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금요수필

차보살 다림화 2012. 3. 16. 17:53

    새 봄의 마술 - 조윤수

전북일보  |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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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15  22: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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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윤수
 

옛 사람들은 동지부터 99 소한도를 그리면서 겨울을 보냈다던가. 추웠던 시절 매화도를 그려놓고 매일 한 송이씩 붉은 물감으로 색칠하며 홍매를 피워냈다지. 마지막 99송이 홍매화가 피어나면 창밖의 매화나무에 진정 매화가 맺힌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풍류를 누릴 수나 있었겠나. 특권을 누렸던 조선의 문인 화가들에게나 해당된 복이 아니었을까. 매화 그리기에 벽(癖)이 있던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쯤이면 당연했으리라.

'매화도 대련'이나 '매화서옥도'는 겨울에 보면 어찌나 화사한지 추운 겨울이 무색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의 매화는 전 시대의 문인들처럼 매화를 짓누르고 있던 힘겨운 상징성과 지조성을 전부 털어버렸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고고한 청덕의 매화가 아닌 꽃 자체로 아름다울 뿐이다.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잠잔 뒤 매화차를 마시고 매화 시를 읊조린 그였으니 말이다.

매화도를 그리듯이 선인장 꽃잎을 담고 아침저녁으로 차를 벗하여 겨울을 보냈다. 떨어진 꽃잎을 모아서 세다 보니 어느새 베란다의 천리향이 퍼지고 있다. 마침 이웃집에서 매화분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다. 매화분의 백매가 피는 창가에서 점심을 먹고, 매화에 취한 듯 포도주도 한 잔 걸치고 알싸한 기분으로 만덕정 솔숲을 거닐었다. 겨울의 창 안에서 익은 새봄을 보았으나 야생 매화나무의 꽃순은 꽃샘추위 속에 아직 숨죽이고 있다.

그래도 춘삼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유년의 아이들이 어린이 집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아이와의 전쟁'을 호소하는 젊은 부모가 늘고 있단다. 현대인의 약 95%가 실내에서 생활한다. 요즈음 아이들의 부모 역시 대부분 온실의 화초처럼 살면서 온실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왔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도시생활 자체가 모든 일들이 자연과는 분리된 생활이어서 적극적으로 단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내 손녀도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언젠가 며느리가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아빠 엄마가 어디어디 다닌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위험한 사회 환경에 대비해야 하는 부모 입장이 민망스러웠다. 요즈음 대두되고 있는 학교 내의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생각하면 즐겁게 출발해야 할 새학기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공교육의 위기라든가 교육 환경 개선차원을 놓고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이미 교육계의 구조적 개선의 제시는 진부한 대안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는 소식이다. 삶의 다양성과 다양한 가치 추구를 본연으로 하는 문화예술의 역할과 기능이 모든 그늘진 곳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리라.

사람을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게 하여서는 진정한 사람으로 자라기 어려울 것이다. 덕(德)·체(體)·지혜(智慧)를 갖춘 사람의 향기는 만리(萬里)를 간다고 한다. 위대한 선각자들의 향기는 세대를 초월한다. 온실의 매화나 천리향처럼 자란 사람들이 어찌 사람의 진정한 향기를 지닐 수 있을까.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과 여행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마비시키는 습관을 헤어날 수 있다." 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한 단계 한 단계 씩씩하게 훈련해 가면 좋겠다. 명랑하게 한 공간 한 공간을 통해 잘 나아갈 수 있도록.

*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가비평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수필가비평작가회·전북문인협회·행촌수필문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행촌수필문학상'(2010)을 수상했다. '바람의 커튼','나도 샤갈처럼 미친(及) 글을 쓰고 싶다' 등을 펴냈다.


 

문화·연예문화일반
[금요수필] 그림이 뭉클한 편지를 받고조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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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4.14  19: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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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생활 열흘 만에 베이스캠프에 돌아왔다. 베란다의 천리향이 그리운 향기를 내뿜는 가운데 춘란의 꽃대도 수북이 올라와 있었다. 우편물 중에 강원도의 눈사태를 헤치고 온 편지 한 장에도 그림이 담겨 있었다. 그리움을 그리면 그림이고 글이 된다던가.

