상을 던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위도에 들렀고, 선유도에 들러서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위도와 선유도는 고려시대부터 해양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고, 군사적으로도 대단한 요충지였다. 백제 때 군산은 마서량(馬西良)이었고, 고려 공민왕 때는 금강 하구에 포구를 설치하여 개성으로 가는 배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진포(鎭浦)라 불렀다. 당연히 강진에서 구운 도자기들을 개성까지 운반할 때도 이 바닷길을 지났다.

이제 새만금에 신항로 개설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저 고대의 해상교역이 새로운 형태로 이루어지리라. 정말 동북아의 허브로서의 제 역할이 새롭게 그려진다. 청사진대로 잘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그 방조제를 참관하러 올 때는 새만금 새 희망으로 오고 싶다.


  박노해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외쳤지만,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곳곳에서 우리는‘사람만이 문제’임을 절감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길 좋아진다고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섬진강의 물만 빼앗아 간 것이 아니었다. 도로공사로 샘이 없어지고, 마을의 장승 할머니가 없어지니 장승 할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김미숙은 갯벌을 '바다의 눈'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그 바다는 장님이 되어 바다를 지킬 수 없을까. 망해사 앞 바다에 내려앉는 노을 사랑도 눈이 멀게 될까. 심포가 고향인 사람은 망해사(望海寺)가 더 이상 망해사가 되지 못할 것이 안타깝다.


  기러기는 V자로 모여서 날아간다. 하늘에 무늬를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은 우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모이면 날 수 있는 힘의 70퍼센트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새떼처럼 대형 버스를 빌어 타고 바다가로 육지로 돌아 여기 신성리 갈대밭까지 올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은 겨울이었는데, 그 겨울을 뚫고 나오니 세밑인데도 봄 강가에 닿은 것처럼 햇살마저 포근하다. 금강 하구, 강 여기 저기 까맣게 가창오리들이 그림처럼 머물고 있다. 마른 갈대 끝에 앉은 새처럼 달려있는 갈꽃들이 강 가운데 오리 떼들처럼 보인다. 철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져서 강가로 가볍게 달려가 본다.

금강하구둑을 지나자니 새만금 방조제수문의 육중함이 아직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그 갯벌의 터전을 잃어 가는 갈매기들과 뭇 생명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어딘가에서 저

철새들처럼 다냥한 햇살을 즐기고 있으면 좋으련만.


  꿈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의 꿈이 합쳐지면 하느님도 감읍하시는가. 자연에 인위를 가하여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우면 하느님도 탄복하실 지도 모른다. 17년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만금이다. 환경을 걱정하여 날 새워 반대했던 삼보일배의 비원과 갯벌에 의지하여 살았던 무수한 생명들의 한숨도, 없어져 가는 고향 풍광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시인들의 꿈이 모두 보상받을 만큼 새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꿈은 생성과 소멸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 먼 훗날 또1600여 년 후의 새만금의 전설을 위하여 오늘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야겠지.힘차게 최선을 다하여.  '눈물의 강'과 ‘비탄의 바다’가 새 희망의 강과 바다가 되기를….  (2008년 1월) 2008년 수필과 비평 3,4호


* 징게망게 는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김제·만경 평야를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고

‘아리랑’에서 작가 조정래는 말했다.


 
















10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
(Natioal Trust) 
 

 

"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뛰노누나
나 어릴 때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에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 그러지 못한다면
이제라도 내 목숨 거두어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하루 하루가
자연에의 경건으로 이루어지기를."

 

   연단에 오른 그분은 연설의 서두로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詩) '무지개'의 전문을 멋지게 낭송했다. 그날 전주역사박물관에서 받은 강의는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성화 방안'의 한 과목으로 영국의 'National Trust 운동의 현장'이었다. 강의를 하신 선생님은 예수병원의 홍보실장이셨다. 그는 워즈워드의 이 시 한 편에서 느낀 감동으로 영국 여행을 감행하였고 그로부터 유럽 여행의 전문가가 될 정도로 여러 차례 유럽을 찾게 되었다. 워즈워드가 어렸을 때부터 늙어서까지 동심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곳이 어떤 자연환경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호기심이 동경으로 바뀌어 결국 워즈워드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었다.

