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금산산 고목의 벚꽃

차보살 다림화 2010. 4. 15. 01:45


4월이 되어도  봄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꽃샘, 잎샘이 이리도 많은가. 4월에 눈비가 내리다니!

나무 꽃들이 거의 다 피어가고 있는데...

벚꽃이 절정인 때, 벚꽃무리인가 눈꽃인가

 

 

 

'찬란한 슬픔의 봄'

                                  

 

조윤수


  유난하게 요동치는 봄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봄꽃들은 앞다투며 피어나고 있다. 황사 섞인 흐린 바람에 흔들리면서 봄비에 젖으면서도…. 4월 6일, 남녘의 벚꽃 축제로 유명한 진해시(鎭海市)는 꽃구름 속에 파묻혀 있었다. 우리나라 해군에 초상이 났으니 군항제는 생략이었다. 남녘의 진달래 개나리 꽃불이 번져서 올라오더니 온 동네가 꽃불이다.
  지난 수요일(14일), 박물관의 뒷동산에는 연둣빛 자욱히 어린 하얀 자두꽃이 뭉게구름 같았고, 앞뜰의 매화 진자리를 대신해서 붉은 동백꽃이 장병들의 생목숨처럼 떨어져서 땅을 흥건히 적셨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날이 흐려서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바로 돌아오려다 금산사 이정표를 보자 그냥 그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금산사 벚꽃이 한창일 것 같았다. 중인리에서 산길로 금산사까지 벚꽃 터널이었다. 이내 눈발이 차창을 때리며 시야가 흐려져서 눈꽃인지 벚꽃인지 뒤범벅이었다. 금산사의 종무소에 도착하니 눈발이 함박눈이 되어서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4월에 눈이 내리다니! 지구마을이 혼란스럽다. 서해바다에서 천안함이 침몰되어 죽어간 장병들의 주검들이 더욱 비통해지는 날이었다. 풀란드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을 태운 비행기 추락 사건으로 많은 생명이 몰살당하였으니 이 꽃불 타는 봄날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 역사 속의 잔인한 4월까지 기억해야 하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폴란드도 온 국민이 애도의 물결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지금쯤 중국에서는 햇차 잎을 따는 손길이 봄볕에 사분사분 나비처럼 즐거운 춤사위 같을 텐데, 칭하이 위수현에 지진이 일어나서 온 마을이 또 산산조각이 났다. 이어서 아이슬랜드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유럽의 항공사들이 난리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피기도 전에 떨어지는 꽃봉오리처럼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떨어졌다. 하얗게 질려버린 이 땅의 봄.  제 목숨대로 한껏 피어난 후에라도 꽃이 지는 날은 서러운데! 채 피어나지도 못해보고 떨어져야만 하는 운명의 봄이라면 어찌 봄의 찬가를 부를 수 있으리. 꽃피는 4월의 찬란함이 잔인스럽게도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피우고 또 핀다. 
 

 

 

 

눈꽃을 헤치면서 눈부시게 벚나무를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길지 않을 영화로움을 마음에라도 담아보는 것이다. 눈이 많이 쏟아져서 희부연 벚꽃무리가 구름 꽃되어 처연하게 하늘에 파묻힌다. 금산사에는 고목이 된 벚나무가 많다. 몸통의 한 쪽이 부서지면서도 꽃을 피워 우리 마음 속에 희망을 심어준다. 벚나무는 생명이 길어도 백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단다. 한 시에 그토록 수많은 꽃을 피워내는 벚꽃은 꽃철마다 뿌리에서부터 젖 먹던 힘까지 한꺼번에 소진하는 지도 모른다. 늙은 허리춤에서도 꽃잎이 툭 불거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한 시간 가량 차를 세워두었는데 눈이 차창을 덮도록 쌓였다. 기슭마다 핀 진달래 개나리에도 눈이 쌓이고. 요사체 담장 옆의 산당화는 설중매처럼 눈송이가 빨간 꽃잎에  나비처럼 소복이 앉았다.
  
 

 

 

 

 

 

 

 

오월의 모란을 노래한 민족의 시인이었던 김영랑( 1902-1950) 시인의 봄은 얼마나 아팠을까.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린 민족혼, 자아의 상실감을 되찾으려 했던 안타까움에 '찬란한 슬픔의 봄'이란 시어(詩語)를 탄생시켰다. 암울한 민족의 환경 속에서는 봄이 왔지만 민족의 봄이 아니었다. 처절하도록 아름다웠던 슬픔을 절감한다. 금산사 담벼락 옆의 모란은 오늘은 꿈도 꾸지 못한다. 매화가 겨울과 봄 사이에서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고 이른 봄 고목의 잔가지에서 피어나는 인고의 상징이어서 희망이라면, 모란은 꽃샘바람과 황사로 점철되는 짧은 봄의 끝자락과 여름 사이에서 피어나니 지나가는 시간의 한계성을 말함일까. 생명의 유한성을 보고 더욱 슬퍼지는 찬란함이었다.

 

 

 

 

 

 

 

 

 

 

 

 

 

 

 

 

 

 

 

 

 

 

 

 

 

 

 

 

 

꽃밭의 수선화도 눈꽃에 떨면서 간들간들 무언가 속삭이는 듯했다. 자동차 지붕의 눈더미를 치우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음악도 틀지 못한 채, <침묵의 봄>을 묵상했다. 잠시 내리는 4월의 눈발 속의 꽃구름 터널을 지나오면서 그 아름다움 속에 우리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어떤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이 기다린 희망 오월의 모란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나라는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북한과는 대치 국면이지만, 이제는 남북만을 따질 때도 아니다. 지구촌 마을 속의 우리다. 지구촌 사람들은 여기저기 혼란의 도가니에서 이 4월의 아픈 봄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아야겠지. 기다림의 뿌리가 희망이라면 우리는 희망 속에서 놓치고 있는 그 무엇을 찾아야 되는 것일까. 소망의 실현을 위해서, 생명의 순환을 위해서 자기의 자리에서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사람의 목숨도 다 피지 못하고 떨어진 생명들은 나무처럼 긴 잠을 자고 다음 해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다. 같은 꽃이 다음 해도 피어나는 것처럼. 그러나 올 봄의 꽃은 영원 속의 유일한 오늘의 꽃이 아닌가.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