"책을 읽으면서 성님의 웃는 얼굴이 내내 어른거립디다. 걸릴 것 없이 터트려지는, 꽃순 터지는 소리가 들릴법한 맑고 투명한 그 웃음 말이요. 어여쁘신 언니이! 남은 햇살 받으며 그 많은 생명활동, 그 눈부신 도약에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육체를 벗으면 인연의 시간이 멎어질 텐데요. 양분이 넘치고 일상의 편리가 자유로운 성님께서, 혹은 차보다 발이 더 빠르다고 했던 제가 잠시 여행을 나서볼까 하는 그리움이 뭉클 이 새벽의 여명을 눈물 나게 합니다." 우리에게 인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깨우고 있다.

여행 차비를 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서울에서 볼 일과 만날 사람들이 떠올려졌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련하게 보일 듯한 먼 행로까지 생각해봤다.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도 그렇게 계획하고 볼 일 등을 기대하면서 떠날 수 있을까. 그 때는 꾸려야 할 짐이 없어 참 편하겠다. 마음도 무거우면 육체를 벗기가 힘들 것이려니. 삶의 여행을 잘 하는 일이 그 긴 여행을 하기 위한 짐 꾸리기가 될 것이다.

서울에서 볼 일을 다 마치고, 우리 자매는 성묘도 할 겸 형부의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출발했다. 올라오면서 완주에 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함양을 거쳐 거창에서 볼 일을 다 보니 오후 3시 반이었다. 하루 종일 길 구경이었다. 마침 새로 건설 중이던 광양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마치 천상의 길인 듯 슬치 고개를 넘는데 일곱 개의 터널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순창 민속마을까지 들렀다가 상관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상관 톨케이트가 우리 아파트 근처에 생겼기 때문이다. 산도 강도 길도 막힘이 없으니 중간에서 숙박할 필요도 없었다. 삼천대천세계가 있다는 무변의 하늘에도 이렇듯 영혼의 길이 있을까. 세월의 한계나 속도를 느낄 수가 있기나 할까. 어제 내린 춘설처럼 하늘을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다닐 수 있게 될까.

육체를 벗을 때 영혼의 옷이 있다면 고려의 수월관음도처럼 연꽃이 수놓인 투명한 사라를 입고 눈송이처럼 하늘을 유영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하늘 수행 끝에 연화로 피고 연실을 맺어 한 천 년 푹 자다가 연화장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연상을 해본다.

할 일이 남은 내 캠프로 돌아왔으니 일상이 바쁘다. 사람은 세상 떠날 때를 알게 된다는데, 아직 많이 남은 것도 같지만 나이대로 느끼는 시간이라면 하루가 여삼추다. 인연의 시간이 멎어지기 전에 가슴 뭉클한 편지를 보내온 님을 만나야 할 일. 태어나는 새봄을 맞을 일. 천리향의 그림에 어찌 생의 기쁨이 솟구치지 않으랴! 먼 여행도 때가 오면 겨울을 건너듯이 그렇게 건너면 될 것임에 이 봄을 충만하게 맞을 일이다.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바람의 커튼」,「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가 있다.


사회사회일반
[금요수필] 싱거운 사람아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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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5.12  20: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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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흐드러졌다. 그런데도 꽃그늘 아래 한가로이 걷는 이가 없다.북적북적 장사꾼과 떠들거나 행사성 소란에 떠밀려 다닌다.사람은 많아도 사람답게 누리는 걸 아는 이가 적다.이러다 보니 산다는 게 싱겁다, 혹은 지친다. 고독, 열정, 고뇌,희망,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알뜰살뜰 돈 좇는 돈의 노예가 되는 재미, 공허한 지식으로 자만하는 재미, 허무맹랑한 종교로 포장하는 위선의 재미. 이 모두 각양각색 인생의 포장지 아닌가. 포장지엔 참맛이 없다. 길들여진 인스턴트 맛쯤이나 될까.