  가슴 두근거리며 공부했던 워즈워드의 대표적이 시 '수선화'와 '초원의 빛' 등을 멋모르고 외웠던 때를 떠올리며 그 강의를 재미있게 들었다. 그 시간은 오히려 내게는 문학 강좌처럼 들렸고, 문학기행문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일찍이 문학 공부를 그렇게 생생하게 현장감을 느끼도록 들을 수 있었다면 나도 지금쯤 워즈워드 못지 않은 시인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을 정도로 열정적인 강의였다.

  N.T.의 정식 명칭은 "The National Trust for Places of Historic Interest or National Beauty"인데, 국민적 신뢰를 바탕으로 역사적 관심 지와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는 비영리 민간인 단체이다. 3인으로 시작된 운동의 회원은 현재 2003년 말, 3백만 명에 이른다. 워즈워드는 이 운동 단체가 창설되기45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이 내려져 와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워즈워드는 귀족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하층 계급의 사람들처럼 호수 지역 곳곳을 걸어 다니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고 영국인들에게 그 정신을 심어주었다. 당시 사회상으로는 어떤 곳으로 이동할 때 귀족들은 마차를 타고 다녔다. 10세기 중반 호수지역을 관통하는 철도 공사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그는 발 벗고 반대에 나섰다. 존경받는 한 시인의 반대에 부딪혀 공사 계획은 철회되었다. 워즈워드 사후에 또 다시 철도 계획이 세워졌으나 이때 호수 지역에 요양 차 와 있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이며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의 극렬한 반대로 인하여 철도 계획은 다시 무산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워즈워드로부터 시작된 자연보호 정신이 이어짐으로 해서 호수 지역이 지금껏 지켜졌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1895년 NT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강의를 하신 김 선생님은 NT 운동 110년의 역사와 운동에 얽힌 에피소드와 관련 인물에 대한 싱싱한 이야기를 영상자료와 함께 재미있게 알려주었다. 그는 NT 회원에 가입하여 영국에 가게 되면 NT 마크인 떡갈나뭇잎이 붙여진 문화재는 무료 통과하는 기분을 뿌듯하게 맛본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문화유산에도 관심이 높아져서 주말마다 조사와 보존에 관한 일을 연구하신다. 아마도 그는 한국의 NT 운동의 창시자가 될 것이다.

  호수 지역으로 여름휴가 때마다 부모님을 따라다닌 것이 계기가 되어 호수 지역을 보존하는 데 주역이 된 사람은 여류 화가이자 동화 작가인 베아트릭스 포터(1866-1943)였다. NT는 영국 전역에 확산되어 모아진 기부금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축물과 호수, 강, 자연 등을 매입하거나 기증 받아 보존해 나간다. 이에 따라 워즈워드의 생가, 토마스 하디 생가와 같은 단일 건축물에서부터 왕족들의 성, 수도원과 같은 문화유산, 그리고 하천, 넓은 들판 등을 관리 하에 두게 되었다. 심지어는 어떤 마을 전체가 'NT 마을'로 지칭되고 있으며 수 Km에 달하는 하향 절벽으로 된 해안도 이 단체의 소유물이다. 영국의 대부분의 해안선이 이 운동의 영향과 정부의 도움으로 보존되었다.

  이날 이후 난 지난날 다하지 못했던 워즈워드를 다시 읽고 시집을 구입하는 등 한 동안 '무지개'와 '수선화'를 다시 읊어보며 학창 시절의 추억에 빠지곤 했다. 나 또한 자연에의 경건으로 가슴 뛰지 않는다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생의 기쁨을 맛본다.

  우리의 자연운동은 아직도 원시적인 것 같다. 영국은 한 시인의 반대로 철도 계획이 무산되었다. 지금도 워즈워드 생가로 들어가는 길은 2차선의 고색창연한 시골길이라고 한다. 관광자원만 된다면 도로를 넓히고 주차장을 넓히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다. 대부분 2차선으로 시골길 그대로가 보존된 곳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좁은 땅에 평상시 빈도로가 너무 많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랜만에 가보면 도로가 좋아져서 나 같은 힘없는 사람이 다니기에는 편리하지만 길게 볼 때 자연을 너무 변형시키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도 없지 않다. 우리의 지율스님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올바른 판단인지 잘 모르지만, 한 사람이 100여  일 동안 단식 농성기도로 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천성산을 살리는 일에 목숨을 내놓았다. 어떤 면에서는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중계 역할을 하여서 일단은 좋은 합의를 보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나도 지율스님의 화면을 보니 눈물이 나왔다. 그날 눈이 많이 내려서 남원에서 해야 하는 차(茶)강의를 쉴까 하다가, 뭔가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의 하루 하루가 자연에의 경건으로 이루어지기를….            (2005).