사람은 가끔 두 발을 움직여 한바탕 바람이 휘감아도는 산야를 헤매어야 한다. 일렁이는 바다나 호수의 물과 함께 뒤척여야 한다. 초목이나 물, 그 앞에서 한없이 외로워져야 한다. 겸손해져야 한다.들녘이나 바다, 그 너머 바람을 바라보라. 바람은 그 너머에서 오고 그 너머로 간다. 한 바람이 달려갈 동안에 이미 과거가 된 고달픔이 눕고 한 바람이 달려올 동안에 미래의 불안과 죽음이 날을 세우고 일어선다. 덧없다. 없다. 텅 빈다. 마음이 무미(無味)가 된다. 홀로 서서 바람에 씻김굿을 하는 것이다.

그리곤 광대무변한 하늘을 눈부처한다. 대지를 늘 있는 그대로 둥글게 감싸 안고 있는, 높고 먼 하늘을 보라. 대지의 생명들은 끊임없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일지라도 하늘은 대지의 생사를 인식하지 않는다. 저 하늘같은 평상심을 닮아야 한다. 아이고, 또 덫에 걸렸다. 행불행, 호불호를 가르는 것은 마음의 장난질이다. 같은 단어로 말해도 그 뜻은 서로에게 다를 때가 많다. '마음이 어디 있나? 마음을 내놓아 보아라!' 나는 손바닥을 허공에 내밀고 나에게 질문한다. 봄안개 자욱한 하늘 아래 겨우 티끌 한 점으로 존재하는 내가 생각한다.

운명의 문은 열리면 들어갈 수는 있지만 스스로 열 수는 없다. 다만 살아가야 할 뿐, 인생의 완성은 죽음뿐이다. 삶의 마지막 안식처는 죽음뿐이다. 죽음에 당도하기까지 인생의 주인은 삶이다. 아직, 나는 살아있다. 이 세상 삶의 주인은 나다.

꽃그늘 아래 걸어가는데 통증이 심하게 일렁거린다. 통증이 살아있는 증거인 양 몸속에 들락거린다. 통증이 안면을 두드리고 손가락을 쑤셔보고, 팔꿈치를 여닫아대고 허리를 비틀어댄다. 그래도 겁낼 건 없다. 어차피 대문 밖이 저승길이요 물 한 모금 마시다가도 저승사자가 호명하면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했다. 그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언제 달려가야 할지도 모르는 저승길에 마음을 쓰는 건 삶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아프니까 살아있는 것이다.

저 들판에 꽃 피고 꽃 지듯이 욕심 없이, 고이는 듯 멈춘 듯 흘러가는 물처럼 걸림 없이, 높아도 낮아도 하늘처럼 흔들림 없이, 일심으로 사는 일에 전념해야겠다. 잘 먹고 자는 일, 잘 놀고 일하는 일은 나의 파랑새며, 이 모두 생(生)놀이의 필수원소다.

업은 아기를 세 면 찾듯이, 삶을 업은 채 삶을 잃어버렸다고 한숨을 쉬었다. 꽃잎이 하르르 날아 내린다.

어리석은 줄 알았으면 미망에서 깨어나라, 싱거운 사람아.

*수필가 김용옥씨는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시와 수필을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시집 「누구의 밥숟가락이냐」 외3권, 수필집 「생각 한 잔 드시지요」 외4권, 화시집 「빛·마하·생성」이 있다.


정점(頂點)/ 김용옥

 

 

그는 변화하고 싶다. 어느 정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정점에선 오래 머물 수 없다. 내려가는 길만이 살길이다. 욕망의 덫에 두뇌가 결박당한 채 갇혀 날마다 더 높이, 더 직선으로, 더 빽빽이, 칼로도 베어지지 않는, 쇠망치로도 부서지지 않는, 한 조각 한 조각 욕망으로 빚은 고층건물의 거리에 갇혀 그가 지나간다. 미로를 돌고 도는, 기어도 기어도 거기서 거기를 맴도는 벌레 같다, 지금, 그는.

일찍이 사람은 갇히기를 욕망했다. 자연을 버리고 집에 갇히기 시작한 후 현대인은 현대문명을 엄청나게 열애하여, 결국 공간분할의 시멘트벽에 갇히고 철골콘크리트에 갇혔다. 걷기를 버린 후 자동차에 갇히고 철마에 갇히고 비행기와 철선에 갇혔다. 더 빨리 더 깊이 더 높이 갇히며 스스로 갇히는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날마다 갇혀 사는 그는, 날마다 자유를 찾듯이, 직선의 고층아파트의 문을 열고 외출한다. 자유를 그리워하듯이, 자동차와 지하전동차나 고속열차에 갇혀 혹은 비행기나 철선에 갇혀 공간과 시간을 횡단한다. 해와 달과 상관없이 기계로 시간을 인식하고, 물과 바람과 상관없이 돈으로 정화되는 숨을 쉰다. 도무지 갇히지 않아 비참한 건 그의 육체. 육체는 자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육체의 두 손과 두 발로 걸어야 하고 일해야 하는 동물 혹은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대지의 소산인 식물과 동물을 입으로 먹어야 사는 동물 혹은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먹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못한다. 화학 알약 한 알 먹고 기계로 대신 배변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기계 한 접시 삼키고 기계똥 누면 얼마나 편리할까만.

그는 변화하고 싶다. 문명의 덫에 갇혀 발버둥치던 그가 점점 욕망의 돈벌레가 되었다. 문명을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처음엔 욕망의 두 손과 두 발이더니 점점점점 욕망의 손발이 갈퀴처럼 늘어나 지네발이 되어 지네로 변신했다. 더 박박 기는, 더 은밀한 구멍에 숨는, 건드리면 재빨리 독을 뿜는 독충이 되었다.

독충이 먹는 건 무엇이나 독(毒) 원료. 먹는 대로 제 목숨에 독을 품는다. 독충은 더 호화 찬란하게 치장된 색을 입는다. 독충의 공간은 아무나의 눈에 띄지 않게, 단단하게 갇힌 공간이다. 독충은 더 이상 사람들의 공간에서 살지 못한다. 위대하기를 바라지만 독충은 결국 독충일 뿐이다.

그는 변화하고 싶다. 이 새로운 바벨탑의 도시를 이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가 속한 곳에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떠나고, 노무현 16대 대통령이 떠나고, 법정스님이 이 도시를, 이 지구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우리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머리와 손 사이엔 가슴이 있어야 한다."는 명제 혹은 인간의 진리를, 오래도록 생각한다. 그는 변화하고 싶다.

 

* 수필가 김용옥씨는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와 수필을 넘나들며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누구의 밥숟가락이냐' 외 3권, 수필집'생각 한 잔 드시지요' 외 4권, 화시집'빛·마하·생성' 등이 있다.

 

 

사회사회일반
[금요수필] 아이들아, 눈을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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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0.20  18: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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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급식을 할 기회가 있었다. 식판을 들고 나란히 줄지어 배식을 받아 각자 자리로 돌아가더니 서로 정답게 이야기하며 맛있게 먹는 모습들이 그렇게 천진난만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켠에 죄책감이 스쳤다. 이렇게 천진한 그들의 밥상을 두고 무상이니 유상이니 떠들며 눈칫밥을 주려는 우리 성인들이 부끄러웠다.

지난 지방선거에선 아이들이 볼모가 된 유, 무상급식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교육감은 물론이고 기초나 광역의원, 단체장 후보들까지 공약의 맨 앞자리에 무상급식을 내걸었고 홍보물에도 자신들이 바로 '무상급식의 전도사'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 문제 때문에 주민투표까지 붙여지고 결국 서울시장이 사직을 했다.

후폭풍으로 안철수 신드롬이 일고, 재선거에 돌입해서는 이제 무상급식을 넘어 복지문제로 사회가 들끓고 있다.

아이들이 볼모가 된 경우는 비록 이 문제뿐만이 아니다. 부부가 의견차이로 갈라설 때도 아이들이 희생양이 된다. 성(性) 도착자들이 욕구를 충족시킬 때도 그렇고, 카드 빛에 쪼들릴 때도 인질범들의 볼모가 된다. 과연 이런 사회 풍토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자랄까?