 


 







11

이명(耳鳴)처럼 들리는 워낭소리



 

  커다란 민들레 한 송이가 소의 무덤에서 노랗게 반짝였다. 할아버지가 손수 뜯어 먹인 민들레가 환생하였던가. 하늘마을에도 다시 진달래와 개나리는 피었을 것이다. 독립영화 다큐 '워낭소리'의 주인공인 '소'는 죽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안녕하신 지. 영화로 인하여 스타가 되셨으니 후일담도 궁금하다.

경북 봉화면 하늘마을의 최원균 할아버지 집. 2006년 12월 어느 날, 늙은 소는 주저 앉아버렸다. "아무리 해도 안 일어나, 아무리 해도 안돼, 에이 씨!" 할아버지의  짜증 섞인 한탄. 늙은 소의 수명이 다 됐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멍에를 풀고 워낭도 풀어놓는다. 눈망울을 한 번 크게 뜬 채 소는 머리를 떨구어버린다. "고생하고 애먹었다! 좋은 데 가거래이--" 할아버지가 말하자. 할머니도 한 마디, "우리 가거든 가지 좀 더 살지" 애석한 심정을 토로한다. 소를 묻어주고 두 노인이 무덤 양쪽에 오도카니 앉아 묵상에 잠긴 모습이 애틋했다. 영화 '워낭소리'의 하이라이트이자 크라이막스라고나 할까.


  새해 벽두부터 '워낭소리'는 유난히도 딸랑거렸다. 올해가 기축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워낭 달린 소가 밭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축년의 고고 소리는 마침내 '워낭소리'가 영화의 관객을 2백만 이상을 끌어들임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4월이 되자, 이제 좀 잠잠해졌구나 싶었다. 웬걸, 조용한 가운데 계속 들려오는 워낭은 내 몸 어딘 가로 전이된 것 같았다. 그 영화를 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서 내용을 다 안 듯했다. 워낭소리가 한참 시끄러울 때 동료들과 같이 보게 되었다.

  기축년을 장식하는 '소' 관련자료 전시회가 전주역사박물관에서도 전시되고 있다.  한 해의 서두를 여는 덕담으로는 반드시 '우덕송'을 이야기했다. 소에 대한 추억담도 많았다. '워낭소리' 이후 인터넷에 감상문도, 동영상도, 이미지들도 열렬했다.

  소에 대한 이야기라면 내 아들과 큰언니가 소띠란 것 외에 개인적인 추억은 없다. 큰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렸을 때 고향마을에 갔을 때 소를 본 적이 있느냐 고 말이다. 큰집에 가면 아래채에 손님방과 마구간이 있었고 여물통이 있었다. 그리고 요즘 트랙터를 빌려 쓰는 것처럼 소가 없는 집에는 빌려주기도 했다. 철마다 아버지의 고향에 따라 다녔던 언니의 말이다.


  소에 대한 사자성어로 '우보천리(牛步千里), 기우귀가(騎牛歸家), 석전경우(石田耕牛) 등이 소의 미덕을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그 중에서 내게 귀감이 된 말은 단연 기우귀가(騎牛歸家)여서 새삼 할 말이 많아진다. 오래 전에 천주교 영성단체 모임에서 열린 세미나가 부산에서 있었다. 하루 휴식으로 범어사로 나들이를 갔다. 한 전각의 외벽에서 의미심장한 벽화를 보았다. 그것이 불가에서 깨달음의 여정을 소를 찾는 과정으로 표현한 '심우도(尋牛圖)' 혹은 '십우도(十牛圖)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본성을 찾아 나서는 심우(尋牛)이다. 견적(見跡), 견우(見牛), 득우(得牛), 목우(牧牛)의 과정을 거쳐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기우귀가이다. 수행에 따라서 자신의 마음자리가 그 과정 중 어느 곳인 지도 알 수 있다. 왜 소를 마음에 비유했을까. 예부터 소는 길들이면 사람과 가장 친한 동물이어서 일까. 소를 우상 시 했던 고대국가들이 많았다. 특히 인도에서는 지금도 소를 숭배하며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활보한다.  암소는 젖을 주고 수소는 농사를 돕는다. 자이나교 사원의 소를 타고 있는 찬란한 여신상(女神象)은 소의 신神적인 자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드디어 나도 45세에 처음 호미를 들고 묵정밭을 갈기 시작했다. 신귀거래사를 읊으며 내 마음의 소를 길들였다. 어느 농부가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숲에서 앉아 명상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답답했다. '불타여, 어찌하여 이 바쁜 농사철에 불타의 사람들은 앉아 있기만 합니까" 하자 석가는 "그들은 더 급하고 중요한 마음 밭을 갈고 있다오" 하고 대답했다. 현대는 수행 방법도 너무도 많아져서 닦여진 길 위에 또 길이 많아 길을 잃을 지경이라고 한다. 아무튼 나는 할 수 있는 한 밭을 갈아먹기도 하며 한껏 신나고 즐거운 삶의 의미를 캤다. 그것은 동시에 마음 밭도 가는 일이었다. 묵정밭의 잔돌이 없어질 무렵, 나도 힘이 없어졌다. 이제는 밭을 만들어줄 사람도 없고. 묵정밭을 갈아본 실력으로 수필 밭을 갈아서 묘목을 심고 있는 셈이다. 나를 글밭으로 이끄는 것이 이제 보니 수필 밭의 워낭소리였다. 내 수필 밭 주변도 '워낭소리'의 할아버지 집 주위처럼 너저분하고 정갈하지 못하다. 여러 가지 농기구들까지 즐비하다. 워낭은 수필이 꿈틀거리는 내 머리 속에서 달랑대는 것 같다. 워낭은 컴퓨터에 달린 것 같기도 하고 텔레비전에서 혹은 책에서 나기도 한다. 길가다가도 밥먹다가도 들리는 소리, 그것이 내게는 워낭소리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하루도 빠짐없이 소와 함께 밭으로 가야한다. 부모님의 깊게 팬 주름과 병주머니가 된 몸과 소의 일생을 대가로 도시에서 출세한 자식들은 소를 팔기를 권했다. 하지만 자식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할아버지는 소가 살렸고 할아버지는 일생이 15년 정도인 소를 40년 살도록 했으며 할머니 또한 팔자타령하면서도 그들이 있었기에 오래 살 수 있었다. 수필 밭을 가는 나도 그렇다. 나도 기어 다니며 힘들게 밭으로 간다. 살아있는 한 꿈적거려야 한다.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살아있는 한 죽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들도 힘들었다. 자식들이 다시 그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것은 그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명처럼 받아들였을 뿐. 고단한 삶이었다. 인생은 고해苦海를 건너는 일이라고 했지만, 고苦이기에 낙樂으로 전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심우도가 말하는것이 그것이다. 고를 낙으로 만드는 일. 수필 밭에서 일하는 것도 참으로 힘드는 여정이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 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겨 하는 자만 못하다 하지 않았는가. 육체의 힘이 아직 있다면 흙 밭으로 가고 싶다.  (2009년 4월 행촌수필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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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을 무대로



  가을비에 씻겨진 하늘이 눈부시다. 쌀쌀한 바람을 맞고 있는 감나무는 앙상하게 굴곡진 각선미를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다. 잎새를 떨군 감나무 가지의 곡선이 매력적이다.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농익은 열매가 붉은 물감을 찍어 놓은 듯 아름답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 감나무에 완숙한 붉은 열매가 달려있어 깊어 가는 가을이 허전하지만은 않다.


  육지 속의 섬이라던 완주군 동상면 깊은 오지의 산 중턱에 전주 한농예술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은 이 학교 교사준공식이 있는 날이다. 내 사위와 나는 한농(한국농업복구회)의 우대회원이므로 이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몇 년 전에 한농예술학교가 TV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한국에도 지구회복 운동을 하고있는 단체가 여럿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낙원촌 운동이 세계로 뻗쳐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어, 40대 때 인간성회복과 교육에 대한 사고(思考)의 일대 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를 계기로 아이들의 교육과 환경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후 거창한 운동을 한다기보다 회원이 되어 마음을 함께 하는 정도로 참여해오고 있다. 내 가족과 자자손손까지 직결된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기에.