필자는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아주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보았다. 흥미롭다기보다는 걱정되고 매우 우려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유명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전국 초, 중, 고생 1,000여명을 대상으로 '청소년 반부패 인식지수'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종합적인 청소년들의 반부패인식지수는 10점 만점에 6.1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 항목 몇 개를 살펴보면,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항목에 절반 이하인 45.8%만이 정직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고, 나머지는 '부자가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10년을 살더라도 10억원을 받게 된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라는 항목에 17.7%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응답자의 20%는 '나는 뇌물을 써서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쓸 것이다'에 동의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설문 결과가 우리나라 중, 고생 전체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청소년들의 전반적인 의식의 흐름과 성향을 엿볼 수는 있다고 봤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할지 심히 혼란스럽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인간의 삶의 방식이 바뀌어도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도덕성일 것이다. 도덕성은 인간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인간사회를 떠받치는 확고한 가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인들은 청소년들의 거울이다. 우리 청소년들의 도덕성이 흔들리고 부패지수가 높게 나타난다는 것은 이 시대의 어른들 특히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노불리스 오블리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비록 어른들이 잘못해도 너희들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만이라도 아이들의 참된 거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지키는 든든한 파수꾼이 되도록 힘써야겠다.

아이들아 그런 사회가 올 때까지 너희들은 잠깐 눈을 감으렴.

* 1984년 〈월간문학> 동화 당선

*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현)

* 국제펜클럽 전북위원장

* 저서 : 산문집 〈안골에서 도시로 나오다>
사회사회일반
[금요수필] 상한 감자 하나가박 순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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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9.08  18: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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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나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작은 소리로 속살거리는 것들이 참 많다.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 발밑에 핀 작은 풀꽃 한 포기, 산허리에 걸쳐 흐르는 구름, 후드득 떨어지는 여름날 소나기까지 모두가 그냥 그곳에 있는 자연스런 것들이어서 정답다.

어젯밤에 산책을 나갔는데 달맞이꽃 꽃봉오리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밤에 피는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숨어 피어도 그 꽃이 얼마나 예쁜지 모두들 잘 안다. 그런데 유독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더 잘났다는 듯 목에 힘을 준다. 사실 뽐내고 자랑하기 좋아하기로는 백로와 까마귀만한 동물도 드물 것이다.

백로의 어머니가 백로에게 타일렀다.

"까마귀 우는 골에 가지 마라. 까마귀는 흰빛을 세우나니 네가 분명 해로울 것이다."

까마귀 어머니가 가만히 듣고만 있을 리 없다. 백로 어머니에게 반격을 가한다.

"겉이 검다고 속조차 검느냐? 겉이 희고 속이 검은 것은 너희들이 아니더냐?"

일침을 놓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충고가 그럴듯하다. 그래도 백로와 까마귀는 이렇게 충고라도 해가면서 빈정거리지만 요즘 사람들은 속전속결이다. 사는 게 모두 급해서일까,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가만히 두면 모든 것들이 순리대로 흐를 것 같은데 너무 급하다. 적이라고 생각되면 곧바로 등을 돌려 버린다.

그래서인지 요즘 TV드라마는 하나같이 복수로 얼룩져 있다. 그것도 형제자매 부모자식간의 싸움 일색이다. 사업의 목적을 위하여 부모와 자식도 냉혹하게 밀치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섬뜩해진다. 아무리 현실이 아닌 연속극이라지만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돈에 대한 욕망들이 여실히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도 자식도 서로 믿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 믿고 산다는 그들을 보면서 가진 것 없으면 서로 반목할 일도 없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게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는 결코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리면 참으로 아름답고 예쁜 것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이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다 보면 그곳에는 작은 행복이 꽃씨처럼 숨어있다.

태풍에 유리그릇 모시듯 조심스럽게 다루던 참깨 깻단이 사정없이 날아가 흩어졌다. 덕분에 참깨가 골목에 눈처럼 뿌려졌다. 1년 참깨농사를 땅에다 뿌린 셈이지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이웃이 있어 위로가 된다. 모기에 물려 빨갛게 부어오른 팔뚝에 남편이 물파스를 발라준다. 나는 이런 작은 것들을 행복이라는 창고에 저장하려고 노력한다. 시원한 한 줄기 바람과 구름사이로 언뜻 보이는 보름달도 함께 저장한다.

*수필가 형효순 씨는 2008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남원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재주넘기 30년」을 펴냈다.


   
 

모든 과일과 야채를 비닐하우스에 때도 없이 심고 수확하지만 감자는 하지 즈음에 노지에서 캔 것이 가장 맛있다. 그 이름도 '하지감자'다. 이른 봄에 심은 감자는 하지가 지나고 나면 캘 때가 되고 감자 캘 계절은 장마철과 겹친다.

비를 안 맞고 감자를 캐려고 서두르지만 농촌의 일손은 이맘때도 여전히 바쁘다. 올해는 감자가 자랄 때 오래도록 가물어서 감자알이 잘게 들었다. 비 오기를 기다려 비 맞고 나면 좀 더 크겠지 하고 미루다가 장마철을 만난 모양이다. 감자를 캐면 파랗게 변하지 않도록 신문지라도 덮어 말려야 썩지 않고 독이 없다.

장마철 감자는 잘못 간수하면 썩기 쉽다.

감자 한 개가 썩고 있을 때 빨리 발견하고 골라 내지 않으면 감자 썩은 물이 묻은 감자마다 함께 썩는다. 양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전염병을 예방하고 암을 조기발견하여 대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건강보험공단에서 2년마다 실시하는 건강검진제도 덕분에 불치병으로 여겼던 각종 암도 조기 발견하여 항암치료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습도 높은 장마철에 상자속의 썩은 감자 하나는 마치 젊은 사람에게 빠르게 확산되는 암세포처럼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온상자의 감자를 다 썩히고 만다. 온 방죽에 미꾸라지 한 마리와 다를 게 없다. 맑은 물에서야 표가 안 나지만 침전물이 많은 방죽에선 한 마리 미꾸라지가 움직일 때마다 구정물만 일으킨다.

썩은 감자하나! 어쩌다 병이 든 걸까.

이른 봄 같은 터전에 심겨진 이후 따사로운 봄볕에 움을 틔우고 꽃샘바람 매서운 봄눈에도 서로 호호 손 불어 주며 다독이며 자랐다.

5월의 훈풍이 들판을 스쳐갈 때 오순도순 행복했을 것이다. 저마다 나름의 성취감을 느끼며 자주 꽃 하얀 꽃을 피우며 희망의 알을 품어 키웠다. 감자를 수확할 때 농부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를 안겨주었던 감자들이었다. 언제까지나 함께할 줄 알았던 감자들도 알이 굵어지니 저마다 갈 길이 따로 있었다. 각자 상자에 담겨져서 어떤 것은 공장으로, 어떤 것은 단란한 가정집으로, 식당으로, 가는 곳도 제각각이다. 한 상자속의 감자! 어떤 공통점으로 최후까지 한 상자 속에 담겨진 걸까. 한 상자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대감은 자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썩은 곳은 수술하듯 도려내고 썩은 물 묻은 감자는 씻고 말려서 간수해야한다.

인간관계도 잘못하면 썩은 감자와 같다. 오랜 세월 정답던 관계도 원하지 않은 침전물이 쌓이다보면 문득 이별을 맞이해야 할 순간을 감지하게 될 때가 있다. 정답게 지나온 세월과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선택이지만 더 이상 함께함으로써 서로 상처를 입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미적거리다가는 온상자의 감자를 버리는 썩은 감자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이유로든 이별은 서글픈 일이지만 웃으면서 헤어질 때 함께 했던 추억이 그리워지리라. 뒷모습이 추해지기 전에 어차피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사라고 허공 바라보며 자조적인 헛웃음을 날려 보낸다. 일말의 추억과 연민을 반추할 수 있는 이별은 아름다운 선택이다. 그때의 이별은 차라리 축복이다.

*수필가 박순희씨는 2004년 〈한국문인>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꽃으로 말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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