  피폐해지는 농촌을 복구하는 일이 바로 지구환경회복이고 그것이 곧 인간회복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있는 교육기관이 바로 한농이다. 돌 나라 한농복구회 사람들의 목적은 병든 땅을 회복시키며, 병든 몸을 회복시키고, 병든 마음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식량증대를 위해 사용한 각종 농약이나 화학비료 등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고, 천연농법을 꾸준히 개발해서 전 세계적으로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염된 음식물이나 공기 그리고 각종 공해로 가득한 도시생활로 현대인 대부분이 질병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염된 공해 뿐 아니라 농약공해 농산물을 먹고 병이 나든 말든 나만 돈 벌어서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한농의 교육은 이러한 이기심을 없애고자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문제아도 없고, 왕따도 없고, 집단폭력도 없으며, 무공해 유기농법을 통하여 농사의 즐거움과 인간의 도리를 함께 배우고 있는 아이들이다. 한 학생이 세 가지 이상의 악기연주와 한국의 전통예술도 함께 익히고 있다. 돌 나라 문화예술단은 KBS열린음악회에서 초청 연주를 할 정도이다.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아이들도 참여하고 있다. 지구는 하나, 인류는 한가족으로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한가족이란 것을 어렸을 때부터 땅을 통하여 배우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기특했다. 절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사회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식위주의 교육은 많은 사회적 병폐를 만들어 왔다. 인성위주교육과 지구환경의 문제에 대한 말은 많으나 실천하는 이가 미미한 현실에서 근본적인 인간교육이 실현되는 사실을 한농의 현장에서 보게된다.


  이미 한농의 교육을 이수한 청년들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22살 원신이와 그의 친구들은 천연농사법을 전 세계로 전하는 역군이 되어 중앙 아시아로 나가 있었다. 농사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숙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하는 생명산업이다. 원신이는 운전과 전기와 기계조작에 능숙하였다. 2,600여 년 전 동서문명의 교류를 위해 열렸던 실크로드처럼 지구를 살리기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구촌 60억 지구가족의 식량위기를 대비하고 있는 게 돌 나라 사람들이었다. 북한을 포함하여 지구촌에서 8억이나 되는 식구들이 절대 기아선상에서 굶고 있다 한다. 이러한 식량문제, 즉 늘어나는 인구, 줄어드는 농토, 공해로 생산량이 떨어지고 있는 문제 등을 풀기 위해 근원에서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인구는 1년에 9천만 명씩 늘어나고 있는 데 농토는 오히려 1년에 한국 농토의 3배씩이나 사막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에서, 한농복구회는 우리 농토뿐 아니라 지구촌을 아우르는 희망이 되고 있어 가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한농의 아이들을 보자니 15년 전에 아이들과 함께 교류했던 낙원촌의 청년들이 떠오른다. "We are dancing on the earth."라는 말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등에 "Come and joinus!"가 쓰여진 셔츠를 입고 폴카를 춤추듯 밭이랑을 누비던 그들의 모습에 얼마나 벅찬 감동을 받았던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마음 놓고 놀 환경도 없고 먹거리도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을 걱정한다. 옛날, 자신의 손을 잡고 낙원촌을 찾아다녔던 이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 같은 내 딸은 어느새 환경을 생각하는 어머니가 되고 있었다.


  학생들의 예술 한 마당도 멋진 한판이었다. 여학생들의 부채춤 솜씨는 하늘을 나는 선녀들 같았다. 사물놀이를 신나게 하는 학생들의 모자 끝 꼬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넋 잃고 쳐다보던 손주 녀석은 내 품안에서 스르르 잠이 들고 만다. 부드러운 살결과 평화스런 얼굴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관현악단의 연주가 산을 넘고 하늘을 찌르건만 아기는 쌕쌕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힘찬 자장가 속에서.

 

  이날 준공식에 온 손님들을 위한 식사는 자연 식탁이었다. 완전 자급자족의 상차림이었다. 방금 밭에서 뽑아온 야채들은 싱그러운 옛날 고향의 맛에 한층 넓은 가족의 맛을 더한 것처럼 풍성했다.

  학생들의 활기찬 팡파레와 예절바른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가에는 하우스 안팎에서, 고지의 찬바람에도 채소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단풍든 산들은 산수화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였다. 깊은 산골짜기를 몇 굽이 돌아오니 저수지로 내려가는 계곡의 물이 호수를 이루어 노르웨이의 피오르드를 연상하게 하였다. 바람이 잔잔한 저수지의 수면에 내려앉은 산 그림자에 희망과 안도의 물결이 선들거렸다. 아이들의 꿈을 실은 팡파레는 내 귓전을 맴돌고 퍼져나가 우리나라, 아니 전 지구촌을 흔들어 깨우리라.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